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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윤리학 특강

2011년 2학기

김 병 권 교수

목원대학교

기독교윤리학 특강

월 2:00-3:50

담당 교수: 김병권()

전화: 042) 828-3316: 011-9696-5465

1. 강의 목적: 이 과목의 목적은, 공동체성을 상실한 현대 사회 속에서, 교회가 그것의 본래적 내용 중 하나인 믿음 공동체성을 어떻게 구현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공부하는 데 있다. 특히 현 단계 한국교회의 실정을 감안할 때,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일차적 실천 책임은 목회자에게 있다고 보고, 공동체성을 지향하는 목회윤리의 기본 정신을 점검하면서 구체적 실천방법을 논의하는 데 이 강의의 초점이 맞춰진다.

2. 강의 개요: 이 강의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공동체성을 상실한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해 이해를 추구한다. 둘째, 성경에서 제시하는 바람직한 공동체 모습이 무엇인지를 공부한 후, 그러한 공동체 모습을 한국 교회에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다룬다. 셋째, 공동체성을 고양하는 목회윤리의 구체적 내용을 공부한다.

3. 주교재 및 참고도서:

1) 김병권. 기독교윤리학 특강 2011년판”--가제본

2) 송인규. 아는 만큼 깊어지는 신앙」. 서울: 홍성사, 2009.

3) 신원하. 교회가 꼭 대답해야 할 윤리문제들」. 서울: 예영, 2001.

4) 이원규. 한국 사회 문제와 교회 공동체」.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5) 이재철. 회복의 목회」. 서울: 홍성사, 1998.

6) 이종범. 이런 목회자를 원한다」. 서울: 기독신보사, 2003.

7) Banks, Robert. 바울의 그리스도인 공동체 이상」. 장동수 역. 서울: 여수룬, 1991

8) _____________. 교회, 또 하나의 가족」. 장동수 역. 서울: IVP, 1999

9) Kraybill, Donald. 예수가 바라본 하나님 나라」. 김기철 역. 서울: 복있는 사람, 2010.

10) Linthicum, Robert. 변화시키는 힘」.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역. 서울: 민중사, 2004

11) Sider, Ronald. 물 한모금 생명의 떡」. 이영길 역. 서울: IVP, 1999

12) Snyder, Howard. 참으로 해방된 교회」. 서울: IVP, 2005.

13) Stassen, Glen. 산상수훈으로 오늘을 살다」. 박지은 역.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09.

14) Willimon, William H. 「21세기형 목회자: 목회의 신학과 실천」. 최종수 역.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4. 과제물:

*. 과제 1 : 이재철 목사의 회복의 목회를 읽고 독후감을 한 편 쓴다.(A4, 2매)

*. 과제 2 : 교재 뒷부분에 실려 있는 읽고 토론하기 자료를 강의 순서에 맞춰 읽어온다.

5. 평가 방법:

수업 참여도: 20점. 독서보고서: 20점. 중간고사: 20점. 기말고사: 40점.

6. 주간별 강의 진도표

1주차. 강의 소개: 이 과목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 공동체성 회복과 목회윤리 서론(1)

2주차. 공동체성 회복과 목회 윤리 서론(2)

-. 토론 1: 교우들이 기대하는 목사

3주차. 공동체성을 상실한 현대 사회와 교회

-. 토론 2: 목회자들은 무엇에 영향을 받는가?

4주차. 참된 교회됨과 성경적 공동체상

-. 토론 3: 목회자: 종님종놈’”

5주차. 목회윤리의 실천 원리 (1):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에 참여하는 목회

-. 토론 4: 목사는 일하면 안 되는가?

6주차. 목회윤리의 실천 원리(2): 하나님 나라에 부합하는 됨됨이를 키우는 목회(1)

-. 토론 5: 목회자와 갈등의 문제

7주차. 목회윤리의 실천 원리(3): 하나님 나라에 부합하는 됨됨이를 키우는 목회(2)

-. 토론 6: 목회자가 비난을 들을 때

8주차. 중간고사

9주차 : 목회윤리의 실천 원리(4): 목회자의 윤리적 실천 내용

-. 토론 7: 목회자의 비교의식

10주차. 목회윤리의 실천 원리(5): 목회자의 윤리적 실천 방법

-. 토론 8: 신자의 자살과 교회의 자기 성찰

11주차. 목회윤리 문제 실제(1): 설교 윤리

-. 토론 9: 목회자의 설교 = 하나님의 말씀?

12주차. 목회윤리 문제 실제(2): 교회 재정 윤리

-. 토론 10: 교회 재정 사용에 관한 실천 신학적 기준 제시

13.주차. 목회윤리 문제 실제(3): 교회 의사 결정의 윤리

-. 토론 11: 교회 안에서의 의사결정과 관련한 두 개의 글

14주차. 목회윤리 문제 실제(4): 목회자 가정 생활 윤리

-. 토론 12: 목회자 빈부격차 이대로 둘 수 없다.

15주차. 목회윤리 문제 실제(5): 목회 리더십 윤리

16주차. 기말고사

제 1 주제 : 이 과목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Ⅰ. 수업을 위한 일반적 서론

1. 학문함의 기본 자세

1) 학문함이란?

-. 자신을 열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 (또는 새로운 세계를 받아 들여), 변화된 자신에 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2) 학문함의 기본 자세: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자세

-. 자신을 열어야: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인식틀, 경험세계 등을 열어 기꺼이 새로운 대상과 인격적 만남을 가질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우물안 개구리지식인의 위험성).

=. 인격적 만남: 저마다 자신이 처한 삶의 정황 속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 영글어 낸 생각’(이론들)을 먼저 존중해 주고, 경청하는 자세를 갖는 것.

-. 새로운 세계 (대상)을 만날 수 있어야: 자신의 경험세계나 고정관념을 강화 확대시켜 줄 것만 기대해서는 안 된다 (식민지 지식인의 위험성).

=. 여기서 새로운 세계란 자신에게 새로운것을 의미함.

=.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지식만이 아니라 자신이 아직 터득하지 못한 고전도 포함됨: 온고지신(溫故知新) 모두가 새로운 세계에 자신을 여는 태도임.

-. 변화된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어야:

=. 주관적 자세가 결여되어 있으면, 실천이 불가능함(지식 판매상 또는 지식 관람객의 위험성)

=. 온고지신은 자신에게로 돌아옴으로써만 창조적 학문 활동이 됨.

2. 정보의 홍수와 신학(사상) 공부

1) 정보의 양을 많이 채우는 것이 공부가 아님.

-. 정보의 양은 결코 실천과 품격의 고양으로 나아가지 않음.

-. 정보의 홍수 속에서 생각과 실천의 길을 잃고, 좌충우돌 하는 경우가 많음.

-. 역정보의 문제도 큼.

=. 정보원이 정보에 의한 가장 큰 피해자가 되는 이유.

-. 정보원을 학자로 치지 않음.

2) 신학(사상)은 정보를 담는 그릇임.

-. 신학 공부는 자기 그릇을 키우고 다듬는 과정임.

-. 사고의 틀을 바로 잡고, 실천의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기 그릇을 만들어야.

-. 신학이 없는 목회자가 목회 현장에서 일관성 있는 목회를 하기가 어려움.

3) 신학(사상)은 실천의 내용을 확보해 줌.

-. 실천해야 할 내용에 대한 선별을 가능하게 해줌.

-. 해야 할 좋은 것들이 정보망을 통해 수없이 많이 제공되는 가운데, 취사선택이 필요.

=. 실천이 신학을 말해줌.

4) 신학(사상)의 내면화는 품격으로 자리잡게 됨.

-. 내면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지속성과 일관성이 필요함.

-. 정보는 사상이 아니기에 결코 인격에 내면화되지 못함.

3. 강의자의 기본 입장 및 바람

1) 강의자는 학습의 장을 만드는 자: 멍석을 까는 자

-. 서로의 교감을 통해 함께 배우는 것이 수업: 자발적이고 즐거운 참여가 전제돼야.

-. 많이 아는 사람(강의자)이 적게 아는 사람(학생)에게 새로운 것을 많이 가르쳐주는 것이 수업이 아님. 오히려 학생들이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그러나 잠깐 잊고 있거나, 별로 주목하지 않고 있던--내용들을 서로 꺼내놓는 데서 창조적이고 내용 있는 교실 분위기는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생각나게 하고’ ‘기억하게 하는 것이 강의자의 위치임(벧후 1:12-15; 3:1; 롬 15:15)

-.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은 자기 그릇의 크기만큼 생각거리와 실천거리를 담아가게 된다.

2) 수업의 내용이나 전개하는 논리에 자신의 생각이 매몰되지 않아야 함.

-. 사고 촉매제 역할이 되어야: 암기와 답습은 수동적 학습 태도.

-. 가능한 한 빨리 자기 생각, 자기 현실, 자기 아픔으로 돌아가야 함.

-. 자기 생각을 키우고 체계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 “청년들아, 나를 딛고 일어서라”-노신

3) 강의실에서 다룬 내용 중 70-30% 정도만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입장의 다양함과 사고의 스펙트럼을 폭넓게 설정함.

-. 서로가 서로에게서 배우고 도전을 받는 기회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4) 정답과 정직한 답 사이에서 창조적 사고를 하자.

-. 정답: 교과서의 답. 획일화나 강제성의 성격을 내장. 동이불화(同而不和)의 사고 내장

-. 정직한 답: 자기 삶의 주체성을 확보하고 그것에서 답을 찾아보려는 노력.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사고를 내장

-. 부화뇌동(附和雷同)은 자기 입장을 방기한 채, 타인을 추수(追隨) 모방하여 결국에는 타인에게 흡수됨.

5) 공동체적 실천을 염두에 두고 사고하자.

-. 사(思)=전(田)+심(心): 사색은 현장에서 땀 씻으면서 하는 것

-. “실천이 없는 이론은 어둡고 이론이 없는 실천은 위태롭다

-. 실천은 낯선 사람을 친구로 만들지만, 실천이 없는 이론은 동지도 원수로 만든다.

6) 고민을 공유하자.

-. 참된 고민은 실천에서 온다. 실천을 전제하지 않는 고민은 기만적 고민이다.

-. 고민의 공유는 공동체적 실천의 기본.

-. 고민의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의 성숙도를 알 수 있다.

7)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라,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자세가 필요.

-. 남을 가르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신을 바로 잡기 위한 공부.

-. 특히 신학생이나 목회자들은 위인지학(爲人之學)의 자세로 공부하기 쉽다.

8) 문학적 상상력과 철학적 추상력을 키우는 공부를 하자.

-. 문학적 상상력: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봄의 충만을 볼 줄 아는 능력

-. 철학적 추상력: 복잡다단한 현실 속에서 문제의 본질을 보고, 정리할 줄 아는 능력.

-. 문제의 현상적 인식에서 벗어나 본질적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

=. 우연적, 조건적, 단편적 사건들을 상호 내적 연관성 속에서 파악할 수 있도록.

=. 많은 정보 (지식)에 집착하지 말고, 그릇을 키우라: 생각하는 방식, 사고의 틀, 관 심의 폭 (내적 연관성 속에서), 고민의 내용과 질.

9) 새로운 전형을 모색하는 공부를 하자.

-. 기득권 보장을 위한 공부 vs 새로운 전형을 모색하는 공부.

10) 논쟁이나 정죄를 위한 윤리학 공부가 아니라, 살림을 위한 공부를 하자.

-. 나와 너를 공동 운명체로 보고 나와 너를 더불어 살리는 방법을 모색하는 공부.

-. 논쟁은 때로는 필요하지만, 이론적 논쟁은 구경꾼의 훈수 싸움인 경우가 많다.

-. 견해의 차이를 대립적 또는 적대적 관계로 보지 말고 (악화시키지 말고), 다양성 관 계의 표출로 이해하라.

11) “더불어 올바르게사는 것을 목표로 삼자.

-. 모든 윤리학 공부의 최종 형태는 단순히 개인적 실천뿐 아니라, 공동체적 실천에서 완성된다. 개인주의적 윤리 엘리트가 되려고 하지 말고, 교회 공동체에 올바르게 적 용하는 것까지를 윤리학 수업의 과제로 삼으라.

-. 우리 가운데 존재하시며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존재 방식 및 역사 방식을 닮는 것.

=. 외형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늘 함께 하시며, 하시는 일 없으신 것 같지만 모든 일을 다 이루도록 도우시는 성령님.

Ⅱ. 과목 수업의 착수점, 관점, 그리고 기대

1. “공동체성 회복과 목회윤리과목에 접근하기 위한 착수점

A. 공동체성이 붕괴되고 있는 교회에 속한 우리:

B. 공동체성이 붕괴되고 있는 사회에 거하는 우리:

C. 교회와 사회 관계를 반성하지 않고 지내는 우리:

D. 신자의 삶에 대한 교회와 사회의 규정력을 경시하며 사는 우리:

E. 그 결과, 삶에 대한 책임을 신자 개인에게 전적으로 전가하는 데 익숙한 우리:

2. 과목 수업의 기본 관점

1) 목회 윤리를 올바르게 정립하는 것이 현단계 한국사회 및 한국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봄.

-. ‘공동체성 붕괴를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의 일차적 문제점으로 봄.

-. 참된 공동체성을 교회의 본질적 성격 중 중요한 요소라고 봄.

-. 교회의 교회됨을 통하여 사회의 공동체성을 견인해 내는 것을 이 시대 교회의 대사 회적(對社會的) 역할 중 중요한 것으로 봄.

-. 교회의 교회됨 또는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을 이루는데 있어서 목회자의 책임이 매우 크다고 봄.

2) 과제 설정 도식의 양면적 패턴: 소프트웨어의 재생산과 하드웨어의 재생산

-. 교회의 과제: 공동체성 회복을 지향하는 믿음의 재생산과 예배당 운영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의 재생산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이루는가?

-. 사회의 과제: 공동체성 회복을 지향하는 가치의 재생산과 사회의 물질적 필요를 충 족시키는 경제의 재생산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이루는가?

3. 이 수업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나?

1) 자신이 속한 교회와 사회의 일반적 성격을 공동체성과 관련하여 이해정리한다.

2) 성경에서 제시하는 올바른 공동체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3)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실천 양식 살펴본다.

4) 공동체성 회복을 지향하는 목회 윤리의 기본내용을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는다.

5) 이렇게 함으로써 현 단계 한국사회의 목회현장에서 목회할 때, 무엇을 지향하며 어떤 입장에 서야하는지를 정리하는 기회를 갖는다.

제 2 주제 : 공동체성 회복과 목회윤리 서론

Ⅰ. 공동체성 회복인가?

1. 착수점(Entry Point)으로서의 산상수훈

1) 예수의 윤리와 착수점

-. 모든 학문에는 착수점이 있음.

-. 성경의 수많은 내용 중 무엇으로 착수점을 잡느냐가 그 학문의 기본 방향을 결정.

-.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따르는 자라고 할 때, 예수의 윤리를 기윤학의 착수점으로 잡을 수 있음.

2) 예수의 윤리와 산상수훈: 산상수훈의 중요성

-. 신약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 중 가장 덩치가 큰 내용.

-. 초대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나 새신자에게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가르치기 위하여 산상수훈을 이용.

-. 산상수훈은 신약 성경 중에서 초대 교회가 가장 많이 인용한 성경본문.

2. 공동체 회복을 지향하는 산상수훈

1) 예수 가르침의 첫 말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

-. 예수가 가르친 복음은 천국 복음하나님 나라의 복음임 (마 4:23)

-. 천국 또는 하나님 나라는 기본적으로 공동체와 관계됨.

=. 천국의 복음은 공동체 회복의 복음과 연결됨.

2) 팔복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가 실현될 때 복 있는 자의 됨됨이를 설명해줌.(마 5:1-12)

-. 참된 공동체 안에서 환영받는 사람의 됨됨이(특성)가 어떠한지를 보여줌.

-.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시연하고 지향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팔복에 나오는 유형의 사람들이 그 교회 안에서 귀하게 여겨지고, 발언권이 강한가를 살펴보면 됨.

-. 팔복에 나오는 유형의 사람들은 오늘날 세상에서는 결코 환영받지 못함.

3) 마 5:21-7:29절의 내용은 공동체성 회복 또는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신자나 교회의 행동(실천) 특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줌.

-. 팔복의 내용이 공동체 회복을 위한 신자 또는 교회의 품성(됨됨이, Being)과 관계된다면, 이 내용은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실천 또는 행동 특성(Doing)과 관계됨.

3. 공동체 회복을 지향하는 산상수훈의 내용은 예수 사역의 특징과 일치됨.

1) 침례 요한이 밝힌 예수 사역의 특징: 눅 3:4-6절

-. 골짜기는 메워짐, 산이 평평해짐, 굽은 것은 곧아짐, 험한 길은 평탄해짐.

-. 이 네 가지 과정을 거치면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임.

-. 이 내용은 기본적으로 공동체 회복과 관계됨.

2) 마리아 찬가에 나타난 예수 사역의 특징: 눅 1:49-53

-. 마음이 교만한 자를 흩으심,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림,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심.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심,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심.

-. 이 내용 역시 기본적으로 공동체 회복과 관계됨.

4. 위와 같은 예수 사역 또는 가르침의 특징은 구약의 기조(基調)와 일치

1)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하나님의 공동체를 창조.

2) 인간의 타락으로 창조 공동체가 손상됨: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개별적 존재로 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존재로 살도록 배려해주심.

3) 바벨에서의 반역으로 인류는 혼란과 흩어짐을 당함.

4)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 형성 비전을 하나님께서 제시하심.

-. 열방의 복을 지향하는 아브라함과의 언약.

-.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공동체는 열방을 구원하려는 하나님 의도의 착수 공동체임을 보여줌.

5)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세대 전승을 거쳐, 야곱의 후손들은 기근을 피해 애굽에 간 후 비교적 큰 민족으로 성장.

-. 동시에 애굽으로부터 박해를 당함.

6) 출애굽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행하심.

-. 이스라엘 공동체를 회복하는 획기적 전환 사건.

7) 가나안 땅에서 지파 공동체로 존재케 하심.

8) 왕정 국가를 요구하는 이스라엘에게 허용을 하심.

-. 그러나 이스라엘은 스스로 억압적 공동체를 일구게 됨.

9)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를 회복하려고 다양한 시도를 하심.

-. 선지자들의 메시지에 오실 메시아 즉 예수가 예언됨.

-. 불순종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멸망하고, 예수로부터 시작된 교회 공동체가 이스라엘 공동체를 대신하게 됨.

5. 하나님의 구원 공동체: 열방의 파멸을 막는 보루, 세상의 유일한 희망

-. 이스라엘 공동체로 시작했다가 교회 공동체로 그 사명이 전수됨.

1) 노아의 방주는 패역한 세상의 희망(창 6:13절 이하)

2)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열방을 구원하려는 의도에서 나옴.

3) 소돔 멸망은 의인 열 명이 없어서(창 18:24-19:26).

4) 세상의 빛과 소금(마 5:13-14절).

Ⅱ. ‘목회에 대한 정의

1. 목회(牧會)의 어휘적 의미

1) 헬라어 디아코니아의 의미 :

-. 넓은 의미에서 목회와 관련하여 사용될 수 있음.

-. “식탁에서 시중들기, 육신의 양식을 조달하기,혹은 식사를 관장함의 의미.

-. “사랑에 찬 섬김의 수행을 의미함.

-. 사도나 전도인 또는 마가와 같은 조력자들이 맡은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의미.

-. 신약성경에서 디아코니아 또는 디아코네오와 관련하여 사용된 사람들 : 마르다의 섬 김(요 12:2), 베드로 장모의 시중듦(막 1:31), 디모데와 에라스도(행 19:22), 오네시 모(몬 13), 오네시보로(딤후 1:18), 스데반(고전 16:15), 사도들(롬 11:13; 고후 4:1), 전 도인들(딤후 4:5), 마가와 같은 조력자들(딤후 4:11)

2) 헬라어 포이멘의 의미 :

-. 엡 4:11절에서 유일하게 목사로 번역되었음.

-. ‘포이메나스는 회중의 인도자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목자개념과 상통됨.

-. ‘포이멘보호하다라는 뜻을 가진 어근에서 나온 말임.

-. ‘포이멘에 해당하는 라틴어는 Pastore임. 여기서 Pastor가 나옴.

=. ‘양을 치다를 뜻하는 포이마이노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요 21:16), 베드로가 장로들에게(벧전 5:2),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에게(행 20:28) 사용하였음.

-. 엡 4:11절에서 목사교사를 병행하여 사용하였음.

=. 따라서 현대적 개념에서의 목사와는 어감이 다른 개념임.

3) 영어 사전적 의미 :

-. Ministry : 봉사, 섬김의 의미를 가짐.

=. 동사로서 Minister는 섬기다, 봉사하다, 하인 노릇을 한다는 뜻.

=. 목사가 하는 업무

4) 한글 사전적 의미 :

-. 사목(司牧:천주교 등의 용어)교역(敎役) 또는 사역(使役)이라고도 하며, 설교의식 의 집행, 교회의 운영관리, 평신도의 지도교육훈련 등의 업무를 가리킨다. 그러나 어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교리를 신앙문답서에 따라 바르게 가르치고 신앙지식 을 체득하도록 지도하는 데 중점을 두며, 또 다른 개혁교회에서는 평신도를 교회의 일원으로서 훈련하고, 교회생활을 바르게 하도록 지도하는 데 중점을 둔다.

2. 어휘적 의미에서 제기되는 쟁점들

1) 목회를 행하는 사람을 누구로 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

-. ‘목회섬김과 관련시켜 이해하면, 목회의 주체는 매우 광범위해짐 : 모든 봉사자 켜 이해하면, 목회가 다 목회자가 될 수 있음.

2) 목회의 범주를 무엇으로 제한하느냐 하는 문제.

-. ‘섬김의 모든 내용을 다 목회라고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

3. ‘목회또는 목회자개념 형성의 역사적 과정

1) 신약성서에는 목회목회자라는 용어와 관련한 명시적 표현이 없다.

-. “목회직을 나타내는 어떤 배타적인 형태나 용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 목회자나 평신도의 구별도 불분명하였다.

-. 교회의 초기 지도자로 성경에 나온 사람들은 열두 제자와 사도들임.

2) ‘목회목회자라는 표현은 없지만, 교회 지도자 그룹은 조심씩 분화되어 나타남.

-. 사도, 예언자, 교사(고전 12:28), 감독(장로, 딛 1:5)), 집사(딤전 3:8) 등이 나타남.

-. 이들의 일도 조금씩 분화되기 시작함 : 말씀의 직무와 봉사의 직무로.

-. 성경시대에 교회 지도자은사에 따른 섬김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됨.

=. 즉 성경시대의 교회 지도자 직분은 카리스마적인 직분이었다.

3) 교회가 틀을 잡아감에 따라, 카리스마적인 직분은 제도적인 직분으로 안착되어 감.

-. 은사에 따라 섬겼던 사도, 예언자, 교사의 직분은 점차 사라지고, 대신 감독, 장로, 집사 직분이 제도적 추인을 거쳐 교회의 중심 지도자 직분으로 자리잡는다.

-. 2세기 초에 카리스마적인 직분과 제도적인 직분 사이의 구별이 교회 안에서 인정.

=. 처음에는 카리스마적인 직분(이들은 주로 여행을 하며 교회를 방문했던 자들)이 제도적인 직분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차츰 지역의 제도적인 직분이 큰 역할을 맡게 됨.

-. 3세기에 이르면, 장로와 감독을 사제라 부르기 시작함.

=. 사제 개념은 성만찬을 하나의 희생 제사로 이해하는 것과 관계됨.

4. 목회에 대한 작업 가설적 정의 :

-. ‘목회는 교회에 의해 임명된 직분자인 목사가 교회를 돌보기 위해 행하는 일들 중 교 회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일을 의미한다.

=. ‘목회자개념 형성의 역사적 과정을 받아들여, 은사에 따라 섬기는 직분자보다 제도 적 직분자의 의미를 중요하게 받아들임 : 현실의 한국 교회의 일반적 정서가 이러함. =. 목회의 일을 교회와 직접적 관계가 있는 일로 제한함으로써 목회 윤리 논의의 심도 를 깊게 할 수 있다.

Ⅲ. 윤리(학)에 대한 정의

1. ‘도덕윤리에 대한 일반적 정의

1) 도덕과 윤리(학)에 대한 어원적 이해

-. 헬라어 에토스’ : ‘관습성품을 의미함. 어떤 사회나 문화에 내재하고 있는 가 치, 믿음 그리고 실행의 특성을 지칭함.

=. 아리스토텔레스 : 윤리학을 의미하는 영어의 Ethics에토스에서 파생된 헬라 에티카가 영어화된 형태임.

-. 라틴어 모레스’ : 도덕적 신념과 실행을 포함하고 있는 관습을 의미함. 이런 점에 서 헬라어 에토스와 상통함.

2) ‘도덕에 대한 사전적 정의 : 일정한 사회 내에서 그 사회 구성원의 사회에 대한, 그 리고 구성원 상호 간에서의 행위를 규제하는, 그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승인되고 있는 규범의 총체를 말한다. 이 기준에 따라서 행위의 선과 악, 그리고 옳음과 그름이 평가 된다.

3) ‘윤리(학)에 대한 사전적 정의 : 도덕의 기원과 발달 및 본질, 그리고 규범에 관한 학 문. 이런 의미에서 윤리학은 도덕 철학과 병행하여 사용될 수 있다.

4) 도덕과 윤리에 대한 일반적 정의에 담긴 의미

-. ‘도덕윤리보다 선행한다.

=. 윤리는 이미 형성되어 있는 도덕을 대상으로 하여 이론적으로 형성된다.

-. ‘도덕이 실제적 삶과 관계된다면, 윤리는 이론과 관계됨.

-. ‘도덕이나 윤리의 뿌리는 공동체적 삶이 있다.

=. ‘에토스모레스는 모두 공동체의 관습에서 유래된 것임.

-. ‘도덕윤리는 해석학적으로 순환하면서 공동체 규범을 형성해 간다.

=. 형성되어 있는 규범(도덕)에 대한 이론적 반성(윤리학)은 그 결과를 다시 공동체 투여함으로써 새로운 공동체 규범을 형성하는 데 기여함.

2. 기독교 윤리학에 대한 정의

1) 기독교 윤리학이란 :

-. “기독교적 삶의 방식-에토스’ : 관습 및 성품-의 기원 및 내용에 대한 이론.

2) 기독교 윤리학에 대한 정의에 담긴 의미

기독교 윤리학 주된 과제는 행위 결정을 도덕적으로 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다.

-. 행위 결정을 하는 데 인간 의지가 결정적으로 작용한다고 보고, 도덕에서의 인간 의지의 역할을 강조하는 흐름과는 대비된다.

-.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윤리학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및 행위 결정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기독교 윤리학의 본령으로 생각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

도덕적 판단 기준이 되는 이나 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 공동체 안에 서의 신자의 삶이 먼저 있었다.

-. 선과 악을 아는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결합된 삶,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 이다.

=. ‘타락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선악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 중심적 삶을 버리고 자기 중심적 삶을 택한 데서 기인된 것.

-. 신자들이란, 공통의 믿음에 의해 형성된 사람들이다.

=. 신자들이란, 를 위해 또는 를 이루기 위해 모인 결사체가 아니다.

=. 그 공통의 믿음은 하나님과 이웃, 자아, 자신들이 거하고 있는 공동체, 자신들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믿음 공동체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루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방향으로 움직이 는 역동적 공동체이다.

-.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강조한 것은 하나님이 거룩하 니 이스라엘 백성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다(레 19:2; 20:7; 벧전 1:16; 겔 20:41)

=. 여기서 말하는 거룩은 윤리적 개념으로서의 정의과 같은 것이 아님.

=. ‘정의보다 하나님의 거룩이 먼저임. 즉 거룩안에 윤리적 의미에서의 정의나 선이 들어 있긴 하지만, 윤리적 정의나 선을 이루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 신약에서 믿음 공동체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지칭됨.(고전 12:27; 엡 4:12)

=. 모든 지역 교회는 선언적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데 만족해서는 안 되고, 실제적으로 현대 사회 속에서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역할을 해야 함.

Ⅳ. ‘목회 윤리학에 대한 정의

1. ‘목회 윤리학이란 : 목회’ + ‘윤리학으로서의 목회 윤리학

-. ‘목회는 교회에 의해 임명된 직분자인 목사가 교회를 돌보기 위해 행하는 일들 중 교 회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일을 의미한다.

-. 기독교 윤리학이란, 기독교적 삶의 방식-에토스’ : 관습 및 성품-의 기원 및 내용에 대한 이론을 연구하는 학문.

-. ‘목회 윤리학이란 교회에서 임명한 (제도적) 직분자인 목회자가, 자신이 속한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 행하는 일-직접적 행동뿐 아니라 교회 내의 관계 형성, 목회자의 존재방식 및 목회 구조 형성도 포함-을 연구하는 학문.

=. 목회 윤리학은 목회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데 근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님.

=.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목적임.

2. 목회 윤리학을 할 때 지향해야 할 태도: 기독교 윤리학의 일반적 특징과 관련하여

1)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데만 초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

*. ‘행위 결정 방법에 초점을 둔 규범 윤리학의 한계를 극복한다.

-.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것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해야.

-. 예수님은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풍성한 삶 (살림, 구원)을 주기 위해 오셨다.

-.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눅 12:14).

2) 하나님 은혜에의 동참, 즉 지금 이곳에서 선도적(先導的)으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 의 은혜에 참여하는 삶을 추구해야.

*. 규범 윤리학의 정태성과 도식성을 극복.

*. 상황 중심적 윤리학이 범하기 쉬운 상황 종속성을 극복.

-. 성경에서 살리시는 하나님의 사역 (내러티브)을 발견하고,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고,

지금 여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 목회 윤리의 주인은 원리나 이상이나 규범이 아니다.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추상적 하나님이 아니라, 역동적 하나님(느 9: 6-38).

3) 사후적 치료 (또는 권선징악)나, 사건 발생 당시 바람직한 결단을 위한 모색에 초점 을 두기보다는 예방적 측면에 초점을 둔다.

*. ‘행위 결정을 위한 윤리학이 갖는 무력증이나 패배주의를 극복함.

-.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은혜의 선도(先導)에 동참하는 것이 지 만, 다른 사람과 나와의 관계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선도를 먼저 알고 있는 사람으로 서 나는 더불어 올바르게 사는 삶을 위해 선도적(先導的) 자세를 취하게 된다.

-. 참조: 오늘날 치료의학보다 예방의학이 중요시되는 이유를 생각해 보라.

4) 공동체 (교회) 회복에 초점을 둔다.

*. ‘존재의 윤리또는 됨됨이를 위한 윤리의 인격주의적 오류를 극복하고자 함.

-. 성경의 내러티브는 이스라엘 공동체 (믿음 공동체)의 회복을 중요시함.

-. 교리적 언급을 하고 있는 것처럼 해석되어온 바울 서신들조차도 좀더 넓은 시각에서

보면, 교회의 회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 참된 살림(구원)은 공동체에로의 인도가 없이는 불가능.

-. 공동체 회복은 공동체 에토스를 바로 잡는 것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개인적 권선징 악의 처벌보다 어떻게 살림의 에토스를 공동체에 제대로 뿌리내리게 하는가에 초점을

둔다.

5) 다양한 규범들이나 가치, 명령 등을 한 가지 규범, 가치, 명령 등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함.

* ‘더불어’: 다양성과 포용성을 전제 + 관계론적 이해

* ‘올바르게’: “평등풍요로움을 전제한 개념

6) 개념화보다는 구체적 실천을 강조함.

-. 예수님은 윤리적 요소들 (사랑, 정의, 평화 등)이 무엇인지 정의 내리며 가르치기 보다는 그것을 실천하심. 그리고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하심.

7) 실천에 있어서 과정목표를 통합하여 이해함.

-. 크리스천은 길 위의 사람들’: 한 과정은 그 이전 단계의 작은 목표. 한 목표는 다음 단계에 이르는 과정으로 봄: 따라서 신앙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업적주의,’ ‘요행심 등은 배제되어야 함.

-. ‘도로의 문화가 주류를 이루는 사회에서 길의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 가려함. 그리 고 이러한 실천 방침은 공동체 에토스를 바로잡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함.

3. 목회 윤리학의 과제

1) 교회 내에서의 목회자의 존재 방식에 대한 연구

-. 목회윤리에는 목회자윤리 측면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

-. 교회 공동체 내에서의 목회자의 위상 및 교우들과의 관계 형성의 문제 등을 고찰.

-. 목회자의 자아상에 대한 이해도 필요함.

2) 교회의 내적 구조에 대한 연구

-. 교회의 관계 구조가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리스도의 몸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자리잡 게 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

3) 교회와 세상의 관계 형성 방식에 대한 연구

-. 교회가 세상과 관계 맺고 있는 방식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리스도의 몸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자리잡게 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

-. 이를 위해 교회에 존재하고 있는 한국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

4) 목회자가 교회 안에서 행하는 직무의 내용 및 방식에 대한 연구

-. 교회 안에서 목회자가 행하는 여러 가지 사역이 그 내용과 방식에서 하나님의 거룩 함과 그리스도의 몸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자리잡게 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

4. 한국적 상황에서 특별히 추구해야 할 목회 윤리학의 초점

1) 현실 교회가 신자 됨됨이 형성의 모판이 되도록 하는 것.

-.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 신자의 됨됨이가 그리스도를 닮아 갈 수 있도록 현 실 교회를 세우는 것.

2) 현실 교회가 한국 사회에서 실제적으로 대안사회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것.

-. 불신자 사회학자가 이 시대의 대안사회로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을 정도로 현실 교 회를 바로 잡는 것.

Ⅴ. 목회윤리의 내용 형성 관계도

인간 관계 영역 복음 전함

목회자의 됨됨이

실행(능력)

사명의식

(책임의식)

하나님과

성경 말씀

구체화(外性)

인지 영역 지향성(內性)

선한 일

역할 영역 지속성과 일관성 지향성 지향성 지속성과 일관성

(外性) (外性)

그리스도를 본받음

자아상 + 지향성

1. 목회 윤리의 내용을 결정하는 세 가지 요소

1) 목회자 됨됨이

-. 일반 신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일차 목표.

=. 굳이 구별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목자적 성격을 좀더 닮아야 한다는 점에 있다.

-. 됨됨이 내용 중 특히, 자아상과 지향성 부분이 중요함.

-. 목회자 됨됨이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와 성경을 기본 바탕으로 형성되어야.

=. “나를 관통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다른 사람을 관통할 수 없다.

2) 사명의식 : 책임 의식과 관계됨

-. 그리스도를 본받는 목회자는 세상에 대한 사명 의식이 있음

-. 사명 의식은 구체적으로 복음 전파와 선한 일에 대한 사명 의식.

=. 하나님의 말씀과 빵으로 사는 인간에 대한 책임.

3) 실행 능력

-. 그리스도를 본받는 목회자는 실행 능력을 갖춤.

-. 실행 능력이 펼쳐지는 중요한 세 가지 영역: 인간관계, 인지, 역할기대에 부응.

4) 이 세 가지 요소는 위에서 살펴본 목회자 삶의 관계도에서 언급된 네 가지 생활 영역 과 관계됨.

-. 목회자 됨됨이는 하나님과의 교제생활, 가정생활, 사회생활, 교회생활과 관계됨.

-. 실행능력의 세 가지 영역 역시 네 가지 영역의 생활과 관계됨.

-. 사명 의식 역시 네 가지 영역의 생활과 관계됨.

2. 세 가지 요소의 상호 관계성 이해

1) 목회자 됨됨이와 사명 의식의 관계

-. 목회자 됨됨이는 사명 의식이 지속적이고 일관성 있게 만들어 줌.

=. 됨됨이에 기초하지 않은 사명 의식은 충동적이기 쉬움.

=. 일회성 사명 의식의 문제점.

=. 정서화된 사명 의식은 됨됨이에 뿌리를 내릴 때만 확보 가능.

-. 사명 의식은 자신의 됨됨이가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 것을 지향해야 함.

=. 됨됨이는 사명 의식을 낳고, 사명 의식은 됨됨이를 성숙시키는 데 일조함.

=. 됨됨이를 지향하지 않는 사명 의식은 외형주의나 선언주의로 전화되기 쉬움.

-. 사명 의식이 없는 훌륭한 됨됨이는 공허함.

=. ‘개인주의적 고고함의 위험성.

2) 목회자 됨됨이와 실행 능력의 관계

-. 목회자의 됨됨이는 목회자의 실행(능력)을 추동하며, 지속성과 일관성을 줌.

=. 그리스도를 본받는 됨됨이에 기초하지 않은 실행은 충동적이거나 자기 중심적이기 쉬움.

-. 실행은 자신의 됨됨이가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 것을 지향해야 함.

=. 그리스도를 닮는 됨됨이를 지향하지 않는 실행은 업적주의의 오류에 빠지기 쉬움.

-. 실행이 없는 훌륭한 됨됨이 역시 공허함.

3) 실행능력과 사명의식의 관계

-. 실행은 사명의식의 외적 구체성.

=. 실행의식은 사명의식에서 나오고, 사명의식은 됨됨이를 지향

-. 사명의식은 실행의 내면성.

=. 사명의식은 실행능력 중 인식 능력에 의해서 영향을 받음.

=. 인식이 편협되면, 사명 의식이 편협될 수밖에 없음.

=. 사명 의식에 뿌리내리지 못한 실행은 무분별하거나 자기 열심에 닫힌 행동.

3. 목회 윤리 문제가 표출되는 갈래 검토

1) 목회자의 됨됨이와 관련한 문제:

-. 기질의 문제: 조바심, 허영심, 과시욕, 과도한 야심, 열등의식, 지나친 소심증 등

-. 습관의 문제: 도박, 일탈적 성생활, 과도한 고급 취향 생활, 생활의 이중성 등.

2) 사명 의식과 관련된 문제:

-. 사명 의식 자체가 희박한 경우

=. ‘직업으로서의 목회(?)

=. 목회(교회) 경영자로 전락.

=. 세상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세속화됨.

-. 사명 의식이 편협된 경우

=. (협소한 의미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다소 비윤리적 행동도 가능하다고.

3) 실행능력과 관련된 문제:

-. 능력의 부재에서 오는 편법

=. 인간 관계와 관련: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는데, 쉽게 상처를 주거나 권위적이 되거나, 남의 비밀 및 약점을 은근히 그러나 습관적으로 퍼뜨리는 경우.

=. 인지 능력과 관련: 실력보다 수행해야 할 역할이 더 큰 경우 편법을 쓰게 됨. 설교 에서의 표절 문제, 협소한 세계관에서 야기하는 문제 등.

+. 신학교에서의 수업은 주로 이 부분을 고양하는 데 초점이 맞춰짐.

+. 신학이나 성경 지식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문-사회 과학 일반의 지식 역시 중요.

=. 역할 영역과 관련: 교회의 목사로서, 사회의 종교지도자로서, 가정에서 남편 및 아 버지로서 행해야 하는 역할을 제대로 할 역량의 부족에서 야기되는 문제.

4. 목회 윤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양방향적 시도

1) 외부에서 내부로 접근

-. 사회 구조에서 인격의 문제로 접근

-. 한국 사회의 문제가 목회 윤리에 끼치는 악영향을 검토한 후 극복을 위한 시도.

=. 목회자 자신뿐 아니라, 교회, 가정에 미친 영향을 이해.

2) 내부에서 외부로 접근

-. 인격의 문제에서 사회 구조에로의 접근

-. 비록 구조적 문제가 크다 하더라도, 해결의 실마리는 자기의 변혁에서부터 시작해야.

3) 목회현장에서는 이 두 가지(사회와 인격)가 상관성을 갖고 목회 윤리 문제를 표출함.

-. 따라서 목회윤리를 바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한국사회의 성격도 바로 알아야 하고, 인격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도 가져야 함.

제 3-1 주제 : 공동체성을 상실한 현대 사회

Ⅰ. 지구촌과 한국 사회의 개괄적 현황 이해를 위한 글

1. 세계가 100명의 마을이라면:

지구상에는 모두 63억여명이 살고 있지만 만약 이를 100명이 사는 마을로 줄여본다면 어떨까요. 100명 중 52명이 여자고, 48명이 남자입니다. 30명이 어린이이고 70명이 어른입니다. 그 중 7명이 노인입니다. 70명이 유색인종이고 30명이 백인입니다. 61명이 아시아인이고, 13명이 아프리카인, 13명이 남북아메리카인, 12명이 유럽인, 나머지는 남태평양 지역의 사람입니다. 33명이 기독교, 19명이 이슬람교, 13명이 힌두교, 6명이 불교를 믿고 있습니다. 5명은 나무나 바위 같은 모든 자연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24명은 또 다른 종교들을 믿고 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믿지 않고 있습니다. 17명은 중국어로 말하고 9명은 영어를, 8명은 힌디어와 우르두어를 6명은 스페인어를, 6명은 러시아어를, 4명은 아랍어로 말합니다. 이들을 모두 합해도 겨우 마을 사람들의 절반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 반은 벵골어, 포르투갈어, 인도네시아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한국어 등 다양한 언어로 말을 합니다. 마을에 사는 사람들 100명 중 20명이 영양상태가 충분하지 않고, 한 사람은 아사 직전입니다. 하지만 15명은 비만 상태입니다. 6명이 모든 부(富)의 59%를 독점하고 있고 전부 미국인입니다. 74명이 39%를 갖고 있으며 20명은 겨우 2%를 나눠 갖고 있습니다. 이 마을의 모든 에너지 중 20명이 80%를 사용하고 있고, 80명이 20%를 나누어 쓰고 있습니다. 75명이 먹을 것을 비축하고 있고, 비바람을 피할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25명은 그렇지 못합니다. 17명은 안전하고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합니다. 은행에 예금이 있고 지갑에 돈이 들어 있고 집안 어딘가에 잔돈이 굴러다니는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8명 안에 드는 한 사람입니다. 자가용을 가진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7명 안에 드는 부자입니다. 마을에서 한 사람이 대학을 나왔고, 두 사람이 컴퓨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14명은 글을 읽지 못합니다. 만일 당신이 어떤 괴롭힘이나 체포와 고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따라 움직이고 말할 수 있다면 그렇지 못한 48명보다 축복받았습니다. 만일 당신이 공습이나 폭격, 지뢰로 인한 살육과 무장 단체의 강간이나 납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렇지 않은 20명보다 축복받았습니다. 1년 동안 마을에서는 1명이 죽습니다. 그러나 2명의 아기가 새로이 태어나므로 마을 사람은 내년에 101명으로 늘어납니다.

2. 한국이 100명의 마을이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4,900만 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을 100명이라고 생각하고, 100명이 모여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지 알아보자. 이 마을의 100명 중 19명은 아이들(15세 미만)이고 81명은 어른들(15세 이상)인데, 어른 10명은 노인(65세 이상이다)이다. 이 마을 사람 100명 중 52명이 남성이고, 48명은 여성으로 지구촌의 다른 어른들(비해 여성이 2명 적다. 마을 사람들은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 서울에 21명, 부산에 7명, 대구와 인천에 각각 5명)19그리고 광주와 대전에 3명, 울산에 2명이 살고 있다. 경기에는 23명, 경남에 6명, 경북에 5명, 충남주다.남에 각각 4명이 살고, 강원ü세 북, 전북에 3명이 살고 있고 가장 남쪽에 있어 따뜻한 제주에는 1명이 살고 있다. 서울ü세인천, 경기의 수도권에 100명 중 거의 절반인 49명이 몰려 살고 있는데, 이 수치는 5년 전들(비해 2명이 늘어난 수치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평균 3명이 한 가족을 이루어 살고 있다., 총 33가족이 살고 있다. 역에 3가족 중에서 혼자서 사는 가족이 일곱집, 2명이 사는 가족이 일곱집, 3명이 사는 가족이 일곱집, 4명이 사는 가족이 아홉집, 명이 살5명 이상이 사는 가족은 세 Ñ살정도 되어서 실제로는 4명이 사는 집이 제일 많다. 재미있는 사실한 가족을 있는 집이 34채로, )19가족이 살기에 이상고 오히려 1채 2정도가 남2명이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수도권에는 집이 부앱는 1족이 일적은 지역에는 빈 집이 생긴ä이 것이다. 특히에 3가족 중 실제로 자기 집평균 3명이 들은 21가족(62명)살정도고, 12가족(38명)은 집이 없어서 남의 집에 살고 있는데, 그상)중에는 집 값 문제로 한숨평균쉬는 사람들이 많다. 3가족 중에서 한 달간 그9가족이 모 가일해서 벌어들이는 소득이 월 100명이원 이하인 집이 다섯 집이고, 월 100-200명이원인 집ô5세집, 월 200-300명이원인 집이 아홉세집, 월 300-400명이원인 집이 네세집, 월 400명이원 이상인 집은 네세집이다. 마을 사람들 중에서 가장 적게 버는 사람 10명의 재산고 8해도 마을 재산의 2퍼센트가 채 생긴될 정도다. 역들(비해 가장 많이 버는 사람 10명의 재산고 다 합하면 마을 재산의 30퍼센트실제된다고 하니, 적게 버는 사람ü세많이 버는 사람의 소득 차가 크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마을 사람 100명 중 3명은 소득이 거의 없어서 마을 사람들이 낸 세금을 보조 받아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3. “그 잘 살던 나우루가 외국에 구걸하는 까닭은

타이완(臺灣) 영자지 타이베이 타임스에 따르면 타이완 정부는 3월부터 남태평양 섬나라 나우루(Nauru)에 매일 아침식사를 무료 급식하고 있다. 나우루 전역의 유치원·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대상이다. 나우루에는 유치원이 6개, 초등학교가 2개 있다. 고교와 공무원 1000명에게는 도시락이 싼값에 공급된다. 남태평양 순방길에 올랐던 마잉주(馬英九) 타이완 총통은 나우루에 들러 지속적인 경제 협력을 약속하기도 했다.

타이완은 2002년 중국의 달러 외교전에 패배해 나우루로부터 단교당했다. 그러다 대대적인 경제 지원을 통해 2006년 국교를 복원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나우루의 1인당 국민소득이 한때 2만 달러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나라가 어쩌다 어린이들 식사까지 외국으로부터 얻어먹는 처지가 됐을까. 호주와 하와이 사이에 있는 섬나라 나우루는 국토 면적이 21에 불과하다. 울릉도의 3분의 1 크기다. 인구는 2010년 현재 1만 명 정도다.

산호초로 둘러싸인 이 작은 섬에는 갈매기와 앨버트로스(신천옹)가 천지였다. 섬을 찾은 새들은 산호초와 섬 위에 수천 년 동안 똥을 쌓았다. 1888년 나우루를 찾은 독일 자본가들은 섬 전체에서 대량의 인광석을 발견했다. 인광석은 화학비료 재료로 쓰인다. 새들의 똥이 산호충과 결합해 인광석으로 변했고 나우루 전체가 인광석 노천광이 된 것이다. 이후 독일·호주·뉴질랜드·영국 자본이 나우루인들을 고용해 노천에서 인광석을 실어갔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68년 신탁통치가 종료되면서 나우루는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인광석 광산은 나우루 소유가 됐다. 나우루 정부는 외국 자본이 한 그대로 인광석을 채굴했다. 땅을 걷어내면 순도 높은 인광석이 나오니 기술도 필요없었다. 현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우루 주민들은 더 이상 노동을 하지 않았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한 채굴장 수입으로 먹고살았다. 농장은 모조리 인광석 광산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통조림을 수입해 냉장고에 쟁여놓고 먹었다. 세금도 없었다. 초등학교 공짜, 의료비 공짜, 주택도 공짜였다. 1980년대 중반 나우루는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기도 했다. 한번도 외국을 나간 적 없는 사람들이 전세기를 타고 하와이와 피지와 싱가포르로 쇼핑관광을 가는가 하면 전세기로 호주 멜버른으로 날아가 럭비 경기를 구경했다. 고급 스포츠카도 수입했다.

나우루에는 일주도로가 하나 있다. 길이는 18에 제한속도가 40였다. 지금은 곳곳이 부서져 차량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한 주민은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찰 간부 한 명이 최고급 스포츠카인 람보르기니를 수입했는데 운전석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몸이 뚱뚱해 제대로 타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이 주민은 "심지어 1달러 지폐를 화장지로 쓴 미친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1990년대 초 문제가 두 가지 터졌다. 전 주민의 90%가 비만이고 50%가 당뇨를 앓고 있었던 것이다. 채소와 어류 대신에 수입한 가공식품에만 매달린 결과였다. 지표면을 뒤덮었던 인광석이 고갈됐다는 사실은 더 심각했다. 정부가 부랴부랴 어업 부활을 위해 항구를 개발했다. 주민들은 거기에서 고기를 잡는 대신 해수욕을 즐겼다. 농장을 개발하려 했지만 표토(表土)가 사라진 땅에는 농사가 불가능했다.

뼈만 남은 땅에 관광산업 개발은 더 불가능했다. 낮아진 지표 때문에 나우루는 지구온난화에 따른 수면 상승 효과의 대표적인 피해국가가 됐다. 1990년대 나우루 정부는 외국에 투자해둔 부동산을 담보로 외채를 빌려썼다. 세금 떼먹는 외국인이나 테러리스트에게 국적을 팔고 스위스식 비밀은행업도 벌였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은 나우루은행 자산을 동결했다. 그 해 나우루 정부는 현금 지원을 대가로 호주 난민수용소를 자기 땅에 유치했다. 2003년 인광석이 공식적으로 고갈됐다. 2005년 12월에는 국적기 에어나우루가 운항을 중단했다. 2008년에는 호주가 난민수용소를 폐쇄했다. 지구상에서 나우루를 위한 돈줄기가 사라진 것이다.

그 무렵 타이완이 나타났다. 2006년 타이완은 국교 복원을 조건으로 경제협력을 제안했다. 중국과 살벌하게 외교전을 벌이던 때라 타이완 정부는 나우루피지서울을 경유해 나우루 대표를 타이베이로 데려가 수교를 복원했다. 이후 타이완은 기술자들을 보내 채소 농장을 건설했다. 중단됐던 국적기 에어 나우루도 2006년 타이완 자본으로 '아워 에어라인(Our Airline)'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지난해 12월 나우루는 그루지야가 소유권을 주장하는 구소련지역 소국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야를 승인했다. 외교가는 "그루지야를 견제하는 러시아가 나우루에 5000만달러를 지원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여기까지가 나우루 어린이들이 타이완으로부터 밥을 얻어먹게 된 사연이다.

Ⅱ. 공동체성을 상실한 인류의 경제적 삶의 질

-. 생산력이나 생산량의 문제가 아니라 분배와 사용과 관련된 문제

=. 1984년 FAO(유엔식량농업기구)의 평가에 따르면, 당시 농업생산력으로 지구는 현재보다 두 배나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음.(하루 2,400-2,700칼로리 먹을 거리 제공 가능)

1. 잘못 나누기의 문제

1) 세계 최대 부자 세 명의 재산이, 못사는 국가 48개국의 일년 국내총생산액과 같다.

2) 세계 최대 부자 84명의 재산이, 12억 중국 인구의 일년 국내총생산액과 같다.

-. 세계 인구의 0.1% 정도에 불과한 부자들이 세계 부의 40%를 소유.

3) 세계 인구의 20%가 전 세계 소득의 80%를 차지하고, 세계 인구의 80%가 전 세계 소 득의 20%를 나눠 쓰고 있다.

4) 매 5초당 한 명의 어린이가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

5) 세계 인구의 약 1/3이 하루 2달러 이하로 생활.

-. 약 13억 인구가 하루 1달러 이하의 생활비로 살고 있음.

-. 이중 약 8억4천만 명이 기아에 시달림.

=.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칼로리를 1이라고 할 때, 인간이 활동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는 1.4이다. 이 1.4의 에너지를 제공받지 못하는 경우를 기아라고 함.

6) 전세계적인 경제불황 속에서도 백만장자의 수와 총재산액은 계속 늘어남.

-. 2002년 말 현재 부동산을 포함한 개인자산이 100만 달러 이상인 사람은 전세계에 730만 명으로 지난해보다 20만 명이나 늘음.

-. 재산 3천만 달러 이상의 슈퍼부자도 5만8천명으로 2% 증가했다.

-. 세계적인 증시 침체 속에서도 백만 장자급 이상 부자들의 재산총액은 27조2천억 달러로 3.6%나 증가했다.(세계 부자 보고서 2003년판)

-. 2000년 미국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낸 부자 400명의 평균 연소득은 1억7400만 달 러로, 1992년의 4680만 달러에 비해 4배 가까이 늘어났음.

2. 잘못 쓰기의 문제

1) 세계 최대 소비는 군사비:

-. 1985년 1조 2천억 달러. 1997년 8천억 달러.

-. 1998년 7천8백5십억 달러.

-. 1999년의 경우 군사비는 7천 6백억 달러.

-. 2002년 세계 군사비 지출: 7천9백4십억 달러

-. 2004년 세계 군사비 지출: 9천7백5십억 달러

=. 이 중 미국의 2004년도 국방비 지출은 4553억 달러: 전 세계 지출의 47%.

=. 2위인 영국은 474억 달러, 3위인 프랑스는 462억 달러, 4위인 일본은 424억 달러, 5위인 중국은 354억 달러(추정치)임.

=. 우리나라는 155억 달러로 10위임.

2) 2003년도 전세계 상위 100대 무기판매 기업의 총매출액은 2360억 달러.

-. 2002년도에 비해 25% 늘어났음.

-. 북미 대륙에 있는 39개(미국 38개, 캐나다 1개) 기업들이 전체 무기 매출액의 63.2%를 차지함.

=. 무기 판매 상위 12대 기업을 국적별로 보면, 8개가 미국 기업임.

=. 특히 1위 록히드 마틴(249억 달러), 2위 보잉(243억 달러), 3위 노스롭 그루먼(227억 달러)은 모두 미국 기업임.

Ⅲ. 환경과 질병의 문제

-. 삶의 조건이 점점 비관적인 이유

1. 생태계 재생 능력을 넘어선 소비

-. 인간의 자원 소비가 1980년대에 지구의 생태계 재생 능력을 넘어서기 시작함.

-. 1999년에는 지구의 생태계 재생능력의 120%에까지 도달하였음.

-. 2030년에는 자원사용이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게 될 것.

=. 2030년부터는 자원 부족 때문에 세계경제가 곤두박질하게 될 것으로 전망.

-. 2050년에는 지구의 생태적 능력의 두 배 정도의 자원이 소모될 것.

2. 환경 파괴의 구체적 예

-. 1990년대에만 전 세계 삼림의 2.4%에 해당하는 9천4백만ha의 산림이 파괴되었음.

-. 전세계 포유류의 24%인 1130종과 조류의 12%인 1183종이 멸종 위기에 있음.

-. 전세계인의 40%가 심각한 식수난에 시달리고 있음.

=. 전세계 사망과 질병의 7%가 오염된 물과 위생불량에서 발생.

3. ‘자원 사용량의 편차 문제: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

-. 개인이 소비하는 자원의 양을 경작지 면적으로 환산한 수치를 자원사용량이라고 함.

-. 1999년 전세계 자원사용량 평균은 2.28ha입니다.

=. 같은 해 미국의 자원사용량 평균은 9.7ha로 세계 평균의 4배가 넘음.

=. 반면, 같은 해 중남미의 자원사용량은 2.17ha,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자원사용량은 1.37ha로 세계 평균 이하.

=. 한국의 자원사용량은 3.31ha로 세계 평균을 넘음.

4. “21세기는 전염병의 시대라고 세계보건기구(WHO)가 규정

-. 1980년 이래 새로운 질병들이 30종 이상 늘었다고 발표.

=.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전세계적으로 감염자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

=. 사스(SARS): 2002년 11월 1일부터 2003년 8월 7일까지 총 30개 국가에서 8422명의 환자가 발생하였으며 이 중 919명이 사망.

=. H5N1에 의한 조류독감: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에서 총 107명의 조류독감 감염자 중54명이 사망.

-. 이미 박멸되었다고 믿었던 병균들이 다시 출현하기 시작.

=. 결핵균: 약 17억 인구가 결핵 감염자로 추정됨. 매년 880만 명의 새로운 환자가 발생하고 175만 명이 사망.

=. 말라리아: 최근 동아프리카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환자 수가 급격히 늘어남. 매년 2천만 명을 죽음으로 내모는 데 희생자의 절반은 다섯 살 미만의 아이.

-. 현대의 전염병은 에코데믹’(Ecodemic) 즉 생태병임.

=. 지구의 온난화, 삼림파괴, 집약농업, 야생동물 절멸, 생물 다양성 파괴, 생태계 교란, 항생제 남용 등 경제적 이익을 위해 무분별하게 자연에 개입한 인간의 행동이 바로 이 질병의 출현과 확산의 주범.

** 보론: 자본주의의 발전과 공동체성 붕괴

1. 고삐 달린 공동체로부터 자유로운 개인들이 분리되어 나옴

-. 봉건주의 시대에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신분 제도에 예속.

-. 그러나 당시에는 공동체적 인간관계가 유지되어 있었음.

-. 초기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상업이나 수공업 중심 도시의 성장은 결국 자연을 토대 로 한 봉건사회를 해체한다.

-. 자본주의 사회가 시작되면서 부모의 신분과는 상관없이 자유롭게 자기 노동력을 팔아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권리(동시에 의무)가 보장됨.

-. 존 로크: 인간은 드디어 역사상 최초로 자기 자신을 소유물로 가질 수 있게 되었다.

2. 탈영성화(despiritualization) 과정이 진행되면서, 인간이 신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옴

-. 탈영성화 과정의 외형적 직접 원인은 계몽주의이다.

-. 그러나 계몽주의의 주체가 자본주의 사회의 기초가 되는 부르주아 계층이기 때문에, 탈영성화 과정은 자본주의 성장 과정과 본질적으로 밀착되었다고 볼 수 있음.

3. 자연과 인간이 분리됨으로써, 자연이 대상화, 객체화 함

-. 토지로부터 농민이 떨어져 나와 노동자가 되는 과정은 궁극적으로 자연과 인간의 분리 를 가속화함.

-.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은 그 삶의 토대인 자연의 순환고리를 박차고 밖 으로 튀어나오게 된다. 그리하여 이제 인간은 자연을 갈수록 더 많이 대상화, 객체화시 키면서 정복과 개발,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게 된다.

-. 이 과정에서 인간(특히 신흥 부르주아)는 뉴턴식 자연과학과 합리주의 철학, 고전파 경 제학을 등에 업고 신이나 봉건적 지배 세력 대신에 자연을 지배하는 새로운 주체로 등 장하게 된다.

4. 삶터와 일터가 분리됨으로써, 이웃과의 분리 및 자기 자신과의 분리가 강화됨

1) 삶터(토지 중심적 생활노동)에서 일터(공장 중심적 노동)로 사람들을 유인함.

-. 농촌의 축소와 도시의 확장이 기본 패턴으로 나옴: 도시는 노동자 합숙소

-. 자동차 산업의 발달은 삶터와 일터가 분리된 데서 가속화함.

-. 노동자의 삶터와 일터가 분리되면서 가족관계와 이웃관계가 개별화, 형식화됨.

2) 생활시간과 노동시간의 분리가 강화됨으로써, 삶의 이중성이 제도화함

-. 노동시간은 필요악으로 여겨짐: 노동시간은 부자유의 영역이요, 여가시간은 자유의 영역으로 여기게 됨.

=. 노동은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고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발전시키는 진지한 삶 의 과정이 되기보다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경제적 도구로밖에 되지 않는다.

-. 노동문화와 놀이문화가 분리됨: 노동은 강화되고 놀이는 타락하게 된다.

=. 일 중독 및 돈 중독 현상과 함께 소비적, 향락적, 퇴폐적 놀이가 유행

=. 노동을 통해 얻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놀이 문화.

5. 생산자와 소비자가 분리됨으로써, 타인과의 관계가 분리될 뿐 아니라 자기 분열이 생김.

-.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 인간은, 지배층의 사치품을 제외하고는 대개 직접적인 필요 를 위해 생산물을 만들었다. 이때는 주로 사용가치 위주로 생산됨

-.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 생산이 주류를 이룸.

=. 상품은 역사적으로, 단순한 사용가치로서의 잉여생산물이라는 자신의 모체를 부정하 고, 다른 사람을 위한 사용가치를 지닌 교환가치라는 얼굴을 갖고서 자본주의 시장 에 등장하게 된다.

-. 옛날에 사용가치 중심의 사회에서는 통일되어 있던 생산자와 소비자가, 교환가치 중심 의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게 되면서 갈수록 분리된다. 이제 생산자와 소비자의 재결합 은 시장에서의 교환을 통한 상품관계 속에서만 가능하게 되었다.

6. 신에게서, 자연에서, 삶터와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나왔을 뿐 아니라, 자기 분열을 경험 하고 있는 인간은 자본주의적 욕망생산 메커니즘에 포섭된다.

-. 공동체성 붕괴에서 온 공허한 내적 세계를 자본주의적 보상체계나 물질적 소비 체계가 채워주게 되면서 현대인들은 서서히 대규모로 일종의 물질에 대한 중독관계속으로 편 입된다.

=. 현대인은 대체로 일 중독소비 중독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 ‘일 중독은 인간이 자신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인재(人材: human resource)로 보는 데서 기인됨.

=. ‘소비 중독은 인간이 자신을 소비자로 이해함: 인간 조사가 아니라, 소비자 조사.

-. 화폐와 상품, 권력과 명예로 자기 공허를 채우려 함.

7. 얼굴 없는 자본의 자기 증식 본성은 위의 6가지 내용을 더욱 강화시킴으로써, 현대 사회 의 공동체성을 점점 더 심하게 파괴시킨다.

-. 자본이 인간, 사회, 자연의 포악한 주인 역할을 하는 사회가 도래될 가능성이 많다.

제 3-2 주제 : 공동체성을 상실한 현대 교회

Ⅰ. 한국 교회 현황을 성찰할 수 있는 두 개의 글

1. 60년대 한국 교회의 한 단면:

나는 세례를 받은 지도 30년이나 되고, 집사라는 직책을 받은 것도 비슷한 햇수가 되는데도 한번도 만족한 예배를 드려본 적이 없다. 참으로 이름 그대로 돌예수꾼이었다. 다만 내가 예배당 문간방에 살면서 새벽종을 울리던 때가 진짜 하느님을 만나는 귀한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특히 추운 겨울날 캄캄한 새벽에 종줄을 잡아당기며 유난히 빛나는 별빛을 바라보는 상쾌한 기분은 지금도 그리워진다. 1960년대만 해도 농촌교회의 새벽기도는 소박하고 아름다웠다. 전깃불도 없고 석유 램프불을 켜놓고 차가운 마룻바닥에 꿇어앉아 조용히 기도했던 기억은 성스럽기까지 했다.

교인들은 모두 가난하고 슬픈 사연들을 지니고 있어 가식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그 중에 6 25때 남편을 잃고 외딸 하나 데리고 살던 김 아무개 집사님의 찬송가 소리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애절했다. 새벽기도 시간이면 제일 늦게까지 남아서 부르던 <고요한 바다로> 찬송가는 그분의 전속곡이었다. 마지막 4절의 이 세상 고락 간 주 뜻을 본받고 내 몸이 의지 없을 때 큰 믿음 줍소서.하면서 흐느끼던 모습은 보는 사람들을 숙연하게 했다. 가난한 사람의 행복은 이렇게 욕심 없는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기도가 끝나 모두 돌아가고 아침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와 비출 때, 교회 안을 살펴보면 군데군데 마룻바닥에 눈물자국이 얼룩져 있고 그 눈물은 모두가 얼어 있었다.

60년대는 참 가난했다. 그러나 그때의 교회는 따뜻한 정이 있었다. 당시의 교회 회계장부를 들춰보면 누가 몇백원 빌려갔다가 언제 갚았다는 기록이 종종 보인다. 어려운 교인들에게 교회재정에서 꾸어주고 되돌려받기도 했던 것이다. 가난한 전도사님의 사례금은 말할 나위 없이 부족했고 심지어는 좁쌀 한말, 쌀 몇 되가 전부일 때도 있었다.

전도사님은 손수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때고, 무너진 교회담장을 쌓기도 하고 우물을 손수 팠다. 으fp 그렇게 하는 것이 상례였고, 그래서 교인들과 훨씬 인간적으로 사귈 수 있었다. 청년들은 밤마다 교회 문간방에 모여 가마니도 치고 책읽기도 했다. 밤늦도록 일하다가 고구마를 삶아먹기도 하고 날무우를 깎아 먹기도 했다.

예배시간에 헌금 봉투에 이름을 적어 바치는 그런 외식적인 것도 없었고, 오히려 남에게 알려질까봐 부끄러워했다. 물질이 풍족하지 못해 거의가 몸으로 봉사했고 마음으로 정을 나눴다. 이래서 그때의 기독교는 우리 한국민의 정서를 크게 다치지 않고 소리 없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지금도 가끔 이야기하지만, 샛돌이라는 마을은 50여호가 살고 있는 산골 외딴 곳이다. 교회가 들어온 지 백년이 가까웠는데, 60년대까지만 해도 그 마을 전체가 지상천국이었다...

어쨌든 교회는 70년대에 들면서 갑자기 권위주의, 물질만능주의, 거기다 신비주의까지 밀려와서 인간상실의 역할을 단단히 했다. 조용히 가슴으로 하던 기도는 큰 소리로 미친 듯이 떠들어야 했고, 장로와 집사도 직분이 아니라 명예가 되고 계급이 되고 권력이 되었다.

같은 목사님인데도 큰 교회 목사님과 작은 교회 목사님에 대한 차별이 생기고, 도시교회 목사님과 농촌교회 목사님에 대한 인격적인 차이까지 생겼다. 인간차별은 평신도들까지도 서먹서먹하게 만들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인사를 해도 마음을 드러내놓고 얘기할 상대가 없어졌다. 하느님께 의지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이용하여 출세와 권력과 돈을 얻으려 하고, 이것이 바로 그 사람의 믿음의 전부가 되었다. 예수 믿어 삼년 안에 부자 못되면 그건 문제교인이 된다. {권정생. [우리들의 하느님] 중에서}

2. 한국 목회자의 어두운 실정 중 하나를 보여주는 글:

목사를 자살하게 하는 현실

최근에 가슴 아픈 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의욕이 앞섰던 한 젊은 목사가 춘천의 작은 교회에서 좌절하고 철원지역으로 교회를 옮긴 뒤 우울증에 빠져 자살하고 만 이야깁니다. 또 하나는 도시 지하 개척교회 목회자가 해도해도 교인수가 늘지 않자 처자식을 놔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야깁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부족한 개인의 목회소명을 탓해야 할까요? 작은 시련조차 극복하지 못하는 나약함을 나무래야 할까요? 누가 그들의 생명을 앗아간 걸까요? 개인적 한계를 꼬집기보다 성직자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죽여야만 했던 그 상황이 무엇일까?... 궁금해졌습니다. 왜 죽었을까?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지만, 들은 얘기를 종합해 미루어보면, 두 번째 경우는 참 아이러니하게도 돈이었습니다. 없어도 너무 없었습니다. 가난에도 처할 줄 알아야 하는 성직자가 오히려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할 성직자가 돈 때문에 자살했다고 하기는 뭐하지만... 사실은, 따지고 보면 돈 때문이었습니다.

도시에서 교회를 개척할라치면 지하에서 시작하더라도 수천만 원이 듭니다. 자기 돈이 없으면 이곳저곳 빌려야 하고 그것도 없으면 은행이든 어디든 빌려야겠지요. 교회 문을 연다고 어디 성도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드나요? 3년이 가도 5년이 가도 처자식 2-3명 놓고 예배드리기 일수구요, 우연히 찾은 새 신자도 썰렁한 분위기 탓에 곧 발길을 끊기 일쑵니다. 교인이 없으니 월세 독촉은 어찌 넘기고 처자식은 어떻게 먹여 살리겠습니까? 근심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죠. 교회 성장시킨다고 이것저것 다 해봤지만 어디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점차 소명이니 의욕이니 하는 것들조차 생각하기 귀찮아지죠.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요. 우울증에 빠지는 날이 많아지고 잠 못이루는 밤도 늘어나고... 그러다 보면 자신의 삶의 존재가 너무 초라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죠. ...... 그리고 자살을 한 겁니다. 처자식을 어디 보낸 뒤 깨끗하게 목욕하고 목을 멘 것입니다.

누가 빚을 내서라도 교회를 개척하라고 했나요? 가게를 차리듯 돈이 있어야 목회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현실이 싫습니다. 교회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도시에서 기를 쓰고 개척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비정상적인 교회개척 현장에 목사 초년생들을 떠밀어내는 교계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목회자가 알아서 교회 차리고(?) 알아서 살라고 방치하기엔 교회와 성직자의 존재가 너무 소중한 것 아닌가요?

목회자가 궁핍한 삶에 못 이겨 소명마저 다 팽개치도록 왜 아무도 보살펴주지 않았나요? 멋진 교회당을 순식간에 헐고 으리으리한 새 교회당을 짓는 교회들이 많아도 여전히 월세 전기료를 못내 문을 닫는 가난한 교회들이 더 많다는 현실이 속상합니다. 스스로 원해서 자처하는 청빈이 아니라 너무나 궁핍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미자립 개척교회의 실상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사실 너무나 많은, 아니 대다수의 미자립 개척교회 목사들이

월세와 생활비, 교회운영비 등등에 허덕이며 하루하루를 근심 걱정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또 왜 이렇게 목사는 많은 건지...... 아무 대책 없이 신학생들을 모집하고 아무 대책 없이 목사들을 마구 배출하고 아무 대책 없이 사회로 내몰아 알아서 살라고 배짱 튕기는 정말 아무 생각 없는 교단과 신학교 관계자들이 미워집니다. 목회자 수급계획은 있기나 한 건가요?

그저 눈에 보이는 등록금, 늘어나는 목회자 수에만 혈안이 돼 그들의 구체적인 삶은 들여다보지도 않는 신학교와 교단, 조그마한 돈이라도, 최저생계비 정도만이라도 지원해주지 못하는 교단, 과연 존재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목회자가 죽어가는 교회 바로 옆에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헌금을 가지고 수억 원어치의 이벤트 행사를 갖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돈이 지지리도 없는 목회자는 하나님이 버리셨나요? 돈이 넘쳐나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걸까요? 그렇게 인식하는 세태...... 개척교회 목회자는 두번 죽습니다. 교회 안에 존재하는 극단적인 빈익빈부익부 현실은 상대적 좌절감을 더 크게 만들 뿐입니다. 나누지 않는 단절이, 나만 아는 이기적 배부름이 사람들을, 그것도 성직자까지도 죽이고 있습니다.

너무나 하잘 것 없는...... 정말 별 것도 아닌...... 남들한테는 넘치는...... 그 돈 때문에 목사가 자살을 했습니다.(나이영의 크리스천 세상”: CBS에서)

Ⅱ. 한국 교회의 윤리적 현황

1. 신뢰집단이 되지 못한 한국교회의 윤리적 현실

-. 교회가 사회에서 윤리적 우위를 점하지 못하면, 신뢰집단으로 존재할 수 없음.

1) 교회 내부에서도(신자들에게서도) 신뢰를 잃고 있음.

-. 개종한 종교인 중 개신교에서 타종교로 개종한 사람이 45.5%로 가장 많음.

=. 불교에서 타종교로 개종한 경우는 34.4%.

=. 천주교에서 타종교로 개종한 경우는 14.9%.

-. 개신교인조차 한국 기독교인의 최대 문제는 위선이라고 봄

=. 2007년 9월 19일부터 한달 동안 기독교인 562명을 대상으로 갓피플닷컴이 조사.

=. 2007년 5월 27일부터 6월 9일까지 기독교인 1500명을 대상으로 국민일보와 한목협이 공동으로 조사에서도 같은 문제가 지적됨.

2) 교회 외부에서도 신뢰를 잃고 있음.

-. 비종교인이 한국기독교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들은 대체로 부정적임.

=. “참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교세를 확장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76%)

=. “지나치게 헌금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70.8%)

=. “개신교 종교지도자의 자질이 우수하다.”(22.8%)

*. 참고: 천주교 종교지도자 자질 우수(40.8%), 불교지도자 자질 우수(26.7%)

-. 증가하는 안티기독교 사이트의 문제.

=. 2007년 샘물교회 선교단의 아프가니스탄 피납 사건 때, 한국에서는 탈레반에 대한 비난보다 교회에 대한 비난이 더 많았던 것은 한국교회가 주목해야 할 점임.

2. 한국 기독교는 고등종교가 타락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음.

1) 종교학에서 고등종교와 하등종교를 나누는 분기점

-. 그 종교가 추구하는 진리를 위한 자기 욕망의 부인이 있는가?

-. 자기 욕망의 강화를 위해 자기 부인을 강조하는 것은 하등종교.

2) 고등종교가 타락했을 때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 성직자가 증가함.

- 고려 시대의 불교가 타락했을 때 온 고려 땅이 스님 천지

=. 티벳 라마 불교가 타락했을 때 티벳 전 남자의 70퍼센트가 승려.

-. 성직자가 증가할 수 있는 이유

=. 자기 부인이 없어졌기 때문에 성직자가 되기 쉬움.

=. 성직자가 좋은 직업이 되기 때문임.

-.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성직자가 차고 넘침.

=. 한국의 모든 교파 신학생들 숫자의 총합은 한국을 제외한 세계 모든 나라의 신학생 숫자보다 많다는 통계도 있음.

=. 홍수가 나서 사방이 물난리를 겪을 때, 마실 물이 없듯이, 신학생과 목사는 많은데 교인들은 믿을 만한 목사가 없다고 불평.

3) 고등종교가 타락했을 때 나타나는 두 번째 현상: 종교 기관이 급증함

-. 그 종교의 사제가 급증했기 때문에 그 사제들이 먹고 살기 위해 종교 기관이 증가.

=. 유럽교회는 교인이 없지만, 교회가 문을 닫지 않음: 성직자들이 먹고 살기 위해.

-. 한국 교회 수는 계속 증가해 왔음.

=. 교인수는 침체되더라도 교회는 많아짐.

=. 목회자가 급증한 만큼 교회는 늘어나게 됨.

-. 캐나다와 미국 서부 지역에 교회를 맡지 않은 무임 한국 목사님이 2,500명.

=. 교회는 계속 분열되어 나감.

4) 고등종교가 타락했을 때 나타나는 세 번째 현상: 신앙의 기복주의화.

-. 신앙의 기복주의화는 내 목적의 성취를 위해 나의 소유나 달란트로 신을 달래는 것.

=.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나를 바꾸는 것인데, 기복주의화된 신앙은 나를 추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화하여 하나님을 내 입맛대로 바꾸려는 것.

-. 그 종교의 사제와 기관이 먹고 살고 운영되는 데 필요한 재정이 신자들에게서 나옴.

=. 따라서 신자들이 떨어져나가면 안 되기 때문에 신자들 입맛에 맞게 진리를 왜곡.

=. 유럽에서 중세에 무사가 많이 배출된 동네일수록 예수상과 성모 마리아상이 부적처럼 많이 간직되고 있음.

-. 한국 교회는 사회 정의나 진리 및 진실을 관철하는 삶보다는 교인들의 기복에 초점.

=. 전 국민의 25%가 기독교인이라는 나라에서 부패와 악은 심화되고 있음.

5) 고등종교가 타락했을 때 나타나는 네 번째 현상: 종교가 이해집단화 됨.

-. 세상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자기들의 이해를 관철해나감.

-. 한국 보수교단의 이해집단화 현상.

=. 이승만 정권 이후부터 군사 정권 시기까지 보수교단은 정치적 우파로서 압력단체 역할을 직간접적으로 행함.

제 4 주제 : 참된 교회됨을 위하여: 성경적 공동체

Ⅰ. 참된 교회됨의 조건: 관계적 측면에서

1. 하나님과의 관계

1) 예수님께서 하나님 중심적 공동체를 창출하심.

-.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 . .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막 3:31-34)

-. “예수께서 가라사대 . . .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 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 를 백 배나 받되”(막 10:29-30)

2) 하나님께서 공동체를 키우심

-.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 .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 게 하시니라.”(행 2:46-47)

3) 공동체가 한 일을 하나님이 하신 일로 인정하심

-.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 .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18:18-20)

-. 최초의 교회회의에서 공동체의 정당한 절차를 거쳐 결의된 내용이 성령님께서 하신 결정이라고 함(행 15:28)

2. 사람과의 관계

1) 참된 용서와 용납을 실천하는 교회 공동체 (마 18:15-20)

-. 용서를 위한 이니시어티브는 당사자가 갖는다: 목사나 신부가 아니다 (15절)

-. 죄를 범한 사람에게 찾아 가는 동기는 그 사람을 공동체 안에서 여전히 함께 거하게 하기 위해서: 체벌을 위한 것이 아니다--형제를 얻는 것” (15절 하).

-. 죄 범한 자의 부끄러움을 최소화시키는 방향에서 행동이 취해짐: 일대일-->한두 사 람의 증인 동반-->교회에 알림-->출교

-. 공동체의 용서와 용납이 하나님의 일로 인정됨 (18절--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림)

-. 이러한 절차를 밟음으로써 교회는 건강한 공동체가 됨.

2) 나눔 즉 분배의 정의를 실천하는 교회 공동체

-. “떡을 떼는 것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에서부터 유래.

-. 초대교회에서는 이것이 상례화 되었다 (행 2:42: 가르침을 받음+교제+떡을 뗌+기도, 2:46 참조)

-. “필요에 따라 나눠줌이 상례적 일이었다. 그 결과는 공동체 안에서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 (행 4:32-35).

-. 그러나 교회가 이러한 나눔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을 때, 문제가 생김.

=.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원망한 이유는 그들이 그 매일 구제 에서 빠졌기 때문: 공동체 안에서의 나눔이 매일즉 상례화 되었다 (행 6:1).

=. 또한 이러한 나눔 행위는 교회의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즉 사도들은 처음에 이 일 에 시간을 많이 바쳤다 (행 6:2: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다는 말 이 나올 정도로).

=. 고린도 교회는 이 떡을 떼는 일상적 행습이 잘못됨으로써 바울에게서 너희 모임이 오히려 해롭다는 평을 받는다 (고전 11:17-34).

=. 이러한 나눔 공동체의 모습은 오늘날 세상이 이루어 내고자 애쓰는 모습이다. 교회참된 교회가 되어 있다면, 오늘날 사회에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3) 참된 평등을 향유하는 교회 공동체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적 또는 세상적 차이에서 오는 모든 신분적 차별이 없어 짐: 유대인이나 헬라인, 종이나 자주자,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다” (갈 3:28; 골 3:11).

-. “침(세)례라는 소위 종교적예식이 갖는 사회적의미에는 세상적 신분의 철폐는 의미가 들어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 로 옷입었느니라” (갈 3:27).

-.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선언도 사회적 평등의 의미가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혈통이나, 사회적 신분이나, 성별 차이나, 지식 여부, 지역성의 차이 등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공동체.

-. “차이가 없어지는 강제적 획일성의 평등이 아니라, 차이는 존중되되, 차별이 없는 평등이다.

-. 교회가 가지고 있는 평등한 공동체에 대한 이런 전통이 오늘날까지 교회에서 실제로 잘 전승되고 있다면, 지역주의 문제, 인종 문제, 계층 문제, 학연/지연 문제, 성별 차별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세상에 참된 모델이 될 수 있다.

4) 자신의 개인적 개성이 존중받으면서도 더불어 사는 삶을 만끽할 수 있는 교회 공동체.

-. 개인의 다양성이 인정됨: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 (엡 4:11); 은사 의 다양함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의 은사, . . . 고전 12:4-11)

-. 그러나 이러한 개인의 다양성과 은사의 다채로움은 배타주의적 각개살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삶으로 꽃 핌: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함” (엡 4:12; 고전 12:7, 24-31).

-. 개성 (개인)을 존중하되, 개인주의적 삶의 폐단으로부터 사회의 공동체성을 지키려는 것은 오늘날 세상이 매우 갈구하고 있는 삶의 질적(質的) 형태이다. 교회가 이와 같은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실현된 대안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5) 평등한 언로(言路)가 보장되어, 생산적 대화를 통해, 진실에 접근하는 교회 공동체.

-. 성령의 통제 아래 있는 교회 공동체는 매우 질서있고, 평등한 언로가 보장되었다.

고전 14장은 이러한 공동체 모습을 위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함: 방언보다는 예언 (3-6절).

-. 알아 듣기 쉽게 말하는 것의 중요성: 약한 자 또는 무식한 자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해야 함 (9, 16-18, 23절).

-. 자신이 깨달은말을 하는 것의 중요성 (19절).

-. 순서 및 질서를 지켜 말하는 것의 중요성 (27, 30절).

-. 누구나 말할 권리가 있고, 누구나 들을 의무가 있는 공동체 (30-31절).

-. 그 어떠한 사람의 말이라도, 그 공동체 안에서 비판과 토론의 대상이 된 후, 공동체 에서 채택되어야 한다. 즉 누구의 말도 그 공동체 안에서 전횡적 권력을 구가할 수 없는 공동체 (29절--분변하라).

-. 사사로운 주제로 공동체의 대화 내용이 방해받지 않는 공동체 (34-35절).

6) 검박한 교회 공동체 유지하기

-. 예수님의 공동체는 검박한 생활을 하였음: 오죽 하였으면, 배가 고파 안식일에 이삭 을 베어먹었을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기나 제자들을 위해 헌금하라는 식의 말씀 없었음.

-. 성서 시대 교회 역시 부한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음.

Ⅱ. 교회에서 상생적 관계로 회복되어야 할 네 가지 측면

1. 나와 너의 관계가 열린 주체성을 지향해야 함

-. 예수를 섬기고 따르는 과정에서 교회에 입적한 성도는 자기를 폐기해서는 안 됨.

=. 자기 폐기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함.

=. 교회에서 자기 폐기를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보다는 교회의 종이 되기 쉬움.

=. 교회에서 자기 폐기를 하면, 대체로 교회의 특정 지도자를 추수모방하게 됨.

-. 교회에 입적한 성도는 자기에게 갇혀서 생활해서도 안 됨.

=. 자기를 폐기한 삶도 위험하지만, 자기에게 갇혀 사는 신자의 삶도 위험함.

=. 자기에게 갇힌 사람 중 한 부류의 특징은 자기 주장이 워낙 강해서 다른 성도에게서 배우지 못하고 오직 남을 가르치고 설득하려고만 함.

=. 자기에게 갇힌 사람 중 다른 한 부류의 특징은 타인으로부터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자기 보호막을 거두지 않은 채 긴장과 안타까움 속에서 지냄.

-. 교회 및 다른 교우들과의 관계에서 열린 주체성을 지향하는 것이 중요함.

=. 자기를 열어 남을 받아들이고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와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 게 세울 줄 아는 자가 건강한 신자.

=. 교인들이 열린 주체성을 세워나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

2. 영성과 일상성의 관계가 조화되어야 함.

-. 참된 성경적 영성은 일상성과 평상성으로 나타나야 함.

=. 예수님의 성육신이 대표적 예임.

=. 변화산에서 머물자는 제자들에게 산 아래로 내려가게 하심.

=.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하심.

-. 일상성 속에서 검증되지 않은 영성은 매우 허약함.

-. 일상성은 영성의 노출 형식.

=. ‘영성이 직접적으로 표출되면 그것처럼 거친 것이 없음.

=. 주장이 형식보다 세면 매우 거칠고, 형식이 주장보다 앞서면 사치스러움. 따라서 주 장과 형식의 상생적 관계가 요체임.

-. 교회는 영성이 일상성과 평상성으로 나타나도록 훈련하는 장소가 되어줌.

=.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큰 차이 없음.

3. 인격과 사회(구조)의 관계가 상생적이 되어야 함.

-. ‘인격주의의 오류

=. 한 개인의 성취나 실패의 책임을 개인의 인격에 환원시켜 생각하는 사회적 관성.

=. 기득권자의 성취를 개인의 성취로 환원시킴으로써 기득권이 주는 유익을 은폐함.

=. 범죄자의 죄악을 개인의 죄악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사회적 박탈자의 불이익을 은폐함

=. 개인이 가진 부(富)와 귀(貴)의 사회적 윤리적 성격을 은폐함.

-. ‘사회적 결정론의 오류

=. 개인의 모든 성취와 실패를 사회구조적 측면으로만 환원시켜 이해하는 오류.

=. 자기 책임의 분량을 은폐함.

-. 인격의 변화와 사회구조의 변화 관계는 머리와 모자의 크기 관계가 되어야 바람직함.

=. 인격의 변화가 동반되지 않는 사회구조의 변화는 그 자체 속에 붕괴의 씨앗을 내장.

=.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그 한 예임.

-. 신자와 교회가 상생적 작용을 할 수 있도록 배려되어야 함.

4. 일과 됨됨이의 관계가 상생적이 되어야 함.

-. 일은 그 성취속도가 빠르고 쉽지만, 됨됨이는 그 성취속도가 느리고 어렵다.

=. 따라서 됨됨이로 자신을 표현하기보다는 일의 성취로 자신을 표현하려고 함: 정직한 이력서의 허구성 문제가 이 때문에 나타남.

=. ‘현대인은 위대한 일들을 많이 했지만, 그 됨됨이는 과거인보다 결코 낫지 않음.

-. 일의 속도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됨됨이의 속도로 역사가 이루어짐.

=. 일의 속도와 됨됨이의 속도 사이의 차이만큼 사회적 허구가 내장됨.

-. 됨됨이의 속도로 일하는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

=. 교회의 일과 교회의 됨됨이가 상생적 작용을 할 수 있도록 일의 속도를 늦춰야 함.

=. 일을 하지 않는 교회인가, 일의 속도가 느린 교회인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함.

보론: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교회(목회)와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목회)

- 하나님 나라 중심성과 교회 중심성의 차이점 -

하나님 나라 중심성 교회

교회 중심성 교회

하나님 나라의 여러 가지 활동, 즉 만물에 신경을 씀

교회의 여러 가지 활동, 즉 종교적인 행위와 신령한 것들에만 신경을 씀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

교회를 세우기 위해 때로 의와 자비와 진리를 간과하기도 함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세상으로 내보내어 빛과 소금으로 살게 하느냐에 관심 가짐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느냐에 관심을 갖는 경향성이 있음

어떻게 하면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고민함

세상이 교회를 변화시킬까봐 고민함

이들의 안목이 가난한 자, 고아, 과부와 나그네 된 자 등에 관심 갖게 됨

현상 유지 차원에 머무르며 자신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만 수용하기 쉬움

제 5 주제 : 목회윤리의 실천 원리(1)

-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에 참여하는 목회 -

Ⅰ. 예수 사역의 핵심 주제: 하나님 나라

1. 예수 사역에 대한 성경의 묘사

-. 사역의 시작: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

=. 천국 즉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심.

-. 사역에 대한 묘사: 예수께서 ......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마 4:23)

-. 부활 후, 사역에 대한 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심”(행 1:3)

2 세상 나라와 대비되는 하나님 나라

-. 하나님 나라가 지리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다른 사회와 격리되어 있는 것이 아님.

=. 도피주의나 현실도피 사상은 하나님 나라 사상과 전혀 상관 없음.

-. 하나님 나라는 새로운 규칙이 만들어진 운동 경기장과 같다.

=. 두 개의 사다리가 서로 거꾸로 놓인 것: 하나는 상방지향, 다른 하나는 하방지향.

-.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현대 상황에 맞게 재해석되어 오늘에 적용 가능.

=. 하나님 나라는 이런 점에서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서 매우 큰 권위를 가짐.

*. 복음은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모든 윤리 문제에 대해 요리책 같은 메뉴 구성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아님.

=. 그러나 인생에서 꼭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중요한 답을 제시.

3. 하나님 나라의 정의

-. 정의 내리기가 매우 어려움. 많은 의미가 숨어 있어서.

-.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다스림, 혹은 통치를 나타냄.

=.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의 지배, 권위 그리고 권력을 나타냄.

-. 하나님 나라는 아주 역동적이어서 항상 되어가고, 퍼져 나가고, 자라감.

=. 하나님이 계신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행위를 의미함.

-.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계신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행위를 가리킴.

-.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하나님의 권위 아래 두는 모든 곳, 모든 시간에 나타남.

-. ‘나라라는 개념에는 집단적인 질서의 개념이 들어 있음.

=. 즉 개인의 마음만을 의미할 수 없음.

-. 하나님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것임.

=. 구성권, 시민권, 충성, 그리고 신분 개념이 포함됨.

-. 하나님 나라는 개인이 선택하는 것

=. 개인은 하나님 나라를 섬길 수도 있고, 조롱할 수도 있다.

=. 하나님 나라는 임의집단(aggregate)이 아니라 의식집단(collectivity)임.

=. 그들의 마음과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하나님의 다스림에 드린 사람들의 네트워크.

=. 하나님께서 그 마음과 사회적 관계를 모두 다스릴 때 그 나라가 실현된다.

=. 하나님의 다스림은 왕과 시민을 함께 엮어줌으로써 관계의 망을 형성함.

-.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파악하기 시작함.

=. 예수의 삶은 하나님의 마지막이고도 분명한 말씀.

=.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목소리는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분명한 어조로 전해짐.

=.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오래된 관습과 가치, 관념을 깨는 새로운 질서라고 말씀하심.

=. 우리는 사회의 가치와 신념과 규칙들을 우리 마음 속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임. 대안을 생각하지 않음.

Ⅱ. 목회: 하나님 나라를 보고, 그것에 집중하는 것

1. 하나님 나라를 참된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목회의 시작.

-. 세상의 현실에서 하나님 나라의 현실로 전환하는 데서 목회는 시작됨.

-. 일반 신자에게는 이것이 회개인데, 목회 역시 이런 과정이 필요함.

2. 선행(先行)하는 하나님 나라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 목회는 은혜에 동참하는 것.

-.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만든 것이거나, 우리의 요청에 의해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임한 것임.

3.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성격이 목회의 내용을 구성하게 됨.

-.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 구성 방식, 운영 원리 등이 목회의 구체적 방식이 됨.

4. 목회 철학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예수 안에서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보고 그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면서 그 나라의 특성을 체득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함.

Ⅲ. 바울의 모범

고전 15장 10절: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2. 고후 4장 1-2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제 6 주제 : 목회윤리의 실천 원리(2)

- 하나님 나라에 부합하는 됨됨이를 키우는 목회 -

Ⅰ. 팔복에 대한 개략적 이해

1. 팔복의 성격 이해

-.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데서 환영받는 사람의 됨됨이(특성)가 어떠한지를 보여줌.

=.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님.

=.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게 된 것임.

=. 팔복에 언급된 유형의 사람들은 그들이 특별히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복이 있는 것임.

-.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시연하고 지향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팔복에 나오는 유형의 사람들이 그 교회 안에서 귀하게 여겨지고, 발언권이 강한가를 살펴보면 됨.

-. 팔복에 나오는 유형의 사람들은 오늘날 세상에서는 결코 환영받지 못함.

2. 팔복의 구성해석목회윤리에의 적용 방식

1) 각 절마다 복이 있는 자의 특성이 앞부분에 나오고, 복의 이유 또는 내용이 뒷부분에 나옴.

-. 팔복을 이야기할 때 원문에 따르면 각 구절의 후반부에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가 붙어 있어서 그러한 자가 왜 복이 있는지를 설명한다.

-. ‘복이 있는 자의 특성은 세상적 기준으로 보자면 별로 매력이 없는 자의 특성임.

=. 세상에서 환영받는 사람들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보다는 자의식으로 충만하고, 성취욕과 야심이 가득한 사람들임.

=. 회사 면접에서 환영받는 사람들과 팔복에서 언급된 사람들을 비교해 보라.

-. ‘복의 내용역시 인간적 성정으로 볼 때 그리 만족스러운 것이 못됨.

=. 팔복에서 제시된 복의 내용현세적 복즉 건강의 복, 재물의 복, 자식의 복, 사업의 복 등과는 거리가 멀다.

-. 따라서 팔복은 가르쳐지고 명령되어야 할 것임.

2) ‘복의 내용하나님 나라또는 교회의 특징적 풍토로 이해될 수 있음.

-.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보여줌.

-. 따라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당연히 이 특징적 풍토를 가꾸어 나가도록 해야 함.

3) 팔복을 적용할 때 목회자 개인과 교회에 동시적으로 적용될 수 있음.

-. ‘복 있는 자의 특성 8가지를 그리스도인의 특성으로 삼고 적용해야 함.

=.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품성이 복 있는 자의 특성에 맞추어 빚어지고 있는지를 성찰하면서 살아야 함.

=. 목회를 하면 할수록 그러한 품성이 더욱 그윽한 향기를 발하며 내면화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함: 목회 일에 치여서 목회할 경우 그러한 품성을 키우기가 어렵기 때문임.

-. 교회 식구 모두가 자신의 교회에서 복의 8가지 내용을 제대로 누릴 수 있도록 교회 풍토가 형성되고 있는가, 하는 각도에서 자기 교회를 반성해 볼 수 있음.

=. 목회자 입장에서는 자기 교회에서 환영받고, 주도적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팔복에서 복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 사람들인지를 늘 살펴보아야 함.

-.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 사회(세상)에서는 그러한 풍토가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못하지만, 예수님이 머리이시고 주인이신 교회에서는 부족하지만 그러한 풍토가 형성되어 가야하며, 교우들은 교회에서 그러한 풍토의 참 맛을 맛볼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천국의 시식처가 되어야 함.

Ⅱ. ‘심령이 가난한 자’(마 5:3), 가난한 자’(눅 6:20)

1. ‘심령이 가난한 자또는 가난한 자의 의미

-. 심령이 가난한 자든,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든 모두 히브리어 아나윔에서 유래됨.

=. “가난한 자, 압제당하는 자, 힘없는 자, 궁핍한 자등을 의미.

=. 로버트 귈리히: 유대교에서 가난한 자란 절망적인 필요(사회, 경제적인 요소) 가운데 있는 이들을 말한다. 그들이 지닌 무력함은 하나님과의 의존적인 관계로 그들을 이끌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고, 그들의 정당성을 입증해 주는 분으로 여겨졌다..... 마태가 말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사회, 종교적 상황에서 모욕과 거절로 고난을 당하면서 빈손으로 자신들의 희망과 구원이신 하나님만을 섬길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이들이다.

-. 심령이 가난한 자든 경제적으로 빈곤한 자든, 그들의 상태가 윤리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복이 있는 것이다.

=. 도덕적 성품이 자기 의가 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됨.

=.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깊이 염려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성경은 자주 언급.

2. 두 가지 방향에서 조명해 본 마 5:3절의 의미 이해 :

1) 본문에 대한 정방향적 이해: 나로(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 이제 영적인 측면에서 무일푼인 자들, 곧 영적으로 파산한 가난하고 모자란 자, 영적인 거지, 종교와는 전혀 거리가 먼 자들이 복이 있도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어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2) 본문에 대한 역방향적 이해: 나로(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지만, 지금 소위 영적인 엘리트들에게는 결코 복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부요에 눈 멀어, 결코 천국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3. 성경적 사례

1) 심령이 가난한 자의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제시함(눅 18:15-17)

-. 당대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한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한 아웃사이더.

-. ‘종교적 선입견이 없었음.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자기 식으로 각색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임.

2)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의 경우(눅 23:39-43)

-.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행악자 중 한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태도를 보여주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심령이 가난하지 못한 자의 태도를 보여준다.

=. 심령이 가난한 행악자는 예수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자기를 성찰한 후, 예수님께 은총을 구함.

=.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행악자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를 자기 중심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

-. 똑같이 극한적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한 사람은 심령이 부자로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심령이 가난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 심령의 가난 문제는 외형적 처지에 직접적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음

3) 반면교사로서 부자 관리’(눅 18:18-25)

-.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대표적인 사람으로 부자 관리를 들 수 있다.

=. 당대 종교계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던 모든 행습을 어려서부터 다 지킨사람으로서 영적 자부심이 대단했던 인물.

=. 자신의 기득권--자기 재물--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서 심령이 가난해지기가 어려운 사람

-. 당대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도 심령이 가난한 자에 해당하지 않음.

Ⅲ. 애통하는 자(마 5:4절)

1. ‘애통하는 자의 의미

-. ‘애통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펜세오인데, 히브리어 히트아벨에서 유래된 말.

=. 매우 비통해하는 것과 관계됨.

=. 죽은 사람을 위해 애곡할 때 사용되는 단어.

-. ‘가난한 자에 대한 설명이 객관적 상태와 관계된다면, 애통하는 자에 대한 설명은 상대적으로 정서적 상태또는 주관적 태도와 관계가 있다.

2. 두 가지 방향에서 조명해 본 마 5:4절의 의미 이해 :

1) 본문에 대한 정방향적 이해: 나로(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 이제 매우 비통해하는 자는 복되다. 왜냐하면, 그/그녀는 참된 위로(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본문에 대한 역방향적 이해: 나로(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지만, 지금 소위 자기 잘 난 맛에 삶을 즐기는 자들에게는 결코 복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참된 위로를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3. 성경적 사례

1)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함으로써 갖게 된 애통함

-. 롬 7:24절에 나오는 바울의 경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눅 18:9-14절에 나오는 세리의 경우: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 마 26:75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경우: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2) 다른 사람의 처지나 어려움 때문에 애통하는 경우

-. 예수님의 경우:

=. 막 6:34: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김.

=. 요 11:33-44절: 죽은 나사로 때문에 마리아와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애통히 여김.

-. 시편 기자의 경우: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시 119:136)

Ⅳ. ‘온유한 자’(마 5:5)

1. ‘온유한 자의 의미

-. 온유는 헬라어 프라오스를 히브리어 아나브를 번역한 것임.

=. 이 두 단어들은 온유라고만 번역되지 않고, 겸비’ ‘겸손등으로도 번역됨.

=. 구약에서 아나브사랑과 순종하는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를 잘 받아들이는 사람, 어떠한 일이든지 분개하거나 불평하지 않으며 삶이 가져다주는 모든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 하나님의 방법이 항상 최선의 길인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됨.

=. 헬라어 프라오스길들여지고 집에서 길러지는, 그래서 다루기 쉽게 된 동물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그것은 힘의 부드러움이다. 따라서 프라오스한 사람은 연약함, 무관심, 공포, 나태나 비굴에서 유래된 부드러움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다. 인의 힘을 가졌지만, 그것을 거인처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의 부드러움이다. 엄격하고 철저하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의 덕목이 프라오스즉 온유이다.

-. 결국, 온유의 의미는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부드러움을 드러내는 사람의 성품이라고 볼 수 있다.

2. 두 가지 방향에서 조명해 본 마 5:5절의 의미 이해 :

1) 본문에 대한 정방향적 이해: 나로(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통치)가 시작되었다. 이제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여러 처지와 환경, 사건 등을 대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복하기 위해, 타인의 세력이나 권세 앞에 당당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권리나 힘을 포기하고 그들을 부드럽게 대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는 곳에서 자기 터전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본문에 대한 역방향적 이해: 나로(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 이제 자기 지혜와 힘, 권세와 지위를 휘두르면서 다른 사람에게 강포한 태도를 취하며 자기 터전을 지켜왔던 사람들은 복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는 곳에서 그들은 더 이상 자기 터전을 갖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3. 성경적 사례

1) 예수님의 경우(마 11:28-29)

-. 하나님의 뜻에 전적인 순복: 아들의 지위를 버리고 인간이 되셨을 뿐 아니라, 낮은 자로 거하심.

-. 강한 자에게 비굴하지 않음: 로마 권력이나 당대 유대 사회의 권세자들 앞에서 결코 겁먹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십자가까지도 넉넉히 수용할 정도로 강하심.

-. 약자나 죄인들 앞에서 한 없이 부드러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할 정도.

=. 당대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 즉 문둥병자, 여자, 창녀, 어린 아이 등을 부드럽게 수용하실 뿐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 나라에서 매우 소중한 사람으로 선언하심.

=.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 12:20; 사 42:3)

2) 모세의 경우(민 12:3)

-. 하나님의 뜻에 전적인 순복: 애굽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라는 소명을 기꺼이 받아들임.

=. 모세가 하나님의 소명을 수행하면서, 애굽의 왕자였던 자신의 과거 신분을 전혀 이용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방식,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만 행했다는 것은, 인간의 일반적인 성정으로 볼 때 매우 특이할 정도로 순종적인 태도이다.

-. 강한 자에게 비굴하지 않음: 애굽 왕 바로의 권세 앞에서 당당함.

-. 하나님께서 치리를 명하신 경우나 하나님의 뜻에 명백하게 어그러진 경우 외에는 죄인들이나 자신에 대한 반대자를 부드럽게 대함.

=. 자신을 비난한 미리암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문둥병에 걸렸을 때 미리암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여 회복케 함.(민 12:1-3)

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마 5:6)

1.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의미

-. ‘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수네인데, 이 단어는 히브리어 체데크와 관계됨.

=. ‘디카이오수네습관이나 풍습을 나타내는 디케라는 말에서 전화된 것임.

=. ‘체데크디카이오수네는 심판의 의미 즉 인간의 죄를 벌하신다는 의미를 갖는 복적 정의응보적 정의개념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비성경적임.

=. 사회적 사용례에서 정의는 대체로 긍정적 측면(사회적 가치의 분배와 관련된 측면)과 부정적 측면(범한 죄에 대한 형벌과 관련된 측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체데크디카이오수네는 주로 긍정적 측면과 관련하여 사용됨.

=. ‘체데크가 선물, 풍성함, 관대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음.

=. 바울은 하나님의 디카이오수네가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오며, 또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구원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는 창조적인 정의를 의미함.

=.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할 때 바울이 주로 사용한 용어는 디카이오수네라기보다는 나님의 진노를 뜻하는 하나님의 오르게이다.

-. 결국,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는 것은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의를 간절히 기다리는 자를 말하는 것임.

=.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의인으로 변혁시키는 변혁적 정의,인간에게 인간다운 삶을 회복하시는 회복적 정의,새 삶을 창조하는 창조적 정의를 의미함.

2. 두 가지 방향에서 조명해 본 마 5:6절의 의미 이해

1) 본문에 대한 정방향적 이해: 나로(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 이제 하나님의 정의--죄인을 의인으로 변혁시키는 변혁적 정의,인간에게 인간다운 삶을 회복하시는 회복적 정의,새 삶을 창조하는 창조적 정의’--를 간절히 기다리던 자에게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짐으로써 그들에게 실제적 필요가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2) 본문에 대한 역방향적 이해: 나로(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지만, 지금 소위 자신들의 정의--응보적 정의 또는 보복적 정의--에 도취해 있던 자들에게는 결코 복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들의 정의에 입각하여 누렸던 모든 기득권들이 하나님의 정의에 의해 모두 재편될 것이기 때문이다.

3. 성경적 사례

1) 예수님의 경우

-. 눅 4:18-19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 시작을 알리면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됨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하는 것과 연결시켜 말씀하심.

=. 이 말씀은 사 61:1-2절을 인용한 것인데, 이때 예수님은 사 61:2절에 언급된 보복의 날은 의도적으로 빼고 인용하심.

=. 예수님의 사역은 보복적 정의를 수립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줌.

-. 침례요한의 제자들이 오실 그이가 당신이냐고 물을 때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회복적 정의, 변혁적 정의의 특성을 보여주심(눅 7:22)

2) 시편 기자가 언급한 하나님의 정의로운 사역의 경우

-. “여호와는 ......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 나그네를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을 굽게 하시는도다.”(시 146:6-9)

3) 예레미야가 언급한 정의와 공의의 특성

-.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렘 22:3)

Ⅵ. ‘긍휼히 여기는 자’(마 5:7)

1. ‘긍휼히 여기는 자의 의미

-. ‘긍휼을 칭하는 헬라어 엘레오스은혜를 칭하는 카리스와는 다르다.

=. “카리스는 죄와 범죄와 관련되어, 죄에 대한 용서가 은혜를 의미함.

=. “엘레오스는 죄의 결과인 고통과 비참함과 고난과 관련된 위안을 의미함.

=. “카리스는 깨끗케 하고 원상으로 복구시키는 데 초점을 두었다면, 엘레오스는 치료하고, 고치고, 도움을 주는 데 초점을 맞춤.

-. 우리는 하나님의 카리스에 의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엘레오스에 의해 죄의 결과로부터 치료를 받고 고침을 받는다.

=. 하나님께로부터 카리스엘레오스를 받은 사람이 그 은혜와 긍휼에 대한 반응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엘레오스를 베풀게 되면,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속에서 살게 되기 때문이다.

2. 두 가지 방향에서 조명해 본 마 5:7절의 의미 이해

1) 본문에 대한 정방향적 이해: 나로(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 이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자비를 베풀고, 은혜를 베풀며--살던 사람에게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기 때문이다.

2) 본문에 대한 역방향적 이해: 나로(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지만, 자기 울타리 속에서 자기 삶만 탐닉하거나, 잘못한 사람에게 인과응보적 태도를 취하면서 긍휼을 베풀지 않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복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속한 모든 사람들로부터 긍휼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성경적 사례

1)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

-. 요 8:3-11절: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돌로 치려고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지혜롭게 물리치고, 예수님도 그녀의 죄에 대해 긍휼을 베품.

=. 11절: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2) 반면교사로서 바리새인과 제자들의 태도

-. 요 9:1-12절: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를 묻는 제자들의 태도는 긍휼히 여기는태도와는 상반된 것임.

-. 요 9:13-34절: 맹인이 눈 뜬 것을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안식일 준수 법을 근거로 예수와 눈 뜬 맹인을 박해하려는 바리새인의 태도는 긍휼히 여기는 태도와 상반된 것임.

3) 나사로에게 생전에 긍휼을 베풀지 않은 부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함.

-. 눅 16:24-25절: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Ⅶ. 마음이 청결한 자(마 5:8절)

1. ‘마음이 청결한 자의 의미

-. ‘마음은 헬라어로는 카르디아히브리어로는 레브또는 레바브로 표현되는데, 일차적으로는 신체 기관인 심장을 표시함.

=. 그것이 전의(轉義)되어서 우리 마음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을 표시하는 말로 쓰임.

-. “청결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카사로스임.

=. “카사로스의 의미는 순결함, 불순물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함.

=. 구약에서 카사로스는 주로 제의적, 의식적 준수와 관련하여 사용됨.

=. 예수님은 마음카사로스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선언하심.

=. 마음에 불순물이 들어 있지 않고, 순수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심.

2. 두 가지 방향에서 조명해 본 마 5:8절의 의미

1) 본문에 대한 정방향적 이해: 나로(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통치)가 시작되었다. 이제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 사랑하며 사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2) 본문에 대한 역방향적 이해: 나로(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지만, 두 마음을 품으며--다른 목적을 위해 나를 이용할 생각으로--나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복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아서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3. 성경적 사례

1) 시편 기자의 고백

-. 시 24:3절: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2) 야고보의 권면

-. 약 4:8절: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3) 반면교사로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태도

-. 마 23:25-28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Ⅷ. 화평하게 하는 자(마 5:9)

1. ‘화평하게 하는 자의 의미

-. ‘화평의 헬라어는 에이레네인데, 이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샬롬으로 두 가지 의미가 함께 들어 있음.

=. 첫째, 완전하고 모자람이 없는 행복의 상태를 의미(평화의 내용을 암시해줌)

=. 둘째, 올바른 관계를 의미함(평화의 범주를 암시해줌)

-. “화평케 하는 자라는 말의 의미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자라는 의미.

=. “평화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자를 의미함.

=. “화평케 하는 자는 평화를 만들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평화애호가와는 다르다.

=. “화평케 하는 자는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어려움, 불쾌감, 인기하락, 고통 등을 기꺼이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의미함. 즉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직면함으로써 평화를 얻어내는 사람임.

2. 두 가지 방향에서 조명해 본 마 5:9절의 의미

1) 본문에 대한 정방향적 이해: 나로(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통치)가 시작되었다. 이제 평화를 일구기 위해--만난을 무릅쓰며--노력하는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닮은 자들(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본문에 대한 역방향적 이해: 나로(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지만, 평화를 일구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자에게는 결코 복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닮은 자들이라고 인정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3. 성경의 사례

1) 예수님 사역의 경우

-. 엡 2:15-16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 인류(유대인과 이방인)가 서로 평화를 이루고, 그 인류가 다시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

-. 골 1:20절: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 만물을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

2) 바울의 권면

-. 고후 5:18-19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 롬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Ⅸ. 의(예수)를 위해 박해받은 자(마 5:10-12절)

1. ‘의를 위해 박해받은 자의 의미

-. 의 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인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그가 지향점이 분명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을 의미함.(의 의미는 위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 대해 설명한 것을 참조)

=. ‘그리스도를 교차적으로 사용하고 있음.

=. 나의 부족함이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

=. 지향하는 방향이 있는 사람에게는 역풍이 있기 마련임을 보여줌.

-. 부화뇌동하거나 무골호인의 삶을 사는 자와는 반대되는 개념임.

=.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같이 하였느니라.”(눅 6:26절)

=. 거짓 선지자(거짓 신자)와 참 선지자(참 신자)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남.

2. 두 가지 방향에서 조명해 본 마 5:10-12절의 의미

1) 본문에 대한 정방향적 이해: 나로(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의--죄인을 의인으로 변혁시키는 변혁적 정의,인간에게 인간다운 삶을 회복하시는 회복적 정의,새 삶을 창조하는 창조적 정의’--를 실현하려고 애쓰다가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큰 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본문에 대한 역방향적 이해: 나로(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지만, 예수님께서 받으신 박해--즉 하나님의 의를 이 땅에 이루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받을 수밖에 없는 박해--를 받지 않고 살았던 사람에게는 아무런 복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며, 설혹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에서 상이 결코 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성경의 사례(박해 받는 것의 당연함에 대한 교훈)

1) 예수님의 가르침

-. 요 15:18-20절: “......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 눅 6:26절: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같이 하였느니라.

2) 바울의 가르침

-. 빌 1:29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 베드로의 가르침

-. 벧전 4:13, 14절: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제 7 주제 : 목회윤리의 실천 원리(3)

- 목회자의 윤리적 실천 내용 -

1. 평화를 창출하는 데 모범(마 5:21-26)

2. 성윤리를 지키는 데 모범(마 5:27-30)

3. 결혼 생활에서의 모범(마 5:31-32)

4. 진실을 말하는 데 모범(마 5:33-37)

5. 비폭력적 저항을 실천하는 데 모범(마 5:38-42)

6. 원수를 사랑하는 데 모범(마 5:43-48)

7. 의(구제, 기도, 금식)를 은밀히 행하는 데 모범(마 6:1-18)

8.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데 모범(마 6:19-34)

9. 자기를 성찰하는 데 모범(마 7:1-5)

10. 세상(권세)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 모범(마 7:6-12)

11. 순종의 열매를 맺는 데 모범(마 7:13-27)

제 8 주제 : 목회윤리의 실천 원리(4)

- 목회자의 윤리적 실천 방법 -

Ⅰ. 참된 현실로 우리에게 다가온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인식

-. 세상이 강제하는 환상대신, 하나님의 대안 사회를 볼 줄 아는 시각.

Ⅱ. 하나님 나라와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교회의 의미에 대한 확신

-. 빛과 소금으로서의 교회(마 5:13-16)

Ⅲ. 구약과 신약에 대한 통전적 이해에 기초한 실천 방식 모색

-.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려고 오신 예수님 사역에 기초한 성경 이해(마 5:17-20)

Ⅳ. 세상의 관행과 자신의 약점에 대한 정직한 인식

Ⅴ. 예수님이 제시한 방식에 대한 실천적이고 실제적인 이해

Ⅵ.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있어서 주도적 자세를 견지.

-. 상대나 상황에 대한 반응적 태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며 솔선수범하는 자세

제 9 주제: 목회윤리 문제 실제(1) : 목회자의 설교 윤리

I. 이 주제 공부의 목적

1. 설교는 목회 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내용 중 하나이다. 설교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윤 리적 문제에는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는 기회를 갖는다.

2. 설교 윤리의 일반적 쟁점들을 간략히 언급한 후, 설교 비평과 관련한 논의를 살펴보 고, 각자가 자신의 입장에 맞게 설교 윤리를 정립하는 기회를 갖는다.

Ⅱ. 설교 윤리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 유형 세 가지

1. 설교 준비 과정과 관련하여

1) 설교 표절의 문제

-. 다른 사람의 설교내용을 인용할 때나, 그대로 옮길 때, 그 설교의 출처와 원 설교 자를 교인들에게 말한 후 설교하는가?

2) ‘표적 설교의 문제

-. 특정한 사람을 의도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아닌가?

-. 특정한 사업이나 목사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아닌가?

3) 설교 내용의 정확성 문제

-. 본문 해석에서 지나친 자의성은 없는가?

-. 예화를 선정할 때 설교 대지와 일치하는가?

-. 어떤 사실을 예화로 들 때 사실확인을 충분히 한 것인가?

4) 설교에 담겨 있는 세계관 문제

-. 설교 표현에서는 성경적 용어들이 사용되지만, 담겨 있는 내용에는 세속적 가치관 이 담겨 있지 않는가?

2. 설교 전달 과정과 관련하여

1) 설교 때 조작된 영성을 과시하는 문제

-. 충분히 자기화하지 않은 가성(假聲)이나 설교 스타일 흉내내기는 없는가?

-. ‘성령의 임재와는 별도로 조작된 회중 분위기를 만들고 있진 않는가?

2) 설교 때 조작된 권위를 과시하는 문제

-. 하나님의 이름으로 위악적(僞惡的) 겁주기를 조장하지 않는가?

-. 근거 없는 저주성 발언을 하진 않는가?

3) 설교 때 부주의하게 발언하는 문제

-. 하나님을 드러내기보다 자기 과시하는 경우는 없는가?

-. 교우들을 상담할 때 들었던 교우의 사적인 이야기를 말하는 경우는 없는가?

-. 특정 교우를 흠집 내는 발언을 하는 경우는 없는가?

3. 설교한 후와 관련하여 : 설교 비평을 수용하는가, 하는 문제

Ⅲ. ‘설교 비평에 대한 찬반론

1. 설교 비평을 찬성하는 측의 논거

1) 설교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한 방법이다.

-. ‘하나님의 말씀은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순종의 대상일 뿐이다.

-.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화되어서는 안 됨.

=.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하려는 것은 기본적으로 설교자 무오론임.

=. 따라서 설교에 논평이나 비평을 가할 수 있다.

-. 설교는 또한 성경에 나타나는 말씀 선포’(케리그마)와도 구별되어야 한다.

=. 설교에는 설교자의 주관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간다.

2) 성경은 설교 비평을 권하는 암시를 주고 있다.

-. 베뢰아 사람처럼 말씀을 받고 그것이 그러한가 하고 날마다 상고하는자세를 아 름답게 묘사함.(행 17:11)

3) 설교가 끼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설교로 인한 악영향을 견제할 필요가 있다.

-. 한국 교회에서 설교는 신자들의 신앙형성, 성경관, 세계관, 윤리관 등에 절대적 영 향을 미침.

-. 선교 또는 전도라는 이름으로 대중 매체를 통해 급속히 넓게 확산된다.

4) 설교 비평은 설교의 질적 발전에 큰 역할을 한다.

-. 모든 비평이 갖는 교정 기능 때문.

-. 설교자를 각성시킴.

-. 설교 비평의 축적은 미래의 설교자를 교육하는 데 큰 자산이 됨.

5) 설교 비평은 성경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된다.

-. 설교 본문의 원뜻을 이해하고 순종하기보다는, 설교를 들을 때 인상적이었던 말을 기억하고 그것으로 자기 삶을 맞추려는 경향이 많은 현실에 교정 역할이 가능.

2. 설교 비평을 회의적으로 보는 측의 논거

1) 설교는 일반 강의와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들려주는 것이 일차적 임무.

-. 설교를 비평하다가 자칫 벼룩이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울 잘못을 범할 수 있다.

=. 비평거리를 찾기 위해 말단 지엽적인 것에 집착하다가 말씀을 놓치기 쉽다.

2) 설교 비평은 설교자나 청중 모두에게 부정적 결과를 낳기 쉽다.

-. 설교자는 자기 설교 비평자를 의식해야 하기 때문에 위축될 수밖에 없다.

-. 청중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려고 하기보다, 비평거리를 찾는 데 마음이 쏠리기 쉽다.

3) 설교 비평자가 자기 주관에 빠져 설교를 비평하기 쉽다.

-. 자신의 이해와 상반된다고 해서 설교 내용을 비판하는 경우.

-. 설교 내용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상치된다고 해서 비판하는 경우.

4) 그 날의 설교는 하나의 주제로 등장하지만, 설교자에게는 지난 설교와 앞으로 전개 될 설교의 주제와 연관성을 맺고 설교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그 날 설교 한 편만 뽑아서 비평한다는 것은 사실상 무리다.

5) 설교는 원칙적으로 국내외의 모든 교회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섬기고 있는 교회를 향해 한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교회가 갖는 문제나 비전의 특수성이 설 교 내용 구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설교가 갖는 이런 특성 때문에 제 삼자가 객관 적 기준(?)을 갖고 비평하는 것은 무리다.

Ⅳ. 건강한 설교 문화를 위한 제안

1. 설교 비평은 그 동안 음성적으로 실시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

-. “설교 참 좋았습니다,” “설교에 은혜 받았습니다,” “나는 어느 목사님의 설교가 참 좋더 라,” “목사님 설교는 참 지루하다,” “듣고 나서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더라,라는 말들 도 일종의 설교 비평에 속한다.

=. “은혜 받았다,” “좋았다라는 긍정적 평만을 듣기를 좋아하고, 부정적 평을 듣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모순된 태도.

=. 이러한 비평의 단점은 그것이 매우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평이라는 데 있음.

=. 좋았으면(싫었으면)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좋았는지(싫었는지)가 규명되지 않음.

=. 결국, 성도들이 자기 입맛에 따라 설교에 대해 좋고 싫음을 판단하는 격임.

-. 목회자 입장에서 설교 평가를 양성화시키려는 적극적 의지가 필요함.

=. 양성화할 경우, 설교 평가의 기준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음.

=. 자기 입맛에 따라 설교를 평가하는 관행을 막을 수 있음.

2. 설교자는 자신이 설교할 때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

-. 말씀 해석, 주제 전개, 예화 설정 등에서 크고 작은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

-. 교인들의 설교 비평(논평)은 그런 오류를 교정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됨.

3. 설교자와 교인은 설교 평을 위한 기준을 기본적 수준에서 합의할 필요가 있음.

-. 교인은 설교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함.

=. 설교 비평은 설교자나 교인이 함께 성경에 좀더 정확하게 순종하기 위한 것임.

-. 설교 비평의 기준은 교회 실정이나 목사님과 교인의 수준에 따라 유연성 있게 정해야.

제 10 주제: 목회윤리 문제 실제(2) : 교회 재정 문제

I. 이 주제 공부의 목적

1) 교회(또는 목회) 윤리 문제가 발생하는 데 재정 문제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이해한다.

2) 한국교계가 교회 재정 문제에 대해 목회 윤리적 접근을 하는 일반적 방법을 살펴본다.

3) 교회 재정 문제를 다루는 통전적이고 살림 지향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Ⅱ. 교회 재정 문제에 대한 통전적 이해

1. 떡(물질 즉 재정)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운영되는 교회

-. 지역 교회는 물질과 말씀으로 운영

=. 물질은 교회 운영과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현실적 요구와 관계됨.

=. 말씀은 교회 운영과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이상적 요구와 관계됨.

-. “현실이 없는 이상의 위험성

=. 교회 운영과 관련하여 물질적 측면을 믿음이라는 명목 아래 너무 쉽게 생각함.

=. “관념적으로 선취된 이상과 그 이상에 도취되어 나타나는 열정을 갖고 교회를 생 각함.

=. 신학생이나, 목회를 막 시작하는 목회자, 목회를 직접 하지 않는 기독 지성인들에 게서 이 현상이 쉽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음.

-. “이상이 없는 현실의 위험성

=. 교회 운영을 위해 요구되는 재정적 필요가 너무 시급해 목회철학이나 목회윤리가 경시되는 경우.

=. 개척 교회를 1-2년 한 목회자, 예배당을 건축한 목회자, 개척한 지 수년이 되었어 도 재정적으로 자립을 하지 못하는 교회의 목회자에게서 쉽게 나타남.

=. 심할 경우, 먹고 살기 위해 목회한다.라는 푸념이 나올 정도가 됨.

-. 교회 재정 윤리는 바로 현실이 없는 이상이나 이상이 없는 현실의 두 가지 위험 성으로부터 교회를 올곧게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2. 교회가 재정을 충족하는 세 가지 방법

-. 첫째, 국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는 경우

=. 기독교 국가가 모든 시민들로부터 종교세를 받아 개별 교회가 필요로 하는 물질 을 충족시켜 주는 방법.

-. 둘째, 교회가 수익사업을 하는 경우 : 자급자족을 하는 경우.

=. 공동체 생활을 하는 교회일 경우 교우들의 헌금이 아니라 노동을 함께 하여 수입 을 얻음.

=. 이 경우, 완전히 자급자족을 하지는 못하고 공동체 밖 사람들의 기부금을 받음.

-. 셋째, 전적으로 교우들의 헌금에 의존하여 교회의 재정적 필요가 채워지는 경우.

=. 대부분의 한국 교회가 이 경우에 해당함.

=. 교회의 재정문제를 목회윤리의 한 주제로 설정한 것도 이 경우를 전제로 함.

3. 교회 재정 수입과 관련된 윤리적 문제 발생의 두 가지 경우

-. 첫째, 교회가 교인들로부터 헌금을 걷는 과정과 관련된 경우.

-. 둘째, 교인들이 세상에서 직업을 갖고 돈을 버는 과정과 관련된 경우.

=. 부정직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교인이 깨끗한 헌금을 할 수 있나?

-. 한국 교계가 헌금의 윤리성 문제를 다룰 때는 주로 첫 번째 경우에 치중됨.

4. 교회 재정 지출과 관련된 윤리적 문제 발생의 두 가지 경우

-. 첫째, 교회 예산과 지출 내역 결정 과정과 관련된 경우.

=. 교회 구성원 사이의 충분한 논의와 합의, 그리고 투명 지출인가, 하는 문제.

-. 둘째, 지출 내용과 관련된 경우.

=. 지출이 교회 본래의 목적에 부합하는가, 하는 문제.

-. 한국 교계의 재정 지출과 관련한 윤리적 문제는 주로 두 번째 내용에 치중됨.

Ⅲ. 교회 재정 윤리에 대한 한국 교계의 일반적 문제 제기

1. 교회 재정 수입과 관련하여 : 헌금 관행에 대한 문제 제기

헌금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 헌금의 액수와 믿음의 정도가 연결된다.

성경적인 근거가 빈약한 방법으로 십일조를 강조한다.

헌금자 명단과 헌금액을 발표한다.

-. 비신사적인 방법이다. 사람의 칭찬을 받으면 하나님의 상을 받을 수 없다.

헌금(액수)과 복(세속적인 복)을 연관시킨다.

헌금 액수를 헌금하는 정성보다 더 중요시한다.

헌금을 위한 부흥회를 한다.

-. 악습이다. 사람을 흥분시켜서 헌금하도록 만든다.

-. 이럴 경우 헌금을 한 뒤에 후회를 하고 걱정을 하게 된다. 시험에 들기도 한다.

2. 교회 재정 지출과 관련하여

재정 사용 결정의 비민주성.

-. 민주주의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권력의 분산 효과를 낳 는다. 민주주의를 위해선 감시 감독 견제장치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종국에는 목 사를 부담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보호하는 것이다.

선교 구제 사회봉사보다는 교회 자체 운영에 주로 지출된다.

교역자 사례의 불평등.

-. 담임목사와 부교역자, 큰 교회와 작은 교회의 사례 차이가 너무 크다.

-. 각자의 필요에 따라서 사례를 책정해야 한다. 기본급은 똑같되 부양해야 하는 가 족 수에 따라서 수당을 차등 지급하는 방법도 있다.

건물 식사 장식 차량에 지나치게 사치하고 낭비한다.

예산을 편성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옳은가?

Ⅳ. 최근의 주요 쟁점들 두 가지

1.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충분히 성경적인가?

-. 십일조는 여전히 유효하나, 강제성은 결여되었다는 견해.

-. 십일조는 신약시대에 완전히 폐지되었기 때문에 전혀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견해.

-. 십일조는 만고불변의 진리이므로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견해

2. 목회자 사례비(생활비)는 어느 정도 선에서 책정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 서울 높은뜻 숭의 교회, 김동호 목사님의 사례비 논쟁의 경우.

-. 목회자 사례비인가, 생계 유지비인가?

Ⅴ. 결론 : 교회 재정의 윤리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신학생들이 준비해야 할 것

1. 검소하게 살면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방법을 익혀야 함.

-. 목회자가 이 세상에서 참된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방법은 검박하되 기쁨과 생명이 넘치는 삶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

=. 단순히 금욕주의적 의가 아니라, 기쁘게검박한 삶을 사는 방법을 익혀야.

2.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 속에서 성경적 교회상을 구축해야 함.

-. 외화내빈의 교회는 결코 성경적 교회가 아님.

-. 예배당 없는 교회의 가능성 모색.

-. ‘적게 쓰고, 적게 모으는 교회상에 대한 모색.

-. 교회 일보다는 교회 됨됨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자세.

=. 교회는 주님의 일로 바빠야(busy)하지만, 사업(business)으로 바빠서는 안됨.

3. ‘자비량 목회의 방법을 창조적으로 모색하는 것도 도움이 됨.

-. 공동목회를 하면서, 목사가 파트 타임으로 일하는 방법.

-. 사모가 직장을 갖는 방법.

제 11 주제: 목회윤리 문제 실제(3) : 윤리적 의사 결정의 문제

- 행 15:1-29절에 나타난 예루살렘 회의가 주는 교훈 -

Ⅰ. 교회 회의는 성령의 도구임 (행 15:28)

1. 행 15: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 행 15:1-27절 사이에 성령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이런 결정을 내리게 해준 것처럼 묘사된 구절은 하나도 없음.

=. ‘성령의 역사라고 볼 만한 일이 일어난 것도 없음.

=. 오직 교회가 실행한 올바른 회의의 결과로 내린 결정을 성령과 우리라는 말로 표현한 것임.

-.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의 회의를 통해 성령의 인도를 받았음을 보여줌.

2. ‘교회의 회의성령의 인도사이의 관계 설정 유형들

1) 초자연적 성령의 인도교회의 회의보다 늘 우위에 두는 유형.

-. 교회 공동체가 결정해야 할 특정 문제에 대해서 꿈이나 환상을 본다거나, 하나님의 직접적 음성을 들었을 경우, 그것을 교회 회의보다 늘 존중하는 유형.

=. 이런 경우에는 교회의 회의는 초자연적 성령의 인도를 추인하는 하나의 요식 행위에 불과하게 됨.

-. 이 유형의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

=. 첫째, 서로 다른 인도를 이야기 하는 사람이 여럿일 경우, 누가받은 성령의 접적 인도를 우위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

=. 둘째, 정경으로 완성된 성경의 권위보다 한 개인의 주관적 체험이나 확신을 더 우위에 둘 위험성이 내장되어 있음.

=. 셋째, 성경에서 중요시 여기는 믿음 공동체 회의의 결정이나 판단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음.

*. 예: 예루살렘 회의(행 15:1-29), 바울이 받은 마게도냐의 환상은 함께 한 공동체의 합의를 거침(행 16:9-10절: 우리가 ...... 인정함이라’), 교회가 매면 매이고, 풀면 풀릴 것(마 18:18).

2) ‘성령의 인도를 경시하면서 교회의 회의그 자체를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유형.

-. ‘교회의 회의를 절대화하는 오류를 범함.

=. ‘교회의 회의가 성령의 인도를 거스를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경시함.

=. 다수결의 원칙이 성령의 인도를 벗어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3) ‘성령의 인도에 부합된 방식으로 교회의 회의를 준행하려고 노력하는 유형.

-. ‘성령의 인도는 내용이라고 한다면, 교회의 회의는 그 내용을 담고 창출하는 틀 또는 형식임을 인정함.

=. 그 결과, 교회의 회의성령의 인도를 동시에 중요하게 여기는 방식.

-. 내용 없는 형식도 문제이지만, 형식 없는 내용 역시 문제임.

=. 형식 없는 내용은 거칠고, 내용 없는 형식은 사치스럽다는 점을 인식.

=. 형식은 내용을 보듬고, 내용은 형식을 빛나게 하는 관계가 중요함.

-. 교회의 회의는 성령의 인도를 보듬고, 성령의 인도는 교회의 회의를 빛나게 하는 역할을 하도록 인도해야 함.

Ⅱ. 성경적 교회 회의의 조건들

-. ‘성령의 인도를 보듬는 교회 회의의 조건들

1. ‘논쟁을 두려워하거나 기피하지 않는 교회의 풍토가 필요함(2절, 7절)

-. 안디옥 교회에서 다툼과 변론이 있었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역시 많은 변론이 있었음.

=. ‘논쟁이 있었기에 회의가 존재하게 됨.

-. ‘논쟁이나 의견의 차이그 자체는 중립적인 것이지, 선악의 대상이 아님.

=. 중요한 것은 논쟁을 긍정적으로 관리해내는가에 있다.

=. 논쟁을 부정적으로 관리할 경우, 분쟁이나 획일화로 전락되기 쉬움.

-. 논쟁거리 때문에 교회가 분열로 치닫는 분쟁에 휩싸이는 것도 위험하지만, 불만이 잠재된 획일화에 휩싸이는 것도 똑같이 위험하다.

=. 결국, 교회의 회의는 교회가 분열로 치닫는 분쟁이나 불만이 잠재된 획일화휩싸이는 것을 막기 위한 하나님 또는 성령님의 도구이다.

2. 공평한 토론의 장 또는 토론 시간이 충분히 제공되어야 함(7절)

-.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 공동번역: 오랜 토론 끝에

=. 표준새번역: 토론을 많이 한 뒤에

=. A. T. 로버트슨: 유대주의자들은 그들의 모든 불평과 반대를 공개적으로 내어놓을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가졌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충분한 시간을 가졌으며, 토의를 가로막거나 회의에서 의안을 서둘러 통과시키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다.” (「신약원어대해설」)

-. 성령의 인도를 보듬는 회의가 되기 위해서는 주류의 입장뿐 아니라 비주류의 입장도 충분히 개진될 수 있도록 배려되어야 함.

=. 그렇지 않을 경우, 회의로 문제를 봉합하는 것으로 끝나기 쉽다.

=. 그 결과--회의로 문제를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분열로 치닫는 분쟁이나 불만이 잠재된 획일화로 회의가 끝날 가능성이 많다.

3. 교회 회의의 쟁점과 관련하여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대해 진솔하게 말할 수 있는 풍토가 제공되어야 함.(7-21절)

-. 베드로의 경우(7-11절): 이방인들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대해 간증.

-. 바나바와 바울의 경우(12절): 하나님께서 이방인 주에서 행하신 표적과 이적에 대한 간증.

4.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대한 간증을 성경적으로 확증하는 대화가 있어야 함. (13-21절)

-. 야고보는 베드로 및 바나바와 바울의 간증의 내용을 암 9:11-12절 말씀을 통해 성경적으로 확증함.

=.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확증되지 않는 역사는 교회를 매우 혼동에 빠트릴 수 있음.

Ⅲ. 교회 회의 때에 특별히 조심해야 할 태도

1. 교회에서의 자기 신분에 의존하여 교회 회의에서 더 큰 발언권을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됨: 베드로의 경우(7-11절)

-. 믿음 공동체 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음.

=.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의 수제자였기 때문에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음.

-. 베드로의 주장은 이방인이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는가 하는 당시 쟁점에 가장 충실한 내용의 말을 펼침.

=.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노라.

2. 성령님께서 과거에 자신을 얼마나 크게 사용하였는지에 의존하여 교회 회의에서 더 큰 발언권을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됨: 바나바와 바울의 경우(12절)

-. 바나바와 바울이 간증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만 국한시켰음.

=.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신 극적인 은혜의 역사에 대해 정말로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이방인 중에서행하신 표적과 기사만 말함.

=.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필요한 간증만을 함.

-. 성령님께서 자신을 사용한 간증을 할 때나 그 간증을 들을 때 우리는 두 가지 점에서 늘 조심해야.

=. 영적 교만: 성령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이적을 보이신 것을 노루 친 막대 삼년 우려먹는다는 식으로 사용하는 경우: 죽은 사람을 기도해서 살린 경험이 있다고 해서 여러 안건에 대한 그 사람의 견해가 항상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것은 아님.

=. 영적 나태: 성령님께서 극적으로 한 번 사용한 사람에게 늘 영적 권위를 부여해주고, 자신은 그 사람의 결정이나 판단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자기 나태함을 으로 미화시켜 버리는 태도.

3.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에 의존하여 교회 회의에서 더 큰 발언권을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됨: 야고보의 경우 (13-21절)

-. 예루살렘 회의에서 의장 역을 맡은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임.

=. ‘나는 예수님의 친동생인데, 예수님께서 어릴 때 나에게 이런저런 말씀을 주셨다식으로 말하지 않음.

-. 예수님과의 영적 친근함을 갖는 것 자체가 교회 회의에서 다룰 특정 쟁점에 대해 더 큰 권위를 갖는 것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님.

-. 소위 영적인 일들을 자신이 아무리 많이 수행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어떤 쟁점에 대한 자기 견해에 권위를 부여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함.

=. 기도를 몇 시간 하고, 성경을 몇 시간 읽는 것 그것을 빌미로 그 분야에서 자기만 못한 사람보다 더 큰 발언권을 교회 회의에서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됨.

제 12 주제: 목회윤리 문제 실제(4) : 목회자 가정생활 윤리

Ⅰ. 이 주제에 대한 논의의 현재 상황

1) 목회자 부부관계에 대한 논의는 어느 정도 있다.

2) 그러나 목회자 부부관계에 대한 논의는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 경향성을 보인다. 첫째, 그 논의가 인격적 또는 심리적 분석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둘째, 목회 자 부부 관계의 대안을 성경에서 찾되, 그 구체적 내용 및 수준은 성경의 일반적 교훈 에 대한 도식적 적용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많다.

3) 결국, 목회자 부부관계에 대한 논의의 현재 수준은, 목회자 부부관계의 성격을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성격과의 관련성 속에서 규명하지 않은 채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인격주의적 논의에 한정되고 있는 실정이다.

4) 목회자 부부관계에 대한 논의는 목회자 가정의 공동체성 점검 논의의 한 부분일 수는 있으나, 그 전모를 드러낼 수는 없다. 즉 목회자 가정의 자녀문제, 목회자 가정의 고부 갈등, 목회자 가정의 친척관계 등에 대해서는 별로 논의가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Ⅱ. 목회자 가정의 아픔과 갈등

1. 일반적 고찰

1) 목회자 가정의 아픔과 갈등은 외형적으로 볼 때 두 가지 각도에서 조명될 수 있다.

-. 일반 가정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성격의 갈등:

-. 목회자라는 신분적 특수성에서 오는 갈등:

2) 이 두 가지 갈등은 엄밀한 의미에서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두 가지 성격의 갈등 이 상호 작용하여 갈등이 증폭되거나 축소된다.

3) 외형적으로 보면 목회자 가정의 신분적 특수성에서 오는 갈등처럼 보이는 경우도, 실 제로는 일반 가정의 갈등이 목회자 가정라는 외투를 입고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생 각한다. 따라서 목회자 가정의 아픔과 갈등이라고 할 때, 목회자에 해당하는 부분과 가정에 해당하는 부분을--숫자로 표시하기가 어렵긴 하지만, 편리성을 위해 굳이 말 하자면--20 대 80으로 보는 것이 지혜롭지 않을까 생각한다.

2. 아픔과 갈등의 실제적 내용

1) 재정적 어려움에서 오는 갈등

-. 기본적인 생활이 어려운 경우:

=. 개척교회 목회자: 외부의 선교 지원금에 의존

=. 채용 목회자: 최저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빈약한 사례비

-. 경제적 자립은 교회 성장과 직접적으로 관계됨.

-. 목회자의 재교육비가 점점 많이 들어감.

=. 고학력 사회화에 대비하는 목회자

2) 인격적 미성숙에서 오는 갈등

-. 부부 사이 성격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

-. 부부 사이에 있는 지적 수준이나, 생활 습관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

-. 한 쪽의 치명적 성격 결함에서 오는 경우

=. 남편의 경우: 폭력적, 억압적, 지나치게 아내 의존적 성격. 책임감 결여. 허영심

=. 여자의 경우: 지나친 외화내빈 추구, 소심증, 남편 의존적 성격.

-. 외도에서 오는 갈등

=. 혼외 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부관계에서 정서적, 지적 사귐의 욕구를 충족하지 않고--또는 충족하려고 노력하지 않고--다른 이성과의 관계를 통해 충족시키려고 하는 경우.

=. 실질적인 혼외정사 관계.

=. 외도를 나는 인격적 미성숙에서 오는 것으로 보고 싶다.

-. 배우자를 하나의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자신의 보조자로 대하는 경우.

=. 대화시 무시하거나 핀잔을 쉽게 하는 경우.

-. 자녀에 대한 정신적, 정서적, 육체적 폭력.

3) 앞날에 대한 전망 부재에서 오는 아픔

-. 개척교회 목회자의 경우: 언제 부흥할지? 자립 교회가 될 가능성이 있나?

-. 채용 목회자의 경우: 언제 단독 목회하나? 개척이냐, 부임이냐? 등등

-. 답보 상태에서 목회를 오래 하고 있는 경우

4) 부부 사이에 공동 여백--또는 공통점--이 협소한 데서 오는 갈등

-. 취미가 서로 다를 경우.

-. 지적 수준의 차이 때문에 대화가 안 된다(?)

-. 삶의 구체적 목표가 같지 않은 데서 오는 갈등

5) 가정일과 교회일이 분리가 되지 않은 데서 오는 갈등

-. 가정이 보호되지 않고 늘 노출됨.

=. “어항 속 가정또는 유리집 속에서의 삶

-. 아내의 경우, 교회일을 가사일처럼 해야 함.

6) 가족 구성원 사이의 관계에서 오는 갈등

-. 자녀 양육 문제.

-. 시부모 (친정 부모) 모시는 문제.

3. 일반적 대처 방식

1) 순종 강조형: 주의 일을 하는 목회자 부부이기 때문에 참아야 한다는 식으로 설득

-. 남편 중심적 가정 평화: 억압적 평화를 누림--팍스 로마나,” “팍스 아메리카나식.

-. 당연히 아내에게 가정 평화 유지의 책임이 많이 지워짐.

-. 남편과 아내 모두 이런 태도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확신형 부부가 주류를 이룸.

2) 심리적 또는 인격주의적 입장에서 접근하여 해결 시도.

-. 최근에 목회상담학이나 목회심리학적 접근에서 새로이 시도됨.

3) 자포자기형: 함께 노력하다가 포기한 부부.

4. 가족 구성원 관계의 단계적 이해

1) 상생적(相生的) 관계:

-. 함께 있음으로써 상호간에 힘과 격려가 되어, 가능성과 잠재력을 열어주는 관계

-. 정상적 가족 공동체가 이루어졌을 경우, 당연히 이런 관계가 형성.

2) 소모적 관계:

-. 함께 함으로써 피차간에 소모적이 됨.

-. 그러나 희망은 자체 내에서 만들어짐.

3) 일방향 탈진 단계:

-. 가족 구성원 중 한 쪽이 자포자기적 희생.

-. 다른 구성원은 소모적 관계 속에서라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관계.

4) 쌍방향 탈진 단계:

-. 서로가 서로에게 자포자기 함.

-.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희망이 만들어지지 않음.

-. 법적으로는 가정 공동체가 붕괴되진 않았지만, 내용적으로는 붕괴된 상태.

5) 붕괴 단계:

-. 이혼, 가출, 근친 살해, 집단 자살 등

Ⅲ. 목회자 가정의 공동체성 상실의 원인

1. 일반적 성격

1) 모든 인간관계는 기본적으로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관계의 일반적 성격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넓게는 시대적 한계에, 좁게는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의 한계 속에서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2) 시대적 한계와 땅의 한계는, 여러 가지 조건들에 의해, 특정 시대 특정한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관계에 중층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자면, 오늘날 한국 가정의 특성 은, 한국적 가부장제의 특성과 한국적 자본주의의 특성에 의해 크게 영향받는다.

3) 목회자 가정도 큰 틀에서 보자면, 위와 같은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교계의 풍토, 신앙적 멘탈리티 등에 의해 일반 가정과는 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긍 정적이든, 부정적이든)

2. 관계 내적 원인: 인격적 측면

1) 부부관계에서의 문제: 법적 관계에 의존한 채, 인격적 관계 키움을 경시.

-. 부부가 되었으니까, 이제는 노력을 좀 덜 해도 된다는 생각.

2) 부모와 자녀 관계 및 동기관계에서의 문제: 혈연적 관계에 의존한 채, 인격적 관계 키움을 경시.

-. 생물학적 의미에서의 부모가 인격적 의미에서의 부모를 보장해주는 것으로 생각.

3) 가정을 정성을 들여 가꾸어야 할 관계공간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 밖 생활에 서 오는 스트레스 하치장으로 생각.

3. 관계 외적 원인 (1) : 자본주의 문화의 환상 만들기에 포섭됨

1) 상품 문화에 포섭: 인간관계의 상품화

-. 자녀 및 배우자의 상품화

-. 성의 상품화

-. 삶에 대한 꿈이 상품에 대한 꿈으로 대치

2) 하드웨어 중심적 생활

-. 하드웨어는 쉽게 돈이 되나, 소프트웨어는 돈이 잘 안됨.

-. 집과 가구(하드웨어) 장만에는 신경을 쓰나, 가정(소프트웨어) 만들기 위한 노력은 별로 하지 않음.

-. 습관화된 쇼핑의 문제

3) 속도와 경쟁: 모두 바쁨

-. 속도와 경쟁은 모두 하드웨어 중심적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가정에서 인간 관계를 키울 시간이 없음.

4) 서구 세계 편향적 문화

-. 인간관계를 키울 토양인 문화가 자생적이지 못함.

3. 관계 외적 원인 (2) : 한국적 가부장제의 영향

*. 가부장제적 사회질서는 봉건제 사회에서든 자본주의 사회에서든 그 뿌리를 사회구조 및 질서 속에 깊게 내리고 있다. 따라서 목회자 부부관계 형성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것은 주로 남편(목회자) 중심적 생활 태도와 관계가 깊다고 생각한다. 아래에 몇 가지 특징적 모습을 제시한다.

1) 여필종부(女必從夫)의 잔재:

-. 대화와 설득, 이해와 자발적 양보에 기초하여 가정의 일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 가 남편이니까--또는 목회를 하니까--당신이 내 견해를 따라와야 한다는 식으로 가 정을 이끄는 경우.

-. 목회자 부인이 되었으니까, 이런 정도의 고생은 당연한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경우.

=. 여기서 조금만 더 나가면 아내의 정당한 항의나 불평조차도--그리고 그 원인이 목 회자 직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남편인 목회자에게 있는 것인데도--사전 봉쇄하 게 된다.

=. 아내를 목회 보조자로 생각함: 사모이기 이전에 아내다.

=. 사실 이런 식의 생각을 목회자들이 의외로 많이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2) 가사 노동의 책임을 목회자 아내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경우:

-. 책임의 공유가 아니라, 단순히 도와주는 정도로 만족하는 경우가 많다.

-. 심지어 아내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정경제를 책임지는 경우에도 목회자 남편은 가 사노동을 별로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3) 불필요할 정도로 자주 바깥으로 나도는 경우:

-. 실제로 목회자 아내는 가사 노동이나 경제적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

-. 아이들이 어릴 경우, 하루 종일 집에서 아이와 씨름하는 아내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목회 일로 주로 바깥에서 불필요하게 시간 보 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4) 목회자 아내도 목회자처럼 자기 성장을 위한 시간이 필요한 사람임을 잊는 경우:

-. 아내도 기도나 독서, 적절한 문화생활, 운동, 인간관계를 위한 시간 등이 필요하다.

-. 그런데 이런 것들은 목회를 준비하는 자신에게만 중요하지 아내에게는 그리 중요하 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5) 교회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아내나 아이들에게 푸는 경우

-. 감정적 폭력이나 육체적 폭력으로.

Ⅳ. 공동체성 고양에의 길 (1) : 바람직한 가정의 성경적 실제를 이해하기

A. 성경적 인간관계의 일반 원리

1. 타락 전 인간관계 (창 1:26-31; 2:18-23)

1) 형식적 측면 : 평등관계

-.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됨 (1:26)

-. ‘돕는 배필관계 (2:18) : 사장과 비서의 관계가 아니라, 응원군의 개념임.

2) 내용적 측면 : 가능성과 잠재력을 열어주는 관계

-. 개별적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는 축복이 주어진 것이 아니 라, 인간관계가 형성된 후에--그들에게”-- 주어진 것임.(1:28)

-. 관계 내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창조된 후에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됨. 즉 자연세계 속 에서 인간 관계가 형성됨으로써,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좋게 됨.(1:31)

-. ‘돕는 배필관계에는 서로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키워주는 관계가 전제됨(2:18)

3) 관계성 작동 원리

-.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발적 희생을 통해 상대(의 가능성과 잠재력)를 살려냄(2:18)

=.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시고 동반자를 창조하시려고 하신 분은 하나님.

=. 그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아담을 잠들게 하심(죽임)

=. 아담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잠듦(죽음)

=. 하와가 창조됨

-. 인간관계는 다른 피조물과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는 방향에서 형성됨

=. 인간관계가 다른 피조물과 잘 조화가 되자 하나님은 심히좋아하심(1:31)

2.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관계

1) 형식적 측면 : 평등관계

-. 그리스도 안에서 사회적 신분의 차이, 성별 차이, 혈연의 차이 등이 없어짐(갈 3:28)

2) 내용적 측면 : 가능성과 잠재력을 열어주는 관계

-.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게 함” (고전 12:12-31; 특히 25절)

-.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함” (딤후 1:6)

3) 관계성 작동 원리

-.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발적 희생을 통해 상대를 살려냄

=.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대표적 모습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 런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음.

=. 바울의 경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유대인에겐 유 대인처럼, 이방인에겐 이방인처럼 행함

-. 일방향적 실천이 아니라, 서로 실천: 사랑, 순종, 섬김, 자비 등에서 서로실천해야.

B. 성경적 인간관계 일반원리의 가족 관계에의 적용

1. 적용의 근거

-. 예수님은 가족관계의 특수성을 하나님 나라 인간관계의 일반성에 비추어 재해석하심.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 12:47-50)

-.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 .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막 10:29)

-. 위의 두 가지 내용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데는 논란이 여럿 있지만, 이 구절들이 기존의 가족관계를 하나님 나라 인간관계의 틀 속에서 재해석하는 예수님 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데는 큰 반대가 있을 수 없다.

2. 성경적 가정생활의 기초 : 인격적 관계를 통해 혈연적 관계가 재생됨(창 2:24; 창 1:28)

-. “남자가 부모를 떠나”: 혈연적 관계에서 벗어나

-.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격적 결단으로 연합

-.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단순히 육체적 결합만이 아니라, 정서적 결합, 동지적 결합

-. “생육하고 번성하라”: 자식들과의 혈연적 관계 형성을 암시

-. 인격적 관계가 기본이기 때문에 가정생활에서 인격적 관계가 혈연적 관계의 실천적 내 용을 규정해야 한다.

3. 부부관계에의 적용 : 엡 5:21-25 (참조, 골 3:18-19; 벧전 3:1, 7)

전통적 해석

성경적 인간 관계 일반원리

일반원리의 부부관계에의

적용을 통한 해석

형식적

측면

위계적 질서 관계

평등

피차 복종을 전제로 함(21절)

내용적

측면

남편은 아내의 머리

가능성과 잠재력을 열어줌

배우자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열어주는 방향에서 복종과 사랑이 실천됨

작동 원리

남편: 사랑

아내: 복종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발적 순종

*.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먼저 자신을 자발적으로 희생하심(십자가)

*. 아내를 위한 남편의 자발적 희생이 먼저 요구됨 (아담의 희생이 먼저)

4. 부모와 자녀 관계에의 적용 : 엡 6:1-4 (참조, 골 3:20-21; 딤전 5:4, 8)

전통적 해석

성경적 인간 관계 일반원리

일반원리의 부모와 자녀 관계에의

적용을 통한 해석

형식적

측면

위계적 질서 관계

평등

주 안에서 인격적 관계 형성을 전제

내용적

측면

부모가 자식들 위에 있음

가능성과 잠재력을 열어줌

*. 자녀는 주 안에서순종해야.

*. 부모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 하고,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 친족과 가족을 돌봐야 함 (딤전 5:8)

작동 원리

부모: 훈계

자녀: 순종과 부양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발적 순종

*. 부모가 먼저 책임을 다해야: 예수님 께서 제자들에게 먼저 모범을 보임

*. 연로하신 부모님께는 자녀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C. 바람직한 가정의 성경적 실제--요약

1. 성경적 가정생활은 가정에서의 성경적 인간관계를 형성함으로써만 가능하다.

-. 의지적 결단에서 오는 일회성 실천보다, 가족관계를 바로잡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함.

-. 바른 관계 형성 없이 실천을 바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2. 성경적 가족관계는 혈연적 관계보다 인격적 관계가 우선한다.

-. 혈연적 이유만으로서의 부모가 아니라, 객관적 인간관계의 일반 표준에 비추어 부모의 인품과 행동이 자식들에게 자발적 존경을 받을 수 있도록 부모는 늘 노력해야 한다.

3. 성경적 가족관계는 법적 관계보다 인격적 관계가 우선한다.

-. 법적 관계에 의존한 남편 또는 아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배우자로부터 인격적 존경 을 받을 수 있도록 늘 노력해야 한다.

4. 성경적 가정생활의 기본 특징은;

-. 첫째, 형식적 측면은 가족 구성원 사이에 평등한 인격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며,

-. 둘째, 그 내용적 측면은 가족 구성원 서로간에 가능성과 잠재력을 열어주는 것이며,

-. 셋째, 그 관계의 작동원리는 가족 구성원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발적으로 자신 을 희생하는 것이다.

-. 이러한 세 가지 특징이 한 가정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행되느냐 하는 것이 그 가 정의 아름다움을 결정하게 된다.

VI. 공동체성 고양에의 길 (2) : 실천적 지침들

*. 목회자 가정에서 나타나는 아픔과 갈등은 대체로 아내에게 집중되어 부과되곤 한다. 그 원인에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가부장제적 문화를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온 사회제도가 한 몫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은 성경이나 신학으로 더욱 강화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아픔을 교회 내에서 또는 목회자 가정 내에서 더욱 악화시키는 데 사용되는 성경해석 방법에 대한 반성적 작업도 필요하다. 여기서는 이 문제는 생략하겠다.

1.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비하며 기도하자.

-. 불평등한 가족관계 속에서 만족하거나 의존하여 살고 있는 자신에 대해 회개하라.

-. 배우자나 자식들 앞에서 자신의 욕망관리, 감정관리, 태도관리 등을 잘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훈련을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하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 배우자나 자식을 변화시키려 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변화되어야 할 부분을 찾고 자기 변혁을 위해 노력하라.

2. 가족 구성원이 함께 만날 수 있는 공통의 기반을 견고하게 확보하자.

-. 나의 바깥과 너의 바깥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공간

=.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추구하는 자세.

-.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는 운동.

-. 설교 준비 시 본문을 먼저 정한 후, 본문 해석 및 기본 내용을 아내와 상의.

3. 자신의 단점을 볼 땐 인격적 책임을 70% 사회구조적 책임을 30%로 보고, 남의 단점을 볼 땐 인격적 책임을 30% 사회구조적 책임을 70%로 보자.

4. 가능한 한 그 시대 모순의 한가운데로 다가가도록 하자.

-. 목회자로서 자신이 겪고 있는 아픔이나 갈등을 자기만의 아픔으로 생각하지 말고, 세 상의 아픔의 한 조각으로 보는 훈련을 하라.

-. 그런 다음, 자기 아픔을 매개로 하여 세상의 아픔의 본질에 접근하도록 노력하라.

5. 목회자 가정의 공동체성 고양을 위해 이니시어티브를 잡아야 할 책임은 목회자에게 있음 을 기억하자.

-. 특히 가부장제적 사회질서가 배여 있는 사회 속에서 사는 목회자(남편)가 먼저 가정의 공동체성을 고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6. 긴 시간이 필요함을 알고 착실히 그러나 끈기 있게 노력할 각오를 하고 실천하자.

-. 가족 구성원 사이에 상생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 원수관계를 바로 잡기 위한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가족관계일 수도 있다.

7. 가정을 자기 목회 및 인격의 거울이며, 일차 훈련 장소로 생각하자.

-. 자신의 됨됨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공간.

제 13 주제: 목회윤리 문제 실제(5): 목회 리더십 윤리

Ⅰ. 한국 교회 목회 리더십 현황

Ⅱ. 상품화된 목회 리더십 이론의 문제

-. 상품 미학에 포섭된 목회 리더십 이론의 문제점

1. 획일성의 문제

2. 우상화의 문제

3. 환상 유포의 문제

4. 관심 낭비의 문제.

Ⅲ. 광야 시험에 나타난 목회 리더십의 유혹

1. 교인들의 요구를 채워줌으로써 리더십을 확보하고 싶은 유혹

2. 초자연적 카리스마를 교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리더십을 확보하고 싶은 유혹

3. 세상의 권력과 영광을 통하여 리더십을 확보하고 싶은 유혹

Ⅳ.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목회 리더십의 윤리적 특징

1. 목회 리더십의 본질적 성격: 동참과 맡김의 리더십

2. 목회 리더십의 방향성(1): 근본적 변혁을 지향하는 리더십

3. 목회 리더십의 방향성(2): 관계를 올바르게 건설하는 리더십

4. 목회 리더십의 수행방식(1): 서서히 그러나 확실한 변화를 추구하는 리더십

5. 목회 리더십의 수행방식(2): 유연성을 갖는 리더십

Ⅴ. 목회 리더십과 대외 관계: 독립적 연대를 추구하는 리더십

Ⅵ. 결론

홀로와 더불어의 영성

하나님이 그대를 부르셨을 때, 그대는 홀로 하나님 앞에 섰었고, 그대는 홀로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했습니다.그러나, 그대는 사귐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부르심은 그대만을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가 형제의 사귐을 무시하면, 그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독이 무서워서 더불어 있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홀로 있을 수 없어서 사람들 사이에 끼이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스스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언짢은 일을 홀로 겪고는 남과의 사귐 속에서 도움을 받아볼까 하고 기대를 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그러한 사람들은 거의 다 실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실망이, 자신의 잘못에서 기인되는 것이 아니라 모임의 잘못에서 기인된 것인 양 비난을 퍼붓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정신병자들의 사귐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자기 도피의 일환으로 사귐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사귐을 잡담과 오락으로 채워 기분 전환용으로 잘못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그 기분 전환이 아무리 영적인 외형을 띠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상 그가 찾는 것은 사귐이 아니고, 자기의 외로움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흥분일 뿐입니다.

사귐 관계 속에 올바로 서 있을 줄 아는 사람만이 홀로 있을 수 있고, 또한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사귐 관계 속에서 올바로 살 수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사귐 속에서만 우리는 어떻게 홀로 서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배우고, 홀로 있음으로써만 우리는 어떻게 사귐 관계 속에 바로 서 있을 수 있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 둘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앞서는 것 같은 관계가 아니라, 동시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에는 각기 깊은 심연과 심각한 위험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홀로 있음 없이 사귐을 바라는 사람은 공허한 말과 감정에 빠집니다. 사귐 없이 홀로 있음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허영심의 심연에 빠지고 스스로에게 현혹되어 결국에는 절망의 심연에 떨어지고 맙니다. 홀로 있을 수 없는 사람은 사귐 시에 각별히 자신을 다잡아야 합니다. 또한 더불어 사귈 줄 모르는 사람은 홀로 있을 때 특별히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뿐 아니라, 성도의 모임에도 적지 않은 피해를 끼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중에서.

*. 읽고 토론하기 자료 1 :교우들이 기대하는 목사

송인규

일반 교우들은 목사에게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다시 말해서, 그들은 어떤 목사를 선호하고 자기 교회의 목사가 어떤 모습을 갖추기 바라는가? 필자는 교우들이 목사에게서 기대하는 여섯 가지 기능을 열거하고자 한다. 물론 이런 기능들이 목회 활동이나 실제적 현시에 있어서는 중복되는 수가 빈번하지만, 그러나 어쨌든 개념만큼은 구별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1) 주술적(呪術的) 기능: 목사를 신적 축복과 저주의 중개자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목사는 교우들을 위해 자녀와 사업이 잘 되도록 복을 빌고, 신령한 은사와 능력을 발휘해 병을 고치는가 하면, 필요한 경우 불행이나 재앙을 쫓는 권능의 대리자로 이해된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종,”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등으로 불리며 쉰 목소리(husky voice)와 명령조(調)반말 투의 권위주의적 화법, 그리고 자기 위주의 주관적 신앙 인식과 판단이 그 특징이다.

(2) 경영적 기능: 목사를 어디까지나 교회라는 조직체의 최고 경영자(CEO)로 본다. 교회란 헌금, 예배, 사역을 말한다는 점에서 종교적양상을 띤 것이 사실이지만, 실상은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조직체라는 것이다. 목사는 재정 사용, 프로그램, 활동을 통해 끊임 없이 교회를 성장시키는 기능인이다. 교회당을 크게 짓고, 사역을 다양화하며, 수적 발전 (헌금 및 인원)을 꾀하는, 결국 종교적 영역에서의 기업가라는 것이다.

(3) 교육적 기능: 목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가르쳐야 한다. 물론 그 자신이 먼저 말씀의 원리에 의해 변화되어야 하고, 이러한 주관적 경험이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활동에 크고 적게 영향을 끼쳐야 한다. 목사의 설교, 성경 공부 인도, 일대 일 양육, 상담, 지도자 훈련은 근본적으로 성경 말씀과 그것의 진리됨에 대한 확신 및 열정이 있어야만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열매 뒤에는 목사의 교육적 기능이 우뚝 솟아 있다.

(4) 윤리적 기능: 목사가 인격자로서의 본보기요 윤리적 측면에서 흠 잡을 데 없는 지도자가 되기를 고대한다. 그는 말씨, 예의 범절, 행동거지(行動擧止), 생활 방식에 있어서 상식에 부합하고 합리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특히 돈성(性)권세명예와 관련하여 깨끗해야 한다. 한 마디로 말해 윤리적 사표가 되지 못하는 목사는 참된 목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5) 보양(保養)적 기능: 이 경우 목사의 기능은 교우들을 돌보고 보호하며 감싸 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교우들은 그들의 목사가 자신들에게 위로를 베풀고, 함께 공감대를 형성하며, 늘 부드럽게 맞아 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면서 목사로부터 각종 신앙적일반적 사안에 대해 묻고 확인하고 조언을 구한다. 그들의 머리에 박혀 있는 이미지처럼 과연 목사가 이같이 따뜻하고 편안한 존재라면, 결코 교우들에 대한 이러한 섬김의 사역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6) 비판적 기능: 목사는 시대 풍조와 더불어 신앙 공동체의 기만적 경향들을 통찰력 있게 읽어 내는 선지자로 이해된다. 그의 날카로운 사정가(査正家)적 안목은 세상의 모든 왜곡과 위선과 오류와 불의를 여지 없이 노출시킨다. 그 무엇도 그가 손에 쥔 다림줄의 측량 행위로부터 면제될 수 없다. 개혁과 갱신은 그의 기본 양식이고 비판과 질정은 주된 조리 방식이다.

목사들은 교우들의 이런 기대와 욕구를 어느 정도나 감지하고 있는가? 그들의 목회 방침은 얼마나 정확한 실정 파악에 기초하고 있는가? 아니, 교우들의 이러한 심리적 동향에 대해서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표명하고 있는가? 필자는 여기에 네 종류의 목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이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그 때 그 때의 상황만 보고 좇아가는 유형 [무지형].

둘째, 이 모든 실정에 무관심한 채 (또 혹시 알게 된다 하더라도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의 목회 방침만 고집하는 유형 [완고형].

셋째, 이 모든 추세와 심리 상태를 약삭빠르게 알아내고서 교우들의 요구에 순응하는 식으로만 반응하는 유형 [야합형].

넷째, 이 모든 현상을 직시하고 정확히 파악하되 어떤 면에서는 교우들의 필요를 수용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교우들을 설득하여 변화를 꾀할지 지혜를 발휘하는 유형 [분별].

물론 필자는 상기 유형 가운데 네 번째[분별형]가 목사로서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이제, 교우들이 기대하는 목사의 기능과 관련하여 전체적 상황부터 살펴 보자.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은 대체로 목사의 (1) 주술적 기능, (2) 경영적 기능, (5) 보양적 기능을 선호하는 것 같다. 따라서 대부분의 교우들은 목사하면 자기들을 위해 복을 빌고, 교회를 성장시키며, 교우들의 영원한 조언자인도자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만일 이러한 요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거나[무지형] 무시할 경우[완고형], 교우들 편에서의 반응이 시덥지 않은 관계로 수적인 면에서 답보 상태를 면하지 못 하거나 오히려 교세의 감소를 경험하게 된다. 반대로 이러한 교우들의 필요를 알아채고 그것을 자신의 목회 방침으로 굳힐 경[야합형], 교우들의 수적 증가와 외형적 성장은 꾀할 수 있겠지만 내적으로 견실한 교회 발전은 기대하기가 힘들어진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가장 바람직한 타입인 분별형의 목사로서, 교우들이 기대하는 여러 기능에 대해서는 어떤 소신과 주관을 가져야 할 것인가? (1) 주술적 기능은 거의 추천할 만한 것이 없다. 이것은 기복 신앙과 샤마니즘의 경향을 더욱 부추길 뿐이다. 물론 성경적으로 평가해 정당한 의미에서의 복 개념, 축도 및 축복 행위는 바람직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주술적 기능은 비성경적 방향으로 발전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2) 경영적 기능 역시 긍정적 요소보다 부정적 요소가 더 많다고 하겠다. 두 가지 면에서 그렇다. 첫째, 경영적 기능은 교회를 근본적으로 유기체(organism)가 아닌 조직체(organization)로만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비록 교회에 조직체적 양상 -- 인원, 예산, 활동, 직책 등 -- 가 있고 필요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유기적체 본질 --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몸을 구성한 지체끼리 상합하고 연락함(골 2:19), 신앙 공동체적 관계 형성 (용서, 용납, 겸손, 사랑, 섬김, 존경, 친절 등) -- 의 맥락에서만 그런 것이다. 이런 맥락을 벗어나 조직체적 양상이 유기체적 본질을 밀어내거나 대체할 때 생기는 비극을 우리는 여러 곳에서 목도하고 있다.

둘째, 수적 성장 일변도의 교회 이해는 많은 위험과 유혹을 안고 있다. 만일 우리가 전도에 의한 교회 성장을 추구하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척박한 목회 환경 -- 교우들의 수평 이동, 교회의 마이너스 성장, 교회끼리의 과다 경쟁 등 -- 을 염두에 둘 때, 성장만을 참 교회의 표지(標識)로 내세우는 것은 폭탄을 안고 불에 뛰어 드는 행위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교육적 기능 및 (4) 윤리적 기능: 이 두 가지 기능은 상기한 어떤 기능보다도 목사가 갖추어야 할 본유적 면모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각각의 기능 한 가지만으로써나 두 가지 기능 모두를 갖추면 목사로서 충분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교우들이 성경 및 신학 지식만을 갖추게 된다든지 [교육적 기능만의 발휘 결과], 아니면 신사적 교양 시민으로서만 변화한다든지 [윤리적 기능만의 발휘 결과], 아니면 또 성경 지식과 인격적 면모만이 발달된다든지 [교육적 기능 및 인격적 기능의 발휘 결과] 하여도 그것만으로는 온전한 의미에서의 신앙적 성숙 모습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이다.

(5) 보양적 기능: 이 기능 역시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 이 기능은 목사의 목양(牧羊)책임과 가장 긴밀히 연관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교우들이 늘 목사의 도움, 조언, 돌봄만을 의존하여 소아로 남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적 갓난아이와 초신자일수록 목사에 대한 의존도가 크겠지만, 점차 성숙해 감에 따라 직접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하는 등 독립적 면모의 비중이 중대하도록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6) 비판적 기능: 이 역시 어느 정도는 바람직한 것이다. 우리 각 개인과 신앙 공동체는 -- 이 세상은 말할 것도 없고 -- 늘 본성의 부패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누군가의 비판과 교정/책망/권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판적 기능은 항시 다른 기능들 -- (3) (4) (5) -- 과 보완이 되어야 하고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목사나 교우들이나 자기의(self-righteousness)에 사로잡히게 되고, 비판을 위한 비판가로 전락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제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 필자는, 목사에게 기대할 가장 중요한 기능이 (3) 교육적 기능, (4) 윤리적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항구적 의존성만 경계한다면 (5) 보양적 기능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 다음에 아마도 (6) 비판적 기능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올바른 복 개념이 전제될 경우 (1) 주술적 기능 또한 제한적으로나마 수용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신앙 공동체의 유기체적 본질과 전도에 의한 수적 성장을 잊지 않는다면 (2) 경영적 기능 또한 보완적 기능의 하나로 인정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목사에 대한 교우들의 기대는 다양하고 복잡하다.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그들의 기대와 요구를 좇아갈 수도 없고, 동시에 그 모든 것을 무시하든지 무지 가운데 머물러서도 안 된다. 오직 영적 분별력을 발휘함으로써 정말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공동체에 활력을 공급하는 그런 목회자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 읽고 토론하기 자료 2 :목회자들은 무엇에 영향을 받는가?

송인규

목회자도 인간인지라, 모든 인간이 그렇듯, 그는 자신의 내적 상태와 외부 환경에 의해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영향력들을 들추어내어 그 정체를 밝히는 일은, 목회자 개인의 영성에 대해서 뿐 아니라 그의 목회 방침이나 공동체의 성숙과 연관해서도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과연 어떤 사항들이 목회자들의 심령과 인격에 영향을 끼치고 있단 말인가? 서로 연관된 네 가지 사항을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1.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외적 증거 확립

목회자의 정체감(sense of identity)을 구성하는 가장 필수적 조건은 하나님께서 그를 사역자(목회자)로 부르셨다는 개인적 확신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명감(소명 의식)은 그 성격상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종종 그것을 객관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외적 증거가 요구되곤 한다. 즉, 하나님께서 어떤 이를 목회자로 부르신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을 입증해 주는 외적 표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목회의 열매라는 것을 소위 교회의 양적 성장 -- 교인 수, 헌금의 액수 등 -- 에서만 찾고자 할 때, 목회자의 순수한 마음은 시험과 욕심으로 얼룩지기 시작한다. 목회자에게 있어 외적 확장이 최우선적 목표가 될 때 그는 교묘한 형태의 우상 숭배를 연출할 수 있다. 또, 교우들을 더 이상 자신이 목숨 바쳐 섬겨야 할 고귀한 대상으로 여기기는 커녕 도리어 자신의 꿈을 이루어낼 값진 수단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목회자들은 괄목할 만한 양적 성장 (그것이 수평 이동의 결과이든 아니든)을 이룩하는 수도 있고, 또 심지어 올바른 동기에서 그렇게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목회 현장을 냉정히 고려해 볼 때 괄목할 만한 양적 성장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목회자들에게는 종교적 신기루요, 하나의 허황된 야심으로서만 작용하기 십상이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증거를 양적 성장이라는 단편적 현상에서만 찾으려는 오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목회적 열매를 점검하는 일이 필요하기는 하되 그것을 단지 외적 확장이나 양적 성장의 면에서만 그리하지 말고, 오히려 사람들의 변화하나님에 대한 성숙한 신앙 자세의 견지” “헌신의 모습등 다면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말이다.

2. 목회자의 자아상(self-image)

자아상은 대부분의 경우 미완성적이요, 비고정성(非固定性)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이나 조건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이미 개인의 내면에 확립된 태도와 성향(dispositions)의 체계로서 작용한다.

목회자의 자아상 형성에 있어서는 주로 두 가지 사항이 대두된다. 하나는 집합적 성격의 요인으로서 그가 목회직을 다른 직종 -- 예를 들어, 법관, 회사인, 의사, 공학자 등 --에 비해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순전히 개인적인 것으로서, 목회 사역의 수행과 관련된 다양한 능력들을 들 수 있다. 기독교가 과거에 있어서보다 더 큰 성장과 영향력을 확보하면서부터 직종으로서의 목회직에 대한 인지도는 상당히 개선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후자, 곧 개인적 역량에 대한 자기 평가에 있다. 설교, 리더쉽, 성품, 대인 관계, 목회 전략 등등에 있어서 목회자는 쉬지 않고 자신을 평가한다. 목회자는 전기한 여러 면과 관련하여, 자신이 인정 받기 원하는 이상적 자아 (ideal self)와 자신이 스스로에 대하여 깨달은 본 모습(perceived self)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 둘 사이에 간격이 크면 클수록 그는 불행을 느끼고, 어떻게 해서든 그 틈을 메우고자 한다.

까딱 잘못하면 목회자는 여기에서 균형을 잃을 수 있다. 그는 때로 자신을 너무 높이, 또 때로 너무 낮게 평가하곤 한다. 따라서 자신의 은사와 능력에 대한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평가가 매우 중요하다. 그리하여 자신의 분수와 그릇을 안 뒤, 욕심 부리지 않고, 주눅 들지 않고, 시험 받지 않으면서, 묵묵히 성실한 자세로 자기에게 맡겨진 바 자기 만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3. 목회 대상으로부터의 반응

목회자가 깊은 영향을 받는 또 하나의 영역은 -- 그가 인정을 하든지 않든지 -- 바로 자신이 목회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교우들로부터의 반응이다.

인간의 기본 성정은 주위 사람들로부터의 인정과 긍정적 반응을 필요로 한다. 목회자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교우들로부터 잘 한다라는 적극적 평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욕구는 자연스런 것이고 또 많은 경우 동기 유발에 있어서 건설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동시에, 목회자가 교우들의 반응과 평판에 너무 비중을 많이 두고 귀가 엷어지면 그는 안정감과 여유를 잃게 된다. 어떻게든 실적(?)을 올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자 하는가 하면, 사역의 결과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떠벌리기가 쉽다. 교우들로부터의 부정적 휘드백(feedback)에 심한 상처와 타격을 입기도 하고, 부교역자에 대한 칭찬의 소리 한 마디에 그토록 위협을 느껴 폭군적이 되는 수도 있다.

목회자의 인정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요 (고전 15:9-10; 살전 2:4), 건강한 자기 평가 (cf. 롬 12:3)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진정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그 중 듣기 좋은 소리에 자신을 팔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계속 주를 올려다보아야 하고 빛 가운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4. 동료 목회자들과의 상호 교류

그러나 오늘날 목회자가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선후배를 망라한 동료 목회자들로부터일 것이다. 교회 성장에 대한 세미나에 참석하고, 노회와 목회자 연합 집회에 몸을 맡기는 순간부터 이런 영향력은 그 괴력을 발휘한다. 심지어 기독교 관련의 각종 매체 -- TV, 잡지, 신문, 간행물 등 --를 통한 광고와 선전, 소식 전달 등이 한층 기승을 더하도록 돕는다.

목회자는 다른 목회자들과의 장소적매체적 접촉을 가지며 부정적인 비교 의식이 자라난다. 목회를 크게 하든지, 유명세를 타든지, 재주가 있어 튀거나 뜨는목회자와 접촉하면 시기, 부러움, 질투, 고의적 무시 등으로 반응하고, 반대로 자기가 다른 목회자들보다 어떤 면으로든 우수한 점이 있다 싶으면 그들 앞에서 쾌재를 부르고 뿌듯함, 보람, 성취 의식에 잠긴다. 대부분의 목회자가 목회자 모임 이후에 드러내는 천박한 즐거움, 경박스러움, 성마름, 씁쓸함, 우울한 모습, 처신의 불안정 등은 이런 것과 연관이 된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목회자끼리의 경쟁적 분위기는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고 아울러 구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배출되는 목회자의 수는 많고 목회자가 제한되어 있다면, 자연경쟁이 등장하게 된다. 모든 이가 다 똑같이 설교로 뜰 수는 없으며, 모든 이가 다 언어 구사 능력이 같을 수는 없다. 모든 이를 다 집회의 주강사로 부를 수는 없으며, 모든 이가 다 총회장이나 대교회의 목회자로서 적합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함께 천국을 세워 나가는 동역자들로서 이러한 풍토의 개선에 능동적으로 이바지하여야 한다. 언제까지나 철 없이 근시안적인 안목으로 동료들을 대할 것인가? 우리에게는 두 방향의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이 어떤 면에서든 많이 누리는 목회자라면 그렇지 않은 동료들에 대해 늘 겸손하고 비(非)자만적인 태도로 일관하여야 한다. 적게 누리는 목회자는 자기보다 더 누리는 동료들에 대해 시기, 좌절, 열등 의식, 경쟁 심리로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인정해 주고 함께 기뻐해야 한다. 목회자는 함께 만나고 접촉하는 동료들로 인해 위로, 분발, 용기 백배, 신앙의 자극, 동역자 의식의 함양, 공감대 형성 등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건설적인 결과를 맛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목회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고 있다. 우리는 소명에 대한 외적 증거, 자아상, 교우들로부터의 반응, 동료와의 상호 교류 등의 면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우리의 목회가 더 이상 우리의 죄성, 세속적 사고 방식, 사단의 시험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이 네 항목의 영향력은 우리의 목회 현장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필수적 요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읽고 토론하기 자료 3 : 목회자--종님종놈

송인규

목회자나 성직자에 대하여 보통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종" 아니면 짧게 "주의 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명칭의 해당자가 하나님께 대해서는 종인 것이 확실하지만, 이런 명칭이 다른 그리스도인들 -- 소위 평신도들 --에 대해서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 자체로서 명확한 지침을 주지 못합니다. 즉, 주의 종이 일반 그리스도인 위에 군림해도 좋은 영적 권세가인지, 아니면 그들에 대해서도 그저 종인지 잘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 주의 종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도 종이다 =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의 종"을 영적 권세가로서 이해하는 경향이 짙었습니다. 과거 7, 80년대에는 봄 가을이면 교회마다 다투어 부흥회를 가졌었습니다. 그런 강사들 가운데 어떤 이는, 초청을 한 교회의 교우가 부흥 강사인 자신을 위해 기도할 때, 그냥 "주의 종"이라고 지칭했을 경우 그것을 꼬투리 잡아 호통을 치며 반드시 "주의 종님"으로 바꾸도록 법석을 피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겪은 어떤 그리스도인은 속이 무척 상한 가운데 (비록 그 강사 앞에서는 그러지 못했지만) 도대체 종이면 그냥 종이지 무슨 종님이냐고 태여 따지려면 종은 종놈이 더 맞지 않느냐고 항의 비슷한 발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점에 있어서 명확한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의 종은 하나님께만 종이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도 종이라고 말입니다. 어디에 그런 근거가 있느냐고요?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 (요 13:4-6, 12)이 그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 당시 발을 씻기는 일은 종이 주인을 섬길 때 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평생 사람들을 섬겼고(막 10:45), 이로써 자신의 사람들에 대해서 종인 것을 밝히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파악하고서 (빌 2:5-8), 자신이 주[그리스도/하나님]종(롬 1:1; 빌 1:1; 딛 1:1)이지만 동시에 사람들에 대해서도 종된 것을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고전 9:19)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후 4:5)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이상의 교훈으로 보건대 주의 종은 주님께 대해서만 종이 아니요, 사람에 대해서도 종인 것입니다.

= 주의 종은 사람에 대해서는 종이 되면 안 된다 =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성경을 꼼꼼히 읽는 어떤 이들은 나의 주장에 반기를 들지도 모릅니다. 사실, 몇 년 전에 한 그리스도인이 전화로, "그런데 성경에 보면 우리가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구절도 있지 않습니까?"라고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다음의 두 구절을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고전 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 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둘 다 바울의 말로서, 첫 구절은 직접적으로 둘째 구절은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종이 됨"과 "사람의 종이 됨"을 길항적인 것으로 내 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들은 문맥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합니다. 고전 7:23은 바로 그 전절,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하는 말씀과 연관을 시켜서 생각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에는 고린도 지방을 포함하여 어디든 노예 출신이 많았습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주장하는 바는, 고린도 교인들의 노예의 상태 중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든지 자유자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든지, 어쨌든 이제는 참 주인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 어떻든지 간에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은 그들의 충성을 그리스도께 바쳐야 하고, 그리스도보다 더 충성을 바치는 일 -- 이것이 바로 사람들의 종이 되는 것인데 -- 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갈 1장 10절의 경우에는 그 배경이 조금 다릅니다. 또, 본문에는 "사람의 종이 됨"에 대해 직접적 언급이 없습니다만,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 종이 된다는 것과 비슷한 표현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 당시 유대주의자(Judaizers)유혹에 빠져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외에 율법의 행위-- 곧 할례 및 모세의 율법 준수 --를 더하려고 했습니다(갈 2:16-2준수 3:1-4수 5:2-4 등). 바울은 이에 대해 "다른 복음을 믿는 것"이라고 엄히 경고했고(갈 1:6), 아무리 그들을 아낀다고 해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그들의 기쁨을 구할(= 그들의 종이 될) --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들이 다른 복음을 좇아가도록 방치하는 것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종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종 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사람들에게 종이 될 수 있고, 또 종이 되어야 한다고 결론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종됨이 하나님께 종됨을 가로막지 않는 한, 우리는 얼마든지 사람들에게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이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우리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지만 동시에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마 22:37-40). 그러나 어떤 특수한 경우에는 이웃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이웃 사랑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 사랑에 대한 책임과 갈등을 일으킬 때,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 사람을 택함으로써 이웃 사랑을 포기해야 합니다 (cf.

10:37; 요 12:3-8). 그러나 대체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종이 되는 것 =

어떻게 하면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종이 될 수 있겠습니까? 목회자는 교우들에 대하여, 주교 교사는 아동들에 대하여, 구역장은 구역원에 대하여, 선교사는 현지인에 대하여 말입니다. 두 가지 사항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에게 맡겨진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권위주의적으로 군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많이 강조하신 바이요 (막 10:42-45; 눅 22:24-27), 사도들의 가르침과 모범이기도 합니다 (고후 1:24; 벧전 5:3).

둘째, 우리는 우리의 직분이나 은사를 통하여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 내에서의 지도력과 직분 및 은사는 지도자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유익과 성숙을 위해서 서서히 소비되고, 궁극적으로 목숨까지 희생할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막 10:45; 요 10:14-15; 고후 12:15; 살전 2:8).

주의 종이 가야할 길은 멀고도 험한 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 대해 종이 되어야 하고 (고전 9:19), 그 종국 역시 고난과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길만큼 영광스러운 길은 없습니다. 주님의 모습을 닮는 길이요 (빌 2:5-8), 후에 참된 영광(롬 8:17)으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읽고 토론하기 자료 4 : 목사는 일하면 안 되는가?

송인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오늘의 제목 같은 그런 질문을 해 본적 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가 아닌 이들은 자신과 직접 연관이 없으니까 그렇고, 목회자들은 으레 사례비에 의존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처한 상황과 입장은 다양하고, 또 어떤 여건과 환경에서는 대안적 조치가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내는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 목사는 다른 직업을 가져서는 안 된다 =

어떤 이는 위의 주장을 손쉽게 변호하고자 합니다. "그거야 교단의 법에 의하면 목사가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교단의 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교단의 법도 다 이유와 근거가 있어서 만든 바이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구속력을 갖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에 기초할 때 목사가 다른 직업을 가져서는 안 된다(혹은 조금 약하게 표현하여서, "갖지 않는 것이 좋다")는 주장은, 크게 두 가지 근거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사역자가 자신의 사례비를 사역 대상에게 의존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규칙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의 성구가 그 사실을 보여 줍니다.

눅 10:7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전 15:13-14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 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딤전 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하였느니라

이상의 구절들이 함의하는 바는 명백합니다. 복음의 사역자들은 따로 생계를 위한 수단이 없는지라, "복음으로 말미암아" -- 이는 복음의 혜택을 입은 그리스도인들 편에서의 재정적/물질적 도움을 암시하는데 --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역자가 다른 직업을 갖게 되면 생길 수 있는 결과 때문에 부정적 입장을 취합니다. 그 결과란 두 가지입니다. 우선, 다른 일을 통해 재정적 수입을 추구하다 보면 생계와 관련하여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기가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일이나 활동에 시간과 정력을 쏟다 보니, 정작 사역자 본연의 임무에 대해서는 책임성 있는 활동을 수행하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역자들은 재정적으로 힘들더라도 하나님만 의존하면서, 사도 바울처럼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2)는 식의 여유와 자족의 심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사역자의 근본 임무는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cf. 행 6:4)이므로,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 (딤후 2:4) 자신을 군사로 모집한 하나님께 불충성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입니다.

= 목회자 사례비의 명암(明暗) =

한국 교회는 이런 면에서 훌륭한 모범을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성장 요인 가운데 하나가 Nevius 정책 -- 그 가운데 재정적 자립도 들어 있는데 --의 성공적 수행임은 이미 다 알려 진 바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다른 나라들 -- 예를 들어, 아시아의 태국이나 인도 일부 지역 등 -- 과 비교해 보면, 한국 교회의 위상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목회자의 사례비를 개교회 자체 헌금에 의해 충당했고, 또 목회자들 역시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목회 사역에만 진력하는 것을 당연한 길로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아름답던 재정적 후원의 면모가 하나의 제도적 장치로 자리잡으면서, 문젯거리 역시 하나 둘씩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목회자들은 "사례비"가 자신의 마땅한 권리인양 생각하게 되었고, 또 심지어 어떤 목회자와 목회자 후보생들은 목회 사역을 단지 생계의 수단 -- 그것도 일반 직업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으로 간주하는 슬픈 양상까지 노출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의 재정권 을 움켜쥐고 있는 어떤 세력가들(?)은 목회자를 하나의 고용인으로 생각하여, 사례비를 목회자의 종교적 서비스에 대한 응분의 보수로 격하시키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사례비의 많고 적음이 목회자의 자기 성취(self-fulfillment) 가운데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고, 동료 목회자와의 비교 자료나 목회 성공의 척도로 이용되곤 했습니다. 사례비 때문에 목회자와 교인 대표들 사이에 갈등이 비일비재하고, 목회자 편에서는 자존심의 손상, 기대치의 미달에 따른 배신감 등으로 괴로워합니다. 또 교인들 편에서는 목회자의 욕망과 이기심 (그들이 보기에는) 때문에 경악과 실망을 금치 못하며 심지어 개인의 신앙조차 타격을 받기도 합니다.

= 목사가 다른 직업을 가질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

이러한 처지를 심각히 살펴보면서, 나는 어떤 경우 목사가 다른 직업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조심스레 제안하고자 합니다. 우선 그는 두 가지 동기 때문에 직업을 갖고자 하면 안 될 것입니다. 이미 얼마 전에 지적했듯, 자신의 생계 때문에 걱정이 되어 다른 일이나 직업을 추구한다면 그런 목회자는 일찌감치 현재의 논의에서 빠져야 합니다. 또, 목회 사역에만 전심전력하기가 싫어서 (자신의 게으름이나 취향 때문에든 아니면 그 직종이 주는 프라이드나 혜택 때문이든) 다른 직업과의 병행을 추구한다면, 그런 목회자도 역시 이런 논의에는 "해당 사항 없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이유나 근거 때문에 목사가 다른 직업을 가질 수 -- 다른 직업으로부터 생계에 필요한 수입원을 마련함 -- 있다는 말입니까? 두 가지 경우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째, 복음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스스로 사례비 받을 권리를 포기하는 경우입니다. 이 면에서 바울 사도의 입장은 우리에게 도전과 모범이 됩니다.

고전 15: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재정적 후원을 받는 권리]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 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바울은 사도로서 -- 특히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는 더욱 더 -- 마땅히 재정적 후원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혹시 그것이 복음 전하는 일에 장애가 될까봐 그러한 권리를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둘째, 교우들에게 과도한 짐을 지우든지 폐를 끼치지 않고자 하여 사례비의 수준을 극소화하든지 아니면 아예 받지 않는 수가 있습니다. 이 모범 역시 사도 바울에게서 발견됩니다.

살전 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재정적 부담을 끼치지 않고자 하여,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 아마 장막 짓는 일을 계속했을 것인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사랑의 결과입니다(살전 2:8).

물론 현재 한국의 상황을 고려할 경우, 나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따로 직업을 갖지 않은 채 자신의 목회 사역에 전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지역과 상황 [모슬렘 사회, 적은 교인밖에 확보되지 않는 해외의 한인 교회, 자립하기 힘든 농촌 교회, 사례비로 시끄러웠던 교회 등등]의 경우에는 목회자나 그 아내가 일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서 복음의 빛이 더욱 영광스럽게 드러나고 교우들을 희생적으로 사랑하는 길이 가능하다면, 왜 예외적으로 다른 직업 갖는 것을 마다하겠습니까?

*. 읽고 토론하기 자료 5 : 목회자와 갈등

송인규

목회자는 다른 어떤 영역의 지도자나 책임자보다 훨씬 더 많은 양태의 갈등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이론적/신학적이거나 실제적/목회적인 주목을 기울여 오지 않았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목회자와 갈등을 연관시키는 것 자체가 자연스럽거나 정상적인 일로 여겨지지 않는 풍토 때문일 것이다. 즉 목회자는 가능하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어야 하는데, 늘상 갈등마찰싸움충돌 등의 부정적 측면이나 현상만을 지적하고 부각시키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듯 하다. 하물며 목회자 자신이 갈등에 휩싸여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대해서나 사역의 추진력과 관련해서나 별로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라는 지레 짐작 또한 한 몫을 담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갈등에 대한 이러한 은폐식 접근은 사실의 파악이라는 면에서도 옳지 않고 정신적 건강이라는 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갈등이란 부족한 자원으로 인한 의지나 욕구의 마찰 현상혹은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결정 사항이나 행동 방침의 수립에 있어서 서로 다른 의견이 엇갈리는 사태라고 정의할 수 있다. 갈등을 이렇게 정의할 경우, 갈등 자체는 결코 죄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과 환경에 따르는 하나의 제약 상태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을 살아가면서, 또 인간 관계를 맺어 가면서, 갈등을 느끼게 마련이다. 갈등은 인간의 삶에 있어 이토록 자연스런 요소이며, 인간이 대인 관계 및 공동체의 맥락에 처할 경우 겪게 되는 정상적 경험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서 갈등의 현상에 무관심해도 좋다든지 아니면 무조건적인 방치나 회피만이 능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갈등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그것은 인간 관계에서의 시험이기 때문에 그대로 방치할 경우 조만간에 심각한 파괴적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법이다. 따라서 우리 -- 특히 지도자로서의 목회자 --는 갈등에 관한 양극단적 입장 -- 은폐 혹은 방치 --을 버리고, 어떻게 하면 갈등에 대해 올바로 대처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목회자의 삶에 있어서 갈등의 요인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목회자는 다른 이와의 관계 속에서 갈등을 느끼게 되는가? 네 가지 사항을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가장 근본적인 요인으로서 목회자의 인간 내적(intra-personal) 문제 및 그와 맞물린 인간 관계적(inter-personal) 문제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의 경우 겉보기와 달리 그의 내면에 열등의식이나 우월감 등 불건전한 자존감의 앙금이 엉겨 붙어 있는 수가 적지 않다. 이런 것들은 곧장 그의 인간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곤 하는데, 이로 인해 그는 남보다 쉽사리 상처를 입기도 하고, 시기와 경쟁의식에 시달리는가 하면, 정서 상태의 불안정을 겪는다. 또 부교역자나 다른 교인들에 대해 옳지 않은 시각 -- 편견, 오해, 선입견 등 --을 고집하는 이유도 이런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함께 일하는 교역자나 일반 교우들과의 관계에서 겪는 기질적 혹은 스타일의 차이 및 다양성 또한 갈등의 요인이 된다. 인간이 보여 주는 성격이나 기질의 다양성은 공동체를 풍성하게도 하지만, 동시에 서로 간에 마찰과 갈등을 야기하기도 한다. 같은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도 느낌, 첫 인상, 호불호(好不好)의 정도 등은 각양각색이다. 개인이 겪어 온 문화사회적 배경이 서로 다를 경우 그것은 즉시 그들의 사고 방식에 엄청난 격차를 만들어 낸다. 같은 언어를 채택하고 심지어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할지라도 표층 밑에 감추어진 이러한 기질적성경적 차이는 때로 엄청난 갈등을 몰고 오는 것이다.

셋째, 목회자는 행정상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엄청난 갈등을 겪곤 한다. 당회나 제직회의 회의 석상에서 의견의 충돌이나 견해의 마찰이 얼마나 빈번한 지는 목회자라면 누구나 익히 알고 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교회의 활동과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실행해 나가면서 접근 방식이 서로 다를 경우, 불편한 심기를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어떤 문제에 접근하는 접근 방식에서 판이한 차이가 노정(露呈)되면, 소외감과 허탈감이 동시에 스며 든다. 공동체와 관련한 의사 결정 시 지도력의 스타일이 다르면, 지도자 상호 간에는 상당한 긴장과 적대감이 형성된다.

넷째, 목회자로서 공동체를 구성한 구성원들과 신앙의 색깔이나 신학적 전통이 다를 때 그들에 대해서나 다른 동역자들에 대해서나 불편과 갈등을 느끼게 마련이다. 이것은 꼭 다른 교단이나 교파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심지어 같은 교회 같은 부서에서 활동하면서도 차이를 감지하는 수가 있다. 이러한 신앙적 불일치의 요소는 교파적 전통의 차이 -- 예배 의식, 교회 직분, 세례 방식 --에 대한 것도 있고, 보수 대 진보 사이의 신학적 방향과 연관된 것도 있으며, 신앙 생활에 있어서의 강조 유무 -- 주일 성수, 새벽 기도, 방언 -- 때문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러한 신학적교리적신앙적 차이는 목회자를 포함하여 연관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커다란 갈등과 불협화음을 야기한다.

목회자는 자신이 겪는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호소하는) 갈등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갈등의 문제들이 하나의 위험 요인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 것인가? 다섯 가지 방면으로의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목회자 편에서 항시 형제 사랑(요일 4:20-21)을 신앙의 근간으로 삼는 근본 자세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주님 자신이 큰 계명과 관련하여서 (마 22:37-40), 또 용서의 문제와 관련하여서 (마 6:12) 이미 천명하신 바이다. 형제 사랑의 목표가 끈질기게 견지될 경우, 갈등을 오히려 목회자 자신과 타인을 위해 유익한 계기로 포착한다든지, 갈등 관계에 있는 상대에게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든지 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둘째, 목회자 자신의 영성 훈련 가운데 반드시 형제 사랑의 항목을 포함시켜야 한다. 갈등에 대한 조정과 회복의 결과는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훈련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평소의 예방이 중요하다. 목회자는 동역자나 교인들을 대할 때 늘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고귀한 존재요 (약 3:9), 같은 형제 자매이며 (마 23:8), 같은 지체임 (고전 12:27)을 기억하여야 한다. 또, 우리의 경건의 시간을 활용하여 형제 사랑의 영역에 연관된 자기 성찰, 동기 점검, 회개와 고백 등을 정기적규칙적으로 실행해야 한다. 만일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 싶으면 목회자는 결단, 조우, 용서, 회복 등의 단호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

셋째, 공동체 생활에서는 어차피 교정(矯正) -- 꾸중, 경고, 권면, 충고, 훈계 --의 조치가 필요한데,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교정을 베풀 때나 교우들로부터 교정을 받을 때 (건의, 불평, 비판, 비난 등의 형태를 통해) 지혜와 사랑과 민감성으로써 행동해야 한다. 교인들에게 교정을 베풀기 전에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자신의 동기를 점검해야 하며, 막상 교정을 베푸는 동안에도 상대방과의 신뢰 정도, 상황의 적실성, 상대방의 수용도 등에 대한 관찰과 판단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또 교정을 베푼 이후에는 그 대상을 위해 당분간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하며 상대방의 충격이나 상처를 극소화하기 위한 후속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성숙한 반응이 요구되는 것은 목회자 편에서 교정을 받았을 경우이다. 교인들 편에서의 교정 내용을 듣고 나서 갖게 되는 각가지 부정적 감정 상태 -- 놀라움, 당황, 실망, 배신감, 의기소침 등 --을 적절히 처리할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또 이러한 교정에 대해 목회자는 비록 때로 힘들고 내키지 않지만 그래도 필요하다면 기꺼이 응락 및 승복의 자세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신학적교파적신앙적 다양성과 관련하여 일관성 있는 신학적 지침을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지침의 구성은 그 자체가 엄청난 신학적 과제이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서 자세한 내용을 피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다음의 구분만큼은 어떤 경우에든 적용이 가능할 것이다. 즉, 본질적 내용 [사도신경의 내용과 성경의 권위]에 있어서는 어느 그리스도인으로부터든 Yes!라는 똑같은 반응을 기대해야 하지만, 비본질적 내용 [신학 체계, 교파적 특성, 신앙 전통 등]에 있어서는 연관된 조항마다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하도록” (롬 14:6) 한다는 방침이다.

다섯째, 목회자는 당회제직회 등의 공적 모임에 있어 상호 간의 의견을 조정하고 자기와 다른 견해를 수용할 수 있는 아량과 신앙적 훈련이 필요하다. 이것은 단지 이와 같은 회의(會議) 방식에 숙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 이외에 두 가지 사항의 깨달음이 요구된다. 우선,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정 모임에도 예배 모임의 경우와 똑같이 임재해 계심을 알아야 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행정 모임을 통해서 얼마든지 공동체적 인도를 베풀 수 있다는 것 (cf. 행 15:1-29)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될 때 각종 공적 회의 모임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향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는 실습의 장이 된다.

갈등의 문제는 어느 누구도 --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 피할 수가 없다. 이것은 두말 할 나위 없이 목회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따라서 우리는 갈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론적 탐구 [사회학경영학 분야에서의 연구 내용 및 결과를 참조], 신학적 정립 [목회학기독교 교육학교회론 쪽에서의 조명과 비판적 수용 작업 시도], 실제적 대응 [회 현장, 공동체 내에서의 인간 관계, 개인적 실행 방안 마련]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읽고 토론하기 자료 6 : 목회자가 비난을 들을 때

송인규

비난을 듣는 일은 우리의 생활에서 비일비재하지만, 목회자로서 비난을 들을 때는 다른 경우와 달리 어려움이 배가된다. 첫째, 한국은 아직 권위를 존중하는 사회이고, 목회자는 어쨌든 -- 뒤로 돌아서서야 어떻게 반응할 값에 -- 영적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그런 문화적 (일반 사회와 교회) 분위기에서 비난을 받는 일은 목회자 자신에게 상당한 상처를 준다. 둘째, 우리는 비난을 들을 때 어떻게 건설적으로 반응해야 하는지 배우지를 못했다. 그것은 일반 사회에서도 그렇고 신학교와 교회 교육에서도 그렇다. 따라서 목회자가 속으로 고통을 삭히느라고 마음에 병을 얻거나[억압] 아니면 비난자와의 노골적인 맞부딪힘 때문에 교회 전체 분위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분출].

우리가 교우들로부터 또는 동역자들로부터 비난을 들을 때, 가장 필요한 바는 제 3 자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의 심리적신체적 반응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일이다. 이러한 감정적 초연성(emotional detachment)의 견지는 생각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고, 단지 목회자가 하나님 앞과 자신 앞에서 솔직해지려는 의지만 있으면, 어느 정도 수월하게 이룰 수 있는 바이다.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목회자는 비난을 들으며 4 단계의 반응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첫 단계인 충격기(shock stage)는 대개 짧은 시간만 지속되는데, 이 때 목회자는 어안이 벙벙해한다든지 뭔가 좀 이상하다든지 혹시 잘못 알아들은 것은 아니냐든지 하는 식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충격기는 곧장 불쾌기(displeasure stage)로 연결된다. 이 단계는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될 뿐 아니라 비주기적으로 반복된다. 목회자는 비난을 들은 사실과 그 비난의 내용 때문에 그의 마음은 분노, 원망, 억울함, 섭섭함, 괘씸함, 보복감, 공격 욕구 등으로 뒤범벅이 되고야 만다. 속된 표현을 쓰자면, 아니 이것들이 정말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원, 더러워서 내가 뭐 여기 아니면 목회 할 데가 없는 줄 아는 모양인데 말이야” “이 자식을 당장 불러내서 따져 봐?등등의 꿍꿍이가 목회자의 입을 맴돌게 되는 것이다. 정말 비난자가 앞에 있다면 귀싸대기라도 올려 붙여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 심정이다.

그러나 목회자는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또 실상 이렇게까지 파괴적이고 분출적인 결과를 낳는 경우는 드물다. 이렇게 분노의 시간이 흐르면서 목회자는 합리기(reasoning stage)로 접어 든다. 이 단계에서는 왜 비난자가 그러한 비난을 했는지 곰곰이 되새겨 보는 때이다. 그 때 그는 비난의 내용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생각들을 정리해 본다. 그런 비난을 받게 된 목회자 편에서의 문제점은 무엇이었는지, 오해일 경우 어떻게 해서 그런 오해를 받게 만들었는지, 비난의 근거가 희박할 경우 왜 비난자가 그러한 내용으로 비난을 했는지 심층적 원인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또 이 단계에서 목회자는 속으로나마 -- 비록 공적으로 노출하든지 비난자에게 사과하든지 하지는 않지만 -- 자신의 약점과 문제점을 인정한다. 그런 면에서 합리기는 목회자를 더욱 성숙의 도상으로 인도할 수 있는 은혜의 훈련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만일 이 과정이나 단계가 없으면 목회자는 심리적 퇴행증에 휩싸여 더 이상 영적 지도자로서의 권위와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드디어 목회자는 비난을 들은 후 종착점인 모색기(strategy stage)에 이르른다. 이 때 목회자는 비난자와 비난 받은 내용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할지 전략을 짠다. 그 대상과 사적으로 만나야 할 지 아니면 그냥 공적인 석상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힐 지 결정해야 한다. 비난 받은 내용을 인정할 것인지 오해에 기초한 것이라고 해명할 것인지 정해야 한다. 앞으로 이런 문제와 관련해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 밝혀야 한다. 이런 모든 것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이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목회자의 심리 상태가 맺고 끊듯이 분명하게 4 단계를 거치는 것은 아니다. 3 단계인 합리기에 들어섰다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마음 속이 분노와 원망으로 뒤끓고 모든 것이 처음의 불쾌한 상태로 되돌아가는 듯한 느낌도 받을 것이다. 몇 날씩 밤잠을 설치면서 2 단계와 3 단계 사이를 왔다갔다할 지도 모른다. 모색기에 다다랐나 싶었는데, 다시금 2 단계로 치닫는 마음의 상태도 목격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전체적으로 보아 이상의 4 단계를 겪는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점에서 필자는 비난이 목회자에게 끼치는 유익을 언급하고자 한다. 이것은 상당히 의아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이다. 만일 목회자들 편에서 비난의 경험을 제대로 잘 소화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얻는 신앙적 유익이란 엄청난 것이다.

첫째, 자기 객관화의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좋다. 남에게 비난을 들으면 목회자는 바로 그 면에서 다시금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된다. 한국 교회의 실정에서 볼 때, 목회자는 너무 입에 발린 -- 사실과 거리가 먼 -- 찬사에만 접하는 수가 많은 것 같다. 은혜 받았습니다” “수고 많이 하십니다” “아주 좋았습니다” “우리 목사님의 최고지요등의 반응에 너무 익숙한 목회자들은 정말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런 표현에 기초해 목회자 자신의 인격과 능력을 평가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처사이다. 그런데 교우들로부터 비난을 들으면서 자기 자신의 참 모습에 대한 현실적 평가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둘째, 비난은 목회자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자기의(self-righteousness)자만심을 노출시키는 유익이 있다. 목회자들은 대부분 목회의 경력이 쌓여감에 따라 관록이 붙고 특히 어떤 영역에 있어서는 상당한 자신감과 자부심을 갖게 마련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건전한 자신감과 불건전한 자만심/자부심 사이에는 경계선이 모호하다. 곧 어리석은 부자처럼 (눅 12:16-19) 또는 바리새인처럼 (눅 18:11-12) 자기 능력과 자질, 성취한 바에 매료되어 영적 나르시즘에 빠지기가 쉽다. 이 때 비난은 우리를 그릇된 자만심에서 깨우는 영적 각성제요, 나팔 소리 역할을 한다. 비난의 경험을 통과한 후 그 목회자는 비록 자신에게 어떤 장점이 있다 할지라도 다시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만을 의존하는 겸손한 신앙의 보유자가 된다는 말이다.

셋째, 비난의 또 다른 유익은 우리 목회자가 지도자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지도자치고 백성으로부터 비난을 듣지 않은 경우가 없다는 말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모세와 바울을 들 수 있다. 모세의 40 년 광야 생활은 실상 백성으로부터의 불평과 원망으로 점철되어 있다 (출 15:24; 16:2; 17:3; 민 14:2-3; 16:41; 20:2; 21:5 등). 바울 역시 복음 때문에 유대주의자들과 거짓 사도들로부터 끊임없는 비난을 받았다 (행 21:27-28; 고후 10:10-11; 11:11-15; 6:12 등). 물론 이 말이 일부러 비난을 들으라든지 또는 비난이 저절로 우리를 지도자로 만들어 준다든지 하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지도자로 나서면 비난 들을 각오도 해야 하고, 그러한 비난의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참 일군임을 증명해 준다는 말이다.

넷째, 비난이 주는 마지막 유익은 비난의 경험을 통해 목회자들이 더욱 신앙적 자격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교우들 역시 신앙의 고민 가운데 하나는 성도 간의 관계 문제요, 문젯거리 중 많은 부분이 비난과 연관이 되어 있다. 그런데 목회자 자신이 비난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고, 그 가운데에서도 유익을 맛본 경험이 있다면, 그는 비난으로 고민하는 교우들을 얼마든지 도울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실로 바울이 하나님에 대해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후 1:4)라는 고백 가운데 나타난 것과 같은 이치이다. 목회자가 비난을 받을 때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뼈아픈 경험을 통해 언젠가 다른 어떤 교우들을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비난은 싫은 일이다. 불쾌하고 괴롭고 모른 척하고 싶은 바일 것이다. 그러나 비난이란 우리의 삶 -- 그것이 목회자의 경우라 해도 --에서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왕 겪을 바에야 좀 더 솔직하고 용기 있게 직면하도록 하자. 비난의 경험을 통해 더욱 성숙하며 더욱 목회자적 자질을 키워가도록 말이다.

*. 읽고 토론하기 자료 7 : 목회자와 비교: 모든 비교가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송인규

비교가 주는 좋지 않은 영향

목회자는 원하든 원치 않든 다른 목회자와 비교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또 자신을 다른 목회자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런데 비교의 결과 종종 마음이 불편하고 심란해지곤 하기 때문에, 비교를 바람직하지 않은 일로 여겨 꺼리게 되고, 비교하지 마시오!라는 금령을 철칙인양 소개한다.

이러한 충고는 이해할 만하다. 예를 들어, 여기 같은 지역에 소위 괄목할 만한 교회 성장을 이룩하고 세인의 주목을 끌고 있는 한 목회자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자세히 알아본즉 그는 실로 열악하기 짝이 없는 조건 하에서 그러한 사역을 감당한 것이었다. 그러면 그의 소문을 들은 다른 목회자는 자신을 그와 비교하면서, 도대체 나는 뭐람?” “내가 목회자로서 무엇이 부족하길래 저 친구와 같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대관절 어떻게 해야 좀 더 교회가 부흥할 수 있지?라고 자문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은 실망, 좌절, 부러움, 질투, 패배감, 자포자기 식의 태도, 의욕 상실 등으로 뒤엉키는 것이 보통이다.

비교가 가져오는 이와 같은 폐해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될 수 있으면 비교를 피하려 들고, 비교하지 않는 척하며, 또 비교라는 괴물을 백안시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

비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

비교 기능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깊숙한 수준에서 우리의 정신 작용에 관여하고 있다. 비교 기능이 발휘되는 것은 많은 경우 거의 무의식적 수준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중요성과 필수성을 놓치고 산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중요한 두 가지 사항 -- 인간의 자기 정체 파악 및 공동체 내에서 직분자를 선택하는 일 --을 생각해 보자. 이러한 활동에는 비교 기능이 필수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만일 그러한 기능의 발휘가 없다면, 자아상 형성이나 지도자 선발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후자와 관련하여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의 예(행 6:1-7)를 들 수 있다.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 빠져서 불평할 때, 열 두 사도는 업무 분장을 시도했고, 구제 사역을 위해 일곱 명의 일군을 선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런데 선택해야 할 일군의 자격은 성령과 지혜와 믿음의 충만 (행 6:3, 5)이었다. 그렇다면 일반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자격자와 비자격자의 상태를 비교해야 한다! 누가 다른 이들보다 더 성령으로 충만하고 더 믿음으로 충만하며 더 지혜로 충만한지 비교해 보아야지만, 자격 조건이 되는 이들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진정한 자기 파악의 경우에도 비교 기능은 필수적으로 발휘되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고전 15:9)라고 고백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자기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고전 15:9) 때문이었다. 사도란 원래 교회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 법 (cf. 2:20)인데, 오히려 교회를 핍박하여 무너뜨렸으니 감히 사도로 불릴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이었다. 그런데 그가 그러한 자기 인식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다른 사도들과 일일이 비교해 본 때문이었다. 만일 바울에게 그러한 비교 기능이 없었다면, 결코 진정한 자기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토록 비교 기능은 우리의 정신 활동에 있어서 매우 필수적인 요소이다. 방금 예로 든 자기 파악이나 지도자 선택 말고도 수없이 많은 활동들은 실상 비교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왜 비교 때문에 실망과 좌절과 자기 연민과 질투가 야기되기도 하고, 반대로 진정한 자기 파악과 지도자의 올바른 선택이 가능하게도 되는가? 이것은 비교 기능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비교 기능을 활용하는 우리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가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비교 기능이 올바른 마음의 방향에 지배를 받으면 바람직한 정신 활동 -- 진정한 자기 파악, 지도자의 올바른 선택 --이 나타나고 반대로 죄악된 마음의 방향에 사로잡히면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정신 상태가 야기되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마음의 방향을 자아 사랑,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의 세 가지로 정리하고자 한다 (cf. 마 22:37-40). 즉, 우리의 비교 기능이 오직 자아 사랑만의 지배를 받으면 마음에 일어나는 정신 활동은 부정적인 것이 되고, 같은 비교 기능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충일하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바람직한 정신 활동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비교 기능 자체를 문제시하기보다도 비교 기능을 필수적 도구로 차용하는 우리 마음의 방향 --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자아 사랑 --을 끊임없이 점검해야 할 것이다.

목회자와 올바른 비교

만일 목회자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으로 충만해 있다면, 나와 타인의 목회 상황이 이렇든 저렇든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비교 기능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목회 사역이 다른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호황을 누릴 때 우리는 교만해지고 다른 목회자들 (특히 우리보다 못 한 이들)에 대해 자랑과 뽐냄으로 나서기가 쉽다. 또 반대로 우리보다 뛰어난 목회 사역의 수행자들을 접할 때, 우리의 마음은 주눅이 들고 지나친 부러움과 질투심, 또는 폄하적 충동으로 가득하기가 쉽다. 이 모든 반응들은 비교 기능 자체보다는 비교 기능이 자아 사랑만의 방향에 의해 지배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 그렇게 될 필요는 없다.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방향이 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쪽으로 움직이도록 힘써야 한다. 만일 마음이 방향이 그렇게 잡힌다면 우리의 비교 기능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만일 나의 목회 사역이 다른 이들에 비해 뛰어나다고 해도 나는 바울 사도처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라고 고백할 것이다. 우리의 비교 기능은 자신을 낮추고 오히려 하나님과 그 분의 은혜만을 높이는 놀라운 결과를 초래하도록 사용된 것이다.

또 반대로 나보다 탁월하게 목회 사역을 감당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우리의 비교 기능은 바람직한 결과를 산출할 것이니, 이는 상대방에 대한 차이의 인식이 그를 통한 하나님이 역사를 발견하도록 자극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세례 요한처럼 다음과 같은 염원을 표현하게 된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 3:29-30).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 우리보다 훌륭한 사역자를 두시기 기뻐하셨고 그들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충만하면 우리의 비교 기능은 이처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늘의 기쁨과 열망을 낳는 법이다.

어차피 인간은 비교를 피할 수 없다. 이것은 목회자도 마찬가지이고, 특히 목회 사역과 관련하여 끊임없는 비교 활동이 이루어진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무엇에 지배를 받고 무엇으로 가득해 있느냐의 문제이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충만한 이상, 목회 사역에 대한 비교는 겸손, 하나님 높임, 동료에 대한 인정,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쁨 등 하늘의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 읽고 토론하기 자료 8: "이 길 외에 어떤 길을 가겠습니까?"

신학생 컨퍼런스에서 이재철 목사와 참석자들이 눈물 쏟은 사연

2011년 08월 15일 미주뉴스앤조이

"목사님,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합니까?" 신학생 멘토링 컨퍼런스 둘째 날인 8월 9일, 스무 명 남짓한 교인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해 목회하고 있다는 한 참가자는 질문과 함께 눈물을 쏟았다. 이재철 목사의 책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었다는 그는 책을 대할 때마다 행복했지만, 정작 그렇게 살 자신이 없었기에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했다. 십자가가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겠나"는 물음과 함께.

이재철 목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허랑방탕한 알코올중독자에 도박 중독자였습니다. 마리화나에도 손을 대었습니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저는 도저히 목사가 될 수 없는 무자격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보혈로 저를 구원해주셨을 뿐 아니라, 저를 당신의 종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탕감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살수밖에 없고, 죽도록 그분께 충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석자의 질문에 대답하던 이재철 목사의 목소리도 떨리기 시작했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이재철 목사는 눈물을 닦으며 질문을 한 참가자에게 "우리 목회의 동기와 출발점이 내가 아니고 그분이 된다고 하면 이렇게까지라도 해야 하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이 길 외에 어떤 길을 가겠습니까 하고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참된 목회자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목회 초년생의 절규에 이재철 목사는 쉽게 꺼내놓기 쉽지 않은 지나온 삶의 질곡을 조심스럽게 공개했다. 자신의 고백을 통해 한 젊은 목회자가 평생 참된 목회자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기를 위한 마음에서였다.

강의 형식이 아닌 질의응답이 오고가는 현장의 분위기를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모한 일이기도 하다. 내용보다 더 중요한 정황을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내용을 옮긴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학생 멘토링 컨퍼런스의 현장은 멘티들의 영적인 고뇌와 멘토들의 따뜻한 위무가 함께하는 자리였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다음은 이재철 목사의 두 번째 강의 때 오고갔던 내용들이다.

참가자 / 예전에 스님과 신부를 모셔서 강의를 열었다고 들었다. 아이들에게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뉴에이지 사상과 다원주의가 강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를 뛰어넘는 감염이 들어오면 안 된다는 우려가 있는데 이런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이재철 목사 / 스님과 신부가 독신으로 산다. 그렇다고 개신교 목사가 스님과 신부가 추구하는 구도의 정신보다 엷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님도 사귀어보고 신부님도 사귀어보라고 진심으로 당부한다. 구도자가 어떤 중심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도'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일종의 '도'를 쫓는 구도자다. 한국의 유명한 사찰의 스님들이 기거하는 곳을 담 너머로 들여다보면 고무신들이 자로 잰 듯 가지런하게 놓여있고, 아무개 신부의 책상 위에는 비뚤어진 것이 없다. 내가 도를 추구하면 내 주위가 저절로 정돈된다. 목사들이 식당에 가면 구두를 꼭 남이 정리해줘야 한다. 우리 교역자에게 해주는 말이 있다. 교인들은 목사가 하는 말에 감동 받지 않는다. 목사가 떠난 책상을 보고 감동 받는다. 밥알을 지저분하게 남기지 마라. 책상을 깨끗하게 정리해라.

우리 구도의 정신은 신부, 스님 이상으로 철저해야 한다. 독신이 아닌 이상 가족이 함께 결단해야 한다. 아이들 키우면서 목사의 아들이 아니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도록 노력하고 있다. 내가 목사로 살기로 결단했기 때문에 내 아내와 아이들도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면 권위는 저절로 생겨난다. 함께 목회하고 살아가는 교인들에 의해서 권위는 생겨난다. 사람들이 목사를 신뢰한다.

목회자는 경제적인 자립이 되어야한다. 그것은 자기가 필요한 만큼의 돈을 스스로 벌어들일 수 있는 능력이 아니고 자기에게 주어진 경제적 상황에 자기를 맞출 수 있는 능력이다. 그 상황에 나를 맞출 줄 아는 것, 물질로부터 초월하는 것 그 이후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고 바울은 말한다. 100주년기념교회에서 415만 원 봉급을 받는다. 세금을 떼고 나면 약 370만 원 정도를 받는다. 내 아내가 홍성사를 경영하면서 약 300만 원 받는다. 거기에서 십일조한다. 판공비는 따로 없다. 내가 쓴 책이 상당히 많이 나갔다. 그 인세가 1 억이 모였을 때, 홍성사가 조그마한 창고를 지어야 해서 그 돈을 다 줬다. 또 인세가 5,000만 원 모였을 때 홍성사 직원들이 다 같이 홍성사 문을 닫고 터키 성지 순례를 다녀왔다.

내가 주님의 교회를 퇴임했을 때, 교회에서 나에게 예우를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냐고 물어왔다. 주님의 교회에서 몇 억 받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하지만 정말 타락했던 나를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나를 구하셔서 내가 주님의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내가 월급을 받는 고용인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는 교인들과 더불어 사는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퇴직금을 준다고 해서 사양했다. 재정 장로가 목사님이 퇴직금을 받지 않으면 후임자들이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문제 제기를 했는데,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그래서 법적 퇴직금만 달라고 했다. 퇴임할 때 한 달 봉급이 220만 원이었는데 열 달치인 2,000만 원을 퇴직금으로 받았고, 그 돈은 정신여고 건축 기금으로 다 냈다.

내 처와 나는 돈을 모으는 통장을 가지지 않고 우리 명의 집을 가지지 않기로 하나님께 서원하고 살고 있다. 늙어서 어떻게 살겠는가라는 질문에 어제 셰퍼 박사와 대천덕 신부 이야기를 하면서 나왔었는데, 두 분이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한 분은 알프스 산 속에서 한 분은 강원도 황지 산 속에서 계시는데 그분들이 살아생전에 단 한 번도 굶은 적이 없다고 했다.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 셰퍼 박사의 경우 어느 날은 살림 사는 집사가 와서 내일 먹을 것 없다고 했다. 새벽이 되니 사람들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청년들이 들어오는데 청년들 어깨에 빵, 버터, 과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평소 아침 식사 시간에 도착했다고 한다. 어디서 왔냐고 물으니 영국 런던에서 왔다고 했다. 몇 달 전부터 준비해서 어제 영국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셰퍼 박사에게는 그것이 그냥 빵이 아니었다. 주님께서 셰퍼 박사에게 빵을 주기 위해서 몇 달 전부터 영국 청년들을 감동시키고 비행기를 태워서 모든 것을 시간을 맞춰 오지 않았나. 나도 그런 리듬으로 살려고 애쓰고 있다. 목회자가 큰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노후 걱정을 하고, 자기가 사랑하는 교인들에게 퇴직금으로 몇 억 내라고 하며 한국에서 요즘 싸움이 자주 벌어지지 않나. 우리가 정말 물질에서부터 자유하는 이 믿음, 내가 내 기득권을 포기하고도 걸어갈 수 있는 리듬으로 간다면 내게 예금 통장이 하나 없어도 하나님께서 내 노후 대책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참가자 / 내가 칭찬하면 하나님 칭찬을 가로채는 것은 아닌가, 칭찬은 어디까지 해야하는가?

이재철 목사 / 내가 주님의교회에서 목회할 때, 어떤 여집사가 새벽 기도가 끝나면 아무도 모르게 타월을 갈았다. 아무도 모르게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자리에 주님의 터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목회자의 칭찬과 사람의 칭찬이 얼마나 공허한지 알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하시는데 저 분만이 즐기는 하나님의 교류를 방해하지 말자며 새벽 기도 끝나고 바로 화장실을 가지 않았다.

헌금 봉투에 이름 안 쓰는 것도 그래서 시작한 일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일 원이든 만 원이든 내가 내서 하나님께 오는 위로를 내가 받으면 세상 사람들의 스포트라이트가 아무 소용없게 된다.

우리가 아이를 키우는 데 단계가 있다. 교인들 중에는 어깨를 쓰다듬어야 할 교인도 있고 내가 말로 칭찬해야 할 교인도 있고 한 번 툭 쳐야 할 교인도 있다. 그러나 평생을 교인이 목회자의 칭찬의 틀 속에 갇혀 있게 하면 안 된다. 주님의 손길을 바로 느낄 수 있도록 통로가 되어주는 것이 목회자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참가자 / 100주년기념교회의 직분 호칭, 제도 문제에 대해 직접 들어보고 싶다.

호칭 제도는 잘 아시리라 생각한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제네바에서 칼뱅이 개혁을 했다. 칼뱅이 개혁을 할 때 칼뱅은 장로교회라는 이름으로 만들지 않았다. 칼뱅은 개혁 교회(reformed church)를 시작했다. 교황 일인 치하의 교회를 개혁(reform)하는 교회를 만든 것이었다. 교인들의 뜻을 대의하는 장로들을 뽑아서 대의정치를 하게 한 것이다. 우리가 교회를 개혁하는데 내가 제네바에서 하는 시스템을 따를 필요가 없다. 현지의 시스템에 맞추라고 칼뱅이 말했다. 그 모든 교회의 이름은 개혁 교회(reformed church)다. 칼뱅의 개혁 정신을 살리는 교회다. 교인들이 선출한 장로가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장로를 하는 것이 미국의 정서에 맞지 않아 미국의 장로교회는 직능의 의미로 장로를 삼았다. 20대 장로는 20대를 대표하는 직능 대표로 뽑히는 것이었다.

이 장로교가 한국의 유교적 가부장 제도와 결합하면서 변형됐다. 지난 1~20년 동안 장로 제도에서 그치지 않고 장로에 필적하는 직분을 주기 위해 세계 유일의 권사 제도를 만들었다. 이 직분 제도가 한국의 교회를 부흥하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100년을 지나오면서 장로, 권사가 계급화되고 서열화되면서 교회의 문제점이 된 것이 실상이다. 그래서 봉사자인 장로, 권사 투표를 하는 데 돈을 쓰지 않나. 교회에 따라서 차량 안내를 해라, 성가대 대장을 해라하는 식의 장로 잘 뽑히는 부서가 있다. 오늘날 한인 교회는 어떤가? 장로, 권사 안 주면 교회를 떠나지 않나. 장로, 권사라고 하는 제도가 변질된 것이다.

한국 교회의 장로, 권사 제도가 큰 기여는 했지만 지금은 부작용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바꿔 입어야 할 백년 된 옷을 바꾸지는 않는다. 장로를 뽑아야 임직예배할 때 헌금을 할 것이고, 그게 교회 재정이 도움이 되니, 이런 악순환이 반복된다. 감리교는 본래 장로가 없지만 한국에는 있지 않나. 침례교도 마찬가진데, 호칭 장로가 재작년 통과됐다고 들었다. 다른 교단과 일할 때 다른 교단은 다 장로가 나오는데 자기들만 집사가 나오면 차이가 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걸 보면 장로 제도가 철저한 계급제가 되었다고 봐야한다.

처음 주님의교회에 가면서 나는 10년, 장로는 13년으로 임기를 정했다. 내가 퇴임하고 나서 장로들이 인수인계해야하니 3년을 보탠 것이다. 장로, 권사, 집사는 임기 끝나면 백의종군하는 것으로 법을 바꿨다. 이러한 결정 이후에 다른 교회에도 임기 정하고 신임 투표하는 무브먼트가 있었다.

2005년부터 목회한 100주년기념교회는 20개 교회와 26개 교회 기관이 연관돼 있는 초교파 교회였다. 교회는 모든 교파를 어우르는 연합교회지만 제도적으로 어느 한 교회의 헌법을 따르는 일은 없는 독립교회로 존재했다. 이런 초교파적인 교회라면 한국 교회에선 언젠간 고쳐져야 하는 장로, 권사의 폐습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해 제도를 바꾸자고 했다. 장로, 권사가 서열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호칭제로 하자고 제안했다. 아무리 믿음이 뛰어나더라도 돈이 없으면 장로가 될 수 없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기 때문에 일정한 기준을 두고 호칭제 장로를 두자고 했다.

막상 시행되자 우리 교인이 늘어나다 보니 우리 교회가 마구 장로, 권사를 세우기 때문에 교인이 늘어난다는 이야기가 도는 등 여러 가지로 역풍을 맞았다. 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바뀌어져야 할 것이라고 본다. 20~30년 후가 되면 현재와 같은 장로, 권사 제도는 바뀌어 질 것이라고 본다. 첫 번째 발판을 까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다.

참석자 / 오늘 날 시대가 말씀의 시대다. 그런 말씀이 소비되는 시대. 클릭 한 번이면 대한민국 명 설교가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데, 나 역시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큰 깨달음을 얻는다. 그걸 나누기도 한다. 스무 명의 성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는 나는 어떤 자리 매김으로 해야 하는지, 그렇게 좋은 설교를 다 들을 수 있는데, 내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들에게 담임 목사로서 이 말씀의 홍수에 시대에 무엇을 전해야하는지 알고 싶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하는가. 목사님의 책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을 때마다 참 좋고 행복했다. 항상 그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며 눈물이 난다. 나는 그렇게 살 자신이 없다. 십자가가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겠나.

이재철 목사 / 참가자께서 말씀하신 "왜 그렇게까지 해서 사는가" 하고 물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분께서 살려주셨기 때문이다. 난 대학교를 졸업하고 외국인 회사에 있다가 사업을 시작해서 큰 돈을 벌었다. 20대에 큰돈을 벌었으니 내 주위에 얼마나 많은 중매쟁이들이 있었겠는가. 50번도 넘게 중매를 봤다. 그러던 중 한 번 파혼의 아픔을 겪은 여성분을 만나게 됐는데 이 분과 결혼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내가 스물일곱 살 되던 삼월 하순에 결혼했다. 결혼하고 2주 만에 아내가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가진 돈으로 2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썼다. 심지어는 외국에서 사람을 불러오기도 했고, 전국의 기도원도 다 돌아다녔다. 하지만 결국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홀아비가 되어서 장례식에서 뼈를 뿌리면서내 마음속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나 이제 당신을 안 믿겠다. 당신 말씀을 통해 뭐라고 했는가. 이 세상의 어떤 부모가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나. 내가 당신에게 떡 달라고 했나, 내가 생선 달라고 했나, 당신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생명, 결혼한 지 2주 만에 암 환자 판명난 이 생명 구해달라고 했는데 생명 거두어갔다. 나도 당신 안 믿겠다"라고 결심하고 집에 갔다. 집에 가서 오후 3시에 침대에 누웠다. 왼쪽 창문에서 햇볕이 들어오는데, 처음 보는 빛이었다. 그때 마치 타자기가 활자를 칠 때 나는 소리와 함께한 글자씩 보이는 듯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않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죽어도 영혼이 죽지아니하리니."성경도 제대로 읽지 않을 때였기에 그런 구절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지만, 나는 버리지만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를 잃은 아픔은 가시지 않았고, 마리화나에 손을 댈 만큼 정말 형편없이 살았다. 하지만 그런 만큼 주일에는 더 열심히 봉사했다. 그게 면죄부였던 셈이다. 주일날 봉사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중략>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몇 번 만나고 나서 아내에게 "나는 당신의 결혼 상대가 될 수 없다, 나는 결혼해서는 안 될 7가지 이유가 있다. 결혼도 해본 사람이고, 나는 술꾼이고, 나는 당신만큼 세상의 학력도 좋지 않고, 지금 하고 있는 사업도 부도가 났다"는 등의 이유를 댔다. 당신 같이 훌륭한 사람은 정말 좋은 남편 만나라고 했다. 만약에 그저 내가 그 사람을 보고 이 사람 괜찮으니까 내 사람 만들어야지 했으면 깨졌을 것이다.

이 사람이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눈물을 흘리고 한 마디를 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래서 나와 결혼했다. 그런데 내 삶의 습관이 어디 가겠나. 결혼하고 늘 술 먹고 새벽 2시에 들어갔는데 아내가 나를 기다리다 엎드려 잠이 들어있는데 머리맡에 일기장이 있었다. 지금도 내 아내의 서랍을 열어보지 않는다. 그런데 그 때 이상하게 그 일기장을 한 번 봐야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일기장에 눈물 자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난 오늘도 하염없이 논길을 걸었다. 그리고 죽음을 생각했다. 손목을 그을까, 약을 먹을까"는 내용의 고민을 쓰다가 "아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남편인데. 내가 믿어야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내 처는 술독에 빠져 있는 나에게 싫은 소리를 한 번도 안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가 방탕한 삶을 살아도 이 사람은 뭘 모르는구나 하고 여겼다. 그런데 그 일기장을 보면서 나 때문에 죽음까지 생각하면서도 예수 때문에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예수님의 사랑을 그렇게 수없이 들었는데, 그 사랑은 단지 책 속의 사랑이요, 전설 속의 사랑이었을 뿐 그런 사랑을 누구도 보여준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사랑을 내 아내의 일기장을 통해 확인했던 것이다. 그 순간에 난 술이 머리끝까지 취해 있었지만 성령을 만났다. 그 날 내 인생이 바뀌었다. 내가 밤새도록 지나온 과거를 보면서 잘못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고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내 인생길을 바꾸어야겠다. 그냥 있으면 또 이 인생을 답습할 것이기 때문에 인생길을 바꿔야겠다'라고 다짐했다. 내 인생길을 바꿔야겠다고 아내에게 이야기했더니 아내가 "고맙다. 이런 날을 기다렸다"고 했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사람들이 나에게 교회(주님의교회)를 개척하자고 제안해서 그 교인들에게도 나의 지나온 삶을 다 이야기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 주님의교회를 시작했다. 나는 허랑방탕한 알코올중독자에 도박중독자였다. 마리화나에도 손을 대었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나는 도저히 목사가 될 수 없는 무자격자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보혈로 나를 구원해주셨을 뿐 아니라, 나를 당신의 종으로 세워주셨다. 주님께서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고, 죽도록 그분께 충성할 수밖에 없다. (눈물) 그렇기 때문에 내 의지나 내 노력이나 내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하지 않는다. 그 분이 나를 살려주셨고, 내가 그 분에게 내 삶을 드릴 때, 그 분이 내 아이들, 내 삶을 책임져 주시는 것을 매일 매일 확인하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 이 이상 최선의 길이 없다.

질문한 분은 나와 다른 인생을 살았지만 정말 예수님의 보혈이 죽음에서 나를 살렸다고 생각한다면 그 은혜의 무게는 당신이나 나나 똑같지 않겠나. 우리 목회의 동기와 출발점이 내가 아니고 그 분이 된다고 하면 이렇게까지라도 해야합니까가 아니라 이 길 외에 어떤 길을 가겠습니까 하고 물어야 한다.

초대 교부 폴리캅이 예수를 부인하지 않으면 화형 시키겠다고 협박당했을 때, '그 분이 내 평생에 예수가 나를 배신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예수를 배신하겠느냐'고 화형길로 가지 않았나. 내 평생에 배신하지 않았던 그분이었기 때문에 그분이 내가 불타 죽은 이후를 책임져주지 않겠냐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참가자 / 목회를 하다보면 여러 가지 유혹을 만나게 되는데, 그런 것들을 극복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이재철 목사 / 신학교를 가기 전에 사람이 누려볼 수 있는 것들을 누려볼 수 있었다. 20대 때 벌써 한국에서 가장 큰 아파트에서 살고 벤츠 탔다. 내가 주님을 만났을 때 그것이 얼마나 어이없고 허망한 일인지 잘 알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티끌만큼도 미련이 없다.

여러분들의 교회가 커지면 여러분을 사랑하는 장로나 교회의 교인들이 여러 가지 제의를 할 것이다. "목사님, 우리 교회 규모면 기사도 있어야하고 차도 있어야 합니다." 나는 다 해봤고 그것이 주님의 몸된 종으로서는 취할 길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에 유혹이 전혀 없다.

주님의교회가 상담 전화를 개설했을 때 지금은 큰 교회들이 많이 하지만 그땐 교회로는 처음이었다. 소문이 나면서 전국에서 상담 전화가 왔는데 그 상담원들이 자기들이 할 수 없는 내용은 나한테 넘겨줬다. 대부분은 목회자의 사모들이었다. 목사 사모 고민의 대부분은 부부 관계다. 남편이 사랑하지 않는 것이었다. 남편이 여자 교인들과 불륜을 저지르거나 하는 경우다. 이런 전화를 부지기수로 받았다. 내가 이렇게 말했다. "사모님은 목사님이 들어오실 때 여성으로서 남편을 맞는가, 자기 자신을 한 남자의 아내로서 가꾸어 가는가. 내가 가꾸지 않고 내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빠지는가, 목사는 하루 종일 여자들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

내 처가 집에서 단순히 목사의 아내의 역할만 할 뿐 한 남자의 아내로 여성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죄성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여자한테 시선이 가지 않겠는가. 그런데 내 처가 나한테 참 잘해준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볼 필요도 없고, 내 처보다 더 나은 다른 사람을 볼 수도 없다. 그래서 난 내 처와 영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이 문제도 나한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김영봉 목사 / 책에서도 읽을 수 없는 속 이야기였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상처 이야기, 아픈 이야기를 들을 때 더 큰 감동을 받게 되는 것 같다. 더군다나 이렇게 우리가 겉모습만 보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귀족처럼 생기게 만드시고 어떤 사람은 머슴처럼 만들어 놓으셨나' 하고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투덜거릴 일이 아니다(웃음).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분의 아픔의 이야기가 훨씬 더 강하게 우리에게 와 닿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참가자 / 여성 사역자로서 부르심에 따라 살기에 이 현실이 척박하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성경에 보면 여성은 가르치지 못한다고 나와 있다고 말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그러면 여자 전도사들 교육부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전도사들이 애들에게 설교하는 것은 괜찮고 공식 석상에서는 왜 안 되나. 각 개인에게 주신 부르심, 소명에 대한 반응을 했을 때 여자와 남자로 구분 짓는 현실이 답답하다. 교회 안에서 머물 수 없으니 여성 사역자들은 선교사로 다른 단체로 간다. 왜 이재철, 김영봉 목사 자리에 여성 사역자는 없을까.

이재철 목사 /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 하나님 형상이 남자면 남자만 만들었을 것이고 여성이면 여자만 만들었을 텐데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여자와 남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에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다 있다고 본다. 교회에도 여성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하다. 목회자도 있어야하고 장로도 있어야 한다. 우리 교단에서 여성 안수가 통과됐을 때 그 해에 여전도사를 안수 받게 했다. 그러나 여성 교역자들이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남자들도 마찬가지지만 난 늘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목회를 해야한다는 점이다.

여성 교역자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현실적으로 결혼하면 애 낳고 키워야하는데 남성 교역자처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똑같이 할 수 있는가? 그것 할 수 없다면 여성 교역자들의 일은 결국 제약적이지 않은가. 우리 교회의 여성 목사는 독신이다. 그 분은 다른 남자 교역자들과 조금도 구별하지 않는다. 그 목사는 우리 교회에 두 번째로 빨리 들어와서 봉급도 두 번째로 많이 받고 있다. 일을 맡기거나 역할에 전혀 차이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결혼하고, 아이 키우고 이런 것들을 다 하면서 "남자 교역자 같은 자리를 다오"라고 하는 것은 남자가 그 자리에 있을 때 더 하나님의 유익이 있지 않겠는가. 이 부분을 여성 목회자들이 꼭 생각해야 될 부분이다.

참가자 / 목회자로서 비전에 대해 말해 달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야망이나 꿈을 비전이라고 포장한다. 어떤 가시적인 결과는 나오지만 후유증이 남을 때가 더 많다. 내가 <비전의 사람>에서 말했듯 비전은 나의 비전이 아니고, 가령 나를 예로 든다면 수렁에 빠져있던 불쌍한 이재철이라는 한 인간을 정애주라는 한 여인을 통해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나를 구원하셨다면, 나를 통해서 이루실 그 분의 비전을 따져야 하는 것이다.

비전은 나를 통해서 이루실 그분의 비전에 내가 동참하는 것이다. 그럼 그 비전을 어떻게 아는가? 이것은 기도원에서 아는 것도 아니고 책상 앞에서 아는 것도 아니고 나의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아는 것이다. 그래서 비전의 사람들의 인생은 모자이크 판과 같은 것이다. 내가 내일 무엇이 될지 모르지만 오늘 주어진 현실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고 열심히 한 장씩 색종이를 붙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다마섹에서 주님을 만난 다음에 13년 동안 다소에서 칩거하고 1년 동안 안디옥에서 목회하다가 선교사로 파송된 뒤 근 20여 년이 지났을 때, 에베소에서 열심히 살아온 자기 인생의 모자이크 판을 보고 "아! 로마구나, 내 생을 던질 곳이 로마구나"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청년 집회에 가면 로마의 비전을 받은 바울처럼 아프리카 비전 받을래, 남미 비전 받을래 하고 말한다. 그러니까 선교지마다 문제투성이다. 그건 내 비전이지 하나님의 비전이라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열심히 모자이크 판을 붙이다 보면 어느 날 그것이 보이는 것이다.

어제 말했던 것처럼 아무도 안 부르는 주님의교회와 제네바한인교회를 간 것도 주님의 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열심히 매일 매일 살았다. 그랬더니 20년 동안 자립되지 못했던 교회가 이제 자립을 해서 지금은 다른 교회를 돕는 교회가 됐다. 내가 떠난 지 10년 됐는데 아직도 그렇게 잘 하고 있다. 비전은 내가 내 것을 찾아서 이루려고 하며 꼭 인간적인 방법을 강구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비전을 단 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내 생을 던지면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참가자 / 목사의 가정, 사모의 역할에 대해 말해달라.

이재철 목사 / 목사의 가정은 모든 사람이 들여다보는 투명한 유리가 끼워져 있는 쇼윈도가 되어야한다. 내 자식들은 목사가 아니기 때문에 내 자식은 세상대로 키우겠다고 하면 구도의 길을 우리가 걸을 수 없다. 두 말할 것도 없이 목사는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어야 하고 자식에게 좋은 아버지여야 한다.

첫 째는 부부는 영촌이라고 했다. 영촌의 거리를 존중하라. 남편은 아내의 여성성을 지켜줘야 한다. 아내는 남성성을 지켜줘야 한다. 많은 남자들이 결혼하고 나서 아내의 여성성을 황폐화시킨다. 이렇게 하면 좋은 수족은 될 수 있어도 좋은 아내나 엄마가 될 수는 없다. 좋은 아내가 될 때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있다.

제네바 있을 때 아들 넷을 데리고 온 아내가 왔는데 이건 흡사 투사의 모습이었다.(웃음) 아들 넷을 혼자 키우며 아내가 힘들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렵게 사신 권사님 댁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 가는 길에 아내가 귀걸이를 하고 나왔길래 내가 귀걸이를 빼라고 했다. 어렵게 혼자 살아오신 권사님께 목사 사모가 귀걸이를 하고 찾아뵙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었다. 아내는 두말없이 귀걸이를 뺐다.

아내는 여성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귀걸이 어렵게 사서 달은 것이었는데 내가 몰랐다. 나중에 말을 들으니 아내는 그 말을 들을 때 흡사 거세되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아내에게 목사 사모의 틀을 강요하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 다음 올 때를 기다려 내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귀걸이를 샀다. 귀걸이를 보고 좋아하는 아내가 나에게 귀 뚫어도 되냐고 물었다. 귀를 뚫어야 하는 귀걸이었는데 그런 것도 몰랐던 것이다. (웃음) 그래서 내가 제네바에서 귀 뚫는 데까지 가서 귀를 뚫어줬다.

그리곤 내가 아내에게 당신 나이 정도 되면 옷 입을 때 무슨 색깔 입을까 묻지 마라. 당신이 충분히 절제하니 당신 여성성을 지키기 위해서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바로 이런 노력이 있을 때 신뢰가 가는 것이다. 자식들 역시 그런 부모를 보면서 같은 가치관을 키워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같은 가치관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내가 목사라고 해서 내 처가 후회를 한다거나 하는 일은 내가 아는 한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내가 같이 왔으니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웃음)

김영봉 목사 / 두 개의 질문이 남았는데 시간이 많지 않아 대신 읽겠다. 이재철 목사는 함께 사역하고 있는 부교역자를 어떻게 대우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이재철 목사 / 교역자들을 부목사님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그냥 목사님이라고 부른다. 다 같은 목사요 동역자인데 다만 역할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교인들 중에서도 부목사라고 부르는 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부 자를 빼고 부르는 분들도 계신다. 내 목회 철학은 내가 열심히 헌신해서 나로 인해 부목사들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주님의교회 때부터 선임 부목사와 내 월급의 차이는 10만 원이었다. 재정 담당하시는 분들에게 "내 봉급을 올려줄 생각하지 말고 동역자들 월급 올려드려라. 그러면 나도 10만 원 올라간다"고 말했다.

어떤 분들은 나를 배우겠다고 지원을 해서 삼수 끝에 들어온 분들도 있다. 나는 그 분들에게 "나를 배워서는 안 된다. 나를 넘어 서야 된다. 나는 얼마든지 여러분들의 디딤돌이 되겠다. 나를 밟고 서라. 나는 이미 예순이 넘은 사람이고 구시대의 사람이다. 그러니 내가 하는 대로 해선 안 된다. 나를 밟고 서면 내가 여러분들을 버텨 줄 테니 여러분들로 인해 한국 교회의 한 부분이 새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우리 교회는 나를 포함해서 교역자들에게 사택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택만은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 이유가 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살이를 한 사람이다. 교인 석에 앉아서 목회자들을 지켜 본 기간이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목회자들 가운데에서 학부부터 신학교를 가고 졸업한 사람들은 세상을 모른다. 세상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모른다.

돈 버는 것 절대 쉽지 않다. 내 자식의 학비를 대기 위해서 상사로부터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 모른다. 여러분 목회하는 교회의 장로, 집사들 다 주일에는 웃고 앉아 있지만 그 분들 하루에도 열 번씩 사표 생각할 것이다. 못 죽어서 그 직장 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젊은 교역자들은 졸업해서 용케 한 교회의 전임 교역자만 되면 한국 상황에서는 집 주고, 차 주고 전부 다 준다. 그러니 세상살이를 모르니 아무리 책을 많이 보고 아름다운 설교를 해도 현실 속에서 뼈 빠지게 살면서 온 사람들에게 목사의 설교는 뜬 구름 잡는 소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목사들에게 보수는 나하고 별 차이 없이 많이 드리되, 적어도 집만은 사글세를 내더라도 본인이 책임지자고 했다. 세상도 알고 가장으로 내 집안 식구들을 내가 사는 집은 사글세 돈이라도 내가 내고 살겠다는 결단이 서 있는 목회자만 이재철이의 사병이 안 될 것이다. 내가 잘 못하면 "목사님 틀렸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그리고 이 목사가 변질됐다 생각하면 교회를 박차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박차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뭔가 장치를 스스로 만들어둬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모든 것 다해 주는 것, 그 안락한 삶에 젊은 나이부터 적응해버리면 결국 그 교회 담임목사와 재정 장로의 사병이 되어버린다. 한국 교회에서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 교회 교역자들이 다 목사 시키는 대로만 하지 않나. 왜 그러겠나. 여기 나가면 내 자식들 살 데가 없기 때문이다. 사글세방에서 살 결심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교역자들에게 "100주년기념교회가 여러분들에게 사택을 안 주는 것은 돈을 아끼려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유 아니다.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목회자의 정신을 지켜주는 한 방편이다. 그래서 그런 목회자를 뽑을 때부터 단서조항이 붙어있기 때문에 편안한 길을 가시려는 분들, 굉장한 학력을 가지신 분들은 아예 지원하지 않는다. 사명감을 가진 사람만 한다. 목사답게 살아보겠다는 사람만 지원한다. 매년 뽑는 숫자가 제한되어 있다 보니 재수, 삼수하는 사람도 있다.

김영봉 목사 / 마지막 질문도 대신 읽겠다. 100주년기념교회의 교인의 참여율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

곽선희 목사가 내가 신학교 다닐 때 강연에 와서 교인들 중 10%만 헌신을 해도 대단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주님의 교회에서나 100주년기념교회에서나 헌신적으로 하는 교인들이 10%를 훨씬 넘는다고 생각한다. 묘지 참배객들을 위한 봉사자가 주중에만 연 500명이 넘는다. 그리고 토요일에는 구역들이 돌아가며 관리부 집사들 수십 명이 나와 예배당을 청소한다. 그래서 양화진 묘역이 있기 때문에 그 묘역을 청소하는 관리인들은 있지만 건물 안을 청소하는 청소부는 없다. 교역자 사무실은 교역자가 한다.

목회자의 권위는 목회자가 자기의 것을 포기하면 세워진다고 말했는데, 내가 한때 영적으로 방황할 때 내가 스님들도 친구로 삼고 신부들과도 교분을 쌓으면서 그분들을 보면 구도의 정신, 가는 길은 다르지만 배워야 할 것이 참 많았다. 주님의교회를 개척하고 새벽기도가 끝나면 동역자들과 함께 사무실 책상을 내가 걸레질하고 사무실 쓸었다.

스님이 되기 위해서 출발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청소다. 궂은일부터 구도의 삶이 시작된다. 내가 신학교 입학하자마자 서점에 가니 누가 나를 전도사라고 불렀다. 나는 내가 전도사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서점 주인 대답이 "입학하면 다 전도사지 않나"고 했다. 신학교는 가면서부터 전도사이고 아버지 같은 교인들 회의하는 데 가서도 상석에 앉는다. 그렇게 해가지고는 구도의 삶을 살기 힘들다.

스님이나 신부님들은 전부 자기 손으로 한다. 그렇게 교역자들이 청소하는 모습을 보고 교인들이 한 두 사람씩 참여하기 시작했다. 새벽 기도가 끝나면 강남 YMCA 건물 전체를 교인들이 매일 다 쓸었다.

교인들의 참여율을 어떻게 올리는가. 다른 방법이 없다. 목회자가 앞장서면 된다. 교인들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100주년기념교회가 세워질 때 내가 58살이었는데 지하실에 사무실을 줘서 3명이서 닦고 준비하며 사무실을 마련했다. 그런 것이 교인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김영봉 목사 / 준비한 강의 대신 즉각 질문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정리해서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에너지를 많이 필요로 했다. 두 시간 동안 흐트러짐 없이 강의해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린다.

*. 읽고 토론하기 자료 9 : 목회자의 설교 = 하나님의 말씀?

송인규

한 신학생이 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목회자의 설교를 들을 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느냐고요. 나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그는 계속 묻기를, 그러면 목회자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무조건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거기에 순종해야 한다는 말입니까?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더 이상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모습으로 보아 분명 무언가 확실치 않다고 느낀 듯 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 세 가지 종류 =

석연치 않아 하는 그의 태도에 이해가 갑니다. 목회자가 강단에서 설교를 전달할 때 분명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 내용에 순종하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목회자가 전달하는 내용 하나 하나가 오류 없는 하나님 말씀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느 면에서는 (아니면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해야 하고 또 어느 면에서는 (아니면 그 이상으로는) 그저 인간의 말이라고 해야 하는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그 신학생의 갸우뚱은 우리의 갸우뚱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세 가지 의미가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각각 살아계신 말씀”(the Living Word), 기록된 말씀” (the Written Word) 그리고 선포된 말씀”(the Preached Word)입니다.

* 살아계신 말씀(LW) -->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

* 기록된 말씀(WW) --> 신구약 성경

* 선포되는 말씀(PW) --> 설교와 전도에서의 메시지

살아계신 말씀(LW)은 삼위 가운데 제 2 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기록된 말씀(WW)은 우리가 가진 바 신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선포된 말씀(PW)은 말씀의 사역자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가리킵니다.

= 각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이해 =

그런데 LW는 우리의 경배 대상이고 전혀 오류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Truth)이십니다(요 14:6). 그는 참되시고 그가 표명한 모든 진술은 참입니다. WW결코 그리스도인의 경배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하게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성경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성경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교묘한 형태의 우상 숭배가 될 것이며, 소위 말하는 성경우상화(bibliolatry)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WW가 결코 경배의 대상일 수는 없지만, 무오성을 그 특징으로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입은 책으로서 오류를 포함하고 있지 않고 우리를 오류로 인도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최종적 권위가 됩니다.

PW의 수준으로 오면 어떻습니까? 이 경우에는 경배의 대상이 아님은 물론이요, 또 무오성조차 귀속시킬 수 없습니다. 목회자의 설교가 하나님의 영감 가운데 감동적으로 전달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WW가 하나님의 영감을 입은 것과는 차원과 성격을 달리합니다. 설교자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설교자가 WW에 기초하여 자기 자신의 말로 LW선포한다는 뜻에서입니다. 물론 이 선포가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서 이루어지지만, 어쨌든 설교자 자신의 말 -- 그의 해석, 재구성, 강조 등 --이라는 것만큼은 결코 부인할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설교자의 인간적 연약함이 들어옵니다. 그가 아무리 훌륭히 하나님께 붙잡혀 설교한다고 해도 그의 생각은 착오, 혼란, 오해, 근시안적 안목, 불완전한 이해, 집착, 편견 등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그는 이런 오염의 요소를 최대로 줄이고서 말씀을 전해야 하지만, 그래도 오염의 자국을 100% 완전히 씻어낼 수는 없습니다.

만일 어떤 목회자가 인간의 이러한 실존적 상태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혹은 희미하게 파악은 했더라도 교인들에 대해 영적 권세를 휘두를 목적 하에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는 성구를 인용한다면, 그의 오류는 배가(倍加)됩니다. 왜냐하면 살전 2:13의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가 볼 때 WW의 성격을 가졌다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경우에는 그 내용을 PW의 형태로 접수했지만, 전한 이가 사도인 바울임을 고려할 때 그것은 WW와 똑같은 수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 설교를 듣는 이중적 태도 =

이상의 내용에 기초할 때 그리스도인들도 목회자의 설교를 들으면서 이중적’(twofold) 도를 취해야 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중적표리부동의,’ ‘인면수심(人面獸心)라는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저 문자 그대로 두 가지 태도를 한꺼번에 견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목회자의 설교를 들으며 한편으로 비판적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조금 전까지 설명했듯 인간 설교자가 지닌 한계와 오류의 가능성 때문입니다. 따라때문솅교를 듣는 이들은 솅교 내용을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이것이 그러한가”(행 17:11) 면밀히 살펴야 하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도록” (살전 5:21)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상의 태도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설교자가 말씀의 원리를 올바르고 명확히 제시할 때, 그 선포된 진리의 말씀에 자신을 쳐 복종시킬 준비와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무조건적 굴종 자세가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선포된 말씀은 우리의 귀를 간질러주고 우리의 감정이나 지성을 슬쩍 건드리는 정도로밖에 일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상반된 것 같은 태도의 동시적 견지가 (특히 전자의 비판적 자세) 바람직하고 또 가능한 것입니까? 물론 바람직합니다. 얼마 전에 이야기했듯 설교자의 말씀 선포는 유오한 인간을 통한 하나님의 진리 전달 방식이므로 비판적 자세 [유오함에 대해]와 동시에 복종적 자세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를 취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가능은 합니까? 물론 가능합니다. 비록 처음에는 쉽지 않을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다 보면 복종적 자세를 잃어버리고, 복종적 자세에만 신경 쓰다 보면 비판적 자세가 무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이고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 이 두 가지는 한꺼번에 견지될 수 있습니다. 마치 영화 비평가가 어떤 특정한 작품을, 비평가의 시각과 동시에 관람자의 시각으로 감상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여러분들은 목회자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까?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회자의 설교를 기록된 성경 말씀의 수준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바라기는 우리 누구나 설교를 들으면서 비판적 자세와 복종적 자세가 함께 견지되는 성숙한 경청 태도를 함양하도록 힘쓰면 좋겠습니다.

*. 읽고 토론하기 자료 10 :교회 재정 사용에 관한 실천 신학적 기준 제시

- 건강한 교회 재정 확립 네트워크 주최 세미나 발제문 -

김승호(한성교회 목사)

1. 서론

1960년대 초반 이후 한국사회는 근대화 과정을 통하여 급격한 발전을 이루어왔다. 정부가 '근대화 = 경제개발'이라는 도식으로 경제 근대화 정책을 시행함으로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든든한 기초 없이 속도에만 관심을 기울임으로 결국 한국경제는 IMF 가 중재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기초가 부실한 상태에서 해외자본에 의존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한국경제가 국제자본의 흐름에 의해 암초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한국경제의 급성장 과정은 한국교회 재정의 급성장 과정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한국교회 역시 근대화에 의한 도시화 과정에서 폭발적인 성장이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재정 규모가 급성장했지만, 교회 재정에 대한 신학적 기초가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재정 규모가 급성장하게 됨으로 자연히 재정 사용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게 되었고, 한국사회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어온 것이다. 현재 우리사회의 교회에 대한 비판 가운데 교회의 재정 수입 및 사용 관련에 대한 비판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는 교회 재정 관련 사항의 개선이 교회 개혁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 헌금 수입에 있어서의 문제점

1) 헌금에 대한 태도

교회 재정의 급성장 과정에서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많은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헌금의 양에 대한 관심에 초점을 모으고 헌금의 질(돈을 버는 과정)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자기성찰을 하지 않았던 측면이 있다. 이러한 태도의 결과 교회에 드리는 헌금은 교인들이 세상에서 암묵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저지른 불법에 대한 면죄부로 활용되는 측면이 있었고, 자연히 물질주의적 가치가 교회 내에 스며들게 되었다. 또한 물질주의적 가치는 암묵적으로 물질적 축복이 하나님의 축복의 유일한 기준처럼 되어 버렸고, 이런 사고는 목회자에 의한 헌금 강요와 무관하지 않다. 1982년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불신자(비기독교도)가 개신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는 첫 번째 이유가 바로 '헌금의 강요' (5.2%)와 교회 내의 권위주의 (5.2%) 로 나타났다. 헌금강요의 문제는 지금도 여러 교회들에서 나타나는 부작용이라 할 수 있다.

2) 헌금교육에 대한 목회자의 인식

목회자는 성경에 나타난 신자의 의무로서 헌금의 당위성에 대해 교육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목회자의 헌금교육이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 '헌금강조'를 넘어 '헌금강요'의 차원까지 나아가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교회의 재정수입의 증가를 목회자의 목회적 능력과 결부시키는 교회(혹은 목회자 세계)의 인식 때문이며 둘째, 재정수입이 지속적으로 늘어나야 교회가 교회의 사역을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는 현실적 문제 때문이며(특히 미자립 교회나 중소형 교회의 경우 재정 수입의 부족으로 인한 목회자의 심적 스트레스는 엄청나다) 셋째, 재정수입이 늘어나야 목회자의 사례비가 늘어난다는 현실적 상황 때문(목회자사례비에 대한 시스템이 구체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교회에서는 재정수입의 증가 여부가 목회자 사례비의 증가 여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이다.

반면 헌금교육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는 목회자들이 있다. 이들의 논리는 헌금교육이 우리나라 교인들의 정서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즉 교회에서의 헌금교육은 자칫 기존 교인들 혹은 새신자들에게 교회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게 할 것이라는 염려가 있다. 따로 헌금교육을 하지 않아도 소위 은혜를 받으면 적극적으로 헌금에 참여한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이런 논리를 주장하는 목회자들은 직접적인 헌금교육을 하기보다는 교인들의 신앙을 자라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추며, 교인들이 은혜를 받고 신앙이 자라나면 자연히 헌금수입도 늘어난다고 보고 있다.

한편 헌금에 대한 건전한 교육의 부재는 기존 교인들과 새신자들로 하여금 헌금생활 및 물질생활 전반에 걸쳐 청지기적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 반면 자칫 헌금교육은 교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어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헌금에 대한 교육은 보다 분명한 성경적 원칙에 근거해서 교육하되 특히 사회적 약자들로 구성된 교회나 이전에 헌금문제로 고통을 겪은 교회의 경우, 헌금에 대한 보다 세심한 배려와 관심이 요청된다.

3. 헌금 사용에 있어서의 문제점

1) 예산편성 (증액예산편성 vs 제로베이스예산편성)

전통적으로 한국교회는 교회 밖을 위한 비용 특히 사회봉사를 위한 비용에는 전체 예산의 5% 미만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다시 말해 사회봉사나 구제 등 교회 밖을 위한 지출 비용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교회마다 교회 내 지출비용을 줄이고 교회 외 지출비용을 늘이려고 하지만, 이미 수십 년간 익숙해져 온 증액예산편성의 습관으로 인해 어느 부서도 쉽게 자기 부서의 예산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결국 증액예산편성에서 제로베이스 예산편성에로의 전환이 전제될 때 비로소 교회 밖을 위한 예산 편성에 더 큰 비중을 둘 수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교회는 증액예산편성으로 일관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증액예산편성방법은 이전 해의 예산편성 안을 기초로 해서 교회 내의 모든 부서에 동일한 퍼센트로 예산을 증액시키는 방법으로, 각 부서로부터 불평을 듣지 않을 수는 있지만, 급변하는 목회 환경에 따른 예산사용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다. 이미 우리사회 각 기관에서는 기존의 증액예산편성 방법에서 벗어나 해마다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서 기존의 예산항목을 과감하게 제거하고 새로운 사역에 대한 예산을 신설 및 확대 편성하는 제로베이스예산편성에 익숙해져 있다. 제로베이스 예산편성은 해마다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개념으로 해당 예산항목들에 대한 정당한 편성이유를 조직의 비전에 근거해 편성하는 예산편성방법이다.

전통 있는 교회들은 이미 증액예산편성에 익숙해져 있어서 제로베이스 예산편성과 같은 급진적인 변화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고 이런 인식이 교회 재정 사용의 획기적 개선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교회마다 힘 있는 부서장에 의한 부서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증액편성에서 제로베이스 편성으로의 전환이 쉽지 않다. 예를 들면, 교회재정 규모의 큰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교회의 역점사업에 예산을 집중해서 편성하려면 다른 부서들의 예산을 줄여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부서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부서 간 합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결국 모든 부서가 같은 비율로 나눠 먹는 식의 증액예산 편성에 머물러 있게 된다. 이런 상황은 개교회뿐 아니라 노회와 교단총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교회(교단)는 급변하는 주변 환경에 순발력 있게 대응하지 못하는 뒤처지는 기관으로 점점 더 퇴보해갈 수밖에 없다.

결국 제로베이스 예산편성을 위해서는 해당 교회의 장단기 비전 및 구체적인 목회계획이 선행되어야 한다. 교회의 목회자와 교우들이 충분한 토의와 합의를 통해 분명한 비전과 장단기 목회계획이 도출될 때, 그것이 바로 제로베이스 예산편성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또한 교회의 비전과 목적의 명료화는 편성된 예산보다 적은 헌금이 들어오거나 초과헌금이 들어올 경우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2) 재정집행 및 감사

재정집행

전통적으로 현재의 담임목사나 장로가 개척한 교회의 경우, 담임목사나 장로 개인이 재정 집행에 관한 일체를 담당해왔는데, 이런 잘못된 관행을 통해서 교회마다 빈번한 재정사고가 발생했다. 재정 집행에 관한 일체는 제직회에서 주관하는 것이지 한두 명의 개인이 담당할 사항이 아니다.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에서는 교회의 재정 집행에 있어서 담임목사가 최종 결재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웬만한 교회에서는 예산항목 지출마다 담임목사가 결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필요한 부분만 담임목사에게 보고하게 하고 일반적으로 재정부장 전결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예산편성 시 예산 항목이 지나치게 큰 규모일 경우, 부서장에 따라 재정집행의 구체적 내역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재정집행의 기준안 혹은 기본 메뉴얼을 마련해놓는다면, 해당 부서장이 바뀐다 하더라도 메뉴얼에 따라 집행할 수 있다.

또한 예산 집행 시 변경사항에 대한 처리의 문제가 있다. 실제로 편성된 예산을 집행하다 보면, 추가 지출, 항목 변경, 초과 지출, 신설 지출 등의 변경사항에 빈번히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변경사항이 발생할 때마다 예비비 지출을 위해 제직회를 소집하는 것이 번거로울 수가 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에서는 연말에 신년 예산안을 상정할 때, 공동의회(제직회) 마지막 안건으로 상정하여, 이런 경우가 발생할 시 '당회 위임' 혹은 '재정부 위임' 사항으로 받는다. 문제는 재정부장(혹은 재정부) 이나 담임목사가 위임을 받는 것은 문제가 있다. 교회마다 재정 사고의 유형을 보면, 개인에게 재정 집행이 위임되어 있을 때 발생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제직회의 권한을 담임목사나 재정부장 개인이 위임받는 것은 민주적 재정 집행의 원칙에 맞지 않으며, 재정부가 위임을 받는 것 역시 재정부 본연의 기능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이러한 재정집행의 변경사항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서 일반적으로 '당회'가 위임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당회'가 위임을 받았다 하더라도, '당회'는 정기적으로 그러한 재정집행의 변경사항을 신속히 제직회 때 보고할 의무가 있다. 이렇게 하여 재정 집행에 따른 사고를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감사

교회 외부의 전문가 혹은 전문가 팀에 맡겨 감사를 하는 외부 감사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중소형 교회들에서는 감사의뢰에 따르는 비용 문제로 실천하기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의 중소형 교회들에서는 내부 감사를 시행하고 있는데, 내부 감사의 문제는 재정을 집행한 자가 자신의 재정집행 상황에 대해 감사를 하게 되는 비상식적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는 점이다.

반면 중대형 교회들 가운데는 교회 내에서 재정을 집행하는 권한을 갖지 않은 감사 분야의 전문가 혹은 전문가 팀에게 감사를 의뢰하고 있다 (이럴 경우, 감사위원회를 직전 재정부장, 회계사 1-2인, 평신도 대표 1-2인 등으로 구성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렇게 하면 기존방법보다는 어느 정도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식구 감싸기 식의 감사가그럼에서 객관적 감사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결국 대다수의 중소형 교회들에서는 감사다운 감사가그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이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3) 재정의 교회 밖 사용

최근 새로운 유형의 교회들 가운데는 '교회통장 무잔고 원칙'을 시행하는 교회들이 있다. 최소한의 비용을 제외하고는 매월 들어오는 교회의 재정을 그 달 다 사용한다는 원칙이다. 이런 경향은 그동안 한국교회가 헌금수입의 일부를 지속적으로 통장에 예치하여 그 규모가 커지게 되자 예치된 헌금이 목회자나 재정장로 한두 명에 의해 잘못 사용되거나 이권이 개입되는 등 재정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대한 반작용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상당수의 교회들이 교회통장에 축적된 헌금에 대한 이권문제로 인해 교회분쟁이 발생되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교회통장 무잔고 원칙'이 대두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교회통장 무잔고 원칙'을 건전한 재정사용의 척도로 삼을 수 있겠는가? '재정사용의 투명성'을 목적으로 하는 '교회통장 무잔고 원칙'은 가능한 한 헌금을 교회통장에 쌓아두지 말고 구제나 봉사를 위해 모두 사용해야 한다는 긍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원칙은 지역사회나 선교대상 지역의 필요에 빠르고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이를 통해 교인들이 헌금참여에 있어서 더 큰 보람과 적극적인 동기부여를 갖게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차원의 구제봉사사역은 임시적 지원활동에 그친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보다 조직적이고 장기적인 차원에서의 근본적인 사회봉사활동 차원의 사역이 필요하다. 즉, 당장의 위급한 필요를 해결해 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경제적 빈곤의 악순환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줄 수 있는 대안적 구제봉사사역 및 개 교회의 지역상황에 맞는 사회봉사 차원에서의 사역의 발굴 및 장기적인 차원에서의 조직적 지원이 필요하다.

4. 교회의 재정 사용에 대한 제언

1) 교회재정 관련사항에 대한 신대원 과정의 교육

첫째, 헌금 교육 및 헌금에 대한 언급 이전에, 평소 목회자의 목회에 대해서 교인들이 신뢰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야 한다. 이런 신뢰는 목회자의 헌금교육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방지할 수 있고 건전한 교회문화 조성에도 도움이 된다.

둘째, 목회자는 교회성장에 대한 조급증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성장에 대한 조급증이 자칫 헌금 강요의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신대원 교육과정에 '헌금신학'과 '교회재정' 관련 과목들을 편성하여 헌금에 대한 신학적 교회사적 성찰 및 현실적 사례 검토를 통해 목회현장에 나가기 전에 이에 대한 충분한 교육이 필요하다.

2) 재정 감사에 대한 제언

첫째, 중대형 교회 내에서 교회예산을 감사 할 수 있는 감사 전문가 혹은 전문가 팀이 중소형 교회의 예산집행 내역을 감사해 주는 방안이 있다.

둘째, 이러한 감사 전문가 혹은 감사 팀원들이 있는 교회들은 자신들이 출석하는 교회를 감사하게 할 것이 아니라 비슷한 다른 교회를 서로 맞바꾸어 감사하게 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보다 객관적인 감사가 가능할 것이다.

셋째, 교인 전문가들로 구성된 감사봉사 팀을 조직하여 감사를 필요로 하는 교회 혹은 기독교 기관에 감사를 위해 자문을 하거나 실제 감사를 대행해 주는 자원봉사 시스템을 구축할 수도 있다.

3) 재정의 교회 밖 사용에 대한 대안

첫째, 경제적 자활을 위한 근본적인 지원방식의 봉사사역이 필요하다. 최근 기독교적 정신에 기초된 '사회연대은행,'이나 '신나는 조합,' 등 마이크로 크레딧(Micro Credit)을 통한 창업지원 및 빈곤층의 소규모 생업자금을 무담보로 대출해 주는 자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이런 지원은 근본적인 재활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단기적 지원과 구별된다.

둘째, 최근 기업체의 사회공헌활동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단순히 현금을 기부하는 방식을 넘어서서 사회문제의 개선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사회참여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다. 교회 역시 특정 사회문제에 대한 개선을 지속적으로 지원할 수 있다. 교회주변의 지역적 특성과 교회 구성원들의 특성을 고려하여 건강(유방암 조기진단, 예방접종, 건강검진 등), 안전(학생 등하교 시 안전 지킴이 활동 지원, 범죄예방 등), 교육(문맹퇴치교육, 컴퓨터 교육, 장애아 지원 교육 등), 환경 (재활용, 유해화학약품 사용금지, 포장지 줄이기 등), 지역사회와 경제개발 (저금리 주택 임대)을 위한 지원 및 그 외 노숙자 지원, 동물보호, 인종차별 반대, 공익 광고, 행사 후원 등을 위한 지원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한 두 분야에 대한 지속적 지원이 개 교회 차원이 아니라 지역 내의 교회들이 연대한다면 더욱 더 효과적인 사역이 될 것이다.

셋째, '사회책임투자'라는 보다 적극적 차원의 투자 개념이 있다. '사회책임투자'의 핵심적 사항은 윤리경영을 실천하고 있는 기업에 교회(교회들)가 재정을 투자해서 윤리경영 기업의 발전에 도움을 주자는 것이다. 윤리경영 기업이 성장하면 할수록 교회는 '기업을 통한 사회정의의 실천'이라는 기독교적 가치를 구현할 수 있으며 동시에 '교회자산의 효율적 운용을 통한 수익성 제고'라는 측면도 기대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책임투자를 시행하기 위해서 현재 개신교가 안고 있는 두 가지 문제점이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첫째, 기업에 대한 교회헌금의 직접적 투자가 암묵적으로 기업과 교회, 돈과 헌금이라는 성속의 이분법적 개념에 젖어 있는 현 한국교회의 정서와는 맞지 않은 측면이 있다는 점이다. 둘째, 실제 교회헌금의 기업 투자 시 기업의 사회공헌도에 대한 정확한 평가 여부가 과제로 남아 있다. 이러한 '사회책임투자' 개념은 현 한국 개신교회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감이 없지 않지만, 이미 서구 교회와 한국 천주교에서는 '사회책임투자'를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있는바, 충분한 기간 동안 이 문제에 대한 토론과 연구가 지속된다면, 개신교 상황에 맞는 사회책임투자가 가능하리라 여겨진다.

이러한 대안적 구제봉사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지역의 교회 간 연대 혹은 교단 내의 노회 혹은 시찰회 단위에서도 대안적 구제봉사사역을 시행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개 교회는 개 교회의 이름만을 내려는 생색내기의 차원에서 벗어나서 교회 간 네트워킹의 활성화로 구제봉사사역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 읽고 토론하기 자료 11 : 교회 안에서의 의사결정과 관련한 두 개의 글

(Ⅰ) 교회 정치는 민주적이어야 한다

백종국

한국교회의 정치가 민주화해야 한다고 하면 꼭 등장하는 메뉴가 있다.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신주주의라는 주장이다. 신주주의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마땅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대략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뜻이라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교회 정치에서 어떤 모습을 의미하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가 없다. 근본이 없이 황급히 만들어낸 조어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이처럼 근본이 없는 조어들을 곧잘 만들어서 사용하곤 한다. 대표적으로 청빙, 서리 집사, 담임 목사, 원로 장로, 전임 총회장, 대표 회장, 일천 번제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한국교회 초기에 사용된 권서처럼 한국교회의 토착화라는 관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어들도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용어들은 대체적으로 그 뜻이 왜곡되어 있거나 국어의 어법에 맞지 않다.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들은 이해를 위해 반대어의 쌍으로 구성된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독재주의이고, 인본주의의 반대는 신본주의이다. 왕정의 반대는 공화정이며, 같은 민주주의일지라도 직접 민주정과 대의 민주정이 양립하고 있다. 그리고 이 용어들은 서로 차원을 달리하기 때문에 겹쳐서 쓸 수 있다. 같은 신본주의 정치라도 개신교는 민주주의에 가깝고 가톨릭교는 독재주의에 더 가깝다. 이러한 점에서 진실로 성직자의 독재가 교회 정치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개신교인들은 빨리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할 것이다. 같은 민주주의 정치라도 미국의 민주주의는 신본주의 정치를 더 강조하고 프랑스의 민주주의는 인본주의를 더 강조한다. 미국의 신본주의는 매우 예외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세이무어 마틴 립셋 교수가 <미국 예외주의>(후마니타스)에서 정리한 것처럼, 미국의 건설자들은 미국이 언덕 위에 세운 동네로서 새로운 예루살렘이며 세상에 자유와 정의의 빛을 전파하는 하나님의 도구라고 믿었다.

교회 정치가 민주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려면 그냥 독재를 지지한다고 말하면 된다. 더 구체적으로 목사의 독재가 좋다고 말하면 된다. 민주주의를 반대하고 신주주의란 용어를 만들어서 쓰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결론에 가서 목사의 독재를 지지하고 있다. 목사의 독재를 지지하는 태도는 역사적으로 상당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한국인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내심 민주 체제의 운영에 상당한 부담과 두려움을 느낀다. 마치 애굽에서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자유를 두려워하는 노예의 습관을 죽기 전까지 버리지 못했던 것과 유사하다. 박정희 군사독재 기간에 급속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독재는 성장에 유리하다는 오해가 목사의 독재에 한몫하고 있다. 박정희 독재 때문이 아니라 박정희 독재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대략 1970년대까지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가장 근대적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은 목사였다. 교회 운영 전반에 걸쳐 목사의 판단이 가장 적절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이유로 목사의 독재는 그동안 한국교회 정치에서 일반적 추세였다.

독재에 대한 향수는 이제 그만두는 게 좋다. 성경 말씀과 어긋나고 시대의 흐름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성경은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다. 칼뱅은 성경이 보장하는 평신도의 권리를 로마 가톨릭의 사제들이 찬탈한 데 대해 크게 분개했다. <기독교강요>를 그대로 인용해보겠다. 레오는 이것(평신도 선거권의 찬탈)이 이성이 허락하지 않으며 극악한 사기라고 규탄한다. 키프리아누스는 평신도의 찬성에 의한 선거만이 하나님이 주신 권리에 유래하는 것이라고 증거하면서 이와 반대되는 관습은 하나님 말씀에 배치된다는 것을 밝힌다.

시대의 흐름도 교회 정치의 민주화를 지지하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고등교육 수준이 높다. 교회는 대학에서 전문 분야의 학식을 익힌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과거처럼 목사가 설교와 교육과 재정과 건축과 구제를 모두 책임져야 할 필요가 없다. 목사는 설교에 있어서 최고의 전문가겠지만 나머지 분야에서는 각각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야 한다. 이것이 복음적 분업이다. 독재가 성장에 유리하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 민주적 체제를 운영하려면 약간의 비용이 들지만, 독재에 의존하면 공동체 전체의 생존을 비용으로 지불하게 된다. 교회개혁실천연대 정운형 사무국장의 지적처럼, 목사의 독재는 교회에게 불행일 뿐 아니라 목사 자신에게도 불행이다.

(2) 평화주의 교회의 의사 결정 과정 사례

- “동성애 문제 풀어가는 메노나이트 교단에 주목하다 -

미국 사회의 식지 않는 뜨거운 감자인 '동성애 논란'을 평화주의 신앙을 추구하는 '메노나이트' 교회는 어떻게 다룰까. 동성애에 대한 메노나이트 교회의 입장을 묻는 게 아니다. '평화'야말로 교회가 붙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라 여기는 이들이 치열한 의견 대립이 벌어지는 갈등의 현장에서 과연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메노나이트 교단도 비켜가지 못한 동성애 논란

미국 메노나이트 교단(Mennonite Church USA)은 6월 30일부터 일주일간 오하이오 주에서 '미국 메노나이트 컨벤션'을 열었다. 총회 겸 연합 수련회이기도 한 이 대회는 2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데, 올해는 동성애 문제, 정확히 말하면 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로 불리는 성적 소수자 문제가 쟁점으로 부각됐다. '성적 소수자들에게 교회 멤버십과 리더십을 부여할 것이냐'가 핵심이었다. 이번 컨벤션에 참여했던 허현 목사(LA 음교회)의 참관기와 미국 메노나이트 교단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을 종합해 재구성했다.

동성애로 인한 논쟁은 컨벤션이 열리기 전부터 진행됐다. 4명의 목회자들이 공개장(open letter)을 통해 성적 소수자를 지지하는 입장을 천명했고, 이후 미국 전역에서 1522명(목회자 128명 포함)이 지지하며 서명에 동참했다. 7월 2일에는 100여 명의 교인들이 'Pink Menno Campaign'을 벌이면서 본격적으로 공론화됐다. 이들은 대표자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분홍색 옷을 입고 회의장 앞에서 원을 만들어 찬양하며 시위를 벌였고, 이로 인한 내부 의견 대립은 한층 고조됐다.

갈등과 혼란을 삶의 일부분으로 자연스럽게

2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그것도 교단의 가장 큰 잔칫날에 불편한 주제로 시끄럽게 만드는 게 못마땅할 수 있다. 말썽 없이 고요한 상태를 진정한 '평화'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방법으로든 잡음을 차단해 위장된 평화를 추구하려들 것이다.

하지만 메노나이트 공동체는 갈등을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훈련이 몸에 배어 있다. 또한 폭력의 부재 혹은 침묵하는 차원의 소극적인 평화가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갈등을 협력적이고 평화적인 관계로 전환하는 과정으로 여기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 표출이나 문제 제기가 되더라도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과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번 행사 기간 내내 성적 소수자 문제로 시위가 열리고, 수차례에 걸쳐 격론이 벌어졌지만 서로 비방하거나, 발언을 방해하거나, 조소와 야유를 보내는 일이 전무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몇 명이든, 무슨 이야기든, 몇 시간이든

메노나이트 교단의 회의 진행 방식은 어떨까. 이들은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끊임없는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친다. 말하고 싶은 만큼 말하게 하고, 들을 수 있을 만큼 듣는다. 이번 행사 시작 전부터 그런 작업이 진행됐다. 별도의 홈페이지를 만들어 교회 대표자들이 안건을 숙지하고, 미리 의견을 올리도록 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토대로 'Resolution Team'합의문 초안을 작성했다.

이런 작업은 행사가 진행되는 중에도 계속됐다. 870명의 대표자가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진행됐지만, 발언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전부 기회가 돌아가도록 했다.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1시간에 걸쳐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했고, 언급하려고 했던 내용을 앞 사람이 언급할 경우 자발적으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Resolution Team'은 사전에 수렴했던 의견과 현장에서 나온 내용을 취합해 다시 결의문의 초안을 수정하고, 다음날 열린 대표자 모임에서 발표했다. 이후 수정된 결의문에 대한 의견 개진이 또 다시 한 차례 이뤄지고, 다시 수정 요청 사항이 나오면 찬반 투표를 실시해 의견을 반영했다. 대표자 회의 동안 그런 작업이 몇 차례에 걸쳐 거듭했다.

이런 지루한 절차를 반복하는 것은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양쪽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리고 공통된 입장이나, 공통된 요구 사항을 공유할 수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 끊임없이 모색하려는 것이다.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향은? 가벼운 주제에서 무거운 주제로

메노나이트 교회가 의견 수렴 과정에서 사용하는 방법론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별 발언을 종합해서 결의문이 나온다고 논의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후 참석자들은 소그룹별로 테이블에 둘러앉아 현안에 대해 토론한 뒤 발표하도록 했다. 그 과정이 흥미롭다. 의견이 첨예하게 맞부딪치는 동성애 문제를 직접 다루기 전에 가벼운 주제들부터 논의해서 합의를 이끌어내도록 한 다음 민감한 안건에 접근해가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향이 무엇인지' 조별로 의논해서 결론을 내도록 한다. 그 다음에는 좀 더 무거운 주제로 넘어간다. '인신매매(human trafficking) 단속 강화 요청서를 교단 차원에서 국회에 보내는 것에 동의하는지'를 놓고 토론하며 결론을 도출하도록 했다. 그렇게 점진적으로 쟁점에 다가가면서 갈등을 최소화하고, 합의를 유도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테이블별로 논의를 거쳐 나온 내용을 돌아가면서 발표를 하거나, 정리된 내용을 기록해서 제출한다. 이때 발언을 기록하는 사람은 자신이 정리한 내용이 맞는지 테이블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의사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절차다. 그렇게 나온 회중의 의견을 수렴하고, 추려가면서 결의문을 다시 수정해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컨벤션 행사가 끝난 뒤에도 지속된다. 대표자 회의를 거쳐 도출된 합의 사항은 대회 이후에 각 교회로 전달된다. 그리고 그 내용을 교회 회중과 또 다시 협의해 추가 의견이 나오면 이를 다시 교단에 보내는 것이다.

이번 대표자 모임 때는 사용하진 않았지만, 메노나이트 교회가 까다로운 주제를 놓고 회의할 때 감정 표현 카드를 사용하기도 한다. 참석자들에게 4가지 색깔의 감정 표현 카드를 나눠주고, 회의 중에 카드로 자신의 감정 상태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한다. 이로써 청중은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고, 사회자는 수시로 참석자들의 감정 상태를 체크하며 회의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시행령 공포'가 아니라 '공동 합의' 도출이 목적

이번 대표자 회의를 거쳐 나온 합의안은 97년에 정리한 합의 내용을 지속하자는 것이다. 당시 결혼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으로 규정했고, 이를 견지하되 모든 지역 교회가 따라야 할 원칙으로 적용하지 않고 계속 논의를 해나가자는 중재안이다.

메노나이트 교회는 의견 수렴 과정에서 '논의를 계속한다'(ongoing discussion)는 여지를 남기는 경우가 많다. 명확한 결론 없이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이런 비효율적인 의사 결정 시스템을 고수하는 데는 이들의 가치와 철학이 담겨 있다.

허현 목사는 "특정한 결론을 도출해서 공동체가 절대 복종해야 하는 운영 원칙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끊임없는 의견 수렴과 대화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해가고, 공동의 합의점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이 원하는 건 법칙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 됨을 지키는 것이다. 메노나이트 공동체가 갈등의 현장에서 'agreeing and disagreeing in love(사랑 안에서 찬성하고 반대하라)'라는 말을 되뇌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 읽고 토론하기 자료 12 : 목회자 빈부격차 이대로 둘 수 없다

미자립교회 목회자, 기본생계비 유지되어야

김상득 교수(전북대 교수)

IMF 이후 중산층의 몰락으로 빈부격차의 골이 깊어져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정부는 빈부격차 해소를 중요한 정책 과제로 선정하고 부동산 값 안정 등 구체적인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빈부격차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귀결이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는 개인의 능력에 따른 사유재산 취득을 인정하는데, 개인의 능력은 천부적 자산에 의해 상당히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근본 전제를 포기하지 않는 한 빈부격차는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교회의 빈부격차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

이는 비단 우리 사회만의 현상이 아니라 우리 교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아니 교회의 빈부격차는 사회의 빈부격차보다 더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일부 가정은 생계비조차 벌지 못하지만 그래도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있다. 하지만 교회의 경우 추정컨대 60% 이상이 자립조차 어렵지 않은가? 일부 대형 교회는 교인 수와 헌금이 날로 증가하여 본당 증축은 물론이거니와 수양관, 교육관, 선교관, 사회봉사관 등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새로이 짓는다.

반면에 대부분의 작은 교회는 부흥은 고사하고 교인 수가 감소하여 교회 유지조차 어렵게 되어 가고 있다. 실제로 시골 교회는 지붕의 페인트가 벗겨지고 빗물이 새어도 이를 수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대형교회에 손길을 내민다.

대형교회 자체를 우리는 비난할 수 없다. 교회가 자연적으로 성장하여 대형화되는 것을 인위적으로 막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역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대형교회도 필요하다. 선교와 봉사를 효과적으로 추진하자면 인력과 경제력이 필요한데, 대형교회는 이러한 요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빈부격차는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사회의 경우, 일반적으로 빈부 구조가 다이아몬드 형을 이룰 때, 즉 중산층이 튼튼할 때 그 사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한다. 반면에 중산층이 몰락하여 역 다이아몬드 형 사회가 될 때 그 사회는 불안하고 더 이상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빈부격차가 심화돼 교회가 양극화되면 교회는 더 이상 안정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교회가 세상의 논리를 따라가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70-80년대 정부의 경제성장 논리에 따라, 기독교계 역시 교회 성장학논리에 따라 부흥에 매달렸다. 성장 논리가 국민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듯이, 교회 성장학은 교인 수의 증가와 교회 헌금의 증가를 가져왔다. 일부 교회의 대형화와 엄청난 수의 선교사 파송이 이를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또한 IMF 이후 많은 서민들이 실직의 아픔을 겪는 반면에, 능력 있는 일부 개인은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고 있듯이, 교회 역시 대부분의 서민 목회자들은 기본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례비로 전전긍긍하는 반면에, 일부 능력 있는 목회자들은 천문학적인 사례비를 받고 있다.

이제 부는 사회의 산물이 아니라 자연의 유전자로 둔갑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회의 산물은 그 당대에 끝나나 자연의 유전자는 그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듯이, 부 역시 유산상속과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까지 유전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한국사회의 실상이다. 그 결과 사회의 계층 간 이동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계층 간 이동이 어렵다는 말은 곧 사회적 약자에게 소망이 없다는 뜻이다. 한국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번 미자립교회는 영원한 미자립교회(?)

한 번 미자립교회는 영원히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특히 농어촌 교회의 경우 더욱더 그러하다. 대형교회 목회자는 다양한 형태로 영적 부를 그 자녀에게 물려주고 있다. 대형교회에서는 노골적으로 담임목사직을 세습하는 경우도 있고, 자녀에게 해외 유학 등 양질의 교육을 제공한다. 하지만 미자립교회 목회자는 가난을 당대에 끝내지 못하고 자식에게까지 물려주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자녀 교육비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자립교회 목회자는 노후 대책은 고사하고 현재조차 자존감을 갖고 떳떳하게 살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동분서주 한다. 때로는 교인의 도움을 얻기도 하고, 심지어는 대형교회 목회자를 찾아 장학금을 달라고 읍소한다. 그래서 농어촌 교회 및 미자립교회 목회자 사모들은 절대로 자기 딸을 목회자에게 시집보내지 않으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사모는 사위에게 목회자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받는다. 혹시 결혼 후 특별 은혜를 받아 딸을 고생시키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말이다.

목회자들은 같은 신학교를 다닌 믿음의 동역자이지만, 이처럼 졸업 후 10년에서 20년이 흐르면 전혀 다른 두 세계에 살아간다. 일부 목회자는 언제나 하늘의 만나를 기대하는 자인 반면에, 또 일부 목회자는 하늘의 만나를 제공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한 쪽은 사랑을 베풀고, 다른 한 쪽은 그 사랑에 목말라 하면서 감사를 베푼다. 이렇게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은 대형 교회 목회자들의 한량없는 은혜 덕택에 살아간다. 이들은 날마다 기적을 체험한다고 자랑스럽게 간증한다.

개인의 자비에 기초한 구제는 한계, 구조적인 시스템 도입해야

물론 이러한 사랑과 감사는 아름답다. 그러나 교회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과 감사의 공동체이어야 하지 않는가? 개인의 자비심에 기초한 구제는 한계가 있다. 농어촌 교회 및 미자립교회 목회자도 생계비와 자녀 교육을 염려하지 않고 목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 사회의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유일한 길이 자본주의 틀에 사회주의 요소를 가미하는 것이듯이, 이제 한국 교회는 빈부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가톨릭적인 요소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로마 교황청처럼 교단 총회에서 모든 교회를 일일이 간섭하는 중앙집권제를 도입하자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미자립교회 목회자에게 최저 생계비와 자녀 교육비를 보장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실제로 사회에서도 모든 근로자는 근로기준법에 따라 최저 임금을 요구할 권리를 지닌다. 이는 기본적 인권이다.

이를 실현하자면 먼저 각 교단 총회는 정쟁을 그만두고 민생에 역점을 두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또 개 교회는 성경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분명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구제하라고 가르쳤다. 입으로는 언제나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의 은혜 덕택이라고 하면서도 한국 교회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양손마저 알기를 소망하고 있지 않는가?

이제 우리 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하였다는 간증을 그만두자. 미자립교회 목회자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사례비를 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에 교단 총회가 이들을 책임져야 한다. 총회가 이를 방치하는 일은 곧 미자립교회를 거지 흥부로, 대형 교회를 부자 놀부취급하는 셈이 된다. 그래서 마치 흥부가 놀부의 적선을 한 푼 기다리듯이, 목회자로 하여금 자존심을 버리고 한 푼 구걸하도록 강요하지 않는가?

미자립교회 목회자들 기본적인 생계비 보장이 되어야

미자립교회 목회자는 결코 거지가 아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종으로 자존감을 갖고 있다. 아무리 바르게 목회를 해도 기본적인 생활과 자녀 교육이 보장되지 않을 때 이들 역시 교회 성장에 목을 매거나 아니면 좀 더 교인 수가 많은 목회지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지 않는가?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이 이러한 길을 걷고 있다. 이렇게 되면 목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역이 아니라 생계비를 벌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제 한국 기독교는 개 교회 중심주의와 자본주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개 교회가 혹은 개 교회 목회자가 직접 미자립교회 및 그 목회자를 후원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총회에 그 기금을 납부하고 총회가 이를 통합적으로 관리 운영하도록 교단 헌법에 명시할 필요가 있다. 그 구체적인 운영방안은 관련 당사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숙제이다. 개인의 자비심이 아니라 제도가 미자립교회를 후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형교회와 그 목회자는 자기 자랑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미자립교회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자존감을 상실하게 되고, 한국 기독교는 그 본질에서 일탈하게 된다.

이제 교회는 사회의 거울이 되어버렸다. 거울은 이중적 역할을 감당한다. 하나는 밖의 물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소극적 역할이요, 다른 하나는 흠 내지 결점을 발견하여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적극적 역할이다. 실제로 우리는 매일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얼굴을 손질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교회가 사회의 거울이라는 말은 다분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거울이 갖는 적극적 역할을 상실한 채 오늘날 교회는 오직 사회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소극적 역할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교회가 사회의 거울이다라는 말은 죄는 사회의 거울이다라는 말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즉, 범죄 상황을 잘 분석해보면 우리는 그 속에서 사회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듯이, 오늘날 우리는 교회를 잘 분석해보면 한국 사회의 실상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는 뜻이다.

교회는 거울의 적극적 역할을 회복해야 한다. 그럼에도 교회는 사회보다도 그 걸음 거리가 더 느리다. 교회는 변화를 싫어한다. 교회 일부 지도자들은 기득권을 움켜잡고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본래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변화가 느린 곳이 바로 교회라는 사실은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개혁의 대상이 바로 교회라는 화두가 언론에 더 이상 회자되지 않기를 바란다. 어쩌면 이러한 주장은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의 소꿉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교계 어른의 말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