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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존 웨슬리의 실천신학 : 거룩한 사랑의 신학!

감리교 최고의 역사학자 고 앨버트 아우틀러는 1961년, 웨슬리 전통을 되짚어 봐야 한다는 기본 물음을 제기하며 존 웨슬리를 신학자로서 재평가하라고 요청하며 독자들에게 이렇게 주장했다.

웨슬리는 신학적 거인도 아니었고, 체계를 세운 이도 아니었으며, 신학자들 중의 신학자도 아니었다. 기획과 의도에 있어서 웨슬리는 대중신학자였다.

1970년대까지도 아우틀러는 웨슬리를 여전히 대중신학자로 묘사했다. 18세기의 웨슬리가 그 어떤 학파에 속하지도 않았고 또 학파를 세우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신학자들중의 신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도 아우틀러는 여전히 웨슬리를 대중신학자로 표현했다.그러나 이때에 아우틀러는 선교와 실천을 강조하는 현대 교회에게 웨슬리의 신학방법이 얼마나 적합한지 새롭게 눈 뜨게 되었다.

실천신학자 존 웨슬리!

놀랍게도 웨슬리 자신은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신학이란 용어대신 다양한 형태의 신학란 용어를 사용한다.

이 용어는 웨슬리가 편집한 [기독교 총서]를 소개하는, 꼭 읽어야 할 실천신학의 단편으로 발췌하고 요약한 것들이란 표현에서, 또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감리교인들의 찬송 선집]에서 사용했다.

또 다른 경우에 웨슬리는 실험신학실천신학이란 용어를 상호 교환하여 사용했는데, 경험이 웨슬리 신학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감각경험에 기초한 실험적 인식은 적어도 몇 가지 점에서 로크의 개념들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감각경험의 인식은 객관적관찰자와 관련하여 공개적으로 입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인식은 공적이고 개인적인 차원, 가슴과 머리의 차원, 인격적이고 사회적인 차원, 곧 모든 차원에서 기독교인 전체 삶의 차원에서의 인식이다. 그러므로 교부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웨슬리의 이러한 신학적 접근은 결정적으로 성서의 내용에 기초한다. 초기 프레더릭 맥도널드는 웨슬리가 본질적으로 성서 신학자였다고 주장했다.

또한 최근의 웨슬리연구는 웨슬리의 실천신학이 교회의 과제를 방향지우는 신학을 함대한 방법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설교, 예전, 신경, 절기문서, 일지, 편지에서 영국 국교회식으로 표현된 웨슬리의 실천신학은 결정적으로 인식론적이기보다는 구원론적인 성향을 보여 주고 있다. 거대한 사색적 체계 원리를 배제하고 있는 웨슬리의 주된 관심은 그의 [설교집]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p.15)

웨슬리 실천신학의 양식!

웨슬리의 구원론적 중심 주제는 시작과 과정이 구원의 순서라는 정황에서 전개된다. 따라서 웨슬리 실천신학의 중심주제가 갖는 형식적 요소가 자세하게 논해지기 전에 웨슬리의 신학적 성찰이 갖는 양식, 곧 웨슬리가 신학의 중심을 이루는 양식을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여러면에서 특별하고 독특한 색깔을 드러내는 이 같은 양식의 신학적 성찰을 지녔던 웨슬리접속적신학작라는 말로 표현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웨슬리 신학에 대한 가장 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해석은 그 방법이 이것도 저것도이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제3의 길의 표상인 웨슬리 신학의 또 다른 접속은 율법과 복음, 은총과 행위, 사랑의 입음으로서의 은총과 능력을 힘입음으로서의 은총, 칭의와 성화, 순간과 과정, 은총의 보편성(선행은총)과 은총의 제한적(구원하는)실현, 하나님의 주도권과 인간의 응답, 최초의 칭의와 최종적 칭의이다. 웨슬리는 근대 신학에 비추어 볼 때 조직 신학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신학적 양식은 실천신학 영역에서는 탁월성을 보여준다.

웨슬리 실천신학의 중심주제

웨슬리의 신학 양식은 아주 중요하며 웨슬리의 신학적 성찰의 형식을 제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우틀러의 주장대로 웨슬리의 신학 양식이 그 자체로 방법을 구성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먼저 신학 양식이 갖는 일반적 성격 때문인 바, 중심 주제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히 중심주제인 구원론적 동기는 다른 주요 교리들이 가장 잘 이해되도록 통합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거룩함과 은총의 중심 주제!

최근 학문의 경향과는 반대로 나는 웨슬리 신학의 접속적인 풍치가 실제 그의 중심 주제나 기본적인 관심인 은총뿐 아니라 거룩함과 은총 안에 배어 있음을 제시하고자 한다. 따라서 웨슬리가 자신의 저술에서 두루 사용하고 있는 거룩함이란 용어는 실제로는 요약한 표현으로서 거룩한/사랑의 접속과 긴장을 내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웨슬리는 중심 주제의 또 다른 축이 되는 은총을 독백적 방식뿐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은총과 협력은총의 긴장으로 나타나는 접속적 방식으로도 이해한다.

거룩한 사랑으로서의 거룩함 : 중심 주제의 처음 반쪽!

웨슬리는 종종 기독교인의 삶의 목표나 목적을 기술하기 위해 거룩함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의 저술에서 중요한 요점을 제시하는 부분에서는 이 용어를 거룩한 사랑의 요소들로 나누어 설명한다.

웨슬리가 거룩함이란 말로 거룩한 사랑을 뜻하고자 하였다면, 거룩함을 사랑이란 말과 관려해서 의미를 밝혀낼 뿐 아니라 사랑이 거룩함과 관련해서 어떤 의미인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거룩함과 관련하여 웨슬리의 용어가 갖는 주밀한 상황화는 분명 다음 세대와 여러 지역에 요청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가치 있는 기획에서 오드와 로달은 본질적으로 거룩함에 대한 정의로 끝내 버린다.

웨슬리는 단순성과 순수성이 기독교인의 거룩함의 본질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드와 로달은 이러한 웨슬리의 이해가 정적이고 충분히 관계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했던 것이다. 대신에 이들은 사랑이 거룩함의 마음이라고 즐겨 주장했다.

웨슬리는 거룩함이란 숨겨진 영광이고, 영광은 드러난 거룩함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거룩함이란 용어가 갖는 묘사적이고 한계를 뛰어넘는 제시적 힘이 독특한 방식으로 빛을 발하면서 사랑으로 열매 맺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특히 십자가에서 가장 겸비한 형식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염두에 없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웨슬리의 이해처럼 거룩함의 질적인 독특함이 없다면, 그렇게 이해된 사랑은 자기 - 의지나 인간의 정서가 인식한 사랑이거나 인간 이성이 선하고 받아들일 만하다고 판단한 사랑일 것이다.

사랑이란 자기로부터 나와 밖을 향하는 운동이며 아래에 있는 존재자들을 향해 허리를 굽히는 운동이다. 예컨대, 사랑이란 하나님의 자기-수여이며 자기-소통이다.

더 나아가 거룩함이 사랑을 암시하듯이, 사랑 또한 거룩함을 암시한다. 웨슬리는 참된 기독교인의 거룩함은 그 기반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는 존재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거룩함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 거룩함에 형식을 제공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마음에 심겨져 있어서 성령의 은혜로운 활동을 통해 믿는 자들의 공동체 가운데 나타난다.

거룩함과 은총이라는 웨슬리의 중심 주제의 처음 반쪽에 해당하는 거룩함은, 그 자체를 거룩한 사랑의 접속으로 이해할 때 그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한 것이 된다. 거룩한 사랑으로서의 거룩함은 바로 하나님의 본설뿐 아니라 진지한 기독교인의 삶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예술적 균형이다.

율법과 은총

거룩함과 은총이라는 웨슬리의 중심 주제는 잘 정리된 율법과 은총이라는 부차적 접속에서 세분화된다.

이 탐구에서 웨슬리가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는 아주 중요하다. 웨슬리가 이해한 도덕법을 탐구해 보면 그가 사용한 여러 근거들이 주로 웨슬리가 속했던 영국 국교회 전통과 관계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균형을 잃은 채 도덕법의 조명과 안내를 받지 않고 열광적이며 반-율법적인 방식으로 선포하는 개신교 복음 선교자들이 특히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오류를 교정하기 위해 웨슬리는 은총을 규범화된 은총이라고 주장했다.

은총이나 복음이 율법의 내용이기 때문에 율법을 설교한느 것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웨슬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이 주장에 전적으로 반대한다. 복음은 인간에게 죄를 확신시키는 율법의 처음 목표에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방식은 율법으로 죄인들의 죄를 선고한다.

예컨대, 웨슬리는 칼빈이 그랬던 것처럼 율법의 예방의 역할을 강조할 뿐 아니라 루터가 그랬던 것처럼 율법의 고발의 역할도 강조했다.

따라서 웨슬리는 받아들임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풍요로운 은총 안에 계속 살아가기 위해 도덕법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 실천적인 기독교인의 삶에 요청된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웨슬리는 믿음이 도덕법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사랑과 자비의 사역을 불러오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죽음 믿음일뿐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움직이는 살아있는 믿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시 정리하면, 웨슬리의 실천신학을 구성하는 것은 거룩함과 은총의 보다 넓은 중심 주제를 반영하는 율법과 은총이다.

진정 율법과 은총의 접속은 웨슬리 신학의 구성이 갖는 적절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은총: 중심 주제의 다른 반쪽!

웨슬리 신학의 역동적이며 복잡한 중심 주제는 물론 거룩함뿐 아니라 은총도 포함한다.

하나님 홀로의 사역과 신 - 인 협력론!

학자들은 종종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아르미니우스 주의의 범주에 속하는 웨슬리 실천신학은 하나님과 인간이 구속의 과정에서 함께 일하는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이라는 설교에서 은총을 협력적인 것으로 보지만, “값없이 주시는 은총이라는 설교에서는 아주 접속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지칭했고, 실재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홀로의 사역으로 생각했다.

웨슬리의 신학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의 활동과 인간의 활동을 포함하는 신-인 협력의 패러다임은 인간의 모든 활동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유일한 활동을 강조하는 개신교의 주장에 동일하게 강조되는 좀 더 넓은 접속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은혜를 입음과 능력을 힘입음!

은총에 대한 웨슬리의 강의의 개념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두 번째 접속은 나님의 은혜를 입음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음이라는 주제이다. 웨슬리는 먼저 은총을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사랑으로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모든 축복은 하나님의 은총, 풍요, 사랑이다 이렇게 이해하고 보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빚을 진 분이 아니고 선한 의지와 사랑을 모든 피조물에게 물 붓듯이 부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선행은총은 하나님의 사랑을 암시할 뿐 아니라 은총이 선물임을 강조한.

웨슬리는 은총이란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인들에게 의롭다 함을 선포하는 것뿐 아니라 실제로 거룩함으로 죄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도움을 주며 새롭게 한다고 주장한다.

신학자들이 웨슬리 실천신학의 통합적 구조인 은총을 두 가지 의미로 파악할 경우, 종종 법적의 치유의 축에 기초해 설명했다. 이 구조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서의 은총은 기본적으로 칭의의 법정의 주제와 상응하고 하나님의 힘있게 하는 능력으로서의 은총은 신생과 온전한 성화와 같은 참여적 주제에 상응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이 구조는 웨슬리 실천신학이 갖는 복잡한 특성과 미묘함을 정확하게 기술하지 않는다.

수혜와 응답!

신학에서 패러다임이란 때때로 여러 신학적 요소들을 평가하는 배타적 방식으로서의 거대담론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 경우 웨슬리의 신학을 절충신학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은 웨슬리의 실천신학이 가톨릭이나 개신교의 어떤 특정유형에 딱 들어맞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와 오늘날까지도 웨슬리 신학은 대체로 신-인 협력적 모델로 여겨 왓. 그러나 웨슬리는 가톨릭의 협력 패러다임과 개신교의 렵력 패러다임을 종합하여 구속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에 응답하는 것의 중요성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주를 섬기고 하나님 홀로 주시는 선물을 받는 것의 가치를 강조하였다.

순간과 과정

전체적으로 웨슬리 실천신학에서 특별히 웨슬리의 이해나 은총의 시간적 차원은 종종 연대기적 방식으로 탐구된다. 특히 그의 언어사용을 주밀하게 살펴보면 웨슬리 신학의 시간적 차원은 구원론적 방식을 믿음과 활동의 보다 더 큰 주제에 대한 성찰로 이해되어야 한다.

시간적 요소들은 구원론적 역할을 보여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활동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성서적 구원의 길이란 설교에서 웨슬리가 유비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를 관찰해보면 온전한 성화와 관련된 시간적 요소들로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표현한다.

간단히 말해 가톨릭 패러다임이 온전한 성화에 이르는 과정을 조명할 수 있다면, 구원의 현실화와 실현의 순간을 강조하는 개신교 패러다임은 온전한 성화 그 자체를 조명한다. 바로 이러한 의미들이 종합하여 웨슬리의 특성을 나타낸다.

웨슬리는 개신교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개념과 가톨릭의 협력적이며 책임적인 은총개념을 포용할 뿐 아니라, 거룩함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이해했다.

제 1장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

신론을 탐구하다 보면 웨슬리가 종종 하나님이란 말을 애매모호하게 사용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때때로 웨슬리는 자신의 글에서 전체 신성을 하나님으로 표현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바꾸어서 사용한다. 특별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사역을 언급할 때 그리하였다. 따라서 나는 신성과 하나님 아버지의 구분을 다룸으로써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웨슬리의 이해를 더욱 분명하게 하고자한다.

하나님의 인격적이며 본질적인 속성들

웨슬리의 신론을 탐구할 때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아버지)의 인격과 사역을 구분한다. 예컨대, 사랑, 거룩함, 영원성, 편재성, 전지성, 전능성등 같은 하나님의 인격적이며 본질적인 속성들과 선, 지혜, 정의 같은 창조와 통치에서의 역할을 다루는 하나님의 사역을 따로 탐구한다. 웨슬리는 영국 교회의 종교 강령을 따라 하나님은 몸이나 지체를 가지지 않는 영이라 주장한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룩한 사랑

밀드리드 윈쿠프는 사랑의 신학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웨슬리 연구의 핵심이어야한다고 정확하게 이해했다. 웨슬리는 자신의 입장에서 사랑은 사랑의 대양인 하나님 안에서 영원부터 존재한다.고 주장했을 뿐 아니라 사랑은 하나님의 모든 완전의 영역에 행복한 영광을 비추는 하나님의 애정이 넘치는 통치의 속성이라고 했다.

또한 웨슬리는 1743년 펴낸 이성과 경건의 사람들에게 던지는 진지한 호소’(Earnest Appeal to Men of Reason and Religion)에서 영국의 지성인 비평가들을 향해 결국 메소디스트 종교는 여러분이 진정으로 원한 것”, 곧 사랑에 대한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애정이 넘치는 속성에 자신들의 생각과 욕망, 선호를 덧붙임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인간이 생각을 덧칠해 버리면 신적 존재에 대해 아주 감상적이며 비현실적인 입장에 서게 된다.

웨슬리는 당시 이러한 오류를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과 다른 통치의 속성, 예컨대 거룩함과 연결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악의 영향과는 무한한 거리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표현했다. 또한 질서와 광대함을 찬양하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초월성, 거룩함을 노래한다고 고백했다.

그러므로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애착이 아니며 하나님의 거룩함은 추상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함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완전함을 일러주는 하나님의 속성, 곧 사랑의 속성이다. 오턴 윌 리가 웨슬리의 사역을 성찰하면서 당시에 지적했듯이 넓이와 깊이 때문에 거룩함은 여러 속성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보다 깊고 심오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본질적인 본성에 속한다. 거룩함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지니 도덕적 특성이

여기서 웨슬리의 독특한 공헌은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함을 서로 관계하는 것으로, 때로는 심지어 긴장 관계 속에 있는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예컨대, 웨슬리는 한편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무한한 거리를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생각한다. 이때 거룩함은 분리하고 구분하는 거룩함이다. 다른 한편으론 소통이 가능함, 사랑의 타자-지향성, 타자의 포용을 강조한다. 서론에서 밝혔듯이, 거룩함은 거리를 만들어낸다. 신적 존재의 두 서술어인 거룩함과 사랑은 거룩함으로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따로 세움을 입었을 뿐 아니라, 사랑과 선교 안에서 다시 세계 속으로 들어가도록 초청받은 사람들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의 표현이고 요약이다.

더구나 하나님의 거룩함이 하나님의 사랑을 간과한 채 강조된다면, 영원한 하나님은 영원히 모든 피조물들과 관계를 갖지 못할 것이고 교제나 연합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거룩함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자신의 저술에서 거룩함과 사랑이라는 두 운동을 하나로 묶어낸다. 때문에 웨슬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증언할 때 즐겨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인, 세상에 남긴 하나님의 지문이란 성도들의 마음에 거룩한 사랑이 새겨진 것을 말한다.

또 다른 곳에서 웨슬리는 우리가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을 인식했다면 전능자에게 어떤 태도로 마음을 드려야하는지 탐구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희생제물은 마음의 산 희생제물일 것입니다. 거룩한 사랑의 불길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제물을 드립시다. 다시 말하지만, 거룩한 사랑의 표징이 하나님의 특성을 표현하기 때문에, 웨슬리는 자연스럽게 거룩하신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에 들어가려면 거룩한 사랑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은 먼저 자신의 성령의 영감으로 우리 마음에 거룩한 사랑을 허락할 것입니다. 이 거룩한 사랑이 없이는 누구도 영광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그러므로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웨슬리의 신론은 거룩함이 없는 사랑을 논하지 않고 사랑 없는 거룩함을 논하지도 않는다.

영원성

웨슬리는 이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도 계실 영원한 하나님은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과 밀접하게 관계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고 알파와 오메가이며 처음과 마지막이다. 웨슬리는 이러한 독특한 하나님의 존재를 과거의 영원성(a parte ante)과 미래의 영원성(a parte post)을 구분함으로써 증명할 수 없는 진리로 생각했다. 웨슬리하나님 홀로 과거의 영원성과 미래의 영원성의 의미에서 ‘...영원히 거한다’”고 주장한다. 위대한 창조자 홀로 영원부터 영원까지 거하신다.’” 거룩한 사랑은 시작이 없었고 끝도 없을 것이다. 웨슬리는 시작이 없는 기간과 끝이 없는 기간을 구분하고는, 이에 기초하여 시작이 없는 기간은 하나님께만 속하고 끝이 없는 기간은 피조물에게도 적용된다고 주장 한다. 웨슬리의 번론을 들어보자

끝이 없는 기간은 위대한 창조자에게만 속한 속성이 아니다 하나님은 무수히 많은 피조물들이 끝이 없는 기간에 참여하는 것을 은총 가운데 기뻐했다 하나님은 천사들, 대천사들, 하늘에 있는 성도들 뿐 아니라...흙으로 지은 집에 거하는 이 땅의 거주자들에게도 끝이 없는 기간을 허락하였다.

웨슬리의 해석의 시각에서 보면 시작이 없는 기간의 영원성은 다른 존재와 공유될 수 없는, 특별히 하나님을 기술하는 것처럼 보인다. 달리말해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 외에 그 어떤 존재나 사물이 과거의 영원성을 갖고 있다면 하나니은 여럿이 될 것이고 그 결과 유일신론은 폐기되어야할 것이라고 보았다 간단히 말해 두 하나님이나 두 영원은 존재할 수 없다.

편재성

하나님의 편재성을 다루면서 웨슬리는 하나님이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무한한 기간을 거쳐 존재하는 것처럼, 무한한 공간을 거쳐 존재 한다.웨슬리는 예레미야 23장24절을 주석하면서 창조의 경계 밖이든 안이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구석은 없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어디든 활동하기 때문에하나님은 어디든 존재하듯이, 모든 곳에서의 활동은 모든 곳에서의 존재를 뜻한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창조 안에 내재하기 때문에 만물 속에 존재한다고 분명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거룩한 하나님께서 아주 중요한 방식으로 우주를 여전히 초월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범신론에 빠지는 것을 피해갔다. 따라서 웨슬리는 무한한 공간이 신성의 감각중”(sensorium of deity)라고 주장한 아이잭 뉴턴의 주장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나 공간이 하나님의 존재를 결정한다든지 우주는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이라는 개념에는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함께 적절히 주장했고, 둘 중 어떤 하나를 배재한 채 다른 하나를 주장하지 않았다. 예컨대, 초월성을 간과한 채 내재성을 강조하다보면 범신론에 빠지게 되고, 내재성을 간과한 채 초월성을 강조하다보면 둘이 나뉘어져 하나님이 인식되지 않거나 인식되지 않은 채 남겨지게 된다. 웨슬리는 설교와 논문, 편지 등에서 하나님의 편재성과 같은 중요한 신학적 문제는 사색적, 추상적, 개념적 차원에 단순히 남겨 놓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에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통찰을 얻고자 하였고, 실천적인 차원에게 영적이며 도덕적인 적용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어 웨슬리는 하나님의 편재성이라는 자신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거룩한 사람이나 하나님의 천사가 아니고 영원부터 존재하는거룩한 그분 하나님 자신이 여러분의 마음과 혀와 손을 매 순간 감찰하고 계심을 인식한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조심스러워야할까요?

그런 다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 침대 곁에 계시고 당신 여정에 동행하시면서 모든 길을 들여다보고 계시다고 믿는다면, 당신이 생각할 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가장 작은 일이나 말이나 생각조차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겠습니까?

전지성

웨슬리는 하나님의 여러 본질적인 속성들이 서로를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일례를 들면 하나님의 전지성을 하나님의 편재성의 분명하고도 필연적인결과로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주의 모든 영역에 현존한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이나 그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것을 알 수밖에 없다.간단히 말해서, 공간의 의미로 하나님의 무한성(과 초월성)을 말할 때 하나님의 전지성이라는 개념이 생겨난다. 어디든 존재하는 영원한 하나님은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안다.

그러나 웨슬리는 하나님의 전지 교리를 장소(편재성)뿐 아니라 시간(영원성)개념과 연관시켜 설명한다. 주 하나님께서는 전체시간 혹은(시간은 단지 영원성의 작은 조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온전한 영원성에 언제나 현존해 있기 때문에.모든 것을 아시며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인식의 범위밖에 존재할 수 없다. 좀 더 철학적인 차원에서 아우구스티누가 말했던 것을 따라 웨슬리는 과거건 미래건 모든 시간은 하나님께는 영원한 지금이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적용이 뒤따른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인식하고 영원한 지금 안에 모든 것을 인식하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다.

선한 목회자였던 웨슬리는 편재성이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전지성이 가져올 수 있는 불편함까지 포함하여 인간의 삶에 미치는 도덕적이며 영원적인 결과를 생각했다. 당신은 하나님의 전지성과 편재성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인간은 아담이 하나님의 눈을 피하려했듯이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보다는 눈먼 우상을 섬기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편재성과 전지성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진리뿐 아니라 거룩하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면전에서 인간이 갖는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전능성

웨슬리는 전능성을 탐구하면서 하나님의 편재성이 부정은 마찬가지로 전능성의 부정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편재성에 경계를 정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전능성에도 경계를 정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웨슬리는 다른 글에서 하나님께서 편재할 뿐 아니라 전능하다. 하나님은 그의 현존뿐 아니라 능력에 있어서도 한계가 없다. 하나님은 능력 있는 팔과 강한 손과 높은 오른손을 갖고 계시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영원한 하나님의 능력에 한계가 없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18세기에 몸(물질)과 정신(영)의 관계를 어떻게 보았는지 염두에 두어야한다.

데카르트의 이분법적인 몸/정신의 구분은 한편으로는 새로이 등장한 사실들의 세계에서 종교의 가치를 지키려는 변증적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몸이 다른 것(res extensa)이라고 해도 몸의 발견이 정신의 발견과 모순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처럼 데카르트가 이분법적인 분리를 한 결과 물질은 완전히 자기-동력이 부족한 비활성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데카르트는 하나님께서 물질세계를 창조하고 난 후 그 안에 운동을 불어넣고는 조용히 물질의 세계를 빠져나왔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물질세계로 부터 퇴거했다는 이신론적 개념은 거부했지만 18세기로 전해 내려온 데카르트의 처음 전제들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전능성에 끼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성찰하였다.

하나님은 실로 물질세계 안에 거하는 유일한 자인입니다. 모든 물질은 본질적으로 살아있지 않고 활동적이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만 움직입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피조물과 보이지 않는 피조물 속에 있는 활동의 샘입니다, 따라서 피조물은 하나님의 전능한 힘의 계속된 유입과 작인이 없이는 활동할 수 없고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후 웨슬리는 1774년 당신 과학적 논증에 잡혀 모든 인간의 감각은 뇌의 움직임에 따라 결정론적으로 움직인다고 주장한 하틀리 박사(Dr, Hartley)와 논쟁을 벌였다, 하나님의 전능성이 인간의 자유를 보증한다고 호소했다.

이제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분은 자신이 만든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릴 힘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물질과 영의 세계, 우리의 몸과 영에 대해서도 같은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 진동과 감각, 감각과 성찰, 성찰과 판단, 판단과 열정이나 행동의 관계를 잘라 내거나 지연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전능성의 개념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관대한 이해는 특별한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 회심, 새창조의 기적과 초자연적 은총을 생각할 때 곧 초월적 영역에 대한 웨슬리의 주장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웨슬리는 이렇게 지적한다. 나는 기적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힘으로 이루어지는 전능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아제 죄인들이 거룩함으로 회심하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면, 나는 기적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 웨슬리는 <이성과 경건의 사람들에게 던지는 진지한 호소> (Earnest Appeal to Men of Reason and Religion)라는 책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과 전능성을 구속이란 말로, 또한 몇몇 감리교인들에게는 놀라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 방식으로 강조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아무도 그냥 믿을 수 없다. 믿음이란 전능의 사역이다 믿음은 무덤에 놓인 몸을 일으키고 죽은 영혼을 살리는 힘을 갖는다. 믿음은 새 창조이다 누구도 영혼을 새롭게 창조할 수 없지만 하늘과 땅을 지으신 그분은 하실 수 있다. 웨슬리가 하나님의 전능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모든 인간 존재를 거룩한 사랑을 위해 창조된 존재로 보고 인간에게 자유와 작인을 허락하는 방식으로 창조하였다.

본질적인 속성들과 예정

우리는 웨슬리가 예정과 선택을 하나님의 독특한 활동으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사도바울이 자세하게 전개하는 구원의 순서에서, 웨슬리는 하나님의 전지성에 큰 무게를 둔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에서 믿음을 갖게 될 사람들을 미리 아신다.첫 단계를 구성하는 하나님의 예지는 결정론적이거나 강제적이지 아니하고 탐구적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시기 때문에 그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을 아신다고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예지는 결정론적인 것이 아니라는 성서적 진리의 중요한 결론가운데 하나는 인간에게 은총으로 말미암아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자유는 거룩한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 인격의 온전함을 의미를 강조하면서 오해가 없도록 조심스럽게 이해되어야한다.

바울이 제시한 질서에서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아들의 형상을 따라 살도록 미리 예정했다는 사실이다. 웨슬리는 이 성서적 진리를 은총으로 어느 정도 회복한 인간의 자유를 짓밟는 결정론적 해석을 하지 않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아들의 형상을 따라 살도록 하나님께서 정했다.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바꿀 수 없고, 뒤집을 수 없으며,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선택받은 자들만 구원의 은총을 주시고 버림받은 사람들로부터는 거두어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믿는 자들이 구원을 받고 저주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선택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조건적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라고 요청한다. 부르심을 입은 이들을 의롭게 할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는 것은 바울이 제시한 세 번째 단계와 네 번째 단계이다. 이 질서의 마지막 단계에서 가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였다. 달리 말하면,우리가 성도의 유업을 받을 자가 되도록 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창세전에 우리를 위해 예비한 하나님 나라를 준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인 웨슬리와 만세반석 열리니”(Rock of Ages)란 찬송시 저자 톱레이디(Augustus Toplady)같은 칼빈주의자의 기본적인 차이는 앞서 말했듯이, 웨슬리는 반복해서 선택이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조건적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톱레이디는 조건적인 선택과 행위에 의한 구원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었다. 왜 어떤 사람들은 버림을 받게 된 것인가? 웨슬리는 버림받은 것은 하나님의 예지 때문이 아니며,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명령 때문도 아니고, 심지어는 죄인들에게 그들이 필요한 은총을 주고자하는 하나님의 불가사의한뜻이 전달이 안 되어서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몇몇 죄인들이 버림을 받은 것은 자신이 말한 대로, 저들이 구원받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달리 말하면 저들은 완강하게 은총이 주어진 것을 거부하며, 생명을 얻기 위해 구원자에게 나아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웨슬리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복음의 온전함, 거룩한 사랑의 실재, 하나님의 성품이었다. 실로 동시대의 몇몇 사람들이 주장했듯이 예정 교리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명령인 거룩함을 파고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지만, 예정 교리의 가르침은 선한 행위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파고하는 경향이 있을뿐더러,” “배고픈 자를 먹이고,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는 것 같은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를 하려는 강력한 동기를 잘라 버린다.

예정교리는 쉽게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을 간과할 수 있다. 한편으로 보면 예정교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선하고 악한 모든 사건의 작인이 되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훼손한다.

웨슬리는 자신의 설교 값없이 주시는 은총에서 예정교리를 신성모독이라고 언급했다. 예정교리는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짓되고 잔인하며 불의한 악마보다 더 악한 자로 표상한다.다시 말하지만,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은총을 거룩한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버림받은 자들에게 선하고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일수 있겠는가?

성서를 좀 더 주밀하고 민감하게 살펴보면 부드러운 사랑이 본성인 은혜가 넘치는 사랑을 지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진리의 지식으로 나아와 구원받기를 열망한다.

하나님/아버지의 사역

웨슬리는 창조와 보전, 통치라는 하나님의 사역이 앞서 논의한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들과 밀접하게 관계된다고 보았다. 실로 세상의 창조는 흘러넘치는 풍요로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또한 웨슬리는 사랑을 창조의 근거요 이유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사랑이 인간의 창조에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랑이란 과정이나 발달단계로서 그 존재를 갖기 위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

창조자

창조와 관련해서 웨슬리는 때로 신성의 사역으로 언급했고, 또 다른 경우에는 특별히 아버지의 할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시작하는 구절인)마태복음 6장9절을 주석하면서, 아버지를 모두에게 선하시고 은혜로우신분, 우리의 창조자, 우리의 보존자, 우리 주님의 아버지, 주님 안에 있는 우리의 아버지...우주의 아버지, 천사들과 인간의 아버지로 지칭 했다.그러나 태어나지 않는 분은(창조자하나님)관계도 없는 단자로 창조한 것이 아니고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아들을 통해 창조한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주 하나님은 자신의 전능하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무로부터 존재하는 전체 우주를 불러냈다.웨슬리는 영원의 개념을 본질적인 신성으로 이해했다.

웨슬리는 하나님을 창조자로 고백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은 우연이냐 냉혹한 필연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목적에서 비롯되었으며,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원인이며 주님이라고 생각했다. 질서가 있고 목적이 담긴 창조는 두 종류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의 창조이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는 영역의 창조다. 웨슬리는 물리적인 우주를 염두에 두는바, 그 크기와 거리 때문에 인간의 감각으로 우주 전체를 인식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 창조란 용여를 사용했다.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창조된 모든 존재가 물리적 몸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물론 여기서 웨슬리는 지성적인 영의 존재로서 창조자와 같은 인간을 섬기는 천사를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영들이고 우리와 같이 혈육을 지닌 물질적인....존재들이 아니다.

이해와 감성, 자유로 옷 입은 천사들의 창조는 다시 한번 창조자의 선함을 보여줄 뿐 아니라 웨슬리가 존재의 질서로 언급하듯이 창조에 일정한 질서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웨슬리는 가장 낮은 지점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이르기까지, 땅이나 물의 가장 체계화되지 않는 분자에서 대 천사장 미가엘에 이르기까지 존재의 질서가 존재 한다고 주장한다. 이 존재의 질서에는 창조자의 다양한 기획들이 가득 채워져 있다. 웨슬리는 창조자의 사역은 하나가 또 다른 하나를 낳을 뿐 아니라 덜 탁월했던 것으로부터 좀 더 탁월한 것으로 진보해갔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느리지만 점차 복잡하고 탁월한 것으로 진보를 가져오는 발전적인 질서의 양식은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단서인바, 웨슬리의 창세기 주석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점진적이면서도 느린 창조의 발전은 엄격한 위계적 질서의 방식으로 이해되어선 안 된다. 특별히 이것이 동물의 영역에 해가 된다면 더더욱 그렇다. 웨슬리는 동물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으로 빚은 피조물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면에서 기본적인 평등성이 존재의 종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또한 주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였듯이 거룩한 하나님은 만물을 보존한다. 웨슬리는 이렇게 주석한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자신의 능력의 말씀으로 곧 그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 한다이렇게 이해한다면, 창조의 보전과 유지는 선과 지혜로 특징되는 자연의 지속적인 활동이 된다. 웨슬리는 이점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우리의 아버지우리의 보존자는...매일매일 그가 준 생명을 유지한다. 우리는 지금 매순간 그분의 계속적인 사랑으로 생명과 숨과 만물을 받는다.하나님은 지혜로우셔서 모든 피조물의 관계, 연결, 의존돌보신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들의 체계를 구성하며 전체 우주를 형성한다.

주권자

창조자이신 전능자 하나님은 주권자이며 자유로운 분이다. 통치자로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고발하는 정의나 신정한 정의없이 행동한다. 다시 말하자면, 창조자인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만물을 내었다. 이제 창조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살펴보자. 웨슬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사유들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자유를 요약했다. 하나님은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시간에 창조를 시작했다. 우주의 기간을 결정했고, 광대한 공간에 우주의 자리를 지정했으며, 우주의 요소들뿐 아니라 별들의 수를 고정시켰고, 피조물들이 살 지구를 창조했으며, 이해와 자유와 뜻을 지닌 체화된 영으로서 인간을 만들었고, 모든 나라가 등장하는 때를 정했으며, 각양 새들이 살게 될 시간과 공간과 환경을 조성했고, 약하건 강하건 존재하는 각각의 존재에서 몸을 입혔으며, 마지막에는 인간에게 다양한 정도의 이해와 지식을 주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창조와 관련된 자유와 주권은 구원에 속한 것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좀 더 전문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자유와 능력과 하나님이 실제 창조한 인간에게 여지를 주는 어떤 의미에서 제약된 자유와 능력은 구분되어야 한다.

통치자

첫 번째 역할인 창조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만물을 창조할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을 강조한다. 그러나 두 번째 역할인 통치자의 역할은 자유와 주권이 아니라 정의와 사랑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자인 통치자로 활동할 때, 하나님은 자신의 유일한 뜻과 기분에 따라 주권자로서 활동하지 않고, 변치 않는 정의에 따라 만물의 공정한 심판자로서 활동하며 다스린다.통치자로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본성 자체인 거룩함에 따라 변치 않고 활동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거룩함 안에서 인간은 자유롭고 책임 있는 도덕적 존재로 창조되었다.

도덕법

웨슬리가 창조자의 통치자의 역할을 관계시켰던 한 가지 방법은 도덕법과 관련해서였다. 창조자 하나님은 물리적인 세계를 창조했고, 전능자 하나님은 인간 안에 하나님 본성 공 영원한 정신의 투영인 도덕법에 따라 도덕적이고 영적인 질서를 부여했다. 그러므로 거룩하고 정의롭고 선하신 도덕법이 창조된 도덕적 영적질서의 본성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웨슬리의 설명을 들어보자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법은 창조된 만물 안에 영존한다.시 말하자면, 옳고 그름의 변할 수 없는 규칙인 도덕법은 만물의 본성과 생존, 그리고 존재자들의 서로를 향한 본질적 관계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때문에 도덕법은 창조된 질서 안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존재들은 이 도덕적 영역이나 차원을 분별할 수 있다. 하나님은 도덕법의 원인일 뿐 아니라 도덕법은 하나님의 뜻이 적절한 표현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분리되지 않고 일치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의 표현이요 거룩한 사랑의 법인 도덕법은 흔들리지 않고 계속된다. 도덕법은 영원한 정신의 모상이고 피조물과 그 안에 있는 관계를 통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도덕에 대한 관상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으로 알려지고 조명된 요소들, 곧 정의와 자비를 생각하게 할뿐 아니라 인격적이며 본질적인 하나님의 본성의 항구성을 생각하게 한다. 이 입장에서 볼 때 웨슬리는 도덕법의 냉정함과 하나님의 본성의 불변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당시 여러 신학자들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섭리적 수여자

세계의 통치자인 주 하나님은 창조의 세계를 통치한다. (해나 달과 같은) 생명이 없는 존재들보다는 피조물들을 돌보는 것을 하나님의 통치로 생각하는 웨슬리는 그 의미를 완전하게 설명하기 위해 섭리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돌봄은 기독교인들의 소원이 아니라 성서의 엄연한 가르침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웨슬리와 신학적으로 생각이 달랐던 이들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창조에 관심을 가진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모든 것을 창조한 지고의 존재인 하나님께서 통치자로서 개인과 사회의 작고 사소하고 일상적인 문제까지 관심을 가진다는 특별 섭리 개념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신론적 고전을 읽었던 당시 사상가들은 하나님께서 기본적인 법칙과 원리를 따라 세상이 돌아가도록 창조했다는 입장을 내놓았고, 이 주장에 기초하여 하나님께서 삶의 세세한 차원에서 개체 존재들을 향해 섭리적인 돌봄과 관심으로 사랑한다는 특별 섭리의 개념을 거부했다.

웨슬리는 1786년 출판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On Divine Providence)라는 자신의 설교에서 첫 번째로, 특별한 섭리를 거절하는 것은 성서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작은 일조차도 위대한 창조자와 통치자의 사랑의 돌보심 아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두 번째로, 이러한 입장은 분명 하나님의 자유와 활동을 반박함으로써 일반적 자연법칙 외에 기적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법을 지연시키든가 아니면 능력 있는 천사를 동원하여 자신이 원하는 때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예외를 만들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세 번째로 특별섭리를 배제하는 일반 섭리의 개념은 혼용되고 궁극적으로는 모순된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불행이 있다할지라도 세계는 무질서와 돌발적인 일들이 혼란스럽게 일어나는 곳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축복이 되는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는 뜻은, 자신의 존재의 중심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이 좌절로 끝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자와 통치자의 돌봄 아래 있다면, 하늘이나 땅에 있는 어떤 것이 당신을 해할 수 있겠는가?

속성들에 대한 요약

실로 거룩한 사랑은 초월(분리)과 내재(연합)를 구분하여 웨슬리의 신성을 이해하게 된다. 이 긴장이 하나님/아버지의 역할을(정의와 거룩한 도덕적 법에 따른)통치자와(선과 지혜와 은총)에 의한 창조자로서 보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는 웨슬리 신학을 불필요한 철학적 추상과 사색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한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은 지혜롭고 선하며 공의롭고 영원하며 편재하고 전지하며 전능한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오늘과 내일: 우주론의 최근 동향들

웨슬리는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탐구: 자연철학 개요](A Survey of the Wisdom of God in the Creation: Or a Compendium of Natural Philosophy)의 출판에서 보여 주듯이 물리과학 특히 전문학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웨슬리가 이 책을 출판한 전체적인 목적은 창조자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었다. 달리 말하면, 게으르고 황량한 호기심을 즐기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선이라는 보이지 않는 영역을 기술하기 위해서였다웨슬리는 [자연철학개요]에서 성서의 해석과 과학의 발견으로 나누어 진리를 표현하고자 했다. 성서는 철학이나 천문학의 가르침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철학이나 문자적인 표현을 성서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정리를 한 웨슬리는 당시 과학이 발견한 것들을 자유로이 사용하여 창조된 존재들의 경외와 영광을 성찰했다. 웨슬리는 [자연철학개요]에서 거룩한 하나님은 하나의 별에 붙어있는 조그만 행성에 지나지 않는, 작고 흩어져 나가는 우리의 거처 지구뿐 아니라전체 우주의 주님이라고 주장한다.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의 발견을 온전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혁명](On the Revolutions of the Heavenly Spheres)이란 책에서 지구가 태양이 태양계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fms 우주론에서의 두 혁명은 20세기나 되어 일어난다. 예를 들면, 1924년 변호사였다가 천문학자가 된 에드윈 허블(Edwin Hubble)은 은하수 너머 다른 은하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별견했다 허블은 우주가 고정되지 않고 실제로 확장하고 있다는, 더 놀라운 결론을 내놓았다 이는 은하수들이 관측지인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허블의 연구에 토대를 둔 천문학자들은 만일 우주가 시간을 두고 실제로 확장해간다고 했을 경우 시간을 뒤로 돌려 생각해볼 때, 이전의 우주는 크기가 훨씬 작았을 테고 밀도는 훨씬 강했을 것임을 알게 되었다 특이한 점으로부터 시작해 우주가 팽창한다는 것은 (시계를 뒤로 돌렸을 경우) 아한 작은 우주의 개념을 날려 버린다. 실로 우주는 정확한 시간을 갖고 있고 처음 1초안에 나누어진 여러 순간들은 그 결정적인 차이가 지속된다는 처음으로 우주의 확장의 원인을 파악하려는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 시공간은 왜 시작된 것인가? 과학자들은 시간의 최소 단위 이전, 예컨대, 십의 마이너스 43승 이전의 기간인 플랑크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전자기(몇몇 방사능의 형식 그리고 아원자적 분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구성하는)약력,(쿼크와 같은 소립자들을 묶는)강력, 중력 이렇게 중요한 네 가지 물리학적 힘 가운데 셋이 양자물리학 이론으로 설명이 되지만, 중력은 양자물리학으로 설명이 되지 않으며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겨져 있다. 호킹(Stephen Hawking)은 초기 우주의 요소 가운데 팽창률과 같이 여러 요소가 정확하게 배열되어서 맨 처음 우주가 등장하게 된 것 같다는 주장을 멈추지 않았다. 호킹의 설명을 들어보자. 만일 빅뱅 후 일초 동안의 우주의 팽창률이 1000억분의 1만큼 작았더라면 우주는 현재 크기에 다다르기 전에 붕괴되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만일 팽창 한순간 똑같은 정도로 컸더라면, 우주는 너무 커져서 지금쯤은 완전히 공이 되었을 것이다. 만일 우주가 팽창한다면 왜 시작이 있어야만 하는지 물리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빅뱅의 순간에 우주를 창조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1998년 몇몇 천물학자들이 초신성의 폭발을 연구하다가 실제로 우주의 폭발 속도가 증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는 거의 고정된 이론이 되어버린 허블 상수와 함께 우는 평평하며영원히 팽창해야 한다. 과학자들은 암흑에너지로 알려진 어떤 힘이 이 팽창속도를 가속화시키는 원인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므로 우주의 운명은(빅뱅의 반대가 되는)대 수축(a Big Crunch)이 아니며 불의 소멸도 아니다. 오히려 점점 팽창하고 있는 우주는 노쇠하게 되고 더욱 차가운 상태가 되어 결국은 죽게 될 것이다. 현대과학자들과 우주론자들은 기본적인 모델 둘을 제시하여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빅뱅 이론의 모델에서 출발하는 호킹의 모델인데, 특이점 곧 시공의 시작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우주의 시공의 차원은 유한하지만 경계가 없다. 마치 크기에서는 한계가 있지만 시작점이나 끝점이 없는 것과 같다. 호킹의 설명을 들어보자. 시공의 범위가 유한 할 수 있다. 그러나 경계나 가장자리를 구성했던 특이점이 없다. 시-공은 두 개 이상의 차원을 지닌 지구 표면과 같다. 지구 표면은 범위가 유한하지만 경계나 가장 자리를 가지지 않는다. 이 모델에 기초해 보면 창조의 순간도 없고 창조자가 창조할 순간도 없다. 왜냐하면 우주는 자기-포용적이기 때문이다. 빅뱅의 통찰에 의존하고 있는 둘째 모델은 우주가 양자의 파동이나 또 다른 우주로부터의 블랙홀에서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양자의 진동을 지배하고 있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적성 원리는 빈 공간이 양자의 규칙이 정한시간 한계 내에서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에너지 묶음들로 살아 있다고 가리킨다. 한 묶음의 에너지가 떨어져 나와 급속히 팽창했고 현재의 우주가 되었다.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 존 그리빈(John Gribbin)우주의 모든 블랙홀은 또 다른 우주로 이어지는 통로이며 우리의 우주는 다른 우주의 블랙홀이 붕괴되어 광대한 시공 안에 거품으로 이루어진 우주들이 무한의 대양을 만들어 내면서 형성되었을 수 있다. 프리드 애덤스(Fred Adams)와 다른 학자들은 호수의 거품들과 같이 여러 우주들이 존재하는 하나의 우가 아니라 다 우주를 주장한다. 애덤스의 설명을 들어보자 물리학 법칙들을 통해 우리 우주의 탄생을 설명할 수 있다면, 동일한 법칙들은 동일한 기제를 통해 전체적으로 수많은 우주의 탄생을 설명할 수 있다. 다 우주를 궁극적 기준으로 삼아 우주를 호수 안에 있는 하나의 거품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호수조차도 보다 큰 구조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것인가? 만일 오늘날 웨슬리가 살아있다면 우주론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최근의 모델들에 대해 무엇이라 대응했을까? 세계는 창조자의 말씀으로부터 존재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던, 영국의 사제 웨슬리는 유신론자로서 우주(시공)에 특이점의 여지가 없고, 때문에 시작도 없고, 창조자도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 호킹의 이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자연철학 개요]에 나타난 사상에 기초해 볼 때 웨슬리가 빅뱅이론을 포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양자 파동이나 블랙홀 같은 최근의 표현들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예컨대, 이러한 과학적 이론의 발전은 창조자가 모든 존재를 창조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이며 과정으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주가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고 경외로운 것이라면 그 우주를 창조한 분도 그렇게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고 경외로운 분이라는 것이 웨슬리의 생각이다.

그러나 자신의 전제와 가정에 기초할 때 웨슬리는 하나님의 실재를 고려하지 않는 자연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2장 거룩한 사랑으로 창조되었으나 본성상 타락한 인간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로우심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안에 나타났다. 웨슬리는 이 창조된 질서가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적 활동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지극히 높으신 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할 때, 영원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조성하기 전 어떤 사람으로부터 허락을 받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아주 기본적인 관계와 상호 책임이 타나나기 전에 주권적인 창조 활동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신학을 논할 때에 다른 곳에서도 논한 것처럼 값없이 넘치도록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총의역사인 하나님 홀로의 활동이 책임을 논하기에 앞서 먼저 요구되는 조건이다.

복잡한 존재로 창조된 인간

웨슬리가 어떤 의미에서 창조의 절정인 인간의 창조를 생각했을 때 염두에 둔 것은 인간 존재의 단순성이 아니고 복잡성이었다. 우선 남자와 여자는 우연적 존재로서 창조된 질서에 뿌리를 둔다. 몸을 가진 인간은 육체의 요소로 구성되며 형성된다. 웨슬리는 인간 존재의 물리적 본성을 간과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리적 본성이 인간의 본질을 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웨슬리는 복합적인 피조물인 인간이 몸뿐 아니라 영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보았다. 인간은 흙으로 지은 지일 뿐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 영이라고 생각했다. 과 물질로 합성된... 인간은 영과 물질이 연합하는 동안 둘 중 하나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활동해야 한다는 원법에 의해 제정되었다.고 기록한다.

웨슬리는 철학적으로 말해서 독립적이고도 지속적인 영혼의 실재를 긍정함으로써 인간이 단순이 몸이라는 입장을 피했다. 몸을 입은 영으로서의 인간은 창조 질서에 뿌리를 두고 있고 시공의 제약을 받고 있다. 그러나 영이 하나님의 형상 곧 영광의 하나님의 타락할 수 없는 형상으로 창조된불멸의 영이기 때문에 영은 수많은 방식, 예컨대, 지성적 삶의 형식 요인에 참여함으로써, 도덕적 차원을 지각함으로써, 그리고 경배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물리적 몸의 존재가 갖는 제약들을 초월할 수 있다. 웨슬리는 인간의 영은 보이는 세계의 어떤 영역보다도 더 높은 질서에 속하며 탁월한 본성으로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해체나 부식하지 않고 지속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은 거룩한 사랑의 상징인 관계적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웨슬리 연구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랑이다. 따라서 창조할 때 인간은 사랑으로 가득했다. 사랑이 인간의 모든 성정과 사유, 말과 행동의 유일한 원리이다.라고 기록한다.

지극히 높으신 이와 고유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아담과 하와는 고요한 평화와 은총, 순수함의 열매를 바르게 향유했다. 또한 웨슬리는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라고 주장한다. 더구나 사랑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과 하나이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자연적 형상, 정치적 형상, 도덕적 형상의 세 영역으로 나누어 좀 더 세밀하게 탐구했다.

먼저 자연적 형상은 자기-운동의 원리를 포함하며 영혼의 영적 본성과 불멸성으로 구성된다.하나님이 영이듯이 인간도 영이다.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하나의영이다. 더 나아가 인간이ㅡ 삶을 특징짓는 비물질적 원리나 영적 본성에 이해와 의지, 자유가 부여된다.

자연적 형상의 첫 번째인 이해에 대해서 웨슬리는 절대적인 기준에서든 ... 다른 것과 비교를 통해서든 거짓과 진실을 분별하는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웨슬리는 인간의 이해가 하나님의 이해와 구분될 수는 있지만 본래 피조물은 피조물로서 완전하게 모든 사물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고 오류 없이 진리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의지에 대해서 웨슬리는 감성과 열정, 기질의 별자리를 염두에 둔다. 이들 모두는 창조 시에 지고로 선하신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다. 웨슬리는 아담의 의지는 어떤 잘못된 편견도 없었고 모든 열정과 감성이 오류가 없는 이해의 안내를 받아 오직 선한 것만을 포용하며 안정적이고도 일관되게 정상이었다.고 말한다. 예컨대, 인간은 하나님의속성이 사랑이었다. 사랑이 인간 영혼의모든 영역을 가득 채우고 어떤 경쟁도 없이 인간을 차지하였다.달리 말하면, 아담과 하와의 이해가 바로 진리를 향하듯이 의지 또한 고유하게 하나님의 사랑의 선함을 향한다.

만일 마지막 선물인 자유가 이해와 의지의 은사에 더해지지 않는다면, 이해와 의지는 쓸모없는 것이 될 것이다. 자유가 없는 아담은 흙 한줌이나 대리석 덩어리가 창조주를 예배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을 것이다.따라서 하나님의 자연적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할 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계약적 관계가 가능한 진정한 동역자를 원했을 뿐 아니라 자유 안에서 일어나고 커 갈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속에서 자신의 완전함과 목적을 발견하게 될 존재를 원했다. 또한 이처럼 자유가 사랑과 행복 속에서 생겼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진리와 선함에서 벗어나 오용될 수도 있다. 웨슬리는 인간이 냉담하게 처음 상태를 유지하거나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스스로 원하는 것을 했다. 인간은 선택의 순간에 만물 안에서 하나님을 선택해야만 했다.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두 번째는 정치적 형상이다. 정치적 형상은 인간이 서로가 또 하나님과 관계될 뿐 아니라 자연 자체에, 또한 다른 피조물과도 관계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웨슬리는 창제기에 나오는 언어를 사용하여 정치적 형상의 특성을 정의하고 설명하면서 인간에게 바다의 고기와 공기 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주목했다.

그러나 창조질서에서 인간의 지위는 지배와 권위 혹은 이로 인한 위계의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넘치는 은총의 중재라는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다. 성서의 말하는 지배는 일방적이거나 관심을 주지 않는 지배가 아니라 함께하는 지배이다.

마지막으로 도덕적 형상은 하나님이 형상 가운데 인간이 창조된 것은 일반 사랑뿐 아니라 거룩한 사랑이었다는 결정적 진리를 밝혀 준다. 에베소서 4장 24절과 골로새서 3장 10절을 사용하여 웨슬리는 인간의 창조된 상태와 진정한 경건의 본질이란 입장에서 도덕적 형상을 전개하고 있다. 원죄에 대한 논문에서 웨슬리는 이렇게 진술한다. 새사람 혹은 마음에 진정한 경건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도덕적 형상을 따라 창조했다. 도덕적 형상이란 인간이 처음 창조될 때 의와 진정한 거룩함으로 창조된 형상이다.

웨슬리는 자신의 정체적인 신학에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이 관계되어 있음을 알고는 다음 세 가지 이유로 도덕적 형상을 주목했다. 첫째, 도덕적 형상은 인간과 다른 창조의 영역을 구분하게 한다. 둘째, 도덕적 형상이 중요한 것은 죄의 가능성을 위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도덕적 형상이 죄의 파괴적인 결과를 통해 곡해되고 왜곡될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이해될 때 도덕적 형상과 이에 수반되는 자유는 인간의 영화나 타락의 가능성을 예시한다. 셋째,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은 도덕법과 밀접하게 관계된다. 창조의 순간에 하나님의 은총과 도덕법이 명백하고도 풍요롭게 현존했다. 웨슬리의 설명을 들어보자. 자유와 지성을 가진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처음 난 자녀들에게 주었던 동일한 법을 주었습니다...진정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가락으로 이 법을 사람의 심령에 새겼습니다. 이법은 저 멀리 있거나 이해하기 어렵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법은 언제나 가까이 있어 하늘의 태양처럼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도덕법은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 곧 의와 거룩함에 달린 중요한 창문으로서 하나님의 본성과 본래 창조된 인간의 본성의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다.

웨슬리에게 도덕법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기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인간의 온전한 관계를 표현하는 표준이고 은총과 의(와 죄)의 존재 이유를 드러내는 표준이다.

또한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으로 인간이 창조된 것이 은총에 의한 것일 뿐 도덕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인식한다면, 이때 은총은 무정형이 되어 도덕법이 적절하게 표현하는 하나님의 생각을 담은 고유한 형식을 갖지 못하게 된다. 웨슬리는 구원론에서 은총은 언제나 범화된은총으로 평가 가능한 상황에서 생겨 꽃을 피우게 된다. 따라서 은총은 하나님의 도덕법으로 조명되며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인간을 초월하는 표준이다. 도덕법과 은총 중에서 도덕법이 없는 은총은 웨슬리가 그토록 분명하게 한탄했던, 추정과 자기-의지, 자기-기만과 반-율법주의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

최근 평가에서 웨슬리의 실천신학이 갖는 탁월성은 나누어진 것을 함께 묶어 낸다는 점이다. 실로 웨슬리는 도덕법이 올곧은 정직으로서의 거룩함의 특성을 표현할 뿐 아니라, 창조되었고 지금도 창조되고 있는 만물의지속적인 생존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한편으로 도덕법은 기본적인 거룩함을 엮어 낼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건강한 관계를 엮어 낸다.

인간의 타락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은혜로우시며 선하시다면, 또한 명시된 대로 인간의 부족한 것이 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면, 어떻게 악이 세상에 들어왔는가?

웨슬리는 이 중요한 물음에 대해 이사야 14장 12절 이하에서 타락한 천사로 등장하는 루시퍼를 예를 들어 대답한다. 예를 들면 웨슬리는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이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악은 아침의 아들, 루시퍼로부터 왔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를 오용하여 악을 창조 세계에 들여온 처음 존재였습니다.이미 체계화된 교회 전통을 따라 웨슬리는 교만이란 이름으로 루시퍼의 죄의 본질을 인식한다. 제1 대천사장 루시퍼는 처음에 자기 스스로를 너무 높이 생각하려는 자기-유혹에 빠지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자연스럽게 유혹에 자기를 내주었다. 먼저는 교만에 내주고 다음으로는 자기-의지에 내주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몇 가지 중요한 입장에서 인간의 타락과 루시퍼의 타락을 구분했다. 예컨대 인간의 타락은 활동적이고 외향적인 악의 힘의 유혹에 넘어간 경우라면 루시퍼의 타락은 온전히 선한창조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경우이다. 웨슬리는 악마는 스스로 유혹에 빠진 것고 인간은 스스로 유혹에 빠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탄의 자기-유혹이 교만에서 일어난다면, 아담과 하와의 불신앙,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함, 깨어진 거룩한 사랑의 관계는 외부의 유혹에서 일어난다. 웨슬리는 불신앙을 악의 근본 요인으로 보고 이렇게 선언한다. 바로 여기서, 곧 불신앙에서 죄가 시작되었다. 여인이 속임을 당했고, 거짓을 믿고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악마의 말을 더 신뢰했다.웨슬리는 히브리서 3장 12절을 주석하며 이렇게 주장한다. 불신앙은 일만 악의 아버지다. 불신앙의 본질은 우리의 생명과 거룩함과 행복의 근원이 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다

웨슬리에게 인간의 죄의 본성 곧 환원할 수 없는 본질은, 종종 잘못 생각하는 것처럼,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왜곡된 불신앙이다. 그러므로 소외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부족이 교만과 자기-의지라는, 후행하는 악의 진정한 기반이다. 소외와 불신앙으로부터 교만과 자기-의지가 나오고, 소외와 불신앙으로부터 모든 악한 기질이 나타난다.

타락의 결과

지극히 높으신 이를 저항하고 죄로 타락함으로써 인간은 여러 해로운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몸과 영혼으로 구성된 복합적 존재인 아담과 하와는 육체적이며 영적인 죄의 결과를 경험했다. 먼저 육체적인 죄에 대해 말한다면, 이전에는 고통과 죽음이 없었던 몸에 선과 악을 알게 된 후 죽음이 임하게 되었다.다시 말하면, 타락 이전에는 창조자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지금은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고 그 결과 몸은 썩고 죽게 되었다. 둘째, 영적인 타락의 결과는 육체적인 타락의 결과보다 더 끔찍한 것으로 나타난다. 특별히 웨슬리는 아담이...자기와 후손에게 고통과 해산의 수고, 슬픔뿐 아니라 시간적이며 영적이고 영원한(하나님의 은총이 없이) 죽음을 가져왔다.고 주석한다. 다시 말하자면, 죄를 짓는 순간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인간의 본래적인 의와 하나님과의 연합을 잃게 되었기 때문에 아담은 영적으로 죄 안에서 죽게 되었다.이로써 그의 영혼은 하나님께 죽게 되었다.그러나 육체적이며 영적인 죽음이 죄의 열매라면 어떻게 앞서 말했던 웨슬리의 영혼 불멸의 개념을 이해해야 할까?

초기에 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설교에서 웨슬리는 대답을 제시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아담의 타락 때문에 육체가 죽게 되었고 영혼은 죽을 수 없는 것을 빼고는 그 힘을 발휘하는데, 변화를 경험하였다.달리 말하면, 웨슬리는 여기서 영혼이 죽게 되었을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웨슬리가 말하는 영혼의 죽음은 은유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예컨대 영혼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의미에서 죽은 것이다. 영혼의 근거인 하나님의 생명과 분리되고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를 깨트린 아담은 자연이 창조될 때 받은 하나님의 은총을 상실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인간을 용납하지 않았고, 인간은 더 이상 자유로운 모습으로 지극히 높으신 이의 풍요로운 축복을 향유하지 않았다. 은총의 상실과 더불어 하나님의형상도 상실하게 되었고 인간은 진정으로 저주받은 상태에 남겨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아담과 관련한 웨슬리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요약한 자연적, 정치적, 도덕적 형상이라는 세 차원에서 논의하는 것이 최상이다. 먼저, 처음 차원인 자연적 형상이 타락으로 크게 망가지기는 했지만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아담의 이해는 작용하기는 했지만 혼돈과 오류상태에 있었다. 예컨대, 거짓을 진리로 여겼고, 진리를 거짓으로 여겼다. 오류는 무지로 이어졌고 증폭시켰다.마찬가지로 아담의 의지는 슬픔, 분노, 미움, 두려움, 수치와 같은 악마의 격정에 사로잡혀 타락하게 된 결과 의지의 안내자인 이해가 맹목적이 되어 많은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와 마찬가지로 의지는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 의지는 곡해되고 품격이 떨어진 형식으로 남게 되었다. 예컨대, 의지는 더 이상 의지의 최고 목표요 목적이며 가장 고매한 목적이 되는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을 향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에 우상의 욕망과 감성의 홍수에 휩쓸려 계속해서 준-궁극적인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웨슬리가 이해의 타락과 의지의 타락의 관계를 분멸하였듯이 의지와 자유의 관계에서도 유사한 관계를 보았다.

이제 품격이 떨어진 의지의 타락으로 자유는 덕과 함께 사라졌다. 자유는 관대한 주인 대신 무자비한 폭군 아래 높였습니다. 덕의 주인이 악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정치적 형상도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크게 모호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인간이 창조자와 전체 짐승 세계 사이의 소통의 통로였지만 이러한 축복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당연히 창조자와 짐승 세계의 소통이 단절되었음을 주목한다. 분명코 인간이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의 중재자가 되는 대신 저주가 되었다.

웨슬리는 도덕적 형상이 지고의 존재의 의와 거룩함을 반영하는 하나님의 주요 형상이기 때문에, 관계에 있어서 가장 큰 분열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써 해결되어야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한편으로 웨슬리는 자연적이고 정치적인 형상이 부분적으로 오염되었거나 상실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 도덕적 형상은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을 상실한 아담은 부분적으로는 교만, 악의, 다른 악한 성정이라는 악마의 형상에 빠졌고 또 부분적으로는 짐승의 형상에 빠져짐승의 격정과 타락의 욕망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갖게 된 하나님과의 왜곡된 관계는 거룩함과 사랑이 자리했던 그의 마음의 성정과 모든 사유와 활동을 향해 기본적인 성향과 기질을 함께 구성했던 성정에 영향을 미쳤다. 달리 말하면, 모든 삶과 거룩함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변화는 필연적으로 기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웨슬리는 타락한 이해와 의지의 노예가 된 결과 인간이 완전할 때 흘러 넘쳤던 행복이 뒤집어 지게 되었습니다.라고 기술한다. 간단히 말해 아담과 하와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들이 거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의 마음은 비열함이 지배하게 되었고, 고통을 주는 감성으로 넘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순결함이 상실되었다.

원죄

교회 전통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들어온 육체적이며 영적인 유전으로 원죄교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원죄교리에 대한 종교 강령을 미국 감리교인들을 위해 편집하면서 마지막 구절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임하게 되었다는 마지막 구절을 생략하였다. 이처럼 편집상의 변화는 원죄교리에 대한 웨슬리의 강조가 죄책감이 아니라 어떻게 이해되든 타락한 본성이 후손에 전달되는 것임을 보여 준다.

1750년대 말 웨슬리는 이미 전적 타락을 말하는 라틴 전통과 죄를 질병으로 보았던 동방정교회 입장의 종합을 추구하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웨슬리는 카르타고 공의회와 제2 오렌지 공의회의 전통을 따랐고, 원죄의 내용이 타락에 있지 않고 모방에 있다고 보았던 펠라기우스의 입장과 거리를 두었다.

여러모로 테일러와 당시 이신론자들과 스스로를 구분했던 웨슬리는 무슨 이유는 변명에서건 이렇게 중요한 원죄교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단자들일 뿐이라고 선언했다. 웨슬리는 신앙의 유비에 호소했고, 교회의 중요하고 근본적인 성서적 교리 세 가지는 죄,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 이에 따른 거룩함이라고 주장했다.

어떻게 원죄가 전해지는가?

웨슬리는 어떻게 원죄가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하여 온 인류에게 전해지는가에 대해 생각할 때는 철저하게 잘 정리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따랐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시편 51편 5절을 시편 기자에게만이 아니라 온 인류 전체에 적용한다. 이제 우리 모두는 악으로 형성되었고 우리의 어머니들이 우리를 죄 가운데서 잉태했습니다. 우리의 본성을 힘과 능력에 있어서 온전히 타락했습니다.다시 말한다면, 아담은 아담 스스로가 그런 것처럼 죄가 가득하여 불결하고 약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비천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아들을 출생하였다. 자신과 같이 몸과 영혼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뿐 아니라 죄책과 역겨움과 퇴보와 타락한 인간으로 출생하였다.

아담이 자신의 형상으로 아들을 낳았다는 우울하지만 중요한 진리는 강조해서 반복되는 다음 문구로 인해 독자에게 강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예컨대, 앞구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형상과 반대되는 것으로 자신의 형상을 따라를 사용하고 있다. 이 표현은 분명 아담이 창조된 상태와 셋이 출생한 상태가 차이가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불신앙과 교만, 저항은 아담이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시킬 뿐 아니라,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고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아담의 타락한 형상을 드러내면서 후손에게 이어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웨슬리는 아담이 인간의 대표자로서 그가 한 일의 결과가 자신 안에서 그치지 않고 그가 대표하고 있는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로마서 5장 19절에서는 이렇게 주장한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여러 사람 곧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이 구절은 아담의 죄의 유전으로부터 아무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예증하고 있다.

워드와 하이젠레이터는 웨슬리가 1762년 울너의 영혼의 참 기원을 읽은 후, 영혼 출생론의 입장을 갖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웨슬리는 “(아담의) 후손들의 몸뿐 아니라 영혼도 우리의 처음 아버지로부터 온 것으로 후손들에게 계속해서 이어졌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아담 안에서 아담과 더불어 타락했기 때문에 타락한 존재로서의 출산이 필연적으로 타락한 영혼을 전달해 준다.

그러나 웨슬리는 아우구스티누스와는 달리 출산의 과정 자체와 죄를 너무 밀접하게 연결시키려하지 않았다. 웨슬리는 우리는 죄로 오염된 본성을 자녀들에게 전달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죄를 범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원죄의 결과

웨슬리는 여러 저술에서 아담이 인간에게 유산으로 넘겨준 영적 유산을 탐구했다. 예를 들면, 웨슬리는 1759년에 쓴 원죄란 설교에서 자연적인 상태에 있는 인간, 곧 하나님의 은총의 도움을 받지 않은 상태의 인간을 언급한다. 그리고 이전에 다윗 왕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남자와 여자가 진리와 거룩함을 떠나갔기 때문에 의인은 없으며 한 사람도 없다.주장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이 세상에 불신앙으로 특정되는 무신론자들로 태어났다. 우리는 본성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면식도 없습니다.달리 말하면, 은총에서 떠난 우리의 자연적인 이해는 하나님의 인식에 이르지 못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무신론과 우상숭배는 교만으로부터 일어난다. 인간은 스스로를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보다 더 높은 것으로 생각하거나 그들이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영광스런 무엇인가를 얻은 것처럼 생각한다.웨슬리의 자기-만곡으로서의 죄 개념은 루터의 스스로를 향해 뒤틀려진 자기 개념과 비슷하다.

아담이 물려준 유산 가운데 세 번째는 자기-의지이다. 사탄은 우리 마음에 자기-의지로 자신의 형상을 심어 놓았다.

여기까지 무신론, 교만, 자기 의지의 형식으로 나타난 원죄는 사탄의 악을 반영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다음 단계에서 우리는 아담이 죄의식조차 느끼지 않는 우상숭배에 빠진다. 예컨대, 세상의 사랑에 빠진다.고 말했다. 요한 1서 2장 16절을 주석하면서 육체의 정욕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세 요인으로 원죄의 네 번째 단면을 전개한다.

그러므로 불신앙(무신론), 교만, 자기-의지, 세상의 사랑은 모든 면에서 인간이 아담과 하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다. 다시 말하면, 웨슬리는 아담이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을 상실하게 되어 자연적 형상과 정치적 형상이 아주 희미하게 된 이후 이 유산은 그 후손에게 이어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전적 타락

하나님의 은총이 없다면 현재 인간의 영적 상태는 어둡고 황량하다고 기술하는 것이 적적하다. 웨슬리는 자신의 원죄교리에서 인간에게 던져진 도덕적이며 영적인 심연을 표현하기 위해 최상의 부정을 사용한다.

웨슬리는 다른 문헌에서도 전적 타락의 주제를 계속해서 다루면서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에서 여러분은 모든 능력, 영혼의 능력이 타락했고, 전적으로 타락하여 모든 기반이 정도에서 떠났다.라고 논평했다. 인간의 마음의 기만이란 설교에서도 인간 마음의 사유의 모든 상상이 악하고 악할 뿐이며 계속해서 악하다.고 하였다. 또한 웨슬리는 원죄에 대한 논문에서 본래적 의로움의 결핍죄로의 본성적 성향이란 말로 인간 본성의 타락을 표현한다. 또다른 글들에서 웨슬리는 은총을 떠난 원죄의 깊이와 넓이를 기술하기 위해 (1)불법과 죄로 죽은”, (2)“불경건과 불의”, (3)“절망적으로 악”, (4)“지속되는 악”, (5)"전적 타락과 부패와 같은 문구들을 사용하고 있다.

서방 전통과는 달리 동방 교부들은 전적 타락이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동방교부들은 아담과 하와가 뒤따라오는 은총에 응답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웨슬리와 동방신학자들의 신학은 인간이 은총을 받고 응답할 수 있도록 선물을 받았다.는 유사한 결론에 이르다. 그러나 이들의 유사한 구원론적 입장은 다른 시기와 다른 통로를 통해 이룩한 결론이다. 분명 웨슬리는 모든 은총에서 떠나 인간이 원죄로 인한 완전한 타락을 주장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먼저 주도권을 갖는 은총(선행은총에 대한 강조)으로 활동해야 했을 뿐 아니라, 어떤 책임이나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기 전 죄와 타락의 결과를 걷어 내기 위해 회복을 가져오는 은총의 주권적 원인으로 활동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간단히 말해서 많은 동방 신학자들에게 타락은 적절한 자리에서 응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 놓는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따랐던 웨슬리와 같은 이들은 하나님께서 먼저 주권적으로 선행 은총을 통해 이전에 향유했던 관계를 어느 정도 인간에게 회복시켜 주지 않는다면 타락한 결과가 너무 커서 구원의 길을 따라 응답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보았다.

선행은총

웨슬리는 원죄에 대해 어떤 동방 교부들과는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던 반면, 은총에 대해서는 아우구스티누스와 16세기 종교개혁자들과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웨슬리가 전적 타락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 전혀 하나님의 은총이 없는 자연인을 의미하고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의 도움을 받지 않은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을 배운다.그러나 이러한 인간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웨슬리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이라는 설교에서 선행은총의 중심 본문이 되는 요한복음 1장 9절을 이용하여 이렇게 덧붙인다. 모든 사람은 조만간 혹은 약간은 세상에 난 모든 사람들을 비추는 어느 정도의 빛과 가냘픈 빛줄기를 갖고 있다.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에 인간이 계속해서 의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원죄의 영향이 여전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전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성서와 전통에 호소함으로써 자신의 선행은총 교리를 지지했다. 선행은총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기초한 선행은총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이 약간은 인간의 부름 이전에 선행은총을 갖는다.선언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행은총은 지리와 문화에 제약받지 않고 모든 인간에게 값없이 주어지며,인간의 능력과 공로에 기초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값없이 주시는 은총이다.선행은총은 배타적이 아니라 포용적이며,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값없이 주어진 은총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웨슬리는 처음 은총의 희미한 빛은 구원으로 안내하는 입구이다.

선행은총의 유익을 평가하지 전에 먼저 웨슬리의 글 속에서 선행은총의 이중적 사용을 찾아냈던 아우틀러의 분별을 살피는 편이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선행은총의 첫 번째 의미는 좁은 의미로 이해한 것인데, 칭의 은총과 성화 은총 이전의 모든 은총을 의미한다. 이 상황에서 선행이란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 죄인들을 책임적이게 하는 전체적인 죄인의 조명뿐 아니라 성령의 사역으로 일어난 죄에 대한 확신을 포함한다. 두 번째 의미는 광의의 의미에서 이해한 것인데 회개은총, 칭의 은총, 신생은총, 혹은 성화은총과 같이 모든 은총 안에서의 인간의 응답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행적 활동을 강조하는 모든 은총을 선행은총으로 본다.

모든 은총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우선성이라는 광의로 인식된 선행은총은 종교 강령10조가 선언하듯이 신-인 협력, 곧 진정으로 함께하는 활동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이란 설교에서 가장 잘 표현된 신-인 협력은 조심스럽게 이해되어야 한다. 한 예로 만일 광의로 협력의 배경에서 선행은총이 모든 신-인 활동의 배타적인 패러다임이라면 웨슬리 신학은 신-인 협력의 개념을 넘어설 수 없는 것으로 잘못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본질상 하나님의 우선성 개념만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웨슬리의 이해를 다 담아낼 수 없다. 오히려 정확히 읽어보면 하나님의 활동과 인간의 활동을 포함하고 있는 신-인 협력적 패러다임은 인간의 공로 없이 하나님의 활동만을 강조하는 개신교(바울)의 입장이 동일하게 받아들여지는 좀 더 큰 접속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상호-협력적 은총뿐 아니라 상호 협력적 은총과 값없이 주시는 은총의 접속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결국 넓은 의미의 선행은총은 이 두 배경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값없이 주시는 은총 또한 하나님의 활동의 우선성을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웨슬리가 자신의 글에서 선행은총이란 용어를 사용할 경우 넓은 의미의 선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좁은 의미의 선행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선행은총은 앞서 오는 것으로 스스로를 넘어 구속적 은총을 지칭한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칭의 은총과 신생의 능력을 지시한다. 간단히 말하면 좁은 의미에서 선행은총은, 지극히 높으신 이로부터 오는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엄밀히 말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지 않는다.

선행은총의 혜택

웨슬리는 자신의 글에서 타락의 끔직한 결과를 완화하는 선행의 은총으로 인간에게 가져다준 5가지 혜택에 대해 이야기한다.

먼저, 로마서 1장 19절에 대한 주석에서 웨슬리는 하나님의 속성이란 형식으로 표현된 기보적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성령의 선행적 역사로 모든 인간에게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이 인식은 특별계시와 상관없는 보편계시이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이 인식이 자연신학의 기초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학자들은 자연신학이 나타나는 듯 보이지만 은총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서둘러 주장했다.

둘째, 하나님의 은총이 없는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것이기 때문에 창조 시에 마음에 새겨져 하나님의 형상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는 타락 후에 하나님은 인간을 이처럼 완전히 절망스런 상태에 남겨두지 않고 하나님의 도덕법에 대한 인식을 인간을 마음에 새겨 주어서 길을 열어보였다.

셋째, 웨슬리는 양심의 궁극적 기원이 전능자 하나님이라고 밝힌다. 거부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 안에 인간의 격정과 행동을 인정하거나 정죄하는 내면의 심판자로서 양심을 주었다는 것이다.웨슬리는 양심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런 성품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선물 이라고 주장한다.

넷째, 웨슬리는 여러 면에서 개신교 종교개혁자들과 유사한 원죄교리를 가르쳤기 때문에 인간이 자연적 자유의지를 소유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부인했다. 달리 말하면, 은총이 없는 인간은 죄 덩어리일 뿐이다. 웨슬리가 로마가톨릭의 전통을 따라고 또 다른 한편으로 비텐베르크와 제네바의 종교개혁 전통을 따름으로써 반-펠라기우스주의와 결정론으로부터 자신의 신학을 구별하게 한 것은, 구원론적으로 말해 성령에 의한 회복이 없이는 자유롭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상당한 정도의 자유의지가 성령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회복된다는 고백이었다. 웨슬리는 은총의 주권적인 원인성은 유지하되 하나님의 결정론은 피해 가는 제3의 대을 추구했다. 이 외에도 아우틀러가 정확히 간파했듯이 선행은총의 현종으로서 은혜로이 회복된 자유의지에 대한 웨슬리의 탁월한 이해는 결정적으로 자신의 신학과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을 분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우틀러에 따르면 아르미니우스는 은총이 선행적으로 주어지기에 인간은 하나님께 돌아갈 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주장한 반면, 웨슬리는 성령의 선행적 활동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선한 것을 향해 움직여지고 영감을 얻게 된다.고 주장한다.

다섯째, 하나님의 속성의 제한된 인식으로, 도덕법의 이해로, 양심의 능력으로, 그리고 초월적으로 회복된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로 표현된 선행은총은 인간의 악함을 제한하고 인간의 사악함을 제약하는, 선행하는 사례들과 구분될 수 있는 누적 효과를 갖는다. 선행은총에 대한 다섯 번째 개념은 여러 면에서 루터의 창조와 보존의 질서 개념과 유사하고 20세기 본회퍼의 위임개념과 유사하다. 달리 말하면 여기서 하나님의 은총은 적어도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교회를 개의치 않은 사람들의 세계에서조차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인간의 악을 제어한다.

웨슬리가 은총과 율법, 죄에 대한 교리들을 앞서 탐구했던 것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선행은총의 다섯 차원은 은혜로운 회복의 영을 통해 죄인들을 구원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선행적 활동과는 구분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새롭게 태어난 능력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새로워진 능력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다.

둘째, 웨슬리의 원죄교리는 전적 타락 개념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은총이 웨슬리의 구원의 순서의 어떤 지점에서 작용해야 한다. 선행은총이 은총으로 회복된 능력이란 점에서 저항할 수 없는 것임을 부인한다면 이는 곧 웨슬리가 전적 타락을 주장했음을 부인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배경에서 저항할 수 없음이란 저항될 수 있는 능력으로의 부름이나 서곡이 아니라, 책임적인 인격과 상호 책임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 어떤 의미에서 선행은총을 일종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으로 이해하는 것은, 칼빈과 마찬가지로 웨슬리도 사랑의 하나님의 순수한 은혜, 온전한 자비, 필연적 주도권을 강조했음을 예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와 웨슬리주의의 주요한 차이 중 하나는 구원의 순서 가운데 어느 시점에서 저항 할 수 없는 은총이 일어나는가?하는 문제이다. 칼빈은 성화은총이 저항할 수 없는 은총이라고 본 반면 웨슬리는 선행은총이 인간의 요청을 기다리지 않는저항 할 수 없는 은총이라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웨슬리의 선행 은총론은 전적 타락, 은총에 의한 구원, 인간의 책임, 만인구원이란 네 주제를 어떤 모순도 없이 통합한다. 그러나 칼빈과 루터의 신학은 단지 처음 두 주제만을 통합하고, 예저오가 선택교리는 왜 모든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는가를 설명한다.

오늘과 내일 : 자아에 대한 최근 논의들

비록 웨슬리가 자신의 인간학적 견해를 전개할 때 철학적 의미를 발전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웨슬리의 가르침 속에서 그 철학적 의미를 추론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선행은총으로 일어나게 되는 중요한 회복과 함께 웨슬리의 전적 타락 교리는, 초월적 자아가 존재하지만 초월적 자아가 은총으로 회복된 화려한 능력과 완전히 동일시되지 않고 구별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웨슬리의 입장에서 설명한다면, 자아는 타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심지어는 성령의 부르심을 통해서 양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자아의 이해는 통합되고 통일된 주체의 개념이 현실적인 현상의 반영이 아니라 계몽주의의 합리성과 중산층의 개인주의에 대한 담론의 산물로 비춰지는 포스트 모던의 배경에서 어려움을 맞고 있다. 사적으로 구성된 자아는 근본적으로 사회 안의 거미줄처럼 배열된 여러 담론에 자리하며 의존한다. 따라서 이들 담론과 사회적 실채가 없다면 분명한 정체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버시스 마틴은 나는 스스로를 계급, 성, 세대, 교회의 산물인 사회적 구성으로 경험한다.고 주장한다. 미셀 푸코는 인간이란 최근 자료가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예컨대 인간이란 바다사가의 모래 위에 그린 얼굴처럼 지워질 수 있는작품이다.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꼼꼼히 연구했던 로버트 웹스터는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에게서 발견된 하나님과 자아에 대한 허무주의적 해석을 열거했다. 그는 초기 급진적 경험론자들과 오늘날 포스트모던 해제주의자들의 공격으로 데카르트의 하나님이 해체됨으로써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존재가 기반을 잃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20세기 초 논리실증주의자들과 스키너와 같은 급진적 과학 경험론자들은 한편으로 환원주의를 견지하고, 다른 한편으론 인간이 단지 행동의 저장소이기 때문에 일반과학과 특히 환경과학으로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방법론적 주도권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실증주의든 해체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이든 각각의 경우 방법론적으로 간관한 것은, 자아가 참여하고 자아의생명의 기원이 되는 초월의 실재이다. 이처럼 소통가능하고, 자유로우며, 상호 책임적인 초월적 차원은, 웨슬리의 자아이해에 결정적인 것으로 나타나며, 자아에 대한 실증주의적 비판이 방법론적으로 아주 정확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포스트모던 이론들이 좀 더 광범위한 해체의 기획에 동참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사실 길은 그의 책 중재된 초월에서 전체적인 인간 경험을 이해할 때 필수적인 초월의 실재를 근대성과 다른 차원에서 주장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이 존재와 같이 인지를 갖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타자 지향을 사랑하는 초월적 자아는 실증주의나 해체적 포스트모더니즘이 방법론으로 증명되거나 증명될 수 있는 실재다. 그러므로 좀 더 광의의 인간학적 물음과 관련하여 말한다면, 초월적 자아가 더 이상 하나의 유용한 패러다임이나 선택이 아닌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포스트모던 허풍에 부로가하다.

칸트의 통찰에서 볼 때 역사를 통해 나타난 다양한 인간 경험의 질서를 위해서라면 적어도 우리는 초월적 자아를 긍정할 수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초월적 자아를 위한 어떤 객관적 증명은 실제로 적합하지 않다. 또한 이 초월적 자아는 개인의 몸과 집단적인 사회적 배경이라는 구체적인 실체를 통해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초월적 자아는 이런 구체적인 실체의 설명으로 환원될 수 없다.

비록 웨슬리는 초월적 자아라를 구체적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선행은총으로 능력이 회복됨으로써 할 수 있고 책임질 수 있다는 가르침을 통해 그의 책 여러 곳에서 초월적 자아를 예시하고 있다. 그러나 웨슬리는 몇몇 포스트모던 주장과는 반대로 구원의 실체란 결코 순수하고 단순한 관계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상응에서 중요한 누구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신적인 본질인 하나님의 누구이 나닌 것처럼, 인간의 누구또한 비어있는 것이다. 바로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신적 누구에 대한 이해, 곧 그분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이해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이라는 구원의 시작을 특징짓는다.

제 3장 예수 그리스도 : 계시된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은 영원히 빛을 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 기초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행적 활동은 시간과 문화,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실재적인 의미에서 갈릴리 출신 유대인이었던 나사렛 예수는 구원 역사의 중심에 위치한다.

웨슬리의 거룩한 사랑의 신학은 성찰과 의도와 목회에서 그리스도가 중심임을 드러낸다. 실로 웨슬리의 실천신학은 그리스도론(Christology)에 기초한다. 말하자면 창조 질서, 구원의 빛,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 이 모두는 그리스도의 은총과 탁월함을 나타내는 중요한 창이다. 이 책에서는 명증성과 질서를 위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따라 그리스도론을 전개하고자 한다. 따라서 순서에 따라 예언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목회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두 본성(신-인), 그리스도의 오심의 의미(수육), 십자가에서의 죽음(구속)을 다룰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인격이란 용어는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작품에서 나타나듯이 초대교회의 성찰에서 비롯된다. 고대 신앙 공동체가 인격(위격, hypostasis)이란 용어로서 의도했던 바는 자율과 개인주의를 강조한 현대개념과는 구분된다. 고대신앙 공동체는 아리우스의 추론에 반대하여 그리스도(말씀 혹은 육을 입은 로고스)와 하나님(아버지)의 관계를 성서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분명히 하였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인격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을 자신들에게 주어진 신학적 과제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 출생한 자와 출생하지 않은 자의 관계를 주목했다. 관계로 이해된 인격은 분리되거나 자기-만족으로 완결된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과정 중에 있타자와의 관계를 표상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격을 바르게 설명하려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아버지)과 인간의 관계로 이해되어야 했다.

하나님의 본성

초기 교회의 전통에 따랐던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한 인격이 하나님과 인간의 두 본성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노년에 쓴 영적 예배라는 설교에서 웨슬리는 영감을 받은 신약성서 저자들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모든 칭호와 속성, 특별히 영원성을 그리스도에게 부했다고 지적한다. 웨슬리는 1장에서 상당히 자세하게 기술한 과거의 영원성과 미래의 영원성의 구분을 통해 아들의 영원성을 탐구했다.

웨슬리에 따르면 아들은 이토록 영원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진실로 온전하게 하나님이다. 그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빛중의 빛, 참 하나님중의 참 하나님 곧 영광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등하며 그 광대하심이 아버지와 함께 영원하다라고 단언하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

또한 웨슬리가 무슨 권위를 갖고서 예수께서 산상수훈을 설교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면서 예수그리스도의 권위는 모든 것의 창조자의 권위임을 말한다. 웨슬리는 감격하여 선포한다. 하나님, 하나님의 권위이다! 그렇다. 존재들의 존재, 야훼, 자존자, 지고자, 모든 것을 넘어 존재하며 영원히 축복이신 하나님의 권위이다.

웨슬리는 자신이 속한 영국 국교회의 가르침에 동의했다. 역사적인 국교회 39개 종교 강령 2항은 참되며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신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의 실체(이다)고 선언한다. 따라서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한 실체임을 주장하는 모든 자료를 근거로 종속론에 대해서도 거부한다. 또한 1789년에 펴낸 설교 육체를 따라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는 아리우스주의, 저등 그리스도론들, 특별히 소키니우스주의를 반박한다.

웨슬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아버지의 동질적인 동등성을 주장하는 두 방식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하나님의 말씀이란 칭호를 통해서이다.

웨슬리는 신약성서 주석에서 누가복음 22:70을 주석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메시아를 뜻하는 칭호뿐 아닌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칭호라고 보았다. 하나님의 아들과 인간의 아들이라는 이 둘의 칭호는 메시아의 칭호였다. 하나님의 아들은 신성으로부터 취해졌으며 인간의 아들은 인성으로부터 취해졌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두 번째 칭호를 통해서 웨슬리는 하나님/아버지와 아들의 역동적인 관계를 분별했다. 하나님의 말씀하심은 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며 존재와 관계 둘 다를 지칭한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말씀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 웨슬리에 따르면 지극히 높으신 이가 말씀하심으로서, 아버지와 더불어 존재하는 여기 선포된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이 본질에 있어 일치하듯이 영원한 성향을 갖는다.간단히 말해서,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존재를 가지지 않기 때문에 말씀은 하나님하고만 함께 하였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아들을 낳고 말씀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또한 세상의 창조에 밀접하게 관여했다. 아들은 “‘참 하나님이고 모든 만물의 유일한 원인이며 창조자이자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움직임의 주인’”이다.

웨슬리는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것이 너의 영역이다. 이것이 바로 너의 경계이다. 세계여!라고 말했음을 의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들은 세계와 많은 피조물을 창조하는 데에 밀접하게 참여했을 뿐 아니라 참 하나님으로써 만물의 지지자이기도 하다. 예컨대 아들은 그의 권능의 말씀으로 만물을 유지하며 동일한 말씀으로 만물을 무로부터 창조했다.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은 만물의 보존자이다. 우제에서 모든 움직임의 주인일 뿐 아니라, 인간이 소유한 모든 생명의 샘이며...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생명이다.

창조자, 주인, 지지자, 보존자라는 네 역할은 세상이 존재하고 세워진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감독과 적극적인 돌봄을 강조한다. 여기서 웨슬리의 말을 빌린다면, 아들은 전체 창조와 창조의 모든 부분의 주님이며 운행자이다. 웨슬리는 아들의 총지를 아주 중요하게 보았다. 아들은 창조된 만물의 통치자이며 아들의 통치는 아버지의 통치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향한 섭리적 통치를 포함한다.

또한 웨슬리는 자신의 신학적 의미와 방향이 담긴 신적 칭호를 아들에게 붙인다. 따라서 참 하나님으로서의 아들은 사도신경에서 엄숙히 선언하듯이 만물의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만물이 그의 것이며 그를 통해서 존재하고 그에게 속한다. 그의 것이란 말은 창조자를 뜻하고, 그를 통해서란 말은 지탱자요 보존자임을 뜻하며, 그에게라는 말은 모든 만물의 궁극적 목적이 됨을 뜻한다.단순히 말해서 창조의 기원에서부터 만물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이 지향하는 목적으로서 완전한 사랑과 존재이다.

용서와 새로운 생명으로 신앙인들을 중재하는 구원자의 역할이 하나님 아들의 유일한 중심역할이라고 알려져 왔다. 실제로 최근의 몇몇 신학적 경향에 따르면 하나님의 세 위격은 때로 이러한 구분에 따라 나누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분명 웨슬리의 그리스도론(혹은 웨슬리의 신론과 성령론)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웨슬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구원자이면서 창조자요, 주인이며, 지탱자이자 보존자이고 통치자이며 궁극이라는 표현으로 적절하고도 정황하게 묘사된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면, 그 어떤 기능도 아버지에게만 혹은 아들이나 성령에게만 속하지는 않는다. 이 영역에 대해서 초기 교회는 아버지와아들과 성령의 세 위격이 상호적으로 서로에게 침투하며 서로 관계한다는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혼돈 없이 순수하게 침투한 상태로 서로-안에 있는 존재를 상정할 때 위격들의 역할이 상호 침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웨슬리는 이러한 고대의 지혜를 소중한 것으로 이해했다.

인간의 본성

웨슬리는 하나님의 형체로부터 인간의 형체로 나아가는 아래로의 움직임(육을 입은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놀라운 방법으로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영광스런 형체를 비워 겸비한 순수 인간의 형체로 내려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과 인간을 잇는 말씀은, 웨슬리가 이해했듯이 기독교 신학에서 초월과 내재 사이의 기본적인 긴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형체를 입은 말씀의 수육은 독특한 기독교적 계시 이해 속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초월적으로 저기 높은 곳에 냉담하게 떨어져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은총의 움직임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온 이야기는 겸비한 모양으로 특별히 가난하고 겸비한 마리아가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를 감싸고 있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으로 임신했다고 가르쳤다. 동정녀 탄생 교리는 예수의 탄생에 하나님이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달리 말하면, 성령께서 마리아의 임신을 가능케 했다는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

여러 면에서 웨슬리는 마리아가 영원히 동정녀임을 주장함으로써 영국 국교회와 로마카톨릭 전통을 따랐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까지도 마리아가 순수하고 흠 없는 동정녀로 계속 남아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웨슬리는 비록 그리스도께서 동정녀로부터 탄생되었다고 주장했지만, 마리아와 그녀의 실체를 너무 밀접하게 동일화하는 것에 난색을 표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웨슬리는 분명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와 실체가 하나라는 것을 주장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 강령을 펴내면서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이 한 분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개의 온전하고 완전한 본성이 결코 나누어지지 않는 한 인격 안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서신들을 자신이 편집한 기독교 총서에 넣어 발행했을 때 또 다른 문제들이 나타나게 된다. 편집하는 과정에서 육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수가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구절들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웨슬리가 애칭사용을 거부한 합리적인 이유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칭은 통치자 주님께 돌려져야 할 잔잔한 존경을 누그러뜨릴 뿐 아니라 “‘감히 움직일 수도 없는 무언의 경외를 느끼지도 못하게 한다.

웨슬리의 저술에 그리스도의 인성을 경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료들이 있고, 때문에 단성론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웨슬리의 그리스도론은, 칼케돈 공의회가 정한 정통(한 인격 안에 두 본성을 공식화)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온전히 고백하는 데 주저했던 것은 사실이다. 데니쉬는 웨슬리가 기독교인의 삶과 예배를 위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할지라도 웨슬리의 그리스도론을 가현설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고 주장한다. 웨슬리는 신성을 강조하기위해 그리스도를 존중하고 이름을 명예롭게 했지만 그에게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이었다.

그리스도의 사역

어떻게 예수가 그리스도인가? 이 물음들에 대한 대답은 특별히 예언자, 제사장, 왕이라는 직무로 나사렛 예수의 사역을 논한 웨슬리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다.

예언자

마태복음 1장 16절을 주석하면서 웨슬리는 교회가 예수의 삶과 목회의 빛에서 예수에게 붙여주었던 그리스어 그리스도와 히브리어 메시아라는 용어가 기름부음을 받은 칭호 곧 예언자, 제사장, 왕의 역할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았다.

웨슬리는 첫 번째 예언자의 역할에 대해서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깨우치고, 하나님의 전체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 수육 했다고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위대한 법의 수여자였으며 새로운 종교를 세상에 소개한 것이 아니고새벽별이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할 처음부터 존재했던 동일한 법을 세상에 소개한 것이다.이렇게 그리스도를 이렇게 그리스도를 법의 수요자로 고백하는 것은 웨슬리 당시 놀라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몇몇 개신교인들이 율법과 복음의 변증에서 율법의 지지함과 규범적인 힘을 은총의 이름으로 폐기하고 복음을 자유여겼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메시아인 그리스도는 계약과 계약 사이의 연속체이다. 특별히 구약의 도덕법과 신약의 도덕법 사이의 역속체이다. 다시금 웨슬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모세의 십계명의 수여자일뿐 아니라 법의 위대한 입안자라고 보았다.

사실 웨슬리는 도덕법과 그리스도를 아주 강하게 연결시킴으로써,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특징짓는 그리스도론적 술어들을 놀라울 정도로 도덕법과 관계시킨다. 율법의 기원, 본성, 속성, 그리고 사용이란 설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드러났다. 어떤 의미에서 사도신경이 아들에 대해 말한 것을 이 법에 적용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분출혹은 터져 나옴이며 하나님의 인격이 드러난 형상이다.이와 같은 설교에서 웨슬리는 도덕법을 영원한 아버지의 가장 사랑스런 자녀, 가장 빛나는 아버지의 본질적인 지혜의 발산, 지극히 높으신 이의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으로 묘사한다.

웨슬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영원한 독생자인 그리스도의 존재와, 창조 질서에 기초하여 태초에 생겨난 도덕법의 형식 사이를 분명하게 구분했다. 다시 말하자면, 도덕법은 보이는 형식을 입은 하나님의 덕이요 지혜이다. 그래서 이러한 덕과 지혜가 영원부터 창조되지 않은 정신이었던 진리와 선의 원 개념들.임을 결단코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예언자 역할은 특히 관계의 적절함으로 도덕법을 창조자의 분명한 뜻으로뿐 아리라 여러 관계들 안에 믿는 자들이 영원히 선한 의지의 지고의 목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함에 이르도록, 만물에 질서를 준 통치자의 뜻을 표현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언자로서의 그리스도는 서방 개신교 신학의 접속적 표현인 율법과 복음, 웨슬리의 특성화된 접속적 표현인 거룩함과 사랑의 선생이다.

제사장

웨슬리에 따르면 죄 때문에 생겨난 불신앙과 소외, 교만은 인간의 노력과 계획으로 극복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죄 된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문제이기 때문에 죄로 야기된 문제를 치유할 수 없었다. 왜곡시키고 속이며 깜짝 놀라게 하는 힘으로 죄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갖는 바른 관계는 중재자의 사역을 통해서만 다시 세워질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잇는 중재자의 사역이 너무도 중요하기에 웨슬리는 중재자를 통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기에 인간과 하나님을 화해시키기 위해, 우리의 전체적인 구원의 사건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계신 중재자가 없다면 하나님이 계심을 향유할 수 없다.

하나님-인간을 중재하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역할은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는 독특한 인격과 본성에 대한 이해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독특하다. 영국 아르미니우스주의자였던 웨슬리는 그 인격이 참 하나님이면서 참 인간이 그리스도가 인간의 대표적인 둘째 아담으로서 모든 이의 중재자라고 보았다.

구속

죄에 대한 구속은 제사장인 중재자가 자신의 희생을 통해 이룬 일 가운데 일부이다. 웨슬리에 따르면 죄에 대한 구속의 사역은 이사야의 고난당하는 종의형상으로 나타나는 바, 골고다에서 완성되고 최고로 표현된다. 웨슬리가 활동했던 18세기의 상황에서 구속이나 십자가의 필요를 보지 못했다. 대신에 성서적인 도덕의 체계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원죄와 마찬가지로 구속이 이신론과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구분하는 접점로 보았다. 기독교 교리의 체계 안에서 구속의 교리보다 더 위대한 결과를 가진 것은 없다.

구속에 대한 수많은 이론들이 교회 역사를 통해 표면에 떠올랐다. 이레니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같은 초대 교부들은 예시된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악마의 포로로부터 자유하게 하려고 보상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은유를 발전시켰다. 웨슬리의 경우 오리게네스처럼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보상했다고 분명하게 가르쳤다. 디모데전서 2:6을 주석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충분함을 논했던 부분에서 나타나듯이 보상의 보편성을 강조했다. 영혼이 있는 자마다 이러한 보상을 필요로 했다.” 1739펴 낸 값없이 주시는 은총설교에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를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셨다.그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감당하였다.’”라고 웨슬리는 선언했다.

단순한 보상 이론을 넘어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웨슬리의 여러 성찰을 조명하는 구속 이론은 기본적인 만족 개념으로 귀속된다. 만족 개념은 보상 개념으로서, 특별히 보상을 하나님의 정의로 표현하는 개념으로 발전한 것이다.

중세 캔터배리 대주교의 만족설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죄에 대하여 만족을 시켜야 하지만 그럴 수 없다.(의무, 그러나 그럴 수 없음)

하나님은 죄에 대해 만족을 시킬 수는 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그럴 수 있지만 의무는 없음)

오직 신/인 만이 죄에 대해 만족을 시킬 수도 있고 만족을 시켜야 한다. (그럴 수 있고 의무가 있음)

웨슬리는 자신의 글 속에서 첫 번째 전제를 상당히 자세하게 탐구하였다. 안젤무스와 비슷한 방식으로 웨슬리는 인간이 자신의 죄를 해결할 능력이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만족개념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대한 웨슬리의 이해와 통합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우리는 안셀무스의 만족설과 웨슬리의 만족설을 구분해야 웨슬리의 사려 깊은 판단에 이를 수 있다. 예컨대 안셀무스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죄인에게 전가된 공로를 보장 한다고 주장한 반면, 웨슬리는 주로 개신교 종교 개혁자들의 전통을 따라 만족이란 기껏해야 형벌대속으로 여긴다고 주장했다. 달리 말하면, 웨슬리는 그리스도께서 보상을 하고 죄 된 인간의 자리에 서 있음으로써 인간의 한 사람으로 간주함으로써, 그래서 결국은 죄의 삯은 형벌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킨다고 주장하였다. 원죄 교리논문에서 밝힌 웨슬리의 주장을 보자. 그리스도께서 지신 모든 고난은 우리 죄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의 결과였다. 구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를 자신에게 담당시켰다. 곧 우리의 죄로 인한 형벌을 그분이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웨슬리에 대한 2차 문헌이 구속에 대한 웨슬리의 만족 이론을 형벌 대속으로 이해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또한 데쉬너는 웨슬리의 구속에서 그리스도는 형벌 대속을 수행한 것이라고 교회에 가르쳤다. 윌리엄스는 웨슬리에게 형벌 대속설은 중심 가르침이라고 지적했고, 린드스트룀 역시 같은 의견을 견지했다. 더닝은 웨슬리의 구속론에 대한 이들의 묘사적인 판단에 동의는 했지만 린드스트룀과는 다른 방식으로 웨슬리의 전체적인 신학에서 형벌 대속의 입장이 적합한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예수가 인간의죄를 담당한다는 개념은 전혀 신약성서와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구속을 형벌 대속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웨슬리의 선언이 그의 전체 신학에 적합할 뿐 아니라 실제로 지표가 됨을 알게 될 것이다. 예컨대, 웨슬리의 형벌 대속설은 정의와 자비, 사랑이라는 계속되는 주제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을 축하하는 접속 신학의 여러 주제들을 긴장이 있긴 하지만 하나로 묶어낸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는 객관적 요인(하나님을 향한 관계)과 주관적 요인(인간을 향한 관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웨슬리의 정교하고도 색조 있는 구속 개념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 나갈 것이다.

객관적 요인들

웨슬리의 형벌 대속설의 객관적인 면은 안셀무스와 웨슬리가 정확하게 인식했던 대로 인간이 스스로를 구속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한 사역과 관계된다. 말 그대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나타내는 바, 창조자와 통치자의 역할을 넘어 구원자로 인식하게 한다.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시원적인 은총과 사역은 본래 하나님과 인간이 맺었던 그 관계를 회복시키고, 또한 하나님의 입장에서 화해, 즉 하나 됨을 이루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관심을 가진다. 독특한 인격과 존재인 그리스도만이 신인 관계를 중재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그리스도 안에 신-인이 함께 참여한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바로 하나님의 진노가 인간을 죽음 아래로 떨어뜨린다.

브루너는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본래 관계에서 떨어져 나와 위험과 재앙과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고 주장했다.윌리엄스는 속죄의 객관적인 요인들을 하나님의 진노와 연결시키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웨슬리는 속죄에서 어떤 객관적인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만족시킨 것이 우리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제시하며, 골고다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와 화해를 얻었다.고 밝힌다. 원죄교리논문에서는그가 받은 고통은 우리 죄가 가져온 형벌이었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고자 받은 징벌이었다고 선언한다.

놀랍게도 진노의 두 번째 주제와 관련한 용어가 웨슬리 글에서 300번 이상 등장한다. 웨슬리는 실제로 하나님의 진노라는 용어로서, 메소디스트의 발흥과 정체성, 목적을 순서에 따라 열거했다.

웨슬리는 진노를 인간의 의지로 지은 죄에 대한 합법적이며, 정의롭고, 거룩하며, 선한 하나님의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진노는 도덕법에서 표현되었듯이, 하나님의 생각을 온전히 고려한다는 점에서 합법적이며, 아주 작은 악까지도 묵인하지 않고 지속적이고도 단호하게 반대한다는 점에서 정의롭다. 린드스트룀이 주목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자비와 관계하듯이 (하나님의)진노는 하나님의 정의와 관계한다.달리 말하면, 진노는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진노가 완고하게 지속되는 악의 힘에 대한 하나님의 응전을 뜻한다는 점에서 신선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진노를 바르게 이해하고 거룩한 사랑의 적합한 표현으로 보고자 할 때 만나게 되는 어려움은 분노의 문제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하나님의 분노와 인간의 진노를 혼동 하는 신인동형론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인간의 분노는 종종 거룩하지 않은 미움과 보복적인 격정에 빠진, 거칠고 생생한 복수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는 인간의 분노와 다르다. 결론적으로 말해 웨슬리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분노와 혼동하지 말아야 하며, 더욱 중요한 것은 여전히 부드럽고 감싸는하나님의 사랑을 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분노와 비교했을 때) 유비적인 의미로만인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진노와 관련한 두 번째 어려움은 원칙적으로 죄인을 희생으로 보는 심리 요법적 구원의 모델과 관계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죄인을 결코 희생자가 아니라 범법자로 보았다.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 타고난 죄의 성향을 적극적으로 키워갈 뿐 아니라,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께 열정적으로 반대하고 저항하는 사람으로 보았다.

웨슬리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인정하는데 어려움이 없었고 악에 대해 확고하면서도 단호한 반대 입장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빛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이해했기 때문에, 자연스러우면서도 주저함이 없이 힐라스모스(요일2:2)를 보상보다는 속죄로 해석했다. 예컨대 웨슬리의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한다면,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는 속죄의 희생이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노와 우리 사이를 중재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가 된다.

그런데 웨슬리의 형벌 보상 입장은 그의 해석의 논리가 필연적으로 보편론을 요구하기 때문에 무조건적 선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또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신-인만이 죄를 구속할 수 있고 그리스도께서 전 세계의 죄를 위해 완전하고 온전하며 충분한 희생과 만족을 드렸기 때문에 앞서 살폈듯이 보편성의 개념은 객관성을 고려한다면 고유한 웨슬리의 입장의 일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칭의의 형식적 원인(formal cause 과거 죄의 용서)이 아니라 공로적 원인(meritorious cause) 임을 주목해야 한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모든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는 데에 보편적 기초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보편주의이다. 예컨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은 이미 충분하게 죄의 용서를 받을 준비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편성은 웨슬리의 형벌 보상설의 입장을 보여준다.

중재의 구속적 사역을 통해 모든 인간의 필요가 충분히 준비되었다는 이 입장은, 광의로 이해된 선도은총 혹은 선행은총을 강조한다.

우리가 객관적 요소라 불렀던, 관계의 하나님 지향적인 측면에서 보면, 구속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도다.”(요19:30)라고 외쳤듯이 이미 완성된 것이다. 다시 한번 영국 국교회의 종교 강령에 나오는 말을 사용한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은 원죄와 자범죄 모두에 대한, 곧 세계의 모든 죄에 대한 완전한 구속이며 속죄이고 만족이다.

주관적 요인들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인 마음을 변화시키는 인간의 인간적 차원에서 볼 때,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인 속죄는 속죄의 은총을 받기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선도은총은 은총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져야 한다.

세상의 구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그분이 특별히 당신을 구원했음을 아는 것의 차이는,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는 선도은총과 수용은총의 차이를 보여준다. 다시 말하지만, 웨슬리의 구속론에서 객관적 요인으로부터 주관적 요인으로 옮겨 가게 될 때 비로소 죄인들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선물에 속하는 자유와 조건들 사이를 구분함으로써 선도은총과 수용은총,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 배후에 있는 개념들을 탐구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조항이나 조건 없이 그 은총을 값없이 주실 수 있는가?물론 하나님은 주실 수 있다. 누군가 당신에게 얼마만큼의 돈을 조건 없이 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손을 펴서 받아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총으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하는 것과 어떤 조항이나 조건에 기초해서 은총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따라서 웨슬리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구원의 처음 움직임으로 선도은총과 수용은총이 그 특징이며, 그 후 감사와 감사의 기도로부터 응답은총이 나온다고 보았다. 그러나 수용은총을, 저항할 수 없이 회복된 선행은총의 능력처럼 군주적 방식으로 이해하건, 용서와 칭의의 선물을 받기 위해 최소한 손을 뻗는 인간의 활동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이해하건, 응답은총 이전에 수용은총이 있어야 한다.

앞서 설명했듯이, 비록 웨슬리가 그리스도의 구속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최고의 기쁨과 사랑과 감사를 준 것으로 비쳤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수용은총의 중요성을 효과적으로 조명하여, 말하자면 인간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역의 주관적 차원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웨슬리의 입장은 아벨라르의 도덕 감화설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아벨라르는 로마서 3장 19-26을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은 골고다와 상관없이 다른 방법들로도 나타날 수 있다고 덧붙여 설명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가장 낮고 깊은 곳, 가장 천한 곳에서 하나님의 겸비하고 희생이 넘치는 사랑이 빛을 발한다고 주장한다. 죄인의 자리로 오셔서 이들의 심판을 짊어지고 수치를 담당한 이 사랑은 도대체 어떤 사랑이란 말인가! 이렇게 이해하고 보면 사랑과 십자가는 우연히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관계된다. 이 둘은 함께 하나님의 겸비하고 희생이 넘치는 거룩한 사랑을 반영한다.

멸시와 거부를 당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의 부활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계시된다.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는 통치를 위임받아 그리스도의 삼 중직 가운데 마지막인 왕으로서 만국을 심판하고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웨슬리가 그리스도의 왕의 직임이 갖는 첫째 주요 역할, 곧 그가 피로 산 모든 사람들에게 법을 주시는 분으로탐구할 때, 그는 구원자인 그리스도께서 다스리고 영원한 권위를 가질 것임을 보여줄 뿐 아니라 율법을 갖고 일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예언자 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왕이시요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곧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로운 현존으로 변화를 받은 사람들에게 (말씀의 내용인) 율법을 준다.

믿는 자들에게 은총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왕의 직임의 두 번째 역할은, 먼저는 중생의 구원의 은총을 제시하고 그럼으로써 사법적인 주제인 용서와 참여적인 주제인 갱신을 연결한다.

하지만 독일 경건주의 전통을 대표하고 있던 조지아 주의 잘즈부르크 신도회와 영국의 모라비안 교도들로부터 죽음이 용서뿐 아니라 생명으로 인도하여 사법적인 주제인 용서와 참여적인 주제인 갱신 모두가 골고다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대한 주석에서는 믿는 자들을 죄의식과 그 능력으로부터 전적으로 구원받았다.고 주장했다. 실로 죄의식에 대한 속죄가 없다면, 우리는 그 능력으로부터도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으며, 십자가 없이는 중생도 없고, 먼저 제사장의 직임이 없으면 왕의 직임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아니고서는 스스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들이 죄의 용서(칭의)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본래 거룩함도 없고 선도하는 성화은총과도 상관이 없는 죄인들은 중생과 생명의 그리스도의 성령 임재를 은총으로 경험해야 한다.

왕이신 그리스도의 세 번째 역할은, 모든 믿는 마음을 다스려 만물을 그에게 복종케 하고,모든 죄를 몰아내며, 영원한 의를 불러오는 것이다.’” 예컨대, 웨슬리는 초기의 성화은총이 칭의와 용서와 더불어 값없이 주어진 것이지, 율법을 완성할 때 능동적인 그리스도의 순종이 믿는 자에게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데니쉬가 지적했듯이 그 완성은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 믿는 자 안에 역사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웨슬리는 승리의 동기가 그리스도의 제사장 사역, 곧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칭의)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왕의 사역, 곧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구원자와 거룩케 하는 자로서 하신 일(성화)과 관계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왕의 역할에 대한 입장은, 믿는 자들의 삶이 바르도록 예방하며 또 그 바른 길을 비춰 주는 능력인 도덕법을 위해 중요하고도 지속적인 역할을 제공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오셔서 심판하며 거리낌 없이 통치하게 되듯이 십자가와 인간의 마음을 계속 변화시켜 가는 교회의 삶에서 죄와 죽음과 지옥과 사탄을 정복하는 승리의 주제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믿는 자의 마음에 역사하는 성화의 사역이 중요하다. 성화의 사역에서 은총이 강조되고 그리스도가 지배한다. 때문에 웨슬리는 은총과 그리스도가 없이는 종말론적 완성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보았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가 만물을 그 발아래 정복하고 완전히 죄를 몰아냄으로써 교회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하며 완전한 왕의 역할인 영원한 의가 다스리게 한다.

오늘과 내일 : 코란이 전하는 그리스도

오늘날 이슬람은 세계 주요 종교 가운데 하나로서 중동과 동남아시아에 걸쳐 십억 여명이나 그 추종자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기독교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신도 수를 갖고 있다. 코란의 내용인 무함마드가 받은 계시와 역사적인 인물 무함마드는 많은 사람에게 흡인력을 갖는 무슬림 신앙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이다. 무함마드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복음서에 대해 어떤 지식을 갖고 있었는지 평가하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9세기나 되어서야 복음서가 아랍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슬람 신앙에 따르면 예언자 무함마드의 종교는 구약과 신약에 담긴 유대교와 기독교 메시지를 수정하고 완성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언자가 실제 기독교를 접한 것은 단성론자들,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 멜카이 정교회원들과 만나거나 구전을 통해서였다. 어쨌든 무슬림 전통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610년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기 시작했다. 그 후 2년여의 잠적기를 거친 다음 예언자는 다시 한 번 조명을 받은 후 계속해서 쉬지 않고 632년에 죽기까지 계시를 받았다. 그 결과 22년에 걸쳐 114장 6천 절 이상으로 구성된 이슬람 책이 나타나게 되었다.

무슬림의 관점에서 보면 코란경은 신의 말씀이고 궁극적인 신의 계시이다. 기독교인의 수육(성육신) 이해와 비슷한 방식으로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신성시 하는 책을 하늘로부터 무함마드가 받아쓴 것으로, 위로부터 내려왔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코란경은 인간 역사에 신이 참여한 것이다. 예수와 비교해야 할 대상은 무함마드가 아니라 코란경이다.분명 이슬람/기독교 사상사를 보면 계시는 계시와 비교되어야 하는바, 무함마드가 아니라 코란경이 그리스도와 병행 구조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코란경과 무함마드의 관계는 예수와 기독교인의 관계이다.

그러나 최근 소수이긴 하지만 몇몇 학자들은 코란경과 그리스도의 병행은 두 가지 방법에서 어려움이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기독교인도 무슬림도 아닌 제3자 입장에서 보면, 독교의 성서는 신이 말씀한 것을 직접 구술했다고 보는 코란경의 당당한 주장과 비교해 미온적인 것처럼보인다. 둘째, 환원주의에 빠지는 어려움이다. 예컨대 그리스도와 코란경을 비교할 때 어쩔 수 없이 메시아는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 이렇게 되면 수육을 강조하게 되고 그 결과 속죄교리가 희석된다.

물론 우리의 현재 관심은 코란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평가하는 것이다. 코란이 말하는, 암묵적이며 명시적인 그리스도론을 평가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슬림들이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기는 코란경에 예수는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 수천 절에 이르는 코란경에 예수라는 고유 이름은 25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10여 곳에서 예수를 메시아 혹은 마리아의 아들이라 표기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코란경에서는 예수보다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 더 많이 언급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예수는 코란경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존경을 표하는 여러 칭호들이 예수를 증언하기 위해 사용된다.

코란경은 구원 역사의 흐름과 연속성에 주목하진 않았지만 예수를 예언자들의 대열에 넣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는 여러 예언자들 중 하나다. 분명 코란경은 예언자들 중 예수보다는 무함마드를 선호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노아와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무함마드로 이어지는종교를 세우기 위해 보냄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예수가 아니라 무함마드가 예언 운동의 절정이며, 코란경과 신약의 관계는 기독교인이 신약과 구약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비슷하게 된다. 말하자면, 코란경은 계시의 완성이고 완전이다. 곧 알라 외에 다른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예언자이다.

그러나 코란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 본 사람이라면 무슬림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예수가 어느 정도 특별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예수는 코란경에서 존경받는 예언자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예언자는 아니다. 좀 더 깊이 코란경에 나오는 예수에 대한 구절들을 탐구해 보면, 코란경에 나타난 그리스도론에 어려움이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이중 거리 두기같은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코란경은 예수에게서 십자가를 제거하듯예수에게서 신성을 제거한다.이 제거로 코란경은 아리우스와 다른 학자들이 했던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는 내용으로 채워진다.

게다가 코란경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십자가를 제거한다. 십자가 사건은 복음서가 증거하고 있고 타키투스 자료에도 언급되어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 어째서 많은 증거가 있는데도 예수를 십자가에서 제거하였는가? 무엇보다도 무슬림의 입장에서 보면, 참 예언자는 무함마드처럼 성공적인 사람이어야 한다. 적과 싸워 승리해야 하고 패배를 당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예언자들은 정복하는 전사들이거나 지도자들 이어야 한다. 따라서 알라는 참 예언자가 증오와 굴욕 가득한 죽음을 당하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동정과 사랑이 넘치는 알라는 자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더 많은 존귀와 좋은 대우를 베풀어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코란경은 기독교 신앙의 결정적인 영역인 십자가를 제거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의 기본적인 증언을 흔드는 이중 거리 두기상황에서,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이 중심 주제를 논의한다면 둘의 관계는 쉽지 않아 보인다. 기독교의 교회 일치를 향한 접근은 대화를 할 때 논쟁이 되지도 않고 본질적이지도 않은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서로 자극이 되지 않는 문제들만을 다루어 왔다.

웨슬리는 이슬람에 대해 대담하게 솔직하고도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슬림과 기독교인 대화라는 주제에 대해 웨슬리는 주로 무슬림의 행동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행위의 부적절함에 초점을 맞추었다. 실로 무슬림들이 복음을 바로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거대한 걸림돌은 다름 아닌 기독교인들의 삶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웨슬리는 이 점과 관련해 영국 국교회를 비판했다.

무엇보다도 웨슬리는 동방 교회의 성상 사용이 무슬림 공동체와 대화를 시도하기도 전에 대화를 망칠 수 있음을 명민하게 알고 있었다. 무슬림 공동체와는 달리 웨슬리는 모든 상을 반대하는 성상파괴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성상의 사용이 기독교인의 삶과 그 증언에 중대한 위험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성상과 이미지를 목회적인 생각을 갖고 제한하여 사용하라고 권장하는 웨슬리는, 어떤 것을 본떠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제2계명을 상기시키면서, 우리의 진정한 예배는 상상의 능력이 아니라 믿음의 능력으로 지배되어야 한다.말했다.

그러므로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진지한 대화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십자가와 관련해 어려운 난관에 부딪혀 있는 상황에서 부적절한 성상과 이미지를 계속 사용하여 문제를 더 복잡하게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성상과 이미지 사용을 오늘날 권장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애와 걸림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피 값으로 산(무슬림을 포함) 모든 사람들의 축복과 교화를 위해서 제거되어야 한다.

제4장 성령 :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의 현존

웨슬리는 창세기 1장2절을 주석하면서 성령을 최초의 동자(the first mover)로 언급함으로써 창조 안에 나타난 성령의 일반적인 역할을 분명하게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로 구속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활동을 탐구했다. 예를 들어, 윌리엄스(Colin Williams)는 성령의 사역 가운데 하나가 아들의 중재 없이 세계 내에서 역사하는 것이지만, 성령의 주된 사역은 믿는 자들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성령의 사역이 과거의 실재일 뿐 아니라 현재의 실재로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현존인 계시와 직접 관계한다고 보았다. 달리 말하면, 성령은 타자 지향적이며 역사적 그리스도를 증언함으로써 은총과 은택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인격적 현존을 현실이 되게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은 믿는 자들을 자연과 이성, 종교적 상상력의 한계에 홀로 남겨 두지 않는다. 오히려 십자가 사건과 다른 영적 진리를 묵상하는 중에 믿는 자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때때로 미묘하고 신비한 타자를 만난다. 진정한 현존인 성령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인간이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리를 깨닫게 한다.

구속의 통치자

라커구스 스타키(Lycurgus M. Starkey)가 지적하듯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완성하는 성령은 구속의 작인이거나 통치자이다. 성령은 지배하는 힘이 아주 크다. 웨슬리는 이성과 경건의 사람들에게 던지는 호소라는 자신의 논문에서 선한 생각, 말, 행위 등 전체 구원의 사역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완성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정통을 따르는 것은 아주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올바른 가르침 이상을 포함하며, 특별한 존재 곧 성령 안에서의 삶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기 위해 성령을 받아야 한다.웨슬리는 18세기 자신의 부흥운동 내내 이점을 강조했다. 로버트 쿠쉬먼(Rbert E. Cushman)은 성령의 구속 사역이 웨슬리의 실험 신학의 첫째 원리라고 주장했다.

확신은총

성령은 확신을 주고, 생각하게 하며, 가르치는 회개의 과정에서 주도적이고 감독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심지어 죄로 가득한 영혼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기까지 한다. 게다가 영적인 차원에서 성령의 지혜로움과 인간의 어리석음을 대조시키면서, 인간의 어리석음은 성령으로 극복되어야 한다고 웨슬리는 주장한다. 웨슬리는 노예의 영과 양자의 영”(The spirit of Bondage and of Adoption)이란 설교에서 이렇게 선포한다. 끔찍한 섭리에 의해서건 성령의 일깨우시는 말씀에 의해서건, 하나님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서 잠자는 자의 마음을 만지신다. 그리고 이들이 잠에서 깨어난다. 다시금 성령께서 우리를 깨우시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며” “우리의 이해의 눈을 열어 주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알려 준다. 달리 말하면, 깨우치는 것과 그리스도의 빛은 짝을 이루어 함께 간다.

도덕법(도덕법을 통해 이루어지는 법적회개와 복음적회개)

웨슬리는 도덕법을 선행은총의 결과로 이해한다. 성령은 깨어난 양심 안에서 역사를 계속하게 하며,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을 향해 죄인들이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는 않는지 양심을 내적으로 살피게 한다. 그러므로 죄인들이 마음에 간직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식, 곧 하나님의 마음의 사본인 도덕법은 하나님의 의와 정의의 통로를 드러내기 위해서 양심에 빛을 비취는 말씀과 성령의 결합 안에서 사용된다.전능자 하나님의 성령이 세상에서 아직도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자의 마음을 깨워 강퍅한 마음을 부수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신다.여기의의 태양이 나타나 그의 영혼을 비추며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여 주신다.

웨슬리 실천신학에서 성령의 확신은총은 죄인을 회개하게 하는데서 끝나지 않는다. 진심으로 회개하여 의롭다 함을 얻게 하고 자범죄 뿐 아니라 타고난 죄(inbred sin)를 확신하게 하지만, 여전히 성령은 모든 색욕과 욕망을 포함한 육체적 본성이 여전히 믿는 자의 삶 안에 남아 있음을 고통스럽게 인식하도록 한다. 이와 같은 확신은총의 두 번째 사역을 웨슬리복음적 회개라 부른다. 복음적 회개에서 다시금 도덕법이 주도적 역할을 한다. 마3:8(NT Note, 15)를 주석하면서 두 종류의 회개를 구분한다. 회개는 법적인 회개와 복음적 회개 이렇게 두 종류가 있다. 법적회개는 죄에 대한 철저한 확신이고 복음적 회개는 온전한 죄가 온전한 거룩함으로 바뀌는 마음의 변화(그 결과 삶의 변화)이다. 복음적 회개는 칭의에 앞서 오는 법적 회개와 유사하기도 하고 구분되기도 한다. 복음적 회개가 자기-인식과 조명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법적 회개와 유사하다. 예컨대, 모든 것이 믿는 자의 마음에 온전한 것은 아니다. 어떤 형식으로든 죄와 죄의 어두움이 여전히 현존하고 있다. 그러나 음적 회개는 육체적인 본성과 원죄를 완전히 확신한다는 점에서 법적 회개와 구분된다. 여기서 원죄가 지배하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남아 있다.이때에 성령의 확신은총조명은총이 현존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성령은 다시금 우리 마음에 말씀하심으로써, 두 번째 또 다시 청결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비로소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

거룩한 사랑인 성령의 현존

웨슬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확신의 사역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내적인 왕국을 준비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마음과 마음의 성정과 열망은 사랑으로의 변화를 경험한다. 웨슬리는 이 변화의 현존을 로마서 5장 5절을 빌려 표현한다. 하나님의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그분의 사랑을 부어 주었다.

이 사랑은 거룩한 사랑을 의미한다. 웨슬리는 무한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거룩함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고백한다. 거룩함이란 인간적인 가능성이 아니다. 교육과 도덕적 노력을 통해 거룩해질 수 없다. 웨슬리가 말하는 구속적 사랑의 거룩함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믿음을 통해 은총으로 말미암아 은혜로이 받게 되는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모든 인간적인 덕목과 구분된다.

성령의 현존은 내적종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신다. 모라비안과 할레의 독일 경건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웨슬리는 하나남의 나라가 인간 마음의 깊은 곳에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7장 21절을 주석하면서 웨슬리는 이렇게 주장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저기 미래에서 찾지 마라.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러분 가운데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고, 모든 믿는 자들의 마음에 현존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 왕국이며 내적 원리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음 안에 존재한다. 이것은 내주하시는 성령의 현존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는 자들 가운데 거하면서 기질적 변화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현존이다. 웨슬리는 하늘이(개인의 신앙의 정도에 따라) 영혼 안에 열려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현존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보았다.이런 맥락에서 종교가 내적원리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음이며, 의와 참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는 영혼의 갱신이라고 강조한다.

웨슬리의 성령에 대한 발제자의 이해는 성령은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는 직접적 주체요, 행위자라는 것이다. 성령은 조명과 확신의 은총을 주시며 비추심과 영혼의 각 기능을 회복시키심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이해(왜 죽으셔야만 했는가?)와 그 사역을 통해서 결과 되는 구원(우리에게 그분이 왜 필요한가?)에 대하여 알게 하신다. 무엇보다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compassion)을 뜨겁게 경험하게 하신 후 그리스도 안에 세워진 완전한 도덕법인 의와 진정한 거룩, 거룩한 사랑으로의 내적변화를 이루어 가신다. 이것이 태초에 창조되어진 인간에게서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인간됨이다. 성령께서는 재창조를 통하여 하나님의 세계를 본래 의도하신 상태로 복원시키시며,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영원토록 거룩한 사랑 세계를 현존케 하시는 분이시다.

이 발제를 통하여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모호했던 성령의 사역과 역할에 대한 것이었으며, 이전보다 뚜렷하게 성령님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온전한 믿음의 확신

은혜 위에 은혜를 입은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웨슬리는 온전한 믿음의 확신이란 말을 사용하여 온전한 성화에 이르는 성령의 증거를 표현하고자 했다. 여기서 말하는 확신은 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마음 사랑 안에서 완전해졌기 때문에 모든 의심이나 두려움과 상관이 없는 확신이었다. 웨슬리는 요한 일서 4장 18절 말씀을 변용해 확신의 다른 차원들을 표현하였다. 자연인은 두려움도 없고 사랑도 없습니다. 죄에 대한 자각을 한 사람은 사랑은 없고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인 사람은 사랑과 두려움이 공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사람은 두려움은 없고 사랑은 있습니다.절대적인 믿음의 확신이 의심과 두려움을 내어 쫓지만, 이 확신은 미래의 확신이 아니고 다만 현재의 확신입니다.예컨대, 믿음의 확신은 미래의 가능성에 속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실재의 속한다.

전문 용어에 대한 물음

온전한 성화와 관련하여 성령의 역할을 다룬 웨슬리의 글들은 마음의 정결보다는 확신의 속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웨슬리는 믿는 자의 삶에서 역사한 성령의 사역을 기술할 성령을 받음성령의 충만함’,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이라는 세 가지 기본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먼저, 성령을 받음이란 표현을 사용할 때 기독교인의 완전에만 한정시키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웨슬리는 성령이 충만함이라는 두 번째 구절을 교차 가능한 방식으로 사용했다. 예컨대, 어떤 때는 이 구절을 신생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했고, 또 어떤 때는 온전한 성화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했다. 그는 성령충만함은 성령의 열매를 충만히 맺기 위해서, 그리고 성령이 충만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든 기독교인이 아니다. 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들, 곧 모든 기독교인을 의미하기 위해서 성령이 충만한문구를 사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함과 정확함을 기하기 위해 웨슬 리가 때로는 성령충만이란 용어를 사랑으로 완전한 사람들과 연관시켜 사용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성령 충만란 용어를 온전한 성화를 말하기 위해 사용했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성화만을 의미하기 위해 말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이란 표현을 온전한 성화와 밀접하게 관련시켰다고 예상해 볼 수 있다. 에 대해 웨슬리는 그러므로 모든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 끝까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주석했다. 그는 하나남의 자녀들이 받은 은사와 은총에 대해 조심스럽게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령의 사역을 풍요롭헤 향유함을 잘 알고 있었다. 예컨대, 다른 것을 위해 간과한 필요가 없는 영적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자료에도 불구하고, 몇몇 학자들은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힐 형제는 웨슬리[기독교 총서]에서 표현된 몇몇 가르침들은 일관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 비판에 응답하면서, 책으로 나온 내용과 자신의 사상을 구분하여 설명했다. 이보다 우리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웨슬리의 용어 사용에 대한 문자적 분석에 따르면, 웨슬리는 온전한 성화에서 성령의 역할을 기술하기 위해 독특한 오순절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죄의 확신이든 씻김이든 아니면 확신이든, 일반적으로 중생과 온전한 성화라는 완전히 다른 사역을 설명할 때 동일한 용어를 사용했다. 또한 칭의와 온전한 성화에서 성령의 다른 역할은 웨슬리의 용어가 아니라, 그 용어가 적요되고 되새김질 되는, 구원의 순서라는 신학적 상황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믿는 자의 온전한 성화를 증언할 때 성령의 다른 역할은 칭의에 대한 성령의 증거가 아니라, 칭의 이후 믿는 자들이 은총 안에서 성장함을 뜻하는 구원론적 간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삼위일체

웨슬리는 믿는 자의 영혼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심는, 성령의 역동적인 역할을 말할 때 영국 국교회 종교 강령의 성 삼위일체 신앙에 대하여를 자연스럽게 참조했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며, 참되시고, 살아 계신 실재시며, 영원하시고, 몸도, 지체도, 감정도 없으시며, 무한한 능력과 지혜와 선을 가지시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창조자이시다. 그리고 신성의 통일성 속에는 세 가지 성품이 있는데, 본질과 능력, 영원성에 있어서 일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성삼위일체로 존재한다.

웨슬리는 이 원본을 편집 각색하면서 감정도 없으시며라는 구절을 빼버렸다. 거룩한 사랑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감정이기 때문에 감정도 없으시며라는 구절을 생략한 것이다. 거룩한 사랑의 기질이나 열정을 가르치고 성령의 관대한 역할을 제시하였다.

필리오크베 문구

삼위일체의 역동적이고 관계적인 개념에 대한 관심은 서방의 필리오크베 문구웨슬리가 인정하는 데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는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또한 아들로부터도 발현했다는 이중 발현의 의미를 담고 있다.

때때로 필리오크베 문구는 아들과 성령의 연결을 축하하고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위격들의 신비한 사랑의 관계를 제시한다는 이유로 서방교회의 예배 때 노래로 불려졌다.

서방교회가 필리오크베 문구를 삽입하는 것을 두고 동방교회는 오늘까지도 하나의 쇄신으로 보고 있지만, 웨슬리는 그 나름으로 서방교회를 지지한다. 아버지로부터 뿐 아니라 아들로부터도 성령이 발현한다는 필리오크베 문구는 충분한 성서적 근거가 있다. 웨슬리는 베드로전서 1장 11절에서 성령에 대해 그리스도의 영이라 한 부분을 아버지로부터 그리스도에 의해 보내어진 영으로 주석함으로써 필리오크베 문구 삽입을 지지했다.

웨슬리의 삼위일체 용어 사용

초기 교부들이 사용했던 삼위일체’(Trinity)삼위일체의’(triune)라는 전통적 용어가 웨슬리의 글에도 표면상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웨슬리는 기독교인의 완전이라는 설교에서는 하늘에는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라는, 셋이 새겨져 있는데 이 셋은 하나라고 주장한다. 1785년에 행한 새 창조라는 설교에서는, 종말이 되면 성령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과 지속적으로 연합하는 때가 도래할 것이며, 셋이면서 한 분이신 하나님과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지속적으로 향유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셋/하나 하나님이라는 성서적 용어를 사용할 때 웨슬리는 또한 어떻게 이것이 그러할 수 있는가? 어떻게 실로 하나가 될 수 있는가라는 사색적 물음을 하기 싫어했다. 셋/하나의 사실과 방식을 구분하면서 신비는 이들 셋이 하나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어떻게 하나인가를 설명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설명 방식에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그 사실 자체를 믿습니다.

웨슬리는 셋-하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참된 기독교 신앙과 모든 살아있는 종교와 얽혀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사실을 좀 더 강조해서 이렇게 주장한다.

누군가 기독교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안에 증거를 가질 때, 하나님의 성령이 그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할 때이다.말하자면 결국은 하나님 성령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 아들의 공로를 통해 그를 받아들였음을 증거할 때이다.

삼위일체와 거룩한 사랑의 용어

웨슬리는 어떻게 하나님/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에게 계시되었는가를 말하는 경세적 삼위일체에 초점을 두고 이 계시의 역동성을 탐구했다. 믿음을 가진 마음은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변화를 경험하고 거룩한 사랑의 흐름에 따라 응답한다. 양자의 영은 믿는 자들이 아들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 받는자녀가 되게 하는 효자의 영이다.

따라서 이들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이들은 좀 더 깊이 하나님의 사랑의 삶에 참여하도록 초대 받는다. 이 사랑응은 그 순결과 아름다움이 뛰어난 사랑이며, 복음의 은총이 넘치는 자유 안에, 곧 죄의식과 죄의 존재로부터의 궁극적인 자유 안에 나타나는 사랑이다.

그는 계시 없이는 변화가 없으며 변화 없이 계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아버지와 아들, 성령의 역할인 하나님의 사역과 인간의 구원 과정 사이의 상관관계는, 결국 구원받는 자들이 창조의 빛나는 거룩한 사랑을 반영하고 있고, 쓰여진 영광의 상징인 삼위일체의 표현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

오늘과 내일 : 오순절 종교의 등장

미 감리교회에서 설교 자격증을 가졌던 파햄은, 1894년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 하나님의 치유, 은총의 2차 사역으로서의 온전한 성화, 성령 세례의 3차 축복을 설교했다. 파햄의 학생이었던 아그네스 오즈먼은 20세기 첫 날인 1901년 1월 1일, 성령 세례의 증거로서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1905년, 파햄은 휴스턴에서 성서학교를 열었다. 파햄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흑인 성결 설교자 윌리엄 시모어는,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다음 해까지 이어지는 아주사 거리 부흥회를 시작했다. 이 부흥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했다.

빈슨 사이넌은 미국 오순절 주의의 역사적이고 교리적인 뿌리는 웨슬리 전통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웨슬리의 중생 교리와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 교리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삶에 나타난 성령의 활동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오순절주의는, 이미 미래에 받을 능력을 믿는 자들이 미리 맛보았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능력을 주는 은총은 성령의 열매와 다양한 은사 속에서 나타날 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과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매력적인 승리가 선포되는 구원론적 낙관론을 갖게 한다.

최근 여론 조사자들과 인구 통계원들의 연구에 따르면,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삶에서 능력을 주는 성령의 활동에 우선권을 주는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신앙이21세기에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 감리교회, 웨슬리 교회, 성결교회, 오순절 교회들 사이에 중요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은 존 웨슬리의 유산으로부터 방향을 제시받을 뿐 아니라 영적 생명력을 공급받고 있다. 이 운동은 기존 세력에 도전하며 토양을 갈아엎을 뿐 아니라 성령의 은총과 깊이 치유하고 만족을 주는 사랑 안에서 자유를 얻어 누리게 된 마음의 생명, 곧 새로운 생명과 진정한 해방을 열어간다.

온전한 소망의 확신

놀랍게도 믿음의 완전한 확신이 종종 기독교인의 완전과 관계하지만 웨슬리의 실천신학에서 최고의 확신은 아니다. 성서의증거를 성찰하다가 웨슬리는 또 다른 증거, 곧 온전한 소망의 확신을 제시했다. 이 둘을 대비시 켜 본다면, 믿음의 온전한 확신이 현재의 용서와 관계한다면 소망의 온전한 확신은 미래의 영광과 관계한다.

구원의 순선의 최고 단계에 이르면 웨슬리의 실천신학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사가 선험적인 협력에 기반을 둔, 온전히 성화된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와 목적에 따라 주어지는 하나님의 완전한 자유를 강조한다. 웨슬리의 신학은 신인 상호 협력으로만 읽었던 전통을 넘어선다.

그의 정교한 신학적 사유는 신-인 협력적 입장을 넘어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의 선성과 자유, 풍요로움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소망의 온전한 확신을 일종의 인내하는 은총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거룩함에 대한 계속적인 관심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충분히 주목하지 않는 추정적이며 오도된 확신과 소망의 온전한 확신을 구분했다.

은총의 지각

우리 자신의 영의 증거는 무엇보다도 성령의 열매와 마찬가지로 결과이고,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는 우리 영의 증거보다 순간적이며 결과이기보다는 원인이기 때문에, 웨슬리의 실천신학에서 믿는 자들은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 은사를 넘어 은사의 수여자를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왜 직접적인 증거를 주장한단 말인가? 어쨌든, 경험론에 기울어 있던 시대에서 웨슬리는 어떻게 성령의 역사가 인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보다 온건한 물음을 던졌다. 성령의 사역이 감각 느낌이나 감각 인지”, 달리 말하면 자연적인 도감을 통해서 인지될 수 있다는 개념을 거부하고 믿음의 능력을 통해 작용하는 영적 감각을 주장했다. 이 영적 감각을 통해 은총의 지고의 실재들이 인식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특히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러한 관심은 성령의 직접적 증거의 요소들이 신비로 남아 있다 하더라도 어떤 면에서는 믿는 자들이 성령을 인식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웨슬리는 성령의 직접적 증거를 가진 한 인격적 실재가 다른 인격적 실재들에게 소통되거나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는지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성령의 증거는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웨슬리는 인간의 마음에 성령이 임재한다는 것은 지속적인 영감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영혼에서 행하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활동이 인간 영혼을 깨워 하나님을 향하 반응하게 한다. 이러한 역동적인 이해는 진지한 기독교인의 삶에 기본적인 주기를 만들어 낸다. 따라서 다양한 은총이 수여될 때,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선행은총의 활동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주도와 목적에 마음을 개방함으로써 반응할 수 있다. 그러나 웨슬리는 먼저 은총을 받는 일이 없이는 응답할 수 없다고 보았다. 영혼은 수여자에 대해서 은사에 대해서 유연하게 수용적이어야 한다.

의롭다 칭하는 믿음.

웨슬리는 초기 믿음의 본성에 대해 반복적으로 잘못 이해했다. 웨슬리는 올더스케이트 경험 이후 행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란 설교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요?라는 질문을 즐겨 사용했다. 이 물음에 부정의 방식으로 답변했다.

1.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이란 이방인의 믿음이 아니다. 의롭다 칭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존재하며, 하나님을 찾는 이들에게 보상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소박한 믿음을 넘어선다. 또한 이 믿음은 도덕 수행, 선한 일에 감사 등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조차 넘어선다. 단지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믿는 것은 이방인의 믿음으로 밖에 볼 수 없다.

2. 다음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악마의 믿음이 아니다. 즉, 성서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을 단순히 동의했다고 해서 구속을 받는 것은 아니다. 악마의 믿음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심지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진 못한다. 왜냐하면 악마의 믿음은 냉철하고 사색적일 뿐, 결코 존재의 깊이인 마음과 관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통치받으려고 하지도 않으며 생명의 믿음을 특징짓는 거룩한 성정 또한 없다.

3. 의롭다 칭하는 믿음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셨을 때 사도들이 가졌던 믿음이 아니다. 사도들이 예수를 따르고, 병든자를 고쳤지만 그리스도는 여전히 그들을 보며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꾸짖었다. 이에 웨슬리는 사도들을 전이 단계의 인물로 이해했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기 전 사도들의 믿음과 경험 이후 사도들의 믿음은 차이가 있었다. 이후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필연성과 공로를 인정할 수 있었고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인정할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의 믿음은 경험 이전의 믿음을 훨씬 능가했다.

그렇다면 의롭다 칭하는 믿음은 정확하게 무엇일까? 말하자면 실제 살아 있는 믿음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즉,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이 진정한 대상이다. 이 점이 이방인의 믿음과 구분된다.

또한 의롭다 칭함을 주는 믿음은 악마의 믿음과는 다른 지성적인 요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마음의 기질과도 관계되어야 한다. 웨슬리는 지성인으로뿐 아니라 인격으로 말하자면 전존재로 은총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의 믿음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필연성과 공로를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인류를 구속하는 충분한 수단으로 본다. 그러나 의롭다 칭함을 주는 믿음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실 때 함께했던 사도들의 믿음을 넘어선다.

웨슬리는 동의신뢰라는 개념으로 믿음을 정의한다. 일단 그는 믿음을 얻었으면 없어지지 않는다고 이해했다.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저주로부터 구원받았음을 분명히 신뢰하고 확신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성서에 동의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믿음의 본성을 영적인 의미로 그려내고자 노력했다. 본유적인 개념의 실재를 부인하고 경험주의적 인식론을 전개하면서 자연감각과 영적 감각의 관계를 연결한다. 더욱이 믿음을 자연적 대상이 아닌 영적 대상으로 분별한다.

의롭다 칭하는 믿음은 여러 중요 요소들을 포함한다. 개념적 차원에서 칭의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과 화해한다는, 성서에 계시된 진리에 동의한다. 인격적 차원에서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마음으로 신뢰하는 것을 포함한다. 감각적 혹은 경험적 차원에서 믿음은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다.하나님의 증거와 확신곧 초자연적 사역임을 신뢰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의롭다 칭하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목회의 구속적 성격을 떠나서는, 혹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믿는 자가 은총을 넘치도록 받는 경험적 신뢰와 확신을 떠나서는 온전히 인식할 수 없다.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믿는 것은 이방인의 믿음이고, 구약을 믿고 오신 분을 신뢰하는 것은 유대인의 믿음이며,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음을 믿는 것은 기독교인의 믿음이다.

칭의 자체: 웨슬리의 구원의 순서에서 첫 번째 초점

칭의의 본성에 대한 웨슬리 자신의 돌파구는 1738년 열렸다. 1738년 이전의 웨슬리는 종종 칭의와 성화를 혼돈했다. 종종 거룩한 삶을 칭의의 열매보다는 칭의의 기초인 경건과 사랑의 사역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웨슬리는 자신이 속했던 영국 국교회의 이해와 수행 때문에 이런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1789년 윌리엄 그린(William Green)에게 보낸 편지에는 영국 국교회 성직자는 성화를 칭의 앞에 두는 습관이 있다고 했다. 이 결과 거룩한 삶이 의롭다 함을 얻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성화가 칭의를 앞설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죄인들은 칭의의 열매인 선한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용서가 구원의 시작이며 부활이 용서의 완성이라고 주장한다. 칭의는 선한 행위와 선하지 않은 행위의 구분을 가져온다.

웨슬리가 1746년 출판한 설교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에서 칭의의 본성을 정의했다. 웨슬리가 초기에 믿음을 둘러싼 대부분의 장애와 많은 혼돈을 제거하면서 부정의 방식으로, 칭의의 본성을 탐구한다.

1. 칭의는 실제로 정의롭고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성화이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for us)행하신 사역(칭의)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in us) 행하신 사역(성화)을 구분한다.

웨슬리는 칭의가 상대적인 변화를 수반하지만, 성화는 실제적인 변화를 수반한다고 가르친다. 칭의는 하나님과 우리의 외적인 관계를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원수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성화는 우리 내면의 영혼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죄인이었던 우리가 성도가 됩니다.즉 칭의는 죄의식을 없애고 성화는 죄의 능력을 제거한다.

2. 칭의는 율법이 제기한 고발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어겨 지옥의 저주를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이 받아야 할 벌을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부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믿음을 통해 도덕법을 무효화하는 율법폐기론이 아니다.

3. 칭의는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속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을 현실적인 존재의 본성과 반대로 판단하지 않으며, 이들은 그리스도와 혼동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은 채 죄책감에 남겨져 있는 죄인들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들이 아니라 불경건한 사람을, 이미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을 의롭다 한다.웨슬리는 죄 됨, 불경건함, 어떤 종류건 거룩하지 않은 것이 칭의를 위한 전제가 되고 본래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질 때 죄인들은 사랑의 하나님이 주시는 값없고 은총이 넘치는 선물로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

신생 : 우리안에 계신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

웨슬리 신학은 칭의와 용서의 문제뿐 아니라 신생과 거룩함 같은 문제들에 주목한다. 웨슬리신학에서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통찰에서 얻은 내용들이 잘 반영되어 있다.

하나님의 선물인 중생은총

신생과 관련해서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획일적인 의미가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사랑(favor)능력(power) 혹은 능력을 주는 현존(enabling presence)이란 두 중요 방식으로 이해했다.

웨슬리는 이전에는 거룩함이 행위와 결단, 인간의 의지와 노력, 좋은 동기나 신실함에 중점을 두고 있었으나, 모라비안 교도들, 아 켐피스, 테일러, 로 의 영향을 통해서, 단순하고 경이롭게도 하나님의 은총의 충만함과 사랑의 결과에 의해서 자신의 삶이 실현된다는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다. 칭의와 중생이란 두 구분된 은총을 하나님 사랑의 은혜(favor)와 풍요로움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했다.

웨슬리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처럼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다. 믿음이 칭의의 조건인 것과 똑같이 성화의 조건이며 유일한 조건이다고 말했다. 여기서 거룩하게 된다는 용어에 웨슬리는 그 시작부터 중생을 포함하고 완전에 있어서 온전한 성화를 포함하고 있다. 즉, 죄인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은총으로 다시 태어날 뿐 아니라 의롭다 칭함을 얻는다.

웨슬 리가 말하는 은총은 칭의와 중생 둘 다와 관계한다. 예컨대, 값없이 주시는 은총은 모든 인간의 공로를 배제하며, 중생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고(오직 하나님만이 영혼을 다시 나게 할 수 있다), 값없이 주시는 은총의 열매는(신-인 협력적 모델에서처럼)선행적인 인간의 협력에 기초하지 않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절대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먼저 뭔가가 되어야 한다든지 뭔가를 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칼빈주의의 입장과 차이가있다).

즉, 칭의은총과 중생은총은 둘 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유와 은총이 넘침을 보여준다. 칭의와 마찬가지로 중생도 완전한 선물이다.

하나님의 능력인 중생은총

웨슬리는 칭의와 중생의 교리 모두를 하나님의 자비를 강조하는 사랑(favor)으로서의 은총 개념과 관계시킨다.

웨슬리의 칭의은총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의롭다 칭하기 때문에 전가되고 전가되어야 한다. 죄인들은 그들의 속죄 행위가 없다면 칭의의 참 의미인 죄를 용서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론, 웨슬리의 중생은총과 그 결과는 공로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순수한 선물을 표상하지만 전가된 것이 아니라 분여된(imparted)것이다. 예컨대,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의 현존의 결과로 실제로 거룩하게 된다.

웨슬리는 개신교 전통과 가톨릭 전통을 포함시켜 전가(imputation)와 분여(impartation)융합한 제3의 대안을 제시했다. 이를 통해 다시금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의롭다 칭함을 받을 뿐 아니라 본래적으로 말해 중생의 다른 사역, 곧 이전에 결코 이뤄본 일이 없는 거룩함으로 변화된다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자신의 저술 여러 곳에서 중생은총을 하나님의 능력과 능력의 현존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을 때 이 말은 때로 값없이 주시는 사랑, 공로에 의지하지 않은 자비로 말미암아, 죄인인 내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지금 하나님과 화해되었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능력인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자신의 선한 행복을 주시기로 작정하고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전자의 의미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인)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영혼에 나타나자마자, (후자의 의미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인)하나님의 은총이 그 안에 일어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서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웨슬리는 선한 청지기설교에서 깊고 중요한 변화를 일으키는 비범한 은총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요 행위여야 한다고 말했다.

즉, 중생의 상황에서 은총이란 믿는 모든 이들에게 합당한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며, 그리스도께 복종할 수 있도록 하는 성령의 능력이다. 이는 인간의 무능력에 초점을 맞추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은총을 받는 인간적 요소를 강조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한다.

피터뵐러의 공헌

영국국교회의 영향가운데 살았던 웨슬리는, 거룩한 삶(Holy Living)을 추구했으나, 1736-1738년 모라비안교도들과 경건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이후 피터뵐러와의 만남을 통해서 높은 기독교 윤리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 오류임을 알게되었다. 웨슬리도 은총의 수단을 포함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그 색조와 강조가 주로 도덕주의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뵐러는 웨슬리에게 오직 믿음으로만의 교리를 개인적인 결단으로 받아들이도록도전했다. 이 도전은 (칭의와 중생 둘 다를 포함하는)구원을 가져다 주는 믿음은 이헤 합당한 두 열매, 곧 행복거룩함, 다시말하면 용서함으로부터 오는 평화와 기운이 넘치게 하는 성령의 현존을 통해 나타나는 능력이라는 특별한 가르침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웨슬리는 중생의 믿음을 믿는자들에게 주신 선물로, 곧 하나님의 사랑으로 봤을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안에 임한 능력의 현존,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게 되었다.

나는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 곧 그리스도만을 신뢰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분이 내 죄를 제거했고 죄와 죽음의 법으로부터 나를 구원했다는 확신이 주어졌다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 경험을 설명하는 내용 中...

열쇠가 되는 시간적 요소들

웨슬리는 성화의 보다 큰 과정으로부터 성화를 구분해 낸 다음 신생의 시간적 요인들이 갖는 의미를 설명함으로써 신생의 결정적인 특성을 강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웨슬리가 신생을 성화의 과정과 구분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면, 그 결과 신생 자체는 결정적이고 순간적인 사건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웨슬리는 신생이라는 설교에서는 성화의 과정을 배경으로 하는 것과 대비해서 중생의 순간을 기술했다. 중생은 성화의 순간적인 측면이다.

이렇게 주장했던 웨슬리는 마치 양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밀한 접속적 긴장 안에 순간과 과정을 함께 주장했다. 순간 하나님께로 태어나고 또 순간 거룩하게 되지만,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고 거룩하게 된 이후 느리게 성장해간다.

그러므로 자연적 탄생과 성숙의 관계는 신생과 성화의 관계와 유사하다. 예컨대, 웨슬리는 순간적이고 기적적인 요소인 신생의 위기에 주목한 다음(and) 점진적 요소인 성화의 과정에 주목했다. 신생과 성화는 둘 다 인정되어야지 어느 하나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중년의 웨슬리뿐만 아니라 노년의 웨슬리도 여전히 순간에 대해 관심했다. 예를 들면 성서적 구원의 길이라는 설교에서 결코 신생의 순간과 불연속성을 반박하지 않았다.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는 동시에, 바로 그 찰나성화가 시작된다. 그 순간에 우리는 다시 태어나고’ ‘위로부터 태어난 것이며, 성령으로 태어난 것이다.

여기서 웨슬리 사유의 큰 밑그림은 웨슬리가 순간적 요소와 내적 종교, 곧 은총의 순간과 하나님의 활동을 동일시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내면의 거룩함은 은총과 거룩함이라는 하나님의 활동을 의미하고, 외면의 거룩함이란 시간과 기회가 있다면 이들 은총의 선물을 수용하여 생겨나는 인간의 협력적 활동, 경건과 자비와 같은 행위들을 지칭한다.

예컨대, 웨슬리는 구원의 순서에서 순간적인 요소들은 죄를 용서하고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결정적 진리를 강조하기 위한 그의 중심 틀이다. 달리 말하면, 시간적 요소들은 구원론적 역할을 지칭한다.

해방을 가져오는 변화인 신생: 복음이 주는 두 번째 자유

웨슬리는 믿음은 하나님 진리에 대한 동의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를 확신하는 것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그러나 자신의 논평 속에서 믿음을 통해 우리가 다시 태어나며, 그 믿음과 분리될 수 없는 믿음의 열매가 바로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라는 내용을 새롭게 강조했다. 곧 믿음의 열매로서 자유는 모든 종류의 외적 죄를 뛰어넘는 권세이며; 모든 악한 말과 행위를 뛰어넘는 권세이고 내적 죄를 넘어서는 권세이다.이것이 바로 복음의 두 번째 위대한 자유이며 웨슬리가 자신의 생애를 통해 자주 가르치고 설교했던 내용이다.

결정적인 웨슬리의 죄와 은총 교리를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좀 더 정확하고도 자세하게 죄가 무엇인지 본래 어떻게 정의되는지를 기술해야 한다.

엄격하게 말해 죄란 인식된 하나님의 법을 의지적으로 범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본래적으로 말한다면 사랑의 법을 의지적으로 범하는 것이 죄이며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을 범하지 않으면서도 만 가지 방황하는 사유와 불복종에 대한 망각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담의 법을 범하여 이런 일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 정의에서 특별히 두 가지 요소에 관심이 간다. 첫째, 웨슬리는 죄를 의지적으로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두 번째로, 웨슬리는 죄를 계시되고 쓰여진 하나님의 법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웨슬리의 몇몇 동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갖는 위대한 자유에 대해 웨슬리가 설교하는 것을 들었을 때, 특별히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해지는 것에 대해 들었을 때, 이들은 그 가르침에 대해 난색을 보이면서 여러 조항을 제시했다. 그 중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 곧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를 범치 않는 자가 아니라 죄를 습관적으로 범치 않는 자라는 조항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습관적으로라는 용어를 덧붙이는 것은 하나의 도피라 판단하여 이에 대해 강한 의의를 제기했다.

웨슬리는 지속적으로 술을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의 상대가 좋다고 주장했던 어떤 술주정뱅이 예를 들어가며 자신의 비평가들에게 대답했다. 이 상황에서 습관적으로지속적으로라는 용어를 삭제함으로써, 웨슬리는 복음의 소중한 전제들 중 하나와 그 2차적인 위대한 자유를 지켜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죄와 은총에 대한 웨슬리의 입장은 순간순간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 의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은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유로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믿음의 상실을 통해 다른 사람처럼 죄에 빠질 수 있다. 웨슬리는 이 둘을 함께 견지하고 있다.

제7장 교회와 은총의 수단 : 거룩한 사랑의 공동체

교회 개혁으로서의 메소디스트

메소디스트는 1729년 옥스퍼드에서 거룩함이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깨달았던 두 젊은이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이때 이들이 가졌던 생각은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교회를 개혁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길로 인도하여 거룩한 백성을 일으키셨다는 것이다.

젊은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와 같은 거대한 국가교회들이 탁월한 신앙고백을 지켜냈지만 종종 게으름에 빠져 이름뿐인 기독교로 전락했다고 보았는데 예로 경건의 능력이 언제나 경건의 모양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로 18세기 영국의 많은 사람들은 영국인이 되는 것이 곧 기독교인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들은 국가와 신앙의 차원을 혼합해서 이해했다는 것인데 그러나 웨슬리는 경건의 목적과 이유가 거룩함임을 분명히 보고 이들의 주장에 도전했다.

또한 웨슬리는 역사적인 말로 진정한 기독교에 관심이 있었다. 독일의 스페너와 프랑케와 같은 경건주의에 영향을 받았던 중년의 웨슬리는 진정한 기독교의 동기가 내적 경건과 개혁, 곧 중생한 신앙인의 표징과 본래의 기독교 신앙의 내용인 마음의 기질과 성정에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노년의 웨슬리는 여전히 이름뿐인 기독교인과 진정한 기독교인을 구분하였는데 이름뿐인 기독교인은 능력은 없고 경건의 모양만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웨슬리는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강조했고 이에 메소디스트의 목적을 새로운 소 종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특히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었고, 성서적 거룩함을 나라 전체에 퍼뜨리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18세기 영국 국교회 교인들은 교리적으로 혼동된 상태에 있거나 그리스도가 몸을 주고 사신 은총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이것은 영국 국교회를 어둡게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메소디스트가 여러 세기 동안 타락할 대로 타락해 온 교회의 보편적 형식에 도전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타락과 남용으로 분명하게 잘못되었을 때에 개혁을 필요로 하지만, 교회가 제 길을 가고 있을 때라도 적절하고도 필연적인 판단을 떠나 의도되지 않은 결과로 나아가게 된다면 개혁이 요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긴장 관계를 우리는 웨슬리처럼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 경건주의와 모라비안주의의 중요성

교회의 개혁을 위해 노력했던 웨슬리와 감리교인들은 경건주의와 모라비안들로부터 개혁의 통찰을 얻었는데 이들은 생각과 수행에 있어서 어떻게 뜻을 갖고 헌신한 기독교 집단이 교회 안에서 분열을 일으키지 않은 채 은혜와 거룩한 목적을 갖고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독일 경견주의자 호르넥은 초대 교회를 현대 교회가 따라야 할 모델로 제시했다. 웨슬리는 호르넥이 제시한 원초적 신앙을 공유하였으며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호르넥의 호소는 영국 교회의 여러 곳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는데 특별히 초대 교회 교부들의 자료를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그 결과로 신도회 운동이 탄생되었고 이 운동으로부터 행동개혁 신도회, 기독교 지식 증진 신도회, 그리고 복음 전파 신도회가 나오게 되었다.

스페너는 전체 교회의 건강을 위해 공동체의 친밀감과 훈련을 목적으로 마인의 프랑크푸르트에서 경건회를 조직했다. 이 경건회의 성격은 대체로 보수적이었고, 기존 교회 제도를 전복시키기 보다는 개혁하는데 관심했다. 또한 경건회에서 성례전을 금함으로써 국가 교회에 무언의 지지를 보냈는데 이 전통은 웨슬리에게 이어져 평신도 설교자들이 성례전을 베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스페너가 경건회를 만든 것은 모든 믿는 자들이 제사장이라고 주장했던 루터의 사상에 기초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웨슬리 또한 스페너와 같이 평신도 설교자들을 세우는 정당성을 제시하면서도 일반 메신저와 특별 메신저를 구분했다고 한다.

이러한 운동은 교회에 위협으로 비쳐지면서 경건회에 반대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었지만 스페너는 끝까지 자기 입장을 견지하면서 웨슬리와 마찬가지로 모교회로부터 분열이나 분리를 생각하지 않았다.

메소디스트의 공동체 생활에 끼친 모라비안 운동의 dudgis은 반회의 구성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반회는 메소디스트의 속회보다 더 작은 수로 구성되었을 뿐 아니라 제자도에 있어서 더 엄격한 시준을 적용했다. 반회의 목적은 회원들이 가장 깊은 차원에서 마음의 성정이 변화되는 것이었다.

경건주의의 교회 안의 교회와 모라비안 운동의 작고 훈련된 모임이 성공하자 감명을 받은 웨슬리는 속회, 반회, 선발 신도회등과 같은 메소디스트의 내적 구조를 발전시켰다.

메소디스트의 내적 구조

1739년 말 런던에서 처음으로 연합신도회가 등장하였고 이 신도회는 형식을 갖춘 공동체였고 경건의 능력을 추구하는 공동체였다고 말했다. 연합신도회 회원들이 자신의 구원을 이루고 있는지 분명히 하기 위해 신도회는 작은 수의 모임으로 나뉘어져 속회를 이루었다. 이 속회는 12명 정도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을 지도자로 세웠다. 또한 연합신도회에 가입하는 조건은 장차 일할 진노에서 자유롭고 싶은 멸망뿐이었지만 속회에 남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연합신도회의 일반 규칙을 지킴으로써 구원에 대한 자신들의 열망을 확신해야 했다. 연합신도회의 일반 규칙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은총의 수단을 활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속회모임의 가장 큰 목적은 이전의 삶의 방식에서 죄를 용서 받고 거룩한 사랑의 은혜로운 성정이 공동체와 그 회원들의 심령에 일어나는 방식으로 나가도록 회개를 독려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메소디스트 제도의 탁월함은 그 시작부터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영국 국교회 사람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향해 개방적이지만, 일단 입단한 사람들에게는 진정하고도 참되며 본래적인 성서적 기독교를 훈련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전체 공동체가 타락하지 않도록 메소디스트 속회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뜻에 따라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경건치 못한 삶을 버리려 하지 않은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회원을 배제시키는 방법 또한 자기-의의 방식으로 행하지 않고 보다 큰 신도회의 유익을 위해 행해졌다고 한다.

메소디스트 속회 제도는 계급과 경제 지위, 혹은 교육이 속회에서 고려될 수 없다고 보았으며 그 뿌리에서부터 계층에 대한 편견을 제거했다. 대신 메소디스트 속회에서 지도력과 더 책임 있는 지위가 부여되는 것은 계층과 상관없이 신앙과 영적 성장이 기준이었다고 한다.

연합 신도회 일원이라면 속회 회원이 되어야 했지만, 속회원이 되었다고 해서 자발성에 기초하여, 보다 엄격한 훈련이 요청되는 반회에 참여할 필요는 없었으며 반회는 특정 지도자가 세워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메소디스트 속회와 구별되었다. 반회에 속한 회원들은 적어도 어느 정도의 죄의 용서, 상호 책임과 돌봄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지도력과 방향이 필연적으로 갖추어진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웨슬리는 1744년 직접 반회신도회 지침을 만들어 방향을 제시해 줬다. 속회와 반회는 각기 다른 시간대에 모임을 가졌지만, 적어도 일 년에 네 차례는 애찬식의 이름으로 연합모임을 가졌으며 애찬식은 모라비안이 웨슬리의 메소디스트 운동에 기여한 또 다른 영역이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빛 안으로 계속해서 걸으며 형제단에 앞서 나가고 있는 탁월한 회원들을 위해 선발신도회를 조직했다. 선발신도회 회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의 완전의 문지방에 있었고 속회와 반회에 모범이 되었기 때문에 웨슬리는 여러 가지 규칙으로 이들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으며, 특정 지도자가 필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했고 대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지침을 마련했다. 첫째, 비밀 준수는 반회에서 얘기된 것은 어떤 내용도 다시 얘기되어서는 안되는 것이고 둘째, 순종은 모든 회원은 사소한 일까지도 그의 목회자에게 복종할 것을 약속한다는 것이다. 셋째, 기여는 모든 회원은 일주일에 한 번은 공동체를 위해 할 수 있는 만큼 절약하여 절약한 것을 가져오는 것을 말하면서 메소디스트의 내적 구조가 갖는 최고의 차원은 은총이 자라면서 책임지는 자유도 자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경건주의와 모라비안 모델로부터 배운 메소디스트는 영국 국교회 안에 복음적 집단을 이루고 있었고 메소디스트는 결코 교회가 아니라 보다 큰 신앙의 연합 안에 개혁을 가져오는 신도회가 되려는 것이었다. 실로 교회의 선교와 기능적 이해가 없이는 메소디스트는 그 방향과 정체성과 목표를 상실하게 되는 것으로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로부터의 분리를 강력하게 반대한 것이다.

웨슬리는 이러한 분리의 문제를 하나님의 성령의 힘으로 풀어 갔으며 어떤 의미에서 교회론과 구속론을 연결 하였다. 또한 이 문제와 관련해 보편적이고’ ‘전통적이며’ ‘제도적인교회가 역사를 통해 정확한 교리를 자랑하고 정책과 교회 훈련과 은총의 수단으로 위안을 삼는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건의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그 안에 복음적인 모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복음적인 모임이란 종종 진정하고 참되며 본래적인 성서적 기독교라고 웨슬리는 불렀다고 한다. 다시 말해, 보다 광의의 교회는 계속해서 개혁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웨슬리는 교회 안에 변화를 가져오는 예언적인 모임을 필요로 한다고 했으며 이는 교회는 역동적이며 영적이어야 하고 지속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이해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메소디스트가 그 배경에 있어 영국 국교회를 필요로 하듯이 영국 국교회 또한 교회의 증언자로 메소디스트 신도회를 필요로 해야 한다고 한다.

교회는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다른 이들에게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기운이 넘쳐 모든 선한 일에 참여해야 하며 밖으로 드러난 경계여야 한다. 그러나 웨슬리 당시까지도 개신교의 몇몇 흐름은 오직 은총으로만이란 가르침으로부터 잘못된 결론을 끌어내어 행함을 거부하는 피동성 혹은 정적주의를 주장했다. 정적주의자들의 주장은 종종 기독교인 삶의 다른 영역에도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실천적 기독교인의 삶

웨슬리는 행함이 없는 신앙은 기독교의 거대한 역병이라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충분하다고 고백했으며 이 은총을 순전한 선물로 받아들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흥미롭게도 이 충분성이란 일단 은총을 받게 되면 하나님과 협력하고 하나님께 응답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웨슬리와 감리교인들은 진지한 기독교인 제자도와 관련한 가르침에서 삶의 노력과 전진과 수고를 아끼지 말라고 강조하였다.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은 우선적으로 주어지는 은총이고, 책임은총의 전제이며 해석의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초기 교부들과 개혁파 경건주의로부터 계속되는 기독교인의 삶 속에 믿음과 행위의 진정한 균형이 있어야 함을 배웠다. 성서를 존중하고, 처음 3세기 작가들이었던 원시 교부들의 가치를 존중하도록 훈련받았다. 또한 니카이아 이전의 기독교와 마카리우스와 시루스를 좋아했던 웨슬리는 이를 근거로 믿음과 행위의 진정한 균형을 이해할 수 있었고 이를 확장하여 크게는 나라를 개혁, 작게는 영국교회를 개혁하는 일을 생각했다. 웨슬리는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실천적 기독교 신앙의 참된 모델을 그리스와 라틴 교부들의 세계에서 찾았다. 웨슬리는 본래의 기독교 신앙의 표준, 특히 신생의 표징을 현실적으로 주장하기 위해 기독교 총서를 사용했다. 이 맥락에서 캠벨은 보수적인 사용실용적인 사용을 구분하였는데 웨슬리는 믿음과 행위, 칭의와 성화, 과정과 실현의 진정한 균형을 새롭게 하고 강화시키는 진정한 기독교로 영국 교회를 개혁하고자 실용적인 사용을 채택하였다. 또한 웨슬리는 초기 교부들을 넘어 경건주의자들의 내적 경건을 인정하면서, 테르스테겐에게서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신학을 만나기도 했다.

은총의 수단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은총은 종종 다양한 수단을 통해 영혼에게 전달된다. 웨슬리의 정의를 빌려 간단히 말하면, 은총의 수단은 선행은총, 칭의은총, 혹은 성화은총을 사람들에게 베풀기 위해 일반적인 통로로 하나님이 제정한 외적인 표징, 말씀 혹은 행동이다.

나이트가 제시한 패러다임을 빌려 일반적 은총의 수단과 특별한 은총의 수단을 구분할 수 있다. 웨슬리는 일반적 은총의 수단은 모든 계명을 지키고, 자신을 매 순간 돌아보아 부정하며,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점차 하나님의 현존을 알아 가는 보편적 순종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웨슬리가 말한 바, 신실함을 뜻하는 것으로, 믿는 자들이 정직하고 겸손한 방법으로 은총 안에서 더욱 자라가게 하는 다양한 방식을 의미한다.

특별한 은총의 수단은 제도적 은총의 수단을 포함하고 있다.

제도적 은총의 수단

특별한 은총의 수단 중 첫 번째인 제도적 은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총의 수단이라 했을 때 생각할 수 있는 은총이다. 사람들은 종종 특별한 수단을 경건한 행위들로 생각한다. 예컨대, 신앙 공동체의 도움이 없이는 우리의 대화를 바르게 하는 것이 몹시 어렵기 때문에 애원, 탄원, 중재, 감사로 구성된 개인기도, 가족기도, 공중기도와 같이 기도하는 일, 읽고, 묵상하고, 들음으로써 성서를 탐구하는 일, 모든 믿는 자들이 언제나 해야 할 일로 주의 만찬을 받는 일, 금식하는 일, 특히 고대 교회가 지켰던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하는 일, 기독교인 집회에 참석하는 일을 특별수단으로 여겨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여기에 제시된 제도적 은총의 수단의 목록은 은총의 수단이 성례전을 언급하는 것을 넘어 중요한 방식으로 말씀(기도, 성서탐구, 기독교인 집회참석)을 포함하는 데까지 나아감을 보여준다. 자신의 글에서 제도적 은총의 수단의 목록을 일일이 열거한 웨슬리는 이내 은총의 수단이 갖는 가치는 경건의 목적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고 기초하는 데 있으며, 그 결과 이 모든 수단들은 목적과 결별될 때는 아무것도 아닌 공허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웨슬리는 실제로 은총의 수단들이 사랑의 여러 수단에 지나지 않거나 사랑의 진정한 열매인 특별한 덕목의 수행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은총의 수단이 종교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임을 강조하는 것이 웨슬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과제이기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부족한 것과 진정한 기독교의 참된 동기의 긴장을 통해 이를 전개했다.

웨슬리는 자신의 생각에 사효적 방향으로 흘러가는 입에 발린 주장을 우리가 아는 대로 경험상 인간은 (해를 끼치지 않거나, 선한 일을 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법령을 사용하기 위해서) 수년간 노력할 수 있지만 결국 처음에 비추어 진전도 이루지 못한 채 어떤 경건도 가지지 못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웨슬리는 정직하게 말해 이러한 현실이 자신의 목회적 상담을 더욱 모호하게 한다는 것을 직접 겪었다. 실제로 무슨 큰 실수를 하였건 은총의 모든 수단 안에 본질적인 힘이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자들이 있다.고 주장했을 뿐 아니라 이들은 어리석게도 그리스도가 그 마음에 있지도 않으면서 자신들이 이런저런 일을 했다는 이유로 이미 기독교인들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값없이 주시는 은총의 본성을 마음에 새기는 것은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수단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면 위험하며, 생명력 있는 종교를 대신해 수단의 가치를 지나치게 중히 여기면 또한 똑같이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웨슬리가 보였던 균형적 입장은 한편으로는 열광주의의 함정을 피해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형식주의의 함정을 피해간다는 입장이다.

성만찬 성례전

웨슬리는 그리스도가 제정한 성례전은 기독교인의 고백의 표지나 표일 뿐 아니라 은총의 분명한 징표이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의지이며 더 나아가 그 분 안에서 우리 믿음을 강화시키고 분명하게 한다.고 1784년 출판된 메소디스트 강령에서 주장했다.

특히 주의 만찬에 대한 설명은, 부분적으로는 대니얼 브레빈트가 쓴 기독교 성례전과 희이란 책을 참조하였다. 로슨은 웨슬리의 주의 만찬을 기념으로 이해할 경우 츠빙글리의 시각으로 읽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면서 기념이란 성서의 용어는 과거 회상이라는 의미보다는 훨씬 풍요로운 의미를 담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과거 희생과 로슨이 말한 성례전적 공동체 안에 나타난 현재적 받아들임의 관계는 웨슬리의 글 속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웨슬리는 또한 성례전과 관련해 중요한 구절이 되는 고린도전서 11장 20절을 주석하면서 주의 만찬을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엄숙한 기념이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말해 기억이 현존을 수반하며, 롭 스테이플스가 말한대로 실재적인 현존은 몸의 현존이 아니라 영적 현존인 것이다. 따라서 메소디스트 종교 강령은 주의 만찬은 기독교인들 서로가 스스로 안에 지녀야 할 사랑의 징표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에 따른 우리의 구원의 성례전라고 진술한다. 그러므로 복음의 표상인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가 선행은총뿐 아니라 칭의은총이나 성화은총도 수여하는 수단으로 제정한 셈이다.

웨슬리는 제사장이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라는 생각뿐 아니라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로마가톨릭의 화체설에 문제를 제기했다. 주의 만찬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현존을 전하는 은총의 수단이며 위로이기 때문에 참으로 진지하게 죄를 회개하는 자들은 계속해서 이 성만찬에 참여해야 한다. 웨슬리는 계속되는 성만찬의 의무라는 설교에서 계속적인 의무와 관련해 두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과 관계되고 둘째, 주의 만찬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푼 자비와 관계된다. 때문에 은총의 수단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준비한 축복을 성취하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이 땅에서 거룩함과 하늘에서 영원한 영광을 얻을 수 있다.

웨슬리는 적어도 매 주일 한번은 성만찬에 참여했고 5일에 한 번 꼴로 자주 성만찬에 참여했다고 한다.

제 8장 온전한 성화 : 순전하고 완전한 거룩한 사랑

믿음

칭의와 중생에 대한 장에서 우리는 어떻게 피터 뵐러가 웨슬리로 하여금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의 주요 두 열매는(용서의 의미로부터)평화와 (신생의 능력을 주는 은총인) 능력임을 인식하도록 도왔는지 논증한 바 있다. 이 두 열매는 행복과 거룩으로 달리 표현할 수 있는데, 구속을 가져오는 신앙으로 특징된다. 또한 웨슬리는 두 구분된 은총,곧 법정의 은총(칭의)와 참여적 은총(성화의 시작)이 믿음을 통해서만 은총으로 받게 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1741년 자신의 영국 국교회 전통을 살핀 다음부터 뵐러를 뛰어넘는 결정적인 행보를 했다. 실천신학 영역에 뵐로의 통찰을 적용하여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거룩한 삶의 전통과 온전한 성화는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며, 칭의와 마찬가지로 믿음을 통해서만 받게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값없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임을 주장했던 종교개혁 전통을 연결했다. 그 후 한참 시간이 지난 1765년, 자신의 사상의 연속을 입증하며 이 문제를 정리했다. 믿음은 순간적이고도 직접적으로 성화에 필연적이다. 믿음은 순간적이며 근접적으로 성화에 필연적인 유일한 조건이다.

웨슬리는 믿음과 관련하여 완전한 사랑이 어떻게 인간의 마음에 새겨지는지 기술하면서 독특한 수사법을 사용함으로써 뵐러(와 루터)와 영국 국교회의 전통을 함께 견지할 수 있었다. 때문에 자신의 일지와 편지에서 온전한 성화가 실현되는 방법으단순한 믿음’(simple faith)순전한 믿음’(naked faith)소개했다. 이로써 온전한 성화은총이 어떻게 값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지를 강조했다. 예를 들어 1761년 단순한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1773년 볼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단순한 믿음으로 받게 될 완전한 구원

주장했다. 또 1786년 워커에게 편지를 보내며, 단순한 믿음으로 칭의와 완전한 성화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두번째 강조와 관련하여 웨슬리는 1780년 브랙켄베리에게 순전한 믿음으로 온전한 성화추구할 수 있다고 말했고, 그 후 5년이 지나 록스데일 양에게 목회서신을 보내어 처음 그 사랑순전한 믿음으로 받았듯이 다시금순전한 믿음으로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다오. 라고 말을 했다. 마지막으로 보만 여사에게 순전한 믿음으로만 완전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

웨슬리의 구원론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도 초보적인 단계에 있는 사람조차도 칭의(와 중생)와 온전한 성화가 웨슬리의 구원의 순서에서 기본적인 두 초점임을 인식한다. 말하자면 칭의와 온전한 성화는 주목을 받게 되는 구본된 독특한 자리이다. 현학적으로 말해서 다음 단계는 초보적인 구분을 넘어 이와 병행하는 구조로 옮겨 간다. 따라서 우리는 회개와 그에 합당한 사역과 관련해서 병행 구조를 살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칭의와 온전한 성화가 비교될 때 나타나는 유사성과 차이를 빌려 설명했다. 이 같은 구조가 웨슬리의 믿음에 대한 이해에 서도 자명하게 나타남을 살펴보았다. 이런 점이 바로 온전한 성화는 믿음으로만 받는다고 강조했던 웨슬리의 탁월한 방법들 중 하나이다. 웨슬리는 성서적 구원의 길이란 설교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뿐아니라 거룩하게된다고 누차 증언한다. 즉 웨슬리는 설교에서 강조하여 말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듯이, 또한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됩니다. 믿음은 칭의에서와 같이 성화의 조건이며 유일한 조건입니다.

이와 함께 웨슬리는 의롭게 하는 믿음과 성화를 가져다주는 믿음을 신적인 증거나 확신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여기서 유사성은 끝을 맺는다. 왜냐하면 의롭게 하는 믿음에서 신적인 증거나 확신은 그리스도가 나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을 확실히 신뢰하고 확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하게 성화를 가져다 주는 믿음에서 신적인 증거나 확신은 우리가 칭의에 이르는 믿었던 것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로 이해된다고 말한다.

첫째,그것은 성서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신적인 증거와 확신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수행할 수 있는 신적인 증거와 확신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그것을 지금 이룰 수 있는 신적인 증거와 확신입니다.

확신하건대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 수 있고 거룩하게 하고자 하십니. 그리고 이 사실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하나님게서 하신다는 신적인 증거와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은총의 두 사역 사이의 차이는 다시 말하지만 영적 성장 때문이다. 즉 의롭게 하는 믿음은 기독교인 삶의 목표나 목적이 아니고 단지 시작일뿐이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죄로부터 깨끗케 할 뿐 아니라 우리 영혼에 이루고자 하는 보다 깊은 사역을 갖고 있다.

균형 잡힌 웨슬리의 은총 개념

완전한 사랑에 이르는 노정에서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사역과 또한 온전히 성화를 가져오는 믿음을 다룰 때 웨슬리가 사용했던 용어를 주목하면, 실제로 웨슬리의 은총에 대한 이해가 하나낙 아니라 두 개의 구분된 이해에 기초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은총에 대한 다른 두 개념들이 한 구문에 함께 사용되면 독자들은 퍼즐을 맞추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1759년에 웨슬리는 도로시 펄리에게 편지를 썼다.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온전히 믿음으로 거룩하게 되기를 기대하십시오. 그러나 믿음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축복은 아득하게는 우리의 사역에 기초한다고도 할 수 있지만, 순간적으로는 단순한 믿음에 기초합니다.여기서 웨슬리는 비평가들이 비평했듯이 자기모순에 빠져 있는, 혹은 웨슬리의 개념이 혼돈에 빠져 화해할 수 없이 뒤죽박죽 된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 상황에서 웨슬리는 두 개의 구분된 은총 개념을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두 개의 구별된 패러다임에서 시작하여, 본래적인 기독교인의 믿음과 본래적으로 이해된 보편성에 대한 물음 안에서 이 두 은총 개념을 자신의 실천신학 안에 궁극적으로 화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셀은 웨슬리의 신학이 개신교의 은총의 윤리가톨릭의 거룩함의 윤리를 필연적으로 종합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회개와 사역을 나란히 전개했던 웨슬리의 입장은 그가 이미 은총에 대한 가톨릭이해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가톨릭의 은총 이해는 신/인 협력을 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주도권에 응답할 수록 점차 그 정도가 자라 간다. 하나님의 협력은 인간의 주도권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행적인 활동에 응답함으로써 나온다. 웨슬리의 일지에서 보면 가톨릭적 전통이 묻어나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 누구든 받은 것을 자라가게 하고’, ’자신이 이미 받은 은총을 향상시키고라는 표현,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지 않는다면 구원이 완성될 수 없다.라는 표현등이다. 이런 가톨릭적인 신/인 협력적 개념을 전개하기 때문에 웨슬리 신학의 정취가 나는 접속적 균형을 결핍하게 되고, 이런 해석학적 편견으로 인해서 개신교적 은총 이해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웨슬리는 신/인 협력적 패러다임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홀로의 사역임을 강조한다. 웨슬리는 자신의 글에서 개신교적인 은총의 주제를 충분히 나타낸다. 하나님 홀로 믿음과 구원의 주이며, 모든 선한 은총의 유일한 수여자이다.라는 표현과 스스로 즐거워 거룩함을 행하신다.고 주장하는 표현이 그것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이 은총을 결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을 결정한다. 당시 웨슬리의 동료 칼빈주의자들에게는 놀아운 일이었지만 웨슬리는 이러한 역동성을 충분히 인식한다.

기독교인의 완전에 대한 평이한 해설에서는 하나님의 사역이 몇 년, 혹은 몇 주, 혹은 한 주, 혹은 하루, 한 시간 안에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믿음으로만 주어지는 성화 교리와 로마가톨릭의 공로에 의한 완전의 사다리 교리가 구분된다. 웨슬리의 완전 교리는 은총의 주권성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칭함을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들은 온전한 성화에 이르기 위해 뭔가 되어야 한다든지 뭔가를 해야 할 필요가 없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개신교 전통과 가톨릭 전통을 종합하는 웨슬리의 균형 있는 은총을 이해하는 두 가지 초점은 웨슬리 실천신학이 색깔도 없는 반-펠라기우스주의적 해설로 끝나거나 복음적 회개의 합당한 수단을 간과함으로

써 열광주의나 정적주의로 흘러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실천신학은 가톨릭이나 개신교 전통의 맥락에서만 해석되어서는 안 되고 적절한 긴장 가운데 이 둘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 해석해야 한다.

웨슬리가 받아들인 가톨릭의 협력은총과 개신교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을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의 활동의 우선성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가장 큰 차이점은 어떻게 하나님의 주도권과 활동을 이해하는가에 있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신/인 협력적인 배경에서 하나님 활동을 이해하고, 개신교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존재가 실재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홀로의 사역을 구성하기에 하나님의 활동은 하나님의 존재의 자유와 풍성한 은혜로 비쳐진다. 하나님 사역에 어떤 응답의 가능성도 전제하지 않는다. 웨슬리의 이중적 은ㅊ오 이해를 서술하고 있는 본래적 접속은 단순히 하나님의 사여고가 인간의 사역이 아니다. 웨슬리는 신/인 협력 그 자체가 보다 크고 관대한 접속의 반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은총이란 협력은총일 뿐 아니라 협력은총과 값없이 주시는 은총의 접속이다.

제 9장 종말과 영화 : 거룩한 사랑의 승리

시간과 영원의 접점에 놓인 온전한 성화는 믿는 자들에게 이 세상뿐 아니라 도래할 세상에서 봉사하도록 준비 시킨다. 자신의 죽음이 임박해 오자 웨슬리는 인간의 유일한 목적은 유동적인 시간에 관심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을 준비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모름지기 거룩한 하나님의 의해 창조되었으니 자신들의 감각 을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며 자신의 상상력을 만족시키기거나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나 인간의 칭찬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구원의 순서는 온전한 성화에서, 혹은 죄인들의 때가 찼을 때 갑자기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구원의 순서는 구원받은 이들을 영원으로 안내하는 다리요 길이다.

부흥운동과 천년왕국설

복음주의 부흥이란 더 큰 역사의 시작 일뿐이며 종말의 영광의 여명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성서적 기독교가 확산되지 못하도록 방해를 받았던 것은 기독교인들의 삶 때문이었다. 이 이름뿐인 기독교인들의 삶에 웨슬리는 거대한 걸림돌이라고 불렀다.

생동감 있는 기독교의 전파는 성령의 능력으로 힘을 받아 크게 확장되어 온 땅의 모든 백성들에게 돌아오게 했듯이, 이제 하나님은 분명 모든 나라 혹은 전체 세계를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돌아오게 하는 것은 한 영혼을 돌이키는 일만큼이나 쉬운 일입니다.웨슬리는 시간을 두고 생각에 변호가 있긴 했지만 천년왕국 통치의 실재를 인정했다. 초기에는 영국 종교개혁 전통의 맥락에서 교회활동에 관심하면서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통치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틀리의 전 천년설에 영향을 받은 웨슬리는 계시록 10장 7절의 약속처럼 전 천년동안 교회가 번창하고, 후 천년 동안 하늘에서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통치를 하고 땅에서는 인간들의 근심도 없는 태평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것이다. 후기에 내온은 설교에서는 대 각성 복음주의 부흥운동과 전 천년의 통치를 연결시킴으로, 전 천년의 통치는 발전적인 진보를 가져올 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이전에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의 도래는 신-인 협력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 나타난다. 달리 말하면, 웨슬리의 종말론조차 그의 접속 적 은총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종말과 하나님의 통치

성도와 죄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죽음과 관련한 종말론적 사건들, 중간 상태와 도래하는 심판, 새 창조와 거룩한 사랑의 최후 승리 이전에 일어나게 될 사건들을 경험한 것이다.

죽음

웨슬리의 생애와 사상은 19세기와20세기 풍미했던 실존주의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 죽음의 궁극성은 인간 실존의 한계를 생각하게 한다, 웨슬리는 죽음을 우리의 시간적 현존을 사라지게 할 뿐 아니라 그 존재 방식에 심각한 도전을 주는 실제적인 끝, 유한한 한계로 이해했다. 죽음은 문자 그대로 시간을 다 써버린 것으로, 정결을 향한 변화의 과정이 이제 끝났음을 의미한다. 웨슬리는 본래 죽음이란 영혼과 몸의 분리를 수반하며 죽음을 통해 영혼은 죽지 않으며 죽을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의 몸은 죽음과 더불어 좀이 먹어 무너져 내린다. 그러나 영혼은 결코 죽지 않는다,” 1788년 출판된 설교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이렇게 주장한다.

나? 그래 나는 무엇입니까? 의심할 바 없이 나는 내 몸과는 구별된 무엇입니다. 내 몸은 필연적으로 내 안에 포함될 필요는 없다고 보입니다. 왜냐하면 내 몸이 죽을 때에도 나는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실제로 존재할 것입니다. 나는 모든 열정과 사랑을 가지고 스스로 움직이며 생각하는 원리가 몸이 재로 변한다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믿을 수 밖 에 없습니다.

중간상태

죽음과 함께 불멸의 영혼은 황천에 들어간다. 황천은 분리된 영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지옥과는 구분되는 존재의 자리 혹은 존재의 상태이다. 황천이 지옥과 구분되어야 하는 이유는 의로운 자들과 불의한 자들 모두가 개체 영들로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황천은 일반적인 용어로 단순히 개체 영들의 거처를 뜻한다. 반면 지옥은 저주받은 이들만이 모여 있는 곳이다.

황천은 지옥과 하늘나라에 이르는 대기실이다. 지옥과 관련해서 웨슬리는 악한 인간의 영들을 위해 가능한 역할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믿음에서 떠난 자들이 죽게 되면 곧 악마와 악귀에 의해 고통의 장소로 안내 된다고 주장한다. 지옥의 대기실에서 고문을 받은 이들은 그 고문으로 정결하게 될 수 없고 오히려 교만과 탐심, 색욕과 미움, 신성 모독이라는 지옥의 개들로 오염이 된다. 그러므로 연옥의 개념은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탁월함과 충분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잘못된 가르침이다.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통 외에 어떤 고통도 죄를 근절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불외에 다른 불은 이생과 내세에 영혼을 정결하게 할 수 없다.

웨슬리는 아주 목가적인 그림을 상상한다. 그때에 성도들은 세상이 시작되던 때부터 모든 세대와 열방에 살았던 지혜롭고 거룩한 모든 영혼들과 대화할 것이며름답게 빛나는 천사들과 대화할 것이고, 심지어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대화할 것이다. 이처럼 지식과 지혜가 자라가면서 행복과 거룩함이 자라나고 성도들은 하늘나라를 향해 지속적으로 성숙해 갈 것이다.

부활과 심판

웨슬리는 영혼이 몸을 떠나 하나님 앞에 발가벗겨진 채 서는 순간 그 상태로 영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황천으로 빠져나온 순간 영원으로 이어지지만 그 자체가 아직 심판은 아니며, 도래하게 될 놀랍고도 불변하는 심판이 있음을 암시한다. 웨슬리는 땅에서 완성했건 미완성했건 자신들이 행한 일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고 말하였다. 또한 인간의 영혼에 담겨 둔 모든 내면의 활동, 즉 모든 식욕과 정욕, 의도와 감성공개되어 누가 의로운 사람이며 누가 불의한 사람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하였다. 웨슬리는 도덕법과 예수 그리스도를 특징짓는 여러 속성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도래하는 심판에서 도덕법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최종적 칭의

웨슬리는 결혼예복에 대하여라는 설교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가 처음 칭의이고 행위에 따른 심판이 최종적 칭의를 뜻한다면, 이 두 개념이 모순될 필요가 없다고 설명한다. 웨슬리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를 하늘나라 시민이라 부르는 데 필요하지만, 개인의 거룩함은 하늘나라 시민이 되는 자격 요건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없다면 우리는 영광에 이르렀다고 할 수 없을 것이고, 거룩함이 없다면 영광에 적합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로에 대한 물음

웨슬리는 공로라는 용어를 로마가톨릭과는 다른 차원으로 사용했다. 엄격한’(본질적인)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고 느슨한의미로 사용하기도 했다. 1773년 웨슬리가 쓴 글에서 격하게 말해서 그리스도의 보혈밖에는 다른 곳에서 공로를 찾을 수 없다. 구원은 행위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생 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공로라는 표현을 느슨한 의미로 사용하는데, 이 경우에 우리의 행위란 보상을 받을 만한보다는 좀 더 깊은 의미다. 보상을 받을 만하다는 말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이미 역사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순전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행위가 열매를 맺게 되고 그 열매로 사랑과 보상을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느슨한 의미에서 보더라도 웨슬리의 공로 사상은 결코 인간의 자율적인 성취를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의 이중적 활동을 강조한다. 첫째는 은총을 주심이고, 둘째는 은총의 열매에 대해 상을 주심이다. 웨슬리에게 처음 칭의와 최종적 칭의의 공로의 근거는 그 행위가 아무리 고상하고 다양하다 할지라도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구속이다.

새 창조

새로운 창조에 대한 웨슬리의 글은 상당 부분 하나님께서 이 땅을 심판한 직후 나타나게 될 승리의 교회에 관심한다. 심판이 있은 다음 하늘이 지나갈 것이고 땅과 땅에서 지은 모든 죄 된 행위는 계시록에 약속한 대로 새 창조를 준비하기 위해 태워질 것이다. 이 특별한 시간에 온유한 사람들은 이 땅의 기초를 놓기 전 이들을 위해 예비 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축복과 영광의 상태는 여러 차원에서 현저한데,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사랑에 기초한다. 무엇보다도 그날에는 깊고 친밀하며 거리낌이 없는 하나님과의 연합이 있을 것이고, 성령을 통한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항구적인 연합이 있을 것이며, 삼위가 하나이신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향유를 누리며 하나님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향유를 누릴 것입니다.라고 웨슬리는 말하였다. 하나님의 지식과 완전히 거룩한 사랑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새 예루살렘을 감싸며 우리는 신부로 받아들여진다. 웨슬리는 이렇게 주석한다. 이 도시는 이 세상이나 천년왕국이 아니라 영원에 속한, 전혀 새로운 도시이다.

오늘과 내일 : 제자도와 섬김의 자료가 되는 존 웨슬리의 실천신학

웨슬리는 자신의 생애뿐 아니라 그가 섬겼던 신앙 공동체 안에서 거룩한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실현코자 했다. 구원이라는 좋은 소식을 나누는, 이 거대한 목적을 가진 웨슬리는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학에 대한 추상적이며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설명을 피하고 대실천신학에 주목했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신학적 관심은 종교의 형식을 피하고 그 능력을 맛보고자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을 세우는 일을 희망했고 그 일에 몰두했다. 전체적으로 그의 실천신학과 구체적으로는 그의 구원의 순서에 반영된 웨슬리의 구원론적 의도는, 거룩한 사랑의 은총이 모든 사람들에게, 특별히 가난하고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실천신학은 진정 복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