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위르겐 몰트만 후반부-문성환.hwp
3) 요청적 무신론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몰트만의 삼위일체 신학
⑴ 요청적 무신론과 인간의 자유 및 해방
요청적 무신론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인간의 참된 자유 및 책임성과 모순 된다고 보아 하나님을 거부하는 무신론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요청적 무신론
하르트만- 인간의 자유로운 윤리적 선택을 위해 무신론을 요청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 윤리적 원리를 정립하고 창조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사르트르-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가치들은 인간의 선택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에 인간은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의 요청적 무신론
블로흐- 전통적 유신론의 전능하고 절대적인 하나님과 인간의 자유와 책임성은 양립할 수 없다고 전재한다. 이 세계의 위재한 주가 있는 곳에는 자유의 여지는 없다.
로저 가로디(공산주의 철학자)- 신은 인간 창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도덕적 법칙이로, 또 인간의 자율과 반대되는 타율로 이해되는 한 신은 인간을 소외시킨다.
칼 마르크스- 신은 구체적인 삶에서 소외된 인간이 위로를 찾는 가운에 만들어낸 것이고 종교란 사람들이 당하는 억압의 표현이며 그 고통에 대한 저항이다.
종교는 사람들의 관심을 실제 이 땅의 조건들에서 눈을 돌리게 하고 그들을 소외시킨 현재의 사회 구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며 저항의 능력을 박탈한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일부 인본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이 실천 지향적 무신론을 채택한다.
인본주의자인 러셀- 기독교는 세계의 도덕적 진보의 주된 적이었으며 지금도 그렇다 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교회는 그 구성원들로 하여금 한 초월자의 능력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사회 속에서 책임적 행동을 못하게 하여 결국 인류의 진보를 방해한다.
요약하면 이 무신론은 온 세상의 주님으로 인식된 신은 모든 인간적인 것과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진정한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 회복을 위해 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이 무신론은 역사 속의 교회가 사회 정의와 평등의 문제에 무관심 내지 무력했다는 점에서 그 입장을 더욱 굳건하게 한다.
따라서 요청적 무신론에 대한 신학적 답변은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성을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진작시키며 또한 사회 정의와 평등을 향한 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음을 보여 주어야한다. 삼위일체 신학은 기독교의 하나님 신앙은 그 안에 실천적이며 구체적인 사회 변혁의 동기와 원칙을 가지고 있음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⑵ 요청적 무신론에 대한 답변으로서의 몰트만의 삼위일체 신학
요청적 무신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를 계시하신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는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억누르고 거부하는 유신론의 신이 아니라 삼위일체 되신 자유의 하나님이며 이 하나님 안에서 사람들은 자유의 진정한 근거를 찾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성서가 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유신론이 전제하고 무신론이 거부하는 천상의 유일신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으로 특징 되는 신적 인격들의 사랑의 사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몰트만은 한 신적 본질이나 한 신적 주체성에 근거한 신적 통일성을 거부하고 삼위 하나님의 일치는 하나의 동일한 신적 본질에서나 한 신적 주체자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의 영원한 통교(페리코레시스)에서 찾아진다.
다시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 구별되는 세 인격의 영원한 사귐이며 교제이며 이들의 일치 혹은 하나 됨은 역동적 상호 침투성 내지 관계성에서의 일치라는 말이다.
몰트만은 이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을 무엇보다 먼저 신적 사랑 안에서의 연합, 사귐, 교제 등에 의해 규정되고 특정지어진다고 한다.
전통적 단일신론은 대개 신을 온 세상을 지배하는 절대적 군주나 영원한 아버지로 이해해 왔으며 이런 이해는 곧 이 땅에서의 절대 군주제 및 그것의 정치적 억압을 정당화시켜 주는 기능을 해왔다.
이런 권위주의적이며 계층질서적인 구조들은 필연으로 강압적이고 억압적 성격을 가지게 되어 개인적 자유와 충돌하게 되고 마침내 자유의 이름으로 일어난 무신론의 저항을 유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몰트만에 따르면 하나님을 세 인격 사이의 사랑의 연합으로 이해하는 삼위일체 신관은 결코 인간의 자유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을 상호간의 사랑과 평등 속에 있는 세 신적 인격의 공동체로 이해하는 삼위일체 신관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의 진정한 근거가 될수 있다.
⑶ 몰트만의 삼위일체 신학과 구체적 실천의 관계
몰트만은 불의한 사회 체제를 그 근본에서부터 도전하며 구체적인 사회 프로그램의 원리까지 포함하는 혁명적인 하나님 이해를 제시할 때 교회는 무신론의 도전에 대해 적절하게 응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몰트만은 이와 같은 삼위일체론의 요소를 그의 종말론적 삼위일체론 논의에서 찾고 있다.
보냄의 삼위일체와 영화롭게 된 삼위일체를 구별한다.
몰트만은 전통적인 삼위일체 이해를 받아들이면서 영광의 삼위일체라고 부르는 종말론적 형태의 삼위일체를 보완해야 한다고 본다.
신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미래와 그 능력 및 힘을 지칭하는 단어가 영광임에 주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고 십자가에서 부활에의 길을 간 이유는 궁극적으로 성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였다고 본다. 그런데 우리가 삼위일체적 역사를 이런 영광의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볼 때 성자의 출생과 성령의 출원은 보냄의 삼위일체에서와는 다른 순서가 된다. 이제 모든 삼위 하나님의 행위는 성령으로부터 출발한다. 성령은 바로 영화를 돌리는 이이며 그는 동시에 성자와 성부를 영화롭게 한다.
몰트만에 따르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미래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남을 통해 특별한 내용을 갖게 되었다. 예수는 그 자신을 의식적으로 가난한 자, 억눌린 자, 버림받은 자와 동일시하셨고 이 사실은 그의 전생애, 특별히 그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다.
만약 예수가 이런 분이었다면, 예수가 아버지라 부른 하나님 역시 가난한 자, 억눌린 자, 그리고 버려진 자들의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억압당하며 사회적으로 버려진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단지 사람들의 종교적 소외뿐 아니라 해방을 위해 그들의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인종차별적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분투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요청적 무신론의 비판과 달리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구체적 실천과 연관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삼위일체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구체적인 미래를 가지고 계신 분이며 그 미래의 빛에서 현재의 모든 체제를 비판하고 도전하는 분이다. 이런 하나님을 따라가는 가운데서 사람들은 주어진 사회 체제의 지배 구조와 악에서 자유로워지며 가난한 자, 억눌린 자, 그리고 버려진 자들의 해방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