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위르겐 몰트만-김용완.hwp
위르겐 몰트만
학번:4101013 이름: 김용완
위르겐 몰트만 역시 융엘처럼 바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유신론과 무신론은 잘못된 신 개념에 근거하고 있으며 좀 더 성서적이며 기독교적 삼위일체 신론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믿는다. 바르트와 융엘은 삼위일체론으로 몰트만은 무신론이 제기하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성의 문제에 대한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답변을 찾고자한다.
1)몰트만의 유신론 비판
전통적인 유신론은 이 세상에서 출발하여 이 세상 밖에 있는 절대적 원인자, 능력자, 혹은 온전한 지혜자를 상정하며 이렇게 상정된 존재를 하나님이라 부른다. 신론은 우주의 질서와 조화에 근거해서 이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이 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위대하고 자비로운 이 세상 너머의 그 어디를 믿기란 불가능하다. 오히려 천상의 악마를 상정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한다. 이점에서 몰트만은 무신론자들의 유신론 비판을 대변하는 이땅의 고통을 볼 때 또 부정의를 볼 때 한 전능하고 온전히 자비로운 하나님이 있다는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 고전적 유신론은 하나님 안에서 결코 죽음, 고통, 필명성(mortality가)이 없는 것으로 전제한다. 인간의 구체적 삶의 현실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세상에서 출발하는 것 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고통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오직 이때에만 우리는 이땅의 엄청난 고통에 유의미한 방식으로 말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말할 때 하나님의 계시에 충실 할 수 있다. 몰트만은 루터의 십자가 모든 것을 판단(증명)한다는 명제를 받아들인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을 통해 계시된다.를 받아들여서 유신론을 논박하고자 한다.
2) 저항적 무신론에 대한 몰트만의 답변
(1) 저항적 무신론
저항적 무신론(protest atheism)은 이땅의 악과 고통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그 선하심을 부인하는 무신론이다. 이땅의 엄청난 고통과 부조리 앞에서는 전능하며 사랑이신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며 또한 인간의 진정한 존엄성과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갈망의 이름으로 이 하나님을 거부한다. 다양한 인간의 고통에 등장한다. 예) 자연적 악, 곧 자연재해에 의해 유발되는 인간의 고통 그러나 심각한 것은 인간 사회 속의 악, 곧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하는 부정의와 고통의 문제이다. 저항적 무신론자들의 주된 관심은 정치, 사회적, 경제적 맥락 속에서의 부조리와 고통이다. 예)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아이들이 죽어가는 사례들에서 저항적 무신론자들의 가장 분명한 형태들을 본다. 그리고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사건이다. 역사속의 수없이 많이 일어나는 부조리한 고통을 방관하는 하나님은 무정하고 잔혹한 하나님이요, 거부되어 마땅한 하나님이라고 한다.
(2) 저항적 무신론에 대한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적 응답
몰트만은 고통의 문제는 오늘날 불신앙의 가장 큰 이유이며 또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가장 큰 도전이라고 본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그의 죽음의 절규인 “나의 하나님 어이하여 나를 버리십니까”가 있다. 모든 기독교 신학과 기독교인의 삶은 기본적으로 예수가 죽으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일 수밖에 없다. 이때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감과 사회와의 관계성을 같이 유지한다. 특히 현대의 신정론적 질문은 자연 속의 악에서 정치, 사회, 경제적 악으로 옮겨 갔음을 주목한다.
몰트만은 고통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창조주의 계획 때문이다. 혹은 오늘 고통을 견디면 내세에서 보상이 받을 것이라는 정통적인 유신론의 답변은 전혀 무의미하고 불가능하다.(이는 우상 숭배에 불과하다) 무신론의 고통에 대한 정당한 응답이 될 수도 없다. 유신론과 무신론은 똑같이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다. 유신론은 고통의 문제를 창조주의 숨은 계획내지 숨은 질서에 근거하여 넘어가려고 한다면 무신론은 고통과 전능하며 사랑인 유신론의 하나님은 양립할 수 없고 따라서 신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신론은 분노와 저항만 보일 뿐 인간의 근본적인 질문에 올바른 답변을 주지 못한다.
몰트만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십자가 가 우뚝 서 있다고 본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모든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니 십자가는 단지 신학의 유일한 주제가 아니라 이 땅위에서 신학의 모든 문제들과 답변들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십자가의 이해 그에 따르면 십자가에 대한 속죄론적인 이해는 이차적인 십자가 이해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아바’라고 불렀던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는 문제, 곧 하나님의 신원(identity)의 문제이다. 십자가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첫째로 십자가의 하나님은 고통 당하실수 있는 분이다. 루터의 말처럼 십자가의 하나님의 참된 본성을 계시한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무감동하고 영향 받지 않는 전통적 유신론의 하나님은 아니다. 십자가의 하나님은 고통의 하나님, 곧 그 자신의 마음을 온 세상의 고통 앞에 활짝 벌려 고통당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다. 주목할 점은 몰트만은 고난당할 수 있는 하나님(passionate God)을 말 할 때 십자가에서 예수와 하나님 사이에 일어난 것은 삼위일체적 사건, 곧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의 사건이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 자신을 하나님이시며 삼위일체의 두 번째 하나님과 동일시하고 있다.
두 번째로 몰트만은 만약 하나님이 고난당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이는 곧 이 하나님은 인간과 모든 피조 세계의 고난의 역사에 참여하시어 함께 고난당하시는 분임을 뜻한다고 한다. 십자가에서 그 자신을 고난의 하나님으로 보이신 하나님은 이제 인간의 모든 고난의 현장에 찾아오시는 분으로 자기를 보이신다. 인간 고난의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는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불의와 강압의 역사 속에서 고난당하신다. 모든 인간의 부정의와 폭압으로 인한 고난 속에 같이 계신다. 몰트만은 하나님을 고난의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이런 이해는 이 땅의 고난 때문에 신 신앙을 거부하는 저항적 무신론의 도전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인간 가까이 내려왔고 오늘도 인간의 모든 고통 속에 같이 고통당하는 분이다. 그러나 고난에 참여하는 분으로 밝히는 것만으로는 저항적 무신론에 대한 충분한 답변은 될 수 없다. 몰트만은 그 답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찾는다. 그에게서 부활은 이 세상의 모든 악과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이다.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그가 이세상의 모든 어둠과 죄악, 고통과 죽음을 극복하시는 분임을 뜻한다. 몰트만은 이 부름은 정의와 모든 인간의 고통이 극복되는 희망에로의 부름이라고 한다. 그의 희망은 아주 구체적인 이 땅의 역사안의 희망이다. 인간의 삶을 억누르고 모든 고난과 죄악에 대해 저항하게 하며 하나님이 이끌어 오실 새 날에의 기대로 이 싸움을 계속하게 하는 희망이다.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이미 예시된 하나님의 최후 승리의 날을 기다리면서 이 땅의 모든 악과 고통에 맞서 싸워 나가는 것이다. 몰트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고난과 승리의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삼위일체신학은 저항적 무신론에 대한 정당한 답변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