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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후 왕조(기원전 845-746)의 역사적 의의

발제자 : 4122068 최진숙

Ⅰ. 들어가는 말

예후 (BC843~815, 왕하9:1~10:36 / 28년 재위)

야웨를 위한 열심”(왕하10:16)

- 오므리 왕조의 이원적(二元的) 종교 체제 반대하여 유혈군사혁명 일으킴

- 오므리 왕조에 속한 자들 살해, 사마리아에 있던 바알성소 파괴

- 엘리사를 중심으로 한 예언자 그룹과 레갑 족속과 같은 신실한 야웨 종교의 추종자들의 적극적인 지원 받아 강력한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리는데 성공

오므리 왕조에 의해 추진되었던 이스라엘의 대내외적 정치 노선을 완전히 버림

결과

북 왕국의 외교적 고립, 주변 국가들에게 침공당할 위험성 가중됨, 외교적 긴장 관계의 형성과 경 제적 번영의 상실을 초래 (상당한 정치적 희생)

예후 왕조가 무너진 이후의 북 왕국

- 파국을 향해 치닫게 되고 계속적인 왕들의 암살 사건으로 인해 매우 불안정한 상태

- 결국 기원전 722년에 동쪽으로부터 밀려온 강력한 앗시리아의 군대에 의해 멸망

이로써 북 왕국은 여로보암에 의해 건국된 이후 200여 년 동안 지속되다가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 로 사라지게 됨.

Ⅱ. 예후 왕조 시대의 역사적 상황

북 왕국 역사 중 절반의 기간을 다스렸던 예후 왕조. 하지만 통치자들에 대한 정보가 비교적 빈약함

1) 예후(28년) – (혁명의 진행과 관련된 자세한 보도(왕하9:1-10:31)를 제외)

하사엘과의 전쟁에 관한 짧은 보도와 그의 죽음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전부

2) 여호아하스(16년) 아홉 절 (왕하 13:1-9)

3) 요아스(15년) 네 절 (왕하13:10-13)

4) 여로보암 2세(40년) - 일곱 절(왕하14:23-29) *북 왕국을 역사상 가장 번영된 국가로 만든 사람

이유 : 신명기사가는 기원전 722년에 일어난 사마리아의 패망사건의 원인을 규명하려는데 우선적 인 관심이 있었으며, 그 해답을 부정적인 역사 기록의 틀 안에서 찾아내려고 시도함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열왕기서에 언급된 제한된 기록은 예후 왕조 시대의 사회적인 상황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음.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황

1) 두로, 유다와의 동맹 단절

두로 - 북 왕국에 바알 제의를 유입시킨 이세벨의 고향

- 예후 혁명의 근본적인 의도가 순수한 야웨 종교의 회복임과 동시에 바알 제의의 멸절이었기 때문에 두로와의 동맹 관계가 파괴되는 것은 당연한 일

- 예후 왕조의 대외 정책에 극심한 손해를 의미

오므리 왕조

예후 왕조

지중해 해상권을 독점하고 있던 두로와의 절친한 관계를 통해 외교 정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

두로와의 관계 파괴로 인해 더 이상 국제 무대에서 어떠한 두각도 나타낼 수가 없었음

풍요로운 상업도시와의 특별한 관계를 통해 상당한 부와 경제적 혜택을 제공받음

비우호적 관계로 인해

활발한 국제 무역활동에 확실한 제동걸림

주변국들과 지속적인 화해 외교 정책을

펼치고 문화적 개방성을 통해 위대한

건축 유산을 남겨 놓음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외교 정책을 자초함으로 어떠한 문화적 잠재력을 소유할 수가 없었음

예후 혁명의 성공은 곧 남 유다와의 동맹 파괴로 이어짐.

- 혁명을 통한 오므리 왕조의 몰락은 북 왕국과 남 왕국 사이의 긴밀한 혈연적 관계를 파괴

- 유다의 왕 아하시야는 북 왕국을 방문하였다가 예후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므깃도에서 살해를 당 함(왕하9:27)

- 아하시야의 모친인 황태후 아달랴가 왕의 승계 가능성이 있는 다윗 왕가의 왕자들을 말살시키고 정권을 쟁취하는데 성공

- 7세의 요아스가 왕위에 등극하기 전까지 아달랴가 6년여 동안 여왕으로서의 직무 감당

- 아합 가문의 아달랴가 남 왕국을 통치하는 동안 원수인 예후와 우호적 외교관계는 불가능

2) 앗시리아와 아람(하사엘)의 군사적 침략

예후가 오므리 왕조의 활발하고 개방적이었던 외교 정책을 포기함으로써 먼저 주변 국가들로부터 침공을 당할 위험성 증대됨

앗시리아에 봉신국가로 전락

살만에셀 3세(기원전 859-824)는 기원전 841년(재위 18년)에 시리아 원정을 감행

- 다메섹을 함락시키는 것이 침공의 첫 번째 목표

- 다메섹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함

- 대신에 그는 요단 동편의 북쪽 지역의 하우란(현재의 예벨 엣-드루즈) 산지에 있는 많은 아람 촌락 들을 약탈하는 것으로 만족

- 서쪽으로 진격하여 지중 해안의 바리라시 산지에까지 이름

- 북 왕국을 포함한 많은 지역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수 있게 됨 - 살만에셀 3세는 시리아와 팔레스틴 지역의 지배권을 과시하기 위해 이곳에 자신의 초상 세움

- 예후는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페니키아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앗시리아 왕에게 굴욕적인 정복당 하며, 왕위에 등극한지 채 4년이 지나지 않아서 앗시리아의 봉신 국가로 전락

아람의 하사엘의 공격

- 앗시리아의 팽창이 침체 상태에 빠지게 된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짐

- 앗시리아의 공격을 끝까지 방어했던 하사엘은 예후가 살만에셀 3세에게 항복한 사건을 반앗시리아 입장에 동참하지 않은 외교적 배신행위로 간주하고 그를 보복할 준비

- 하사엘은 예후를 희생 제물로 팔레스틴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욕망을 소유

- 열왕기서의 보도

: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지는 않지만, 몇몇 구절들은 하사엘을 북 왕국에게 참담한 결과를 가져다 준 매우 두렵고 무서운 대적으로 묘사함.

- 아람의 공격은 우선 북 왕국의 방어선이 취약한 요단 동편 지역에서 발생

- 요단 동편의 지역들이 방화와 전쟁을 면하기 위해서는 하사엘에게 강탈금을 내야만 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방화와 약탈과 잔인한 죽음을 그 대가로 지불

북 왕국은 이때 요단 동편 지역의 대부분을 상실 (왕하10:33)

- 북 왕국의 침체는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됨.

- 하지만 더 이상 전쟁에 참여시킬 수 있는 군사력이 존재하지 않음. (마병 50명, 병거 10승, 보병 10,000명)

- 하사엘은 일부 블레셋과 유다 땅을 점령하고 해안 도로에 대한 관할권을 소유

- 요단 동편의 주요 교역로인 왕의대로의 북부를 지배

- 팔레스틴을 통과하는 상업적 왕래를 사실상 독점.

3) 작은 이웃 국가들의 군사적 침략

- 힘이 없는 북 왕국을 확인하자 이에 힘을 얻은 주변에 있는 다른 작은 민족들이 북 왕국을 공격

- 블레셋은 포로로 잡은 북 왕국의 백성들을 노예로 만들어 그들을 에돔 사람들에게 매매(암1:6-8)

- 암몬도 혼란기를 틈타 얍복강 남쪽 지역에 있는 자신들의 거주지를 확장시키기 위해 길르앗을 침 략하여 비인간적인 야만 행위를 저지름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황

1) 아람의 쇠퇴와 북 왕국의 재기

아닷-니라리 3세의 출현

- 앗시리아의 부흥을 이루기 위해 다시 시리아 지역을 침공한 왕

- 앗시리아의 우선 공격 대상은 시리아 지역

다메섹의 압박에 괴로워하던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를 비롯한 주변의 국가들에게 희 망의 메시지 (신명기사가는 북 왕국의 백성을 아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준 아닷-니라리 3 세를 구원자라고 표현(왕하13:5)

앗시리아가 다메섹을 지배함으로 아람은 더 이상 북 왕국을 위협하는 두려운 존재가 아님

평화의 시대는 기원전 800-750년 동안에 지속

예후 왕조의 요아스와 여로보암 2세는 그 동안의 전쟁의 혼란과 폐허에서 일어나 북 왕국을 온전한 독립국가로 만듦. 정치 경제의 번영과 부흥, 사회적 안정

2) 영토의 회복

요아스

- 그의 부친 여호아하스가 빼앗겼던 요단 동편에 위치한 성읍을 아람의 벤하닷 3세로부터 회복

- 3번이나 벤하닷 3세를 물리치고 하사엘에게 강탈당한 북 왕국의 도시들을 찾아오는데 성공

- 남 왕국과의 대결에서도 큰 승리를 쟁취 (요아스는 벧세메스로 진격하여 남 왕국의 군대를 격파하 고, 아마샤를 포로로 잡아감)

- 다메섹과의 계속된 전쟁에서 승리하고 남 왕국까지 지배하게 된 북 왕국의 상승세는 여로보암 2세 에게 그대로 이어짐 (역사상 최고의 번영기)

- 근본적 이유 : 아람의 세력이 현저하게 쇠퇴하고 앗시리아가 기원전 796년 시리아 지역을 침공한 이후 내부혼란으로 서진(西進)정책이 잠시 주춤하게 된 덕분

여로보암 2세

- 국경 지대를 회복하여 영토를 안전하게 함(왕하14:25)

- 국제 무역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여, 경제가 활성화 될 수 있는 기반 마련

3) 경제적 부흥과 사회 정의의 부재

여로보암 2세 시대

- 다시 활발해진 국제 무역은 백성들에게 부의 축적을 가능케 함

- 교역로의 확보를 통해 가능해 진 무역 활동으로 획득한 경제적 이득

오랫동안의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도시들의 성벽 수리, 재 정돈, 요새화하는데 사용

- 일부 도시들의 상당한 인구 증가

도성의 크기 자체가 확장. 경우에 따라서는 주거지가 성벽 밖 주변으로 퍼져나감

사치품

- 여로보암 2세 시대의 경제적 상황을 가장 잘 전해주는 증거물

- 사마리아에서 발굴된 상아 조각품 당시의 상아 세공기술의 정교함과 화려함.

- 사마리아 왕궁 터에서 발굴된 엄청난 양의 상아 당시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부의 모습

- 호화로운 생활자들의 향락 욕망이 심각해짐 아모스의 신랄한 비판

도기류

- 페니키아로부터 수입된 도기류들

- 북 왕국의 도시 하솔에서 발굴된 도기류들 중에는 약 10% 정도의 것이 페니키아산

페니키아와 북 왕국 사이에 무역이 매우 활발 (경제 발전과 부흥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

사회정의의 부재

- 아모스는 시골에 지은 화려한 별장에서 펼쳐지는 사마리아 부자들의 사치스러운 식사와 술 자리에서 벌어지는 쾌락적인 삶의 모습을 비판

- 영토 확장과 경제적 번영이 북 왕국을 정의롭고 공의로운 사회로 이끌지 못함

-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이 당하는 고난과 아픔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음.

여로보암 2세에 대한 아모스의 평가

1) 여로보암 2세가 이룩한 경제적 부유함이 오히려 백성들을 탐욕스러운 죄악으로 이끔

2) “사회의 공법과 정의”(암5:7)의 부재는 결국 왕국의 파멸로 이끌 결정적 원인이 됨

3) 북 왕국의 상류층이 사회의 기본적인 가치 체계의 질서를 붕괴

4) 사회 계층간 유대 관계의 파괴가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할 것임을 모르고 있는 것에 비판

Ⅲ. 나가는 말

기원전 9세기 후반부

- 보수적인 입장에 서서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야웨 종교 전통을 고수하는 대신에 새롭고 현대적인 모든 발전을 거부한 예후왕조 (국제적 외교 관계고립, 정치적 쇠퇴)

- 평화로운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 않음

- 앗시리아와 하사엘의 아람 국가는 끊임없이 예후 왕조를 괴롭힘. 예후가 혁명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하사엘의 최대 원수였던 앗시리아에 항복함으로써 예후와 하사엘의 관계는 어려워짐

- 북 왕국의 이웃에 있던 작은 민족들(블레셋, 암몬)조차도 아람의 성공적인 침략에 고무되어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

- 하지만 외세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소유하지 못한 허약한 정권이었던 예후 왕조

페니키아 해안 도시들, 유다와의 관계에서도 우호적인 관계들이 중단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의 시대에까지 상황은 호전되지 않음

이사야의 평가 : 북 왕국을 향한 주변국들의 공격을 하나님의 심판 행위로 간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르신의 대적을 일으켜 그를 치게 하시며 그 원수들을 격동시키리니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그들이 그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사9:11f).

기원전 8세기 전반부

- 요아스 시대에 이르러 북 왕국의 운명은 반전

- 다메섹과 남 유다와의 계속된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북 왕국은 재건 될 수 있는 토대 마련

- 이러한 상승세는 여로보암 2세 시대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함

- 앗시리아와 아람의 세력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일시적으로나마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안정

- 그러나 사회적인 정의와 공의의 질서를 세우지 못했으며, 가진 자들과 높은 자들은 오히려 사회 적인 불의를 일삼고 가난한 자들과 같은 사회적인 약자들을 돌보지 못함

아모스의 경고 : 이것이 바로 북 왕국이 새롭게 잡은 역사의 기회를 놓치고 만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 말았음을 경고

새로운 민족 번영의 기회를 잡았지만, 다시 앗시리아라는 무시무시한 세력 앞에 무릎을 꿇는 역사 적 비극을 경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