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후왕조의 역사적 의의
발제
: 4122068 최진숙
예후왕조의 역사적 의의
발제
: 4122068 최진
Ⅰ. 들어가는 말
Ⅱ. 예후 왕조 시대의 역사적 상황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황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황
Ⅲ. 나가는 말
Ⅰ. 들어가는 말
Ⅰ. 들어가는
- 오므리 왕조의 이원적(二元的) 종교 체제 반대하여 유혈군사혁명
- 오므리 왕조에 속한 자들 살해, 사마리아에 있던 바알성소 파괴
- 엘리사를 중심으로 한 예언자 그룹과 레갑 족속과 같은 신실한 야웨
종교의 추종자들의 적극적인 지원 받아 강력한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리는데 성공
- 오므리 왕조에 의해 추진되었던 이스라엘의 대내외적 정치 노선을 완전히
버림
예후 . . .
예후 . . .
“야웨를 위한 열심”(왕하10:16)
⇒
북 왕국의 외교적 고립
주변 국가들에게 침공당할 위험성 가중됨
외교적 긴장 관계의 형성과 경제적 번영의 상실을 초래
(상당한 정치적 희생)
결과
결
- 파국을 향해 치닫게 되고 계속적인 왕들의 암살 사건으로
인해 매우 불안정한 상태
- 결국 기원전 722년에 동쪽으로부터 밀려온 강력한 앗시리
아의 군대에 의해 멸망
예후 왕조가 무너진 이후의 북 왕국
예후 왕조가 무너진 이후의 북 왕
⇒ 이로써 북 왕국은 여로보암에 의해 건국된 이후 200여 년
동안 지속되다가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됨.
“야웨 그리고 바알” 정책의 포기
⇒ 외교적 긴장관계 형성과 경제적 번영의 상실 초래
Ⅱ .예후왕조시대의
역사적 상황
Ⅱ .예후왕조시대의
북 왕국 역사 중 절반의 기간을 다스렸던 예후 왕조.
하지만 통치자들에 대한 정보가 비교적 빈약함
Ⅱ. 예후 왕조 시대의 역사적 상황
Ⅱ. 예후 왕조 시대의 역사적 상
- 예후(28년) – (혁명의 진행과 관련된 자세한 보도(왕하9:1-10:31)를 제외)
하사엘과의 전쟁에 관한 짧은 보도와 그의 죽음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전부
- 여호아하스(16년) – 아홉 절 (왕하 13:1-9)
- 요아스(15년) – 네 절 (왕하13:10-13)
- 여로보암 2세(40년) - 일곱 절(왕하14:23-29)
* 북 왕국을 역사상 가장 번영된 국가로 만든 사람
⇒
이유
: 신명기사가는 기원전 722년에 일어난 사마리아의
패망사건의 원인을 규명하려는데 우선적인 관심. 그 해답을
부정적인 역사 기록의 틀 안에서 찾아내려고 시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열왕기서에 언급된 제한된 기록은 예후 왕조 시대의
사회적인 상황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음.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
1. 기원전 9
- 예후 혁명의 근본적인 의도가 순수한 야웨 종교의 회복임과 동시에 바알
제의의 멸절이었기 때문에 두로와의 동맹 관계가 파괴되는 것은 당연한 일
- 예후 왕조의 대외 정책에 극심한 손해를 의미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황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
1) 두로, 유다와의 동맹 단절
◈ 두로 - 북 왕국에 바알 제의를 유입시킨 이세벨의 고향
오므리 왕조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황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
예후 왕조
두로와의 절친한 관계
두로와의 관계파괴
상당한 부와 경제적 혜택
활발한 국제 무역활동에 제동
위대한 건축 유산
문화적 잠재력을 소유X
◈ 예후 혁명의 성공은 곧 남 유다와의 동맹 파괴로 이어짐.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황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
- 혁명을 통한 오므리 왕조의 몰락은 북 왕국과 남 왕국
사이의 긴밀한 혈연적 관계를 파괴
- 유다의 왕 아하시야는 북 왕국을 방문하였다가 예후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므깃도에서 살해를 당함(왕하9:27)
아하시야의 모친인 황태후 아달랴가 왕의 승계 가능성이 있는
다윗 왕가의 왕자들을 말살시키고 정권을 쟁취하는데 성공
- 7세의 요아스가 왕위에 등극하기 전까지 아달랴가 6년여 동안
여왕으로서의 직무 감당
- 아합 가문의 아달랴가 남 왕국을 통치하는 동안 원수인 예후와
우호적 외교관계는 불가능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황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
2) 앗시리아와 아람(하사엘)의 군사적 침략
예후가 오므리 왕조의 활발하고 개방적이었던 외교 정책을 포기함으로써
먼저 주변 국가들로부터 침공을 당할 위험성 증대됨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황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
◈ 앗시리아에 봉신국가로 전락
살만에셀 3세(기원전 859-824)는 기원전 841년(재위 18년)에
시리아 원정을 감행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황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
- 다메섹을 함락시키는 것이 침공의 첫 번째 목표
- 다메섹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함
- 대신에 그는 요단 동편의 북쪽 지역의 하우란(현재의 예벨 엣-드루즈)
산지에 있는 많은 아람 촌락 들을 약탈하는 것으로 만족
- 서쪽으로 진격하여 지중 해안의 바리라시 산지에까지 이름
- 북 왕국을 포함한 많은 지역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수 있게 됨
- 살만에셀 3세는 시리아와 팔레스틴 지역의 지배권을 과시하기 위
해 이곳에 자신의 초상 세움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황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
- 예후는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페니키아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앗시리아 왕에게 굴욕적인 정복당하며, 왕위에
등극한지 채 4년이 지나지 않아서 앗시리아의 봉신 국가로
전락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황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
* 예후 시대 이스라엘은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지 못하고
위기에 직면해 있던 허약한 왕국
◈ 아람의 하사엘의 공격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황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
- 앗시리아의 팽창이 침체 상태에 빠지게 된 후 상황이 달라짐
- 앗시리아의 공격을 끝까지 방어했던 하사엘은 예후가 살만에셀 3세에게
항복한 사건을 반앗시리아 입장에 동참하지 않은 외교적 배신행위로
간주, 보복할 준비
- 하사엘은 예후를 희생 제물로 팔레스틴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욕망을 소유
-
열왕기서의 보도
: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지는 않지만, 몇몇 구절들은 하사엘을 북 왕국에게
참담한 결과를 가져다 준 매우 두렵고 무서운 대적으로 묘사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황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
- 북 왕국의 방어선이 취약한 요단 동편 지역에서 발생
- 요단 동편의 지역들이 방화와 전쟁을 면하기 위해서는 하사엘에게 강탈금
지불 / 그렇지 않은 경우 - 방화와 약탈과 잔인한 죽음을 그 대가로 지불
⇒ 북 왕국은 이때 요단 동편 지역의 대부분을 상실 (왕하
10:33)
- 북 왕국의 침체는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 하지만 더 이상 전쟁에 참여시킬 수 있는 군사력이 존재하지 않음
(마병 50명, 병거 10승, 보병 10,000명)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황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
- 하사엘은 일부 블레셋과 유다 땅을 점령하고 해안 도로에 대한 관할권소유
- 요단 동편의 주요 교역로인 “왕의대로”의 북부를 지배
- 팔레스틴을 통과하는 상업적 왕래를 사실상
3) 작은 이웃 국가들의 군사적 침략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황
1.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상
- 블레셋은 포로로 잡은 북 왕국의 백성들을 노예로 만들어 그들을 에돔 사람들에게
매매(암1:6-8)
- 암몬도 혼란기를 틈타 얍복강 남쪽 지역에 있는 자신들의 거주지를 확장시키기
위해 길르앗을 침략하여 비인간적인 야만 행위를 저지름
1. 기원전 8세기 전반부
1. 기원전 8
기원전 8세기
세계사의 흐름에 큰 변화. 이로 인한 북 왕국의 역사도 중대한 전환점
북 왕국
기원전 9세기 후반부의 침체와 혼란에서 벗어나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과거의 영토를 회복하고, 정치와 사회는 어느 정도 안정 되찾음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황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
1) 아람의 쇠퇴와 북 왕국의 재기
◈ 아닷-니라리 3세의 출현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황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
- 앗시리아의 부흥을 이루기 위해 다시 시리아 지역을 침공한 왕
- 앗시리아의 우선 공격 대상은 시리아 지역
→ 다메섹의 압박에 괴로워하던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를 비롯한 주변의 국가들에게 희망의 메시지
(신명기사가는 북 왕국의 백성을 아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준 아닷-니라리
3세를 “구원자”라고 표현)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황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
⇒ 앗시리아가 다메섹을 지배함으로 아람은 더 이상 북 왕국을
위협하는 두려운 존재가 아님
◈ 평화의 시대는 기원전 800-750년 동안에 지속
예후 왕조의 요아스와 여로보암 2세는 그 동안의 전쟁의
혼란과 폐허에서 일어나 북 왕국을 온전한 독립국가로 만듦.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황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
⇒ 정치 경제의 번영과 부흥, 사회적 안정
2) 영토의 회복
◈ 요아스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황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
- 그의 부친 여호아하스가 빼앗겼던 요단 동편에 위치한 성읍을
아람의 벤하닷 3세로부터 회복
- 3번이나 벤하닷 3세를 물리치고 하사엘에게 강탈당한 북 왕국의
도시들을 찾아오는데 성공
- 남 왕국과의 대결에서도 큰 승리를 쟁취
(요아스는 벧세메스로 진격하여 남 왕국의 군대를 격파,
아마샤를 포로로 잡아감)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황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
- 다메섹과의 계속된 전쟁에서 승리하고 남 왕국까지
지배하게 된 북 왕국의 상승세는 여로보암 2세에게 그대로
이어짐
(역사상 최고의 번영기)
- 근본적 이유 : 아람의 세력이 현저하게 쇠퇴하고
앗시리아가 기원전 796년 시리아 지역을 침공한 이후
내부혼란으로 서진(西進)정책이 잠시 주춤하게 된 덕분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황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
◈ 여로보암 2세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황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
- 국경 지대를 회복하여 영토를 안전하게 함(왕하14:25)
(아람 지역에 대한 북 왕국의 영유권 주장 / 요단 동편 북쪽 지역에 있는 도시국가들
되찾음)
→ 여로보암 2세가 아람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음을 의미
-모압 지방에 대한 통치권 가지게 되고, 예후 시대에 상실했던 “왕의 대로”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주장하게 됨
- 국제 무역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여, 경제가 활성화 될 수 있는 기반 마련
3) 경제적 부흥과 사회 정의의 부재
◈ 여로보암 2세 시대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황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
- 다시 활발해진 국제 무역은 백성들에게 부의 축적을 가능케 함
- 교역로의 확보를 통해 가능해 진 무역 활동으로 획득한 경제적 이득
→ 오랫동안의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도시들의 성벽 수리, 재 정돈, 요새화 하는데
사용
- 일부 도시들의 상당한 인구 증가
♢ 사치품
- 여로보암 2세 시대의 경제적 상황을 가장 잘 전해주는 증거물
- 사마리아에서 발굴된 상아 조각품
- 사마리아 왕궁 터에서 발굴된 엄청난 양의 상아
- 호화로운 생활자들의 향락 욕망이 심각해짐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황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
♢ 도기류
- 페니키아로부터 수입된 도기류들
- 북 왕국의 도시 하솔에서 발굴된 도기류들 중에는 약 10% 정도의 것이
페니키아산
⇒ 페니키아와 북 왕국 사이에 무역이 매우 활발
(경제 발전과 부흥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황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
♢ 사회정의의 부재
- 아모스는 시골에 지은 화려한 별장에서 펼쳐지는 사마리아 부자들의
사치스러운 식사와 술 자리에서 벌어지는 쾌락적인 삶의 모습을 비판
- 영토 확장과 경제적 번영이 정의롭고 공의로운 사회로 이끌지 못함
-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이 당하는 고난과 아픔에 대해서는 관심없음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황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
☞ 여로보암 2세에 대한 아모스의 평가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황
2. 기원전 8세기 전반부의 상
1) 여로보암 2세가 이룩한 경제적 부유함이 오히려 백성들을 탐욕스러운
죄악으로 이끔
2) “사회의 공법과 정의”의 부재는 결국 왕국의 파멸로 이끌 결정적 원인
3) 북 왕국의 상류층이 사회의 기본적인 가치 체계의 질서붕괴
4) 사회 계층간 유대 관계의 파괴가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할 것임을 모르고
있는 것에 비판
Ⅲ. 나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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