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P문서생명존중과 생명윤리.hwp

닫기

생명존중과 생명윤리

김광태 (공주대학교 강의전담교수)

1.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의 이해

환자가 임종하는 과정에서 의료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극단적인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소위 안락사를 행하는 것과 또 하나는 보호자나 환자가 원하는 대로 끝까지 연명장치를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안락사는 문제가 되고 있지 않지만, 연명행위에 대한 집착은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1) 무의미한 연명치료(futility)의 정의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환자가 치료를 통해 더 이상 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없는 치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의 환자는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상태이며,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은 치료가 더 이상 환자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결정할 객관적인 자료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회생 가능성’ ‘의미 있는 치료여부를 판단하는 적절한 기준이 될 것인가? 실제로 의학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말을 빌면, 회생 가능성 예측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다. 법적으로는 회생가능성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둘 중의 하나의 답을 요구하지만 실제로는 100%로 두 가지를 규정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회생 가능성 무의미한 연명치료라는 규정을 하기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한편으로는 연명 가능성여부는 회생 가능성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에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의 논의에 있어서 회생 가능성과는 별도의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2)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에 대한 선진국의 제도화 과정

1976- 미국 Natural Death Act

1980- 로마교황청 - 존엄사 인정

1992- 일본의사회 - 존엄사 허용

1994- 미국개신교 - 존엄사 찬성/ 안락사 반대

1997- 미국 연방대법원 - PAS 금지

1999- 미국 의사협회(AMA)-PAS 반대

2000- 대만 - 자연사법 통과

3) 우리나라의 제도

존엄사에 대한 것은 환자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환자 자신의 가치관에 근거하여 환자와 가족들의 의논으로 이루어진 것이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다. 법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는 잘못된 것이다. 사회 복지적 측면에서는 호스피스를 통한 완화 의료제도가 더 확산되어야 하며, 의료 조직 내에서도 자율적으로 의사결정이 가능한 지침이 있어야 한다. 또한, 임종에 관련된 법 제도를 정비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이다.

무의마한 연명치료의 중단에 대한 것은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합법화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무의미한 연명치료중단을 소극적 안락사로 잘못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회생 가능성이 희박한 환자에 대한 의사들의 치료포기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법의 근본적인 취지는 회생 가능성이 희박한 환자에게 연명치료를 하지 않더라도 의사의 죄를 법적으로 묻지 않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회생 가능성이나 연명 가능성이 희박한 환자에 대한 연명치료 문제에 대해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때이다. 연명 가능성이 희박한 환자는 호스피스제도의 대상인 것이다.

4) 죽음을 위한 선언문

자신의 삶이 마지막 순간에 대한 유언으로 환자의 의사를 남겨두기 위한 문서이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결정에 대해, 우리나라 법제화안 되어 있으므로 필요시 공증절차가 필요하다.

2. 무의미한 연명치료중단에 대한 논의

인간의 생명이 회생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단지 기계장치에 의하여 무의미한 치료를 계속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헌법이 보장하는 자기결정권에 근거하여 구체적인 사정에 따라 연명치료의 중단을 요구할 수 있고, 그 경우 연명치료를 행하는 의사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근거한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 요구를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환자의 요청에 의한 의료인의 연명치료중단 행위가 현행 형법에 의하여 촉탁승낙의 살인에 해당하는 행위로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보라매 병원 사건 이후 일어난 현상처럼 중환자실에서 임종할 때까지 연명치료 장치를 부착하고 이를 떼어놓지도 못하는 상태로 유지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세브란스 김 할머니 사건과 같이 법원에 인공호흡기 제거 청구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지만, 개개의 사례들을 모두 소송 사건화하여 법원의 판단을 받게 하는 것도 매우 비현실적이며 어려운 일이다.

1)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의 의미

(1) 배경과 의미

의료 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기능인 호흡, 순환, 영양섭취 및 전해질의 균형 등을 의료인이 보조해주거나 대신 해줄 수 있게 하였다. 자발호흡이 어려운 환자는 외부에서 더 높은 압력으로 공기를 불어넣어주었다가 빼주는 양압환기가, 순환이 어려운 환자는 체외순환기가 환자의 생명을 지켜줄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예전의 기술로는 생명을 유지하지 못했던 환자들도 이제는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의료 환경의 변화에 따라 우리는 여러 상황에서 한 환자에 대한 생명유지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예전의 존엄사라는 용어에 비해 길어져서 쓰기는 불편하지만, 상당히 중립적인 새로운 용어인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이 의미를 파악하기에는 더 편리하다. 말 그대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그만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안락사와의 차이

개념적으로는 안락사는 적극적 안락사소극적 안락사로 나뉜다. 적극적 안락사는 외부인이 어떤 행동을 함(Do)으로써 환자의 생명을 중단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소극적 안락사는 외부인이 어떤 행동을 하지 않음(Undo)으로써 환자의 생명을 중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비하여 연명치료중단이란 치료의 중단만을 의미하여, 죽음은 초점이 아니다.

3) 개념적인 분류의 한계

그러나 위와 같은 구분은 모호한 면이 있다. 적극적 안락사는 죽음을 의도하고, 죽음을 유발할 행위를 하는 것이고, 소극적 안락사는 죽음을 예측하고, 죽음을 피할 수 있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인데, 연명치료 중단은 죽음과 관련 없이 치료만 중단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환자의 모든 상태를 알고 있기에 연명치료중단을 할 경우에도 자연스럽게 죽음은 예측된다. 때문에, 환자에게 고통이 될 치료를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인 소극적 안락사와 구별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실제 예를 들어보면 이러한 구분은 더욱 어려워진다.

환자의 기도를 막아 더 이상의 호흡을 불가능하게 한다.

사고로 인공호흡기의 호스가 빠졌지만, 굳이 다시 연결해주지 않는다.

환자의 기도에 이물질(가래 등)이 기도를 막아 호흡이 어려워졌을 때 이물질을 흡입하지 않아 호흡을 어렵게 한다.

산소요구량에 비해 산소공급이 부족해진 환자에게 더 이상의 산소를 공급하지 않는다. 저산소증으로 사망

자발호흡이 없는 환자에게 인공호흡기를 제거한다.

입으로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는 환자에게 위장관루(위에 구멍을 내어 밖으로 튜브를 연결해 음식물을 공급하는 통로)로 더 이상의 음식 제공을 중단한다.

어디까지가 소극적 안락사이고 어디까지가 연명치료 중단인지 구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호스의 연결이라는 새로운 연명치료는 하지 않아야 할까? 산소 공급의 중단은 오히려 호흡기 제거라는 죽음을 의도한 행위일까? 음식 제공을 하지 않은 것은 죽음을 예측하고 시행한 Undo일까? 사람에 따라 번까지를 연명치료중단으로 볼 수도, 번까지를 소극적 안락사로 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특히 번의 경우에는 오히려 적극적 안락사의 범주에 넣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모호성은 결국 우리가 환자의 생사를 예측할 수 있고 그 결과 역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기에 발생한다. 다시 말해, 선택이라는 입장에서 함(Do)은 하지 않음(Undo)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번 상황에서 호스를 연결하는 것은 우리가 환자에게 또 다른 것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호스 연결이라는 선택한 것이다. 반대로, 산소 공급을 중단하는 것은 더 이상의 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산소 공급을 안 하겠다는 선택을 한 것이다.

3.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찬반 의견

1) 무의미한 연명치료중단에 대한 논쟁

이 논란은 상당히 복잡하다. 우리나라 법률의 흐름은 다소 목적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찬성 입장을 보면 의사의 의무는 환자에게 최선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지 병을 고치는(cure)것이 아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병의 완치가 환자에게 최선의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이지만, 말기 암 환자의 경우처럼 현대 의학으로는 그 병에 대한 완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돌봐주는 것이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치료가 될 것이다. 때문에 암의 진행에 따라 환자와 의사가 가져야 하는 목표는 달라진다. 암의 초기에는 완치의 가능성이 높으므로, 완치를 목표로 불편하더라도 적극적인 치료를 해야 한다. 암의 중기에는 완치의 가능성이 낮으므로, 완치보다는 '기간의 연장'을 위해 치료를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암의 말기에는 생존기간을 늘릴 가능성도 낮고 늘더라도 그리 길지 않으므로 통증 등의 '예상되는 합병증의 감소를 위해 치료를 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환자에게 단순히 생존기간의 연장을 위해 치료를 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환자에게 단순히 생존기간의 연장을 위해 고통스러운 삶과 치료를 유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항암치료는 환자에게 수많은 부작용을 가지고 있고, 가장 흔하면서 비교적 가벼운 편인 구역감과 구토만으로도 환자는 끼니를 거르게 되고, 삶의 의욕을 잃는 경구가 많다. 게다가 이들 환자들은 대부분 중환이기에 많은 모니터와 약물이 필요하고, 환자의 상태를 수시로 검사할 의료 인력이 항상 바로 가까이에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수많은 전선과 호스들로 뒤덮여 중환자실에서 보내는 많은 일이 가족과 일반병실에서 보내는 하루 이틀보다 가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제공되는 집중적인 의료자원을 중환자실에 입원한 후에 병이 나아서 퇴원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의료 정책적으로 더 합리적인 선택이 될 것이다. 암에 대해 완치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고, 재발하지 않음이 적절한 표현이다. 만일 폐암 수술을 받고 10년동안 검사상 문제없이 살았더라도 이는 완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10년동안 재발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11년째에 척추에서 전이성 암을 발견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발하지 않은 기간이 오래될수록 대개의 경우 재발률은 현저히 낮아지기 때문에 흔히들 완치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반대 입장을 보면 말기 암 환자와 같이 남은여생에 대한 고통을 덜어주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현대 의학은 병의 진행에 의한 고통을 덜어주는 기술 역시 발전시켜 왔다. 단적인 예로, 김 할머니는 인공호흡기가 장치되어 있었을 때 우리가 충분한 양의 진통제를 사용했다면, 김 할머니가 느꼈을 고통은 굳이 호흡기를 제거하여 생명을 위협해야할 정도로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병원이나 집에서 여러 의료 기구에 의존하며 누워만 있는 삶이 무가치한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호흡근까지 약화되어 인공호흡에 의해서만 숨을 쉴 수 있고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으며, 오직 눈으로만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근 위축성측삭 경화증(ALS: 루게릭병) 환자의 경우 몸은 거의 움직이지 못하지만, 뇌 속에서의 사고는 보존된다. 그렇지만 ALS환자의 생명은 이 글을 마음대로 읽고 있는 우리들의 생명보다 하찮지 않다. ALS에 이환되었어도 세상에 큰 공헌을 하는 스티븐 호킹 박사가 우리들보다 하찮은 사람인가?

마지막으로 의료 정책적인 입장에서는 공리주의에 입각했을 경우에는 타당한 설명이 되지만, 의무론적인 입장에서는 이러한 주장은 결코 옳을 수 없게 된다. 다른 이들을 위해 연명치료를 중단하자는 말은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가망이 없는 환자의 목숨을 도구로 이용하자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2) 대립되는 윤리적 가치

(1) 무의미한(Futile) 연명 치료에서의 무의미

무의미한 연명 치료중단의 찬성과 반대의견에 뼈대를 이루는 개념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연명이 의미 있는지 혹은 무의미한지, 그래서 치료가 유의미한지를 뜻하는 말이다. 찬성 측에서는 더 이상 회복될 가망이 없는 환자의 고통스럽고, 존엄적이지 않으며, 의료분배의 입장에서는 비합리적인 치료에 의한 생명 연장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반대 측에서는 그러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생명 연장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통의 문제: 연장된 삶을 위한 고통

이 고통을 겪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존엄하게 죽게 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과 진통제, 진정제 등을 통한 통증 조절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찬성의 입장.

가치의 문제: 연장된 삶에 대한 가치

지속적인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는 가족이나 세상과 어떠한 교류도 할 수 없다. 간혹 이들이 손을 움직이거나 하품을 하기도 하며 심지어 눈물도 흘리기도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세상과의 교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반사작용에 불과하다. 때문에 이러한 삶의 가치는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반대 입장은 환자가 세상과 교류하고 인간적인 삶을 영위해야 가치 있다는 주장은 위험하며, 인간의 삶에 대한 가치에 대해 순서를 매기는 것은 불가능하며, 비윤리적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문제

의료자원 분배를 효율적으로 하는 데에 도움이 되므로 찬성하는 입장과 다른 환자를 위해 특정 환자를 희생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입장이 대립된다. 사실 국가 전체적으로 봤을 때에는 찬성 측 의견이 더 합리적이다. 말기 암 환자에 대해 최대한의 치료를 하다 보면 새로 나오는 값비싼 신약들도 사용해야 하지만, 생명유지 장치만으로도 많은 돈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차피 사형당할 사형수를 장기이식의 공여자(donor)로 사용하는 것은 윤리적인가? 혹은 그들을 일제의 747부대의 마루타처럼 생체실험의 대상으로 사용하는 것은 괜찮은가? 그렇다면 뇌사자나 식물인간들을 장기이식의 공여자로 사용하거나, 다른 이들의 의료자원 이용을 위해 죽이는 것은 윤리적일까?

실제 환경에서는 이 마지막 문제가 가장 핵심적이면서도 까다로운 부분이다. 특히 의료비가 보장되지 않는 미국이나 일부를 환자가 부담해야하는 우리나라와 같은 나라에서는 중환자에 대한 생명유지가 그 가족에 심각한 부담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이점은 제3자가 보기에는 괘씸해보일 수도 있지만, 당사자의 경우에는 경제적 문제에 뿐만 아니라, 죄책감과 그에 대한 방어기제를 필요로 해 심각한 정신적인 고통을 안겨준다.

(2) 자기결정권(Patient Autonomy)

찬성과 반대의 입장에 자기결정권이 들어갈 경우 논점이 복잡해진다.

환자가 치료중단을 요구한 경우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하므로 치료를 중단해야 한다는 입장과 사실상 자살혹은 안락사를 요구한 환자의 말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반대 입장이 있다.

가역적으로 의식을 잃은 환자

환자가 의식이 없는 경우, 환자가 사전의료지시를 밝혀놓은 경우 자기결정권을 존중해 이에 따라야 한다는 입장과 우선 의식을 돌려놓고 나서 다시 물어봐도 된다는 입장이 대립하며, 사전의료지시가 없는 경우 대리결정권자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보호한다는 입장과 마찬가지로 환자의 의식을 돌려놓는 것이 우선 이라는 입장이 대립한다.

비가역적으로 의식을 잃은 환자

비가역 즉 의식이 돌아올 가능성이 없는 경우라도 환자가 사전의료지시를 밝혀놓은 경우 이를 따를 것이지, 생명가치의 존중과 의료적 오판을 방지하기 위해 따르지 않을 것인지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필수적이다. 심정지가 발생한 지 하루가 지난 환장에게 심폐소생술을 통해 돌아올(정말 희박한)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우리는 심폐소생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질환자체로도 이미 많은 통증과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에게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도 모르는 항암제를 투여하는 것은 더 큰 고통을 줄뿐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디까지를 허용할지 어디까지는 제한할지에 대해서는 모호해진다. 명확하고도 합리적인 기준을 세우지 못할 경우에는 미끄러운 경사길 이론에 의해 그 경계선에 있는 상황들이 잘못 처리되고, 이러한 관행이 계속되어 우리들의 도덕적인 잣대를 무디게 하면 다시 새로운 경계선에 있는 것이 잘못 처리되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더 이상의 가망이 없는 환자의 삶에 대한 가치문제

우리는 생명가치의 윤리적 존중과 법률적 문제 그리고 경제적 문제 등 다양한 관계 속에서 생명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선천적으로 무뇌증이나 다운증후군과 같은 기형아의 경우 낙태를 허용하는 것이 옳은지? 우리의 실험이 아니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배아줄기세포의 경우 생명과 관련하여 어떤 가치를 지니며, 또 어느 선에서 허용하여야 하는지? 과거 중국에서 논란이 되어 왔던 사형수들에 대한 장기매매와 같이 어차피 죽을 생명에 대한 생체실험이나 장기매매와 같은 신체 일부에 대한 문제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 특히 동물에 대한 동물 실험으로 해마다 수천의 생명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어디까지 허용하도록 납득하는 것이 우리의 양심에 따른 생명존종의 문제인가는 두고두고 고뇌하여야 할 새로운 생명윤리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