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조직신학연구 2019-1 김동건현대신학의흐름.hwp
20세기 신학 유장환 교수
(현대신학의 흐름, 김동건)
제2장 계시의 주체: 바르트
1. 생애와 변증법적 신학의 태동
바르트는 1886년 5월10일에 스위스 바젤에서 독일계 스위스 인으로 출생했다. 아버지 프리츠는 개혁교회의 목사였고, 바르트는 아버지를 따라 독일의 루터교회가 아닌 개혁교회의 신학전통에서 성장했다. 18세가 되던 1904년에 아버지의 권고로 베른대학에서 신학을 시작했다. 바르트는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접하고 깊이 빠져든다. 베를린대학으로 옮겨 자유주의 신학의 대가들을 만난다. 1911-1912년은 자펜빌에서의 목회기간이다. 이시기는 바르트에게 중요하고 많은 사건이 일어난 기간이다. 이시기에 자기 자신의 신학을 형성하게 된다. 바르트는 1915년에 사회민주당에 당원으로 입회했다. 바르트는 설교의 문제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의 고민에 빠진다. 이 결과물이 바로 그의 로마서강해이다. 그후 바르트가 아끼는 책 안셀름: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 출판되었다. 바르트는 1932-1967년에 교회 교의학을 집필한다. 이 책은 4부에 13권으로 구성된 약9,185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양인데 완성되지는 못했다. 그후 바젤대학을 은퇴하였다. 1968년 12월10일 새벽 그는 82세를 일기로 주님 곁으로 떠났다.
2. 바르트 신학의 개요
1) 하르낙과의 논쟁
1922년에 『로마서 강해』 2판의 출판과 함께 1923년의 하르낙과의 공개토론은 바르트의 초기 신학사상을 알게 해주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시기적으로 『로마서 강해』 2판이 일 년 빠르지만 하르낙과의 공개토론에서 바르트 사상의 특징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살펴본다. 바르트는 1920년 아라우에서 “성서적 질문, 통찰과 전망”이라는 강연을 했는데 하르낙은 이 강연에 동의하지 못했다. 하르낙은 바르트가 신학을 설교를 위한 것으로 종속시키고 학문적 신학을 거부한다고 믿었다. 하르낙은 “학문적 신학을 경멸하는 자들에 대한 15개 질문”이라는 제목의 논쟁 글을 실고 이에 바르트는 “하르낙 교수에게 주는 15개 답변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하르낙의 질문 15개 중에는 몇가지 강조가 드러난다. 그 특징을 네 내 주제로 나누어 해석해 보면 첫째, 하르낙은 성서의 진리, 혹은 계사기 역사적 지식과 비판적 숙고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성서에 드러난 계시와 내용들이 서로 일치되지 않기 때문에 비판적 연구가 필요하다. 하르낙 질문 중에 역사적 지식과 비판적 숙고와 연관된 항목은 최소 5개 항목(1, 2, 3, 9, 11항)에 걸쳐 있다. 하르낙은 역사적 지식 없이 성서를 이해하고 설교를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로서 3항에서 “역사적 지식과 비판적 숙고 없이 어떻게 설교가 있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서 자유주의 신학이 역사비판적 신학방법 위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바르트는 역사적 지식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 바르트에게 역사적 지식과 비판적 사고는 성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저해가 될 수도 있는 가능성들일 뿐이다. 성서는 인간 정신의 기능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믿음으로 알려진다. 신인식은 “하늘과 땅이 다르듯이” 신앙의 각성과는 다르며 신앙은 설교에서 오고 설교는 그리스도에게서 온다. 따라서 “신학의 과제는 설교의 과제와 동일하다.” 여기서 바르트는 역사비평 방법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보인다. 하지만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계시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며 나아가 신 인식과 신앙적 체험의 차이를 분명하게 하였다. 그리고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은 신학을 단순하게 하나의 학문으로 보지 않는 다는 것이다. 신학은 교회를 위한 학문이고 교회는 말씀 선포가 그 핵심이라는 입장이 분명하다. 그의 이런 점은 『교회 교의학』 서문에서 “실질적으로 나는 교의학은 애초부터 자유로운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교의학은 교회의 영역에 매여 있으며, 거기에서만 가능하고 의미 있는 학문이다.” 라고 밝혔다.
둘째, 인간의 이성과 인간 경험에 대한 신학적 차이이다. 하르낙은 인간적 체험이 주관화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기준은 역사적인 지식이 될 수도 있다. 하르낙은 신학적 작업뿐만 아니라 어떤 학문적 확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성의 능력을 강조한다. 여기서 하르낙은 상당히 거친 표현을 사용한다. “만일 이 같은 대담무쌍한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무엇을 각오해야 하는거? 이제 다시 영지주의 심령술이 그 잔해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이 질문에 바르트의 대답은 두 가지로 바르트 신학의 특징이 나타나는 상당히 복잡한 내용을 먼저 보면, 종교적 전승이 비판적 이성과 반드시 충돌되지는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자신을 영지주의적 - 영지주의(靈知主意) 혹은 그노시스주의(gnosis 主意)는 고대 그리스어로 ‘앎, 깨달음, 비밀스런 지식을 소유한 사람’ 등의 뜻을 가진 γνωσις(gnosis)에서 비롯된 용어로 1세기 말에 기독교 및 지중해 연안의 토속종교들의 신학적 이론과 사상을 절충하여 이루어진 하나의 종교적 경향 혹은 주의를 일컫는다. 영지주의라는 말은 영적인 지식, 영적인 깨달음이라는 뜻으로 영지주의자들은 육체는 악하다는 신념에 따라 예수의 인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는 예수가 인간의 탈을 썼을 뿐,인간이 아니라는 가현설을 주장하였다. 구원이란 바로 예수와 같은 빛의 사자에 의해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는 신념 체계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교육이나 경험적 관찰이 아닌 신적 계시에 의해 얻어지는 비밀스런 지식, 즉 영지를 중시해 내면의 준비 과정과 자아 성찰, 변화를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 으로 비유한 것에 대해 못마땅해 한다. 신에 대한 인간적 체험이 역사적 판단에 맡겨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신 인식이 비판적 숙고에 달려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비판적 성찰 없이 신이라 부른 것과 인간의 진선미의 결합이 가능하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인간의 이러한 신 경험은 인간에게 위기이며, 이 위기를 넘어서서 진정한 인간성에 대한 긍정이 나타난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 구너면은 우리가 진선미라고 부르는 것과 신 사이를 결합시킨다. 그러나 이 결합이 ‘칸막이 벽’이며 신적인 ‘위기’이다. 이 위기에 근거해서야 비로소 진선미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 부분은 매우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잘 드러나지 않지만, 바르트 신학의 변증법적인 측면이 나타난다. 여기서 신과 인간의 질적인 차이를 염두해 두고 있다. 이 점에서 하르낙과 바르트는 서로 얼마나 다른 주장을 하는지 극명하게 나타난다.
두 번째로 단순한 대답을 보면 그는 빌립보서 4:7을 인용 하면서, “그 분은 모든 이성보다 더 높다.”라고 간단하게 답변한다.
셋째, 하르낙은 신과 인간의 대립을 지양하고 신의 사랑과 인간의 이웃 사랑을 결합니다. 같은 관점에서 하르낙은 신과 세계가 대립되면 신을 향한 교육이 불가능할 것을 우려한다. 이 주장에는 자유주의 신학의 일면인 자연신학적 측면이 드러난다. 그는 신과 인간, 신과 세계의 유사성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인간과 세계의 연장 속에서 신을 찾는다. 이 부분의 대한 바르트의 주장은 신과 인간의 사랑을 나란히 놓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신과 인간을 나란히 놓으려는 시도가 바로 신과 인간이 대립관계임을 보여준다.(존재 유비에 대한 반대)
넷째, 마지막으로 비교적 단순한 논쟁처럼 보이지만, 하르낙과 바르트의 기독론의 방향성이 드러나는 부분으로 하르낙은 역사적 연구가 뒷받침되지 않는 그리스도는 몽상적이 그리스도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이에 바르트는 계시에 의한 그리스도 인식 외에는 그리스도에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기독론에 대한 방법론의 차이가 드러난다. 기독론에 접근하는 근본적인 토대가 역사비평학인지, 아니면 계시인지가 분명히 대조되어 나타난다. 기독론에 접근하는 근본적인 토대가 역사비평학인지, 계시인지가 분명히 대조되어 나타난다.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시의 기독론 연구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8C 라이마루스에 의해 격발되어 19세기를 거쳐 20세기 초까지 이어진 ‘예수 생애 운동’은 신학 세계를 엄청난 열정으로 몰아넣었다.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역사비평 방법에 의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바르트가 “육신으로는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는 말로서 자신의 입장을 표방한 것은 당시의 학문적 세계의 흐름에서 볼 때 대단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르낙과 바르트의 공개서한을 통한 논쟁은 아무런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끝났지만 이 둘의 차이를 통해 하르낙과 바르트의 신학적 입각점이 더욱 선명히 드러나는 성과는 거두었다.
3) 안셀름 연구
안셀름연구는 바르트사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안셀름에 많은 관심과 사랑을 그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안셀름이 신의 존재 증명을 논한 (프로스로기온)에 대한 연구를 통해 바르트는 1931년에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이라는 안셀름 자신이 사용한 표현을 빌어서 「안셀름: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바르트는 안셀름 연구를 통해 「교회 교의학」을 쓸 수 있는 신학적 관점과 방법론을 찾게 된다. 바르트는 1958년에 「안셀름: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2판의 서문에서 이 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에 대한 비평가들이 자신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 안 되는 이 책의 중요성을 알아채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바르트는 이 책이 「교회 교의학」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할 뿐 아니라, 자신의 전 사상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열쇠”라고 말한다.
바르트는 안셀름 연구를 통해 신앙이 어떻게 비합리적이지 않고 합리적 성격을 가지며 신과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한 토대를 놓는다. 바르트가 공격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종교적 지식은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지 않다는 확신 위에 서 있었다. 따라서 신학은 성서의 다양한 개념과 상징적 표현을 잘 해석하여 동시대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신학은 철학, 역사적 지식, 윤리 등의 다양한 학문과 연합한다. 성서에 나오는 종교적 경험도 빈 진공 속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므로 역사적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역사적 성찰의 결과는 과학적 학문의 여러 형식과 기준에 따라 재해석될 수 있다. 연구의 결과도 합리적인 것으로 역시 인식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앞의 하르낙과의 논쟁에서 드러난 것처럼, 바르트는 연구의 대상인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과 같은 범주에서 ‘합리성’으로 인식되는 것에 동의하지 못했던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바르트의 고민이 생겨났고,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신앙은 정말 불합리한 것이며 이해를 거부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안셀름: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안셀름 연구서이다. 이 책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학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기존의 생각을 견지한다. 왜냐하면 바르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인간에게 들려지는 메시지(message)의 이중적인 성격을 가진다. 따라서 메시지는 선포되고 인식될 수 있는 합리적인 것을 가진다. 이 합리성의 토대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말씀 스스로가 가지는 합리성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의 합리성으로 인해 합리적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을 궁극적인 진리, 즉 ‘진리의 합리성’(ratio veritatis)으로 보았다. 다른 모든 합리성은 진리의 합리성에 근거하는 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 신에 대한 인식을 가질 수는 없지만, 일단 하나님으로부터 진리가 계시되면 인간은 합리성을 가지고 신에 대한 인식을 가질 수 있다. 이간은 말씀에 대한 인식 능력을 창조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말씀이 인간에게 계시가 되면 인간에 의하지 않고 인식되지 않는다. 이점에서 인간은 결코 수동적이고 약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바르트는 이것을 ‘존재적 필연성’(ontic necessity)과 ‘인식의 필연성’(nietic necessity)으로 설명한다. 존재적 필연성은 신앙의 대상이 다른 어떤 존재가 될 수 없는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신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알릴 때 이 대상이 다른 것으로 계시될 수 없다. 인식의 필연성은 인식의 대상을 다르게 인식할 수 없는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계시에 의해 신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면 그 대상에 대해 다른 인식이 불가능하다. 신앙의 대상에 대한 ‘합리적’ 지식은 신앙의 대상으로 오는 것이며, 결구 이것은 궁극적 진리인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존재적 필연성은 이식을 필연성에 선행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격적인 말씀이며, 그 자신의 신성에 대한 이해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이해의 가능성이 신학자의 연구의 결과로 얻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이해의 가능성은 신학자의 연구의 결과로 얻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이해의 가능성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고 이해하도록 하는 말씀의 능력에 근거한다.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되었다는 말도 하나님이 인간의 용어로 인간의 차원에서 자신이 이해될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주셨음을 뜻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의 근거이다. 하나님이 인식될 수 있도록 자신을 허락하지 않으면 신앙은 어떤 것도 인식할 없다. 신앙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신앙은 본질적으로 이해를 추구한다.
여기로 신학은 신앙과 연관해 자신의 역할을 가진다. 신학은 신앙이 일으킨 이해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고 신앙에 내재된 말씀을 인간에게 새롭게 만나게 한다. 그러므로 신앙은 모호하거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우리에게 격발된 매우 구체적인 사건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내어줌으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는 자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신앙은 하나님에 의하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고, 신비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는 말씀이 들려지고 인식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신앙은 결코 비논리적이거나 비합리적일 수 없다. 신앙의 행위는 근본적으로 인식적이고 개념적이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말씀은 설고를 통해 인간에게 선포되고 들려짐으로 신앙의 대상이 된다. 이를 통해 말씀과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인간의 표현과 개념에 의해 묘사될 수 있다. 물론 이때 신앙은 우리에게 들려진 것은 믿는 행위가 아니고, 설교를 통해 우리에게 매개된 진리의 실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바르트는 안셀름 연구를 통해 말씀이 가지는 합리성을 찾고, 신앙과 이성의 간격을 놓을 교두보를 마련하다. 바르트의 사상에서 이 시기를 기점으로 결정적인 변화의 시기로 볼 수 있다. 안셀름 연구는 기의 초기 신학적 방법론이었던 변증법적 사고에서 교회 교의학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바르트 신학을 전기와 후기로 나눈다면 바르트 연구가들 사이에는 이 시점을 전기와 후기의 분기점으로 보거나, 혹은 이 시기를 바르트 신학의 결정적인 변화의 시점으로 본다.
4) 바르멘 신학선언과 자연신학 논쟁
1934년은 바르트의 삶에 중요한 해이며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첫째는 “바르멘 신학선언”이며 둘째는 오랜 친구인 브루너와 펼친 자연신학 논쟁이다.
1933년은 히틀러(A. Hitler)의 제 3제국이 출현하면서 본격적인 나치독재와 전쟁준비가 시작되던 해였다. 히틀러는 “제국은 교회를 돕는다.”는 입장을 표방하면서 독일 교회를 제국의 통제 아래 두려고 했다. 1933년 9월27일에는 독일 교회 총회가 뭘러(L. Miiller)를 국가주교로 선출했고 뭘러는 히틀러 정책에 동조하며 민족주의를 북돋우고 유대인 박해를 위한 신학적 토대를 마련한다.
당시 독일 교회는 민족적 배타성과 이익을 위해 성서의 윤리, 평화, 생명, 사랑, 형제애 같은 예수의 가르침은 생각하지 못하고 1993-1994년 사이에 여러 차례 성명을 바표하여 히틀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그 성명서의 내용은 “그리스도가 히틀러를 통해 우리에게 왔다.”(1933년8월) “히틀러를 통해 참 도움이며 구원자인 하나님, 곧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그의 능력을 나타낸다.”(1934년3월) “히틀러가 독일 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성령의 길이다.”(1934년3월)
당시 개신교 고백 공동체는 니묄러(M. Niemoller)목사의 지도로 1934년5월29-30일에 바르멘에서 독일 고백교회의 첫 총회을 열고 신학 선언문을 발표하기 위해 4명의 기초위원을 선정했다. 선언문 작성을 위해 1934년 5월 15-16일에 4인 위원들은 모이기로 했으나 자쎄는 이날 아파서 오지 못하고 3인이 모였다. 므라이트와 아스무센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안 바르트가 초안을 작성하고 아스무센의 감동적인 연설에 힘입어 138명의 대표로부터 만장일치의 지지를 얻어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선언인 “바르멘 신학선언”이 나오게 된다.
제1항 중에서:(요 14:6,10:19)... 성서에 증언된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사건들, 세력들, 형상들, 진리들을 설교의 자료로 사용해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 것처럼 전하는 잘못된 교리를 우리는 배격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계시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상이 드러난다.
제2항 중에서 :(고전1:30)... 우리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고 다른 주구너자에게 속하는 영역이, 즉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와 성화가 필요 없는 영역이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그릇된 교리를 배격한다.
제3항중에서:(엡4:15-16)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해 말씀과 성례에서 주로서 현재적으로 행하는 형제들의 공동체이다. 직접적으로는 당시 제국 교회가 교회를 마음대로 나치제국의 수족으로 전락시킨 것에 대한 신락한 비판이며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것” 이라는 확고한 주장을 한다. 이것은 우상숭배이다.
제4항 중에서:(마20:25-26)... 교회의 직제는 위계체계가 아니고 공동체 전체에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는 것에있다. 제3항에 이어 여기서 바르트는 교회의 직무와 그 유기적 성경을 말한다.
제5항 중에서 :(벧전2:17)... 국가가 그의 특수한 사명을 넘어서서 인간 삶의 유일하고 전체죽의적 질서가 될 수 있고 교회의 사명까지도 성취할 수 있다는 잘못된 교리를 우리는 배격한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밝히는 주요한 자료이다.
제6항 중에서 :(마28:20,딤후2:9)... 교회의 사명은 설교와 성례전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메시지를 모든 민족에게 전하는 데 있다. 교회가 인간의 오만함 속에서 주님의 말씀과 행한 일을 임의로 다른 어떤 욕구, 목적, 혹은 계획과 결함시킬 수 있다는 잘못된 교리를 우리는 배격한다.
바르트가 제시한 여섯 개 항목의 선언문을 통해 계시 이해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의식과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주권을 주장했고 하나님의 계시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발견되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바르멘 신학선언을 작성한 같은 해 1934년에 바르트는 오랜 친구인 브루너와 자연신학 논쟁을 벌이게 된다. 그가 이 논쟁에서 나타난 일반적인 직제나 형식을 통한 신 인식을 격렬하게 반대한 것은 바로 자연신학적 요소에 대한 경계에서 나온 것임을 지적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와 같이 다양한 종교 형태가 공존하는 곳에서 특히 자연계시와 자연신학에 대한 문제를 고려하는 것은 뜻깊은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유사한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역사에 귀 기울여 배우는 자세또한 우리에게는 필요한 작업이라 여겨진다. 또한 기득권자들의 자기 합리화의 신학이념적 도구로써의 자연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비판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오늘 우리에게도 설득력 있는 것으로 들린다. 그 비판은 기복종교로서의 기독교의 모습이 특징적인 우리나라에서 또한 하나님을 각자의 취향에 따라 물 적, 정신적 욕구 충족의 대상으로 우상화하려드는 우리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복음을 이해하게하는 하나의 지침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5) 교회 교의학
『교회 교의학』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고, 각 부 아래에 몇 개씩의 장으로 나누어진다.
제1부는 “하나님 말씀론” 서론과 그 아래에 1장 하나님의 말씀, 2장 하나님의 계시,3장 성서, 4장 교회의 선포가 다루어 진다. 제2부는 “신론”이며, 그 아래로 5장 신의 지식, 6장 하나님의 실재, 7장 하나님의 선택, 8장 하나님의 명령이 다루어진다. 제2부에서는 신론이 집중적으로 다루어지며 제1부에서 다루던 신론과 연속적이다. 제3부는 “창조론”이며 9장 창조사역, 10장 피조물, 11장 창조와 그의 피조물, 12장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이 다루어진다. 10장의 피조물은 인간에 집중해 있으며 바르트의 “인간론” 부분이다. 제4부는 “화해론”인데 13장 화해론의 내용과 문제들, 14장 종으로서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 15장 주인으로서의 종:예수 그리스도, 16장 참된 증인: 예수 그리스도로 구성되어 있고, 마지막에 세례론이 첨부 되어 있다.
『교회 교의학』의 큰 주제는 “하나님 말씀론”, “신론”, “창조론”, “화해론”이라는 네 개로 나누어져 있지만, 이들은 서로 잘 연결되어 있다. 『교회 교의학』은 대단히 조직적으로 쓰인 책이다. 하지만 논지의 전개는 연역적이 아니고 논제식 구성이라는 오래된 전통적 방법에 의해 진행된다. 그러므로 앞장을 이해해지 않고 어느장을 시작으로 읽어도 상관은 없다.
『교회 교의학』은 네 주제가 하나의 동일한 모티브로 짜여 있는데 이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시간과 역사 속에서 인간을 위해 오셨다는 것, 성육신은 하나님의 현실화라는 것, 그리고 그 자신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원 계약자라는 것, 이 계약 속에 모든 우주와 구원의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 십자가라는 신적인 부정과 부활이라는 신적인 긍정에 의해 인간의 하나님과의 소외가 극복된다는 것,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이 『교회 교의학』에 토대로 놓여 있다. 따라서 하나의 특징은 바로 ‘기독론 집중’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교회 교의학』이 가지는 놀라운 점은 바르트가 이러한 방법으로 전통적인 정통 신앙의 모든 주요 주제들을 다시 재건하고 매우 신선하게 재해석 했다는 점이다.
3. 계시의 초월성
1) 설교와 성서
바르트의 고민은 무엇을 설교할 것이며, 이 설교는 인간의 언어로 전해야 하는데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지를, 또한 성서에서 말씀하는 내용과 이 세상을 어떻게 연결시킬까? 에 대한 물음과 고민에 빠진다.
설교를 하기위해서는 먼저 성서의 본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한 해석학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 해석에 있어서 바르트는 단순히 인간의 기교와 언어적 훈련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바르트는 당시의 지배적인 성서 석의 방법론과 자유주의 신학과의 단절을 선언하며 새로운 눈으로 성서를 보기 시작했고 하나의 큰 발견을 하게 된다. 그것은 성서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길이 있고, 성서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기록해 둔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바르트는 생각의 전환이후 성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과정, 그리고 이 세상을 섭리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일과 뜻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성서의 시각적 전환이후 바르트는 성서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라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 말씀은 계시이며 이 계시는 인간이 조절할 수 없는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이다. 성서의 모든 사건과 내용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라는 사실을 지적하며 인간의 철학과 지혜, 인간의 사상과 문화, 여타한 종교적 심성이 아닌,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2) 전적 타자
바르트는 성서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말씀은 계시로서 인간의 조정을 넘어선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인간의 이성과 판단에 맡겨지게 되는 우려를 낳게 되는 역사비평론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는 인간과 하나님의 사이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았고 이를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라는 유명한 명제로 표현하였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이지 인간과 유사한 어떤 존재가 아니며 하나님은 이 세상적인 것과는 다른 어떤 존재이며, 인간과도 전혀 다른 이질적인 어떤 존재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성서에서 하나님을 발견 할때 하나님은 인간에게 ‘전적타자’이며 절대적인 다른 존재이다.
절대적인 다른 존재, 전적타자는 인간과의 무한한 질적 차이로 인식했다. 하나님과 인간은 같은 범주에 속하지 않는 다른 의미라는 것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하나님은 하늘에, 인간은 땅위에” 라고 주장했다. 하나님을 우리와 유사한 어떤 분이라는 모호한 생각이 아니라 그는 우리에게 전혀 낯선 자이고, 우리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그리고 이 현존하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분이며, 세상을 근원적으로 새롭게 하는 전적인 타자로 남아 있다.
전적타자의 신 인식은 신을 인간과 역사에서 찾아지는 존재로 인식한 내재주의적 신관에 결정적인 문제를 제기한 것이며, 바르트에 의해 하나님의 계시와 초월성이 새롭게 부각된다. 바르트는 하나님은 인간의 인식과 경험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 초월이란 인간 인식의 연장선에서 찾아지는 범주를 넘어선 인간과 질적으로 다른 하나님은 인간의 인식과 자연적 외연으로 만나지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3) 위기
인간 인식에서 인지되어진 신은 성서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통적으로 말해 온 참선이고 인간의 인식 속에서 만나지고 인간의 종교적 체험 속에서 일치되는 신이 아니다. 우리가 원할 때 우리에게 임하며, 우리가 필요로 할 때 적당한 위로를 주는 인간적인 신이 아니다. 그는 전혀 다른 존재자인 전적 타자이며 이러한 전적타자는 우리가 위에서 생각한 것과는 달리 인간에게 경고하고 이 세상으로 엄습해 오고 있으며 죄로 물든 인간에게는 심판뿐이 기다리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오면 인간의 본질이 계시의 빛 아래서 적나라게 드러나게 되며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바르트가 말하는 실존의 위기이다.
① 인간의 위기
하나님의 말씀에 감추어진 인간의 본질이 하나님의 계시의 빛 아래에서 인간의 지, 정, 의에 바탕을 둔 어떠한 신 인식도 우상임을, 또한 인간의 종교적 감정과 자연인의 한계를 여전히 가진 인간이 그 연장선상에서 만나고 체험한 신 역시 하나님이 아닌 우상임을 알게 되고 인간은 그 하나님께 부딪치며, 실패하며, 절망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는 모든 인간적인 것을 철저히 파괴시킨다. 이런 인간의 어두운 죄성과 심연, 즉 인간의 경건, 종교, 이성, 경험, 도덕성, 인격, 내면성, 이상 역시도 근본적으로 죄 아래 있으며 인간이 이 점을 간과하며 적당히 덮어두려고 할때 스스로 교만에 빠지며 인간의 어떠한 속성과 능력으로도, 혹은 그것들안에서 해결하려는 시도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인간의 경건, 종교, 이성, 경험, 도덕성, 인격, 내면성, 이상에 대해 하나님은 심판하시며 진노하시며 이런 심판아래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본질을 깨달았을 때 위기로 이어진다.
② 종교성의 위기
바르트는 계시와 종교를 구별하고 인간의 종교적 체험을 계시로 착각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바르트에게 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자신의 체험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자신의 주관적 체험의 영역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그 체험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의로운 자가 되고 자기 만족에 빠진다. 이런 현상은 인간이 계시와 종교를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려는 착각과 교만으로 보았다.
위에서 말한 인간의 종교적 체험 속의 자기만족의 상태가 되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믿음은 인간의 의가 아니다. 믿음은 인간적 태도나 신념과 무관하며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고 인간의 존재와 소유 모든 것에 대해 활동하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이 하나님의 행위는 오직 하나님의 자유 가운데 일어나는 힘이 있고 실재적인 행위이며, 인간에게 믿음은 단지 기적일 뿐이다. 라고 설명한다.
4) 주체이신 하나님
인간의 신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어떤 새로운 사물이나 객체를 인식할 때 유비(analogy)가 사용되는데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유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도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질적 단절의 관계로 파악하여 존재의 유비가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알 수 없는 신을 존재(being)인 인간을 통하여 신에게 접근할 수 있는 어떠한 길이나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유비를 반대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인간이 중심이 되어 시작한 신의 인식은 인간의 자기 속성에 의한 투사가 이루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인 이유와 둘째, 존재의 유비 이론이 인식론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비교 대상에 있어서 양적인 차이만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존재의 유비를‘적그리스도의 고안’이라고 하며 강한 부정을 하였다.
하지만 바르트는 존재의 유비를 거부한 것이지, 하나님과 인간의 실제적인 관계 설정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주체가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떠한 유비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여준 계시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 유비는 인간에게서 하나님에게로 절대적으로 갈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에게서 인간인 피조물에게로 가는 것이다. 앞서 말한 계시를 통해서 이다. 이것을 그는 소통의 고리라는 뜻으로 관계의 유비(analogia relationis)라고 한다. 이것은 또한 인간 쪽에서는 오직 신앙으로만 알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라고도 한다. 이 유비의 공식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은 신앙 안에서 말씀을 인식가능하게 된다이다. 유비의 성립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적극성을 갖고 우선적으로 보여주셔야 성립이 된다. 이 사건은 과거에도 일어났으며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하나님에 의해 허락된 이 연결의 관계를 은혜라고 의미하였다. 서로 다른 방향을 가진 두 평행선은 하나님의 자발성으로 서로의 유일한 유비를 갖고 마주보는 평행선을 이루게 된다. 이 유비의 확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창조자와 피조세계 전체의 새로운 관계, 새로운 회복을 말한다.
바르트의 신론의 핵심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식되어지는 하나의 객체(an object)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그 하나님은 인간에게 탐구,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하나님은 결코 객체로 전환될 수 없는 주체(subject)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인간은 그 말씀을 들을 뿐이다. 주체로서 말씀하시는 구조는 틸리히와는 구조를 달리한다. 틸리히는 인간이 실존적인 질문을 던지면 신이 그에 대한 대답을 하였다. 유한과 무한의 상호연관으로 보았다. 질문은 반드시 인간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바르트는 말씀이 주체로서 인간에게 말씀되어지고, 이 말씀이 인간에게 위기와 물음을 던진다. 이러한 위기와 물음의 부정은 결국에는 하나님의 긍정으로 가는 과정이다. 정(thesis)과 반(antithesis)을 거쳐 합(synthesis)의 결과를 도달해 내는 것이다. 인간을 향한 사랑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저주의 길을 보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으로 인간과 사귐을 갖고 인간에 대한 합-긍정의 결과를 보여 주셨다. 이러한 정반합의 부정을 통한 긍정의 과정 또한 인간의 어떠한 요인이 작용하지 못한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인간의 실행을 통한 모순을 극복하며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라는 한쪽에서만 정과 반의 과정을 통하여 합의 과정(새로운 피조물)을 이루게 된다고 말한다.
4. 자연신학 논쟁과 은혜의 우선성
1)자연신학 논쟁 (p184~196)
1934년 오랜 친구이며 신학적 동지라고 알려진 브루너와 바르트 사이에 일어난 신학논쟁을 자연신학 논쟁이라 부른다.
이 논쟁은 표면적으로 여섯 개의 항목으로 진행되었고, 교재에서는 논쟁의 표면에 내세운 항목을 정리해서 아래의 다섯 개의 주제에 따라 각자의 신학적 입장을 살펴보았다.
브루너 |
바르트 |
|
하나님 형상 (imago Dei) |
하나님의 형상 : 형식적 형상 + 물질적 형상 인간에게 물질적 형상은 사라졌지만, 형식적 형상은 죄를 짓더라도 남아 있어 인간과 다른 피조물은 구별된다. 그리고 인간은 형식적인 면에서 주체이며 책임성이 있다고 보았다. |
인간은 구원의 측면에서 스스로 주체적이고 책임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다른 피조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
계시 |
모든 피조물에서 창조자의 영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은 피조물 속에 흔적은 남겼기에 피조물 속에서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구원에 이를 만큼 충분히 깨달을 수는 없다. |
브루너의 주장에 대해 바르트는 피조물을 통한 계시도 하나님의 계시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어떻게 이 계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반문한다. 자연을 통해 인식한 신이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
보존의 은혜 |
비록 죄가 있어도 피조세계를 유지시키는 은혜를 하나님의 ‘보존의 은혜’라고 지칭한다. 피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이 보편의 은혜는 구원의 은혜와는 구별된다. |
하나님께서 타락한 피조세계도 돌보신다는 것에 있어서 반대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 없이 행해지는 은혜라는 것은 반대한다. 피조세계가 보존되는 것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벗어나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
규례 |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결혼이나 국가에 대한 규례들은 하나님의 보존의 은혜에 속하며, 이러한 규례는 일반계시로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 수 있다고 보았다. |
규례는 인간의 본능과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접촉점’ |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고, 이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능력을 갖는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주체적인 능력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할 수 있다는 형식적인 가능성을 의미한다. |
바르트는 브루너가 형식적 형상을 수용능력으로 봄으로써 인간이 ‘구원의 접촉점’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발전하게 된 것을 지적한다. 인간에게 계시를 받아들일 수용능력은 전혀 없으며, 성령님은 어떤 접촉점도 필요치 않다고 이야기 한다. 인간은 계시를 수용 할 어떤 능력도 가지지 못하며, 말씀의 수용도 오직 은혜로 인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
브루너와 바르트의 주장 사이에 일치하는 부분은 없어 보이나, 면밀히 따져보면 상당부분 일치하거나 피차 수용 가능한 부분이 제법 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브루너는 인간이 형식적인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결코 브루너는 어디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외에 구원의 가능성을 언급한 적이 없다. 그리고 브루너는 자연신학을 주장하지 않았기에 이들의 논쟁을 자연신학 논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고 계시에 대한 수용성 여부를 토론한 계시논쟁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따라서 브루너의 주장은 바르트가 주장하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는 것이다.
또한, ‘계시’의 논쟁에 있어서도 브루너는 피조물에 있는 계시로는 구원을 하지는 못한다고 인정한다. 일반계시는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독립적인 의미가 없고, 구원의 능력은 전혀 없는 단지 피조세계에 남아 있는 창조주의 흔적정도의 의미일 뿐이라는 것에서 바르트와 근본적인 차이는 없어진다.
‘보존의 은혜’와 ‘규례’에 대해서도 브루너는 구원론적 의미에서 보존의 은혜에 독립적인 의미를 전혀 부여하지 않고 있다. 또한 규례는 하나님과 분리해서 자체적인 계시의 힘을 가지지 않고, 신앙의 견지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보존의 은혜와 규례에 대한 논쟁은 당시 시대적 상황 때문에 예민하게 논쟁되었지만, 내용적으로 볼 때 심각한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다.
브루너와 바르트의 논쟁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인 것은 바로 ‘접촉점’의 논쟁이다.
브루너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이 은혜보다 먼저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스스로 책임성을 가지고 행동하고, 이 행동의 결과가 죄로 나타나면 은혜를 인식할 수 잇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은혜가 와야 인간이 자기의 죄성을 알게 된다고 보았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은혜의 우선성에 대해서는 어떤 양보다 할 수 없었다.
브루너도 오직 은혜의 교리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죄에 대한 인식, 율법을 은혜에 우선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은혜의 우선성’에 기초하고 있는 바르트의 신학은 브루너와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5. 말씀의 인식 가능성과 인간의 책임성
1) 말씀의 인식 가능성
바르트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질문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식은 교회의 전제”라고 말한다. 바르트는 말씀의 인식 능력을 논하는 시작을 세심하게 표현하는 이유는 모든 인식의 방법은 인식의 대상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대상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의 인식 가능성을 묻는 것은 타당한 출발이지만, 말씀이라는 대상을 고려하지 않고 인식 여부를 묻는 것을 거부한다.
바르트는 말씀의 인식과 연관해서 경험론적으로 다루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말씀이 경험되는 인간의 주관성에 빠지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말씀은 그 자체가 가진 타당성에 따라 판단되는 것이지 경험된 인간의 주관에 따라 판단될 수 없다.
바르트는 말씀에 대한 경험은 현실적으로 부름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이 부름에 대해 복종과 불복종으로 드러난다고 보았다. 인간 스스로 결정할 수는 없고 스스로의 실존에 대한 자아결정으로 경험된다. 다라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할 수 있는 인간학적인 장에 대해 반대할 필요도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경험에 대한 가능성으로 인간학적인 장을 부각시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여기서 인간학적인 장은 인간의 의지, 감정, 양심 등을 의미한다.
바르트는 말씀의 인식에 있어 경험을 대치할 개념으로 ‘승인’을 제시한다.
① 말씀이 스스로 승인할 때는 승인에 인식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② 말씀의 승인은 말씀의 내용과 함께 이루어진다.
③ 승인이라는 개념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에 대해, 우리에게 말함에 대해, 판단에 대해 권한을 가진다.
④ 승인이 일어나는 곳에는 인간의 승복이 일어난다.
승인은 철저히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에 다려 있고 인간 쪽에서 승인을 결정할 수 없다. 즉 말씀의 인식 가능성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의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험을 가질 수 있지만, 이 경험은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경험은 아니다.
바르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객관성을 일차적 객관성과 이차적 객관성으로 구분한다.
- 일차적 객관성: 스스로 신 지식의 대상인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적 존재(인간이 논의할 수 없음)
- 이차적 객관성: 매개체를 통해 인식되는 것. 구약과 신약에 많이 나타남.
바르트는 하나님의 인식 가능성을 다루는 가장 적합한 개념은 ‘신앙’이라고 본다. 인간은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타당한 경험을 가질 수 있다.
바르트는 말씀의 인식 가능성을 신앙 속에서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바르트가 주장한 신앙의 인식 가능성이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① 신앙이 자율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지의 여부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의 인식 가능성은 항상 은혜로서 간주한다. “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라 실로 죄인들에게 능력 없는 인간들에게 일어나는 은혜”일 뿐이다. 말씀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인 신앙은 오직 하나님에 의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② 신앙이 말씀의 인식을 위한 실질적인 범주가 될 수 있는지이다. 바르트가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해 가장 경계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객체가 되는 것이다. 객체가 된다는 것은 말씀이 인식의 한 대상이 되는 것이며, 이는 바로 주-객 이원론이 되고 만다. 신앙 안에서 가지는 말씀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구체적이며, 말씀의 인식 가능성이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실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신의 주체성에 근거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는 주체적 행위를 할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로서 주체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과의 연관 속에서 인시그이 주체가 된다. 바르트에게 신앙 안에 있는 인간에 대한 강한 긍정이 들어 있다. 인간은 주체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대상으로 주어진 말씀을 인식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스스로 자신을 객체로 허락했고, 인간은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하나님과 대면한다. 바르트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며, 이 인간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신앙은 인간의 행위이고 신앙의 행위 속에서 인간은 말씀을 실제적으로 인식하고 경험한다.
바르트는 말씀의 인식 가능성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하는 것이기에 오히려 확고한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성에 토대한다는 의미이다.
말씀의 선포와 인식은 인간의 주관성에 제한당하지 않고, 우리는 그 확신을 가지고 말씀을 선포할 수 있다. 우리는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이 가지는 능력을 믿고 선포할 수 있다.
2) 인간의 책임성
바르트는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창조로 보고 피조물이라는 전체 주제를 잡았으나, 실제로는 인간론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바르트에게 피조물이란 일차적으로 인간을 의미한다. 가장 큰 이유는 성서가 다양한 우주론을 반영하고 있지만 그 어떤 우주론도 채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에 비해 구별된 위치를 가지는 것은 인간만이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된다는 신학적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바르트는 인간을 독립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해서 이해한다.
Ⅰ 인간론의 유형
1. 관념적 인간형 : 얼마의 가설과 직관에 토대로 둔 유형으로 보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2. 과학적인 인간형 : 인간이 심리학적, 생물학적, 사회학적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하며 하나님의 말 씀의 빛에서 조명된 인간론만이 진정한 인간론이 된다고 믿는다.
3. 신학적 인간형 :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 위에 있으며 말씀의 빛에 따라 이해되는 인간론
신학적 인간론은 성서가 보여주는 참인간에 대한 이론이다.
1) 성서를 통해 참인간을 위한 두 가지 근거
① 인간이란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이다.
② 참 인간의 근거는 그리스도라는 점이다. 인간 예수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일 뿐 아니라 인간의 본질에 대 해서도 보여준다. “인간 예수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근원이다.”
2) 참인간을 위한 두 근거를 중심으로 참인간을 위한 여섯 가지 기준(criteria)
①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 예수에게서 보여 진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규정되어야 한다.
② 인간 예수와 계시의 현존의 관계를 보면, 예수는 모든 사람의 구원의 역사이다.
③ 인간 예수의 삶은 그의 자유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관점에서 조명된다.
④ 인간 예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존재했다.
⑤ 인간 예수는 전적으로 구원자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활동하신 것처럼 역사속에서 자신을 드러냈다.
⑥ 인간예수는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을 위해 섬김의 모습을 보인다.
3) 여섯 가지의 기준을 토대로 대표적인 인간론의 유형에 접근한 분석비판
① 자연주의적 인간론 : 참인간을 위한 여섯 개의 기준 중에 하나도 충족하지 못한다.
② 관념론적 인간론(=윤리적 인간론) : 자연주의적 인간론과 유사하며 여섯 개의 기준 중에서 신과의 관계, 하나 님의 영광, 섬김과 봉사 등의 기준에 어긋난다.
③ 실존주의적 인간론 : 인간의 한계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초월적 측면을 가지나 이 초월이 인간을 떠나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 모르는 문제를 가진다.
④ 유신론적 인간론 : 초월적 존재에 대한 실제적이고도 역동적인 관계를 가진다. 인간의 자기-이해의 자율성을 인식하지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참인간을 위한 여섯가지 기준과 상당히 일치한다. 그러나 인간의 잠재성을 만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며, 인간의 현실성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 첫 세유형에 나타난 공통적인 문제 : 신과의 관계가 폐쇄된 인간론이라는 점
유신론적 인간론 : 신과의 인간의 역사에서의 개방은 인정되나, 신의 초월적 계시는 무시
「바르트는 참인간을 항상 예수에게서 시작한다. 바르트는 직접적으로 철저히 예수의 인간성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참인간이 된다는 것은 예수에게서 나타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누구이든 예수와 함께 있는 자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자이다.” 참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이해한 인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는 참인간을 말씀 속에 있는 인간이라고 부른다.」
4) 말씀 속에 있는 참인간
①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정 속에 나타는 은혜이다.
② 단순히 말씀이라는 개념 속에 머물지 않는다.
③ 감사(gratitude)하는 존재 : 인간은 감사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가고,
감사를 통해 인간의 존재가 완성되고, 감사를 통해 다른 피조물과 연대성을 가진다.
5) 참인간의 책임성 : 말씀에 대한 책임성
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책임성이다.
이는 참인간의 감사의 응답이며 그는 이웃과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관계로 들어간다.
② 말씀 속의 참인간을 하나님과 이 역사에 대한 계약-파트너로서의 책임성을 가진다.
③ 결단 속의 인간은 응답의 주체로서 인류와 역사를 향한 포괄적 의미의 책임성을 가진다.
▷ “영과 육으로 된 인간”과 “시간 속의 인간”의 기저에는 말씀 속에 있는 참인간이
자신과 역사를 향해 펼치는 “관계의 확장”이 놓여 있다.
6) “말씀에 대한 책임성”을 토대로 인간의 책임성이 추가로 세 가지 측면에서 확장
① 참인간은 자기 자신과 새로운 관계로 들어간다. 예수를 완전한 하나님이며 인간으로 보듯이, 인간을 “통전적 인간”(성령과 함께하면서 새롭게 이해되고 규정되는 존재)으로 본다.
a. 이를 통해 참인간은 자신에 대한 인식의 정립을 가진다. ; 영과 육을 분리시키는 이원론을 거부하며, 추상적인 물질주의적 단원론을 피하며, 단원론적인 관념론도 거부되어야 한다.
b. 말씀 속에 있는 참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우선되는 책임성 :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성
② 참인간은 타자와의 관계로 나아간다. 인간예수는 타자를 위한 존재이시다.
말씀의 빛을 통해 새롭게 자아결정(self-determination) 하게 되면 다른 인간과의 만남 속으로 존재의 의미가 확장되며 참인간의 이웃과 동료 인간에 대한 책임성이 부과된다.
③ 참인간은 시간 속으로 존재의 의미를 확장한다. 예수의 시간에는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들어 있다. 예수의 미래는 이 세계 역사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 재림,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도 포함된다. 한편, 인간의 시간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시간이다. 참인간은 시간 속에서 존재하며, 시간 안에서 예수의 미래를 향한다. 이런 의미에 서 역사에 대한 책임성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책임성을 의미한다.
※ 참인간은 구체적으로 네 가지의 책임성을 가진다. 말씀 속에 있는 인간은 가장 먼저 “말씀에 대한 책임성”을 가진다. 말씀 속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계약의 파트너로서 확대된 책임성으로 나아간다. 그는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책임적이고, “이웃에 대해”책임적이며, 나아가 이 “역사에 대해”책임적 존재이다.
6. 평가
성서 안에 있는 새로운 세계 (1916년)
1. 물음 : 성서 안에 무엇이 있는가?
우리는 성서에서 언제나 우리가 찾는 만큼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위대한 것을, 신적인 것을 찾을 때 위대한 것과 신적인 것을 찾는다.
우리가 무가치한 것을, 역사적인 것을 찾을 때 그것들을 찾는다.
⇒ 너는 무엇을 찾는가? 그렇게 묻는 너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으로 바뀌는 시점
2. 대답 : 성서 안에 한 새로운 세계, 하나님의 세계가 있다.
스데반의 말 “보라 나는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있는 것을 본다.”
우리의 신앙의 진지성으로도, 우리의 경험의 깊이와 풍부성으로도 우리는 이 대답을 줄 권리는 갖지 못한다.
3. 성서의 초청 : 하나님을 찾고, 은총을 사모하라
우리가 성서의 내용을 더 깊이 파악하려면, 우리 자신을 훨씬 초월해야 한다. 성서는 각자에게 그가 벌어들이고, 그에게 알맞은 것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론 우리의 진지한 물음과 찾은 답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친절히 말 한다
“그것은 너이지, 그러나 나는 아니다! 그것은 너의 과음의 필요와 견해들의 요구와, 너의 시대와 주변의 요구, 너의 종교적인 철학적인 이론의 요구에 걸 맞는다. 너는 내 안에서 네 자신을 반사하기를 원한다. 이제 가서 나를 찾으라. 거기에 있는 것을 찾으라. ”
⇒ 우리는 비록 거의 파악할 수 없고 다만 중얼거리면서 표현하지만, 성서는 우리 자신을 넘어서 우리를 몰아대고, 우리의 가치와 무가치에 상관하지 않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이 말해진 최후의 가장 높은 대답에 이르기 위하여 우리를 초대하는 분명하고 결연한 논리이다.
결국 그 대답은 한 새로운 세계, 하나님의 세계가 성서 안에 있다는 것이다.
⇒ 성서에는 영이 있다. 그 영은 우리를 누르기 시작한다.
그 영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주된 사실을 향하여 우리를 몰아낸다.
우리는 자신을 초월하여 최고의 대답을 붙잡기 위하여 성서에 있는 이 충동을, 이 영을, 이 강을 감히 따라야만 한다. 이 모험이 믿음이다.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성서를 바르게 읽을 수 있다. 우리가 그러할 자격이 없지만 최고의 것을 모험하고 그것을 붙잡으라는 초대는 성서 안에 있는 은총이다.
성서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와 만나고, 우리를 이끌고 성장하게 할 때, 성서는 우리에게 바르게 열린다.
4. 성서 안에 무엇이 있는가?
1) 역사가 있다.
주목할 만한, 유일한 백성의 역사, 힘 있는, 정신적으로 강력한 사람들의 역사, 초대 그리스도교회의 역사가 있다. 성서에는 다음 시대와 현재에 대한 영향 때문에 교양인으로서 관심해야할 위인들과 이념의 역사가 있다. 우리는 잠시 동안 이 대답으로 만족할 수 있고, 이 대답에서 많은 아름다운 것과 참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역사를 연구하고 이야기들을 즐거워할 때,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것 다음에 저것이 일어나는가? 사물의 자연적인 파악할 수 있는 원인은 무엇인가, 왜 그들은 그렇게 말했고, 그렇게 행동했으며 달리 말하고 행동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성서는 결정적인 곳에서 우리의 "왜"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기 때문’이 존재할 뿐이다.
성서는 하나님이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하나님이 살아 있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시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이란 역사가 일어난다. 거기에서 역사가 중단한다. 더 이상 물을 것이 없다. 거기에서 전적인 다른 것이,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 시작한다. 전적으로 특별한 근거와 가능성, 전제를 지닌 역사가 거기서 시작한다.
새로운 세계가 낯익은 옛 세계 안으로 우뚝 솟아 나와 있다. 우리는 성서적인 역사를 통해서 보통 역사라고 부르는 것을 훨씬 넘어서 새로운 세계 안으로, 하나님의 세계 안으로 이끌려진다는 것을 부정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
2) 도덕이 있다.
성서의 인간들은 그들의 삶의 양식에서 우리가 그들로부터 무한히 배워야 할 모범적인 인간들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서의 대부분은 학교를 위해서와 가장 좋은 경우에서 도덕적인 목적을 위해서 거의 쓸모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실제적인 삶이 지혜와 감동적인 모범들이 거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성서에는 도덕의 수많은 측면들에서 자료들이 부족하다.
삼손, 다윗, 아모스, 베드로 : 존경 받을만하지만 공적으로 교육을 받은 이를 위한 예로내세우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성서는 학교에 낯설다.
아브라함, 야곱, 엘리야 :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하여 놀랍게도 무관심함으로써 우리를 놀랍게 한다.
마치 성서는 모든 경우에서 "나는 너의 실제적인 삶에 무슨 관심을 갖고 있는가?"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것에 관계가 없다. 나를 따르라!! 그렇지 않으면 나를 가게 하라!
성서는 우리에가 애써 다루어야할 경제생활, 결혼, 문화, 국가생활에 관련된 어려운 문제들을 위한 가르침을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성서 안에서 시작하는 이 "다른" 새로운 세계 앞에 선다.
성서에는 인간의 행동이 주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이 주된 일이다.
성서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을 전개하고 확증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 하나님이 이해하는 사랑이 거기에 있고, 흘러나온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옛, 일상적인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근면, 정직,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도덕이 다스리는 새로운 세계가 문제다. 이 세계는 건설되었고 자란다.
우리가 성서를 주의하여 읽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를 결단해야 하는 지점을 향하여 성서는 우리를 이끈다. 그것이 새로운 세계다.
우리는 위대한 생산적인, 희망에 가득 찬 생명의 씨알, 새로운 시작을 여기서 얻는다. 우리는 신적인 씨알이 이 생명을 배울 수도 모방할 수도 없다. 우리는 그것을 살릴 수 있고, 그것과 함께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끌려진 곳에 설뿐이다. 믿을 수 있을 뿐이다.
3)종교가 있다.
우리는 성서 안에 참된 종교가 계시되어 있다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생각하는가? 우리는 그에게 가는 바른 길을 어떻게 발견하는가? 우리는 그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 우리는 이것을 경건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역사와 도덕처럼, 우리가 성서 안에서 정직하게 찾아야 한다면, 우리는 종교와 경건보다 더 큰 것이 성서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발견한다.
세계에는 여러 형태들을 지닌 그리스도교가 있다.(가톨릭, 신교, 다양한 현태의 성찬식을 거행하고 여러 방향들을 지닌 그리스도교) 그럼에도 이들이 성서 안에 계시된 바른 경건을 갖고 있다거나 계시된 바른 경건의 가장 정당한 후계자라고 주장할 때 그것은 우려된다.
경건으로써 성서를 인증하는 사람들이 옳은가? 여기서 우리는 성서의 영이 잠자코 얼굴을 돌리는 현실과 직면하는 것은 아닌가? 혹은 우리는 우리의 경건의 다양한 견해와 형태들 때문에 틀린 것은 아닌가? 우리가 그렇게 원한다면, 성서 안에 모든 종교들이 발견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자세히 본다면, 종교는 전혀 없다. 다만 “다른” 새로운 더 위대한 세계가 있을 뿐이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과 우주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신적인 것에 이르는가? 어떻게 나를 나타낼 것인가? 우리가 이 질문들로써 성서에 접근하며, 이것들은 너의 문제들이다. 너는 나를 찾아서는 안 된다고 성서는 대답한다.
5. 성서의 내용을 이루는 것(성서가 말 하는 것)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바른 생각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바른 생각이다.
성서는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말해야 하는가를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하는가를 말한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을 발견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가 우리에게 오는 길을 추구했고 발견했느냐를 성서는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루어야 할 바른 관계가 아니라, 그가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녀인 모든 사람들과 맺은 계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일회적으로 날인한 계약이 성서 안에 있다.
성서 안에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서 안에 있다.
성서 안에 있는 것은 새로운 세계다!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주권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다!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다. 인간의 덕이 아니라, 그의 놀라운 사랑으로 부른 하나님의 덕이다. 인간의 출발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출발점이 성서 안에 있다.
6. 하나님은 누구인가?
우리가 이제 최고의 대답을 추구한다면, 우리가 성서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면, 하늘의 음성에 순종한 바울과 함께 모험한다면, 하나님은 존재하는 그대로 우리 앞에 선다.
“네가 믿는다면, 너는 받으리라”
1) 하나님은 하늘의 아버지다.
하늘의 아버지는 지구에서도 실제로 하늘의 아버지다. 그는 삶이 이곳과 피안으로 분리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죄와 슬픔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과제를 죽음에 맡기려 하지 않는다. 그는 교회의 힘으로써가 아니라, 생명과 부활의 능력으로써 우리를 축복하려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그의 말씀을 육이 되게 했다. 그는 시간을 위하여 영원을, 이미 시간 안에서 동터오게 했다. 그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 이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2) 하나님은 나의 중보자가 된 아들이다.
그 이상으로 그는 전 세계의 중보자며, 만물의 처음에 있었던, 그리고 모든 만물이 간절하게 기다리는 구속하는 말씀이다. 그는 나의 형제들과 자매들이 구속자다. 그는 우리를 에워싼 탄식하는 피조물들의 구속자다.
3) 하나님은 믿는 자 안에 있는 성령이다.
그는 아들로부터 우리에게 열리고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수정처럼 맑게 고요한 마음속으로 흐른다. 하나님은 사랑과 선한 의지로서 고요한 마음으로부터 밖으로 분출하기를 바라고 나타나야 할 영이다.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창조하는 분은 성령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새로운 인간을, 새로운 가정을, 새로운 관계들을, 새로운 정치를 창조한다. 성령은 옛 습관들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단순히 존중하지 않는다. 성령은 옛 세력들이 단지 강력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존중하지 않는다. 성령은 다만 진리 자체만을 존중할 뿐이다. 성령은 세계의 불의의 한복판에서 하늘의 정의를 세우고, 모든 죽은 자들이 살게 되고, 새로운 세계가 존재할 때까지 멈추거나 쉬지 않는다.
이것이 성서 안에 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해서 성서 안에 있다. 이것 위에서 우리는 세례를 받았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은혜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제3장 계시와 세속: 본회퍼
1. 삶과 죽음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독재와 전쟁의 위협 속에서 살았던 한 기독교인으로 순교적 삶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그의 신학과 함께 그의 삶 자체는 참된 그리스도의 증인이었다. 그런 그의 삶과 죽음을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제1기: 1906년에서 1932년까지는 본회퍼에게 성장과 신학 훈련의 기간이다. 1906년에 태어난 본회퍼는 집안의 지적인 분위기 속에서 수준 높은 가정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고, 1912년에 베를린으로 옮겨와 교수들의 주택가에 살면서 당시의 뛰어난 지성인들과 이웃으로 지내며 성장했다. 본회퍼는 비교적 어릴 때부터 신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목사가 되려는 그의 생각은 어린 시절 이후 흔들리지 않았다. 형제들이 교회는 형편없는 곳이라고 할 때에도 그는 “그렇다면 내가 교회를 개혁할게!”라고 말할 만큼 뚜렷한 주관을 갖고 있었으며, 부모님과 형제들이 신학을 반대했지만 자신의 선택을 포기하지 않고 신학을 하기 위해 대학에 진학하였다.
본회퍼는 1923년 6월 베를린으로 돌아와 신학 공부를 계속하면서 그곳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대가들을 많이 만났으며, 개인적으로 하르낙(A. Harnack)과도 친밀한 관계를 가졌지만, 본회퍼가 가장 영향을 받은 신학자는 그가 직접 배운 선생들이 아닌 바르트(K. Barth)였다. 본회퍼는 1925년 그의 학위논문 “성도의 교제”를 준비하면서 바르트의「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을 읽게 되었고, 그 후 바르트의「로마서 강해」를 위시한 그의 저술을 통해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그는 바르트 신학을 통해 자신의 독립적인 신학을 형성시켜 갈 자유와 용기를 얻게 되면서 바르트를 늘 마음에 두기 시작하였다. 1927년 본회퍼는 박사논문을 완성하여「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 A Dogmatic Investigation of the Sociology of the Church)를 제출하였는데, 후일에 바르트로부터 ‘신학의 기적’이라는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1930년 24세의 나이로「행위와 존재」(Act and Being: Transcendental Philosophy and Ontology in Systematic Theology)를 신학부에 제출하여 베를린대학의 조직신학 강사가 되었고, 미국 체류 동안에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며 할렘지역 등을 둘러보고 흑인 교회에 6개월 정도 출석하였다. 그 후 본회퍼는 1931년에 바르트의 세미나에 참석하여 직접 대화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는데, 세미나의 토론 시간에 “불신자의 저주가 경건한 자의 할렐루야보다 하나님의 귀에 즐겁게 들릴 수 있다”라는 루터(M. Luther)의 말을 인용하면서 바르트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바르트가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면서 둘의 개인적인 만남이 시작되었다. 본회퍼는 계속 바르트를 존경하고 그에게 영향을 받은 것은 틀림없으나, 단순한 그의 추종자가 아닌 나름대로 바르트를 비판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독립적인 신학 영역을 점차 확대해 나갔다.
1931년 본회퍼는 자신의 생의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그것은 9월에 케임브리지(Cambridge)에서 열리는 “세계 동맹” 화합에 독일 대표로 참여하면서 에큐메니칼 회의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전 세계 교회의 흐름을 파악하고, 독일 교회와 히틀러 정권의 문제점 들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된다.
제2기: 1933년에서 1939년까지는 본회퍼의 신학적 응답의 시기이다. 1932년에 나치가 일어나 1933년에 히틀러가 독일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때 본회퍼는 2월에 베를린 라디오 방송에서 “젊은 세대의 지도자 상의 변화”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다가 중도에 중단되고 이때부터 감시를 당하게 되었다. 1933년 4월 7일 독일 의회는 모든 유대인들을 국가 공무원에서 배제시키는 “아리안 입법”(Aryan Clause)을 통과시켰고, 독일 교회는 히틀러 정권의 후원 아래 기독교 연맹을 결성하고 아리안 입법을 채택한다. 이때 본회퍼는 두 가지 중요한 선언을 한다. 하나는, 4월에 “교회와 유대인의 문제”라는 글을 통해 즉각 교회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반박 성명을 발표했고, 다른 하나는, 8월에 “긴급 목사 연맹”(Pastor's Emergency League)을 위한 초안문인 “베델 고백”(Bethel Confession)에서 나치 신학자들의 잘못된 우월론을 비판했다. 본회퍼는 이 고백을 통해 반유대교 교리와 아리안 입법의 폐기를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1933년 여름에 있었던 그의 설교를 보면, 본회퍼의 반히틀러 투쟁은 결코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결정이 아니라 두려움과 주저함을 극복하고 나온 결정이었으며, 그의 신학에서 나온 신학적 결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반히틀러 투쟁 중인 1933년 본회퍼는 베를린대학에서 기독론 강의를 했으나 강의가 중단됨으로 원고는 완성되지 못했고, 당시에는 출판되지 못했으나 베트게(E. Bethge)가 학생들의 노트를 모아 내용을 재건해서「그리스도론」(Christology)으로 출판했다. 그가 강조한 그리스도의 개념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이나 이론이 아니었다. 본회퍼는 현실 속에서 지금 나와 함께 역사 속에서 살아 있는 그리스도를 절실히 갈망했고, 그가 이해한 그리스도는 나를 위한 그리스도이지만, 동시에 나를 역사 속으로 부르시는 그리스도였다.「그리스도론」에는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부름’과 이에 ‘따름’으로써 응답하는 기독교인의 역사적 응답성과 책임성이 나타난다.
본회퍼는 1933년 10월에 아리안 입법을 받아들이는 독일 교회와 시국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베를린 신학부에 실망을 느끼고 런던으로 가서, 1935년 4월까지 교회 목사로 봉사하며 설교와 목회에 전념한다. 그는 런던에 막 도착해서 바르트에게 자신의 상황의 변화 등에 대한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바르트로부터, 하루 속히 베를린으로 돌아오라며 어렵고도 지독한 충고가 담긴 심각한 내용의 답장을 받게 된다. 하지만 본회퍼는 영국에 약 17개월을 더 머물면서,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피해 온 독일인들에게 피신처를 마련해 주고 독일 출신의 목회자들과 교회 투쟁에 대해 깊은 논의를 하며 독일 교회의 상황에 대한 훌륭한 대변인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35년 4월 독일로 돌아와 고백교회 연수원 가운데 하나의 원장직을 맡는다. 이곳에서 그는 “형제의 집”을 세워 신학생들과 공동생활을 영위했다. 그는 제자의 도를 강조하고 소유를 나누며 기도, 명상, 노동, 청소 등을 함께하며 기독교 공동체를 구현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쓴 원고를 정리하여 「제자의 길」(The Cost of Discipleship)이라는 교회와 세상의 대립 속에서 예수를 따르는 길을 보여주는 책을 출판하였다. 1937년 연수원은 게슈타포의 명령으로 폐쇄되었고, 본회퍼는 쌍둥이 여동생 자비네의 집에 머물며 약 2년간의 연수원에서의 생활과 삶을 토대로 한「신도의 공동생활」(Life Together)을 짧은 시간에 집필하였다. 이 책은 “형제의 집”을 통해 시도한 기독교인의 이상적인 삶에 대한 체험이 담긴 소중한 결실이다.
그 후 본회퍼는 1939년 6월 2일 라인홀드 니버(R. Niebuhr)의 초청으로 다시 뉴욕의 유니온신학교로 갔는데, 조국의 어려운 시기에 함께 못하면, 전후(戰後) 독일의 기독교 재건에 참여하는 권한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며 7월 7일 다시 조국 독일로 돌아갔다.
제3기: 1939년에서 1945년까지로 투쟁과 죽음까지의 시기이다. 미국에서 돌아온 본회퍼는 목회 훈련소에서 일했으나 1940년 3월에 훈련소가 해산되면서 그는 모든 강연, 강의, 저술은 금지되었고 행동 하나하나를 경찰에 보고해야 했다. 이 시기에 그가 가장 고심했던 것은 ‘윤리’였다. 1941년에서 1943년 사이에 본회퍼는 광범위한 반 나치 지하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해외여행을 하며 외국에 독일의 지하조직을 알리고, 외국에서 얻은 정보를 지하조직에 주는 일을 하였다. 1942년 본회퍼는 지하단체가 제안한 계획을 영국에 알렸으나, 영국 정보로부터 거절당하자 그는 평화주의를 포기하고 히틀러를 직접 암살하는 것밖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결론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암살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1943년 4월 5일 오후 본회퍼는 부모의 집에서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었다.
1943년 4월부터 감옥에서 보낸 약 2년간은 신학자 본회퍼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그곳에서 그는 필생의 숙원으로 생각한 기독교 윤리학에 대한 구상을 다시 한다. 그러나 ‘윤리’에 대해 체계적인 저술을 끝내 하지 못했고, 그가 틈틈이 쓴 글들을 베트게가 모아 본회퍼 사후에「윤리」(Ethics)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그리고 옥중 기간 동안에 쓴 글들과 편지를 모아 출판한 것이「옥중서간」(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으로 나타났다. 여기에는 본회퍼의 중요한 신학적 통찰과 현대사회에 대한 인식이 나온다. 「옥중서간」에 나타난 신학적 단상들이 기독교의 비종교적 해석으로 발전된다. 결국 본회퍼는 1945년 4월 8일에 사형선고를 받았고, 9일 새벽 동이 터올 무렵 교수형을 받았다.
본회퍼의 삶의 모습은 감옥 생활에서도 드러났다. 그의 경건한 생활과 흔들리지 않는 신앙적 자세는 다른 죄수와 간수까지 감동시켰다. 그는 철저한 기도생활과 성경묵상을 했고, 다른 죄수들을 위해 예배를 드려 주고 상담과 위로를 해 주었다. 그의 삶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삶이었다. 그의 증언은 이제 역사 속에 남아 기독교인 모두의 귀중한 유산이 되었다. 그는 기독교인의 신앙이 현실 앞에서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력한 것인지 고민했고, 기독교의 세속에서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이 ‘성숙한 세계’에서 하나님은 이제 무의미한 것인가? 그가 던진 질문들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이제 그것은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이다.
2. 본회퍼 신학의 연속성
1)본회퍼 신학의 연속성
본회퍼의 연구가들 사이에는 그의 초기와 후기 신학이, 연속적인지 혹은 단절인지에 대해 상당한 논의가 있었다. 본회퍼 사상의 초기와 후기의 연속성에 대한 소개는 세 권의 책에 잘 정리가 되어있다. 이 세권의 책은 단절과 연속성에 대해 다루고 있는 학자들도 거의 같고 접근방법도 유사하기 때문에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는 세 권의 책을 참고하면 되겠다. 이 책의 저자 김동건 교수는 본회퍼 사상에서 연속성 여부가 왜 나왔는지를 이야기하며 이 책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50년대 초에는 본회퍼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았고 본회퍼의 신학도 독일어권을 벗어나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아직 본회퍼의 저작도 출판이 덜 된 상태였고, 본회퍼 연구는 소수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때는 본회퍼 사상의 연속성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지 않았고, 대체로 연속성이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본회퍼의 이름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는 계기는 영국의 올위츠의 감독 주교 로빈슨이 1963년에 출판한『신에게 솔직히』의 영향 때문이다. 로빈슨은 이 책에서 전통적인 신 개념의 한계를 극복할 새로운 신론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불트만, 틸리히와 나란히 본회퍼의 비종교적 해석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이로 인해 영국과 미국의 많은 사람들이 본회퍼라는 새로운 학자와 그의 사상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특히 본회퍼의 기독교에 대한 비종교적 해석은 새로운 개념이었기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더군다나 본회퍼의 순교적인 삶이 알려지면서 본회퍼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고조되었다.
1960년대는 본회퍼에 대한 관심으로 그의 저술이 많이 보급되고 읽혔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본회퍼에 대한 연구의 열기가 고조되어 많은 논문과 연구서가 나왔다. 특히 당시 미국에서 논란이 되던 “신 죽음의 신학”과 “세속의 신학”을 주장하던 신학자들이 본회퍼에 높은 관심을 가졌다. 이 신학자들은 본회퍼의 마지막 작품인『옥중서간』에 치중했고, 무엇보다 기독교의 비종교화에 매료되었다. 본회퍼의 “신 없는 시대”, “무종교의 시대”, “종교 없는 기독교” 등의 개념은 신 죽음의 신학과 세속화 신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신 죽음의 신학을 주장하던 학자들과 세속화 신학을 주장하던 학자들은 본회퍼의 초기 저작들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본회퍼의 비종교화에 높은 관심이 있었다. 그것은 본회퍼가 주장한 비종교화가 그들의 신학적 문제제기와 입각점이 유사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신학자들은 대부분 본회퍼의 사상이 전기와 후기가 단절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본회퍼의 사상에 연속성이 있는지 여부가 본회퍼 연구가들 사이에서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었다.
본회퍼 연구의 주된 흐름을 이어온 학자들은 대부분 본회퍼의 신학이 연속성을 가진다는 입장으로 드러났다. 중요한 학자로는 베트게, 갓세이, 에벨링, 몰트만, 오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이 본회퍼 사상이 연속성이 있다고 보는 이유는 각기 차이가 있지만, 공통된 것은 본회퍼의 사상이 초기에서 후기까지 주요 사상은 단절되지 않는다고 보는 점이다.
한편 본회퍼의 사상에 단절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부류는 본회퍼의 저술에 따라 나누어지기 때문에, 먼저 본회퍼의 저술의 순서를 보자.
그의 중심 작품은 대체로 일곱 개로 보는데 저술된 년도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성도의 교제』(1927),『행위와 존재』(1931),『그리스도론』(1933),『제자의 길』(1937),『신도의 공동생활』(1939),『윤리』(1940~1943),『옥중서간』(1943~1945)이다.
본회퍼 사상의 단절을 주장하는 학자의 첫 부류는 본회퍼의 저술들 사이의 다양한 차이를 지적하거나, 본회퍼의 삶의 전기적인 여정에 따른 사상적 변화에 치중한다. 예로 필립스는『성도의 교제』부터 『제자의 길』까지를 교회론적 관심으로 일관성이 있고, 『윤리』이후로는 교회론적 관심이 없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따라 윤리를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저술들이 단절되는 것으로 보았다. 혹은 본회퍼의 전체 사상의 단절이 아니라, 특정 주제의 변화에 치중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헌트만은 『제자의 길』의 공동체는 교회적 공동체이나, 『옥중서간』의 공동체는 세속적인 공동체라고 보았다. 첫 번째 부류에 속하는 학자 중에서 본회퍼의 사상을 전체적인 단절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두 번째 부류는 신 죽음의 신학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신학자와 일부 세속화 신학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이다. 여기에 속하는 신학자는 로빈슨, 반 뷰렌, 콕스, 해밀튼, 알타이저 등이다. 이들이 본회퍼 사상을 불연속적으로 보는 중요한 기준은 본회퍼의 ‘비종교적 해석’이다. 즉, 본회퍼의 마지막 ‘비종교적 해석’이 담겨진『옥중서간』이 그 이전의 저술들과 단절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혹은 불연속의 기점을 『윤리』나 그 이전으로 보는 경우에도 윤리 등에 이미 ‘비종교적 해석’이 나온다는 이유를 근거로 들고 있다. 본회퍼 사상의 전기와 후기가 단절적이라고 보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두 번째 부류이다. 따라서 본회퍼 사상을 단절로 보는 중요한 기준은 ‘비종교적 해석’ 여부가 되겠다.
1970년대 이후에는 본회퍼 신학의 연속성 문제는 본회퍼 연구에서 공개적인 주제로 논의되지 않았다. 최근의 본회퍼 연구는 본회퍼의 신학이 가지는 여러 가지 신학적 통찰과 주제들에 따라 연구되고 있다. 본 저서의 목적은 본회퍼의 사상이 얼마나 연속성이 있는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본회퍼의 신학을 통해 본회퍼가 계시를 어떻게 해석하고 응답했는지를 찾는 것이다.
2) 이 책의 관점
「현대 신학의 흐름」김동건 저 책은 왜 본회퍼 사상을 연속성이 있는 것으로 보는지 그리고 이책이 본회퍼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러다면 본회퍼의 신학의 연속성을 가지는 근거는 무엇인가?
1. 비종교적 해석
① ‘비종교화’의 주된 관심은 무종교의 시대에 기독교의 개념을 어떻게 세속적 개념으로 해 석하는지에 있다
② ‘신없이’ 그러나 ‘신 앞에’ 설수 있을지에 대해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옥중서간에는 이 질문에 대해 구체적인 답변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본회퍼의 윤리에서 답변을 찾을수 있다 예수의 ‘부름’ 에 대한 ‘따름’으로 나타난다.
본회퍼는 무종교의 시대에도 그리스도는 여전히 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는지 반문한다.
③ 본회퍼의 비종교화라는 의미에는 세속화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본다 본회퍼의 세속화의 개념은 어떻게 정의되고 있는지가 본회퍼의 비종교화의 의미를 올바르게 해석된다고 본다
세속화라는 말은 역사성과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말해 세속화는 현 시대의 관점을 초월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세속화는 상대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상대성은 적어도 현재의 관점의 오류를 분석하게 해준다고 생각된다
2. 그리스도의 현존에서 신학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① 본회퍼의 사상은 일정한 관점과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현재”에 대한 관심이 다
본회퍼가 다루는 모든 주요 주제는 ‘현재’라는 관심에서 출발하고 그 각 주제는 현재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답변으로 구성된다
본회퍼의 현재에 대한 관심과 강조는 기독론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나타난다 크게 보면 ‘현재’와 ‘그리스도의 현존’은 같은 맥락에서 볼수 있지만 우리는 본회퍼의 현재에 대한 관심과 그리스도의 현존을 통해 본회퍼의 사상 전체를 일관되게 볼 수 있는 중요 한 관점을 얻게 된다.
3. 신학의 방법론에서 변증법적으로 다루고 있다
① 인간의 현실과 그리스도의 현실, 형성으로서의 윤리, 제자도에 나타나는 부름과 따름 등 의 주제가 같은 변증법적으로 다루어진다
두 상반되는 개념을 ‘이중적인 긴장’ 이라는 과정을 거쳐 결론에 이르는 방법을 사용한다
② 본회퍼의 원죄의 개념을 보면 변증법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더 잘 이해된다고 생각된다
그의 원죄 개념은 인간이 선악을 구분할 수 있는 지식으로 인해 하나님과 분열이 일어났다고 한다 분열의 결과로서 인간은 수치를 경험하는데 인간은 수치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찾는 것이 인간이라고 한다 즉 수치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는데 긍정의 의미와 부정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음페와 발현, 자기 은폐와 자기개시, 고독과 사귐의 긴장관계를 가지는 것이 인간의 수치라고 한다
3. 기독론의 구조
1)그리스도의 현존
본회퍼의 관심은 항상 ‘현재’와 분리되지 않는다. 그는 추상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진 교리에 만족하지 않는다. 본회퍼 사상의 한 축에는 언제나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들의 고민이 놓여 있다. 본회퍼의 관심은 매우 현대적이다. 본회퍼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떻게 그들의 삶과 연관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과 연관된 사회, 역사와 무관한 성경이해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서 설교, 교리, 신앙은 ‘현대적’으로 의미가 있어야 한다.
본회퍼가 그의 『그리스도론』을 여는 첫 말은 바로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본회퍼에게 그리스도는 항상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의 『그리스도론』에 나타나는 그의 첫 관심은 어떻게 예수의 현존하심이 인격성의 훼손 없이 가능한지에 대한 것이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강조점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격적 현존을 의미한다. 그의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관심은 교리적인 차원에서 보지 않았다.
본회퍼는 기독론을 통해 삼위일체 교리에 접근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리스도론』을 전체적으로 볼 때 그의 기독론은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기독론에는 역사에서 현존하는 그리스도와 예수와 성부를 연결하는 삼위일체적 범주라는 두 요소가 동시에 존재한다. 즉 지금 역사에 현존하는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며,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본회퍼는 예수의 현존성을 강조하는데, 이 때 놓치기 쉬운 예수의 인격성이 유지된다. 그는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찾는 방법으로 이 위험에서 벗어났다.
‘현재’에 대한 강조는 『그리스도론』 전체에서 강조된다. 여기서 서론을 제외하면 본론은 크게 두 부분인데 1부 “현존하는 그리스도” 특히 전반부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세 가지 존재양식으로 표현된다. 그가 말하는 세 가지 존재양식으로 ‘말씀’,‘성례’, ‘공동체’가 있다.
①말씀: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존재한다. 본회퍼가 말하는 말씀은 상호간의 대화성에 초점이 된다. 대화는 혼자의 독백이 아닌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난다. 또한 ‘관념’과 ‘대화’를 구별함으로 ‘그리스도의 현존’을 두 인격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로서의 말씀으로 표현되어진다. 말씀으로서 그리스도는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인격적 만남이라는 상호성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한 개인의 내면성에서가 아니라 대화라는 말씀의 상호성 안에서 현재적으로 만나진다.
②성례: 성례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이다. 본회퍼는 성찬을 하나의 상징이나 의식으로 보지 않고 말씀을 통해 성화되는 격렬한 행위로 본다. 성례 가운데 현존하는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은 말씀이다. 또한 성례에 그리스도는 친히 현존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현존은 하나님의 임재로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성례가 거룩하게 됨에 대해서 “어떻게”라고 묻는 것 보다는 “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즉 성례가 거룩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 가능하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은 말씀이라는 그리스도를 통해 성찬에 현재적으로 임재하신다.
③공동체: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이다. 공동체는 단순히 하나의 집합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성례에 현존하는 것처럼 공동체 안에 현존한다. 그리스도가 공동체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의 로그스가 시간과 공간 속에 벋어 들어와 공동체로 존재하게 되었고, 또 공동체 안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공동체라는 것은 하나의 개념으로서 단순한 단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존함으로 구체적이고 살아 있는 생명의 유기체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공동체 자체가 계시오, 하나님의 말씀이다.
끝으로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존재 양식을 세 가지로 표현했지만, 이 각기 다른 존재 양식을 하나로 묶는 고리는 그리스도의 ‘현존성’이다. 본회퍼는 교리 속의 예수, 사변적인 예수, 구체적인 삶의 정황과 역사를 떠난 예수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본회퍼의 기독론적 질문은 항상 현실 속에서 이루어진다.
2) 변증법적 긴장속의 그리스도: pro me & extra nos
본회퍼의 기독론은 틀에 박힌 교리적 색채가 없다. 전통적인 기독교에서 전개하는 위로부터의 기독론과도 다르며, 예수의 신성에서도 출발하지도 않는다. 역사적 예수에도 관심이 없다. 아래로서의 기독론으로 보기도 어렵다. 삼위일체나 예수 그리스도 본성론과 같은 전형적인 기독론의 주제에도 관심 없다. 그의 기독론은 철저하게 ‘오늘 나에게’ 그리스도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는 철저하게 나를 위한 그리스도’(pro me) 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기독론의 출발점인데 그런 의미에서 그의 기독론은 비종교적이고 비 교리적 기독론이라고 볼 수가 있다. 그의 기독론은 나의 실존 속에 함몰되는 그리스도는 아니다. 나를 위한 그리스도는 동시에 ‘우리를 넘어서는’(extra nos) 그리스도이다. 즉 변증법적 긴장의 기독론이라고 볼 수가 있다.
그의 기독론에 ‘역사’와 ‘구체적’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의 기독론에서 그리스도는 ‘역사’속에서 ‘구체적’으로 만난다. ‘말씀’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이 아닌 교리가 아닌 ‘역사’속에서 ‘구체적’으로 만나는 진리이다. 『옥중서간』에서 본회퍼는 성인된 세계 속에서 사는 우리들은 어디서 그리스도를 만날지 고심한다. 그는 신을 인간의 내면이든 종교의 영역이든 인위적인 특정한 영역에 둘 때 오는 위험을 직시하고 있다. 그의 기독론에서 그리스도는 현실역사이며 그리스도는 일상생활이라는 역사적 현장 속에서 만나져야 하는 자이다. “오늘도 그 알려져 있지 않은 분은 노상에서 인간을 만난다” 그의 그리스도는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언제나 ‘나’와의 만남이고 ‘구체적’인 그리스도는 철저히 나를 위한(pro me) 존재이다. 본회퍼에게 신의 말씀은 독백일 수 없고 신은 시간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
본회퍼의 기독론은 얼핏 보면 실존주의 신학처럼 보인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변증법적 긴장을 가만 한다면 그의 신학은 실존주의 신학을 넘어선다. 나를 위한 그리스도는 언제나 ‘우리를 넘어서’(extra nos) 있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인간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인간이 실존 속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도 없으며 타인과 영적 교제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본회퍼는 인간이 스스로 ‘의’를 성취하거나 구원을 이룰수 있는 존재라고 믿지 않았다. 그는 종교개혁가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살고 죽는 것은 자신 속에 있는 무엇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밖으로부터 그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결정된다. 종교개혁가들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의 義는 ‘남의 의’(alien righteousness), 말하자면 ‘우리 밖에서’(extra nos) 온 의이다....그는 자기 밖을 향해서, 그에게 들려오는 말씀을 향해 서 있다.....만약 그대의 구원과 의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는 결코 자신을 가리킬 수 없다.
이상은 실존 속에서 인간이 구원과 의를 자기 스스로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인식한 그의 기독론을 가늠할 수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구원과 의를 스스로 얻으려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주의할 것은 그의 변증법적 기독론은 ‘현재’와 ‘초월’의 관계로 나타나기도 한다. 즉 나를위한(pro me)가 ‘현재’라면 우리를 넘어서는(extra nos) 그리스도는 ‘초월’로 나타난다. 그의 신학에서 ‘현재’는 두 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현재’가 그리스도의 현존성과 혹은 ‘초월’과 한 쌍을 이루어 변증법적인 구조를 만들기도 한다. 그의 신학은 구체적이고 그 구체성은 항상 ‘현재’와 연결되고 ‘나’와 연결된다. 그는 이렇게 질문한다.
그러나 하나의 질문이 여전히 우리를 괴롭힌다. 따라오라는 예수의 부름이 오늘날 노동자, 농부, 실업자, 군인을 위하여 무엇을 뜻할 수 있을까?
본회퍼의 기독론이 ‘현재’라는 구체적 상황 속에서 언제나 ‘나’와 만나게 되는데 그 ‘현재’ 자체에 빠지지 않는 것은 현재를 넘어서는 본질적인 것에 대한 추구가 있기 때문이다. 이 근원적인 것에 대한 추구가 현재를 넘어서는 초월적 성격을 가진다. 그의 신학에서 ‘현재’에 대한 강조는 언제나 ‘초월’에 대한 강조와 균형을 이룬다. ‘현재’나 ‘현실’을 본 회퍼의 중요한 신학으로 본 학자 중 듀마(A. Dumas) 는 『그리스도론』에서 그리스도의 현재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현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았다『윤리』에서도 현실이 중요하게 취급되는데,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현실이 현재화된 것으로 해석했다. 나아가서 그는 본회퍼의 사상이 본회퍼가 처한 상황 속에서 나왔음을 강조했다. 현재에 대한 그의 관점은 정확하나 그는 본회퍼의 초월적 면을 간과하는 우를 범했다. 그는 본회퍼를 바르트나 불트만의 영향을 벗어난 독립된 신학자로 보려고 했다. 그 근거로 바르트가 사용하는 초월적인 용어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으나, 그는 본회퍼가 사용하는 언어 밑에 놓여있는 본회퍼의 초월성에 대한 강조를 간과하지 못했다. 본회퍼의 신학의 특징은 현재와 초월성의 변증법적인 긴장 속에 있다.
본회퍼의 기독론적인 질문 “오늘 예수는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시오?”라는 질문은 매일의 일상에서 일어난다. ‘오늘 그리스도는 나에게 누구신가’라는 질문은 ‘현재’(혹은 pro me)에서 답변되지 않는다. 질문은 돌아와서 ‘이와 같이 묻고 있는 너는 누구냐?’고 되묻는다. 그리스도에 대한 현재적 질문을 통해 인간은 인간 이성의 한계 속에 자기 존재에 대한 한계를 깨닫는다. 이처럼 본회퍼가 현재, 구체적 상황, 역사에 대해 강조하지만 그의 관심이 현재에 흡수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현재에 대한 강조는 초월적 긴장으로 심화된다. 즉, 본회퍼의 기독론에서 ‘pro me'(정)와 ’extra nos'(반)의 그리스도를 통해 오히려 ‘내’가 그리스도를 따라 역사 속으로 나아가는 것(합)으로 나타난다.
결론은 현실 실존의 상황 속에서 “당신은 내게 누구시오?”란 질문을 인간은 하게 되고 그런 인간에게(나에게) 그리스도는 다시 “너는 누구냐?”라고 되묻는다. 그리스도의 이 물음은 인간이(내가) 좌절과 무능 속에 있다는 걸 알게 한다. 나의 한계와 나의 무능력이 극한에 달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더 다가가게 된다. 구원은 우리 밖에(extra nos)있다. 그는 결단을 요구하고 인간은(나는) 그를 고백하고 인정하며 그의 고난과 역사에 동참한다.
3) 중심이신 그리스도
본회퍼의 기독론에서 중요한 질문은 “오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라는 매우 현실적인 질문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다음 질문은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장소는 어디인가?” 일 것이다. 본회퍼는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만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물론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교회로서, 성례로서, 또 공동체로서 존재한다. 하지만 본회퍼의 사상은 이들 경계를 넘어선다.
무종교의 시대, 무신성의 시대에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장은 어디인지에 대한 고민이 그의 책 <그리스도론>의 1부 후반부 “그리스도의 위치”의 주요 주제이다.
“이 한계 지점에 나는 홀로 있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는 그곳에, 곧 나와 나 사이, 옛 존재와 새 존재 사이, 그 중심 지역에 서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나 자신의 한계인 동시에 내가 재발견한 중심, 곧 나와 나 사이와, 나와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중심점이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이 한계선에 직면할 때 심판 받는다.’ 바로 이 한계선을 기준으로 인간은 옛 피조물과 새 피조물로 나누어진다. 이 한계는 인간에게 좌절이고 심판으로 다가온다. 바로 인간이 할 수 없는 이 지점, 이 한계선상에 그리스도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위치는 공간적인 장소가 아니라, 옛 피조물과 새 피조물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위치를 말한다. 이 한계선상에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체험한다.
첫째, 인간 존재의 중심이신 그리스도이다.
본회퍼가 그리스도를 인간 존재의 중심이라고 말할 때, ‘우리의 인격과 사유와 느낌의 중심이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항상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다거나, 생각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둔다는 의미도 아니다. 도리어 신학적 성격을 가진다. 인간은 율법과 성취의 사이 실패한 그곳에 있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실패한 그 ‘한계이자 심판이며 동시에 인간의 새로운 존재의 시작이자 그것의 중심이다.’ 그리스도가 인간의 새로운 존재로 나아가는 중심에 있다는 말이고, 그를 통해서만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인간 존재의 중심이다.
둘째는, 역사의 중심이신 그리스도이다.
본회퍼가 이해하는 역사의 구조도 인간의 구조와 마찬가지다. 즉, ‘역사는 약속과 성취 사이에 그 생명을 가지고 있다. 역사는 그 자체 안에 약속을 내포하고 있는데, 곧 역사가 하나님을 탄생시키는 태(胎)가 된다는 신적 약속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도처에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살아 움직인다. 역사의 진정한 생명은 이 메시아에 대한 기대 속에 있으며, 이 기대로부터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메시아의 도래와 그의 지배가 바로 역사의 의미라 볼 수 있다.
본회퍼는 개개인이 율법과 맺고 있는 관계와 역사가 이 약속과 맺고 있는 관계를 동일한 것으로 본다. 즉, 인간이 율법을 성취할 수 없듯이 역사도 그 약속을 성취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약속은 성취되지 않은 가운데 남아 있으며, 역사는 그 자신의 약속과 함께 한계점에 도달했다. 바로 이 역사의 한계에 그리스도가 중심으로 서 있다. 역사가 약속에 대해 무능력한 바로 그 지점, 스스로 약속을 잃어버리고 희망을 상실한 그 지점에 그리스도가 있다. 그리스도는 약속에 대한 성취로서, 그 성취의 중심으로 역사의 중심으로 존재한다. ‘역사의 중심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기독론이 공허해지지 않고 추상화되지 않는 것은 본회퍼의 기독론의 강점이다.
셋째는 우주의 중심이신 그리스도이다.
본회퍼가 사용한 용어는 “하나님과 자연 사이의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자연의 중재자이고, 자연도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안으로 들어온다는 내용이다. 조금 발전시켜 본다면 전 우주를 향한 구속의 완성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
자연도 역사와 마찬가지로 무의미와 자유의 상실로 고통 받고 있다. 창조세계의 타락으로 자연은 벙어리가 되었고 인간은 죄에 사로잡힌 노예가 되었다. 본회퍼는 자연과 우주는 자유가 없기 때문에, 죄 아래 있는 것이 아니고 저주 아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모든 자연은 “자연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가 아니라, 자기를 구속함을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인간과 역사의 중심일 뿐 아니라, 온 우주의 중심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옛 창조세계의 요소들이 새로운 창조세계의 요소”가 되고, “피조물은 벙어리 된 상태에서 자유”를 얻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자연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이고, 동시에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자율성을 가지고 스스로 책임적 존재로 행동한다. 그러나 본회퍼는 자율적 인간의 한계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 옛 존재가 극복되고 새 존재가 되는 한계선상에서 그는 전적으로 무능하다. 인간은 스스로 인간의 좌절, 절망과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이 점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래성을 회복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 본회퍼는 인간이 참인간이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가 인간 존재의 중심인 것이다.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인간이 새로운 피조물로 옮겨간다.
역사도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역사를 지배하고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고 믿었다. 하지만 본회퍼는 이 역사의 완성에 대한 약속은 인간의 힘으로 성취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은 역사를 움직이기 위해 열정을 쏟을 것이다. 이 모든 노력 끝에, 인간의 모든 열정을 소진한 후에 역사가 자신의 궁극을 드러내는 바로 그 곳에서 인간은 역사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할 것이다. 그리스도에 의해 역사가 의미를 부여받고 역사가 완성될 때 창조 질서에 부여된 약속은 성취된다. 이런 의미에서 본회퍼에게 그리스도는 진정 이 역사와 세상의 주인이다.
우주도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구속의 물결로 들어온다. 성서가 명시한 대로 인간은 자연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한다. 하지만 자연에 대한 인간의 능력은 한계에 봉착할 것이다. 자연과 우주에 대해 인간이 한계를 마주할 때, 자연과 우주도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 속에 있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그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자연이 완전한 구속의 섭리로 들어오게 되는 것은 자연 스스로도, 인간에 의해서도 아닌,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이다.
이 전환이 인간의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선행적 행위에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다.
4. 현대세계의 이중성
그의 신학적 토대가 기독론이라면 그의 핵심 사상이 표출되는 것은 비종교화이다. 그의 세상 이해는 기독론과 비종교화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가 이해한 이 세상은 그가 몸담고 있는 구체적인 ‘현대사회’를 의미한다. 본회퍼가 인식한 현대세계는 그 이중성으로 이해된다. 하나는 성숙성이고 다른 하나는 무신성이다.
첫째는 현대사회가 가지는 성숙성 혹은 자율성이다. 인간의 자율이라는 역사적인 실현을 거쳐 세상은 성숙해졌다. 세계는 성인이 되었고 이 성인된 세계에서 인간의 자율성은 확대되었다. 본회퍼는 우리가 맞고 있는 현대세계가 가지는 자율성은 역사적 과정을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본회퍼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이 세계는 자율성이 확대되다가 그가 살던 시대에 완성된 것으로 이해한다. 성숙된 세계는 인간이 스스로 처리하고 영위해 나갈 수 있는 능력과 범칙을 발전시켰다. 본회퍼는 인간의 자율성의 확대 과정에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것은 ‘종교’도 예외가 아니라는 발견이다. 본회퍼는 인간의 자율성이 확보된 세계를 성숙한 세계, 혹은 성인된 세계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성인된 세계는 인간의 자율성에 의해 유지되는 세계이고 이 세계에서 신을 위한 공간은 없다. 현대인은 외부로부터의 힘, 곧 초월적인 힘을 거부하도록 교육받는다. 즉 인간이 어른이 되면서 ‘하나님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로 바뀐다. 성숙한 세계는 그 자체에 자율성의 근거를 가지며 자율적 해석을 요구한다. 성숙한 세계의 자율성은 인간에게 동시에 책임성을 요구한다. 인간은 우리가 물려받은 사회와 자연을 잘 보존하여 다른 후손들에게 물려 주어야 하고, 이런 책임적 존재를 현대에서는 좋은 지성인으로 부른다. 이제 인간의 책임하에 이 세상은 놓이게 되었고, 인간과 이 세상은 이미 성숙한 세계로 들어왔고 과거의 타율적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둘째는 현대세계가 가지는 무신성과 허무성이다. 본회퍼는 성인된 세계의 다른 측면은 성인된 세계가 가지는 무신성과 허무성이다. 성인된 세계가 자율성이 확대되면서 이 세계는 더 이상 신 없이 모든 것을 처리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인은 세상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 신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스스로 자율성이 확대되었고 인간은 학문과 삶의 여러 분야에서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영역이 종교까지 확대되었다. 당연히 신의 의존부분이 줄어들고 인간 스스로 모든 것을 결장할 수 있기에 이 세계는 성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이 세계 속에서 신을 위한 공간이 없어졌기 때문에 이 세계는 ‘무신성’으로 나타난다.
본회퍼는 중세 이후 이렇게 발전한 현상을 현대세계의 양면성으로 이해했고, 성숙성과 성인된 세계의 다른 한 면을 무신성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성숙한 세상에서는 인간의 사고의 체계, 사회질서 어디에도 신을 위한 자리가 없다. 인간이 점점 더 세상을 통제할수록 ‘신 부재’를 느끼고, 신 부재의 현실은 대중적 현상으로 나타난다. 처음에는 이런 무신성 현상에 놀라지만 이 세상의 자율성을 따라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일반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에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실제적으로는 종교적 형식 안에 거하는 무신론자이다.
신에 대한 무신성은 곡 더욱 심각한 신에 대한 대중적 무관심에 도달한다. 이제 무신성에 대한 심각한 논의를 하지 않으며 그 주제가 심각한 주제가 되지 않는다. 본회퍼는 신 부재에 대한 무신성은 결국 인간에게는 허무주의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본회퍼는 1940년대에 이 세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하였다. 그는 현대세계가 인간의 자율성이 커지면서 과거의 타율적 세계관이 유지될 수 없다고 보았고 인간의 자율성이 증대되는 이 과정을 종교의 영역이 줄어드는 세속화로 보았고, 신에 대한 어떤 의존도 허용하지 않는 이 세상을 성인된 세계이라 칭했다. 하지만, 이 자율적 세상의 다른 측면은 신의 현존도 받아들이지 않는 무신성으로 나타났다. 결국 세속화의 총체적 귀결은 무신성이었고 성인된 세상에 속한 현대인에게는 허무주의로 드러났다. 본회퍼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이러한 자율성과 무신성을 동시에 가진 현대세계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만날 것인가? 이다.
5. 기독교의 비종교화
1) 현대세계에 대한 기독교의 대응
첫째, 인간의 한계가 드러나는 취약 부분에 신을 두려는 시도이다.
교회는 인간이 어떤 한계에 부닥치며 드러나는 약한 부분에서 신을 증명하려고 시도했다. 이런 방법으로 기독교는 성인된 세계를 향해서, 세계는 신이라는 ‘후견인’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증명하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미 인간의 자율성과 현대의 세계관으로는 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살지만, 어느 순간 인간의 일상이 깨지면서 나타나는 비정상적인 취약 부분에서 신을 논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이는 현대세계의 자율성과 세계관을 그냥 유지한 채 하나님을 그 틈새에 두려는 시도일 뿐이다.
본회퍼는 교회의 이러한 변증적 시도를 비판한다. 그는 인간의 취약 부분에 교묘히 신을 두려는 시도를 목회적 속임수라고 보았다. 본회퍼는 인간을 약함의 기초 위에 두고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예수는 먼저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지 않았고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오히려 인간을 죄로부터 불러냈다. 본회퍼는 인간의 한계 안에 존재하는 반쪽자리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취약 부분, 인간의 죄책감 속에서, 심리적 불안 속에서 존재하는 하나님은 온전한 하나님이 될 수가 없다. 본회퍼에게 기독교의 하나님은 온전한 하나님, 우리 삶의 중심에 계시는 하나님, 이 역사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둘째는, 기독교가 시도한 변증은 하나님을 ‘해결의 신’으로 본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곤궁과 삶의 모순을 가진다. 이때 신은 인간이 곤궁을 피해 나가는 해결자로서 등장한다. 이 신은 삶의 당혹과 모순 속에서 현대인이 가지는 어려움을 해결하는 신이다. 본회퍼는 이런 임기응변의 신을 ‘기계장치의 신’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성인된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특수한 어려움이 있을 대만 신을 찾고, 이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것이 신의 역할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어려움이 해결되면 다시 성인된 세계로 돌아간다.
셋째는, 하나님을 인간의 사적(私的)이고 내면적인 영역에 두려는 시도이다.
인간은 누구나 개인적인 영역이 있으며, 내면적이고 사적인 부분이 있다. 현대인은 이 사적인 부분을 누구에 의해서도 침범 받지 않는 고유한 영역으로 이해한다.
본회퍼는 신을 인간의 내면에 두려는 시도를 우려한다. 본회퍼는『창조와 타락』에서 인간의 창조를 해석하면서 인간을 통전적으로 보고 있다. 인간이 영과 육이 따로 있어서 어느 순간에 인간이 영을 “가지는”(has)것이 아니고, 인간 자체가 영이며 육“이다”(is)
따라서 본회퍼는 인간을 영과 육으로 분리하고 하나님을 인간의 내면에 두려는 변증론자들의 시도는 기독교의 신을 더욱 왜곡시키게 된다고 보았다. 본회퍼는 인간의 내면이나 마음이 신을 만나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기독교의 모든 변증적 시도는 정당하지 못하다. 이미 본회퍼는 이러한 시도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본회퍼는 교회의 서툰 변증적 시도에 대해 심각하게 비판한다.
세계의 성인성에 대한 기독교의 변증적인 공격을 본회퍼는 “첫째로 무의미하고, 둘째로 저열하고, 셋째로 비기독교적”이라고 단언한다.
본회퍼가 “무의미하다”고 말한 이유는 이미 성인인 세계를 과거 중세로 돌이킬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미 인간의 자율성은 긴 역사적 과정을 거쳐 현재에 도달했기 때문에 과거로 회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열하다”는 의미는 현대세계에서 상실된 신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인간의 약점과 삶의 모순, 인간의 죄의식을 들춰내고 이용하기 때문이다.
“비기독교적이다”라는 의미는 그리스도를 인간의 어떤 ‘종교성’으로 왜곡시킨다는 뜻이다.
본회퍼는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종교적 감정과 그리스도의 계시를 엄격히 구별한다. 본회퍼는 인간의 곤궁을 해결해 주는 신을 기계장치의 신이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필요에 따라 신을 끌어들이는 행위를 ‘종교적’이라고 보았다.
인간이 자신의 사고체계를 그냥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자율성으로 세속적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필요에 따라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종교’행위이다. 이런 ‘종교’는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을 분 아니라 비기독교적이다.
2) 비종교화의 목적과 타당성
필자는 본회퍼가 종교를 비판한 것은 종교가 가지는 얼마의 개념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서구 유럽은 기독교 국가로서 기독교를 ‘종교’라는 밀접한 연관 속에서 문화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회퍼의 종교에 대한 비판은 당시 기독교와 서구 문화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보아야 한다.
그의 종교의 비판은 성서의 계시를 종교로 만든 기독교, 그리고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 전락시킨 서구문화에 대한 비판이라는 관점으로 볼 때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다.
본회퍼가 비종교화를 시도할 때 염두에 둔 종교에 대한 다섯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종교는 부분적이다. 종교는 인간의 삶의 취약부분이다.
둘째, 종교는 인간의 필요에 종속된다. 그렇기에 종교의 신은 기계장치의 신이
고, 해결사의 신이다.
셋째, 종교는 내면적이고, 사(私)적인 성격으로 규정된다.
넷째, 종교는 본질적으로 이원론적이다. 저 세상과 이 세상, 신성한 것과 세속
적인 것으로 나누고 두 영역으로 분리한다.
다섯째, 종교는 인간의 삶과 역사를 떠나있다. 종교의 신은 역사를 떠나 있으
며, 인간의 고난과 역사의 고통을 외면한다. 그래서 본회퍼는 “종교
적 행위가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기독교인을 만든다.”라고 말했다.
종교에 대한 다섯 가지의 특징을 보면 비종교화의 성격이 드러난다.
비종교화는 종교가 가지는 부정적 성격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즉, 예배나 영성 없는 기독교를 의미한 것은 아니다.
본회퍼는 교회의 변증적 시도가 결국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 만드는 것이라고 보았다. 기독교를 종교로 보려는 여하한 시도는 성공적일 수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성인된 세상은 다른 말로 하자면 무종교의 시대가 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이미 현대세계는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무종교의 시대에 진입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본회퍼가 시도한 것이 바로 기독교의 비종교화이다.
본회퍼는 종교를 복음을 감싸고 있는 의복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본회퍼는 종교를 역사적으로 나타나 잠정적인 효용성을 가지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기에 본회퍼는 그 시대의 종교 혹은 종교성이 복음을 잘 드러내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된다면 종교를 비종교화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비종교화의 목적은 무엇인가?
성서의 신은 현대인의 필요에 따르는 해결의 신, 종교의 신이 아니다. 기독교의 신은 정신 치료나 기독교 상담에 등장해서 한 요소를 채워주는 자도 아니고, 인간 실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실존론적 결단의 동인도 아니다. 본회퍼는 기독교를 잘못된 종교라는 형식에 두는 것보다 비종교화를 할 때 성서의 하나님이 노출된다고 보았다.
본회퍼는 기독교의 신이 인간의 내면, 경건성, 혹은 실존의 한 부분에 위치하는 것을 거부한다. 기독교가 인간의 요청에 따르는 종교가 되면 하나님은 어떤 한계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본회퍼가 기독교의 비종교화를 통해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역사 전체의 신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현대 사회의 성숙성 속에서 밀려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이 세상의 주(主)이고, 인간의 한 주변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고, 이 역사의 주인이다. 이것이 본회퍼가 시도한 비종교화의 진정한 목적이다.
본회퍼의 비종교화의 과제는 무종교 시대에 하나님을 이 역사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는 비종교화를 통해 종교적 영역과 세상의 구별을 극복하려 했다. 성숙한 세상 속에서 종교라는 작은 영역에 신을 두려는 것이 아니고, 세상과 종교의 이원화를 극복함으로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주인이 되도록 시도했다.
필자는 본회퍼가 시도한 기독교의비종교화를 ‘성과 속’의 해체라고 본다.
그는 현대 세계에 직면한 기독교의 위기를 성과 속의 구별 자체를 없앰으로써 신이 종교적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을 극복하려 한 것이다.
그렇다면 본회퍼가 성과 속의 구분을 없앨 수 있는 타당성이 있는가?
타당성의 근거는 본회퍼의 이 세상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다. 본회퍼는 이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보지 않는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하나의 세계 밖에 없다. 이 하나의 세계에 유일한 주인은 오직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이 본회퍼의 근본 사상이기에 세상을 하나의 세계로 보는 것이 타당한 일이다.
하나의 세계라는 본회퍼의 인식은 신학적으로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첫째, 기독교 신앙이 세속적 측면을 가진다. 기독교 신앙은 세속의 영역에 표
현되고 추구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이 세상 속에도 거룩의 요소가 있다. 성(聖)은 종교적 영역에만 있는 것
은 아니다. 성은 세속적 차원에서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세속적 차원의
행위에서도 예수를 만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본회퍼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세상의 분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 속에도 계시의 신성한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는 계시를 비종교화하려는 것이 아니고, 비종교화를 통해 세상 속에서 계시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본회퍼는 기독교를 철저히 비종교화 하여 종교와 세속의 구별을 극복하고, 현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삶’이 우리 시대에 추구해야 할 기독교인의 길이라고 믿었다. 그는 종교가 아니고 삶 자체가 신을 만나는 매개가 된다고 믿었다.
본회퍼의 이러한 시도는 이 세속 세계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부여했다. 본회퍼의 비종교화에서 신을 만나는 장(場)이 교회라는 종교적 영역이 아니라 역사라는 강력한 신학화가 일어났으며, 성과 속의 이원화를 극복하는 시도가 종교적 영역의 약화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하나의 온전한 삶과 현실, 그리고 온전한 역사 전체가 신을 만나는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6. 신 없이 신 앞에
1) 그리스도의 현실
본회퍼에게있어서 윤리의 출발점은 항상 구체적인 현실에서 출발한다. 또한 그는 현실을 종교와 세속적인 영역으로 나누지 않는다. 그 이유는 두 영역으로 나누는 사고방식을 율법적 사고방식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현실은 눈에 보이는 현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세상이라는 현실, 자연적인 인간의 상태가 아닌 그리스도의 현실이다. 본회퍼는 인간은 스스로 자연적인 인간학을 구축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인간이 새로운 가치의 추구를 자신에게서 찾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보면서 기독교 윤리의 출발을 인간의 현실이나 세상의 현실이 아니며, 하나님 없는 현실을 현실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인간의 노력에 의한 윤리적인 선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본회퍼에게 있어서 유일한 현실은 바로 그리스도의 현실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궁극적인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은 모두 추상적이라고 보았다. 본회퍼가 말하는 현실은 그리스도의 현실이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현실이다.
본회퍼는 기독교 윤리의 시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현실이라고 보았으며, 본회퍼는 현실을 강조하였지만 그에게 있어서 현실은 눈에 보이는 불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이세계의 현실은 근원적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현실을 직시하였다. 그리고 이 세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궁극적인 실체로서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현실일 뿐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현실의 개념들은 모두 추상적이라고 하였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세계는 하나이고 이 하나의 세계는 바로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였다. 그리고 본회퍼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현실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현실은 세계의 현실 속으로 들어왔으며, 하나님의 현실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현실의 문제가 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현실과 그리스도의 현실은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리스도의 현실은 유일하고 궁극적인 현실로 보았기 때문에 윤리의 과제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현실이 그 피조물 가운데서 실현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현실이 이 세계 속에 구체화되고 실현되는 것이며 이 어두움을 벗겨내고 그리스도의 현실이 분명히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이 현실을 실현해내는 것이 바로 윤리의 과제라고 보았다. 본회퍼는 윤리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세계의 현실에 참여하는 것이며 유일한 목표는 이 피조 세계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적 현실의 실현에 있으며, 이 현실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또한 본회퍼는 보편적인 선이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추구해 나갈 수 있는 선은 없으며 유일하게 행할 수 있는 선은 바로 그리스도의 현실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선은 어떻게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현실에 참여하느냐의 문제이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선은 그 자체적으로 가지는 가치의 개념이 아니며 하나님으로부터 이탈된 가치와 선은 없으며 그리스도와 분리된 선은 존재하지 않으며 보편적일 수도 없다고 보았다. 본회퍼가 일반적인 윤리를 거부하는 요소는 첫째 윤리를 경험의 범주에서 다루지 않았으며, 둘째 측정 가능한 가치와 현실을 기본으로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시작하지 않았으며,셋째 상황을 규범화해서 행동지침을 마련하는 상황윤리의 거부라고 할 수 있다. 본회퍼의 윤리에 나타나는 두가지 특징은 첫째 그리스도의 현실을 유일한 현실로 보았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한 단호한 저항과 변화를 요청하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현실만이 유일한 현실이며 이 현실의 실현을 윤리적 과제로 보는 인식은 강한 실천적 참여를 수반한다. 둘째 윤리가 신학의 여러 주제에 덧붙여진 하나의 갈래가 아니라 전체 신학과 연관되어있다. 결론적으로 본회퍼는 윤리에서 윤리적 원칙이 아닌 신학적 원칙을 찾으려고 하였으며, 윤리를 실천이 포함된 모든 신학적 주제들의 결집으로 보았다.
2) 그리스도의 형성
본회퍼에게 기독교 윤리의 궁극적 목표는 그리스도의 현실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본회퍼는 “형성으로서의 윤리”라는 제목으로 다룬다. 그는 윤리의 구체화를 형성이라는 개념으로 시도한다.
본회퍼는 인간이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는 행위를 형성이라고 보지 않는다. 인간 사회가 제시하는 어떠한 것도 형성에 포함되지 않으며 오직 하나의 형성만이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형성들 가운데 오직 한 모습, 세상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의 형성”만이 유일한 형성이다.
본회퍼는 그리스도를 유일한 형성으로 보았지만 그 의미는 그리스도를 우리가 따를 수 있는 모델로 본 것이 아니며 또한 그를 닮아가려는 인간의 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본회퍼가 이해한 화해자 예수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성을 따르는 삶을 찾을 수 있다. 예수에게서 하나님과 세상은 화해되고 하나님과 세상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나타난다. 이제 세상 없는 하나님도 아니고, 신 없는 세상도 아니다. 예수에게서 하나님과 세계가 만나고 하나님과 이 세상의 실체가 함께 만나며 드러난다. 그리고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진다.
예수 안에서 신과 세상의 화해를 발견했기 때문에 성과 속의 분리를 거부한다.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 형성은 인간이 모방하거나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다양한 윤리적 노력과 시도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율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윤리는 인간이 선의 ‘기준’을 만들고 그것을 향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하나님의 뜻)이 가장 잘 드러나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율법의 원 정신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윤리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형성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윤리의 최종적 목적은 그리스도의 형성을 이 세상에서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본회퍼의 주장은 상반된 주장을 하는 듯하다. 노력하는 삶이 아니라면서 만들어 가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이 된다. 인간은 하나님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습의 변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시킨 하나님이다. 이렇게 함으로 인간은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된다.”
변증법적 긴장의 요청 : 인간이 그리스도의 형성에 참여하려는 노력이 요청된다. 이것은 인간의 자기 노력에 의해 성취되지 않는다. 인간의 노력 중에 인간은 오히려 유일한 그리스도의 형성에 스며들고 그리스도에 의해 참인간으로 형성된다. 이 변증법적인 조화가 바로 본회퍼의 형성의 윤리의 핵심이다.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계시적 현실, 이 유일한 ‘현실’에 참여하고 복종하여 그리스도의 형성을 이 세상에서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 안에서 행하는 우리의 전 실존을 건 복종을 의미한다. 삶과 역사의 전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보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끌려 들어오는 것, 인간이 되고, 십자가에 달려 죽고, 부활한 인간의 유일한 모습과 같은 모습이 되는 것으로서의 형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성에 동참하고 그의 부름에 복종한다. 우리는 무신성의 시대에 지적인 정직성을 가지고 ‘신 없이’, ‘신 앞에서’ 헌신한다. 우리는 그에게 복종했지만 오히려 그에 의해 우리가 새롭게 형성된다.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시도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교회도 그리스도의 형성을 향해 부름 받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이므로 세상과 구별해 피할 수 있는 은신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실을 증거하는 장소이다. 교회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해 싸워야한다.
본회퍼는 자신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했다. 그리스도의 현실을 거부하는 모든 힘은 우상이다. 그리스도의 현실을 막는 어두움의 힘은 히틀러로 상징되는 당시의 독일의 현실이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형성을 가로막는 독일의 현실에 대해 전 실존으로 저항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 그의 형성에 참여하는 것은 각 시대와 역사 속에서 각자의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져 있다. 본회퍼에게 던져진 것과 같은 요청이 우리에게도 던져져 있다.
3) 신 없이 신 앞에_궁극적인 것과 길 예비
그리스도의 현실만이 유일한 현실이다. 그러나 아직 그리스도의 현실이 완전히 현재화된 것은 아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은혜속에 들어온 현실, 의로워진 상태를 ‘궁극적인 것’이라고 했다. 아직 의인화되지 못한 상태, 그리스도의 현실로 들어오지 못한 이 세상의 상태를 ‘궁극이전의 것’이라고 말했다. 궁극이전의 것은 “궁극적인 것 이전에 생기는 모든 것이고 궁극적인것이 발견됨으로써 궁극이전의 것으로 인정되는 모든 것이다.”
궁극적인것과 궁극이전의 것의 관계설정에는 두 개의 극단적인 길이 있다. 하나는, 급진적인 길로 궁극적인 것만을 바라보며 여기서 궁극이전의 것은 완전히 무시된다. 궁극이전의 세계는 어차피 망해야 하는 현실이다. 은혜는 궁극이전을 향해 차가운 율법의 가혹성으로 나타난다. 다른 하나는, 타협의 길로 현재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궁극이전의 세계는 자체적으로 존재의 가치를 가진다. 궁극이전의 것은 궁극적인 것으로부터 위협받지 않는다.
본회퍼는 이 두가지 길 모두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두가지 길은 똑같이 극단적이고 오류를 가지며, 이 두길은 진정한 해결이 안된다. 이 둘은 서로 배격의 관계에 있다. 본회퍼는 이 두가지 길이 가지는 근원적인 차이를 이렇게 말한다.“급진적인 해결은 모든 것의 종말과 심판과 구원의 하나님을 생각하고, 타협적인 해결은 청조주와 보존의 하나님을 생각한다. 즉 전자는 종말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후자는 이미 존재한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 두 길 어느것을 택해도 창조와 구속, 시간과 영원은 서로 대립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 자신의 통일성은 파괴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붕괴된다.
본회퍼는 예수도 이 두가지 길중에 하나르 택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상호대립이 하나가 되고, 하나님과 세상의 화해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중요한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하나님의 현실과 인간의 현실이다.”
예수에게는 두 길이 하나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극단주의도 타협주의도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의 현실이 존재한다” 예수의 독특한 양식은 그의 성육신, 십자가, 부활을 통해 나타난다. 예수는 신이면서 이 피조의 세계, 이 역사의 한 가운데로 들어오셨다. 그는 궁극적인 분이었지만, 이 세상에서 궁극이전의 것으로 서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그를 거부했고, 그결과는 십자가로 나타났다.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을 대신 죽었지만, 여전히 그리스도가 들어온 이 세상에, 자신이 십자가를 진 이 세상에 여전히 주로 남아있다. 이것이 예수가 보여준 성육신, 십자가, 부활의 양식이고 서로 구별과 통일성을 이루며 독특성을 구성한다. 그리스도에게서 궁극적인것곽 궁극이전의 것이 만나고 이 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한다. 위에서 본것처럼 본회퍼는 궁극적인것과 이전의 것을 예수의 성육신, 십자가, 부활에서 찾았다.
본회퍼의 윤리적 특징도 궁극적인 것과 이전의 것을 조화있게 보는데 있다. 그는 이 세상것에 대해 거부하지 않았다. 궁극이전의 것은 근원적인 의미에서 그 자체로 존재의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궁극적인것과 관계속에서 궁극이전의 가치를 가진다. 이점에서 본회퍼이 이 세상에 대한 긍정과 사랑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확실히 오고 인간이 미리 예비하고 있든지 않든지 그 자신의 길을 연다” 라는 그의 말은 언젠가 그리스도의 현실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의 표현이다. 이 길예비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가 은혜로 하는 것이지만, 인간은 길 예비에 참여하는 책임적 존재가 될 수도 있고 그것에 저항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굶주린 자들에게 빵을 주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는행위들은 마땅히 해야할 과제이지만 본회퍼는 궁극적인 것과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궁극이전의 것을 혼돈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본회퍼는 기독교인의 역사참여에 대해 분명한 방향을 보여준다. 기독교인의 윤리적결단과 기독교인의 참여는 이 현실속에서 이루어진다. 본회퍼는 이렇게 기독교인의 윤리와 책임이라는 토대 위에 구체적인 네가지 위임을 거론한다. 노동, 결혼, 정부, 교회라는 네가지 위임을 제시한다. 위임은 궁극이전의 세계에 사는 기독교인이 실천할 구체적인 항목이다. 궁극이전의 시간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고 길 예비를 할 수 있는 승인받은 시간이다. 본회퍼는 위임의 개념을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현실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가 행해야 할 구체적인 위탁이라고 보았다. 본회퍼가 제시한 위임은 기독교인이 이 역사속에서 얼마나 구체적으로 책임적 존재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항목들이다.
4) 남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
본회퍼는 복종 없는 신앙은 싸구려 은혜가 된다고 우려했다. 복종은 그리스도의 부름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본회퍼의 신학은 그의 삶 속에서 드러났다. 그의 신학과 삶이 만나는 지점은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본회퍼는 자신의 신학대로 살았다. 그렇기에 그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라.”는 요청은 우리를 향해 힘차게 울려온다.
본회퍼는 그의 저서 곳곳에 그리스도의 부름과 따름에 관해 언급한다.
그의 신학에서 부름과 따름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크다. 그리스도의 부름에 순종하는 따름과 연관해 그리스도의 은혜가 비싸게도 되고 값싸게도 된다. 부름과 따름을 그렇게 단순하게 취급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본회퍼 신학에서 부름과 따름이 변증법적인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행위를 강조한다. 그에게 그리스도를 따름은 삶의 전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지금까지 자신을 유지한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따름은 세상과의 완전한 단절인 동시에 그리스도와는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신앙도 따름의 연관에서 이해된다. 본회퍼에게 신앙은 믿는다는 자기 인식이나 믿음에 대한 내적 확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신앙은 예수의 부름에 순종하는 것이다. 본회퍼는 먼저 믿고 나서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자만이 믿을 수 있다고 보았다. “순종의 첫걸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기 위한 첫 행위이다.… 믿기 전에 먼저 순종의 첫 출발이 필요하다. 순종치 않는 자는 믿을 수 없을 것이나, 오직 순종하는 자는 믿을 수 있다.”
본회퍼가 말하는 따름은 먼저 따르는 자의 “자세”와 연관된 것이지, 어떤 하나의 항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말로, 우리 삶의 어떤 부분 혹은 일정한 시간을 주를 위해서 바치는 것이 아니다. 순종과 따름은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의미한다. 예수를 따름은 나의 생활과 삶의 안정을 버리고 미지의 불안한 곳으로, 계획할 수 있는 삶에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삶으로 완전히 옮겨가는 것을 의미한다.
본회퍼의 부름과 따름의 의미는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예수의 부름에 순종하는 따름에서 시작된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따름은 우리 삶의 한 부분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 온전히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을 말한다. 이는 동시에 기금까지 살아온 우리 삶의 모든 법칙과의 결별이고, 또 우리를 지켜 주는 모든 세상적인 안전을 포기하는 것이며, 전혀 아무런 내용조차 없어 보이는 불안하기 그지없는 미래에 우리의 전 실존을 던져 넣는 것이다.
본회퍼의 유명한 테제인 은혜에 대한 논의도 내면에는 따름과 연관이 되어 있다. 본회퍼는 은혜를 귀중한 은혜와 값싼 은혜로 대비한다. 값싼 은혜는 그리스도에 의해 은혜가 값없이 주어졌으니 교회가 이 은혜를 값없이 무한정 줄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잘못된 사고에서 비롯된다.
본회퍼는 교회가 은혜를 값싸게 취급하고 나누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고 본다. “값싼 은혜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의 부정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되었다는 것에 대한 부정이다.” 값싼 은혜라고 하는 것은 은혜를 값싸게 대하는 교회와 목사, 혹은 기독교인들의 태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목사로서 철저한 회개 없는 죄 사함을 설교하는 것, 죄의 고백 없이 베푸는 성만찬, 십자가 없는 은혜의 선포, 합당하지 않은 축복은 모두 은혜를 값싸게 만든다. 교인들로서는 자신의 삶의 변화와 회개함과 죄책에 대한 고백이 없이 은혜와 축복만을 요구한다면 은혜를 값싸게 만드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값비싼 은혜는 무엇인가? 은혜가 귀하게 되는 것은 예수의 부름에 순종하는 따름이 있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이를 함축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은혜는 따라오라는 부름 때문에 비싸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오라는 것이기에 은혜이다. 은혜가 비싼 것은 그것이 사람에게 삶을 요구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참 생명을 주는 것이기에 은혜이다.”
예수의 부름에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버리고 기꺼이 그리스도를 따를 때 이 은혜는 귀해진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지 않는 자는 은혜를 알 수가 없다. 예수의 부름에 전적인 순종 없이는 은혜를 은혜로 만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자신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라고 우리를 부른다.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수의 부름에 순종하는 것이 따름이며, 신앙 자체가 따름이라는 행위에서 시작된다. 은혜가 귀한지 값싼지 여부도 예수를 따를 수 있는지에 초점이 모아진다.
본회퍼는 인간의 능력으로 과연 자신이 주장한 대로 전적인 따름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이 질문은 실제적이고도 중요하다. 만약 가능하지 않다면, 가능하지도 않은 요구를 본회퍼는 왜 하는 것일까?
본회퍼는 그리스도를 우리가 따를 수 있는 모범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를 역사상에서 만날 수 있는 일종의 힘으로 보지도 않는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우리의 노력은 사실 우리를 절망케 한다. 우리의 노력이 클수록 절망도 크다. 인간의 무능력 속에서 이것을 가능케 하는 은혜를 만나게 된다. 내가 철저히 순종하며 따르려 할 때 우리는 먼저 깊은 좌절을 맛본다. 그러나 그때 “예수는 우리를 불러 양심과 죄의 갈등에서 구출해 단순한 순종을 인도한다.” 그러므로 참 순종과 따름은 은혜로 일어나는 것이다. 만약 순종과 따름이 재물을 버리는 것, 어떤 윤리적인 삶, 청빈주의, 혹은 이상주의와 같은 율법화된 기준을 지키는 것이라면, 이런 것은 인간의 자기-결단이며 자기-의의 성취일 뿐이다. “예수의 부름에 순종하는 것은 결코 인간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철저한 순종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일어난다. 순종이 인간에게 요청되고, 인간은 순종하려 노력하지만, 순종이 가능해지는 것은 예수에 의해서이다.
따름은 우리가 예수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다. 따름은 예수가 우리에게 허락한 은혜이다.
예수의 부름에 순종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우리를 좌절케 한다. 그러나 이 좌절을 통해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를 만난다. 순종과 따름은 인간에 의해 직접적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거쳐 변증법적인 통일을 이룬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무한한 자유와 기쁨을 뜻한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우리가 이 그리스도의 부름을 외면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값싸게 만든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내면의 세계에 가두어둘 수 없다. 그는 결코 인간 경험의 한 부분에 위치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 존재의 중심이며, 이 역사의 중심이며, 우주의 중심이다. 그는 이 세상의 주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형성’(form)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라는 부름은 그의 은혜로 들어오라는 초청이다. 그의 부름에 복종하고 따름은 그의 은혜 속으로 잠겨 드는 것이다.
7. 평가
우리가 본회퍼를 잊지 못함은 본회퍼만이 보여준 그의 삶과 신학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본회퍼의 신학이 우리에게 남긴 특징을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한다.
첫째, 그의 신학은 ‘삶의 신학’이다. 이것은 그의 신학이 자신의 삶과 고민을 따라 형성되었다는 의미이다. 둘째, 본회퍼의 신학은 ‘동시대의 신학’이다. 그의 관심은 철저히 ‘현재’와 연결되어 있었고, 그가 어떤 주제를 다루더라도 현재라는 ‘동시대’를 고려하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셋째, 그의 신학은 ‘역사 책임적 신학’이다. 그의 신학은 반드시 구체적인 역사의 장에서 실천을 통해 신학적 통찰을 얻었고, 그 결과는 역사 속에서 실천을 통해 다시 구체화되었다.
본회퍼의 신학의 내용을 보면, 그의 신학이 우리에게 주는 통찰은 현대 세계의 이중성에 대한 해석이다. 그는 현대 세계의 자율성과 무신성을 정확히 지적하였다. 또 다른 통찰은 현대세계와 복음의 상관성 문제이다. 그는 성과 속의 이원화 속에서 복음이 온전히 매개되지 못하는 것을 알아챘고, 이 문제가 전통적인 기독교의 틀로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의 비종교화를 통해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그리고 그가 윤리를 신학의 한 주제로 삼지 않고 전체 신학의 구조 안에서 다룬 것도 훌륭한 시도였다. 윤리가 굳건한 신학적 토대 위에 있기 때문에 삶과 연결될 때 신학적 의미가 상실되지 않는 강점이 드러난 것이다. 그가 윤리에서 궁극적인 것과 궁극이전의 것을 조화 있게 본 것은 좋은 통찰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본회퍼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를 인간의 결단의 영역에서 다루지 않았다. 그는 따름을 그리스도의 부름과 연결했고, 인간의 결단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연결시켰다. 그는 인간의 결단을 율법적인 자기 책임성에 맡기지 않고 변증법적 긴장을 거쳐 은혜의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본회퍼는 여러 신학의 형성과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본회퍼의 신학이 세속화 신학이나 신 죽음의 신학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본회퍼의 신학의 어떤 부분은 혁명적이고 어떤 개념은 과격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본회퍼는 끝까지 은혜의 우선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은 오직 은혜로 구원받으며, 이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것이다. 이 점에서 본회퍼는 철저히 ‘오직 은혜’라는 종교개혁의 전승 속에 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사상 중 가장 논란거리인 비종교화도 계시를 떠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비종교화를 통해 성서의 정신이 살아나고 계시가 드러나기를 기대했다.
본회퍼는 떠났다. 그는 자신의 시대에, 자신에게 던져진 소명에 전 실존으로 응답하고 떠났다. 그가 그렇게 변화시키려 했던 현실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그가 힘껏 맞서 부딪혔던 무신성의 세계는 여전히 우리의 현실이다. 그는 떠났고, 이제 우리의 응답이 남아 있다.
제4장 계시와 실존 :불트만
1. 생애, 사상적, 원천, 주요 주제들
1) 학자로서의 생애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은 1884년 8월 20일 독일 북서쪽의 올덴 부르크 근처의 비페슈테드에서 아버지 아르투르와 어머니 헬레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불트만의 가계는 정통적인 개신교 목회자 가문이었다. 아버지는 루터교 목사였고 할아버지는 아프리카의 선교사였으며, 어머니 쪽으로 외조부도 개신교 목사였다.
1892~1903년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의 기간
올덴부르크에서 중등과정인 김나지움을 다녔다. 종교학, 그리스어, 독일 문학에 특별히 관심이 있었다. 그리스어에 두각을 나타냈고, 신학공부를 하면서 신약학자로서 중요한 자질을 갖추게 되었다.
1903~1912년은 신학수업 기간이며 연구의 시기
불트만은 1903년 튀빙겐대학에서 신학을 시작해 3학기를 보내고, 베를린 대학에서 2학기를 보낸 후, 마지막으로 마르부르크에서 2학기를 더 보냈다.
불트만은 마르부르크에 있는 동안 바이스의 권고로 전공을 신약학으로 박사학위를 시작하려고 결심했다. 그는 1910년에 신약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마쳤고 1912년에는 마르부르크대학의 율리허 밑에서 교수 자격 논문을 마쳤다.
1912~1951년은 신학 교수로서 저술과 후학 양성에 힘을 쏟은 기간
1912년 마르부르크대학의 초빙을 받아 1916년 가을까지 강사로 지냈다.
1916년 블레슬라우에 조교수로 가서 1920년까지 일했다. 브레슬라우에 있는 동안 헬레네 펠트만과 결혼했다.
불트만은 1920년 가을에 기세(Giessen)대학에 부셋(W. Bousset)의 뒤를 이어 정교수로 초빙 받았다. 그는 기센에서 1년 정도 지낸 1921년에 마르부르크대학으로 돌아가서 1951년 은퇴할 때까지 마르부르크를 떠나지 않았다.
1912~1951년은 교수로 생활하는 기간이며, 불트만의 중요한 저작이 대부분 이 시기에 출판되었다. 교수 생활을 하는 동안 다른 곳으로 옮긴 적 없이 매우 단순한 생활을 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저술과 강의에 치중했다.
1921년 ‘공관복음 전승사’가 출판
이즈음에 불트만은 바르트의 ‘롸서 주석’으로 격발된 변증법적 신학 운동에 중요한 일원으로 함께 한다. 불트만은 자유주의 신학 중에서도 과학적 방법론, 역사비평학 등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다. 불트만은 항상 깨달음을 추구했고 배우는 일에 열심이었다.
불트만의 학문적 발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은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와의 만남
불트만은 하이데거를 통해 인간의 현존과 인간을 보는 실존주의적 토대를 형성했다.
1933년 자신의 논문집인 ‘신앙과 이해’의 첫 권을 하이데거에게 헌정 했다.
1933년 이후를 나치 정권이 등장하면서 상당히 우울했던 시기로 기억한다. 불트만은 1930년대에 나치 정권에 반대하는 고백교회에 소속한다. 그는 반 나치 운동을 펼치지는 않았으나 유대인에게 호의적이었고, “바르멘 신학선언”에도 동의를 한다.
1942년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동생이 포로수용소에서 죽는 슬픔을 겪음
1941년 4월 21일에 발표된 논문 “신약성서와 신화론”은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큰 신학적 논란에 속한다. 이 논문은 신학계에서 즉각적인 집중을 받아 많은 학자들이 토론에 참여했고, 이 논문은 곧 책으로 출판되었으며, 나중에는 일반 평신도들도 토론에 가세하게 되었다.
이것이 불트만의 “비신화화” 논쟁이다.
불트만은 비신화화 논쟁으로 말미암아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얻었다.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당시에도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아직도 상당 부분은 그 오해의 연장 속에 있다.
1951~1976년은 은퇴 후부터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기간
불트만은 1951년 은퇴 후에도 줄곧 마르부르크에서 살며 저술 활동을 RP속했고, 제자들의 세미나도 불규칙적이었지만 지속했다. 이 시기 여러 나라에서 강연을 했다. 그중에는 미국 예일대학에서 샤퍼 강연이 있었고 그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론’이 출판되었다.
1955년 영국 에든버러 대학에서 기포드 강연을 했고 그 결과로 유명한 ‘역사와 종말론’이 출판 되었다.
불트만은 대중적인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지성과 솔직한 삶의 자세, 그리고 제자들과의 열정적인 토론을 통해 후학들에게 신학의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불트만의 신학과 그의 학자적 면모에 두터운 제자층이 생겨 소위 말하는 불트만 학파가 형성되었다.
불트만은 1976년 7월 30일에 92세 생일을 얼마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2. 역사적 탐구에서 불트만의 위치와 자료
역사적 예수 논쟁은 비신화화 논쟁과 함께 불트만의 신학에서 가장 열띤 논쟁의 주제였다. 이 주제는 학문적으로도 중요하고 일반인들에게도 아주 관심 있는 주제이다. 일반인들은 신앙에만 호소하는 예수의 모습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밝혀진 새로운 예수의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불트만의 역사적 예수 논쟁이 학자들 사이에 큰 관심을 모은 것은 불트만이 이 논쟁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불트만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정확한 입장과 신학적 의미를 알려면 먼저 전체 ‘역사적 예수의 탐구’에서 불트만이 점하고 있는 위치부터 확인해야 한다.
1). 역사적 예수의 탐구에서 불트만의 위치
불트만의 역사적 예수의 탐구에 관하여 세 가지로 나누어 보면 먼저 1 단계로써 대체로 1750-1900년경까지로 볼 수 있고, ‘원래 예수’(original Jesus), 혹은 ‘진짜 예수’(real Jesus)를 찾겠다는 열정이 지배한 시기이다. 이 시기의 연구가 주로 예수의 생애에 집중되었다고 해서 ‘예수 생애 운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점에 1921년 불트만의 <공관복음 전승사>가 출판된다. 이 책은 양식사 비평이라는 역사비평의 한 방법론을 개척하는 것으로서 매우 놀라운 저술이었다. 하지만, 역사적 예수의 탐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의 등장은 거의 치명적으로 보였다. 불트만은 예수의 말씀을 양식(form)에 따라 엄격하게 그 진정성을 검증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 믿어 온 예수의 말씀 중에 진정성을 획득한 말씀이 많지 않았다. 양식 비평을 통과한 말씀은 ‘비판적으로 검증된 최소한’이었다. 불트만이 이 책에서 사용한 방법론과 이론이 너무나 치밀하였기 때문에 양식 비평의 결과를 누구도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양식 비평의 결과에 비추어보면 과거에 해 오던 역사적 예수의 탐구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불트만의 양식 비평은 쉬트라우스, 바우어, 바이스, 슈바이처로 이어지는 역사 비평학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킨 결과로 평가할 수 있다.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에 의해 신앙이 담보될 수 없다는 켈러의 명제 또한 받아들였다. 하지만 불트만 이후 더 이상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열기가 과거처럼 살아날 수는 없었다. 자연히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의 탐구를 종식시킨 인물로 평가받았고,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를 찾을 수 없다는 회의론자로 인식되었다. 이런 가운데 불트만은 1926년에 <예수>를 출판했으며, 이 책이 불트만의 저술 가운데 가장 뛰어난 책이라고 말했지만, 불트만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신학적 입장에 대해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통일된 평가는 없었다. 그 후 1950년대가 되면서 불트만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가 막을 올렸다. 불트만의 위치는 이 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옛 탐구’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더구나 복음서의 자료를 통해 예수의 일대기를 재구성하는 것에 대한 불가능성을 분명히 했다. 그의 양식 비평은 자료에 대한 철저한 검증 없이 역사적 예수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예수의 진정성 있는 말씀을 통해 역사적 예수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의 도달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 즉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옛 탐구’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방법에 의한 역사적 예수의 탐구는 가능하다고 믿었다. 저자인 김동건씨는 불트만을 역사적 예수의 탐구 1단계인 ‘옛 탐구’를 종식시키는 역할을 했고, 동시에 2단계인 ‘새 탐구’의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한다. 불트만의 양식 비평은 복음서의 말씀이 예수의 생애를 위한 자료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 복음서의 주요주제가 예수의 생애가 아니가 예수의 선포라는 것이 부각되었다. 예수의 생애나 인격보다 예수가 선포한 내용에 관심을 기울여야 된다는 관점의 변화를 가져왔다. 예수의 말씀, 비유, 산상수훈 등에 관심이 증폭되었고, 특히 예수선포의 중심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으나, 제자들은 예수를 선포했기 때문에 이 양자 사이의 괴리가 오히려 더 부각되는 결과는 가져왔다. 이 주제는 작게는 복음서와 바울 서신 사이의 괴리 문제로 나타났지만 크게는 신학 전체의 새로운 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새 탐구’의 공식적은 시작은 1953년 케제만이 마르부르크에서 불트만의 제자들 사이에 발표한 “역사적 예수의 문제”라는 강연에서 비롯된다. 이어서 불트만의 제자인 푹스가 1956년 취리히대학에서 유사한 주제로 강연을 하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열기가 다시 일어났다. 새 탐구는 케제만, 푹스, 보른캄, 에벨링, 로빈슨이 주도했고 콘첼만, 풀러 등이 가세했다. 이들은 대부분 불트만의 제자이거나 그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로서 소위 불트만 학파로 불리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다. 새 탐구의 태동은 불트만의 제자들이 불트만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회의론을 반박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견해가 상당히 있다. 하지만 이들의 어느 논쟁에서도 불트만의 역사적 예수의 탐구 자체를 회의하거나 부정했다는 말은 없다. 앞에서 본 것처럼, 불트만의 실제적으로 새 탐구가 가능할 수 있는 신학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물론 역사적 예수의 말씀에 대한 분석, 복음서 자료에 대한 인식, 특히 역사적 사실과 신앙의 상관성에 대해서 불트만과 제자들 사이에 차이를 보인다. 오히려 이런 차이에 대한 비판과 토론을 통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 탐구가 내실 있게 발전하게 되었다.
2). 역사적 예수의 탐구를 위한 자료
불트만은 복음서를 양식 비평이라는 방법론에 의해 이해한다. 불트만의 복음서 이해를 보기 전에 먼저 불트만이 주장한 양식 비평의 특징을 보자. 불트만의 양식 비평은 두 가지 전제를 가진다. 첫째는, 예수의 사역과 복음서의 기록 사이에 일정한 기간이 있다. 양식 비평은 필요한 단위의 기원과 역사를 밝히고, 이를 통해 어떤 전승이 문학적인 형태를 갖기 이전의 역사를 찾으려 시도한다. 둘째는, 구전 기간 동안이 전승의 단위들은 그들이 기독교 공동체에서 취한 역할에 따라 특별한 ‘양식’들을 취한다. 양식 비평의 목적은 어떤 공동체의 삶이 형성되고, 그 공동체의 삶을 규정짓고 그 삶의 스타일과 범주를 내포한 문학적 양식에 대한 판단에 있다. 즉 모든 문학적 범주는 그 자신의 ‘삶의 정황’을 가진다. 따라서 불트만의 양식 비평은 각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공동체의 삶 속에 있는 전형적인 삶의 정황에 관심을 가진다. 불트만은 양식 비평의 이런 관점에 따라 복음서를 이해한다. <공관복음 전승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부분은 ‘예수의 말씀’이고 다른 부분은 ‘설화 자료’이다. 이 중에서 우리는 특히 첫 부분인 예수의 말씀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그들의 양식에 따라 ‘경구’와 ‘주의 말’로 분류된다. 주의 말은 ‘나-말’과 ‘비유’를 포함한다. 예수의 예언적 말씀과 묵시적 말씀의 양식은 대체로 유대적 문헌들과 유사하다. 그러나 내용의 의미는 상호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이유는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씀에는 유대 문헌과 다른 뚜렷이 구별되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구원의 현재적 요소이고, 다른 하나는 결단의 중요성이다. 그러면 이 두 가지가 어떤 의미인가? 첫째, 예수의 말씀은 “미래의 구원에 관한 일반적인 예언이 아니라 현재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 기다려 오던 그 시기가 지금 일어나고 있음을 증언한다.” 예수의 말씀을 듣는 자는 그 자리에서, 그 시간에 구원을 체험할 수 있다. 둘째, 비록 예수 말씀의 양식이 유대 예언 문학과 유사하다 하더라도, 예수의 말씀은 ‘결단의 순간’이라는 결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말씀이 예수의 ‘선포’와 연관되어서 사용되는지 혹은 예수의 ‘인격’과 연관되어 사용되는지 여부이다. 말씀과 결단이 어디를 근거로 해서 일어나는지는 기독론 연구에 매우 중요하다. 불트만의 양식 비평을 공관복음서에 적용해 볼 때, ‘비판적으로 검증된 최소한’을 추구하는 양식 비평의 특성상 예수의 진정성 있는 말씀이 상당히 적어지는 것을 확인하였다. 물론 불트만의 양식 비평을 적용한 복음서를 자료로 하였을 때, 예수의 삶과 일대기를 추구하는 ‘옛 탐구’를 하기는 어렵다. 역사적 예수의 탐구를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옛 탐구는 큰 의미도 없거니와 불트만이 추구하는 방향도 아니다. 그러나 불트만은 공관복음서를 자료로 했을 때, 역사적 예수에 대한 중요한 이해는 가능하다고 보았다.
3. 역사적 예수와 인간의 결단
1) 예수의 삶과 메시아적 자의식
1) 예수의 삶과 메시아적 자의식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가능하면 양식사와 역사비평방법을 통해 성서의 원자료를 찾고,
그 당시의 삶의 정황 속에서 자료를 이해하려고 했다.
(1) 역사적 예수의 삶의 형태
▶ 예수의 삶의 형태를 알기위한 기본이해
- 불트만은 예수를 유대주의 범주에서 이해한다.
-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고, 유대인이었다.
- 그의 선포는 유대주의 사고의 양식과 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 예수의 선포는 유대인이라는 범주를 넘어서지 않았다.
- 예수는 당시에 팽배한 메시아적 기대 속에서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했다.
▶ 예수의 삶의 형태에 대해(2가지)
① 예언자적인 형태
예수의 ‘종말론적 메시지’에 비추어 예수를 특징짓는다면, 그는 예언자처럼 보인다.
② 랍비적인 형태
예수는 회당에서 스스로 선생의 위치를 취했다
예수는 실제로 한명의 랍비로 살았다
하지만, 예수와 구약의 예언자사이에
그리고 예수와 유대 랍비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외형적인 삶의 양식뿐만 아니라 하나님, 인간, 율법등에 대한 해석에서 나타난다.
예수는,
- 다른 랍비에 비해 규례에 매여 있지 않았다(죄인들, 창기들, 세리들, 여자들->이들과 교제)
;일반적인 랍비에게서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는 다른 예언자들의 묵시적 기대와 달랐다.
랍비로서 예수는 율법에 대한 복종이 인간의 성취가 되고마는 형식적인 율법주의를 비판했다.
▶ 예수의 죽음에 대해
예수의 죽음은 비정치적이기도 하고 정치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수의 죽음에 대해 결론을 내리자면 예수는 정치적이거나 정치적 의도가 없었으나
예수를 처형한 자들은 예수를 정치적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2) 메시아적 자의식
불트만에게서 예수가 ‘메시아적 자의식’이 있었는지 여부를 밝히기는 쉽지 않다.
그 이유는 ‘메시아’ 혹은 ‘메시아 됨’(Messiahship)의 용어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ⅰ) ‘메시아’라는 용어는 기원으로 볼 때 유대 종말론의 국가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말도 구약에서 왕을 의미했다.
--->예수는 메시아적 자의식을 가지지 않았다
ⅱ) 만약 메시아라는 용어가 신성이나 예수의 선재를 함의한다면,
‘주’나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호칭에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선재’의 개념이 결합된 것은 헬라 교회에서
시기적으로 상당히 늦게 일어난 일이다.
---->예수는 메시아적 자의식을 가지지 않았다.
ⅲ) 불트만의 사상을 분석해 보면, 구원의 담지자와 연관시킬 때 예수는 구원-전달자(salvation-bringer)로서
자신의 사명에 대한 독특한 의식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예수가 전통적인 의미의 메시아사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예수 자신이 메시아적인 칭호를 사용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런점을 엄격히 적용한다면 예수가 메시아적인 자의식을 가지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자신의 독특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자신이 선포와 말씀이 구원의 징조라는 것을 알았고,
자신의 선포를 통해 구원과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런의미에서 예수는 구원의 담지자(salvation-bearer)였고, 구원을 가져오는 자(salvation-bringer)라는
인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2) 예수의 메시지
불트만은 예수의 메시지를 통해 역사적 예수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트만은 역사비평방법론 중, 특히 양식사 비평이란 방법으로 성서의 본문이 가지고 있는 구성단위를 문학적인 형식(form)에 따라 진정성을 찾아 역사적 예수에게 접근하여 예수의 말씀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예수의 선포의 핵심을 파악하고자 시도한다.
불트만은 예수의 메시지를 종말론적인 말씀의 범주와 윤리적 말씀의 범주에서 다루고 있고, 이 말씀들이 예수에게서 비롯된 진정성 있는 말씀이라 믿는다. 종말론적인 범주에서는 예수의 예언자적인 삶의 스타일과 예수의 선포를 통해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인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드러나고 있으며, 윤리적 범주에서는 예수의 선포에 대한 인간의 결단과 책임성의 문제를 다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특징이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1) 하나님의 나라 (종말론적인 범주)
종말론 적인 말씀의 지배적인 개념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이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믿으라고도,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선포도 하지 않았으며, 오직 예수의 선포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러므로 역사적 예수를 알기위해서는 그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지만 역사적 예수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을 알아보자. 예수에게 있어 하나님의 나라는 국가적인 혹은 정치적인 나라가 아니며, 인간이 어떤 자격을 획득해서 들어갈 수 있는 그 어떤 곳도 아니다. 즉,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죽어서 가는 공간적인 장소가 아닌 의미가 크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종말과 함께 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 세상의 대한 심판과 파국이라는 의미에서 묵시론적 성격을 붙트만은 거부한다. 그는 묵시문학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대교의 마지막때에 희망에 이란이나 바벨론에서 유래한 근동 종말론들의 신화론이 계속 영향을 끼쳐 새로운 문학형태로 나타난 것며 묵시문학은 신의 세계의 복안을 풀고 마지막때의 전조들을 식별하여 그 도래를 요량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늘의 영광을 환상적으로 상상하여 표현한 문학이라 정의한다. 하지만 예수는 시간을 계산하면서 시대의 징조를 바라보며 이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듯이 하나님 나라의 묵시론적인 내용을 거부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능력이며 이 능력은 왕적인 통치,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와 지배를 의미한다.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직면하여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각오하고 있는 것, 또는 준비하고 있는 것뿐이다. 지금은 결단의 때이고 예수의 부름은 결단으로의 부름이다.
불트만은 하나님 나라의 시간성에 대해 미래적 요소와 현재적 요소가 존재한다고 보며 이 두 요소의 조화를 시도하며 그 핵심은 실존적인 현재이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과 현재성이 신약성서에 공존하지만 불트만에게 있어 그 강조점은 실존적인 현재, 즉 지금이다.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만약 지금 현재를 결정하고 또한 이 선포가 구원을 의미한다면 이 선포는 메시아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즉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가 아니라 자신의 사역과 자신의 인격과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고 확신했으며 예수가 스스로 메시아적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메시아로서의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2) 하나님의 뜻 (윤리적 범주)
불트만은 예수가 이해한 하나님의 뜻은 예수가 선포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말씀을 통해 예수가 이해한 하나님의 뜻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 당시의 순종은 의례와 예식적인 규례를 지나키게 강조하는 형식적인 권위에 대한 순종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다른 어떤 동인이나 이유 없는 순종을 요구했다. 즉 예수는 하나님께 대한 근본적이며 완전한 총체적인 순종을 요구한다고 선포했던 것이다. 예수는 인간에게 스스로를 마주하게 했고 이 스스로를 마주함은 선과 악 사이에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의지 사이의 결단을 요구하는 선포였으며 하나님을 향한 결단은 하나님의 의해 선물로 주어지는 구원을 향한 결단이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은 사랑의 규례로 이해 될 수 있다. 자신의 이웃에 대한 구체적인 만남이 없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근본적인 순종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웃에 대한 자신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확인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사랑과 순종을 예수는 율법화하는 것을 삼갔다. 예수는 사랑을 인간이 완전으로 향하는 덕목으로도, 사회의 도덕적 함양을 위해 필요한 행위로도 보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만나는 구체적인 삶의 정황안에서 자기 의지를 극복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지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면 그 자신은 자신의 정황속에서 누가 설명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결단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의 사랑의 요청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예수의 종말론적인 말씀(하나님의 나라)과 윤리적 말씀(하나님의 뜻)은 모두 진정성 있는 말씀들이다. 역사적 예수에게서 발견되는 이런 종말론적인 말씀과 윤리적 말씀이 서로 다른 성격으로 인해 해석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가져 왔지만 불트만은 이 두 말씀이 통일성을 이룬다고 본다. 즉 두 선포 속에서 예수의 요구는 인간을 하나님 앞으로 몰아가고 하나님 앞에 세우며, 지금을 하나님을 향한 결단의 순간으로 만듦으로써 모든 시간을 현재가 되게 한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원하는 자는 사랑의 계명에도 충실하려 하고, 그리고 그의 뜻은 하나의 조건으로서 사랑의 계명을 지키게 되고 결국 어떤 다른 것도 지향하지 않고 그 계명을 달성하기 위해 오로지 순종하는 데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마주하게 하는 궁극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말씀들을 실존적으로 마주한다면 이 말씀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현재적으로 임하는 공통점이 있고 이런 점에서 불트만은 종말론적 말씀과 윤리저기 말씀을 실존적 해석으로 그 조화와 통일성을 시도했다.
3)인간의 응답과 결단
불트만의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은 인간에게 결단과 응답을 요구한다. 또한 그의 역사적 예수의 종말론적인 말씀과 윤리적 말씀의 연결 고리도 인간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궁극성과 응답성으로 정의하였다. 여기서 책은 인간에게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결단 능력보다는 가능성에 초점을 두었다.
1. 예수가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의지 사이에서 결단을 요청하였을 때 인간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수 있다고 보았다. 예수님은 상황 속에서 구체적인 내용은 제시하지 않았지만 인간에게 결단을 남겨두었다. 이는 인간에게 결단의 능력이 있다는 의미이다.
2. 결단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책임성을 물을 수 있다. 실존의 본질 안에서 행동은 자신의 존재의 표현이며, 그 행위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
3. 이러한 주장들을 정리하게 되면 불트만의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과 인간에 대한 결단의 능력과 책임에 따른 상반된 두 가지 입장이 생기게 된다.
1)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2) 인간에게 결단의 능력과 그에 따른 책임성이 있다.
책은 불트만이 이에 대하여 명확하게 표현한 부분을 찾기는 쉽지 않다고 판단하여 ‘믿음’과 ‘은혜’의 의미로 이에 대한 답을 내 놓았다.
4. 죄, 믿음, 은혜의 관계
1) 믿음 : 삶의 특별한 운동 속에서 전능한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확신을 취하는 능력으로 실존의 자신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체험이며 이로써 신앙을 가능케 한다. 이 신앙은 은혜로 표현된다.
2) 죄 : 인간은 죄인이다. 하지만 인간이 존재론적인 본질적 죄인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요청을 부정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에게 나타난 어쩔 수 없는 특징이다. 즉 인간의 사악한 의지로서 인간의 한 특징적인 상태를 말한다.
3) 실존에서의 하나님의 행위가 경험되어진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을 은혜라고 하였다. 실존안에서 은혜, 죄는 인간의 실체가 처한 경험되어지고 있는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다. 불트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 신앙, 은혜 같은 용어들을 각기 분리하지 않고 실존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불트만은 결단, 순종이라는 단어로 결합하여 표현한다. 결단 안에서 죄 된 상태와 하나님의 은혜를 동시에 체험한다고 보았다.
4) 결단과 은혜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면 다른 사건이 되겠지만 실존적으로 이해하면 두 용어는 같은 사건의 다른 측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단으로 죄인과 의인의 갈림에 서있다고 하겠지만 실존적으로 결단에 임한 인간은 바로 그 결단의 순간에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실존적 결단 안에서 인간에게 결단과 은혜는 분리되지 않는다.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결단은 한 사건의 다른 측면인 것이다.
성경의 메시지가 현재의 개개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앙적 반응을 촉구함에는 도움이 되겠으나 지나친 실존적 의미의 강조는 복음의 역사성을 부정 할 수 도 있으며, 또한 기독교의 객관적, 역사적 토대를 무시하게 한다. 이것은 기독론 자체를 부정하고 또한 성경의 권위를 불신케 한다.
4. 비신화화와 해석학
3) 해석학적 원칙과 실존철학
(1) 핵석학적 원칙의 성서 적용
불트만은 해석학의 원칙과 역사관을 신약을 해석하는데 그대로 적용한다. 그는‘성서도 하나의 역사적 자료’로 보기 때문이다.
해석학의 두가지 원칙 전이해와 삶의 연관이 성서와 신 이해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불트만에 따르면, 인간은 신에 대해 사전에 어떤 지식과 신과의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인가은 언제나 신을 찾는다. 그리고 삶이 신을 향한 추구에 의해 움직여진다. 이것은 항상 인간 자신의 실존에 관한 질문에 의해 움직여지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질문과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서를 해석할 때 적절한 질문은 ‘인간의 실존이 성서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 이다. 불트만은 이것을 바른 질문이라고 하였고 이러한 이해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개념들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런 적절한 개념이 바로 철학이 할 역할 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가장 적절한 철학을 실존철학이라 이라고 생각했다. 불트만은 실존철학의 인간이해와 신약의 인간 실존의 이해가 거의 동일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불트만은 이 둘은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있다고 한다. ‘그것은 인간타락의 이해이다.’ 실존철학은 인간의 타락이 인간의 인격성의 핵심까지 미치지 않는 것으로 본다. 반면 신약성서는 타락을 총체적인 것으로 여긴다. 실존철학은 스스로 진정한삶을 찾을 수 있고 불트만은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고 믿는다. 여기서 인간은 자신이 처한 타락의 상황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인간은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나? 불트만은 타락한 인간의 모든 시도는 타락한 자의 시도일 뿐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본래성을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실존철학과 케리그마의 차이 : 죄와 은혜
불트만은 실존철학을 통해 인간이해에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실존철학도 인간의 한계를 정확히 분석하고 인간의 결단을 요구한다. 불트만은 자신의 신학과 실존철학이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불트만은 그 차이를 ‘철학자들은 이론적 가능성과 실제적 가능성을 혼돈했다. 왜냐하면 신약성서가 증언하듯이 인간은 실제적인 가능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불트만은 정통주의자와 논쟁을 할때 타락이 인간을 구제 불능의 상태까지는 도달하지 않은 것처럼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에게는 어떠한 책임성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존철학자들과 논쟁을 할 때는 이 타락에 대한 정통주의의 입장은 상당히 신화론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중요한것은 ‘인간의 책임성’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본래성을 회복할 수 있는지 여부이다.
불트만은 실존철학은 인간의 현재 상태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결단의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신제적인 능력은 주지 못한다고 보았다. 즉 불트만은 그의 케리그마의 해석을 실존철학과 구변하는 시도를 할 때, 타락을 주어진 조건으로 간주함으로써 자연인이 타락에서 자신의 진정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한다. 다른 말로,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다. 인간은 스스로는 죄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불트만은 인간이 자신의 안정을 하나님에게서 찾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결코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즉,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삶을 전제하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신 앞에서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열정적인 율법의 완성과 성취는 인간의 이 세상으로의 타락의 한 표현일 뿐이다.
불트만은 죄를 이렇게 정의한다. “눈에 보이는 안정을 추구하고, 손에 잡히는 실체를 추구하며, 일시적인 것들에 매달리는 것이 죄이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실체를 닫아버리고 우리에게 선물로 오는 하나님의 미래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신앙은 인간의 자기 안정을 포기하는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 안정을 찾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복종이다. 왜냐하면 이는 인간의 자기-자만을 포기하는 것이고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순수한 신뢰, 아무런 보장 없는 신뢰,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불트만은 실존철학과 케리그마를 동일하게 보지않았다. 우리는 그 차이의 핵심을 죄와 신앙이라는 개념으로 살펴보았다. 즉 실존철학과 케리그마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구원’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죄와 은혜가 불트만과 실존철학을 구별하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불트만은 인간의 자력구원을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구원의 토대를 오직 그리스도로 여겼다.
5. 역사와 신앙
6. 평가
제5장 인간과 신의 상관관계 : 틸리히
1. 경계선상의 삶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대학에서 가르치고 강연하거나 글을 쓰는 것으로 보냈는데, 1933년 미국으로 이주한 뒤에는 존경과 사랑을 많이 받았고 그의 강연에는 많은 청중이 모였으며 학교에서의 강의실은 언제나 학생들로 붐볐다. 그로인해 틸리히는 학자적으로 굴곡이 없고 사색을 즐긴 사상가 정도로 평가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은 틸리히를 철학적 신학자나 단순히 문화신학자로 간주하면서 그의 사상을 매우 철학적인 편향성이 강한 사변적 사상가로 이해하지만, 몇 가지 범주에서만 이해한다면 오해하는 것이며, 그의 정신세계는 단순하지 않고 치열했으며, 그의 삶과 신학은 언제나 경계선상을 거쳐 왔다.
틸리히는 1886년 8월 20일 독일 베를린 근처 작은 마을 슈타르제델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그는 몹시 약하게 태어나서 태어나는 날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루터교 목사인 아버지로부터 1886년 9월 12일 유아세례를 받았는데, 아버지는 틸리히 집안에서 배출된 첫 루터교 목사였다. 틸리히는 아버지로부터 우수적이고 명상적인 성격을 물려받았고, 어머니로부터는 생동감, 열정, 감성적인 측면을 물려받았다.
그는 조그만 도시에서 규칙적이고 조용한 생활을 하면서 자연에 대한 감성과 낭만적 기질을 키웠으며, 1904년 베를린대학에 진학해 신학을 시작했다. 그는 할레대학에서 수학하던 때에 만난 셸링의 무한과 유한에 대한 관계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셸링의 무한과 유한의 변증법적 상호성은 그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의 평생에 걸친 철학적인 토대를 제공하였다. 그는 인간의 의식이란 곧 신을 실현하는 과정이며 역사도 인간의 의식에 의해서만 역사성을 부여받는다는 생각도 배우게 되었다.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신학자로 켈러 또한 빼놓을 수가 없다. 당시 틸리히는 역사비평학과 정통주의 신학과의 대립에서 심한 갈등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의 지적인 분위기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추구와 이를 위한 방법론으로서 역사 비평학이 대세를 이루던 때였다. 이런 가운데 켈러는 1982년에 <소위 역사적 예수와 역사적 성서적 그리스도>를 출판했고, 이 책은 당시의 역사 비평적 연구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켈러는 여기서 역사를 실증적 역사(Historie)와 실존적 역사(Geschichte)로 구분하였다. 그는 실증적 역사는 과학적이고 사실적인 역사로 사용했고, 실존적 역사는 고백적인 역사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는 역사 비평학이 예수에 대한 역사적 자료를 아무리 모아도 그 자료를 읽는 독자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기독교인에게 정말 의미 있게 오는 자는 역사의 예수가 아니라 신앙의 그리스도라고 강조했다. 틸리히는 켈러를 통해 정통주의와 역사 비평학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되며 역사 비평학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도 오토의 <거룩의 개념>이라는 책을 통해 거룩함의 체험이 경외감과 황홀감을 수반하는 존재의 깊이를 제공한다는 것을 배웠으며,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에서 유한성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열정과 생에 대한 의지를 배우게 된다. 이것은 틸리히에게 삶을 역동성으로 파악하게 하였고 틸리히의 ‘힘’에 대한 기술에서 잘 나타나게 된다.
틸리히에게 있어서 삶의 전환기가 되었던 사건이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1차 대전의 참전과 전쟁에서의 경험이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당시 군목에 지원을 하여 전쟁에서 기아와 살상, 인간의 잔인함과 고통을 철저히 겪는다. 그는 지금까지 서구 문명과 기독교가 보여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상에 대해 전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전쟁 동안 부르주아 문명과 19세기적인 삶, 그리고 이에 바탕을 둔 관념론 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몰락을 경험한다. “내가 잠에서 깼을 때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이제 내 사고에서 관념론적 측면은 끝이다! 바로 그 순간 관념론은 파괴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틸리히의 이 고백에서 느껴지듯이 그는 인간실존의 좌절과 한계, 공포와 죽음을 전쟁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결국 인간의 실존, 무의미, 존재의 용기, 비존재의 위협 등은 틸리히 사상의 기본 범주가 되었다. 그의 존재론이 단순히 정적이거나 개념의 분석에 머물지 않으며 역사성을 가진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틸리히에게 존재론이 그의 사상을 펼쳐나가는 중심 역할을 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의 존재론은 정적이지 않고 실존적이고 역동적인 성격을 가진다. 틸리히에게 진리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시간 속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모든 진리에 대한 지식도 자신의 상황 안에서 결단과 역사적 행위의 특징을 가진다. 진리가 역사성을 가지기 때문에 틸리히의 신학에는 절대적, 유일회적, 보편적 성격의 진리 개념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역사 속의 진리는 항상 유한하며 시간에 열려져 있고 새롭게 실체화가 되는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20세기가 처한 새로운 신학적 지평을 인식하는 계기가 생기게 되었으므로 1차 대전은 틸리히 사상에서 19세기와 20세기를 잇는 다리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두 번째 그의 삶의 전환기가 되었던 사건은 1933년 나치당국에 의한 탄압에서 비롯되었다. 나치당국은 그의 책을 문제 삼아 교수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미국에서 제2의 학문적 생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언어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해야 했던 틸리히는 사고를 더욱 간결하고 명료하게 표현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그는 많은 목회자들이 더 이상 동시대와 교류할 수 없는 언어와 개념을 사용하여 설교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틸리히의 설교는 간결하고도 새로운 언어로 동시대인과 소통하는 시도였다. 1948년 그의 설교집 <흔들리는 터전>이 출판되자 이 책은 곧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후 3년 뒤 1951년 그의 <조직신학>1권이 출판되자 즉시 이 책은 논의의 초점이 되었다. 이 후 틸리히는 미국 지성계와 대중 모두에서 유명한 인사가 되었고, 언론에서도 그에게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는 존재가 되었다.
틸리히는 1955년에 유니온신학교에서 은퇴하고 하버드대학교에서 영예로운 석좌교수가 되었다. 이 시기에 틸리히는 강의뿐 아니라 대중 강연도 많이 했으며 일반인의 관심도 많이 받았다. 1959년 3월 16일 타임지는 틸리히를 표지 기사로 다루었다. 1962년에는 하버드대학에서 은퇴한 후 시카고 대학에서 존 뉴빈 석좌교수가 되었다. 틸리히의 마지막 강연은 1965년 10월 11일에 시카고 대학의 신학부가 주관한 종교사 모임에서 행한 “조직신학자들을 위한 종교사의 중요성”이었다. 그는 다음날 10월 12일 아침에 심장마비를 일으켜 병원에 입원했고, 10일 후 10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틸리히의 생은 여러 면에서 경계선상에 자리한 삶이었다. 어릴 적 엄격한 아버지와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어머니 사이의 경계선에서 성장했고, 전쟁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었고, 19세기의 마지막과 20세기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경계선상, 전쟁 이후에는 종교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한 대학교수와 노동자와의 경계선상에 있었고,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구대륙과 신대륙의 문화의 차이, 신학과 철학 사이의 경계, 이성과 계시의 경계, 종교와 문화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의 삶은 사상적으로 경계선상에서 이 둘을 종합하려는 시도로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 삶에서 내 사고가 발전된 길을 말해 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 내 인격적인 발전과 지적인 발전 전체를 포괄해서 경계라는 개념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나는 거의 언제나 실존의 대안적 가능성들 사이에 서 있었다.”
틸리히의 저술은 상당히 많아서 논문을 합치면 약 500종류가 된다. 이 중에서 그의 초기 저술과 독일어 저술을 한 부류로 두고,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의 저술과 영어로 접근이 되는 저술로 나눌 수 있다. 영어로 접근이 되는 저술은 크게 4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세 권의 <조직신학>이다. 이는 틸리히의 신학 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나타내 준다. 둘째, 체계적으로 논의된 개별적인 신학적 주제로 다룬 책이다. 여기에는 <성서적 종교와 궁극적 실재를 찾아서>, <사랑, 힘, 정의>, <개신교 시대> 등이 있다. 셋째, 세 권의 설교집이다. <흔들리는 터전>, <새로운 존재>, <영원한 현재> 이다. 넷째, 종교철학에 관한 에세이와 대중적인 글이다. 대표적으로는 <존재에의 용기>와 <믿음의 역동성> 등이 되겠다.
2. 제3의 길
틸리히에게 있어서 신학의 근본 목적은 두 가지가 충족될 때 가능하였다. 하나는 기독교의 진리를 진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진리를 모든 세대를 위해 해석하는 일이다. 그는 신학의 위치를 기독교 메시지와 세상 사이에 두었고, 신학의 역할을 기독교 메시지와 현 세대 사이의 ‘중재’로 보았다. 틸리히는 다양한 신학들이 영원한 진리와 시간적 상황이라는 두 극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지 못하는 것을 우려한다. 대부분의 신학들이 진리의 요소를 희생시키거나, 아니면 상황이라는 요소를 너무 가볍게 처리해버린다. 틸리히는 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바로 중재라고 믿었다. “신학의 과제는 중재이다. 중재는 그리스도인 예수에게서 현현된 진리의 영원한 기준과 다양한 질문과 실체를 인식하는 자신들의 범주를 가진 개인과 집단의 변화하는 경험 사이의 중재이다. 만약 신학의 중재의 과제가 거부된다면 신학 자체가 거부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중재를 함축하는데, 즉 신이라는 신비와 로고스라는 이해 사이의 중재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틸리히의 신학에서 중재의 성격은 아주 다양하게 나타난다. 넓은 의미에서는 틸리히 신학의 모든 주제가 중재와 연결되고, 그의 신학 방법론이 상관관계에서도 일종의 중재의 방법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틸리히가 의도하는 가장 근본적인 중재는 기독교 메시지와 상황 사이의 중재이다. 틸리히는 기독교 메시지와 상황이라는 두 요소 중 어느 하나도 희생되지 않게 중재하는 것을 신학의 바른 역할로 보았다. 따라서 틸리히의 신학에서는 기독교 메시지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상황에 대한 이해가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래서 틸리히는 어떻게 기독교 메시지가 세상과 관계되는지, 종교가 어떻게 문화와 관계가 되는지, 기독교 메시지가 어떻게 현대인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목사들이 현대인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것을 우려하고 교회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적절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그에게 있어서 현대인이란 현대의 다양한 문화 속에서 자라났고, 그 문화가 주는 가치와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사람이다. 따라서 현대 문화와 현대인의 가치 체계와 그들의 언어와 고민을 이해하지 못한 설교는 현대인에게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틸리히는 개신교 교회의 설교가 이러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을 상당히 우려한다. 신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바로 메시지와 상황의 중재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여태까지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사용해 온 용어와 개념이 현대인에게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틸리히의 입장이다. 그는 기독교가 사용한 단어와 용어에 대한 재해석 작업을 하게 된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조직신학>에 나타난 용어의 재해석을 몇 개만 보더라도 이러한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존엄, 영광, 전능, 영원, 전지 등 기본적인 개념을 재해석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십자가의 부활, 중생, 칭의, 성화도 새롭게 해석한다. 인간의 원죄, 타락, 악, 심판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생명, 시간과 공간 등 그의 저술에서 그가 시도한 전통적 용어의 새로운 해석은 모두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이러한 그의 새로운 해석에 대한 작업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개념 자체를 새롭게 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그는 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근본적인 개념 자체를 새롭게 한다. 틸리히가 사용하는 용어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틸리히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틸리히의 철학적 편향성 때문에 그가 기독교의 용어들을 현학적으로 만들었다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가 하나님을 ‘존재 자체’ 혹은 ‘존재의 근원’ 이라고 부를 때,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불린 예수’라고 명할 때, 그의 책을 읽는 독자들은 반드시 틸리히의 사상 체계 안에서 그 용어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한편 틸리히에게 있어서 메시지가 선포되는 상황은 무척 중요하며, 그것은 우리가 틸리히를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이다. 상황은 일차적으로 그 사회의 구성원이 처한 사회-경제-정치적인 상황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가 말하는 상황이란 조금 다르다. 틸리히도 사회적 구조나 정치적 상황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정치적 환경 위에 처한 현대인의 ‘실존적 상황’이 그에게 있어서는 일차적인 문제이다. <조직신학>에서 볼 수 있는 상황에 대한 그의 입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신학 작업의 한 극으로서 상황(situation)은 개인이나 집단이 살아가는 심리학적인 또는 사회학적인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상황은 무엇보다 실존에 대한 그들의 해석을 표현하고 있는 과학적, 예술적, 경제적, 정치적, 윤리적 형식을 의미한다... 신학이 고려해야 하는 상황은 실존에 대한 창조적인 해석이다.” 즉 틸리히는 현대인의 ‘실존’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결국 신학이 응답해야만 하는 상황은 각 시대마다 수행된 인간의 실존에 대한 ‘해석의 총체’이다. 따라서 틸리히에게 인간의 실존은 가장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고, 따라서 그는 인간의 실존이 잘 드러나는 다양한 문화 현상에 몰입하게 된다. 그의 예술, 문학, 철학, 미술과 같은 타학문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관심도 인간 실존의 이해와 연관된다. 특히 그는 존재를 직접적인 주제로 다루는 철학을 높이 평가한다. 그중에서도 실존주의 철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는 19세기에 시작되어 20세기에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실존주의가 ‘실존적’이라는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낸다고 믿었다. 그에게 실존주의는 인간 존재의 무의미함으로 인한 불안의 표출이고, 이러한 불안을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로 받아들이는 시도의 표현이다. 그는 20세기를 사는 현대인을, 의미 있는 세계를 상실한 채 정신의 중심에서 나오는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아를 잃어버린 존재로 이해한다. 이러한 현대인의 실존적 상황을 가장 정확히 포착하고 인간 실존의 한계를 직접적인 주제로 삼는 것이 실존주의이다. 실존주의는 자신의 비인간화를 절망으로 경험하며 ‘해결’이 없는 상황을 정확히 인식함으로 자신의 인간성을 구원하려 한다. 이것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용기로서 비존재의 위협에 저항한다. 인간이 이렇게 실존적 상황에 대하여 인식함으로써, 또한 인간의 좌절에 대해 강력하게 고발함으로써, 불안함을 존재하려는 용기로 승화시켰던 것이 실존주의의 시도였다. 틸리히는 다양한 장르에서 일어난 이러한 실존주의적 시도들에 매료된다. 그는 샤르트르의 연극 <출구 없음>에서 인간의 절망에 대한 고전적인 형태를 보았고, 엘리엇의 <황무지>에서 문명의 해체와 현대적 의식의 빈곤을 발견했고, 카프카의 소설 <성>에서는 의미의 근원과 정의의 모호함을 보았다. 틸리히는 이처럼 철학이나 문학뿐 아니라 밀러나 윌리엄스의 연극에서 묘사된 인간 실존의 구조와 한계를 관심 있게 보았다. 그가 이렇게 현대 예술과 문학의 다양한 작품들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신학이나 종교의 영역이 아닌 일반 예술과 문학에서도 인간 실존에 대한 비슷한 이해를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틸리히의 생각은 그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틸리히의 인간이해, 존재론, 계시 이해 등에서 그의 이러한 생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틸리히의 신론과 인간론을 보면 그가 왜 다양한 학문과 문화에서 나타난 인간의 존재와 실존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지 알게 된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이해되는 현대인이 처한 상황이, 바로 틸리히에게 중요한 ‘상황’이다. 상황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 메시지를 적절히 해석해서 현대인에게 받아들이기 좋도록 만들겠다는 의도는 아니다. 그는 중재를 통해 현대인의 문제를 기독교 메시지로 답변하려는 것이지 기독교 메시지를 현대라는 상황에 맞게 변형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틸리히의 상황에 대한 관심은 상황에서 나오는 질문을 찾기 위한 것이며, 상황이 안고 있는 물음에 대해 답변하는 것이 신학의 역할이라고 그는 믿는다. 이러한 그의 신학을 변증신학이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그 의미는 중재와 같은 의미이다. 결국 틸리히가 사용하는 변증신학은 상황에서 나오는 질문을 기독교 메시지의 힘으로 답변하는 신학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변증신학은 "대답하는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변증신학은 틸리히가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변증신학이 상황에 대해 치우치거나 ‘상황 속’에서 답변을 찾을 때 항상 문제를 야기했다. 근대에는 인본주의나 역사주의로부터 기독교를 변증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방법론을 사용했기 때문에 신뢰를 잃었다. 틸리히는 메시지가 상황에 빠지거나, 혹은 반대로 기독교 메시지만 강조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는 ‘종합’(Synthesis)을 신학의 중요한 역할로 보았다. “종합을 시도했던 사람들의 끊임없는 수고가 신학을 살아있게 만들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전통적인 기독교는 편협하고 미신적인 종교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틸리히의 글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그가 의도하는 중재의 신학은 상황이 안고 있는 물음을 메시지가 가진 대답과 연관시키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물음에서 대답을 이끌어내려는 근대에 나타난 변증신학과는 다르다. 이 방법은 케리그마 신학이 한 것처럼 대답을 물음에 연관시키는 것 없이 대답을 제시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틸리히의 중재의 신학은 어느 한 쪽의 강조나 희생 없이 조화를 중요시한다는 의미에서 종합을 추구하는 신학이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중재의 신학은 어떠한 방향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틸리히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신과 인간 사이의 동일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으로 보고 신과 인간의 경계가 무너졌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잘못된 변증신학의 유형과 유사하다. 또한 바르트를 위시한 변증법적 신학은 신과 세상을 너무 멀리 분리시켰다. 이것은 케리그마 신학의 유형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틸리히가 이 두 가지와는 다른 자신의 신학을 어떻게 설정하는 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이 두 종류의 신학의 갈등을 극복하는 신학으로 자신의 신학을 설명하였다. 즉 그가 추구하는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도 아니요, 신정통주의 신학도 아니다. 틸리히는 자유주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신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선택했다. 이것은 우리가 잘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틸리히의 신학은 여러 의미에서 중재의 신학이다. 기독교 메시지와 상황 사이의 중재이고, 신학과 다른 학문 사이, 계시와 이성 사이, 영원과 시간 사이, 무한과 유한 사이, 그리고 초월과 내재 사이를 중재하려는 신학이다. 이런 의미에서 틸리히는 중재의 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겠으며, 그의 신학을 중재의 신학이라고 칭할 수 있다. 이 중재의 신학을 펼쳐나가기 위한 방법론이 ‘상관관계의 방법’이다.
3. 상관관계의 방법
상관관계의 방법은 틸리히의 신학 전체의 내용과 구조를 결정한다. 그는 매우 조직적인 사고를 하는 신학자이고, 신학 저술이 아주 많지만 상당히 일관된 사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가 이런 일관된 신학 내용과 체계를 견지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상관관계의 방법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은 하나의 방법론이라기보다는 신학의 각 주제와 내용을 결정짓는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틸리히는 의식적으로 그의 신학의 체계를 상관관계의 방법에 따라 구성하고 있으며, 이 관점에 따라 신학이 각 주제를 다루고 있다. 즉, 그의 신학 전체가 이 방법론의 토대 위에 놓여 있고 각 신학의 주제와 내용이 이 방법론이 제공하는 관점에 따라 쓰여 졌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의 신학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틸리히는 상관관계의 방법이라는 용어를 세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첫째, 다양한 일련의 자료들에 대한 대응을 의미하는데, 주로 종교적인 개념이나 지식의 중심 문제를 다룰 때 사용한다. 둘째, 상관관계는 대극적인 관계에 있는 개념들의 논리적인 상호의존성을 의미한다. 이는 신과 세상에 대한 관계를 밝히는 것으로 사용된다. 셋째, 전체 구조 안에서 사물이나 사건의 실제적인 상호의존성을 의미한다. 이는 종교적인 경험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틸리히가 이런 다양한 사용의 용례를 밝히지만 상관관계의 방법의 일차적인 목적은 “실존적인 물음과 신학적인 대답의 상호의존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만이 질문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보며, 질문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이라고 본다. 인간 실존이 가지는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해결은 신학적으로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계시로부터 온다. 하지만 계시적인 답변도 물음이 없다면 무의미하다. 물음과 대답은 서로 상호성 속에 있다. 그러므로 상관관계의 핵심은 질문과 답변이 별개의 것이 아니고 서로 연관이 있다는 점에 있다. 신과 인간의 ‘상관’은 신과 인간 사이의 ‘연결’에 의존한다. 이 연결은 인간을 향한 신과, 신을 향한 인간이라는 상호 의존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 신은 인간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행위 하지 아니하고, 신과 인간은 서로 살아 있는 관계 속에서 상호 영향을 준다. 신과 인간의 관계가 형성되고, 상호 영향이 가해지는 것은 먼저 ‘종교적 경험’ 속에서 이루어진다.
틸리히의 이러한 이해를 바르트의 계시에 대한 이해와 비교해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주장이 하나님을 인간에 의존하게 만들 것을 우려해서 매우 신중했다. 바르트는 계시가 인간의 질문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 자체가 주체로서 인간에게 질문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신과 인간 사이의 존재의 유비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틸리히에게 있어서 인간의 신에 대한 인식도 신과 인간의 상관관계 위에서 이루어진다. 인식의 결과는 질문과 답변 사이의 상호연관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이 어떠한 질문을 던질 수 없다면, 신이 홀로 답변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즉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 실존적인 질문을 던져야만, 성서의 계시를 그에 대한 답변으로 얻을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상관관계의 방법은 신이 질문의 주체인 인간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틸리히가 주장하는 ‘상호의존’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비판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질문과 대답이라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대답은 질문에 의존한다. 질문 없는 답변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질문이 대답에 의존한다. 질문은 답변되어지는 계시의 내용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실존적 질문과 메시지의 답변은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상호 의존적이다. 상호 의존의 두 요소는 상호의존적이면서도 동시에 독립적이다. 나아가 상호연관이 되는 두 개체는 의존성과 독립성을 넘어 통일로 나아간다. “의존과 독립이라는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상관관계의 방법의 핵심이다.
과연 틸리히가 말하는 독립성은 무엇인가 살펴보자. 대답은 실존적인 물음에 의존한다. 하지만 대답을 실존적인 분석을 통해서 얻지는 못한다. 대답을 물음으로부터, 또는 물음을 대답으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물음과 대답은 서로 독립되어 있다. 실존적인 상황의 갈등 속에서 나온 인간의 물음은 계시적인 대답의 원천이 될 수가 없다. 신의 자기 현현으로 나타나는 계시의 내용을 인간 실존의 분석으로부터 얻을 수는 없다. 따라서 대답은 언제나 질문으로의 독립성을 유지한다. 신의 계시는 때로는 인간의 상황을 향해(to), 때로는 인간의 상황에 맞서서(against), 때로는 상황을 위해(for) 말해진다. 틸리히는 자신의 <조직신학>1권이 출판된 이후 상관방법이 결국 어느 한 요소의 의존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비판을 의식하고 <조직신학>2권에서 상관관계가 가지는 독립성에 대해 다시 설명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틸리히의 상관관계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 의존이 아니고 상호의존이며, 상호의존의 두 개체는 자신의 독립성을 유지하고, 또한 의존과 독립이라는 두 명제가 통일이라는 과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특징이다.
틸리히가 다루는 거의 모든 주제는 상관관계의 방법에 의해 다루어지는데, 이 주제들을 잘 보면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상관관계의 두 요소 중에 하나는 유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한한 것이라는 점이다. 존재와 존재의 근원, 이성과 계시, 시간과 영원, 문화와 종교처럼 그가 다루는 주요 주제들을 보면 모두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 사이의 상관관계라는 특징을 가진다. 그는 자신의 상관관계의 방법을 통해 지금까지 신학이 사용해 온 세 가지 방법을 극복하려고 의도한다. 첫째, 초자연적인 방법이다. 이 방법은 기독교 메시지를 다른 세계에서 온 것으로 여김으로 계시된 지리를 인간의 상황 속에 던져진 것으로 취급한다. 여기서는 계시와 인간의 상황에 대한 매개체가 없다. 이런 전승에서 성서는 초자연적인 신탁의 글로 간주된다. 하지만 틸리히에 따르면, 이 방법은 인간이 묻지 않았던 물음에 대해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둘째, 자연주의적, 혹은 인본주의적인 방법이다. 이 방법은 기독교의 메시지를 인간의 자연적인 상태에서 유추한다. 이는 인간의 실존 자체가 가지는 한계를 간과하기 때문에 인간의 실존으로부터 대답을 찾으려고 한다. 이것은 주로 자유주의 신학에서 나타났고, 자유주의 신학이 사용한 신학적 방법론은 인본주의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틸리히의 입장에서 이것은 인간의 실존적인 상태를 그의 본질적인 상태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다. 즉 자기 한계를 가진 인간 실존의 상태와 인간의 완전한 상태인 본질의 상태를 적절히 구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인간의 물음과 대답을 인간의 창조성과 능력이라는 같은 수준에서 취급하였다. 셋째, 이원론적인 방법이다. 이 방법은 자연적인 하부구조와 초자연적인 상부구조라는 이원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인간과 신의 무한한 간격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결점을 찾으려는 시도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이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에 의존한다. 따라서 자연계시를 통해 신에게 나아가려는 시도들에서 이 방법이 주로 사용되었다. 틸리히는 이러한 세 가지의 신학에서의 방법론에서 그 단점을 극복하는 새로운 방법론으로 자신이 사용하는 상관관계의 방법을 바라보았다.
<조직신학>은 틸리히가 말한 상관관계의 구조 위에 잘 짜여있다. 3권으로 되어 있지만 주제는 크게 다섯 부분이다. 첫 번째 주제는 “존재와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전개된다. 인간의 본질적인 본성을 분석하고 인간의 유한성과 그 물음을 분석한 후에 이에 대한 대답으로 신을 제시한다. 두 번째 주제는 “실존과 그리스도”이다. 인간의 실존적인 자기 소외와 인간의 한계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절망을 언급하고, 이 실존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새로운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를 다룬다. 세 번째 주제는 “삶과 성령”이라는 제목이다. 인간의 본질적 특성과 실존적 특성이 추상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이들이 실제로는 “삶”으로 나타남을 논한다. 여기서 틸리히는 인간의 삶과 삶의 모호성 속에 포함된 질문을 다루고 이에 대한 대답이 성령인 것을 제시한다. 이 세 부분이 <조직신학>의 중심을 차지하는데, 전통적인 신론, 기독론, 성령론에 해당하는 주제이다. 여기서 인간론이 독립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틸리히의 인간론은 앞에서 언급한 전통적 세 주제 모두에 걸쳐서 나타난다. 유심히 보면 신, 예수 그리스도, 성령은 상관관계의 방법에서 대답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네 번째 주제는 “이성과 계시”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인식의 합리성을 분석하고 이성의 유한성, 자기 소외, 모호성 속에 포함된 물음을 분석한다. 여기서 이성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계시라는 것이 제시된다. 마지막 다섯 번째 주제는 “역사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제목인데, 삶의 역사적 차원을 다룬다. 여기서 틸리히는 삶의 역사가 가지는 모호성, 인간의 역사적 실존, 역사 속에 포함된 질문들을 살펴보는 데,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역사의 목적과 의미로 다루어진다. 이와 같이 틸리히의 대표적인 저술인 <조직신학>은 상관관계의 방법 위에 잘 짜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4. 존재와 궁극적 관심
존재론은 틸리히 사상의 주요한 토대이다. 이것은 그의 사상에서 어떠한 하나의 주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의 신학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그의 <조직신학> 1권에서는 존재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되며, “존재의 기본 구조”, “존재의 구성요소들”, “존재와 유한성”, 그리고 “인간의 유한성과 신에 대한 물음”이라는 네 주제로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틸리히가 말한 존재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겠다.
1) 인간 : 존재와 실존
그의 존재론에서 인간은 당연히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모든 존재 중 하나일 뿐인 인간이지만, 다른 존재와는 차이가 있다. 인간만이 자신이 존재의 구조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인간은 다른 대상들 중에서 존재론적인 물음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자의식속에서 존재론적인 대답을 발견할 수 있는 존재로서 구별되는 존재이다. 틸리히는 ‘존재’를 크게 네 가지의 의미 혹은 상호 연관 속에서 사용한다. 첫 번째, 존재는 사물이나 존재하는 ‘개체’의 성격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떤 형태를 가지고 존재하는 개체의 상태이다. 두 번째, 존재는 하나의 개별적인 존재의 성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존재라는 개념의 ‘포괄적인 의미’에서 사용된다. ‘실존’, ‘본질’처럼 유사한 용어와 구별해서 사용하는 경우에 의식적으로 사용한다. 세 번째, 존재는 ‘신적’인 의미로 사용되거나, 신과 연관되어 사용된다. 이 경우는 ‘존재자체’, ‘존재의 힘’, ‘존재의 근거’처럼 수식하는 단어가 함께 쓰이기 때문에 혼란은 일어나지 않는다. 네 번째, 그가 말하는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해서 “새로운 존재”라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구별은 종종 모호하게 나타나고 틸리히 자신도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기도 한다. 우선 여기서는 첫 번째, 두 번째의 존재에 대한 개념을 살펴본 후,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용례에 대해서는 뒷부분에서 살펴보겠다.
첫 번째의 존재의 개념과 관련하여 틸리히는 존재를 서로 대극이 되는 세 쌍의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개체화와 참여”, “역동성과 형식”, “자유와 운명”이라는 서로 대극성을 가진 상호연관 속에 있는 개념들이다. 틸리히는 이 구성요소를 모든 존재가 가지는 기본 범주로 보고 있다.
* 개체화와 참여 - 성서의 창조에서 하나님은 보편적인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고 ‘개별적’인 존재를 만들었다. 틸리히는 아담과 하와라는 구체적인 존재가 된 것을 존재의 개체화로 보았다. 개체화는 모든 존재 안에 포함되어 있고 모든 존재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이다. 틸리히는 개체화가 어떤 존재가 가지는 특수한 성격이 아니라 존재를 규정짓는 ‘상태’(quality)로 본다. 인간은 하나의 개체이면서 스스로 자아-연관성을 가진다. 인간은 개체로서 존재하지만 동시에 자아는 그의 환경 혹은 자신의 세계에 참여한다. 작은 개별적인 나뭇잎이 영향을 주고 받는 자연의 구조와 힘에 참여하는 것처럼 참여는 그것이 관계하는 실재에 참여한다. 실존하는 것은 실존의 조건 아래에서 실존이 되게 하는 본질에 참여한다. 이처럼 틸리히는 개체화의 대극에 놓인 참여를 존재의 구성요소로서 관계의 범주로 사용한다. “개체화가 없다면 어떠한 것도 관계 속에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참여가 없다면 관계의 범주는 실제로 어떠한 토대도 갖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틸리히는 실제 경험적으로 보이는 존재만 인정하는 유명론(개체 강조)과 관념적인 개념도 존재로 보려는 실재론(참여 강조)의 단점을 극복하고, 종합할 수 있는 이론으로 보았다.
* 역동성과 형식 - 존재한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형식을 가지고 있다. 어떤 존재가 개체화가 되었다면 그것은 형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어떤 사물을 현재의 그것이 되게 하는 형식은 그것의 내용이며, 그것의 본질이며, 그것의 명확한 존재의 힘이다.” 여기서 형식과 내용은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모든 형식은 ‘어떤 것’을 형성한다. 틸리히는 이 어떤 것을 역동성이라고 부른다. 역동성은 잠재성으로 비존재로 나타나기도 하고, 모든 형식 안에서 자기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힘으로 생명력과 활기를 유지하기도 한다.
* 자유와 운명 - 이것은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적인 요소들이다. 인간은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지만, 이것은 완전하지 못하고 운명과의 대극적인 상호 의존 속에서만 제한된 자유를 가진다. 여기서의 운명은 결정론이나 필연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모든 존재에게 자유로서 나타나는 자발성의 한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유한한 존재의 자유가 제약 속에 있음을 의미한다. 틸리히는 모든 존재가 이 한계와 제약성을 해결하지 못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운명’이라는 용어를 쓴다. 하지만 이 한계는 자유가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제약성이다. 운명이 자유와 분리되어 어떤 미래를 결정론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존재는 이 자유와 운명의 대극성이라는 상호성 속에서 자아를 가진다.
한편 두 번째 존재의 개념과 관련하여 틸리히는 존재외에 ‘실존’ 혹은 ‘실존적’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사물이 실존한다는 것은 사물이 존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사물은 ‘무’(없음)의 밖에 서 있다는 뜻이다. 라틴어의 어원에서 ‘실존하다’(existere)는 ‘밖에 서다’(stand out)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실존한다는 말은 자기 자신의 비존재 밖에 선다는 것이다. 여기서 틸리히는 존재를 절대적인 비존재와 상대적인 비존재로 구별한다.
절대적 비존재는 ‘텅 비어 있음’으로서 실존하는 것과 상대적 관계에 있다. 실존한다는 것은 절대적 비존재의 상대어로서, 절대적인 비존재라는 텅 비어 있음의 ‘밖’에 서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밖’에 서 있다는 말은 은유적으로 ‘~의 안에 있다’는 말을 포함한다. 따라서 실존하는 것은 절대적인 비존재 밖에 서 있지만, 이것은 존재와 비존재 모두의 안에 있는 것이다.
상대적 비존재는 절대적 비존재와 달리 아직 현실적 존재가 되지 않은 상태이다. 모든 것은 현실적인 존재가 되기 전에 잠재적인 존재에 참여한다. 잠재적인 존재일 때는 상대적인 비존재의 상태 안에 있다. 잠재성은 아직 그의 힘을 실현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존재의 힘이며 아직 나타나지 못한 힘이다.
따라서 어떤 것이 실존한다는 것은 완전한 비존재의 상태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이 실존한다는 말은 자기 자신의 비존재의 밖에 서는 것이다. 틸리히는 실존과 존재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실존한다는 것은 여전히 절대적인 비존재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절대적인 비존재 밖에 서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틸리히의 존재론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인간 존재이다. 인간은 존재에 대한 물음을 하기에 가장 특징적이다. 이러한 물음은 인간이 겪는 비존재의 충격에 의해 생긴다. 인간의 실존은 존재와 비존재의 혼합물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내재한 비존재를 인식한다. 비존재에 대한 인식은 자기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인식이기에 존재에 대한 충격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틸리히에게 인간의 실존이 본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틸리히에게 본질은 어떤 가치도 배제된 한 사물의 본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개체로서 인간의 존재는 본질과 구별되고, 존재의 포괄적인 개념과도 구별되는 ‘실존’이다. 실존은 본질의 영역에서 잠재적인 것의 현실적인 형태, 타락된 세계, 존재의 실존적인 조건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 혹은 본질로부터 떨어져 나온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은 유한성에 대한 자각에서 불안을 경험한다. 불안은 존재론적인 특징으로서 모든 존재에 유한성과 함께 편재해 있다. 틸리히는 어떤 존재도 유한성을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는데 그 이유는 존재를 규정하는 네 가지 범주가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범주는 시간이다. 모든 존재는 시간 안에 존재하며 존재는 정지하지 않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의 순간을 정지시킬 수 없다. 시간의 존재론적인 성격은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모든 존재는 ‘죽지 않을 수 없다’는 필연성에 대한 불안이다. 두 번째 범주는 공간이다. 시간은 공간과의 결합을 통해 현재를 창조한다. 존재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공간은 제한된 것이고 항구적인 것이 아니기에, 모든 존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공간을 상실할 수 밖에 없고 이는 근원적인 불안을 의미한다. 세 번째 범주는 인과성이다. 현재의 존재는 그 이전의 원인에 의해 현존하게 된 것이므로, 자신을 존재하게 만드는 힘을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 된다. 네 번째 범주는 실체이다. 현재 존재하는 모든 실체는 사건의 발생의 결과이다. 유한한 모든 존재는 자신의 실체가 상실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며 이는 자기 자아를 유지시키려는 힘의 상실에 포함된 불안과 동일하다. 그러나 틸리히는 비존재의 위협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각각의 용기를 이야기한다. 즉 이 용기는 존재가 가지는 유한성을 직시하고 자신을 유한한 존재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려는 용기이다. 틸리히는 이처럼 실존주의를 긍정적으로 보고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에 탁월한 능력을 가직 것으로 평가한다. 인간 본래의 한 부분으로 인간의 유한성과 불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용기있게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틸리히의 신학에서는 인간의 유한성과 존재의 불안은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물음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물음을 ‘궁극적 관심’이라고 일컬었다.
2) 신 : 궁극적 관심과 존재자체
틸리히에게 궁극적 관심은 인간이 신에 대해 궁극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인간으로 하여금 궁극적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신이 된다는 것이며, 역으로 인간은 그에게 신이 되는 것에 대해서만 궁극적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신이란 비존재의 위협을 극복하고 존재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존재의 힘”이다. 또한 모든 존재가 참여할 수 있는 “존재의 근거”이며 비존재의 위협에 노출되지 않는 “존재자체”이다. 틸리히는 신에 대해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지만 “존재자체”가 틸리히의 신에 대한 근본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그는 신에 대해 상징으로만 표현하는데, 유일한 예외가 바로 이 “존재자체”이다. 하나님이 존재자체라는 진술은 비상징적 진술이다. 자연이나 사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에게 참여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인간은 존재자체로부터 분리되어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비존재에 위협당하며 실존적인 불안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또한 틸리히는 존재의 근거인 신을 “존재의 깊이”로 표현한다. 비존재, 죄와 죄의식, 무의미함, 죽음을 이기는 존재의 근거인 신은 공간에서 만나지는 신이 아니고 존재의 깊이로 만나지는 신이다.
신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은 ‘무제약자’이다. 틸리히가 신을 무제약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신을 하나의 유한한 존재로 제한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틸리히에게 신은 존재의 근거, 존재자체, 존재의 힘, 존재의 깊이 혹은 무제약자로서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 그에게 신은 ‘나와 너’의 관계성 안에서 발견되는 나의 ‘상대자’로서 어떤 존재가 아니다. 그는 신을 하나의 ‘존재’로 보지 않는다. 또한 신을 ‘실존’하는 것으로도 ‘본질’로도 보지 않는다. 그는 일반적으로 이해해 온 존재, 실존, 본질로 신을 규정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더불어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신에 대한 개념이 있는데 이것은 신의 ‘인격’이다. 틸리히는 인격을 개체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격’이라는 상징이 가지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이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격적인 신은 하나의 인격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신이 모든 인격적인 것의 근거이며 그는 자신 안에 인격성의 존재론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언급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신은 “존재자체”이다. 신을 “존재”로 보는 것은 신이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그렇게 되었을 때에 신과 인간은 주객도식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틸리히의 주객도식의 극복은 유신론의 신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큰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신론을 포기한다면 신의 인격성도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틸리히의 신 해석이 성서의 인격성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 지는 검토를 해 보아야 할 것이다.
3) 창조와 섭리 : 창조성과 상징
(1) 창조성 - 신은 결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고 살아 있는 신인데, 이는 무엇보다 신의 창조성으로 나타난다. 신에게는 신적인 삶과 신적인 창조가 분리되지 않는다. 신의 삶과 창조는 동일하다. 틸리히는 이렇게 신의 창조성을 “신의 자유이며 운명”으로 보았다. 즉 신은 세계를 창조하였고, 지금도 창조하고 있으며, 신은 자신의 목적을 창조적으로 완성할 것이다. 틸리히는 이 세상에 대해 가지는 신의 창조적 힘을 다음의 세가지 형태로 보았다.
* 기원시키는 창조성 -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창조론이다.
* 유지시키는 창조성 - 현재 피조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의 창조성을 의미한다. 신은 이 세상에 존재로 참여하기도 하고 초월하기도 하면서, 모든 존재에 창조적인 존재의 힘으로 관계를 맺는다.
* 이끄는 창조성 - 이는 전통적으로 신의 섭리에 해당하는 주제인데, 이것은 바로 모든 피조물을 그 완성을 향해 이끄는 것이다. 틸리히는 신의 섭리라는 개념이 모호하다고 보았는데, 섭리라는 용어가 강조되면 신을 관찰자 또는 계획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이끄는 창조성은 신과 인간의 상호 자유에 바탕을 두고 모든 피조물의 자발성과 구조적인 전체성을 통해서 완성을 향해 가는 것을 말한다.
(2) 상징 - 틸리히는 신에 대해서는 오직 상징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궁극적 관심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상징적인 언어만이 궁극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틸리히가 주장하는 상징은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 상징은 하나의 기호라는 성격을 가진다. 기호는 자신을 다른 존재와 구별해준다. 둘째, 기호는 자신이 지시하는 대상의 실체에 참여하지 않지만, 상징은 참여한다. 셋째, 상징은 우리에게 닫혀 있던 실체의 모습을 열어 보여준다. 넷째, 상징은 일상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열어준다. 다섯째, 상징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여섯째, 상징은 인간의 삶처럼 성장하고 죽는다.
종교적인 상징은 세상적인 실체를 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모든 상징은 항상 이중적 측면을 가진다. 여기에는 유한성과 무한성이 함께 포함되기 때문에 그 표현이 지시하는 문자와 실재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종교가 신과 신의 속성과 행동과 현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모두가 상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상징적인 언어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신’의 의미는 완전히 상실된다.” 이런 면에서 “종교적 상징은 양날의 칼이다.” 종교적 상징은 그것이 상징하는 무한한 것에 우리의 주의를 향하게 하지만, 동시에 무한한 것을 유한성의 자리로 끌어내리기도 한다. 틸리히가 상징을 강조한 가장 주된 이유는 상징이 아니면 신의 초월성이 파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징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제약자인 존재자체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한자는 유한자의 상징을 통해 자신을 현현한다. 상징 안에서 인간의 실존과 존재의 근거가 마주친다. 틸리히의 종교적 상징에는 존재와 비존재, 존재와 존재자체, 유한자와 무제약자의 상호연관이 변증법적으로 드러난다.
5. 새로운 존재
틸리히에게 ‘새로운 존재’는 그의 신학 전체를 완성시켜 주는 결정적인 부분이다. 그는 현대인이 가지는 실존적 곤경을 극복할 답변으로 ‘새로운 존재’ 즉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면서 이가 얼마나 자신의 신학에 중요한지 말한다. 여기서는 새로운 존재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죄와 타락”을 먼저 살펴보고, 두 번째는 “새로운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다룰 것이고, 세 번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구원”에 대해 살펴보겠다.
1) 죄와 타락
틸리히는 아담으로 기원되는 인간의 원죄를 받아들이기 않는다. 그는 창세기 1-3장의 이야기를 인간이 본질에서 실존으로 넘어오게 된 전이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타락 이야기는 아담이라는 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실존적인 ‘보편성’을 보여준다. 틸리히는 바울이 ‘죄’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복수가 아닌 단수로 사용했으며, 죄를 이 세계를 지배하는 어떤 힘으로 이해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틸리히는 죄를 인간과 신의 분리로부터 야기된 어떤 상태로 보았다. 그는 죄의 현실에 놓인 이 상태를 ‘소외’라고 표현하고 인간의 소외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고 하였다. 첫째, 불신앙으로서의 소외이다. 이것은 인간 자신과 자신의 존재의 근거인 신과의 통일성을 완전히 파괴한다. 틸리히는 이러한 소외를 인간 존재가 가지는 보편적인 비극성으로 이해한다. 둘째, 휘브리스로서의 소외이다. 신적인 중심을 벗어나려는 유혹은 인간을 실존적으로 자신과 그의 세계 중심에 두게 한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를 신의 영역으로서의 자기 높임이다. 셋째, 실재하는 모든 것을 자신의 자아로 끌어들이려는 무제한적인 욕구이다. 욕구는 권력, 물질, 성, 지식, 정신적인 가치 모두에 해당된다. 이와 같은 소외의 특징은 모든 인간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틸리히는 소외를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 운명”이라고 칭한다.
이러한 소외는 ‘자기 상실’과 ‘세계 상실’을 가져온다. 존재론적인 대극성이 일어나며 유한성의 다양한 문제를 초래하기도 한다. 또한 더 이상 출구가 없는 상황, 곧 절망과 자살을 초래한다. 인간은 이러한 소외로 벗어나려는 많은 방법을 시도한다. 율법주의적 방법, 금욕주의적 방법, 신비주의적 방법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 방법들이 인간의 자기 구원의 길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틸리히는 제시한다. 틸리히는 근본 원인을 인간의 “의지의 노예”로 보았다. 인간의 유한성에서 나온 자유와 운명은 자기구원에 도달하지 못하고 구원을 향한 의지는 굴레와 한계라는 숙명적 상황을 맞이한다. “자신의 소외된 실존의 힘으로 소외를 극복하려는 시도들은 모진 고생과 비극적인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러한 모든 실패의 시도는 인류에게 “새로운 존재”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났다.
2) 그리스도로 불린 예수
틸리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본다. 그는 신과 인간은 서로 다른 존재인데 ‘본성’ 이라는 개념을 하나님과 인간에게 공통으로 적용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또한 이것이 예수는 신도 인간도 아닌 제3의 존재가 된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예수가 중재자로 불렸지만 구원이 예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신에게서 온다는 그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탈리히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부르지 않는다. “예수가 참 하나님”이라는 말은 예수가 ‘신적인 운명에 의해 구원자로 세워진’ 것을 단지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것이다. 틸리히에게 예수는 신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고 구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틸리히는 하나님을 하나의 ‘존재’와 같은 개체로 인식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이라는 인격적인 존재와 인간이라는 존재를 명제로 하고, 이 두 존재 사이를 화해시키는 존재로 예수를 생각한다면 틸리히의 기독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틸리히에게 있어서 예수는 인간을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구원자나 중재자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가 구원의 주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다면 왜 틸리히가 이렇게 예수를 존재론적으로 구원자 혹은 중보자로 보는 것을 거부하는가? 그것은 틸리히가 신 자체를 개체적인 존재로 보지 않는 그의 신론에 대한 이유도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예수가 존재론적으로 중보자가 되면 신은 피조물의 구원과 중보를 예수에게 의존해야 한다. 즉 신이 구원의 주체가 될 수 없고, 하나의 존재에 의해 신과 인간의 화해가 이루어진다. 틸리히로서는 하나의 존재인 예수가 존재자체인 신과 피조물의 중재자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볼 수 있는가? 틸리히는 ‘예수 그리스도’를 고유명사로 보지 않는다.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특별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특별한 인물을 신화론적 전승 속에서 표현해 주는 용어이다.” 이처럼 틸리히는 예수가 실존적 범주안에 있었음을 강조한다. 그는 성서가 예수의 (1)완전한 유한성, (2) 이 유한성에서 오는 유혹의 실재성, (3) 유혹에 대한 승리를 철저하게 보여주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든 힘은 무엇인가? 틸리히는 이것이 바로 새로운 존재, 혹은 새로운 존재의 힘, 혹은 하나님의 영이라고 표현한다. 틸리히의 말을 보자. “그를 그리스도로 만든 것은 나사렛 인간 예수의 영이 아니라 그의 개인적인 영을 사로잡아 이끌어 간 영적 현존, 곧 그 안에 있는 신이다... 즉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를 창조한 성령은 인류에게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와의 만남을 예비해왔고 또한 지금도 계속 예비하고 있는 성령과 동일한 존재라는 진리를 자각하는데 방해를 받아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든 것은 존재의 힘이며, 제자들은 소외를 극복하는 이 무한한 힘을 예수에게서 경험하며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이렇게 틸리히는 예수 안의 ‘새로운 존재’를 신이라는 존재자체의 힘으로 보았다.
3) 예수의 유일성
틸리히에게 있어서 예수는 신이 아니고 인간이 걸어가야 할 마땅한 길을 보여준 대표로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틸리히에게 구원은 인간 예수가 아니고 ‘새로운 존재’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다. 틸리히의 존재론은 모든 존재는 존재자체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예수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의 힘만을 유일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틸리히에게 있어서 새로운 존재의 힘은 그리스도로 불린 예수 이전에도 나타났고, 이후에도 계속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도 이전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와의 실존적 만남 이전”을 뜻한다. 틸리히는 오직 예수와의 만남, 혹은 예수 안에 나타난 구원의 힘에 의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면 구원이 매우 협소해진다고 보았다. 즉 틸리히는 구원의 근거가 예수로 제한된다면 매우 소수의 사람만이 구원에 이를 것이라고 본 것이다. 틸리히는 예수가 유일한 구원 사건이라고 보지 않는다. 단, 그는 예수 안에서 일어난 구원의 사건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는 모든 치유와 구원과정의 궁극적 기준이다.”
6. 성(聖)과 속(俗)
틸리히에게 성과 속의 주제는 “이성과 계시”, 그리고 “종교와 문화”의 관계성으로 나타났다.
1) 이성과 계시
틸리히는 이성을 인식론이라는 큰 틀 안에서 접근한다. 그는 이성을 존재론적 이성과 기술적 이성으로 구별하는데, 전자는 실재를 파악하고 변형할 수 있는 정신적 구조이며 후자는 인간 정신의 인식적, 미학적, 실천적 기능들 속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틸리히는 존재론적인 이성을 다른 모든 존재들과 구별되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인간성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한다. 기술적 이성을 실체를 인식하고 통제하는 수단이다. 기술적 이성이 존재론적 이성으로부터 분리되면 이는 단지 계산하고 추리하는 인식적인 면만 남게 된다. 기술적 이성이 물질문명을 발달시켰으나 그 자체는 빈곤해지고 타락하게 되었다. 우리는 틸리히가 이성과 계시, 혹은 이성과 믿음의 관계를 논할 때는 항상 존재론적 이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틸리히는 계시를 철저히 상호연관으로 이해한다. 계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어떤 사로잡히는 내용이 있어야 하고, 동시에 이 사로잡힘이라는 사건의 발생을 주관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그는 계시를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계시의 발생인 기원적 계시와, 기원적인 계시가 다시 새로운 개인이나 집단의 수용을 거치면서 발생한다는 의존적 계시로 구별한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예수를 만나서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은 기원적인 계시이다. 베드로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존재를 보았고 새로운 존재의 힘에 사로잡히는 주관적 측면과 예수 안에 실제로 존재의 힘이 나타난 객관적 측면이 동시에 일어났다. 하지만 그 이후의 세대들은 베드로, 혹은 다른 사도들에 의해 그리스도로 받아들여진 예수를 만난다. 이미 일어난 기원적 계시와 새로운 집단이 상호연관을 구성하면서 의존적 계시가 발생한다. 틸리히가 계시사건을 상호의존으로 보고 계시의 구체성과 계시사건에서 상황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준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계시의 발생과 원 예시의 지속적 발생이 수용이라는 상호성에 의존하기 때문에 의존적 계시에서 계시에 대한 어떤 변형이 일어나는지, 또 기원적 계시가 얼마나 준거로서의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판단을 위한 신학적 해석 작업이 과제로 남는다.
틸리히에게는 계시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일어나지 않고 반드시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만 일어난다. 모든 사건이나 사물이 계시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몇 가지 정리와 주의가 필요하다. 첫째, 계시의 매개체와 계시의 수용에 대해서는 성과 속의 구별이 전혀 없이 나타난다. 둘째, 모든 것이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 어떤 사건이나 사물이 그 자체로 매개체라는 것이 아니다. 매개체가 되려면 계시와 상관관계라는 배열의 구조로 들어가야만 한다. 역사가 계시의 매개체가 된다는 말은 역사를 통해(through) 계시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셋째, 자연물이 계시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틸리히가 자연계시를 주장한다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자연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일반계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특별계시로 보는 것에 상응하는 개념이다.
틸리히는 계시의 인식과 관련해서 기적과 탈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계시사건에서 신비한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기적이며, 기적 사건이 인간에 의해 수용되는 것을 탈아적 경험이라고 칭한다. 그는 탈아가 존재론적 이성과 전혀 모순적이지 않으면서 자아의 한계가 극복된다고 보았다. “탈아적인 이성”도 여전히 이성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계시와 이성은 충돌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성은 계시 경험을 위한 필수적인 것이며, 계시는 이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한계를 극복하게 한다.
2) 문화와 종교
역사적으로 볼 때, 절대성을 주장하는 기독교와 상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문화는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화와 종교의 관계설정은 어느 시대나 할 것 없이 모든 기독교인들이 해결해야 하는 현실적 문제이다.
(1) 종교에 대한 개념 - “나는 궁극적 관심에 붙잡힌 상태를 종교라 정의한다”라는 틸리히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를 신과 연관된 것으로 정의하지 않고 보편적인 것으로 보았다.
(2) 종교의 위치 - 그는 종교에 대한 영역을 따로 설정하지 않았다. 다만 역사적으로 그 기능을 통해 종교가 자신의 자리를 확보해왔다고 이해한다. 종교가 차지한 첫 번째 자리는 도덕적 기능이었다. 다음은 인간 정신의 활동, 심미적 기능, 근래에 들어 ‘감정’으로서 타당한 자리를 확보했다. 탈리히는 근대에서 현대 사회로 오면서 종교가 타당성을 점차 잃게 된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종교를 인간 정신의 한 요소로 보려는 시도를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며, 인간 정신의 전체와 연관된 것으로써, 종교를 ‘깊이’의 차원에서 보았다. 즉 인간 정신의 토대로 본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깊이에서 절대적 존재를 부분적이나마 경험한다.
(3) 종교와 문화와의 관계 - 틸리히는 문화적 구조를 단순화시키면 세 가지의 근본적인 틀이 나온다고 보았다. 첫째, 자율적 형식으로 문화의 세속적이고 형식적인 측면을 중시 여기는 형태이다. 문화는 인간의 내재적 합리성의 법칙들에 따라 움직이며 궁극적인 의미와 연관성은 부인된다. 둘째, 타율적 형식으로서, 형식보다는 본질이나 의미를 중요시 여기는 종교적 형식의 문화이다. 이 문화에서는 보편적 이성이 결여된 것으로 문화를 형성해나가는 동인이 종교의 법이나 국가의 권력과 같은 외부적 권위에 의존한다. 셋째, 신율적 형식으로 형식과 본질이 잘 어울려 균형과 조화가 이루어진 문화이다. 이는 인간 위에 더 높은 신적인 규범이 있지만, 인간은 외적인 권위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인 법과 인간 자신의 근거인 신적인 근거에 의해 문화를 형성해 나간다. 틸리히는 신율적 문화를 이상적으로 보고, 종교와 문화의 관계에서 문화에 대해 특별한 수식어 없이 긍정적으로 사용할 때의 문화는 신율적 문화를 의미한다.
그는 종교와 문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궁극적 관심인 종교는 문화에 의미를 주는 실체이며 문화는 종교의 근본적인 관심이 그 자신을 표현하는 형식의 전부이다. 요약하자면 종교는 문화의 실체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 “종교는 무한한 의미에 대한 정신의 지향이며, 문화는 유한한 형식에 대한 정신의 지향이다. 그러나 종교와 문화 양자는 의미형식의 완전한 통일 지향하는 데서 서로 만난다.” 이처럼 틸리히는 시각예술, 음악, 시, 문학, 건축, 춤, 철학 등이 궁극적 관심을 표현할 수 있으며, 이런 형식을 통해 종교적 본질이 전해진다고 보았다. 종교는 어디에나 존재하며 인간에게 무한한 깊이를 부여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종교와 문화는 오랫동안 성과 속의 분리 속에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종교가 궁극적 관심에 의해 경험된 상태라면 이 상태는 어느 특별한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 관심의 무조건적인 성격은 우리 생활의 매 순간에서 모든 공간과 모든 영역에서 가능하다. 틸리히는 기독교와 문화를 성과 속이라는 이원적 실체로 이해하지 않았다. 같은 영역에서 다루었고, 종교적 차원을 일상 경험의 차원에서 다루었다. 종교를 다양한 예술과 일상의 차원에서 다룸으로써 종교를 성(聖)이라는 특정영역에서 해방시켰다. 그는 문화가 가진 종교적 성격을 통해 문화를 속(俗)이라고 제한하지도 않았다.
7. 평가
틸리히를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 중 한명으로 간주하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는 사실이다. 그의 신학과 사상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와 비판이 있었지만 앞에서 다룬 주제를 통하여 틸리히에 대한 몇 가지 특징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1) 문화신학자로서의 틸리히
그는 기독교 전승과 현대문화를 매개하였으며 기독교의 초월적 개념과 세속의 유한한 개념 사이의 중재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와 세상의 갈등으로 대변되는 성과 속의 이원화를 극복할 수 있는 체계를 보여주었다. 이 점에서 틸리히의 전체 신학을 기독교와 문화 사이의 간격을 상호의존의 방법으로 극복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겠다.
2) 상관관계의 방법론
그는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저술을 했으나, 사상이 일관성을 가질 수 있었다. 그의 방법론은 인간과 신, 무한과 유한, 내재와 초월처럼 대립되는 두 실체의 중재를 의도한다. 두 실체의 통일성을 지향하는 성격을 가진 이 방법론은 그의 사상 전체를 일관된 토대 위에 올려 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실존적인 질문이나 철학적 질문에 의해 기독교 메시지가 약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방법론이 전통적으로 이원화된 두 영역과 두 실체의 통일성을 성공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은 그가 기독교의 역사에 남긴 공헌이며 계속되는 연구의 과제이다.
3) 그가 제시한 기독교의 새로운 개념과 용어, 그리고 상징
그의 신학은 기존의 신학 개념과 용어를 전면적으로 재해석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틸리히는 성서가 가지고 있는 상징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했다. 틸리히는 성서의 내용과 본질을 문자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했다. 상징과 기호는 다르며 상징이 훌륭하게 초월적 실재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 또 상징을 통해서 인간이 초월적 존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상징이론은 문자주의의 함정과 과학 시대의 도전을 이길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4) ‘존재자체’
그는 신을 ‘존재자체’라고 보았다. 신은 하나의 존재가 아니고 대상화될 수 없으며 모든 존재의 근거라는 것이 틸리히의 강조점이다. 따라서 신은 특정한 영역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깊이에서 경험된다. 이것은 주객이원화의 도식을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마련하였으며 신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5) 유신론의 신에 대한 개념
틸리히가 신을 하나의 존재로 보지 않는 다는 것은 유신론의 신의 개념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문제들이 나타난다.
첫째, 신이 “존재”라는 범주를 상실하면 신에 대한 “인격성”도 무의미해진다. 결국 틸리히의 신관에서는 인격적인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수정되거나 거부될 수밖에 없다.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과 피조세계를 떠난 하나님이 아니다. 그는 한 ‘존재’로 성육신해서 역사 속으로 들어왔고 역사 속에서 인간과 함께 고통 받고 십자가에 달렸다. 하나님의 인격성과 역사성이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토대이기 때문에 이 부분이 사라지면 기독교가 일반적인 종교의 하나가 될 가능성이 높다.
둘째, 틸리히에게서 모든 존재는 존재자체에 참여하며 신을 경험할 수 있다. 모든 존재가 신에 참여할 수 있는 근거는 모든 존재가 그 자체 안에 가지고 있는 ‘존재’ 때문이다. 틸리히의 신론은 신을 모든 존재가 참여할 수 있는 ‘존재자체’로 규정함으로써 무신론이 되지는 않더라도 존재론적 범신론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셋째, 주객 이원화는 극복이 되었지만 신을 ‘존재자체’라고 규정한 것은 대화와 만남의 상대로서의 신을 포기한 것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인간에게 응답하고 우리의 기도를 듣는다. 성서의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로서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인간과 만났다. 또한 성서가 증언한 하나님과 ‘존재자체’로 규정된 신이 동일시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성서는 삼위일체라는 구체적인 신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 하나님은 오직 계시에 의해서만 알려진다. 또한 틸리히에게 예수의 존재는 메시아도 아니고 구원자도 아니다. 그러나 성서는 예수에게서 나타난 구원 사건을 유일회적인 사건으로 증언한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대변되는 예수의 구원사역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예수의 유일회성과 절대성은 기독교의 독특성에 대한 중요한 근거이다. 그러나 틸리히처럼 신을 존재자체로, 예수를 하나의 규범으로 볼 때 기독교의 독특성은 상실될 수밖에 없다. 이는 그의 이론이 성서적 근거에 대한 검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틸리히 설교 새로운 존재 최 근
우리 시대를 향한 기독교의 메시지를 두 단어로 요약하면
“새로운 창조”(New Creation)에 대란 메시지
고후 5:17 - 기독교: “새로운 존재”(New Being)
예수님: “새로운 현실”(New reality)에 대한 메시지.
할례와 무할례 - 우리에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바울은 새로운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먼저 그것이 무엇이 아닌지에 대해 말한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니다” 라고 말한다.
즉 그것은 유대인이 되거나 이교도가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새로운 현실이 현존하는 분과 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할례 : 유대인들의 종교의식
제사 : 이반인들의 종교의식
세례 : 기독교인들의 종교의식
“그 어떤 종교도 중요하지 않다. 오직 새로운 상태만이 중요하다.”
바울 - 기독교는 종교이상이다. 기독교는 새로운 창조에 대한 메시지인다.
바울은 이방종교에 대해서 그리므로 우리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옛 창조 안에 새로운 창조가 있으며, 그 새로운 창조가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의 어리석음
새로운 창조 - 궁극적 관심이자 우리의 무한한 열정이 되어야한다.
화해로서의 새로운 존재
“ 이 새로운 존재란 무엇인가?” - 낡은 것의 갱신
새로운 존재 - 부패하고, 왜곡되고, 분리되고, 거의 파괴되었으나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은 낡은 것의 갱신이다. 구원은 창조를 파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낡은 창조를 새로운 창조로 변화시킨다.
새로운 창조의 세 가지 징표
① “화해” (reconciliation) - “하나님과 화해하라. 그분에게 적대적이기를 그치라.”
우리가 그분께 무언가를 드리고 그분을 기쁘게 해드릴 만한 선한 행위를 보이려고 한다면, 우리는 실패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자신이 거부되었다는 느낌과 더불어 적대감을 느낀다.
하나님과 화해 - “자신” 과 화해 . “다른 이들” 과 화해
우리는 새로운 존재에 의해 사로잡히기 위해 자신을 열어 두어야 한다.
② "재결합“ (Reunion) - 서로 분리된 것들이 그 안에서 재결합되는 현실.
새로운 존재 -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남 , 그분 안에서는 분리가 그분과 하나님 사이의, 그분과 인간 사이의, 그리고 그분과 그분 자신 사이의 일치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사랑” -> “자신의 불안을 스스로 짊어지려는 용기” 라고 갖게 됨.
= 깊은 자기 용납 안에서 자신과의 재결합을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됨.
새로운 창조 - 치유하는 창조. 자신과의 재결합을 이루기 때문.
③ “부활”(Resurrection) - 새로운 상태 승리, 옛 존재의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존재의 탄생. 먼 미래 발생이 아닌 지금 생명을 창조하는 새로운 존재의 능력이다.
새로운 존재가 있는 곳 - 시간의 모든 순간으로부터 영원으로의 창조가 존재한다.
부활은 지금 발생하거나,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영혼과 역가 안에서, 그리고 자연과 우주 안에서 발생한다.
● 화해, 재결합, 부활 - 새로운 창조, 새로운 존재, 새로운 상태이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기독교”가 아니라 “새로운 현실” 이다.
새로운 상태가 나타났고, 지금도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숨겨져 있으나 보인다. 그것은 이곳에 그리고 저곳에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속으로 들어가고, 그것이 당신을 사로잡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