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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틸리히의 신학과 영성

유 장환( 목원대학교, 조직신학)

I. 조직신학과 영성

폴 틸리히의 대표적인 저서는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I, II, III)이다. 여기서 틸리히는 그의 신학방법인 상관관계의 방법(the method of correlation)의 변증론적인 적합성과 체계적인 유용성의 증명을 그의 저술의 목적으로 삼고서 이 신학방법에 따라서 신학의 주제들을 인간 실존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제1부 이성과 계시에 따르면, 계시는 인간의 이성의 인식적인 기능에 대한 존재의 신비의 현현으로서 실존적인 이성의 모호성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또한 제2부 존재와 하나님에 따르면, 신은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체로서 인간의 유한성이 안고 있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또한 제3부 실존과 그리스도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인간을 옛 존재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의 담지자로서 인간 실존의 곤경성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또한 제4부 삶과 성령에 따르면, 성령은 인간의 영에 탈아적으로 현존하여 삶의 모호성을 극복하는 현존하는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영의 삶의 모호성에 대한 대답이다. 끝으로 제5부 역사와 하나님 나라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역사의 목표로서 역사의 의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이와 같이 틸리히는 신학의 주요 주제인 계시,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 나라를 이성, 존재, 실존, 삶, 역사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고찰하여 그 결과 계시는 이성의 모호성을 극복하는 존재의 신비의 현현임을, 신은 존재의 유한성을 극복하는 존재자체임을, 그리스도는 인간 실존의 소외성을 극복하는 새로운 존재임을, 성령은 인간의 삶의 모호성을 극복하는 현존하는 하나님임을, 하나님 나라는 역사의 모호성을 극복하는 역사의 목표임을 논증하고 있다.

그렇다면, 틸리히의 신학의 영성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틸리히의 신학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물음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먼저인 것이 실존적으로는 나중일 수 있고 실존적으로 나중인 것이 논리적으로는 먼저일 수 있다는 틸리히 그 자신의 말처럼 실존적으로 먼저 있었던 그의 영성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논리적으로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는 그의 신학에 대한 이해는 표면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틸리히의 조직신학은 상관관계의 방법을 통해서 신학의 전 주제가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틸리히의 신학의 영성을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쉬운 일이 아니다는 것은 틸리히가 직접적으로 영성을 주제화하지 않았기 때문뿐만 아니라 조직신학 각 권마다 영성을 각 주제의 관점에서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틸리히가 조직신학 제1권에서 지향성설명하면서 간접적으로 영성에 대해서 정의하고 있을지라도 이 정의는 그의 조직신학 전권을 통해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각 권의 설명을 간략하게 서술해 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먼저 조직신학 제1권 신론에 따르면, 영성은 인간의 도덕적인 행위와 문화적인 행위에 있어서의 역동성과 형식의 통일을 의미한다. 여기서 역동성과 형식은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의 구성요소들 중의 하나라는 점에서 영성은 존재의 구성요소들의 통일을 의미한다. 또한 존재의 근거 안에서는 존재의 구성요소들이 통일되어 있다는 점에서 영성은 존재의 근거 안에 있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조직신학 제2권 그리그도론에 따르면, 영성은 존재의 구성요소들이 분열된 상태인 인간 실존의 소외의 극복을 의미한다. 여기서 실존의 소외의 극복은 실존의 조건 속에서 본질적인 존재로 나타난 새로운 존재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점에서 영성은 새로운 존재에 대한 참여를 의미한다. 또한 이 새로운 존재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 나타났다는 점에서 영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끝으로 조직신학 제3권 성령론에 따르면, 영성은 존재의 구성요소들이 분열된 상태인 인간의 영의 삶의 모호성의 극복을 의미한다. 여기서 삶의 모호성의 극복은 존재의 구성요소들에 의존하고 있는 삶의 기능들의 모호성이 극복된 삶이라는 점에서 영성은 모호하지 않은 삶을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모호하지 않은 삶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영성은 성령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종합하여 말하자면, 영성은 존재의 구성요소들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모든 존재의 구성요소들이 통일되어 있는 존재의 근거 안에 있음이요, 소외의 극복이라는 점에서 실존의 소외를 극복한 새로운 존재로서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요, 삶의 모호성의 극복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영 안에 탈아적으로 현존하여 모호하지 않은 삶을 창조하는 성령 안에 있음이다. 또한, 영성을 영적인 삶으로 해석한다면 영성은 존재의 근거안의 삶이요, 그리스도 안의 삶이요, 성령 안의 삶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틸리히의 조직신학은 같은 본질의 영성을 각권 마다 각기 다른 주제의 관점에서 다르게 함축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신학의 영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한 방법으로서 다른 주제의 관점을 포괄하고 있는 관점을 선택하여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조직신학 제3권 제4부 삶과 성령은 틸리히의 신학과 영성에 대한 가장 적절한 연구대상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틸리히는 성령을 신의 삶의 가장 포괄적인 상징으로 이해하여 성령을 그의 신학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로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신의 삶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직접적인, 무제한적인 상징이다. 성령은 모든 존재론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상징과 균형을 맞출 필요가 없다. 또한 틸리히에 따르면, 아무리 그리스도론이 신학의 근원적인 토대를 제공한다 할지라도 예수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되었고, 또한 우리가 실존의 모호성을 극복하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론은 성령론이 없다면 완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영이며, 역사 속에서의 새로운 존재의 실현은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틸리히의 조직신학 제3권 제4부 삶과 성령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틸리히의 신학과 영성을 총체적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II. 삶과 성령(Life And Spirit) : 성령 안의 삶

1. 삶의 물음

틸리히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령을 삶의 모호성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으로 보기 때문에 성령을 논하기 전에 먼저 삶의 물음부터 분석한다. 말하자면, 틸리히는 성령(모호하지 않은 영원한 삶)을 요청하는 인간의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삶의 근본적인 물음이 어째서 성령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는지를 먼저 고찰한다.

1)삶의 본질

먼저, 틸리히의 성령론의 기본 용어로서 사용되고 있는 삶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틸리히는 무엇보다도 존재론의 입장에서 삶을 존재의 현실성’(actuality of being)으로 정의한다. 모든 존재자는, 그것이 종이든지 개체이든지 자신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실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모든 존재자들의 특수한 잠재성에 대한 관찰은 우리로 하여금 삶에 대한 존재론적인 개념, 곧 존재의 현실성으로서의 삶의 개념을 형성하게 한다. 이것은 삶이란 존재론의 입장에서 보면 잠재성이 현실성으로 실현되는 과정임을 의미한다. 틸리히는 이러한 삶에 대한 존재론적인 개념은 실존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본질적인 요소와 실존적인 요소의 혼합을 의미한다고 본다. 존재의 현실성으로서의 삶의 개념은 존재의 근본적인 특질인 본질과 실존이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잠재성은 현실적인 것이 되고자하는 힘(또는 생동성)을 가지고 있는 본질적 존재의 한 종류이다. 예를 들어 모든 나무의 잠재성은 나무됨(treehood)이다. 물론 기하학의 형식처럼 이러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본질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것이 된 잠재성은 스스로 유한성, 소외, 갈등과 같은 실존의 조건에 예속된다. 이러한 예속은 잠재성이 자신의 본질적인 성격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잠재성이 실존의 구조아래에 놓이게 되어 성장과 왜곡과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의 개념을 본질적인 요소와 실존적인 요소의 혼합의 의미로서 사용한다. 이것은 삶은 본질만도, 실존만도 아니고 본질과 실존의 혼합이며 따라서 현실적인 것이 된 잠재성은 그 본질적 성격을 상실하지는 않지만(나무는 여전히 나무이다) 그것은 실존의 구조아래에서 놓이게 되어 성장과 왜곡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틸리히에 있어서 삶이란 존재론적으로 말하면 존재의 현실성,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를 의미하며, 실존론적으로 말하면 본질적인 것과 실존적인 것이 혼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삶의 구조

그렇다면 삶의 과정 곧 잠재성의 현실화는 어떻게 일어나며 이러한 삶의 과정은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가? 다시 말하자면, 삶의 실존론적인 물음은 무엇이며, 어째서 이 물음은 성령(모호하지 않은 영원한 신의 삶)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가? 먼저, 틸리히는 삶 곧 잠재적 존재의 현실화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본적인 요소, 곧 자기동일성(self-identity)과 자기변화(self-alteration)와 자기에로의 귀환(return to one's self)을 통해서 일어난다고 본다. 먼저 모든 삶은 존재하기 위해서 자기 동일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 자기 동일성이 그 동일성에 머물러 버린다면 그 존재는 살아있는 존재라고 할 수 없다. 곧, 삶은 새로운 잠재적 가능성을 실현하는 운동, 곧 자기 변화를 해야만 한다. 그리고 삶은 자기변화를 경험한 후에 다시 그 경험의 내용을 통해서 자기 동일성을 재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처럼 모든 삶에 있어서 잠재성은 자기동일성, 자기변화 그리고 자기에로의 귀환을 통해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틸리히는 이와 같은 삶의 기본적인 요소(자기 동일성, 자기 변화, 자기에로의 귀환)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삶의 세 가지 기능을 구별한다.

첫째, 삶은 자기통전(self-integration)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삶은 자기 동일성(자기중심)을 확립하고, 자기변화에로 나아가고, 그리고 다시 그 변화의 경험내용과 결합하여 자기동일성을 재확립하는 순환운동을 한다. 다시 말하면 삶의 자기통전이란 중심성이 실현되는 운동이다.

둘째, 삶은 자기창조(self-creation)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 기능은 잠재성을 현실화하려는 삶의 운동으로서 수평적인 방향으로 진행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여기서 자기 동일성과 자기변화 모두 실제적이지만 이 운동은 자기변화의 지배하에서 일어나는 운동을 뜻한다. 이 둘을 비교해서 말하면, 자기에 중심을 가지고 있는 존재의 순환운동이 자기통전의 운동이라면 이러한 순환을 넘어서서 새로운 내용을 창조하는 운동이 자기 창조의 운동이다.

셋째, 삶은 자기초월(self-transcendence)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 기능은 수직적 운동을 하는 삶을 뜻하며 용어자체는 앞의 두 기능에서도 사용되었다. 곧, 자기통전의 기능은 하나의 중심을 가지고 있는 존재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자기초월의 운동이고, 자기창조의 기능은 모든 삶의 창조가 보여주는 것처럼 수평적인 방향에서의 자기초월의 운동이다. 그러나 이 두 경우에 자기초월은 여전히 유한한 삶의 한계 안에 머무르고 있다. 곧, 유한한 상황은 다른 것에 의해서 초월되고 있지만 유한한 삶 자체는 초월되지 않고 있다. 이에 비하면, 자기초월의 기능은 삶이 유한한 삶인 자기 자신을 넘어서 나아가려는 삶의 기능을 의미한다. 결국, 종합적으로 말하면 자기통전의 기능은 중심성의 원리 아래에 있는 운동이고, 자기창조의 기능은 성장의 원리 아래에 있는 운동이며, 자기초월의 기능은 승화의 원리 아래에 있는 운동이다.

한편, 삶의 기능들은 본질적으로는 삶의 기본적인 구성요소인 자기 동일성의 요소와 자기변화의 요소를 결합하고 있지만 실존의 차원에서는 이 결합이 실존적인 소외로 말미암아 분열되어 있다는 근본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곧, 자기통전은 분열에 의해서, 자기창조는 파괴에 의해서, 그리고 자기초월은 세속화에 의해서 파괴될 위험 속에 있다. 그 결과 삶의 모든 과정들은 이처럼 부정적인 요소와 긍정적인 요소가 명백하게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혼합되어 있기에 그 모호성을 피할 수 없다. 삶은 매 순간 모호하다.(life at every moment is ambiguous)

3) 인간의 영의 차원에서의 삶의 모호성

틸리히는 이와 같은 삶의 모호성은 모든 생명의 차원(무기적, 유기적, 심리적, 영적, 역사적 차원)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인간의 영의 차원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틸리히는 삶의 자기통전과 자기창조와 자기초월은 인간의 영의 차원에서는 각각 도덕, 문화, 종교로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1)영의 차원에서의 삶의 자기통전 : 도덕

먼저, 틸리히는 자기통전의 모호성을 영의 차원에서는 도덕의 행위에서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영의 차원에서 자기통전의 운동을 살펴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도덕의 행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로 도덕의 행위에서 인간은 인격적 자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서 도덕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틸리히는 인간에게는 완전한 중심이 본질적으로 주어져 있지만 인간이 이것을 자유와 운명을 통해서 실현하기까지는 현실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이 그의 본질적 중심성을 실현하는 행위가 도덕의 행위라고 주장한다. 도덕은 영의 구성적인 기능이다. 따라서 도덕의 행위는 어떤 신의 법이나 인간의 법을 준수하는 행위를 뜻하지 않고 삶이 영의 차원에서 자신을 통전하는 행위를 뜻한다. 곧, 도덕은 중심을 가진 자아가 자신을 인격으로서 구성하는 삶의 기능을 뜻한다. 이처럼 도덕이란 인격적 자아의 구성을 뜻하는 것이며 이러한 도덕의 행위는 한 인격의 삶에 있어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인격으로서의 인격의 구성은 그의 삶의 전 과정 동안에 결코 끝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틸리히는 대표적으로 희생의 개념을 분석하여 삶의 자기통전의 기능의 모호성을 지적한다. 틸리히는 희생의 모호성(the ambiguity of sacrifice)은 한 존재가 그가 만난 실재의 내용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파괴하지 않고 그의 통일된 중심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생긴다고 본다. 실재의 내용을 나의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나는 무수한 가능성들을 만난다. 그들 각각은 받아들여지면 자기변화를 뜻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분열의 위험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나는 현재의 나를 위해서 많은 가능성들을 나의 자아밖에 두든지 아니면 나의 자아를 확대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위해서 현재의 나의 어떤 것을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의 과정들은 가능한 것과 실제적인 것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으며 한 쪽을 위해서 다른 쪽을 포기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바로 이것은 우리의 모든 인격적인 삶이 모호한 희생 속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이 희생의 모호성은 인간에게 있어서 불가피한 것이다. 더욱이 희생의 모호성은 인간의 영의 차원에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희생의 모호성은 본질과 실존의 혼합 속에 있는 인간의 삶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희생의 모호성은 오직 현실성과 가능성 양자 모두를 포함하는 모호하지 않는 희생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완전한 자기희생은 이러한 희생의 모호성 때문에 영원히 모호하지 않는 삶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영의 차원에서의 삶의 자기창조: 문화

다음으로, 틸리히는 삶의 자기창조의 모호성은 영의 차원에서는 근본적으로 문화의 현상 속에 나타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문화란 무엇인가? 그는 무엇보다도 문화란 어떤 것을 돌보고 살아있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행위를 뜻한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인간은 그가 만나는 모든 것을 문화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문화의 대상을 변하지 않게 남겨 두는 것이 아니고 그로부터 새로운 어떤 것을 물질적으로(기술의 기능에서처럼), 수용적으로(테오리아의 기능에서처럼) 그리고 반응적으로(프락시스의 기능에서처럼) 창조하는 것이다. 곧, 문화는 마주친 실재를 넘어서 새로움을 창조하는 행위이다.

바로 여기서 틸리히는 새로움의 창조인 문화의 모호성을 그의 대표적인 기능인 언어를 통해서 고찰한다. 먼저 틸리히에 따르면, 언어의 모호성은 의미와 그 의미가 지시하는 실재 사이의 분리에 근거하고 있다. 정신이 대상을 파악할 때 파악된 대상과 언어에 의해서 창조된 의미 사이에는 간격이 만들어진다. 곧, 실재가 의미로 전환될 때 언어는 정신과 실재를 분리하게 된다. 사실 각 시대마다의 인식에 대한 연구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궁극적인 통일을 보여줌으로써 의미와 실재 사이의 분리의 간격을 이으려고 한 시도였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행위의 성공적인 결과가 진리로 일컬어졌다. 그러나 모든 인식행위 역시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전제하기 때문에 그 모든 지식은 모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틸리히는 이와 같은 언어의 모호성을 관찰, 추상, 전체적 진리, 논증 등의 분석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고찰한다. 예를 들어 인식은 한 대상의 본질에 다다르려고 하는 시도인데 이 시도의 과정은 추상에 의해서 곧, 각각 그 자신 속에 본질이 들어 있는 수많은 특수한 것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볼 때 추상의 모호성은 분명한 것이다. 말하자면, 추상의 모호성은 한 개념이 그 개념을 이루기 위해서는 추상된 특수한 것의 구체적인 요소들을 동시에 포함하기도 하고 은폐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것이다.

결국, 인식의 모든 기능은 궁극적으로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주체가 언어와 개념과 이미지로 객체를 받아들임으로써 그 분리를 이으려고 하지만 실존의 조건 아래에서는 이러한 목적은 결코 성취될 수 없다. 여전히 분리는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상황은 인간의 삶의 상황 자체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며 또한 그 때문에 결코 인간의 창조행위에 의해서 극복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삶이 본질과 실존의 분리를,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초월해야만 한다. 곧, 삶이 존재의 본질적인 통일의 상태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틸리히에 따르면 그것은 성령의 선물이다.

(3)영의 차원에서의 삶의 자기초월: 종교

다음으로, 틸리히는 삶의 자기초월의 모호성은 인간의 영의 차원에 있어서는 종교의 현상 속에서 가장 명백하게 나타난다고 본다. 왜냐하면 틸리히에 따르면 종교는 영의 차원에서 나타난 삶의 자기초월을 뜻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틸리히는 삶의 자기초월을 뜻하는 종교개념은 그 자체가 종교의 모호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기초월에서는 어떤 것은 초월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초월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자기초월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것도 거기서 초월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초월되는 행위 속에서 더 이상 거기에 있어서는 안되고 부정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삶의 자기초월로서의 종교는 종교를 필요로 하면서도 동시에 종교를 부정해야만 하는 모호성 속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더욱이 틸리히는 종교는 다른 모든 차원의 삶의 모호성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 보다 심오한 모호성에 빠지게 된다고 말한다. 종교는 삶의 위대함과 위엄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다. 여기서 삶의 위대함은 거룩함이 된다. 하지만 종교는 또한 삶의 위대함과 위엄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거부이다. 여기서 위대함은 가장 심오하게 세속화된다. 결국 삶의 자기 초월로서의 종교도 삶의 자기 초월은 자기초월의 정기능과 역기능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자기초월의 모호성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종교의 정기능은 종교가 일상생활의 먼지와 소음으로 뒤덮여 있는 인간의 영적인 삶에 삶의 깊이를 열어준다는 점이다. 종교는 거룩한 것, 접근할 수 없는 것, 궁극적인 의미, 그리고 궁극적인 용기의 원천에 대한 경험을 제공해준다. 이것은 종교의 영광이다. 그러나 종교는 역기능도 가지고 있다. 곧, 종교는 자신을 궁극적인 것과 동일시하고 세속적인 영역을 경멸한다. 또한 종교는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탄압한다. 이것은 종교의 수치이다.

틸리히는 이와 같은 종교의 성격으로 인해서 종교의 모호성은 이중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교의 첫 번째 모호성은 종교적인 기능 자체 안에서 나타나는 자기초월과 세속화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 모호성은 조건적인 것을 무조건적인 타당성으로 높이는 마성화에 대한 것이다.

첫째로, 자기초월과 세속화의 모호성은 모든 종교적 행위에는 세속화의 요소가 현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이러한 측면을 종교의 제도적인 현상과 환원주의적인 현상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종교의 제도화란 종교가 무한한 것을 향해서 유한한 것을 초월하는 것 대신에 유한한 실재 자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종교는 일반 사회단체와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조직체가 되어 버린다. 다음으로 종교는 환원주의적 방식으로 세속화되고 있다. 여기서 종교의 환원주의적 세속화란 종교를 문화와 도덕으로 환원시켜 종교의 상징을 단지 문화적 창조의 결과로 해석하는 것을 뜻한다. 곧, 종교는 인식의 영역에서는 심리학적 원천이나 사회학적 원천에서 유추된 것으로 설명되어 환상이나 이데올로기로 생각된다.

둘째로, 자기초월의 모호성은 신적인 것과 마성적인 것 사이의 모호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마성화의 현상은 거룩한 것의 특별한 담지자가 자신을 거룩 자체와 동일시함으로써 그 결과 자기초월이 왜곡되는 것을 뜻한다. 간단히 말해서 유한한 것을 무한한 것으로 드높이는 것, 곧 유한성의 한 요소를 무한한 힘과 의미로 고양시키는 것이 마성적인 것(the demonic)의 특징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볼 때 종교는 항상 세속화와 마성화의 위협 속에 놓여 있으며, 종교적인 삶의 모든 행위에는 양자가 명백하게 또는 은밀하게 현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삶의 모호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우리는 이것을 직접적으로는 자기 초월을 시도하지만 성공할 수 없었던, 곧 실존 속에 있는 인간이 본질적인 통일의 상태에 도달하려고 하지만 그것에 도달할 수 없었던 종교의 기능에서 살펴보았고, 간접적으로는 그 모호성이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열에서 비롯된 도덕과 문화의 기능 속에서 살펴보았다. 인간은 자신을 본질과 연합시키고 본질적인 선을 창조하고자 하지만 인간은 그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인간은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모호하지 않는 삶을 회복할 수 있는가? 이 점에서 틸리히는 모호성 속에 있는 종교는 모호하지 않은 삶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아니지만 종교적 상징주의는 모호하지 않은 삶에 대한 대답을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삶 이것들은 모두 모호하지 않은 삶의 물음에 대하여 계시가 제공한 대답의 상징적인 표현이다. 성령은 영의 차원의 삶의 모호성의 극복을, 하나님 나라는 역사적 차원의 삶의 모호성의 극복을, 영원한 삶은 역사를 넘어서 있는 삶의 모호성의 극복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의 삶의 모호성은 오직 성령의 현존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성령(Spiritual Presence)

우리는 앞에서 삶의 세 가지 기능인 도덕과 문화와 종교의 모호성을 살펴보았다. 곧 우리는 도덕은 희생의 모호성으로 인해서 완전한 자기 구성을 할 수 없고, 문화는 주-객 분열로 인해서 의미있는 자기 창조를 할 수 없고, 종교는 세속화와 마성화의 위협으로 인해서 성공적인 자기 초월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또한 우리는 삶의 모든 모호성은 인간의 실존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영의 차원에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라는 것도 살펴보았다.

이제 틸리히는 먼저 삶의 실존적인 물음에 대한 계시적인 대답으로서 제시된 성령의 의미와 특징을 고찰한 후에 성령이 어떻게 삶의 모호성을 극복하는지를 고찰한다.

1) 성령의 의미

틸리히는 성령이란 인간의 영에 현존하는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본다 하나님의 영은 피조물의 삶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삶의 현존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은 현존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틸리히는 이와 같은 성령에 대한 정의를 자신의 설교집인 새로운 존재영원한 지금에서 보다 분명하게 주장한다. 성령이란 우리 안에 거하고 있는 하나님 자신을 의미한다. 성령은 우리를 뒤흔들고,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 현존하는 하나님에 대한 또 다른 말이다., “우리의 영에 현존하시는 하나님 (God present to our spirit),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의미이다. 성령은 신비적인 실체가 아니며 하나님의 한 부분도 아니다.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다. 특히 성령은 만물의 창조적 근거로서의 하나님도 아니고, 역사를 이끌며 역사의 중심 사건 속에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도 아니다. 그는 공동체와 개인 속에 현존하는 하나님으로서 그들을 사로잡고 그들에게 영감을 주며 그들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고 존재자체 또는 존재의 근거이듯이 하나님의 영은 하나의 존재나 실체가 아니고 인간의 영에 현존하는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현존’(God present)을 의미한다. 곧, 하나님의 영은 현존하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틸리히는 성령의 의미를 완전하게 나타내기 위해서는 성령(Spirit)이란 단어 대신에 (하나님의) 영적인 현존(Spiritual Presence)이란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면 성령이 인간의 영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인간의 영은 하나님의 영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영 안에 거하며 역사한다는 은유적인 진술로 대답되어 왔다. 이 점에서 틸리히는 만일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 안으로 들어온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 속에서 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을 밖으로 이끌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곧, 하나님의 영의 은 인간의 영의 측면에서는 밖인 셈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 안에 거하면 유한한 삶의 한 차원인 인간의 영은 성공적인 자기초월로 이끌려진다. 인간의 영은 궁극적이며 무조건적인 것에 의해서 사로잡힌다. 물론 인간의 영은 여전히 인간의 영이다. 인간의 영은 본래의 그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영은 동시에 성령의 충격(impact)에 의해서 자신 밖으로 나간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 안에 거한다는 것은 인간의 영이 성령의 충격에 의해서 자신 밖으로 이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황홀경(ecstasy)은 성령에 의해서 사로잡힌 인간의 상태를 정확하게 나타내 주는 전통적인 용어이다.

이 점에서 틸리히는 성령에 의해서 창조된 인간의 황홀경의 상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첫째, 성령은 인간의 영이 자신의 본질적인 구조를 파괴하지 않고 자신을 초월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간다. 탈아(황홀경)는 통전된 자아의 중심을 파괴하지 않는다. 만일 파괴한다면 마성적인 사로잡음이 성령의 창조적인 현존을 대체할 것이다.

둘째, 성령의 경험의 탈아적인 성격은 인간의 영의 합리적인 구조를 파괴하지 않는다할지라도 인간의 영이 스스로 할 수 없었던 것을 창조한다. 성령이 인간을 사로잡을 때 성령은 모호하지 않은 삶을 창조한다.

셋째, 자기초월 속에 있는 인간은 모호하지 않는 삶에 도달할 수 있지만 인간이 먼저 성령에 의해서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인간은 성령을 붙잡을 수 없다. 인간은 자기초월의 본성에 의해서 모호하지 않은 삶에 대한 물음을 묻도록 이끌린다.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오직 성령의 창조적인 힘을 통해서 인간에게 오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인간의 영 안으로 들어오도록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한한 것은 무한한 것을 강요할 수 없다. 곧, 인간은 하나님을 강요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만일 종교적인 헌신과 도덕적인 순종과 과학적인 정직이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내려오도록강요한다면 그 때 내려온 하나님의 영은 종교적으로 위장한 인간의 영일 뿐이다.

이와 같이 성령은 인간의 영의 합리적인 구조를 파괴하지 않고 인간의 영의 자기초월을 통해서 모호하지 않은 삶을 창조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모호하지 않은 삶은 오직 인간의 영이 성령에 의해서 사로잡힐 때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영과 삶의 모호성

우리는 앞에서 삶의 모호성과 이 모호성에 대한 계시적인 대답으로서 성령의 의미와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틸리히는 성령이 어떻게 삶의 모호성, 곧 종교와 문화와 도덕의 모호성을 극복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고찰한다. 여기서 틸리히는 하나님의 영이 삶의 모든 모호성의 극복자임을 논증한다.

(1)종교의 모호성의 극복: 프로테스탄트의 원리

먼저, 틸리히는 성령이 교회의 구성원 개개인에게 효과적인 한 성령은 인간의 영의 특별한 한 기능으로서 나타나는 종교를 극복한다고 본다. 물론 틸리히에게 있어서 종교의 극복은 종교의 세속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종교의 극복은 성령을 통해서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모두가 제거되고 이 둘 사이의 간격을 좁혀짐으로써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틸리히는 종교가 성령의 현존에 의해서 극복되는 한 성령은 종교의 세속화와 마성화 모두를 극복한다고 본다.

첫째, 종교가 성령에 의해 극복되는 한 성공적인 자기초월을 가로막는 세속화는 정복된다. 교의 환원주의적인 세속화와 종교의 제도적인 세속화는 교회 구성원 개개인이 영적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저지된다. 곧, 성령의 자유는 종교개혁에서처럼 제도적인 세속화를 파괴한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서 성령의 자유는 환원주의적인 세속화를 저지한다. 왜냐하면 환원주의적 세속화는 제도적인 세속화에 대한 저항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만일 이러한 저항이 무의미하게 된다면 도덕과 문화의 기능은 다시 삶의 자기초월의 목표, 곧 궁극적인 것을 지향하게 될 것이다.

둘째, 종교가 성령에 의해서 극복되는 한 마성화도 정복된다. 여기서는 위대함의 긍정(자기-높임) 속에 감추어져 있는 마성화와 거룩의 이름으로 유한한 것을 무한한 것으로 긍정하는 데서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는 마성화, 곧 비극과 우상화 모두 원칙적으로 성령에 의해서 극복된다.

먼저, 비극의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마성화는 성령에 의해서 극복된다. 사실 그리스도교는 항상 그리스도의 죽음도 그리스도교인의 수난도 비극이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왜냐하면 어느 것도 위대함의 긍정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소외된 인간의 곤경성에 대한 참여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와 순교자들이 죄 없이고난당했다는 주장은 그들의 고난이 자기 긍정적인 위대함에 의해서 초래된 비극이 아니라 인간의 소외의 비극적인 결과에 대해 기꺼이 참여하려는 그들의 의지에 근거한 것임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거룩한 것의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마성화도 성령에 의해서 극복된다. 이러한 마성화는 한 교회가 영적 공동체를 모호하지 않게 대표한다는 주장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교회는 그 결과 성과 속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무제한적인 의지를 갖게 되는데 그 자체가 그러한 교회에 대한 심판이다. 또한 이것은 그러한 주장을 하는 집단의 추종자로서 자기 보증적이며, 광신적이며, 다른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려는 개인들에게도 해당된다. 왜냐하면 성령이 종교를 극복하는 한 성령은 교회의 구성원 개개인의 그러한 절대주의적인 주장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성령이 효과적인 곳에서는 하나의 교회가 다른 모든 교회를 배제하면서 하나님을 대표한다는 주장은 거부된다. 성령의 자유가 그것을 저지한다. 또한 성령이 효과적인 곳에서는 교회의 한 구성원이 진리를 배타적으로 소유했다는 주장도 진리에 대한 그의 단편적이며 모호한 참여에 대한 성령의 증언에 의해서 파괴된다. 이것은 성령은 광신주의를 배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현존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그가 하나님을 붙잡았다고 자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그를 사로잡는 것 곧 성령을 붙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틸리히에 따르면 종교의 모호성은 성령이 종교의 세속화와 마성화를 정복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곧, 종교의 모호성은 인간의 힘으로는 극복될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성령의 탈아적인 힘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틸리히는 이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트 원리'의 진리이며 이런 점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원리는 종교에 대한 성령의 승리의 표현이라고 본다. 프로테스탄트의 원리는 성령에 의한 종교의 극복의 표현이며, 종교의 모호성, 곧 종교의 세속화와 마성화에 대한 승리의 표현이다.

(2)문화의 모호성의 극복 : 신율적인 문화(theonomous culture)

다음으로, 삶의 자기창조의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문화의 모호성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문화의 모호성의 근본적인 원인인 주체와 객체사이의 분리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 틸리히는 문화의 모호성의 근본원인인 주객분열은 성령이 주체를 초월적인 연합으로 이끌어 감으로써 그리고 주체가 초월적인 연합 속에서 주-객을 초월한 존재의 통일성에 참여함으로써 극복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언어는 근본적으로 주-객의 분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풍부함 대 가난함, 보편성 대 특수성, 의사 전달 가능성 대 의사전달 불가능성과 같은 언어의 모호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언어는 주-객 분리가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는 것과 언어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분리 때문에 완전한 의미를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율에 있어서 언어는 단편적이지만 이러한 모호성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언어는 어떤 순간에 성령의 담지자가 되어 언어적인 자기초월의 행위 속에서 말하는 그와 그가 말한 것의 연합을 표현한다. 이렇게 성령의 담지자가 된 언어는 객체를 주체와 대립 속에 있는 객체로 파악하지 않고 주-객을 초월하여 삶의 숭고함을 증언한다. 곧, 성령을 담지한 언어는 주-객 구조를 초월한 것을 증언하고 표현한다. 이처럼 언어의 가난함과 풍부함의 모호성은 성령이 말하는 사람을 사로잡아 그의 말을 성령의 담지자의 상태로 이끌어 올림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성령은 언어의 전달 가능성과 전달 불가능성 사이의 모호성도 극복할 수 있다. 언어는 다른 자아의 중심에 침투할 수 없기 때문에 언어는 항상 드러낸 부분과 감춘 부분의 혼합이다. 후자로부터 의도적인 은닉의 가능성 곧, 허위, 왜곡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성령에 의해서 결정된 언어는 타자의 중심에 도달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유한한 대상이나 유한한 주관성의 견지에서(예를 들어 감정)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령에 의해서 결정된 언어는 초월적인 연합 속에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중심을 연합시킴으로써 타자의 중심에 도달한다. 이처럼 성령이 있는 곳에는 오순절 이야기가 말하고 있듯이 언어의 소외는 극복된다.

결국, 언어의 모든 모호성은 주-객을 초월하여 초월적인 연합(transcendent union)으로 이끄는 성령에 의해서 극복되는 것이다. 곧, 언어의 모호성은 성령에 의해서 결정된 언어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된 언어에 의해서 극복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에 의해서 결정된 인간의 언어(the Spirit-determined human word)를 의미하는 것이다.

(3) 도덕의 모호성의 극복: 신율적인 도덕(theonomous morality)

틸리히는 성령은 신율적인 문화를 창조하여 문화의 모호성을 극복하듯이 신율적인 도덕을 창조하여 도덕의 모호성을 극복한다고 본다. 그러면 성령이 창조한 신율적인 도덕은 어떻게 도덕의 모호성을 극복하는가? 앞에서 우리는 도덕, 곧 인격의 자기통전 행위는 자기동일성과 자기변화의 대극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에 중심을 가진 자아는 끊임없이 공허한 자기동일성이나 혼란스러운 자기 변화에 빠질 위험 속에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바로 이러한 대극 관계로 인해서 생긴 대표적인 모호성이 희생의 모호성이다. 틸리히는 이와 같은 희생의 모호성 곧, 가능한 것을 위해서 현실적인 것을 희생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현실적인 것을 위해서 가능한 것을 희생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단편적이지만 성령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다고 본다. 성령은 인격의 중심을 보편적인 중심, 곧 믿음과 사랑을 가능하게 만드는 초월적인 연합으로 이끌어 간다. 인격의 중심이 초월적인 연합으로 이끌려지면 이것은 실재와의 어떤 만남보다 우월하게 된다. 왜냐하면 초월적인 연합은 가능한 모든 만남의 내용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초월적인 연합은 신의 삶의 통일성을 뜻하기 때문에 인격의 중심은 잠재성과 현실성을 초월하여 가능한 모든 만남을 포괄하게 된다. 곧, 인간의 본질은 성령과의 교제속에서 실존의 조건 아래에 있는 자유와 운명의 우연성으로부터 해방되게 된다. 이러한 해방의 수용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희생을 뜻하며 동시에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성취를 뜻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인간이 유일하게 행할 수 있는 모호하지 않은 희생은 오직 성령 아래에서의 희생뿐이다.

이와 같은 틸리히의 주장은 인격의 자기통전은 성령 아래서 자기를 빈곤하게 하지 않고 자기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고, 자기를 분열시키지 않고 자기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곧, 성령은 인격의 자기통전 행위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중의 불안 곧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자기실현 속에서 자기를 상실할 수도 있다는 불안을 극복한다. 이러한 극복은 성령이 실존 속에서 본질을 모호하지 않게 실현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성령이 있는 곳에는 현실적인 것은 잠재적인 것을 나타내며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을 결정한다. 곧, 성령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은 실존의 조건 아래에 나타나지만 새로운 존재의 실재 안에서 실존의 왜곡을 극복한다. 결국, 희생의 모호성은 인간실존이 성령에 의해서 새로운 존재에 참여하여 본질과 실존 사이의 갈등을 초월함으로써 극복되는 것이다.

III. 틸리히의 신학의 영성의 의의

이제까지 우리는 조직신학 제3권 제4부 삶과 성령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틸리히의 신학의 영성, 곧 성령 안의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고찰해 보았다. 간략하게 종합하자면, 삶은 본질과 실존의 혼합이기 때문에 모호성을 피할 수 없다. 이 모호성은 인간의 영의 차원에서는 도덕, 문화, 종교 속에서 명백하게 나타나는데 삶의 자기구성으로서의 도덕은 삶이 근본적으로 본질과 실존의 혼합이기 때문에 모호성을 피할 수 없고, 삶의 자기창조로서의 문화는 삶이 근본적으로 주-객 분열 속에 있기 때문에 모호성을 피할 수 없고, 자기초월로서의 종교는 삶이 근본적으로 자기-안주와 자기-높임 속에 있기 때문에 모호성을 피할 수 없다. 이처럼 인간의 모든 삶의 실현은 곧 완전한 자기구성과 의미있는 자기창조와 성공적인 자기초월은 매 순간 모호성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모호성은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영 안에 있으면, 말하자면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영적인 현존에 의해서 본질과 실존 사이의 분열과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열을 넘어선 초월적인 연합 속으로 이끌리게 된다면 극복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영의 탈아적인 힘에 의해서 사로잡히게 된다면 실존과 본질의 분열 속에서 완전한 인격적인 자기구성을 할 수 없었던 인간의 도덕적인 삶은 완전한 자기구성으로 이끌리고, 주체와 객체의 분리 속에서 완전한 의미를 창조할 수 없었던 인간의 문화적인 삶은 완전한 자기창조로 이끌리고, 자신의 힘으로는 완전한 자기초월을 할 수 없었던 인간의 종교적인 삶은 성공적인 자기초월로 이끌리게 된다. 결국, 인간의 삶은 매 순간 모호하지만 성령 안의 삶은 비록 단편적일지라도 모호하지 않은 삶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와 같은 틸리히의 성령론이 지니고 있는 영성의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틸리히의 신학의 영성은 초합리적인 탈아로서의 영성이다.

틸리히는 성령의 안의 삶 곧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사로잡히면 인간의 영은 자신 밖으로 이끌리어 탈아의 상태에 있게 되는데 이러한 탈아의 상태는 인간의 영의 본질적인 구조를 파괴하지 않는다고 본다. 말하자면,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영 안에 있음 곧 성령 안의 삶은 인간의 영이 자신의 구조를 넘어서는 자기초월적인 탈아적인 경험이지 결코 반합리적인 또는 비합리적인 경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탈아(ecstasy)는 인간의 영의 본질적인 구조 곧 합리적인 구조를 파괴하지 않고 자신 너머로 이끌어 간다. 이와 같은 탈아에 대한 초합리적인 해석은 인간의 영의 합리적인 구조를 파괴하고 교회공동체를 혼란스럽게 하는 비합리적인 탈아의 현상들을 정화시키고 기독교 영성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본다.

둘째, 틸리히의 신학의 영성은 삶의 총체성으로서의 영성이다.

틸리히는 성령 안의 삶 곧 성령이 인간의 영 안에 현재할 때 인간의 영이 도덕과 문화와 종교의 기능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성령은 종교의 영역뿐만 아니라 도덕과 문화의 영역에도 명백하게 현존한다고 본다. 곧, 그는 문화가 성령의 현존의 영향 아래에 놓이게 되면 신율적인 문화가 창조되어 자율문화와 타율문화의 대립이 극복되고, 도덕이 성령의 현존 아래에 놓이게 되면 신율적인 도덕이 창조되어 도덕의 모호성이 아가페에 의해서 극복된다고 본다. 따라서 틸리히에 따르면 성령 안의 삶은 종교적인 자기초월 뿐만 아니라 완전한 자기통합(도덕)과 의미있는 자기창조(문화)도 포함하는 것이며, 이 점에서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은 숭고한 것이다. 인간의 영의 차원의 삶의 모든 영역은 숭고한 것이다. 이와 같은 틸리히의 주장은 성과 속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하여 삶의 이원화를 초래하고 있는 그릇된 영성생활을 비판하고, 삶의 총체성을 지향하는 영성을 회복하여 생동적인 신앙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종교는 문화의 실체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라는 틸리히의 문화신학의 근본명제는 오늘날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지표가 아닐 수 없다.

셋째, 틸리히의 신학의 영성은 새로운 존재의 영성이다.

틸리히는 성령 안의 삶은 새로운 존재의 실현이라고 본다. 곧 그는 본질로부터 분열된 인간 실존은 성령의 현존에 의해서 초월적인 연합으로 이끌리면 주-객 분열을 극복한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성령의 현존은 본질과 실존 사이의 분열을 넘어선, 그리고 결과적으로 삶의 모호성들을 넘어선 새로운 존재를 창조한다. 이와 같은 틸리히의 주장은 새로운 존재의 실현이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현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과 성령의 역사의 궁극적인 목표가 다른 데 있지 않고 새로운 존재의 실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자유한 영을 종교적인, 도덕적인 열정을 통해서 붙잡으려는 행위와 영성운동의 목표를 새로운 존재의 실현이 아니라 교회의 내적, 외적 목적에만 한정하려는 행위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행위들은 인간의 유한한 영은 그의 행위를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무한한 영을 붙잡을 수 없다는 프로테스탄트의 원리를 파괴하는 것이며, 성서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의 역사는 인간의 구원(새로운 피조물)에 그 목표가 있었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다. 결국, 틸리히가 성령 안의 삶을 삶의 모호성을 극복한 모호하지 않은 삶과 연관시킨 것은 영성생활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트 원리를 재발견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오늘날 성령의 역사를 감정의 변화나 신비한 세계의 체험에서 찾고자하는 그릇된 영성운동에 대해서 올바른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