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용 칼 바르트의 신학 -화해론.hwp
칼 바르트의 화해론 4152031 배진호
바르트의 화해론은 그의 ‘교회교의학’ 13권 가운데 5권에 걸쳐서 쓰인 것으로 바르트의 교의학에서 가장 방대하고 또한 바르트 신학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화해론 가운데 놀라운 것은 그가 객관적 화해론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바르트가 화해론에서 발전시킨 죄론은 전통적인 죄론과 매우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 이론인데, 죄론에 대한 매우 깊이 있는 신학적 이론으로 평가된다. 바르트는 화해론과 죄론에서 매우 독특한 신학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또한 놀랍게도 믿음을 인간의 행위로 규정하면서, 그의 ‘교회교의학’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리에서 주장했던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나는 신학이론을 제시했다. 믿음을 인간적 행위로 규정한 것은 화해를 객관적인 하나님의 행위로 규정한 것 뒷면으로 신학적으로 원숙한 바르트를 느낄 수 있는 바르트의 가르침이다.
객관적 화해론
바르트의 화해론의 가장 큰 특징과 독특성은 그가 객관적 화해론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 만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주관적 믿음과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하나님과 화해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
전통적 화해론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되는 순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즉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해가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이 화해론은 주관적 화해론인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에 의하면 이 주관적 화해론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인류가 하나님과 화해된 순간은 자신 믿음의 순간이 아니고 이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악을 짊어지고 죽으신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인간이 믿든지 믿지 않던지, 상관없이 인류의 죄가 해결되었고, 인류는 하나님과 화해 된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심판하실 진정한 심판자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대신해서 심판을 받으셨다. 심판 하셔야 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히려 심판을 받으시고, 심판을 받아야 할 인간은 심판을 받지 않고 살아난 것이다. 즉, 십자가에서 인간과 하나님의 교환이 이루어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에 대한 형벌은 사실상 완료 된 것이다.
십자가는 극단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계시이며, 하나님은 극단적인 사랑과 자비로 모든 인류의 죄악의 짐을 스스로 담당하신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는 인간의 믿음에 의해 규정되지 아니한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는 이미 영원히 결정 되었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원히 자비하신 신이라고 말한다. 또한 인간은 영원히 자비로우신 신을 모를 수는 있어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그의 자비하심, 화해의 사건을 철회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화해의 사건은 이미 객관적으로 일어났고, 인간의 죄악의 형벌은 이미 객관적으로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화해론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의 순간을 지금 여기에서 믿는 믿음의 순간을 이천년 전의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순간으로 옮겨놓은 화해론이다.
그렇다고, 바르트의 화해론이 인간의 믿음이 불필요하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만인구원론의 이단적 이론이란 것인가?
바르트가 객관적 화해론을 주장하며 많은 위와 같은 많은 질문이 있었다. 바르트는 이러한 질문에 만인구원론이 아닌 만인화해론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만인구원론과 만인화해론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바르트에 의하면 화해와 구원은 다른 사건이며, 화해는 객관적으로 일어났지만, 구원은 주관적으로 지금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어날 사건이라고 말한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심판은 십자가에서 이루어 졌으며, 더 이상 인간을 심판하시지 아니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에게 영원히 자비하실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은 존재한다. 그것은 십자가의 그늘이다. 실상은 없지만, 세상에 존재하고, 세상 속에 있는 인간들은 그것을 느끼고 경험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복음과 성령만이 인간을 사단과 무의 세력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 바르트는 죄를 세 가지 특징으로, 교만, 어리석음, 태만으로 보았는데 이 죄의 근본은 복음에 대한 인간의 불신앙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 불신앙 때문에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비참과 곤경 속에 살고 있다.
객관적 화해론의 신학적 파장
바르트의 객관적 화해론은 세계 신학계에 엄청난 충격과 파장을 몰고 왔다. 가장 첫 번째로 온 것은 만인구원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었다.
바르트가 자신의 화해론은 만인 구원론이 아니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의 화해론이 만인구원론을 향하고 있으며, 만인이 십자가에서 용서하셨다면,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께서 그 누구도 심판치 않고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결국 구원하게 된다는 비판이었다.
그러나 바르트가 만인구원론을 주장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바르트는 ‘교회교의학’의 예정론에서 만인을 향한 선택에서 바로 만인구원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신학적 추상화이고, 이를 감행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했으며, 하나님의 자유와 하나님의 사랑은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의 사랑에서만 신학적 논리를 추론해서 논리적 비약을 하는 것 역시 경계했다. 또한 인간의 논리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활동하심과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잘못이라주장했다.
그러므로 많은 신학자들은 바르트가 어떻게 구원론의 결과를 쓸지 기대했으며, 바르트는 화해론을 쓰고 구원론을 쓰려 계획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구원론을 쓰지 못하고 1968년 12월 10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바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 바르트가 남긴 신학적 문제는 세계 신학계에 중대한 숙제로 남아 있었지만, 이 문제에 대한 뚜렷한 신학적 발전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1995년 위르겐 몰트만이 ‘오시는 하나님’을 출간하면서 바르트가 그의 화해론에서 남긴 신학적 문제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몰트만은 ‘오시는 하나님’에서 발전시킨 신학적 답은 만유구원에 대한 희망이었다. 몰트만은 2003년 ‘마지막 속에 시작이 있다’를 계속 저술하면서 자신의 만유구원에 대한 희망을 더욱 자세히 체계화시켰다. 몰트만의 만유구원은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예정론에서 이미 기초를 세우고 그의 화해론에서 발전시킨 새로운 구원론의 완성이었다.
몰트만에 의하면 바르트의 화해론이 남긴 신학적 숙제는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결정과 이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인간의 자유와의 관계였다. 즉, 인간이 끝가지 복음을 거부한다면 마지막 날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고 지옥에 넣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자유 사이의 문제이기도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자유 사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만유 구원론이 옳은가, 이중적 심판론이 옳은가를 결정하는 문제는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결단과 인간의 결단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의 문제와 연관된다고 한다. 이에 몰트만은 인간의 운명을 궁극적으로 정하신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몰트만은 인간의 결정과 하나님의 결정은 대칭적인 것이 아니고, 심각하게 비대칭적이며, 하나님의 결정이 절대 우위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인간은 그리스도를 끝까지 거부 할 수 있지만, 영원히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영원성을 극복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몰트만은 모든 사람이 이미 하나님과 화해되어 있다는 바르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인간이 이것을 알든지 모르든지 그것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영원히 정해진 객관적 사실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을 하나님이 화해시킨 하나님의 결정보다 크게 보아선 안 된다는 점이다.
바르트의 객관적 화해론은 카톨릭교회 안에도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파장을 주었다. 특히 칼 라너의 구원론과 관련해서, 20세기 후반에 발전시켜 카톨릭교회 안에 큰 신학적 변혁을 몰고 온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은 바르트의 객관적 화해론과 관계되어 연구되며, 라너의 ‘칭의론에 관해 논쟁이 되는 신학적 문제들’ 이라는 유명한 글에서 바르트의 화해론에 대한 상당한 긍정을 표하고 있는데, 모든 인간은 선험적으로 의화 된 인간이라는 라너의 신학적 관점이 바르트의 객관적 화해론과 일치하고 있다.
라너에 의하면 모든 인류는 의화된 존재이고 그리스도의 은총을 경험할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갖고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에게 그리스도의 은총이 객관적으로 관통하고 있으며, 경험하고 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해서 선을 행하고, 초월적 존재를 향해 개방하는 사람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했다.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은 카톨릭교회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때, 크게 영향을 미쳤고, 20세기 카톨릭교회의 방향을 바꾸는 분수령이었다.
바르트의 객관적 화해론은 몰트만의 만유구원에 대한 희망의 이론도,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의 객관적 화해론은 20세기 후반의 신교와 구교를 망라해서 구원론의 방향이 새롭게 정립되는 큰 신학적 파장을 몰고 온 것이다.
교만과 태만과 기만으로서의 죄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의 죄에 참된 형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바르트는 신학적으로 화해론의 뒷면은 죄론이라고 말한다. 죄를 해결해주시기 위한 것이 화해의 사건이고, 화해의 사건의 뒷면이 죄악 된 인간의 삶과 역사이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죄의 형태를 3가지 교만, 태만, 기만으로 보았다.
첫 번째 죄의 형태 교만은 하나님께서 낮아지시고 인간이 되셨는데 인간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것을 말한다.
이 교만은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신데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우상을 만드는 형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인간의 형태, 이웃을 지배하려는 형태, 인간이 스스로 심판자가 되려하는 형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죄의 형태로 볼 수 있다.
인간은 교만의 죄로 말미암아 나락의 상태에 떨어진다. 이 나락의 상태로 떨어진 인간의 특징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신을 파괴한다.
두 번째 죄의 형태는 태만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인간의 형태는 왕 같은 인간으로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고 승천시키시면서 속량 받은 인간의 참 모습을 보여주셨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고 승천하신 모습이 인간의 참 모습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존귀한 자요, 하나님의 자녀이며, 왕 같은 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며, 스스로를 죽음에 갇힌 존재로 생각하고 염세주의에 빠지는 것을 인간의 죄라고 보았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왕 같은 참된 모습에도 불구하고 자격과, 위상, 특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의 거절을 죄라고 보았다.
즉, 복음을 거절하는 것을 죄라고 본 것이다. 왕 같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자녀의 모든 자격과 위상을 거절함을 죄로 보았다.
태만에 빠져있는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을 거절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으며, 이웃과의 관계,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자로 나타난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고, 당연하지만 기도하지 않는 인간의 태만은 죄인 것이다.
태만으로서의 죄는 복음에 대한 거절인 동시에 거룩한 삶에 대한 거절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거룩한 삶에 이룰 수 있지만, 인간이 스스로 고상한 삶을 거부하고 저급한 존재로 살아가고 세상의 탐욕 속에 묻혀 사는 것 역시 태만으로서의 죄이다.
세 번째 형태는 인간의 기만이다. 기만은 인간의 속임수와 거짓말을 의미하는데, 그 뒤에는 무의 세력, 곧 마귀가 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르트에 의하면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화해의 사실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이시다. 무의 세력과 마귀의 세력은 이미 끝났으며,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리이시다.
기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의 죄를 해결 해 주셨지만, 이 복음의 사건이 없었던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에 의하면 교만으로서의 죄의 결과는 인간의 추락이고, 태만으로서의 죄의 결과는 인간의 곤경, 기만으로서의 죄의 결과는 저주이다.
인간의 행위인 믿음
하나님은 하나님을 통해서 인식된다. 이 말은 바르트의 신 인식론의 특징을 요약한 말로 오랫동안 인식되어 왔다. 바르트는 ‘교회교의학’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리를 집필하면서 하나님은 철저하게 성령을 통해서만 인식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인식이라는 말은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인식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화해론에서 객관적 화해론을 발전시키면서 하나님의 화해의 활동의 객관성과 하나님의 활동의 독립성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화해의 사역은 인간의 동참없이 객관적으로 일어났다.
즉, 하나님의 화해의 사건에 인간의 믿음은 필요치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화해의 사건의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인간의 반역과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일어났다.
불트만이 주장한 것처럼 제자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일어났다 부활은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놀라운 능력의 현시로, 객관적 역사적 사실이다.
부활은 인간의 신앙 속에서나 존재하는 실존적 사건이 아닌 배타적인 하나님의 행위였고, 인간의 동참 없이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스스로를 드러내신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인간의 믿음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바르트는 부활은 구체적 사건으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져 볼 수 있는 놀라운 사건이다. 제자들은 부활의 사건을 볼 수 있었고, 앞에서 대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신앙과는 철저하게 구별되는 독립적 사건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성령 안에서 세계 역사 속에 활동하시고 현존해 계신다. 부화라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과 활동은 오늘도 그 놀라운 은총과 능력으로 인간의 가슴 속에 믿음을 일깨우고 그의 증인들을 만들고 계신다. 그러나 믿음은 인간의 행위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능력을 경험하면서도 인간은 믿음으로 결단하지 않을 수 있다. 바르트는 이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가능성이지만, 현실 속에서는 이것이 실질적으로 가능하고 또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의하면 믿음은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이다. 그것은 철저히 인간의 행위이지 하나님의 행위가 아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인 믿음을 통해 인식된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과 하나님의 참된 만남이 시작된다.
바르트는 믿음은 인간의 행위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철저히 성령 안에서 역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성령 안에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증인 이시고 이 증인의 역사로 말미암아 인간은 믿음을 갖게 되고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화해의 사건을 깨닫게 되고 세상과 우주 만물 속에 깃들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끝으로 ‘교회교의학’ 화해론은 바르트 신학의 절정으로 바르트는 이 화해론에서 그의 전기 저술에서 하지 못했던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책임을 언급했으며,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만남을 원하시고 인간으로부터 감사와 찬양을 받기를 원하시는 신이라는 시실을 본격적으로 체계화시켰다. 믿음은 인간의 행위이고 기도와 감사와 찬양 모두 인간의 행위이다. 인간은 결코 로봇이나 기계처럼 규정된 대로 움직이는 어떤 존재가 아닌,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