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바르트는 설교의 갱신을 위해서는 설교의 방법과 기술 이전에 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함을 일깨워주었다. 그는 설교란 근본적으로 신학적인 시도
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바르트의 설교에 대한 이해는 그의 신학에 대한 이
해를 충실히 반영한다.
바르트는 신학의 불가능성을 신과 인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에서 확증한다.
동시에 신학의 가능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의 은
혜에서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인간이 설교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은혜로우신 분으로 드러내시고 말씀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설교가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바르트가 신학에서 인간을
찾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주목하였듯이 그는 설교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찾아오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임
을 분명히 하였다.
연구 논문
칼 바르트의 신학과 설교
*
이문균
(
한남대 교수/ 조직신학)
*“이 논문은 2007년도 한남대학교 학술연구조성비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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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르트의 설교에 대한 이해에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르트는
설교를 듣는 회중, 인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바
르트는 설교를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의 행위라는 점을 강조함으로 설교
자의 역할은 거의 사라지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설교의 가능성과 근거, 그리고 설교의 내용을
신학적으로 잘 해명함으로써 설교의 갱신에 크게 기여하였다. 오늘날 설교가
도덕적인 충고, 더 나은 삶의 원리를 제시하는 것으로 떨어지는 현실에서 바
르트는 설교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것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주제어
설교, 신학, 칼 바르트, 하나님의 말씀, 설교 신학
1. 서론
설교의 갱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런데 설교의 갱신
을 위해서 우선 필요한 것은 설교의 방법과 기술이 아니라 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다.1) 설교자들은 설교의 방법과 효과에는 관심이 많지만 과연
설교가 무엇이고, 자신의 설교가 계시에 적합한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
각하지 않는다. 다만 교인들이 좋아하는 설교를 하기 위하여 애쓴다. 이
것은 목사에게 치명적인 유혹으로 작용할 수 있다. 설교자는 성경 구절
을 인용하지만 적극적인 사고방식, 성공의 비결, 삶에 대한 실용적인 지
혜를 전할 때가 많다. 이러한 현실에서 바르트는 우리에게 설교에 대하
여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그는 설교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208 /
神學思想 140輯·2008 봄
1)
크래독은 2003년 4월 에모리대학교 설교학 교수직을 은퇴한 다음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의 학문적 활동을 회고하면서 설교자는 신학적인 훈련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
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Fred B. Craddock, “Interview with Craddock”,
Preaching18/6(May-June 200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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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증언하고,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바르트는 설교가 근본적으로 신학적인 시도임을 일깨워주었다. 그러
나 한국 교회는 바르트에게서 참으로 배워야 할 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
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바르트의 신학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기도 하고
그의 신학에 대해서 약간의 지식도 가지고 있지만 정작 그의 신학이 설
교의 갱신에 얼마나 중요한 내용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
고 이해도 부족하다. 목회자들은 자신의 설교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새
로운 설교학 이론을 찾아 헤매지만 정작 설교가 무엇인지, 설교에서 무
엇이 선포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물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바르트의 신학을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르트의 신학은 설교의 근본 문제에 대해서 우리의 시야를 바로 잡아
준다. 그는 신학과 설교에 대해서 분명한 이해를 갖고 자신의 생각을
펼쳤다. 신학과 설교에 대한 바르트의 생각 가운데 몇 가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신학은 설교의 과제를 위해 있다. 교의학(신학)은 설
교자의 근본 질문, 즉 너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며, 하나님이 무엇을 말
씀하려 하시는가 라는 질문에 봉사해야 하기 때문에 필요하다. 설교는
그 본질적인 내용에서 뿐 아니라 그 방식에 있어서까지 신학적인 활동
이다. 신학은 설교의 원천이 될 수 없으며, 설교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재판관이 될 수도 없다. 그러나 신학은 설교가 온전케 되도록 함께 가
는 대화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 글에서 신학과 설교에 대한 바르트의 그러한 생각을 확인
하고 그 의미를 해명하려고 한다. 우리는 설교에 대한 바르트의 관심이
그의 신학에 어떻게 반영되었으며, 동시에 그의 신학이 설교에 대한 우
리의 이해를 어떻게 깊게 하는지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바르트의 설교
신학이 한국 교회의 설교 갱신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찾아볼 것
이다.
이문균·칼 바르트의 신학과 설교 /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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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설교자 바르트와 신학
잘 알려져 있듯이 바르트의 신학은 설교의 과제에 응답하기 위하여
나온 신학이다. 1920년대 초 바르트의 신학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때
바르트는 어떤 강연회에 초청을 받았다. 그 모임을 주관한 야코비
(Jacobi)
박사는 바르트에게‘나의 신학 이해의 서론’에 대해서 강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바르트는 그 강연의 대부분을 설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제시하는 것으로 채웠다. 그는 자신이 본격적인 신학을
가지고 출발을 하지 않았다고 전제하면서, 나의 신학“그것은 단순히
설교의 필요와 약속”이 무엇인지를 느끼면서 시작되었다고 하였다.2)
교회 교의학을 비롯한 바르트의 방대한 저서는 그 신학의 넓이와 깊
이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의 넓이와
깊이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는 목회자로서 설교를 준비하고 설교하는
가운데 그가 배운 신학을 문제 삼게 되었다. 그리고 성서를 깊이 들여
다보는 가운데 신학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게 되었다. 교회와 설교
강단은 바르트의 신학을 형성한 삶의 자리였다.
바르트의 생각을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신학은 설교를 위해 있는 것이
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설교에 대한 그의 관심은 바르트를 설교자가 아
니라 신학자로 살게 만들었다. 설교의 과제를 위한 신학을 전개하기 위
해 그는 평생을 신학 저술에 바쳐야 했다. 그의 신학은 설교의 과제를
위해 수립된 신학이었지만 신학을 위하여 그는 설교자로서의 활동을 줄
일 수밖에 없었다.
신학자로서 그의 설교는 어떠했을까? 그의 신학은 그의 설교의 내용
뿐 아니라 그의 설교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나님의 주도적인 활동
에 주목하고, 자연신학을 거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거의 일방적으로
210 /
神學思想 140輯·2008 봄
2)
칼 바르트, “설교의 필요와 보람”, 전경연 편『성서 안의 새로운 세계』, 서울: 향린
사, 1964, 62.
08이문균(207-232) 2008.4.7 12:39 PM 페이지210
강조하는 그의 신학적 입장은 설교에 있어서 청중과의 접촉점을 의도적
으로 무시하게 하였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의 설교는 대중적인 호소력
이 부족했다. 설교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의
설교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항상 설교자라는 의식을 갖고 살았다. 생애 말기에 그
는 바젤의 교도소를 정기적으로 찾아가 수감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설교자로서 바르트의 삶은 다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 자펜빌에서 목회하던 시기
이 시기에 바르트는 신학과 설교에 대하여 독자적인 견해를 형성하지
못했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자, 특히 헤르만(Wilhelm Herrmann)의 영
향을 많이 받았다. 이 당시 그의 신학과 설교는 종교적 주관성, 개인주
의, 역사적 상대주의 등 자유주의 경향을 보여주었다. 1914년에 한 그
의 설교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종교 사회주의를 연결하려는 시도가 엿보
인다. 이 시기에 그는 제목 설교를 많이 하였다. 역사적으로 관심 있는
주제나 그 당시 문제가 되는 주제를 길게 설교하기도 하였다.3) 신학적
인 개념을 길게 다룬 설교, “윌리암 부스의 생애”와 같은 전기 설교도
보인다.
이 당시 바르트는 설교단에 오를 때마다 자신의 설교자로서의 직무의
공허성과 위선성을 날카롭게 느꼈다고 한다. 바르트는 그러한 느낌을
공유하는 투르나이젠과 성경을 함께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그 연구를
통하여 바르트는“성경 안에 있는 기이한 세계”, 하나님의 세계를 발견
하게 되었다. 게네스트(Hartmut Genest)는 이 시기 바르트의 설교에는
회중의 삶에서 발견되는 성경의 정신을 명료하게 하려는 시도도 보인다
고 하였는데4), 이것은 바르트의 신학적 사유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라
이문균·칼 바르트의 신학과 설교 / 211
3) William H. Willimon, Conversations with Barth on Preaching, Nashville:
Abingdon Press, 2006,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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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생각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 아래 있었던 이
시기의 설교는 1960년대에 출판된 설교에 나타나는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5)
2) 로마서 강해와 교회 교의학을 저술하던 시기
1916
년부터 바르트는 로마서를 주의 깊게 읽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19
년 로마서 강해가 출판되었고 1922년에 제2판이 출간되었다. 이
시기에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과 결별했으며, 설교에 대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몇 년 동안은 슐라이어마허의
설교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여러 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의 설교가
예전보다 더 성서적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길고 복잡하였다. 여
전히 주제 중심, 제목 중심의 설교가 많았다. 즉, 그의 설교는 그의 신
학적 발견과 보조를 맞추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브룬너(Emil
Brunner)
에게 편지하기를 설교를 갱신하고 발전시키고 싶지만 실제 설
교에서는 그게 잘 안 된다고 하였다. 설교가 여전히 딱딱하고 부분적으
로만 성서적이었다.6)
1930
년대에 바르트는 히틀러와 나찌 운동에 대항하는 활동을 통해서
그의 신학적 확신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의 신학은 설교에도 잘 반영되
었다. 이 당시 그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음을 자주
확인하였다.7) 나찌에 대항하는 고백 교회 형성에 참여한 바르트는 바르
멘 고백(Barmen Confession)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어떤 권
212 /
神學思想 140輯·2008 봄
4) Hartmut Genest, Karl Barth und die Predigt: Darstellung und Deutung von
Predigtwerk und Predigtlehre Karl Barths, Berlin: Neukirchener, 1995, 92.
5) William H. Willimon, op. cit, 158.
6) Ibid., 159.
7) Karl Barth and Eduard Thurneysen, Come Holy Spirit, trans. George W.
Richards, New York: Round Table Press, 1934, 90-102.
08이문균(207-232) 2008.4.7 12:39 PM 페이지212
세와 상징도 계시가 될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바르트는 성경에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다른 권위를 인정
한다고 여겨지는 모든 신학과 결별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신학과
설교에 그대로 나타났다. 1940년대부터 1950년대에는 교수로서의 책임
때문에 주로 저술과 강의로 세월을 보냈으며 설교는 이따금만 했다.
3) 교도소 설교 시기
1957
년 이후 바르트는 스위스 바젤의 교도소에서 설교하기 시작하였
다. 이 시절 그의 설교는 덜 복잡하였으며 직접적이고 단순하였다.8) 그
러나 예화는 거의 없었고, 현대의 상황에 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았
다. 거의 전적으로 성서 본문, 때로는 본문에 나오는 한 단어를 중심으
로 설교하였다. 생애 후기에 한 그의 설교는 그의 신학에서 강조한 것
을 구체화하고 충실히 실현하였다. 그의 설교는 생생하게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누구나 신학에 충실한 설교가 흥미를 끌기는 쉽
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윌리몬은 바젤의 교도소에
서 바르트가 한 설교 테이프를 구해서 들어 본 소감을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 “인쇄된 설교문과 달리 그의 설교는 매우 생동감이 있었고 목
회자의 감수성과 활력이 넘쳤다! 실제 설교는 독일어 설교 원고보다 더
열정적이고 생생했다.”9) 젊은 시절 그가 로마서 강해에서 하나님의 전
적 타자성,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였다면 노년의 바르트
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 하나님의 심판보
다 은혜를 강조하였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신학과 설교뿐 아니라 바르
트의 인간성 역시 더 친절하고 부드럽고 이해심 있고 사랑스러워졌다
(Heinz Zahrnt).
이문균·칼 바르트의 신학과 설교 / 213
8) Karl Barth, Deliverance to the Captives, trans. Marguerite Wiesser, New
York: Harper & Brothers, 1961.
9) William H. Willimon, op. cit, 159.
08이문균(207-232) 2008.4.7 12:39 PM 페이지213
3. 신학과 설교의 불가능성과 가능성
“하나님의 전적 타자성과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 인식의 불가능성
과 가능성”, “신학의 불가능성과 가능성”
-이것은 바르트 신학의 성격
과 내용을 지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설교의 불가능성과 가능성을 지배
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가능성을 철저히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
님의 은혜를 통해서 신학과 설교의 가능성을 축하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과 인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는 바르트 신학
의 출발점이었다. 이것은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인식할 수도 없고 말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가능
성이 위로부터 열림을 말하려는 것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하나님과 인
간, 영원과 시간은 역설적으로만, 변증법적으로만 나타낼 수 있다. “변
증법적 방법은 신은 인간이 아니라는 진리, 즉 신은 유한한 영역을 벗
어나 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그 안에서 자신을 계시한다는
진리를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10)
이처럼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음과 말할 수 있음을 동시에 강조
하는 바르트 신학의 역설은 그의 설교에 대한 이해에도 그대로 관철된
다. 바르트는 목사들의 모임에서 설교에서 겪게 되는 역설적인 긴장을
강조하였다. 설교자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불가능한 상황
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11) 목사로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야 하
지만 인간인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이것은 피할 수 없
는 목사의 처지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 책임과 하나님
에 대해서 말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설교의 불가능성에
214 /
神學思想 140輯·2008 봄
10)
제임스 C. 리빙스톤, 『현대 기독교 사상사 하권』, 김귀탁 역, 서울: 은성 출판사,
1993, 151.
11) William H. Willimon, op. cit,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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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그의 말에서 우리는 인간 편에서 신학은 불가능하다는 자연신학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평가를 상기하게 된다.
그러나 바르트의 생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한계에
서 하나님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일
반적인 인지 능력을 통해서 알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전히 자유
로운 주체로 남아 계시며, 우리 지식의 객체가 되지 않으시는 자유를
누리신다. 하나님은 오직 간접적으로, 육화된 형식으로, 베일에 가려있
으면서 동시에 드러나는 사건으로서 알려지신다.12) 하나님의 계시는 그
의 은혜의 자유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13) 그래서 그는 설교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바로
인식할 때 설교의 가능성이 시작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설교의‘계시 적합성’과 연결된다. 바르트는 설교의
계시 적합성은 설교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설교
자가 인식할 때 비로소 그의 설교가 계시 적합적이 될 수 있다고 한
다.14) 설교의 불가능성, 설교의 부적합성, 설교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는 사실 즉 설교의 계시 부적합성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설교
의 계시 적합성’이 살아난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설교할 수 없다. 오직
“설교는 자기를 계시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에 귀를 기울임 가운데 이
루어진다. 설교자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으며, 이 일에 관여하고 또
이 사건을 통해 부름을 받았다.”15) 이런 점에서“설교는 하나님 편에서
는 지배이고 인간 편에서는 복종일 뿐이다.”16)
이문균·칼 바르트의 신학과 설교 / 215
12) Karl Barth, Göttingen Dogmatics: Instruction in the Christian Religion,
edited. by Reiffen, trans. by Bromiley, vol. 1, Grand Rapids: Eerdmans,
1990, 151.
13) CD, I. 1. 92.
14)
칼 바르트, 『설교학』, 정인교 역, 서울: 한들출판사, 1999, 48-49.
15) Ibid., 52.
16) Ibid.,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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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에게 있어서 신학의 내용은 신학의 가능성과 방법을 규정한다.
신학의 내용인 복음은 신학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마찬가지로 바르트에
게 있어서 설교의 내용인 복음은 설교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따라서 설
교자의 설교에 대한 태도는 복음에 대하여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하
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하나님은 인성을
스스로 입으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인간됨이 이루어졌다. 그
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서 분노해 버리지 않으시고 대신 자신을 인
격적으로 인간과 결합시키셨다. (이로써) 잃어버린 인간의 존재는 회복
되었다……. 따라서 만일 설교가 이 출발점(Woher)에 의하여 지배받아
야 한다면 설교는 받아들이는 자의 수동적 태도 그 자체이며 그것 이외
의 다른 태도에서 되어질 수 없다.”17)
바르트는 은혜가 풍성한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설교의 가능성을 발
견하였다. 소통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본성이 외적으로 나타나
는데, 하나님은 외부를 향하여 나아가시고, 찾으시고, 소통하신다.18) 하
나님의 이런 성격 때문에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설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은혜로우신 분으로 자신을 나
타내시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
식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의 은혜를 통해서만 온다. 이렇게 볼 때 설교
는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니다. 설교는 기적이다. 다시 말하자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의 설교가 아무리 기교가 넘치더라도 그것
은 참된 선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설교는 그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은혜에 항상
의존해야 한다. 우리의 설교는 계시 안에 있는 은혜에 의해서 부정되고,
고양되고, 심판되며, 정당화된다. 우리는 모두 거지일 뿐이라고 한 루터
216 /
神學思想 140輯·2008 봄
17) Ibid., 53-54.
18) William H. Willimon, op. cit., 145.
08이문균(207-232) 2008.4.7 12:39 PM 페이지216
의 말은 바로 설교자의 입에서 나와야 할 마지막 말이다. “우리는 설교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우리가 설
교학을 숙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구원뿐 아니라 설교학에도 칭의론
이 적용된다. 우리는 수사학적인 방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
혜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을 듣는다.19)
4. 하나님의 말씀과 설교의 내용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직접 나타나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오는데, 곧 성
육신 되신 그리스도로, 기록된 말씀으로, 그리고 교회에 의하여 전달되
는 설교를 통해서 온다. 그러므로 설교는 성서의 새로운 세계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 내용으로 갖는다.
1) 성서의 새로운 세계
앞에서 지적했듯이 신학과 설교의 가능성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다.
이러한 원칙은 신학과 설교의 내용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설교는 성서
를 해석하는 것이지만 설교자가 성서를 주관할 수 없다. 하나님은 설교
에서도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
니라 성서로부터(von) 이야기해야 한다. 설교자인“나는 무엇인가를 말
해 야 한 다 가 아 니 라 , 오 직 무 엇 인 가 를 그 대 로 뒤 따 라 말 해 야
(nachsagen)
한다.”20) 그러므로 설교자는“다만 성서에 흐르는 고유한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 거기에 머물 뿐, 그것을‘벗어난’임의적인 목적
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21) 이 점을 아는 바르트는 우리 설교자들이 흔
이문균·칼 바르트의 신학과 설교 / 217
19) William H. Willimon, op. cit., 162.
20)
칼 바르트, op. cit., 51.
21)
칼 바르트, op. cit., 52.
08이문균(207-232) 2008.4.7 12:39 PM 페이지217
히 경험하고 빠지는 잘못에 대해서 경고한다. 설교자는 성서 속에 들어
가“무엇인가 멋진 것”을 발견하고 끄집어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설교
자가 주체가 되어 성경을 자신의 뜻대로 활용하면 안 된다. 설교는 성
경에서 비롯되고 성경을 되풀이하며 성경 본문의 독특한 흐름을 따라가
는 것이다.22) 왜냐하면 인간이 성서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서를
통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르트의 성서에 대한 이해를 확인하게 된다. 바르트
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성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담고 있는
책이 아니다. 성서는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담겨 있다. 성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고상한 사상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생
각과 말씀이 담겨 있다. 성서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을 찾고 발
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인간을 찾고 구원하는 이
야기다.23)“우리는 성서에서 한 새로운 세계, 하나님, 하나님의 주권, 하
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발견한다.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다!”결국“성서의 내용은 하나님이다.”24)
그러면 성서의 내용이 하나님이라면 성서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가? 바르트는 성서로부터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을 삼
위일체 하나님으로 소개한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아버지시다. 그리스
도 안에서 자신의 말씀을 육신이 되게 하신 분, 시간 위로 영원을 동트
게 하신 분이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내 영혼의 중보자”가 되신 그 아
들이시다. 그러나 그는 전 세계의 중보자가 되셨다. 그는 만물의 처음에
계셨고 만물이 안타깝게 기대하는 구속의 말씀이시다. 하나님이 누구신
가? 그는 그의 믿는 자들 안에 계신 영이시다. 성령은 땅의 불의의 한
218 /
神學思想 140輯·2008 봄
22) William H. Willimon, op. cit., 25.
23)
칼 바르트, “성서 안의 신기한 세계”, 전경연 편, 『성서 안의 새로운 세계』, 서울:
향린사, 1964, 17.
24) Ibid.,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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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판에 하늘의 의를 수립하고, 죽은 자들이 모두 살아나고 한 새로운
세계가 생겨나기 전까지는 멈추거나 머물지 않으실 분이다.25) 성서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설교는 성서를 따라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다.
그러나 바르트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을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다는 의미로 단순하게 보지 말 것을 제안한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법전에 국가의 신념이 명시되어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언한다. 그래서 바르트는 성서는 하
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여기서 된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다는 의미다.
이것은 설교자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설교자가 성서와 함께
하는 생명의 역사 속으로, 설교자와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서 끊임없이
무엇인가가 발생하게 되는 그 역사 속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렇다면 설교자는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을 하나의 정보로 전달하는 것
이 아니라 사건을 일으키는 주체로 전해야 한다. 그래서 바르트는 설교
에서 사상이 아니라 만남을 강조한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성서는 복음을 담고 있다. 따라서 성서로부터, 성서를 따라 말해야 하
는 설교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이다. 결국
설교의 중심은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된다.
바르트는 설교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설명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선
포해야 한다고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설교의 중심점은‘그
리스도’라는 단어나 그리스도에 관한 그 어떤 기술이 아니라 오직 그리
이문균·칼 바르트의 신학과 설교 / 219
25) Ibid., 22-23.
08이문균(207-232) 2008.4.7 12:39 PM 페이지219
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 사건,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
께 하시는 임마누엘이다.”26) 설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찾아오시고
구원하시는 사건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이지, 사상이나 교
훈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바
른 관계를 수립하도록 돕는 것이다.27)
이를 위하여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도착한 기쁜 소식을 선포
해야 한다. 이 말은 구체적으로 설교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는 말인가? 바르트는 설교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 용서와 구원
을 전해야 한다고 한다. 물론 설교에서 인간의 죄와 잘못에 대해서 말
해야 할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최종적인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죄는 진지하게 취급되어야 하지만 용서는 더 진지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고 한다. 설교에서 율법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교회는 율법을 복음과
연계해서만 설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율법은 오직 복음과 연계될 때에
만 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28)
설교의 중심은 이미 오신 그리스도와 다시 오실 그리스도다. 바르트
는 설교가 인간에게 다가서려 한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
말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출발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설교는 자동적으로 인간에게 다가서
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 말고
그 어떤 다른 지평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쐐기를 박는다. 그는 설
교자는 복음에 대해 그 어떤 입장을 취해서도 안 되며, 그저 단순하게
복음을 믿고, 그리고 그 믿음으로부터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
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다
시 오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믿음은
220 /
神學思想 140輯·2008 봄
26)
칼 바르트, 『설교학』, 정인교 역, 서울: 한들출판사, 1999, 54.
27)
이문균, “신학의 패러다임과 설교”, 『신학사상』135집 (2006. 겨울), 48.
28)
칼 바르트, op. cit., 55.
08이문균(207-232) 2008.4.7 12:39 PM 페이지220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란 믿음을 일으킨다. 설교는 오신 그리
스도로 출발하여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주님이신 그리스도로
부터 출발하는“설교란 끊임없이 내려가는 일이며, 어떤 목표에 도달하
려고 올라갈 일은 아니다. 모든 것은 일어났다.”29)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바르트의 설교에 대한 이해가 그의 신학과 일치하는 것을 발견
하게 된다.
3) 복음의 사실을 지시하는 성례전과 설교
설교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바르트의 확신은 설교가 성례전과 상호
연관 속에서 전해질 것을 강조한다. 바르트는 개신교회에서 설교가 지
나치게 강조되는 것을 우려한다. 설교의 지나친 강조는 교회의 붕괴이
자 교회의 사멸을 의미한다고 예언자적인 통찰을 제시한다. 바르트가
성례전에 주목하는 이유는 성례전이 복음의 사실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
다. 설교의 내용과 중심이 복음이요, 그리스도라고 할 때 성례전은 바로
복음의 사실을 잘 담고 있다는 것이다. 설교가 변질되면 인간의 주장이
나 인간의 덕을 강조하는 것이 되기 쉬운데, 성례전은 목회자가 자의적
으로 변질시킬 수 없는 사실을 증언한다는 것이다. 즉 성례전은 그리스
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나님의 덕이 생생하게 표현되는 것에
주목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설교가 쉽게 인간의 지혜와 덕을 강조하는
연설로 떨어질 위기에 처한다면 성례전은 철저하게 복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바르트는“설교는 그 단어의 진정한 의미로 볼 때 오직 성례전
에 의해 설교가 수반되고 또 설명되어지는 곳에서만 존재한다”고 한다.
바르트는 성례전과 설교의 관계를 복음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대조
한다. “만일 우리가 설교의 사실(Daß)과 내용(Was)을 구분하려 한다면,
한편에는 성례전이 또 다른 한편에는 성경이 자리 잡는다. 성례전은 교
이문균·칼 바르트의 신학과 설교 / 221
29)
칼 바르트, op. cit., 56.
08이문균(207-232) 2008.4.7 12:39 PM 페이지221
회의 실존에서 수행되는 계시의 사실(Daß)에 대한 지침이다. 반면 성경
이라는 존재는 사건의 질(Qualität), 즉 계시의 내용(Was)을 가리키는
지침이다.”30) 그러므로 설교가 계시의 사실에 주목하지 않으면 쉽게 그
중심을 상실하게 된다. 복음을 바로 전하기 위하여 설교는 계시의 사실
을 보여주는 성례전과 함께 있어야 한다. “성례전과 성서라는 이 두 가
지 사실을 눈앞에 두고 설교는 행해져야 한다. 성례전은 그 사건의 발
생을 증언하고, 성서는 이 사건의 내용을 증언한다.…… 원에는 중심점
과 원 둘레가 있는 것처럼 그리고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설교와 성례전이 함께 갖추어질 때 그것이 온전한 예
배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31)
5.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설교자의 자세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학의 내용은 설교의 내용뿐 아니라 설교의 방식
도 규정한다. 아니, 그의 설교 신학은 설교자에게 설교의 기법에 대하여
관심을 억제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치중하는 바
르트의 신학은 설교가 전달되는 회중에 대한 관심을 불편해 한다. 회중
과 회중의 이해력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설교의 내용이 변질될 것을 염
려하는 것이다. 이처럼 설교의 내용이자 주인인 하나님과 하나님의 복
음에 대한 관심은 설교의 기법과 효과에 대하여 외면하게 하였다. 앞에
서 말했듯이 설교가 인간에게 다가서는 것이기는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인간에게 다가서게 된다는 확신이 바르트의 설
교에 대한 이해를 지배하고 있다.
222 /
神學思想 140輯·2008 봄
30)
칼 바르트, op. cit., 67.
31)
칼 바르트, op. cit., 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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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설교자
설교자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대화를 이어가는 도구, 하나님의 사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 설교자를 통해
서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과 대화의 관계에 들어가도록 말씀하신다. 설
교는 어떤 영적인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그 한 분과의 만남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32) 설교자는 성서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질문하기에 앞서“너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그리고 감히 찾
아보려는 너는 도대체 누구냐”는 질문을 스스로 해야 한다.33) 바르트의
신학에서 볼 때, 하나님의 사자인 설교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에서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1)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 받은 사
람이다.
바르트의 설교 신학은 소명에 대한 이해와 결부되어 있다.34) 설교자는
설교자 자신의 인격에 의하여 자격이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
씀에 의하여 부름 받았다. 그런데 계시는 소명을 포함한다. 하나님이 주
시는 계시, 소명, 부르심은 순종하는 인간의 응답과 연관되어 있다. 말
씀의 사자는 어떤 존재가 되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말하라고 부름을 받았다. 설교자인 메신저는 사건을 증언하는 자다. 그
사건은 메신저보다 중요하다. 신실한 설교자는 자신의 좋은 인간성과
선한 품성에 기대지 않는다. 메시지가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보다 뛰어
나다. 설교자의 성격은 중요하다. 그러나 성격보다 더 중요한 것은 메시
지에 대한 사랑이다.
이문균·칼 바르트의 신학과 설교 / 223
32) William H. Willimon, op. cit., 240.
33)
칼 바르트, “성서 안의 신기한 세계”, 전경연 편, 『성서 안의 새로운 세계』, 서울:
향린사, 1964, 8.
34) William H. Willimon, op. cit., 164.
08이문균(207-232) 2008.4.7 12:39 PM 페이지223
(2)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믿음으로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설교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그것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신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모험을 감수하며,
이 세상을 의지하지 않으며, 자신의 주장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지 않
으며, 목적을 위하여 수사학적 전략을 택하지 않으며, 우리가 말할 수
없지만 말해야만 하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만 신뢰하며 살아가는 사람
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35) 신실한 설교자에게 요구되는 가장 으뜸 되는
덕은 순종이다. 설교자는 자신의 사역을 순전한 복종 속에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령하셨다는 신앙 가운데 행해야 한다. 신실한 설
교자는 자신의 창의력에 주목하지 않는다. 설교자의 일은 자신이 들은
것을 순종하는 자세로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그 나머지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설교를 참되게 만드실 수 있다. 설교자
가 된다는 것은 회중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3)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다.
하나님의 사자(使者)인 설교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확증하는
것 이상 더 나아갈 수 없다. 사자에게 필요한 준비는 들으려는 용기, 깨
닫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대하는 설교자의 자
세는 주도적으로 찾는 태도가 아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
이고 복종하는 자세가 되어야 마땅하다. 설교를 흥미롭게 하고, 중요한
것이 되게 하는 것은 설교자가 하는 말의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
는 말씀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반드시 훈련해야 하는 것은 말
씀을 전하는 기술이 아니라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의 깊게, 순종하며 듣
224 /
神學思想 140輯·2008 봄
35) William H. Willimon, op. cit., 241.
08이문균(207-232) 2008.4.7 12:39 PM 페이지224
는 훈련이다. 설교자로서 우리의 도전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복
하고 숙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
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2) 회중 앞에 서 있는 설교자
설교자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대화를 이어가도록 하나님의 사자로 부
름을 받은 사람이다. 설교자는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뿐 아니라 회중 앞
에 서 있다. 그런데 알렌(Ronald J. Allen)은 20세기 설교학의 추세는
청중에 대한 관심이라고 했다.36) 그것이 설교학의 새로운 추세이기는 하
겠지만 잘못하면 수사학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설교의 주인과 내
용을 상실할 위험이 있다. 청중에게 더 잘 적응하고, 청중이 잘 들을 수
있게 하는데 초점을 맞추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할 수 있다.
바르트는 이러한 최근의 설교학 추세와는 달리 회중과의 접촉점을 중
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설교는 우선적으로 하나님
의 자기 노출의 행위요, 하나님의 은혜와 계시의 행위다. 그러므로 말씀
을 전하는 설교자의 편에서는 전할 내용을 만들어 낼 것도 없고 설교학
적으로 청중과 접촉점을 마련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고 한다.
바르트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슐라이어마허에게서 발견되
는 자유주의 신학의 잘못된 설교학을 경계하려고 했을 수 있다. 하나님
과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기보다 당시 독일 국민의 정서에 영합하는
독일 개신교회의 잘못을 경계하려는 뜻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회중과
의 접촉점 마련이 메시지 자체의 왜곡을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했을 수도 있다. 설교를 오도하는 갖가지 위험을 생각하면서 바르트는
설교는 계시에 순응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견지하려고 하였다. 바르트는
설교는 근본적으로 수사학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의 문제라는 점을 분명
이문균·칼 바르트의 신학과 설교 / 225
36) Ronald J. Allen,
“The Turn to the Listener: A Selective Review of a Recent
Trend in Preaching
”, Encounter 64(2003), 167-196.
08이문균(207-232) 2008.4.7 12:39 PM 페이지225
히 했다.37) 설교란 신적인 사건, 위로부터 오는 어떤 것, 은혜임을 견지
하였다. 설교는 특수한 방식으로 말하는데 적합하기 때문에 설교인 것
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 즉 설교는 하나님에 관한 말이며 하
나님이 하시는 말이기 때문에 설교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바르트는 설교자는 청중이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무엇을 생각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곤란을 겪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설교자는 수사
학적 전략이나 멋진 웅변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설교
자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자기 길을 열어 가신다는 확신을 갖고 하나
님의 말씀의 종, 하나님의 말씀의 충실한 전달자가 되려고 해야 한다.
좋은 설교의 전제는 기교나 멋이 아니라 용기다. 바르트는 설교의 은혜
롭고, 신학적이고, 기적적인 성격을 지치지 않고 강조하였다. 이렇게 해
서 바르트는 설교가 도덕적, 인간학적 충고나 꾸짖고 도움을 주는 것으
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려고 하였다. 설교는 수사학적 행위 이상의 일
이다. 설교의 가치는 수사학적 기교의 능숙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설
교자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게 했다는 사실에 있다(살전
2:13).
설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설교자나 회중이 아니라 그 소식이
좋은 소식이 되게 하는 메시지 자체다.38)
6. 결론
바르트의 도움으로 설교는 근본적으로 신학적인 시도임을 회복할 기
회를 갖게 되었다. 바르트는 설교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기초한다는
점, 설교는 그 본질적인 내용에서 뿐 아니라 그 방식에 있어서까지 신
학적인 활동이라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오늘날 설교가 도덕적인 충고,
더 나은 삶의 원리 제시, 정치적 견해, 인간에 대한 인식의 제고로 떨어
226 /
神學思想 140輯·2008 봄
37) William H. Willimon, op. cit., 84.
38) William H. Willimon, op. cit., 242.
08이문균(207-232) 2008.4.7 12:39 PM 페이지226
지는 현실에서 바르트는 설교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것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바르트의 설교에 대한 이해는 그의 신학에 대한 이해와 거의 정확하
게 일치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전적 타자성을 주장하면서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
타내신 하나님의 계시에서 신학의 가능성을 찾았다. 마찬가지로 그는
설교자는 근원적으로 설교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식할 때 설교자
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신학의 가능성이 인간의 능력에 있지 않듯이
설교의 가능성 역시 설교자에게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였다.
그가 신학을 그렇게 생각했듯이 설교 역시 하나님이 자신을 은혜로우신
분으로 드러내시고 말씀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
였다.
바르트는 신학자가 말씀을 주도하거나 주관할 수 없듯이 설교자 역시
말씀을 주도하거나 주관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성서의 주인이신 하
나님은 설교에서도 주님이심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바르트는 설교자가 성경 말씀을 자신의 뜻대로 활용하면 안 된다는 점
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그는 설교자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뒷받
침하기 위하여 성경 구절을 인용할 위험을 경고하였다. 바르트를 통해
서 우리는 설교의 인간학적 기초와 경향성의 위험을 감지한다.
바르트가 신학을 함에 있어서 인간을 찾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주목하였듯이 그는 설교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찾아오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임을 가르쳐주었다. 기독교 설교
는 우리 인간을 찾아오시고 구원하시는 복음에 나타난 계시의 사실을
주목해야 함을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그는 계시의 내용을 선포하는 설
교가 계시의 사실을 보여주는 성례전과 함께 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바
르트는 설교의 근본을 문제 삼았다. 그는 신학을 근거로 설교의 내용과
설교자의 자세에 대해서 깊이 있는 통찰을 제시하였다.
이문균·칼 바르트의 신학과 설교 / 227
08이문균(207-232) 2008.4.7 12:39 PM 페이지227
그러나 바르트의 설교에 대한 이해에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
르트는 설교를 듣는 회중, 인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기울이
지 않았다. 따라서 설교의 내용이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설교의 방법과 수사학적
기법을 의식적으로 외면하였다.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
성에 희망을 거는 바르트의 관점이 설교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래
서 바르트는 설교를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의 행위라는 점을 강조
함으로 설교자의 역할은 거의 사라지게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39)
설교자는 하나님의 사자(使者)로서 성경 말씀을 전할 뿐이며, 하나님
이 말씀하신 것을 설교할 뿐이라고 해서 그것이 설교자가 수사학적 전
략이나 목표가 필요 없다는 것으로 새길 필요는 없다. 윌리몬이 말한
것처럼 바르트가 설교에 있어서 인간 편을 소홀히 한 것은 가현설에 빠
질 위험이 있다. 말씀이 예수 안에서 육신이 되었듯이 말씀은 우리의
설교에서 다시 구체화되어야 한다.40) 설교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들은 것
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전달된 말씀이 설교
자를 통해서 회중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
록된 계시가 은혜롭고, 낮추고, 대화적인 관계를 통해서 전달되는 것임
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회중이 갖가지 모호성, 불신앙,
혼란 가운데 있음을 인식해야 하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
하기 위하여 더 나은 전달 방식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
한 문제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바르트가 설교학에 기여한 공로는 매우
크며 설교자에게 주는 통찰 역시 매우 소중하다. 바르트는 목사가 회중
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헌신은 말씀에 복종하고 말씀의 종이 되는
것임을 일깨워주었다.
228 /
神學思想 140輯·2008 봄
39) Thomas G. Long, The Witness of Preaching, Nashville: Abingdon Press,
1989, 29.
40) William H. Willimon, op. cit., 191.
08이문균(207-232) 2008.4.7 12:39 PM 페이지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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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균·칼 바르트의 신학과 설교 / 229
08이문균(207-232) 2008.4.7 12:39 PM 페이지229
■Abstract
Theology and Preaching in Karl Barth
Lee Moon-Kyoon
Theology and Preaching are closely interrelated. Karl Barth
represents this point. Preaching, in Barth
’
s view, is distinctive as
an theological activity, not only in substance but also in means.
Barth
’
s theology is reflected in his homiletics. Theologically
speaking, theology is impossible, homiletically speaking,
preaching is impossible. Christian preachers dare to speak about
God. But they can do so only on the presupposition that God has
spoken first. Preaching is human talk about God on the basis of
the self-objectification of God.
Preaching
’
s turn to the listener is the most significant homiletical
trend of our century. But Barth has taught us that listening to
God is so much more important than listening to the listeners.
The preacher
’
s job is to proclaim the Word of God. The purpose
of preaching is not the conveying of spiritual truth, but an
encounter with God.
In a day when preaching too often degenerates into moralistic
advice, principles for better living, political commentary, Barth
recalls us to an idea of preaching as witness to the very voice of
God.
In spite of his contribution we find Barth
’
s weak points in his
homiletics. Barth
’
s emphasis against homiletical rhetoric and 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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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學思想 140輯·2008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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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exaggerated overemphasis. Rhetoric is unavoidable in
preaching. Preaching is not only a call to proclamation but also
an exercise in the ministry of the church. God may be the major
actor in a sermon, but the preacher ought not to deny his or her
God-given responsibility as well.
Key Words
Preaching, Theology, Karl Barth, Word of God, Theology of
Preaching.
이문균·칼 바르트의 신학과 설교 / 231
서울 종로구 청운동 115-1번지·전화 738-3265~7·팩스 738-0167·홈페이지 http://ktsi.or.kr
한국신학연구소·아우내재단
2008년 출간 예정
유일신앙의 여러 모습들-하나님은 어떻게 한 분이신가
Aspects of Monotheism은 1997년에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행해진 강연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학자들(도널드 레드포드(Donald B. Redford) / 윌리엄 데버(William
G. Dever) / 카일 맥카터(P. Kyle McCarter, Jr.) / 존 콜린스(John J. Collins))이 강연했
고, 이집트의 아켄아텐의 유일신앙과 이스라엘의 유일신앙의 관계 / 이스라엘의 민간신앙에
서 야훼 하나님이 배우자 여신이 있었던 것으로 여겼는지에 대한 논쟁을 Kuntillet Ajrud 에
서 발견된 비문을 통해 살펴보았고,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종교개혁과 유일신 사상, 유대교와
기독교 신학의 유일신 사상에 대한 강연이 포함되어 있다.
유일신앙의여러모습들
허셸 섕크스(Hershel Shanks) / 잭 마인하르트(Jack Meinhardt)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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