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P문서(2019.10.20. 수업용) 폴 틸리히의 하나남의 나라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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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틸리히의 하나님의 나라론

유장환 교수

I. 들어가는 말

현대 종말론의 핵심 논쟁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갈등에 관한 것이다. 첫째는 미래적 종말론(슈바이처)과 실현된 종말론(도드)사이의 갈등이다. 신약성서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현재하는 실재인가 아니면 전적으로 미래에 있는가? 둘째는 개인적인 실존적인 종말론(불트만)과 사회적인 집단적인 종말론(몰트만, 해방신학)사이의 갈등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의 삶의 완성과 관련이 있는가 아니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완성과 관계되는가? 셋째는 역사적 종말론(근대 서구신학)과 우주적 종말론(동방교회신학, 과정신학)사이의 갈등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삶의 완성인가 아니면 자연과 우주의 과정을 모두 포괄하는가? 넷째는 하나님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 종말론(신정통주의)과 인간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종말론(사회복음주의, 최근의 실천신학)사이의 갈등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인가 아니면 인간이 그들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가?

이러한 갈등들은 종말론 논쟁의 상수로서 현대신학은 이에 대한 적합한 대답을 제시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잘못된 종말론은 신학의 병폐일 뿐만 아니라 시대의 병폐를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 잘못된 비역사적 또는 무역사적 종말론은 현실 도피주의와 열광주의를 조장하여 창조적인 윤리의식의 마비를 확산시키고 있다. 신학이 종말론을 소홀히 다룰 때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 현상은 종말을 역사의 현재와 관계없는 피안의 것으로 간주하는 현상이다. 둘째 현상은 종말의 날짜를 계산하고 종말이 언제 오리라고 예언하는 현상이다. 셋째 현상은 종말이 신앙하는 개인의 마음속에 이미 임하였으며 하나님의 신천신지가 지금 우리 가운데 있다고 보는 열광주의의 현상이다. ····첫째 현상과 둘째 현상은 종말을 역사와 변증법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수직적 내지 초월적으로 올 것으로 봄으로써 종말을 비역사화, 무역사시킨다. 그 반면 위에서 기술한 셋째 현상은 종말을 내면화, 영성화, 현재화시킴으로써 그것을 비역사화, 무역사화시켜 버린다. 종말의 비역사화, 무역사화는 개인의 존재는 물론 세계의 상황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의 세계를 세우고자 하는 창조적 윤리의식을 마비시킨다.

이처럼 종말론의 비역사화 또는 무역사화는 기독교 신학과 윤리의 심각한 왜곡을 초래하고 있다. 따라서 종말론 논쟁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는데, 필자는 20세기 신학자들 중에서 이에 대한 의미있는 대답을 제시한 신학자는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이라고 생각한다. 폴 틸리히는 지난 세대의 신학적 지도자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공헌을 했다.일반적으로 틸리히는 중재의 신학”, “철학적 신학자”, “문화의 신학자”, “경계선 상의 신학자로서 알려져 왔고, 그의 신학에 대한 연구는 주로 신학방법론, 신론, 기독론 위주로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틸리히의 신학적 체계는 그의 종말론에서 완성되었기에 틸리히의 신학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종말론에 대한 탐구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틸리히가 얼마나 종말론을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그의조직신학제5부 서론에서 밝힌 창조와 종말의 관계에 잘 드러나 있다. 어디로부터(where from-만물의 시작)의 물음과 어디로(where to-만물의 목적)의 물음 사이에 신학적인 물음들과 신학적인 대답들의 전체계가 놓여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한쪽에서 시작하여 다른 쪽으로 나아가는 직선이 아니다. 둘 사이의 관계는 보다 본질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어디로어디로부터안에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포함되어 있다. 창조의 의미는 창조의 종말에 계시된다. 그리고 역으로 어디로의 본질은 어디로부터의 본질에 의해서 결정된다. 따라서 필자는 본 논문에서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폴 틸리히의 나님의 나라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틸리히가 종말론의 핵심적인 논쟁들을 어떻게 균형있게 해결했는지를 살펴보고 그의 종말론이 지니고 있는 신학사적인 의의를 고찰하고자 한다.

II. 역사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

틸리히의 신학방법은 물음과 대답을 상호연관시키는 상관관계의 방법(method of correlation)이다. 틸리히는 그의 하나님의 나라론을 조직신학제5부 부제 역사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상관관계의 방법에 따라서 역사와 하나님의 나라 사이의 상호관계 속에서 고찰한다. 나의 신학체계의 이 부분은 인간의 역사적 실존을 분석하고, 역사의 모호성 속에 포함되어 있는 물음들을 분석한 후에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제시하려고 한다.이처럼 틸리히는 상관관계의 방법에 따라서 실존적인 물음인 역사의 모호성과 신학적인 대답인 하나님의 나라를 상호연관시킨다. 말하자면, 역사의 모호성은 하나님의 나라를 요청하고 역사의 종말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이 틸리히의 종말론의 기본구조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틸리히의 하나님의 나라론은 근본적으로 무역사적인 종말론이 아니고 철저하게 역사와의 역동적인 관계 속에 있는 역사적인 종말론이다.

그렇다면 틸리히가 역사의 물음과의 관계속에서 제시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점에서 역사의 물음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역사의 물음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은 무엇인가?

1) 역사의 해석

일반적으로 역사에 대한 보편타당한 해석을 확립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의 주관적-객관적 성격은 초연한 과학적인 의미의 객관적인 대답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의 의미를 열어주는 보편적인 역사해석을 얻는 길은 무엇인가? 틸리히는 역사 이해의 열쇠는 소명의식이라는 것과 신학의 순환성을 전제할 때 보편타당한 역사해석은 기독교적 역사해석이라고 주장한다. 현재의 신학체계 내에서 열쇠와 대답이 발견되는 곳은 기독교이다. 기독교의 소명의식에 있어서, 역사는 역사적인 차원 하의 생명의 모호성들의 물음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상징을 통해서 대답되는 가운데 긍정되고 있다.이처럼 역사의 궁극적인 의미는 기독교적 역사해석이 대답으로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적 역사해석은 어떤 점에서 보편적으로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틸리히는 기독교적 역사해석의 타당성을 기존의 잘못된 부적절한 역사해석들 즉, 역사를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비역사적(nonhistorical) 역사해석과 역사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역사적인(historical) 역사해석과의 비교를 통해서 제시한다.

먼저, 역사를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비역사적인 역사해석 유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비극적인, 신비적인, 기계적인 역사해석)로 구별될 수 있다. 첫째, 비극적인(tragic) 역사해석은 헬라사상에서 엿볼 수 있는데 여기서 역사는 역사적인 또는 초역사적인 목적을 향하여 달려가지 않고, 원 안에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즉, 역사의 내재적인 또는 초월적인 성취에 대한 희망은 없고 단지 발생과 쇠퇴의 비극적 순환만이 있을 뿐이다. 둘째, 신비적인(mystical) 역사해석은 베단타 힌두교, 도교, 불교와 같은 동양에서 가장 완전하게 엿볼 수 있는데 여기서 역사적인 실존은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역사적 실존의 의미는 역사 속에서 살지만 역사를 초월하여 궁극적 일자(Ultimate One)에로 되돌아간 사람처럼 사는 것이다. 셋째, 기계적인(mechanistic) 역사해석은 현대과학의 발달 속에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서 여기서 역사는 물리적인 우주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의 발생으로 환원된다. 이와 같은 비극적인 순환의 역사해석, 신비적인 초월의 역사해석, 기계적인 법칙의 역사해석은 역사적 실존에 대한 냉소적인 경시와 역사적 목적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하는 공통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다음으로, 역사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역사적인 역사해석 유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진보주의적인, 유토피아적인, 초월적인 역사해석)로 구별될 수 있다. 첫째, 역사의 역사적인 해석의 첫 번째 유형은 진보주의”(progressivism)이다. 역사적인 시간은 어떤 목표를 향하여 앞으로 달려간다는 진보사상은 오늘날 유사종교적인 상징이 되었다. 진보주의는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진보 자체를 끝없는 무한한 과정으로서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를 들어, 역사의 세 번째 단계의 개념의 의미에서 역사의 궁극적인 완성의 상태를 믿는 것이다. 첫 번째 형태가 본래적인 의미의 진보주의이고, 두 번째 형태는 유토피아이다. 첫 번째 형태의 진보주의는 지난 20세기 동안 역사의 보편적인 법칙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진보주의적인 신앙은 20세기의 여러 경험들 즉 비인간성의 단계로의 세계사적인 퇴보, 진보가 발생한 영역들에서의 진보의 모호성의 출현, 끝없는 무한한 진보의 무의미성의 느낌 등에 의해서 분쇄되었다. 둘째, 역사의 역사적인 해석의 두 번째 유형은 유토피아(utopianism)이다. 유토피아는 생명의 모호성들이 극복된 역사발전의 완성단계인 세 번째 단계에 도달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유토피아적 기대들은 현실적으로는 그에 뒤따르는 깊은 실망감으로 인해서 좌절되었고, 실존적인 실망은 냉소주의, 대중의 무관심, 지도집단의 의식분열, 열광주의, 독재를 양산해 왔다. 틸리히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근본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유토피아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우상 숭배적이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예비적인 어떤 것에 궁극성의 특성을 부여해 준다. 유토피아는 조건적인 것(미래의 역사적인 상황)을 무조건적인 것으로 만들고, 동시에 항상 현존하는 실존적인 소외와 생명과 역사의 모호성들을 무시한다.셋째, 역사의 역사적인 해석의 세 번째 유형은 초월주”(transcendentalism)이다. 이 견해에서 역사는 그리스도가 개인들을 죄와 죄책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이 죽은 이후에 천상의 영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위해서 나타난 곳이다. 그 결과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 이 두 세계는 이을 수 없는 틈에 의해서 분리되고, 하나님의 나라의 정의와 권력구조의 정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되었다. 틸리히에 따르면, 초월주의적 역사해석은 세속적인 유토피아와 종교적인 유토피아의 위험을 상쇄시키는 데 필요한 중화제가 되어 왔지만 이것이 역사에 대한 적절한 역사해석이라고 말하기에는 미흡하다고 비판한다. 무엇보다도 초월주의는 개인의 구원과 역사와 우주의 변혁을 대립시킴으로써 한쪽을 다른 쪽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또한 구원의 영역과 창조의 영역을 대립시키고, 끝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상징을 개인들이 죽은 다음에 들어가는 정적인 초자연적인 질서로 해석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초월적인 유형의 역사해석은 적절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문화와 자연 모두를 역사의 구원의 과정으로부터 배제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역사적인 역사해석들은 부분적으로 긍정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으나 역사의 의미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으로서는 부적절한 대답들이다. 즉, 무한한 진보의 역사해석은 역사 속에 실현되어야 할 역사의 목적을 간과함으로써 무한한 진보의 무의미성을 초래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고, 유토피아적 기대의 역사해석은 역사적 실존의 모호성을 간과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실존적인 좌절속에서 냉소주의나 열광주의를 초래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고, 초월적인 이원론의 역사해석은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의 이원론적인 분리로 인해서 역사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2)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

이처럼 틸리히는 역사에 대한 부정적인 비역사적인 역사해석과 역사에 대한 긍정적인 역사적인 역사해석 모두를 비판하면서 역사에 대한 올바른 역사해석을 추구하여 하나님의 나”(Kingdom of God)의 상징의 재해석을 시도한다. 그렇다면 역사의 물음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으로서 제시된 하나님의 나라의 상징의 본질은 무엇인가?

먼저, 틸리히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중적인 성격 즉 역사 내적인 측면과 역사 초월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내적인(inner-historical) 측면과 역사 초월적인(transhistorical) 측면을 가지고 있다. 역사 내적인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의 역동성에 참여하고, 역사 초월적인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의 역동성의 모호성이 지니고 있는 물음에 대해서 대답을 제시해 준다.즉,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내재적이면서 역사 초월적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in)에 단편적으로 나타나는 동시에 역사를 넘어서”(beyond) 역사의 완성을 지시한다. 역사의 역동성에 참여하는 역사 내재적인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 현존을 통해서 활동하고, 역사 초월적인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생명의 초월적인 실재와 동일한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나라의 이중적인 특성은 미래적 종말론과 현재적 종말론 사이의 논쟁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을 제시해준다. 왜냐하면 틸리히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내재적인 것으로서는 이미 현재하는 실재이면서 동시에 역사-초월적인 것으로서는 전적으로 미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틸리히에 따르면 역사의 궁극적인 의미로서의 하나님 나라는 정치적인, 사회적인, 인격적인, 보편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목적 지향적 상징어는 매우 정치적이고(political) 사회적이며(social) 인격적인(personalistic) 특징을 나타내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실현될 때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고통을 당하는 양육강식의 먹이사슬 구조마저 극복된다는 우주적 보편성(university)을 함의한다.째,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적인것이다. 구약성서의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보다는 하나님이 적들에 대해서 승리하신 후에 떠맡으신 통치력 자체를 의미한다. 물론 영역의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시온산, 이스라엘, 나라들, 또는 우주와 동일시되고 있다. 이것은 변혁된 하늘과 땅이며, 역사의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현실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모든 것에 모든 것 되신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사회적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와 정의의 관념을 포함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와 정의의 영역의 유토피아적인 기대를 성취해 주는 반면에 하나님의”(of God)이란 말을 덧붙임으로써 평화와 정의의 관념들을 그들의 유토피아적인 성격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왜냐하면 이것이 덧붙여짐으로써 지상에서의 완성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암암리에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의 나라는 인격적인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궁극적인 동일성에게로 되돌아가는 다른 종교적인 상징들과는 대조적으로 개별적인 인격에게 영원한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다. 역사가 지향해 나가는 초역사적인 목표는 모든 개별적인 인간의 인간성의 소멸이 아니고 완성이다. 넷째, 하나님의 나라는 보편적인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들만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차원의 생명의 완성 즉 무기적, 유기적, 심리학적, 영적 차원의 생명의 완성을 포함한다. 이것은 생명의 다차원적인 통일성과 일치하는 것이다. 즉, 한 차원의 성취는 다른 모든 차원의 성취를 포함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과 자연 모두를 포괄한다.

결국, 틸리히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현대 종말론 논쟁의 양극단을 중재하면서 양쪽 모두를 포괄하는 상징이다. 먼저, 역사-내재적인 동시에 역사-초월적인 실재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로서 이미’(실현된 종말론)와 아직 아님’(미래적 종말론) 모두를 포괄하는 종말론이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인격적이며 사회적인 나라로서 개인적인 완성과 공동체의 완성을 모두 포괄하는 나라이며, 사회적이며 보편적인 나라로서 역사와 우주적 과정을 모두 포괄하는 나라이며, 정치적이며 보편적인 나라로서 하나님의 주도권과 인간의 참여 모두를 포괄하는 가장 포괄적인 나라이다.

III. 하나님의 나라의 내재성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역사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내재적인 동시에 역사-초월적인 실재이다. 틸리히는 하나님의 나라의 내재성을 역사의 중심에 토대를 두고서 역사의 모호성을 단편적으로 극복하는 역사 내재적인 실재로서 제시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초월성을 역사의 내적 목표로서 역사적 생명의 모든 모호성을 완전히 극복하는 역사 초월적인 실재로서 나누어 명료하게 제시한다.

먼저, 틸리히에 따르면 역사 속에 나타난 구원의 역사 즉 구원사(Heilsgeschichte)는 역사 내재적인 실재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역사를 위한 구원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안에서 특별한 구원사를 창조한다.말하자면, 구원사는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 안(in)의 현현이다. 물론, 인간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구원은 생명의 모든 차원의 모호성들의 극복을 뜻하는데 역사적인 차원을 포함하여 생명의 모든 차원들은 모호성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계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한 구원의 역사는 종교의 역사 심지어 교회의 역사와도 동일하지 않다. 왜냐하면 구원하는 힘은 역사를 꿰뚫고 들어오고 역사를 통해서 작용하지만 역사에 의해서 창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원사는 어떻게 세계사에 나타나는가? 틸리히에 따르면 구원사는 세계사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구원사는 구원의 힘이 역사적인 과정들에 돌입하고, 이 역사적 과정들에 의해서 구원의 힘이 받아들여지도록 준비되고, 구원의 힘이 역사 속에서 작용할 수 있도록 그 과정들을 변화시키는 일련의 사건들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구원사는 측정된 시간, 특정한 공간의 견지에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사는 역사 안에 있을지라도 역사로부터 오지 아니하는 어떤 것 즉 궁극적인 완성을 향한 역사의 자기초월적인 성격을 나타내 준다. 이런 점에서 틸리히는 구원사는 초역사적인”(suprahistorical) 사가 아니고 역사의 자기초월적인(self-transcendent)역사라고 정의하면서 구원사를 초역사적인역사라고 일컫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구원사를 초역사적(suprahistorical)이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는 없다. supra라는 접두사는 하나님의 활동이 세계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발생하는 보다 높은 단계의 현실을 지시한다. 이런 식으로 역사 속에 나타나는 궁극적인 것의 역설은 세계사를 구원사로부터 분리시키는 초자연주의에 의해서 대체되고 만다.이처럼 세계사와 구원사가 분리된다면 어떻게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세계사의 과정들 속에서 구원의 힘이 될 수 있는가는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초자연주의의 문제점이다. 따라서 구원사는 초역사적인 역사를 뜻하지 않고 역사가 역사 속에서 자신을 넘어서 역사의 궁극적인 대답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역사의 자기초월적인 역사를 뜻한다.

(1) 역사의 중심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구원사가 역사의 자기초월 즉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 내재적인 현현이라면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의 중심적인 현현은 무엇인가? 기독교의 근본적인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 예수의 출현이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의 중심적인 현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유일무이한(unique) 사건이지만 고립된(isolated) 사건은 아니다. 과거와 미래가 그에게 의존하고 있듯이 그는 과거와 미래에 의존하고 있다. 이 사건은 우리가 상징적으로 역사의 시작과 종말이라고 말하는 무한한 과거에서 무한한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의 질적인 중심이다. 여기서 역사의 중심”(center of history)이란 용어는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 사이의 중간을 뜻하지도 않고, 과거의 노선들이 통일되고 또한 미래가 결정되는 문화적인 과정의 중간 지점을 뜻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역사에는 그러한 지점이 없기 때문이다. 중심이라는 은유는 이전과 이후의 모든 것이 준비인 동시에 수용이 되는 역사의 한 순간을 나타내 준다. 중심은 그 자체가 역사 안에 있는 구원의 힘의 규범인 동시에 원천이다.리히에 따르면, 중심이라는 용어에는 상대주의에 대한 비판이 표현되어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리스도의 출현이 역사의 중심이라면, 역사 속의 하나님의 나라의 현현은 그 현현이 각각 상대적인 타당성과 힘을 가지고 있는 비일관적인 현현이 아니라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또한 중심이라는 용어에는 진보주의에 대한 비판도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분명하게 역사의 중심을 넘어서는 진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중심을 뒤따르는 모든 것은 그 기준 아래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중심이라는 용어에는 실현된 종말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현실에 대한 인류의 희망은 새로운 시대, 만물의 새로운 상태를 가져오신 새로운 존재로서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역사적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실현된 종말은 원리적으로서의 실현 즉 힘의 나타남과 시작의 의미로서의 실현을 뜻한다. 만물의 새로운 상태는 재림과 함께 즉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창조될 것이다.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에는 새로운 존재가 현존한다. 그는 현재 하나나님의 나라이다. 이 안에 종말론적인 기대가 원리적으로 성취되어 있고, 그에게 참여한 사람들은 새로운 존재에 참여하게 된다.결국, 새로운 존재인 그리스도 예수는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의 중심적인 현현으로서 역사의 본질적인 목적의 실현자이다. 역사의 중심이라는 용어에서 볼 때, 인간의 역사는 역사의 자기초월의 관점에서 보면 앞을 향해 달려가는 역동적인 운동일 뿐만 아니라 한 지점 즉 그리스도 예수가 중심이 되고 있는 중심화된 전체라고 말할 수 있다.

(2) 중심과 순간

틸리히에 따르면, 역사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의 중심적인 현현이 수용된 순간이다. 틸리히는 1차 세계대전 이후 그의 종교사회주의자 동료들과 더불어서 이 순간을 카이로스라고 부른다. 카이로스(kairos)는 희랍어로 시간의 완성(성취) 또는 어떤 것이 발생하기에 좋은 때를 의미한다. 그리스도 예수는 그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중심적인 현현이 성취된 때 즉 카이로스이다. 이 카이로스는 역사의 중심이 받아들여지는 곳에서 반복해서 발생한다. 역사의 중심의 출현인 위대한 카이로스가 하나님의 나라가 특수한 돌파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고 있는 상대적인 카이로스들’(kairoi)을 통해서 거듭해서 재 경험된다.론, 모든 상대적인 카이로스들(카이로이)은 위대한 카이로스에 따라서 판단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카이로스와 카이로이의 관계는 기준과 기준 아래에 있는 것의 관계이고, 힘의 근원과 이 힘의 근원에 의해서 양육되는 것의 관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 속에서는 항상 카이로스를 경험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 틸리히는 역사는 역사적인 과정 그 자신의 본성에 의해서 언제나 자기초월적이기에 하나님의 나라와 영적인 현존은 어떤 순간에도 결코 없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역사를 결정하는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현존의 경험은 언제나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현존한다. 그러나 역사를 뒤흔드는 하나님의 나라의 힘의 경험은 언제나 현존하지 않는다. 카이로이는 드물고, 위대한 카이로스는 유일하다. 그러나 이들은 함께 역사의 자기초월 속에서 역사의 역동성을 결정하고 있다.결국, 인간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존재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항상 경험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는 상대적인 카이로스들을 통해서 역사의 목표 즉 특수하게 새로운 것이면서도 동시에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간다. 말하자면, 역사 속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섭리가 하나님 자신과의 결합을 향한 창조로 인도하는 상대적인 카이로스들의 순간 속에 그 자신을 현시한다.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건은 역사의 중심으로서 위대한 카이로스다. 위대한 카이로스인 그리스도 예수의 사건은 소외된 실존에 대하여 새로운 존재로서 주어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역사의 의미와 모호성에 대답하는 역사의 중심이자 목적이다. 물론, 역사의 부정적인 것과 모호한 것은 여전히 남아있다. 말하자면 마성적인 세력들은 파괴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마성적인 세력들은 역사의 목표 즉 존재와 의미의 신적인 근거와의 재결합을 저지할 수는 없다.

2)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이제까지 말했던 것으로부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세상에 속해 있는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 내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대표자(the representative of the Kingdom of God)는 무엇인가? 틸리히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대표자들은 교회들(churches)이다. 여기서 영적 공동체의 대표자로서의 교회는 단지 인격들만 포함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대표자로서의 교회는 마치 역사적인 차원이 모든 다른 차원들을 포괄하듯이 존재의 모든 영역들을 포괄하는 상징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사회적인 상징일 뿐만 아니라 현실 전체를 포괄하는 상징이다.

틸리히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의 대표자로서의 교회의 주요 과제는 역사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한 운동에 참여하고, 역사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항하는 마성화(demonization)와 세속화(profanization)의 세력들에 대한 역사내적인 투쟁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다. 특별히 교회는 전 역사를 통해서 마성화와 세속화에 대한 싸움을 수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의 도구로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은 교회가 소외의 세력들이 극복되어 있는 새로운 존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들은 새로운 존재의 힘이 보편적인 역사 속에서 마성적인 세력과 세속적인 세력 모두를 극복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싸우는 전투 기관이며, 역사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운동의 주도적인 세력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하여 세속화와 마성화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교회자체가 종교의 모호성에 종속되어 있고 세속화와 마성화에 개방되어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자신이 마성화 되어 있는 교회가 마성화에 대항하는 싸움을 대표할 수 있고 그 자신이 세속화되어 있는 교회가 세속화에 대항하는 싸움을 대표할 수 있는가? 틸리히는 이에 대해서 교회의 역설을 통해서 대답한다. 교회는 역설적인 통일성 속에서 세속적이면서도 숭고한 것이고, 마성적이면서도 신적인 것이다.따라서 마성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에 대한 교회의 싸움은 먼저 교회 자체 안에 있는 마성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에 대해서 행해져야만 한다. 교회는 그와 같은 싸움을 통해서 개혁 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고, 그런 개혁 운동을 통해서만 역사 속에서 전투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

3) 하나님의 나라와 역사의 모호성 극복

일반적으로 모든 존재와 생명이 자기통합, 자기창조, 자기초월의 모호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역사도 자기통합, 자기창조, 자기초월의 모호성들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 내재적인 실재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교회와 세계 역사의 모호성을 극복하는가?

(1)하나님의 나라와 역사적인 자기통합의 모호성

먼저, 역사적인 자기통합의 모호성은 중심(centerdeness)을 향한 운동 속에 내포되어 있는 모호성 즉 제국의 모호성과 지배의 모호성이 잘 보여준다. 전자는 보편적인 역사적인 통일성을 향한 확장의 운동 속에서 나타나고, 후자는 특수한 역사-담지자 집단의 중심화된 통일을 향한 운동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양쪽 모두에서 힘의 모호성”(ambiquity of power)이 역사적인 통합의 모호성 배후에 놓여 있는데 그 이유는 힘의 사용은 정체성의 상실과 창조적 자유의 상실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역사적 집단은 자신의 엄격한 중앙집권 때문에 역사적으로 행동할 수 있지만 그것은 미래로 돌진하는 창조적인 잠재성들을 억압하기 때문에 그 힘을 창조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틸리히에 따르면, 이와 같은 역사의 자기통합의 모호성 즉 힘의 모호성은 근본적으로 신적인 힘에 의해서 극복된다. 존재의 힘 자체(the power of being)이신 하나님이 존재의 모든 특수한 힘들의 근원이기 때문에, 힘은 본질적으로 신적이다. 힘은 비존재를 저지하는 영원한 가능성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는 이 힘을 영원히 행사한다. 그러나 신적인 생명 속에서는(이 신적인 생명의 창조적인 자기실현인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힘, 제국, 지배의 모호성들이 모호하지 않는 생명에 의해서 극복된다.즉, 힘의 모호성은 근본적으로 주체와 객체 사이의 실존적인 분열에 근거하고 있는데 신적인 힘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단편적인 재결합을 이루어내어 역사적인 자기통합의 분열의 모호성을 극복한다. 말하자면, 신적인 힘에서는 힘을 동반하는 강제가 극복되고 중앙집권적인 지배의 대상을 순수한 대상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주체와 객체 사이의 단편적인 재결합을 이루어낸다. 이것은 정치적 태도와 제도의 민주화가 힘의 파괴적인 함의를 저지하는데 기여하고 있는 한, 그것은 역사 속에의 하나님의 나라의 현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교회의 힘의 사용에 대한 태도는 단순한 부정(평화주의)이나 절대적인 수용(군국주의)가 되어서는 안되고, 자유의 맥락 안에서 공동체를 추구하는 신적인 힘의 규범에 따라서 힘의 모든 사용을 판단해야만 한다. 정치권력의 구조에서 중앙집중적(centering) 요소와 해방적(liberating) 요소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한,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지배의 모호성을 단편적으로 극복해 왔다.결국, 역사적 자기통합의 모호성은 고도의 정치적인 통일성이 창조되어 통일된 집단들 사이에 자율과 타율을 넘어선 신율적인 공동체가 건설되고 그들 중 어느 것도 중앙집권적인 지배의 단순한 대상으로 바뀌지 않을 때 단편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 말하자면 힘, 지배, 제국의 모호성들이 초래한 주-객 분열적인 결과들이 극복되는 한 그것은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단편적인 현현이다.

(2) 하나님의 나라와 역사적인 자기창조의 모호성

역사적인 자기창조의 모호성은 혁명(revolution)과 반동(reaction)의 모호성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역사적인 자기통합의 모호성이 주로 정치권력의 문제인 반면에 역사적인 자기창조의 모호성은 주로 사회적 성장(social growth)의 문제 속에서 엿볼 수 있다. 사회적 성장에 있어서는 새로운 것과 옛 것 즉 혁명과 전통 모두 필수적인 요소이다. 사회적 성장의 모호성의 전형적인 예는 양쪽 모두 불공평성을 주장하는 옛 세대와 새 세대 사이의 갈등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옛 세대와 새 세대 모두 불평하는 불공평성을 극복하고 전통과 혁명사이의 통일이 창조될 때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나라의 승리는 사회적 성장의 불공평성과 그것의 파괴적인 결과 즉 거짓과 살인이 극복되는 전통과 혁명의 통일성을 창조한다.이처럼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을 지향하는 창조적인 해결방법이 발견되는 방식으로 혁명이 전통으로 세워지는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단편적으로 현현한다. 사실, 민주주의 제도의 본질은 정치적인 집중과 정치적인 성장의 문제와 관련해서 서로 모순되는 이 두 측면들 즉 각각 혁명과 전통에 의해서 대표되는 새로운 것과 옛 것의 진리를 결합하려고 시도한 데에 있다. 이런 점에서 법적인 수단에 의해서 정부를 교체한다면 이것은 혁명과 전통의 결합으로서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승리를 드러내 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적 분열을 극복하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적인 자기창조의 모호성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승리는 성령에 의해서 예언자적인 혁명정신과 제사장적인 제의전통이 창조적으로 통일될 때마다 이루어진다. 성령의 힘에 의해서 예언자적인 혁명이 제사장적인 전통을 보존하고 성장을 위한 새로운 기반을 창조하는 한 그것은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단편적인 현현이다.

(3)하나님의 나라와 역사적인 자기초월의 모호성

역사적인 자기초월의 모호성은 실현된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와 기대된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 사이의 관계의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역사적인 자기초월의 모호성은 근본적으로 유한한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드높이는 마성적인 것(the demonic)에서 엿 볼 수 있다. 역사에 대한 마성적인 주장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의 단편적인 실현을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함으로써 마성적인 자기절대화를 초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한한 실존에 불가능한 것을 기대하게 함으로써 냉소적인 절망으로 끝나게되는 유토피아주의를 초래한다. 따라서 역사적인 자기초월의 모호성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승리는 실현된 성취의 의식이 부정되거나 성취의 기대가 부정된 곳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며, 오직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현존의 의식과 하나님의 나라의 아직 현존하지 않음의 의식을 결합할 때만 이루어질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의 현존과 하나님의 나라의 아직 현존하지 않음의 결합을 이론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지만, 그 결합을 교회적인 또는 세속적인 만족의 가운데 길로 타락시키는 것 없이 살아있는 긴장의 상태 속에서 유지시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역사 속의 하나님의 나라의 대표자로서의 교회의 근본적인 과제는 현존(presence)의 의식과 도래(coming)의 기대 사이의 긴장을 살아있게 유지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개인 구원을 강조하는 수용적인(성례전적인) 교회들의 위험은 그들은 현존을 강조하고 기대를 무시한다는 것이고, 반면에 사회변혁을 강조하는 행동적인(예언자적인) 교회들의 위험은 그들은 기대를 강조하고 현존의 의식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성례전인 교회가 사회변혁의 원리를 그의 목표로 받아들이거나 행동주의적인 교회가 모든 사회적 조건하에서 영적인 현존을 선언하고 역사적인 활동의 수평선에 대하여 구원의 수직선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승리이다.이처럼 역사적인 자기초월의 모호성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승리는 성례전적인 수직선(현존의 의식)과 예언자적인 수평선(도래의 기대)이 결합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4)하나님의 나라와 역사 속의 개인의 모호성

역사 속의 개인은 모두 역사의 보편적인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 역사적인 참여의 모호성의 근본적인 성격은 역사적인 희생의 모호성(sacrifice)에 잘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인 참여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희생의 모호성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무엇보다도 개인이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이름으로 자기를 역사에 대한 참여로부터 제외시키는 것은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의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개인은 역사적 실존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고 또한 그것은 개인에게서 완전한 인간성의 박탈을 초래한다. 인간은 역사내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투쟁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초월적인 것은 역사내적인 것 안에서 현실적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역사적인 희생의 모호성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승리는 역사적인 참여로부터의 도피가 아니고 역사적인 희생을 성숙하게 받아들일 때 이루어질 수 있다. 사실, 역사적인 희생의 모호성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위한 희생이냐?의 물음의 문제이다. 만일 희생의 목적이 희생이 요구된 사람과 아무 관계가 없는 희생이라면 그 희생은 희생이 아니고 강요된 자기폐기이다. 진정한 희생은 희생하는 사람을 폐기시키기보다는 성취시키는 희생이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희생의 모호성의 극복은 역사적인 희생이 하나의 정치구조의 힘이나 한 집단의 생명이나 역사적인 운동의 진보나 인류역사의 최고의 상태보다도 더 많은 것이 성취되고 있는 목표에 자기를 내맡길 때 그 목표를 위한 희생이 또한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의 인격적 성취까지도 생산하는 목표일 때이다. 이처럼 역사 속의 개인의 모호성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승리는 역사적인 희생과 인격적인 성취의 확실성이 결합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말하자면, 개인적 희생과 인격적 목표의 일치는 역사적인 희생의 모호성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단편적인 현현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역사적인 실존의 모호성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현현에 의해서 극복된다. 자기 통합의 역사적인 모호성은 주-객 분열을 극복한 신율적인 공동체를 창조하는 정치적인 힘의 적당한 발휘에 의해서 극복되고, 자기 창조의 모호성은 전통과 혁명을 창조적으로 통일시키는 긍정적인 사회적인 성장에 의해서 극복되고, 자기 초월의 모호성은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와 아직 아님 사이의 건강한 긴장의 지속적인 준수에 의해서 극복된다. 물론, 역사적 실존 내에서의 극복은 단편적인 것이지, 총체적인 것이 아니다. 이로써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단편적인 승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단편적인 승리에 대한 물음을 일으킨다. 틸리히에 따르면 이 물음에 대답은 역사의 목표로서의 역사의 종말 곧 영원한 생명이다.

IV 하나님의 나라의 초월성

이제까지 우리는 역사 내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단편적인 승리를 다루었는데 이제 역사를 초월해 있는(above)의 하나님의 나라의 궁극적인 승리를 다룰 차례이다. 틸리히에 따르면, 역사 초월적인 실재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의 종말”(end)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이다. 역사 의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의 종말(end)이다.

(1) 역사의 텔로스로서의 하나님의 나라

역사의 종말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영어의 단어 end는 끝(finish)과 목적(aim)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 자체는 하나님의 나라의 두 측면 즉 역사 내재적인 측면과 역사 초월적인 측면을 각각 지시한다. 전자의 end는 역사적인 시간의 끝을 의미하지만 후자의 end는 시간적 과정이 자신의 목적으로서 가리키고 있는 역사의 내적인 목적(telos) 또는 시간적 과정의 모든 순간들을 초월해 있으며 시간 자체의 목적인 영원(eternity)을 의미한다. 역사의 생물학적 또는 물리학적 가능성의 끝은 두 번째 의미에서의 역사의 끝이 아니다. 두 번째 의미의 역사의 끝은 우주의 보다 광대한 발전 내부에 있는 한 순간이 아니다. 이것은 시간적 과정의 모든 순간들을 초월한다. 즉, 이것은 시간 자체의 끝 곧 영원이다. 역사의 내적인 목적 또는 역사의 텔로스(목표)의 의미로서의 역사의 끝은 원한 생명이다.말하자면, 역사의 종말이란 먼 미래의 특정한 시간이 아니라 언제나 현존하는 궁극적으로 새로운 것을 향한 역사의 내적인 목적을 의미하고, 이 역사의 내적 목적은 역사 내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역사 초월적인 것으로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의 초월적인 측면으로서의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틸리히는 종말은 역사의 먼 미래의 특정한 시간을 뜻하지 않고 시간적인 것으로부터 영원한 것으로의 전이(transition)를 상징한다고 본다. 이것은 창조론의 영원한 것으로부터 시간적인 것으로의 전이, 타락론의 본질로부터 실존으로의 전이, 구원론의 실존으로부터 본질로의 전이와 유사한 은유이다. 여기서 틸리히가 시간적인 것으로부터 영원한 것으로의 전이의 상징을 통해서 주장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종말 즉 시간적인 것으로부터 영원한 것으로의 전이는 마치 창조가 시간적인 사건이 아닌 것처럼 시간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종말은 먼 미래의 시간적인 사건이 아니라 모든 시간적인 것이 자신을 넘어서 영원한 것으로 넘어가는 시간의 자기 초월을 뜻한다.

그렇다면 역사의 내적인 목적으로서의 종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먼저, 틸리히에 따르면 역사의 종말은 시간적인 것이 영원 속으로 고양되는 것(elevation)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영원이라고 불리우는 생명의 내용에 대해서는 세 가지 대답이 제시되고 있다. 첫 번째는 영원을 접근할 수 없는 신비로 간주하여 대답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언제나 이 한계를 돌파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생명나라는 궁극적인 것의 세속적인 표현들 속에 나타났던 다른 것들과는 구별되는 구체적이면서도 특수한 상징들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대답은 통속적인 상상력이나 초자연주의적인 신학의 대답이다. 통속적인 상상력이나 초자연주의적인 신학에 따르면 영원은 우리가 실존의 보편적인 조건들 하에서 경험하는 삶이 이상화된 초월적인 나라이다. 여기서 역사는 개인의 구원과는 연관이 있지만 역사를 초월해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는 아무런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에 이것은 명백하게 역사로부터 궁극적인 의미를 박탈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와 영원한 생명사이의 관계에 대한 진정한 대답은 무엇인가? 틸리히는 시간과 영원의 관계에 대한 세 번째 대답으로서 반(反)초자연주의적인 또는 역설적인 이해에 근거하여 영원은 시간적인 것이 영원 속으로 고양되는 것(elevation)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생명은 보편적으로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으며, 그것의 언제나 현존하는 궁극적인 목표, 즉 영원한 생명으로 높여지고 있다.따라서 역사의 종말 즉 시간적인 것으로부터 영원한 것으로의 전이는 마치 창조가 시간적인 사건이 아닌 것처럼 시간적인 사건이 아니다. 종말론적인 순간은 시간적인 것이 영원으로 드높여지는 순간이다. 시간은 창조된 유한한 것의 형식이고 영원은 창조된 유한한 것의 내적 목표 즉 텔로스로서 영원히 유한한 것을 그 자신 안으로 높인다.결국, 역사 속에서 창조된 것은 어느 것도 상실되지 않는다. 상징적으로 말하면, 모든 생명은 모든 피조물 속에서 그리고 모든 차원들 속에서 매 순간 하나님의 나라에 기여하고 있으며, 영원한 생명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역사의 종말은 부정적인 것이 부정적인 것으로 노출되는 것(exposure)을 뜻한다. 역사의 종말 즉 실존의 긍정적인 것의 영원한 생명으로의 높임은 실존의 조건하의 생명의 특징인 부정적인 것과의 모호한 혼합으로부터의 긍정적인 것의 해방을 의미한다. 종말에 있어서의 부정적인 것의 부정, 이것이 바로 궁극적인 심판의 의미이다. 따라서 궁극적인 심판의 상징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지금 여기서 시간적인 것의 영원한 것으로의 영원한 전이 속에서 부정적인 것은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라는 그 자체의 주장에 의해서 무너진다. 여기서 부정적인 것은 긍정적인 것을 사용함으로써만 또는 긍정적인 것과 모호하게 혼합됨으로써만 자신의 주장을 지지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부정적인 것은 자신이 긍정적인 것이라는 모습을 만들어낸다(예를 들어, 질병, 죽음, 파괴, 살인, 악 일반). 하지만 긍정적인 것으로서의 악의 출현은 영원의 면전에서는 사라져 없어진다. 이런 뜻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은 태우는 불(burning fire)이라고 일컬어진다.여기서 하나님의 불은 긍정적인 것이 아닌 것을 태워버린다. 그러나 긍정적인 것은 어느 것도 태워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고, 모든 긍정적인 것은 존재 자체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어느 것도 그것이 존재하는 한 영원으로부터 배제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비존재와 혼합되어 있고 아직 비존재로부터 해방되어 있지 않는 한 그것은 배제될 수 있다. 결국, 궁극적인 심판이란 부정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으로서 영원으로부터 배제되고 긍정적인 것은 영원으로 고양되고 자신의 존재의 본질로 되돌아가는 본질화(essentialization)를 뜻한다. 여기서 본질화는 본질로의 단순한 회귀가 아니다. 이것은 그것 이상이다. 틸리히에 따르면, 본질화는 시간과 공간에서 실현된 새로운 것은 실존 속에서 창조된 긍정적인 것과 결합하여 본질적인 존재에 무엇인가를 첨가할 수 있고 이로써 시간적인 삶에서처럼 단편적으로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에 기여하는 것으로서의 궁극적으로 새로운 것 즉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원한 생명에의 참여는 어떤 존재의 본질적인 본성과 그 존재가 그의 시간적인 실존 속에서 만들어 낸 것과의 창조적인 종합에 의존하고 있다. 부정적인 것이 본질적인 본성의 소유를 주장하는 한, 부정적인 것은 그것의 부정성 속에서 노출되고 영원한 기억으로부터 배제된다. 반면에 본질적인 것이 실존적인 왜곡을 극복하는 한, 본질적인 것의 위치는 영원한 생명 속에서 더욱 높아진다.결국, 영원한 생명에 대한 참여는 한 인간의 본질적인 본성과 그가 그의 유한한 실존 속에서 만든 것 사이의 창조적인 종합에 의존한다. 긍정적인 모든 것은 고양되고 영원한 생명 속으로 통전되며,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만 배제된다.

(2)하나님의 나라와 생명의 모호성들의 궁극적인 극복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궁극적인 심판에서 부정적인 것이 부정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영원으로부터 배제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생명의 모호성들이 단편적으로가 아니라 총체적으로 극복된다. 말하자면,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은 생명의 모호성의 비단편적인, 총체적인, 완전한 극복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의 자기통합, 자기창조, 자기초월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영원한 생명의 모호하지 않은 자기통합은 존재의 구조의 대극적인 요소의 첫 번째 쌍 즉 개체화와 참여의 완전한 균형을 의미한다. 이 두 극은 그들의 대극적 대립을 초월해 있는 것 즉 신적인 중심 속에서 결합되어 있다. 둘째, 영원한 생명의 모호하지 않은 자기창조는 존재의 구조의 대극적인 요소의 두 번째 쌍 즉 역동성과 형식의 완전한 균형을 의미한다. 이 두 극은 그들의 대극적 대립을 초월해 있는 것 즉 신적인 창조성 속에서 결합되어 있다. 셋째, 영원한 생명의 모호하지 않은 자기초월은 존재의 구조의 대극적인 요소의 세 번째 쌍 즉 자유와 운명의 완전한 균형을 의미한다. 이 두 극은 그들의 대극적 대립을 초월해 있는 것 즉 신적인 자유 속에서 결합되어 있다. 이 신적인 자유의 힘 속에서 모든 유한한 존재는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자유와 운명의 궁극적인 통일성 속에서 신적인 운명의 성취를 향하여 나아간다.

이와 같이 영원한 생명에서는 완전한 자기통합, 완전한 자기창조, 완전한 자기초월이 완성되고 생명의 모호성의 비단편적인, 총체적인, 완전한 극복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인간의 영의 세 가지 기능들과 관련하여 의미하는 바는 영원한 생명에서는 생명의 세 가지 기능들 즉 도덕, 문화, 종교는 특수한 기능으로서는 종말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이다. 먼저, 영원한 생명은 도덕의 종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에는 당위적인 것이 없고 동시에 당위적이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본질화가 있는 곳에는 율법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실존 속에서 실현되어만 하는 본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영원한 생명은 문화의 종말을 의미한다. 문화는 현실을 파악하는 theoria와 현실을 형성하는 praxis로 구분된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에는 제4복음서의 의미에서 행해지지않은 진리는 있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창조로서의 문화는 동시에 영적인 창조가 된다. 영원한 생명에서의 인간의 영의 창조성은 하나님의 영에 의한 계시와 동일한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창조성과 하나님의 자기현현은 성취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이다. 끝으로, 영원한 생명은 종교의 종말을 의미한다. 성서적 용어로는, 이것은 하늘의 예루살렘의 설명 속에 표현되어 있다. 하늘의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그곳에 살고 계시기 때문에 성전이 필요 없는 도시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존재의 근거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인간의 소외의 결과이며 또한 그 근거로 되돌아가려는 인간들의 시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 되시고, 모든 것에 모든 것 되신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에는 종교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에서는 세속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사이의 분리가 극복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생명의 모호성이 극복되어 있기 때문에 도덕, 문화, 종교에 대한 어떠한 요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화가 있는 곳에는 어떠한 율법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은 도덕의 종말이다. 또한 인간의 영의 창조성이 하나님의 영의 창조성이 되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은 문화의 종말이다. 또한 존재의 근거로부터의 더 이상의 소외가 없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은 종교의 종말이다. 인간은 영원한 생명 속에서 그의 근거로 되돌아가서 그의 근거와 연합된다. 즉, 영원에서는 본질적인 존재가 존재 자체와의 통일성으로 이끌려진다. 이것이 바로 틸리히가 말하는 보편적인 본질화이다. 보편적인 본질화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존재의 근거와 힘인 하나님과의 모호하지 않은 통일성으로 이끌려진다는 것을 뜻한다.

(3) 하나님의 나라와 시간과 영원

끝으로, 영원과 시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틸리히에 따르면, 영원은 무시간(timelessness)아니고 끝없는 시간(endless time)도 아니다. 말하자면. 시간성의 부정도 시간성의 계속도 영원을 구성할 수 없다. 오히려 영원은 시간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으며, 실존 속에서는 분열되어 있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들이 영원 속에서는 초월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영원은 무시간적 동일성도 아니고, 영속적인 변화도 아니다. 시간과 변화는 영원한 생명의 깊이 속에서 현존한다. 그러나 시간과 변화는 신적인 생명의 영원한 통일성 안에 포함되어 있다.”, 영원한 것은 시간적인 것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다. 영원은 실존적인 시간의 분할된 순간들의 초월적인 통일이다.이처럼 영원은 모든 시간의 근거로서 모든 시간성을 포함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시간성의 자기초월적인 통일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모든 시간성의 초월적인 통일성으로서의 영원과 역사적 시간은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 역사적으로 고찰해 볼 때 먼저,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영원한 회귀 속에서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시간에 대해서 공간적인 유비인 순환운동을 사용했지만 이 유비는 고대헬라사상에서는 효과적이지 못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시간이 지금 거기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되는 목표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어거스틴은 시간의 운동에 대해서 순환의 유비를 배격하고, 시간적인 것의 창조와 함께 시작하고 시간적인 모든 것의 변혁과 함께 끝나는 직선으로 대체했다. 이 관념은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의 목적으로서 이해하는 기독교적인 역사관 속에서 가능했다. 그러나 직선의 그림은 영원으로부터 와서 영원으로 가는 시간의 성격을 지시해 주지는 않는다. 그 결과 직선의 그림은 시간적인 선을 양방향으로 무한히 연장하여 시작과 끝을 부정하게 만들었고, 시간적인 과정을 영원으로부터 철저하게 단절시키도록 만들었다. 끝으로, 틸리히는 순환이나 직선의 시간이해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곡선”(curve)의 시간이해를 제시한다. 나는 위로부터 와서 아래쪽과 앞을 향해 움직이다가 실존적인 지금’(nunc existentiale)인 가장 깊은 지점에 도달한 후에 다시 그것이 내려온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앞과 위를 향해 되돌아가는 곡선을 제시하고자 한다.틸리히에 따르면, 본질에서 실존을 통해 본질화로서의 보편적인 생명의 리듬을 예시하는 방식은 원이나 직선이 아니라 곡선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즉, 곡선은 위로부터 와서 아래로 동시에 앞으로 움직이고 실존적인 지금에서 가장 깊은 점에 도달하다가 그것이 왔던 것과 유사하게 앞으로 그리고 동시에 위로 올라가면서 되돌아간다.

<도표1>

여기서 곡선은 경험된 시간의 모든 순간에 적용될 수도 있고, 시간성 전체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따라서 시간의 끝은 과거나 미래의 특정한 순간의 견지에서 생각될 수는 없다. 영원으로부터 시작하는 것과 영원에서 끝나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의 확정할 수 있는 순간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가 그러한 것처럼 모든 순간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과정의 문제이다. 창조도 완성도, 시작도 끝도 언제나 존재한다. 말하자면, 영원은 사물의 미래 상태가 아니고, 언제나 영원을 의식하고 있는 인간 안에 현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 존재 속에서 존재를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안에도 현존하고 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오고, 영원한 생명의 현존 안에서 살며, 영원한 생명으로 되돌아갑니다. 영원한 생명은 부재하는 적이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는 그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또한 우리가 그 안에서 자유에 참여하도록 운명지워진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영원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우리가 다루어만 하는 문제는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 사이의 관계의 문제이다. 즉,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 즉 영원하신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의 내적인 목표인 영원한 생명과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서로 평행하는 두 가지 영원한 생명 과정들이란 있을 수 없다. 이에 대해서 틸리히가 제시하는 대답은 영원한 생명은 영원 안에서의 생명이며,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적인 모든 것은 영원으로부터 와서 영원으로 되돌아간다는 주장에 상응하는 것이며, 궁극적인 완성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 모든 것 되신다는 바울의 비전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종말론적인 범재신”(eschatological pan-en-theism)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이라면 여기서 하나님의 이라는 표현에 있어서의 ”(in)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틸리히에 따르면, 하나님의 의 첫 번째 의미는 창조적인 기원의 의미에서의 로서 이것은 존재를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존재의 신적인 근거 안에 현존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의 두 번째 의미는 존재론적인 의존의 의미에서의 으로서 여기서 은 유한한 것은 어느 것도 심지어 소외와 절망의 상태 속에서도 영속적인 하나님의 창조성의 지지하는 힘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의 세 번째 의미는 궁극적인 완성의 의미에서의 으로서 모든 피조물은 본질화의 상태 속에서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은 삼중적인 안에 있음은 보편적인 생명과 종말론의 전 체계의 리듬을 지시해준다. 이 리듬은 본질로부터 실존적인 소외를 통해서 본질화에 이르는 길 즉, 단순한 잠재성으로부터 현실적인 분리와 재결합을 통해서 잠재성과 현실성의 분리를 넘어서 있는 성취에 이르는 길이다. 시간으로의 창조는 피조물의 자기실현과 소외와 화해의 가능성을 창출한다-이것은 종말론적인 용어로 말하면 본질로부터 실존을 통하여 본질화에 이르는 길이다.

III. 나오는 말

폴 틸리히의조직신학의 가장 큰 특징은 체계적인 일관성이다. 틸리히가 그의 조직신학Dogmatics이 아닌 Systematic Theology라고 일컬은 것처럼 그의 조직신학은 신학의 전 주제를 체계적으로 재구성하여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론을 다루고 있는조직신학제5부 역사와 하나님의 나라도 이와 같은 체계적인 일관성을 다른 곳 못지않게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다. 틸리히의 하나님의 나라론을 성부, 성자, 성령과 관련하여 서술해보자면,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나라는 역사의 모든 모호성이 완전히 극복된 새로운 존재의 나라이며, 위대한 카이로스인 그리스도 예수는 모든 역사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현의 기준이며, 하나님의 영적인 현존으로서의 성령은 역사 내재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새로운 존재의 나라의 기초위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구현의 능력인 성령 안에서 매 순간 지금 여기 이 역사 속에서 현존하고 투쟁하는 하나님의 나라 운동에 하나님의 나라의 대표자인 교회와 더불어서 참여함으로써 창조의 은총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키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나라에 기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체계적인 일관성을 지닌 폴 틸리히의 하나님의 나라론의 특징과 의의는 무엇인가?

첫째, 틸리히의 하나님의 나라론은 역사를 통해서 역사의 목표(telos)을 이루어가는 역사적인종말론이다. 김균진은 형식적으로는 칼 바르트나 루돌프 불트만의 무역사적 종말론과는 달리 폴 틸리히의 종말론은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전개된다고 비평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무역사적 종말론과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고 비판한다. 역사의 종말 곧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의 미래에 완성될 것으로 파악하는 동시에 영원이 그 속에 있는 시간의 모든 순간 속에 현존하는 것으로 보는 틸리히의 입장은 종말론을 무역사성으로 폐기시킬 수 있는 위험을 보여준다.하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틸리히의 종말론은 오늘날 현대신학의 대표자인 위르겐 몰트만의 종말론처럼 역사적인종말론이라고 여겨진다. 필자가 틸리히의 종말론을 역사적인 종말론으로 보는 이유는 방법론과 내용 두 가지이다. 먼저 방법론적으로 볼 때 틸리히의 하나님의 나라론은 그의 신학방법인 상관관계의 방법(method of correlation)에 따라서 역사와 하나님의 나라 사이의 상호관계 속에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종말론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틸리히는 실존적인 물음과 신학적인 대답을 상호 연관시키는 상관관계의 방법에 따라서 역사적 차원의 실존적인 물음인 역사의 모호성과 신학적인 대답인 하나님의 나라를 상호연관시킨다. 말하자면, 역사의 모호성은 하나님의 나라를 요청하고 역사의 종말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이 틸리히의 종말론의 기본구조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틸리히의 하나님의 나라론은 근본적으로 무역사적인 종말론이 아니고 철저하게 역사와의 역동적인 관계 속에 있는 역사적인 종말론이다. 또한 틸리히의 하나님의 나라론은 내용적으로 볼 때도 역사적인 종말론이다. 틸리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속에서 실현되었으며, 역사의 모호성이 극복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속에 단편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역사의 모호성의 완전한 극복은 역사 내에서는 이루어지지 않고, 역사의 목표로서 역사를 넘어서 있는 영원한 생명 속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틸리히는 우리는 역사의 목표인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위해서 역사 속에서 역사의 모호성의 극복을 향한 투쟁에 참여하여만 하고, 동시에 역사의 목표의 궁극적인 완성을 향해 역사 속에서 기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촉구한다. 세계의 모든 일들, 모든 사물들은 본질에서 소외를 거쳐 다시 본질로 돌아가는 영원한 신적인 삶 속에 있으며, 신적인 삶에 기여한다. 온 창조 안에 있는, 특히 인간의 역사 안에 있는 삶은 시간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위해 기여한다. 이처럼 틸리히의 하나님의 나라론은 역사에 실재성을 부여하지 않는 무역사적 또는 비역사적 종말론이 아니고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단편적으로 구현하고 역사 넘어서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궁극적인 완성을 향해 역사 속에서 기여하는 삶을 촉구하는 역사적인종말론이다.

둘째, 틸리히의 종말론은 하나님의 나라의 내재성을 강조한 자유주의신학의 자연주의적 종말론과 하나님의 나라의 초월성을 강조한 정통주의신학의 초자연주의적 종말론 사이의 대립을 극복한 자기초월적인종말론이다. 틸리히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중적인 성격 즉 역사 내적인 측면과 역사 초월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내재적이면서 역사 초월적이고, 역사 초월적이면서 역사 내재적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in)에 단편적으로 나타나는 동시에 역사를 넘어서”(beyond) 역사의 완성을 지시한다. 이런 점에서 틸리히의 종말론은 하나님의 나라의 내재적인 요소와 초월적인 요소를 균형있게 조화 통일시킨 내재적 초월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론이다. 이것은 신학사적으로 볼 때 종말론을 다루는 제3의 길, 즉 정통주의 신학의 초자연주의적 종말론과 자유주의 신학의 자연주의적 종말론 사이의 대립을 극복한 통전적인 신학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종말론은 신의 초월성을 강조한 정통주의 신학의 초자연주의적 종말론과 신의 내재성을 강조한 자유주의 신학의 자연주의적 종말론으로 크게 대조되어 왔다. 먼저, 초자연주의적 종말론은 현실 역사보다는 죽음이후에 세계에 더 많은 관심과 실재성을 부여하여 현실역사에 대한 무관심을 유발하고 피안적인 세계상을 조장하는 역사관이다. 다음으로, 자연주의적 종말론은 초자연주의적 종말론과는 반대로 역사 초월적인 실재를 거부하고 오직 현실 세계 내에서의 현실 세계의 변혁만을 갈망하여 오히려 물질주의와 세속주의를 유발하는 차안적인 세계상을 조장하는 역사관이다. 틸리히는 이러한 두 역사관의 문제점을 직시하면서 두 역사관을 중재한다. 즉, 현실 역사는 진정한 실재임을 인정하나 현실 역사의 물음의 궁극적인 대답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고,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의 자기초월적인 현실이나 역사내적으로 역사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 역사와 역동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역사와 하나님의 나라는 이원론적인 대립이 아니라 변증법적인 긴장 속에서 상호 내재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두 질서 곧 역사의 질서와 영원의 질서는 비록 동일한 것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서로에게 속해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질서는 영원의 질서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선지자들과 기독교의 새로운 주장은 역사의 질서 안에서 영원의 질서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역사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근거”(Ground of Being)서 모든 존재와 내재적이면서도 초월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듯이, 역사의 목표”(Telos of History)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가 역사 속에서 자신을 넘어서 지시하는 자기초월적인 역사로서 우리 역사에 대해서 내재적이면서도 동시에 초월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결국, 틸리히의 하나님의 나라론은 하나님의 나라의 내재적인 요소와 초월적인 요소를 균형있게 조화 통일시킨 내재적 초월의 종말론으로서 신학적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나라의 내재성을 강조한 자유주의신학의 자연주의적 종말론과 하나님의 나라의 초월성을 강조한 정통주의신학의 초자연주의적 종말론 사이의 대립을 극복한 자기초월적인종말론이다.

셋째, 틸리히의 종말론은 현대 종말론 논쟁의 양극단을 중재하면서 양쪽 모두를 포괄하는 보편주의적인하나님의 나라론이다. 틸리히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적이며, 사회적이며, 인격적이며, 보편적인 나라이다. 먼저,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실현된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 사이의 갈등을 해결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역사 속에 단편적으로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속에서 구현되었지만 사회적 정의와 평화는 역사 내에서는 완성될 수 없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인 것이다. 또한 인격적이며 사회적인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실존적인 종말론과 사회적인 종말론 사이의 갈등을 해결한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개별 인간은 소멸되지 않고 존재의 근거와의 연합 속에서 완성되기에 인격적인 나라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한 평화와 정의가 실현된 곳이기에 사회적인 나라이다. 또한 사회적이며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적 종말론과 우주적 종말론 사이의 갈등을 해결한다. 역사의 모호성의 극복이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이기에 역사적인 나라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과 자연 모두를 포함하기에 범우주적인 나라이다. 이처럼 정치적인, 사회적인, 인격적인, 보편적인 특징을 지닌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적인 실현과 미래적인 완성 모두를 포괄하고, 개인적인 완성과 공동체의 완성을 모두 포괄하고, 역사와 우주적 과정을 모두 포괄하는 가장 포괄적인 나라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틸리히의 종말론은 모든 악과 부정성이 극복된 나라이며, 완전한 평화와 정의가 실현된 나라이며, 모든 인간의 인간성이 완성된 나라이며, 인간과 자연 모든 생명이 하나님 안에서 완성된 나라 즉 하나님이 모든 것에 모든 되시는(all in all) 장 포괄적인 보편주의적인하나님의 나라론이다.

넷째. 틸리히의 하나님의 나라론은 신학사적으로 차별성을 지닌 영원한 현재의 종말론이다. 틸리히의 하나님의 나라론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있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적인 현존은 어떤 순간에도 결코 없지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현존한다.” “원은 모든 존재 안에 현존한다는 것이다. 영원은 언제나 인간 안에 현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 존재 속에서 존재를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안에도 현존하고 있다.이처럼 틸리히는조직신학제 5부 곳곳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 영적인 현존, 영원이 언제나 현존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틸리히는 영원은 우리 밖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언제나 우리의 시간 안에 현존하고 있으며, 또한 영원은 역사의 과거나 미래의 특정한 시간에만 정초되어 있지도 않고, 모든 시간의 근거로서 모든 시간 안에 현재한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영원은 영원한 현재이다. 이런 점에서 틸리히의 종말론은 현대의 다른 신학자들과 구별되는 영원한 현재의 종말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틸리히는 범주적으로는 현재적 종말론을 주창한다. 그러나 틸리히는 영원을 역사의 목표로서 현재의 역사 속에 역동적으로 현존한다고 말함으로써 영원을 현재의 역사와 대립시키고 있는 바르트의 영원의 종말론과 구별되며, 영원을 존재하는 모든 존재 안에서 현존한다고 말함으로써 영원을 인간 실존의 순간 속에만 정초시키고 있는 불트만의 실존론적 종말론과 구별되며, 영원을 현재를 변혁시키는 힘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근원적으로 영원을 현재에서 미래로 그리고 다시 영원한 현재로 나아가는 현재적 미래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영원을 미래에서 현재로 그리고 다시 미래로 나아가는 미래적 현재로 보고 있는 몰트만의 메시야적 종말론과 차별되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틸리히의 영원한 현재의 종말론은 모든 시간과 역사의 목표로서의 영원이 모든 시간과 역사 속에 현재한다고 말함으로써 역사적인 비관주의와 무관심을 극복하고 인간의 역사적인 참여와 기여를 강조하면서도 역사의 목표의 완성으로서의 영원은 역사를 넘어서 있는 초시간적인 실재임을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주도권과 인간의 참여 모두를 균형있게 포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향한 종말론적인 윤리를 강조하는 하나님의 나라론이다.

결국, 틸리히의 하나님의 나라론은 역사를 통해서 역사의 목표(telos)를 이루어가는 역사적인종말론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내재적인 요소와 초월적인 요소를 균형있게 조화 통일시킨 내재적 초월의 종말론이며, 현대신학자들과 구별되는 차별성을 지닌 영원한 현재의 종말론으로서 신학사적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나라의 내재성을 강조한 자유주의신학의 자연주의적 종말론과 하나님의 나라의 초월성을 강조한 정통주의신학의 초자연주의적 종말론 사이의 대립을 극복한 자기초월적인종말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