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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신학-거룩한 사랑과 은총

케네스 콜린스 (유장환 교수요약)

2023-1

존 웨슬리의 신학-거룩한 사랑과 은총 케네스 콜린스(유장환교수요약2023-1)

서론 존 웨슬리의 실천신학 : 거룩한 사랑의 신학

감리교 최고의 역사학자 고 앨버트 아우틀러는 1961년, 웨슬리 전통을 되짚어 봐야 한다는 기본 물음을 제기하며 존 웨슬리를 신학자로서 재평가하라고 요청했다

초기의 아우틀러

웨슬리는 신학적 거인도 아니었고, 체계를 세운 이도 아니었으며, 신학자들 중의 신학자도 아니었다. 기획과 의도에 있어서 웨슬리는 대중신학자(folk theologian)였다.

1970년대까지도 아우틀러는 웨슬리를 여전히 대중신학자로 묘사했다. 18세기의 웨슬리가 그 어떤 학파에 속하지도 않았고 또 학파를 세우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신학자들 중의 신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도 아우틀러는 여전히 웨슬리를 대중신학자로 표현했다. 그러나 이때에 아우틀러는 선교와 실천을 강조하는 현대 교회에게 웨슬리의 신학방법이 얼마나 적합한지 새롭게 눈 뜨게 되었다.

1. <<실천신학자 존 웨슬리! practical divinity>>

놀랍게도 웨슬리 자신은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신학’(theology)이란 용어대신 다양한 형태의 신학’(various types of divinity)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예컨대 편지와 연설, 출판된 책 서문에서 실천신학, 사색신학, 논쟁신학, 비교신학, 신비신학, 심지어 알기 쉬운 평이한 신학이란 말을 사용하는데 이러한 용어들 가운데서 실천신학’(practical divinity)이란 용어가 지배적이었다.

이 용어는 웨슬리가 편집한 [기독교 총서]를 소개하는, 꼭 읽어야 할 실천신학(practical divinity)의 단편으로 발췌하고 요약한 것들이란 표현에서, 또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감리교인들의 찬송 선집]에서 사용했다.

(1) 경험의 신학자 객관적 관찰의 경험 X 주관적 심리의 경험 X

또 다른 경우에 웨슬리는 실험신학’(experimental divinity)실천신학이란 용어를 상호 교환하여 사용했는데, 경험이 웨슬리 신학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감각경험에 기초한 실험적 인식은 적어도 몇 가지 점에서 로크의 개념들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감각경험의 인식은 객관적관찰자와 관련하여 공개적으로 입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실험적 혹은 실천적 신학이란 참여적이고 구체적이다.

실천신학이란 (믿음을 통해 은총으로 말미암아) 성서의 진리를 내적 종교와 관련하여 실현하고 입증한다.===>웨슬리는 실천신학이 사람들 스스로가 성서의 진리를 시험할 수 있는 은총의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도널드 소슨이 잘 지적했듯이 믿는 자들이 경험적으로는 숨겨져 있지만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실재와 접촉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인식은 순수하게 심리학적이거나 주관적일 수 없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인식은 공적이고 개인적인 차원, 가슴과 머리의 차원, 인격적이고 사회적인 차원, 곧 모든 차원에서 기독교인 전체 삶의 차원에서의 인식이다.

(2) 성서의 신학자

교부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웨슬리의 이러한 신학적 접근은 결정적으로 성서의 내용에 기초한다. 예컨대, 성서의 진리는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속에서 실현되고 작용되어야 한다. 초기 프레더릭 맥도널드웨슬리가 본질적으로 성서 신학였다고 주장했다.

(3) 사색신학자이기보다는 실천신학자

또한 최근의 웨슬리연구는 웨슬리의 실천신학이 교회의 과제를 방향지우는 신학을 함대한 방법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웨슬리 실천신학은 성서의 진리를 실현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주목한다. 그래서 수년 전 아우틀러는 웨슬리를 당시 가장 중요한 영국 국교회 신학자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말을 웨슬 리가 조직신학자였다는 말로 잘못이해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예전, 신경, 절기문서, 일지, 편지에서 영국 국교회식으로 표현된 웨슬리의 실천신학은 결정적으로 인식론적이기보다는 구원론적인 성향 보여 주고 있다. 거대한 사색적 체계 원리를 배제하고 있는 웨슬리의 주된 관심은 그의 [설교집]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성서에서 발견한 바 인간의 창작과는 구분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늘나라에 이르는 을 다음 설교들 속에서 제시했다. 나는 진정한 성서적 경험 종교외에 다른 것을 가감하지 않았다.

2. <<웨슬리 실천신학의 양식!>>

conjunctive 신학방법: 여러 모순된 진리들을 긴장 가운데 묶는 다양하고도 절충적인 양식

0 웨슬리의 신학이 상관관계의 방법을 사용한 폴 틸리히와 신-인 상응의 패러다임을 사용했던 에밀 브룬너와 같이 거대한 체계원리로 특징되지 않는다고 해도 웨슬리의 계속적인 실천신학에 대한 관심 범위에서 모든 부차적인 교리들의 중심을 이루는 중심주제가 등장한다. 웨슬리의 구원론적 중심 주제는 시작과 과정이 구원의 순서라는 정황에서 전개된다. 따라서 웨슬리 실천신학의 중심주제가 갖는 형식적 요소가 자세하게 논해지기 전에 웨슬리의 신학적 성찰이 갖는 양식, 곧 웨슬리 신학의 중심을 이루는 양식을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함.

0 영국 국교회 신학자인 웨슬리는 신학적 성찰을 할 때 한쪽에 치우진 독서를 하지 않고 온건한 입장을 취한다. 말하자면, 아우틀러의 말대로 펠라기우스의 낙관론과 아우구스티누스의 비관론에 대한 제3의 대안(third alternative)을 제시하고 했던 웨슬리는 다양한 진리를 긴장 가운데 묶어내는 탁월함을 보여 준다. 하지만 바로 이 다양성 때문에 학자들은 자신의 렌즈를 통해 웨슬리를 해석해 내곤한다. 예를들어, 셀의 칼빈주의, 힐데브란트의 루터교 경건주의, 럽의 청교도주의, 매덕스의 동방교부의 렌즈. 여러 모순된 진리들이 긴장 가운데 묶여 있는 다양하고도 절충적인 양식은 웨슬리 신학의 전체적인 특징인 바, 아우틀러는 이를 그 나름의 특별한 방법이라고 불렀다.

0 웨슬리=접속적(conjunctive) 신학자

웨슬리 신학에 대한 가장 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해석은 그 방법이 이것도 저것도’(both and)이지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 or)의 선택 문제가 아니다.

예) 오직 믿음으로만(only faith) 과 거룩한 삶 살기(holy living)의 신학적 종합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only faith) 과 거룩한 삶 살기(holy living)를 하나로 묶어 내는 웨슬리의 독창적인 입장을 쉽게 간과한다. 위대한 복음 전도자 웨슬리는 오직 믿음으로만을 설교하면서 동시에 완전으로의 여정을 가르치고 이 땅에서 완전을 기대한다. 웨슬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움직임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이 점이 바로 웨슬리의 일관성 없는 태도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실제 가장 웨슬리다운 독창성은 제3의 대안이라는 것이다.”(아우틀러)

또 다른 접속의 예 : 율법과 복음, 은총과 행위, 사랑의 입음으로서의 은총과 능력을 힘입음으로서의 은총, 칭의와 성화, 순간과 과정, 은총의 보편성(선행은총)과 은총의 제한적(구원하는)실현, 하나님의 주도권과 인간의 응답, 최초의 칭의와 최종적 칭의의 접속.

웨슬리는 근대 신학에 비추어 볼 때 조직 신학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신학적 양식은 실천신학 영역에서는 탁월성을 보여준다.

3. <<웨슬리 실천신학의 중심주제>>

웨슬리 신학의 중심주제는 무엇인가?

아우틀러 : 은총, 매덕스 : 책임은총

케네스 콜린스의 비판 ===> 이들의 주장은 웨슬리의 중심 주제에 담긴 다양성과 풍요로움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고, 웨슬리의 신학적 양식 표현하지 못함

거룩함과 은총의 중심 주제!

최근 학문의 경향과는 반대로 나는 웨슬리 신학의 접속적인 풍치가 실제 그의 중심 주제나 기본적인 관심인 은총뿐 아니라 거룩함과 은총 안에 배어 있음을 제시하고자 한다. 거룩함믿음으로만이라는 대조적인 특성 때문에 신학의 중심주제로서 이 둘을 연관짓는 일은 웨슬리 평생의 신학적 기획이었다.

또한 거룩함과 은총이라는 중심주제는 각각 또 다른 접속으로 구성된다. 웨슬리가 자신의 저술에서 두루 사용하고 있는 거룩함이란 용어는 실제로는 요약한 표현으로서 거룩한/사랑의 접속과 긴장을 내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웨슬리는 중심 주제의 또 다른 축이 되는 을 독백적 방식뿐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은총과 협력은총의 긴장으로 나타나는 접속적 방식으로도 이해한다.

<웨슬리 실천신학의 중심주제>

거룩함(holiness)

은총(grace)

거룩한(holy)/사랑(love)

값없이 주시는(free) 은총/ 협력(책임)(cooperant)은총

1) 거룩한 사랑으로서의 거룩함’ : 중심 주제의 처음 반쪽!

웨슬리는 종종 기독교인의 삶의 목표나 목적을 기술하기 위해 거룩함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의 저술에서 중요한 요점을 제시하는 부분에서는 이 용어를 거룩한 사랑의 요소들로 나누어 설명한다.

예) 히브리서 12장14절여러분은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거룩함을 추구하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에서 발견한 진리를 변형하여 1745년 존 스미스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영감으로 먼저 거룩한 사랑으로 역사할 것입니다. 만일 이 거룩한 사랑이 없다면 아무도 영광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웨슬리가 거룩함이란 말로 거룩한 사랑을 뜻하고자 하였다면, ‘거룩함을 사랑이란 말과 관련해서 의미를 밝혀낼 뿐 아니라 사랑이 거룩함과 관련해서 어떤 의미인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오드와 로달은 거룩함과 사랑을 동일한 것으로 보나 웨슬리는 거룩함과 사랑을 다른 부류에 속한 용어로 이해함.

거룩함 --관계의 질을 표현하는 간접적인 관계성을 뜻함/순수함을 지키기위한 분리의 운동

사랑 --직접적인 관계성을 뜻함 / 관계와 참여의 운동이며, 최고의 경지에서는 연합의 운동

거룩한 사랑이란 단순하고 직접적인 표현이 아니라 순수함을 위해서는 분리의 개념으로 표현되고, 사랑을 위해서는 연합의 개념으로 표현되는 접속을 내포하고 있음.

순수함과 연합은 긴장 가운데서 묶여야 하는 것이지 이것을 위해 저것을 간과해서는 안됨.

거룩함이 사랑을 암시하듯이 사랑은 거룩함을 암시한다.

!) 하나님의 사랑이 거룩의 근거이다. :참된 기독교인의 거룩함은 그 기반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예) <성령의 증거1>, 하나님의 사랑이 칭의의 근거

!!) 거룩함이 밖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상관없으면 쉽게 아주 굳어 버린 인간의 종교로 전락할 것이다. 그 결과 순수함을 지키기 위한 분리는 소외와 무관심을 조장할 것이다.

결론 : 거룩함 없는 사랑부드럽고 어린아이처럼 소원만 아뢰는 자기 탐닉이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거룩함재만 남기는 불이다. 그러므로 거룩함과 은총이라는 웨슬리의 중심 주제의 처음 반쪽에 해당하는 거룩함은, 그 자체를 거룩한 사랑의 접속으로 이해할 때 그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한 것이 된다. 거룩한 사랑으로서의 거룩함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뿐 아니라 진지한 기독교인의 삶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예술적 균형이다.

율법과 은총

거룩함과 은총이라는 웨슬리의 중심 주제는 잘 정리된 율법과 은총이라는 부차적 접속에서 세분화된다. 율법과 은총의 접속은 종교개혁 때부터 서방신학의 큰 관심거리가 되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정확한 웨슬리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은총과 관계된 도덕법의 영향을 탐구해야한다.

0 웨슬리는 그 당시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을 따라서 도덕법하나의 영원한 정신의 복사... 지극히 높으신 분의 드러난 아름다움으로 생각했다.

0 더 나아가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균형을 잃은 채 도덕법의 조명과 안내를 받지 않고 열광적이며 반-율법적인 방식으로 선포하는 개신교 복음 선교자들이 특히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오류를 교정하기 위해 웨슬리는 은총을 규범화된 은총이라고 주장했다.

0 은총이나 복음이 율법의 내용이기 때문에 율법을 설교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웨슬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이 주장에 전적으로 반대한다. 복음은 인간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의 처음 목표에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방식은 율법으로 죄인들의 죄를 선고한다.

0 웨슬리는 1744년 제1차 감리교연회에서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 모든 이들에게 복음뿐만아니라 율법을 선포하라고 권면했다. 예컨대, 웨슬리는 칼빈이 그랬던 것처럼 율법의 예방의 역할을 강조할 뿐 아니라 루터가 그랬던 것처럼 율법의 고발의 역할도 강조했다.

***따라서 웨슬리는 받아들임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풍요로운 은총 안에 계속 살아가기 위해 도덕법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 실천적인 기독교인의 삶에 요청다고 주장했다. 율법과 그리스도는 나를 다른 타자에게 지속적으로 보낸다.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그리스도는 율법에게로 나를 보낸다.” 예컨대, 웨슬리는 믿음이 도덕법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사랑과 자비의 사역을 불러오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죽음 믿음일 뿐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움직이는 살아있는 믿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시 정리하면, 웨슬리의 실천신학을 구성하는 것은 거룩함과 은총의 보다 넓은 중심 주제를 반영하는 율법과 은총이다. 진정 율법과 은총의 접속은 웨슬리 신학의 구성이 갖는 적절성을 보여 주고 있다.

2) 은총: 중심 주제의 다른 반쪽!

웨슬리 신학의 역동적이며 복잡한 중심 주제는 물론 거룩함뿐 아니라 은총도 포함한다. 거룩함이 거룩한 / 사랑의 접속으로 설명되었듯이 은총 또한 아래 도표에서 보듯이 여러 접속들의 요약이다.

은총의 접속

값없이 주시는 은총

협력은총(책임은총)

하나님 홀로의 사역

신/인 협력

은총을 입음을 강조

능력을 힘입음을 강조

수혜

응답

순간

과정

개신교전통

카톨릭 전통

(1) 하나님 홀로의 사역과 신-인 협력론!

0 학자들은 종종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아르미니우스 주의의 범주에 속하는 웨슬리 실천신학은 하나님과 인간이 구속의 과정에서 함께 일하는 협력은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협력의 이미지가 웨슬리 신학의 어떤 면을 탐구하는데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은총에 대한 웨슬리의 전반적인 이해를 완전하게 표상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협력은총이 웨슬리 신학적 양식을 기술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예컨대 웨슬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이라는 설교에서 은총을 협력적인 것으로 보지만, 값없이 주시는 은총이라는 설교에서는 아주 접속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지칭했고, 실재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홀로의 사역으로 생각했다. 은총은 그 자체로 은총의 수혜자의 선한 행위나 의에 의존하지 않았다. 곧 수혜자의 행위나 존재에 의존하지 않았다.웨슬리는 분명하게 선언했다. 우리는 의롭게하고 거룩하게 하며 영화롭게하는 것이 하나님의 홀로의 사역임을 인정한다.또한 이 세가지가 구원의 전체를 파악한다고 인정한다.”(예정론 성찰)

00 웨슬리의 신학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의 활동과 인간의 활동을 포함하는 신-인 협력의 패러다임은, 인간의 모든 활동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유일한 활동을 강조하는 개신교의 주장에 동일하게 강조되는 좀 더 넓은 접속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2) 은혜를 입음과 능력을 힘입음!

0 은총에 대한 웨슬리의 광의의 개념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두 번째 접속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음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음이라는 주제이다.

0 먼저 웨슬리는 은총을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사랑’(undeserved favor)으로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모든 축복은 하나님의 은총, 풍요, 사랑이다. 곧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사랑이며 온전히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배푸시는 사랑이다. 이렇게 이해하고 보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빚을 진 분이 아니고 선한 의지와 사랑을 모든 피조물에게 물 붓듯이 부으시는 분이다. 예컨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총은 완전히 인식되거나 응답되기 전에 이미 현존한다. 그러므로 선행은총은 하나님의 사랑을 암시할 뿐 아니라 은총이 선물임을 강조한다.

0 더구나 웨슬리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이를 통해 능력을 힘입는 것을 강조했던 카톨릭 전통자료들을 심도있게 읽었다. 이릍 통해 웨슬리는 은총을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가게하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해했다. 이런 상황에서 은총은 놀라운 능력이며, 성령의 현존으로 인해 믿는 자들에게 임하는 전능한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다. 아우틀러가 설교집 서문에서 지적하듯이 웨슬리 신학의 보편적인 내용은 참여라는 주제이다.

00 따라서 웨슬리는 은총이란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인들에게 의롭다함을 선포하는 것일 뿐 아나라 실제로 거룩함으로 죄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도움을 주며 새롭게한다주장한다.

*** 칭의와 중생과 성화 모두 하나님의 사랑으로서의 은총과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은총 의 접속이다.

(3) 수혜와 응답!

0 신학에서 패러다임이란 때때로 여러 신학적 요소들을 평가하는 배타적 방식으로서의 거대담론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 경우 웨슬리의 신학을 절충신학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은 웨슬리의 실천신학이 가톨릭이나 개신교의 어떤 특정유형에 딱 들어맞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0 과거와 오늘날까지도 웨슬리 신학은 대체로 신-인 협력적 모델로 여겨 왔다.

윌리엄 캐넌웨슬리가 구원을 신-인협력적으로 기술한다.” “웨슬리에게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 존재의 협력의 결과이다.

매덕스 신-인 협력적 협동이 신생을 받는데 필여적임 주장 웨슬리는 신생이 일어날 때 인간의 능력에 은총이 넘치는 중생을 가져오는 것은 회복된 용서의 관계(칭의)를 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응답이라고 주장했다.

0 그러나 협력모델은 웨슬리 신학의 전체 범위에 속했지만 하나님 홀로의 행위에 여지를 주지는 않았다. 가톨릭의 협력 패러다임과 개신교의 패러다임을 종합했던 웨슬리는 구속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에 응답하는 것의 중요성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주를 섬기고 하나님 홀로 주시는 선물을 받는 것의 가치를 강조하였다. 예컨대 믿는 자들은 응답하기 전에 받아야만 한다. 이 수혜는 인간의 활동이 아니고 수동적 의미의 개방성이다. 여기서 개방성은 선험적인 협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주어진 선물을 받기 위해서 자유안에서 인격의 온전함을 견지한다. 이처럼 웨슬리 신학이 갖는 치밀한 균형은 실제적인 의미에서 웨슬리의 제3의 대안 중 하나를 표상한다. 예컨대, 은총은 제네바(신단독설)나 로마(신-인협력)에 의해서 배타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고 이 둘로 이해되어야 한다.

(4) 순간과 과정

0 웨슬리의 구원의 순서의 순간적 요소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서의 은총뿐만 아니라 죄를 용서하고 거룩하게 하는 분은 인간이 아니고 전능하신 분이라는 결정적 진리를 강조하는 기본수단이다. 다시 말하자면 시간적인 요소들은 구원론적 역학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활동을 강조하다.

성서적 구원의 길 설교

여러분은 나는 먼저 이러저러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거나 아니면 이러저러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했다면 여러분은 오늘까지 구원을 행위로써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구원을 믿음으로 추구한다면 여러분은 지금 이 모습 이대로 구원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모습 이대로 구원을 추구한다면, 지금 구원을 기대하는 셈이 됩니다.

0 물론 이것은 웨슬리의 구원론 해석들 중에서 구원의 법정 차원(칭의나 용서)을 순간과 동일시하고 치유의 차원(성화)을 단순히 과정적인 것과 일치시키는 광의의 해석이다. 실로 웨슬리의 구원론은 이 범주가 허용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넓게 이해한다면 성화는 과정과 순간의 특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온전한 성화와 같이)신생은 그 이전과 이후의 과정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웨슬리 말대로라면 신생의 처음 순간을 가져야하기 때문이다.이러한 구원론적 순간은 연대기적 방식으로 신생의 순간적인 실현을 강조할 뿐 아니라 실제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홀로의 활동이며, 좀 더 중요하게는 구원론적 방식에서 이 은총의 넘쳐남을 강조한다. 간단히 말해서, 가톨릭 패러다임이 온전한 성화에 이르는 과정을 조명수 있다면, 구원의 현실화와 실현의 순간을 강조하는 개신교 패러다임은 온전한 성화 그 자체를 조명한다. 바로 이러한 의미들이 종합하여 웨슬리의 특성을 나타낸다.

책의 흐름

존 웨슬리 신학의 핵심에 이를 수 있는 해석학적 구조

1차 세계는 본문의 세계이다. 웨슬리 자신이 썼던 글들. 예를들어, 편지, 일지, 일기, 찬송속, 신학논문 등

2차 세계는 역사비평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웨슬리 자신의 성찰에 들어와 있는 전통적이며 역사적인 자료들. 예를들어, 동방의 교부들, 청교도들,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 캐롤라인 신학자들, 모라비안 교도들, 독일 경건주의자들. 2차 세계는 하이젠레이터 말대로 아리송한 웨슬리씨”(elusive Mr. Wesley)를 분명하게 밝히는데 중요하다.

3차 세계는 신학적 비평과 관계한다. 이는 필연적인 해석의 관심이 되는 웨슬리 신학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위치를 고려할 뿐만 아니라 18세기와 21세기의 시간적 차이를 극복하고자한다. 분명코 웨슬리의 모든 생각과 가르침을, 예를들어 아이들과 관련한 교육을 해석의 과정없이 우리의 현시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존 웨슬리의 신학-거룩한 사랑과 은총 케네스 콜린스(유장환교수요약2023-1)

서론 존 웨슬리의 실천신학 : 거룩한 사랑의 신학 <핵심사항>

1. <<실천신학자 존 웨슬리! practical divinity>>

실천신학이란 (믿음을 통해 은총으로 말미암아) 성서의 진리를 내적 종교와 관련하여 실현하고 입증한다.

2. <<웨슬리 실천신학의 양식!>>

conjunctive 신학방법: 여러 모순된 진리들을 긴장 가운데 묶는 다양하고도 절충적인 양식

중도적 입장 === 제3의 대안(third alternative)

아우틀러의 말대로 웨슬리는 펠라기우스의 낙관론과 아우구스티누스의 비관론에 대한 제3의 대안(third alternative)을 제시 ===>다양한 진리를 긴장 가운데 묶어내는 탁월함 제시 여러 모순된 진리들이 긴장 가운데 묶여 있는 다양하고도 절충적인 양식 때문에 학자들은 자신의 렌즈를 통해 웨슬리를 해석. 예를들어, 셀의 칼빈주의, 힐데브란트의 루터교 경건주의, 럽의 청교도주의, 매덕스의 동방교부의 렌즈.

3. 중심주제

웨슬리 신학의 중심주제는 무엇인가? 아우틀러 : 은총, 매덕스 : 책임은총

케네스 콜린스의 비판 ===> 이들의 주장은 웨슬리의 중심 주제에 담긴 다양성과 풍요로움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고, 웨슬리의 신학적 양식 표현하지 못함

중심 주제! 거룩함과 은총

토마스 오드와 마이클 로달 거룩함=사랑 사랑이 거룩함의 마음이라고 주장

거룩과 사랑의 상호구별

거룩함 --관계의 질을 표현하는 간접적인 관계성을 뜻함/순수함을 지키기위한 분리의 운동

사랑 --직접적인 관계성을 뜻함 / 관계와 참여의 운동이며, 최고의 경지에서는 연합의 운동

<웨슬리 실천신학의 중심주제>

거룩함(holiness)

은총(grace)

거룩한(holy)/사랑(love)

값없이 주시는(free) 은총/ 협력(책임)(cooperant)은총

은총의 접속

값없이 주시는 은총

협력은총(책임은총)

하나님 홀로의 사역

신/인 협력

은총을 입음을 강조

능력을 힘입음을 강조

수혜

응답

순간

과정

개신교전통

카톨릭 전통

(1) 수혜와 응답

은총은 제네바(신단독설)나 로마(신-인협력설)에 의해서 배타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고 이 둘로 이해되어야 한다.

(2) 순간과 과정

신학자들:칭의-순간, 성화-과정 // 케네스 콜린스 칭의 중생 성화 모두 순간과 과정의 접속

4. 조지 셀 비판

조지 셀 은총-개신교전통, 거룩-카톨릭전통

케네스 콜린스 은총과 거룩 모두 개신교전통과 카톨릭전통의 접속

제1장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 유장환교수

만물이 함께 노래하는 당신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당신의 한없는 은총의 영광과 편만한 사랑을 찬양합니다. (보편적 구속)

신론을 탐구하다 보면 웨슬리가 종종 하나님이란 말을 애매모호하게 사용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때때로 웨슬리는 자신의 글에서 전체 신성을 하나님으로 표현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바꾸어서 사용한다. 특별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사역을 언급할 때 그리하였다. 따라서 나는 신성과 하나님 아버지의 구분을 다룸으로써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웨슬리의 이해를 더욱 분명하게 하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인격적이며 본질적인 속성들

웨슬리의 신론을 탐구할 때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아버지)의 인격과 사역을 구분한다. 예컨대, 사랑, 거룩함, 영원성, 편재성, 전지성, 전능성 등 같은 하나님의 인격적이며 본질적인 속성들과 선, 지혜, 정의 같은 창조와 통치에서의 역할을 다루는 하나님의 사역따로 탐구한다. 웨슬리는 영국 교회의 종교 강령을 따라 하나님은 몸이나 지체를 가지지 않는 영이라 주장한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룩한 사랑

밀드리드 윈쿠프사랑의 신학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웨슬리 연구의 핵심이어야한다고 정확하게 이해했다. 웨슬리는 자신의 입장에서 사랑은 사랑의 대양인 하나님 안에서 영원부터 존재한다. 고 주장했을 뿐 아니라 사랑은 하나님의 모든 완전의 영역에 행복한 영광을 비추는 하나님의 애정이 넘치는 통치의 속성이라고 했다.

또한 웨슬리는 1743년 펴낸 이성과 경건의 사람들에게 던지는 진지한 호소’(Earnest Appeal to Men of Reason and Religion)에서 영국의 지성인 비평가들을 향해 결국 메소디스트 종교는 여러분이 진정으로 원한 것”, 곧 사랑에 대한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애정이 넘치는 속성에 자신들의 생각과 욕망, 선호를 덧붙임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인간이 생각을 덧칠해 버리면 신적 존재에 대해 아주 감상적이며 비현실적인 입장에 서게 된다.

웨슬리는 당시 이러한 오류를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과 다른 통치의 속성, 예컨대 거룩함과 연결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악의 영향과는 무한한 거리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표현했다. 또한 질서와 광대함을 찬양하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초월성, 거룩함을 노래한다고 고백했다.

그러므로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애착이 아니며 하나님의 거룩함은 추상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함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완전함을 일러주는 하나님의 속성, 곧 사랑의 속성이다. 오턴 윌리가 웨슬리의 사역을 성찰하면서 당시에 지적했듯이 넓이와 깊이 때문에 거룩함은 여러 속성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보다 깊고 심오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본질적인 본성에 속한다. 거룩함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지닌 도덕적 특성이다

여기서 웨슬리의 독특한 공헌은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함을 서로 관계하는 것으로, 때로는 심지어 긴장 관계 속에 있는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예컨대, 웨슬리는 한편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무한한 거리를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생각한다. 이때 거룩함은 분리하고 구분하는 거룩함이다. 다른 한편으론 소통이 가능함, 사랑의 타자-지향성, 타자의 포용을 강조한다. 서론에서 밝혔듯이, 거룩함은 거리를 만들어낸다. 신적 존재의 두 서술어인 거룩함과 사랑은 거룩함으로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따로 세움을 입었을 뿐 아니라, 사랑과 선교 안에서 다시 세계 속으로 들어가도록 초청받은 사람들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의 표현이고 요약이다.

더구나 하나님의 거룩함이 하나님의 사랑을 간과한 채 강조된다면, 영원한 하나님은 영원히 모든 피조물들과 관계를 갖지 못할 것이고 교제나 연합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웨슬리는 거룩함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00 웨슬리는 자신의 저술에서 거룩함과 사랑이라는 두 운동을 하나로 묶어낸다. 때문에 웨슬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증언할 때 즐겨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인, 세상에 남긴 하나님의 지문이란 성도들의 마음에 거룩한 사랑이 새겨진 것을 말한다.

00 또 다른 곳에서 웨슬리는 우리가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을 인식했다면 전능자에게 어떤 태도로 마음을 드려야 하는지 탐구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희생제물은 마음의 산 희생제물일 것입니다. 거룩한 사랑의 불길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제물을 드립시다. 다시 말하지만, 거룩한 사랑의 표징이 하나님의 특성을 표현하기 때문에, 웨슬리는 자연스럽게 거룩하신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에 들어가려면 거룩한 사랑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은 먼저 자신의 성령의 영감으로 우리 마음에 거룩한 사랑을 허락할 것입니다. 이 거룩한 사랑이 없이는 누구도 영광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그러므로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웨슬리의 신론은 거룩함이 없는 사랑을 논하지 않고 사랑 없는 거룩함을 논하지도 않는다.

영원성

웨슬리는 이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도 계실 영원한 하나님은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과 밀접하게 관계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고 알파와 오메가이며 처음과 마지막이다. 웨슬리는 이러한 독특한 하나님의 존재를 과거의 영원성(a parte ante)과 미래의 영원성(a parte post)을 구분함으로써 증명할 수 없는 진리로 생각했다. 웨슬리하나님 홀로 과거의 영원성과 미래의 영원성의 의미에서 ‘...영원히 거한다고 주장한다. 위대한 창조자 홀로 영원부터 영원까지 거하신다.’” 거룩한 사랑은 시작이 없었고 끝도 없을 것이다. 웨슬리는 시작이 없는 기간과 끝이 없는 기간을 구분하고는, 이에 기초하여 시작이 없는 기간은 하나님께만 속하고 끝이 없는 기간은 피조물에게도 적용된다고 주장 한다. 웨슬리의 번론을 들어보자

끝이 없는 기간은 위대한 창조자에게만 속한 속성이 아니다. 하나님은 무수히 많은 피조물들이 끝이 없는 기간에 참여하는 것을 은총 가운데 기뻐했다. 하나님은 천사들, 대천사들, 하늘에 있는 성도들 뿐 아니라...흙으로 지은 집에 거하는 이 땅의 거주자들에게도 끝이 없는 기간을 허락하였다.

00 웨슬리의 해석의 시각에서 보면 시작이 없는 기간의 영원성은 다른 존재와 공유될 수 없는, 특별히 하나님을 기술하는 것처럼 보인다. 달리말해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 외에 그 어떤 존재나 사물이 과거의 영원성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은 여럿이 될 것이고 그 결과 유일신론은 폐기되어야할 것이라고 보았다. 간단히 말해 두 하나님이나 두 영원은 존재수 없다.

(비고) 위르겐 몰트만 <나는 영생을 믿는다>

편재성

하나님의 편재성을 다루면서 웨슬리는 하나님이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무한한 기간을 거쳐 존재하는 것처럼, 무한한 공간을 거쳐 존재한다. 웨슬리는 예레미야 23장24절을 주석하면서 창조의 경계 밖이든 안이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구석은 없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어디든 활동하기 때문에하나님은 어디든 존재하듯이, 모든 곳에서의 활동은 모든 곳에서의 존재를 뜻한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창조 안에 내재하기 때문에 만물 속에 존재한다고 분명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거룩한 하나님께서 아주 중요한 방식으로 우주를 여전히 초월해 있다고 주장으로써 범신론에 빠지는 것을 피해갔다. 따라서 웨슬리는 무한한 공간이 신성의 감각중”(sensorium of deity)라고 주장한 아이잭 뉴턴의 주장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나 공간이 하나님의 존재를 결정한다든지 우주는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이라는 개념에는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함께 적절히 주장했고, 둘 중 어떤 하나를 배재한 채 다른 하나를 주장하지 않았다. 예컨대, 초월성을 간과한 채 내재성을 강조하다보면 범신론에 빠지게 되고, 내재성을 간과한 채 초월성을 강조하다보면 둘이 나뉘어져 하나님이 인식되지 않거나 인식되지 않은 채 남겨지게 된다.

00 웨슬리는 설교와 논문, 편지 등에서 하나님의 편재성과 같은 중요한 신학적 문제는 사색적, 추상적, 개념적 차원에 단순히 남겨 놓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에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통찰을 얻고자 하였고, 실천적인 차원에게 영적이며 도덕적인 적용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어 웨슬리는 하나님의 편재성이라는 자신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00 거룩한 사람이나 하나님의 천사가 아니고 영원부터 존재하는거룩한 그분 하나님 자신이 여러분의 마음과 혀와 손을 매 순간 감찰하고 계심을 인식한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조심스러워야할까요?”“만일 하나님께서 당신 침대 곁에 계시고 당신 여정에 동행하시면서 모든 길을 들여다보고 계시다고 믿는다면, 당신이 생각할 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가장 작은 일이나 말이나 생각조차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겠습니까?

전지성

웨슬리는 하나님의 여러 본질적인 속성들이 서로를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일례를 들면 나님의 전지성을 하나님의 편재성의 분명하고도 필연적인 결과로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주의 모든 영역에 현존한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이나 그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것을 알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해서, 공간의 의미로 하나님의 무한성(과 초월성)을 말할 때 하나님의 전지성이라는 개념이 생겨난다. 어디든 존재하는 영원한 하나님은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안다.

그러나 웨슬리는 하나님의 전지 교리를 장소(편재성)뿐 아니라 시간(영원성)개념과 연관켜 설명한다. 주 하나님께서는 전체시간 혹은(시간은 단지 영원성의 작은 조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온전한 영원성에 언제나 현존해 있기 때문에.모든 것을 아시며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인식의 범위밖에 존재할 수 없다. 좀 더 철학적인 차원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던 것을 따라 웨슬리는 과거건 미래건 모든 시간은 하나님께는 영원한 지금이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적용이 뒤따른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인식하고 영원한 지금 안에 모든 것을 인식하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다.

00 선한 목회자였던 웨슬리는 편재성이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전지성이 가져올 수 있는 불편함까지 포함하여 인간의 삶에 미치는 도덕적이며 영적인 결과를 생각했다. 당신은 하나님의 전지성과 편재성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인간은 아담이 하나님의 눈을 피하려했듯이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보다는 눈먼 우상을 섬기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편재성과 전지성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진리뿐 아니라 거룩하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면전에서 인간이 갖는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전능성

웨슬리는 전능성을 탐구하면서 하나님의 편재성이 부정은 마찬가지로 전능성의 부정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편재성에 경계를 정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전능성에도 경계를 정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웨슬리는 다른 글에서 하나님께서 편재할 뿐 아니라 전능하다. 하나님은 그의 현존뿐 아니라 능력에 있어서도 한계가 없다. 하나님은 능력 있는 팔과 강한 손과 높은 오른손을 갖고 계시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영원한 하나님의 능력에 한계가 없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18세기에 몸(물질)과 정신(영)의 관계를 어떻게 보았는지 염두에 두어야한다.

데카르트의 이분법적인 몸/정신의 구분한편으로는 새로이 등장한 사실들의 세계에서 종교의 가치를 지키려는 변증적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몸이 다른 것(res extensa)이라고 해도 몸의 발견이 정신의 발견과 모순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처럼 데카르트가 이분법적인 분리를 한 결과 물질은 완전히 자기-동력이 부족한 비활성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데카르트는 하나님께서 물질세계를 창조하고 난 후 그 안에 운동을 불어넣고는 조용히 물질의 세계를 빠져나왔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물질세계로 부터 퇴거했다는 이신론적 개념은 거부했지만 18세기로 전해 내려온 데카르트의 처음 전제들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전능성에 끼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성찰하였다.

하나님은 실로 물질세계 안에 거하는 유일한 작인입니다. 모든 물질은 본질적으로 살아있지 않고 활동적이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만 움직입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피조물과 보이지 않는 피조물 속에 있는 활동의 샘입니다, 따라서 피조물은 하나님의 전능한 힘의 계속된 유입과 작인이 없이는 활동할 수 없고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인용구 마지막에 표현된 전능한 힘의 계속된 유입과 작인은 자연적 질서와 관련해서슬리 자신의 입장과 데카르트의 입장의 차이를 보여준다. 적어도 웨슬리는 창조자의 전능성을 인식하는바, 창조가 창조의 시작 뿐만 아니라 계속적인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분명 하나님이 초월적이지만 하나님의 전능함은 세계와 깊이 관계고 있기 때문이다.(이신론거부)

또한 웨슬리가 전능성을 자연으로부터 퇴거하시키지 않는 증거는 윌리엄 로의 <기도의 영>이란 책에 대한 비판에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는 황소나 돌을 가지고 합리적인 철학자나 아브라함의 자녀로 만드실 수 없을까요? ...만일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의 전능성이란 간련한 것 아닐까요?

그 후 웨슬리는 1774년 당신 과학적 논증에 잡혀 모든 인간의 감각은 뇌의 움직임에 따라 결정론적으로 움직인다고 주장한 하틀리 박사(Dr, Hartley)와 논쟁을 벌였다, 하나님의 전능성이 인간의 자유를 보증한다고 호소했다.

이제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분은 자신이 만든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릴 힘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물질과 영의 세계, 우리의 몸과 영에 대해서도 같은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나님께서 어느 정도 진동과 감각, 감각과 성찰, 성찰과 판단, 판단과 열정이나 행동의 관계를 잘라 내거나 지연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전능성의 개념을 가질 수 없다.”(필연에 대한 사유들)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관대한 이해는 특별한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 회심, 새창조의 기적과 초자연적 은총을 생각할 때 곧 초월적 영역에 대한 웨슬리의 주장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웨슬리는 이렇게 지적한다. 나는 기적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힘으로 이루어지는 전능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이제 죄인들이 거룩함으로 회심하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면, 나는 기적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 웨슬리는 <이성과 경건의 사람들에게 던지는 진지한 호소> (Earnest Appeal to Men of Reason and Religion)라는 책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과 전능성을 구속이란 말로, 또한 몇몇 감리교인들에게는 놀라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 방식으로 강조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아무도 그냥 믿을 수 없다. 믿음이란 전능의 사역이다. 믿음은 무덤에 놓인 몸을 일으키고 죽은 영혼을 살리는 힘을 갖는다. 믿음은 새 창조이다 누구도 영혼을 새롭게 창조할 수 없지만 하늘과 땅을 지으신 그분은 하실 수 있다. 웨슬리가 하나님의 전능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모든 인간 존재를 거룩한 사랑을 위해 창조된 존재로 보고 인간에게 자유와 작인을 허락하는 방식으로 창조하였다.

본질적인 속성들과 예정

우리는 웨슬리가 예정과 선택을 하나님의 독특한 활동으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롬 8장 29-30) 사도바울이 자세하게 전개하는 구원의 순서에서, 웨슬리는 하나님의 전지성에 큰 무게를 둔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에서 믿음을 갖게 될 사람들을 미리 아신다. 첫 단계를 구성하는 하나님의 예지는 결정론적이거나 강제적이지 아니하고 탐구적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시기 때문에 그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을 아신다고 생각해야 한다.실제로 웨슬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을 신-인동형론적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말해 하나님께는 예지나 후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영원히 지금으로 현존한다달리 말하면,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전지성에 있는 그대로 개방된다.

하나님의 예지는 결정론적인 것이 아니라는 성서적 진리의 중요한 결론 가운데 하나는 인간에게 은총으로 말미암아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자유는 거룩한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 인격의 온전함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오해가 없도록 조심스럽게 이해되어야 한다. 은총으로 회복된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선이나 악을 행할 수 없는 해나 달처럼 될 것이다.

바울이 제시한 질서에서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아들의 형상을 따라 살도록 미리 예정했다는 사실이다. 웨슬리는 이 성서적 진리를 은총으로 어느 정도 회복한 인간의 자유를 짓밟는 결정론적 해석을 하지 않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아들의 형상을 따라 살도록 하나님께서 정했다.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바꿀 수 없고, 뒤집을 수 없으며,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선택받은 자들만 구원의 은총을 주시고 버림받은 사람들로부터는 거두어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믿는 자들이 구원을 받고 저주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선택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조건적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라요청한다. 부르심을 입은 이들을 의롭게 할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는 것은 바울이 제시한 세 번째 단계와 네 번째 단계이다. 여기서 칭의는 사도바울의 저술에서보다 폭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게 분명하다. 그 결과 웨슬리의 칭의는 법정의 용서 뿐만아니라 신생의 다른 사역, 곧 신생과 관계된 거룩하게 하는 사역을 담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칭의라는 말은 이 상황에서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는 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바르게하거나 의롭게하거나... 우리를 거룩하게한다.

이 질서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가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였다. 달리 말하면,우리성도의 유업을 받을 자가 되도록 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창세전에 우리를 위해 예비한 하나님 나라를 준다.

<웨슬리와 칼빈주의자의 예정론 차이점>

아르미니우스주의자인 웨슬리와 만세반석 열리니”(Rock of Ages)란 찬송시 저자 톱 레이디(Augustus Toplady)같은 칼빈주의자와의 기본적인 차이는 앞서 말했듯이, 웨슬리는 반복해서 선택이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조건적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톱레이디는 조건적인 선택과 행위에 의한 구원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었다. 왜 어떤 사람들은 버림을 받게 된 것인가? 웨슬리는 버림받은 것은 하나님의 예지 때문이 아니며,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명령 때문도 아니고, 심지어는 죄인들에게 그들이 필요한 은총을 주고자하는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뜻이 전달이 안 되어서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몇몇 죄인들이 버림을 받은 것은 자신이 말한 대로, 저들이 구원받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저들은 완강하게 은총이 주어진 것을 거부하며, 생명을 얻기 위해 구원자에게 나아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1739년 값없이 주시는 은총”(Free Grace)이란 설교를 펴냈던 초기에 칼빈주의자들과 논재을 계속하면서, 또한 1770년에 첨예한 논쟁을 거치면서 웨슬리는 이 논쟁은 필연적이기 하지만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웨슬리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복음의 온전함, 거룩한 사랑의 실재, 하나님의 성품이었다. 실로 동시대의 몇몇 사람들이 주장했듯이 예정 교리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명령인 거룩함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지만, 예정 교리의 가르침은 선한 행위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을뿐더러,” “고픈 자를 먹이고,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는 것 같은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를 하려는 강력한 동기를 잘라 버린다.

예정교리는 쉽게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을 간과할 수 있다. 한편으로 보면 예정교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선하고 악한 모든 사건의 작인이 되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훼손한다.

웨슬리는 자신의 설교 값없이 주시는 은총에서 예정교리를 신성모독이라고 언급했다. 예정교리는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짓되고 잔인하며 불의한 악마보다 더 악한 자로 표상한다.다시 말하지만,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은총을 거룩한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버림받은 자들에게 선하고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일수 있겠는가?

성서를 좀 더 주밀하고 민감하게 살펴보면 부드러운 사랑이 본성인 은혜가 넘치는 사랑을 지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진리의 지식으로 나아와 구원받기를 열망한다.(요 3:16)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떠나 다른 일을 하실 수 없다.

2) 하나님/아버지의 사역

웨슬리는 창조와 보전, 통치라는 하나님의 사역이 앞서 논의한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들과 밀접하게 관계된다고 보았다. 실로 세상의 창조는 흘러넘치는 풍요로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세상의 기초가 세워지기 전, 믿음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사랑의 자리는 있었다. 사랑은 영원부터 사랑의 대양인 하나님 안에 존재하였다.또한 웨슬리는 사랑을 창조의 근거요 이유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사랑이 인간의 창조에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랑이란 과정이나 발달단계로서 그 존재를 갖기 위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

창조자

창조와 관련해서 웨슬리는 때로 신성의 사역으로 언급했고, 또 다른 경우에는 특별히 아버지의 할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시작하는 구절인) 마태복음 6장9절을 주석하면서, 아버지를 모두에게 선하시고 은혜로우신 분, 우리의 창조자, 우리의 보존자, 우리 주님의 아버지, 주님 안에 있는 우리의 아버지...우주의 아버지, 천사들과 인간의 아버지로 지 했다.그러나 태어나지 않는 분은(창조자하나님) 관계도 없는 단자로 창조한 것이 아니고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아들을 통해 창조한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무로부터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주 하나님은 자신의 전능하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무로부터 존재하는 전체 우주를 불러냈다.웨슬리는 영원의 개념을 본질적인 신성으로 이해했다.

웨슬리는 하나님을 창조자로 고백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은 우연이냐 냉혹한 필연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목적에서 비롯되었으며,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원인이며 주님이라고 생각했다. 질서가 있고 목적이 담긴 창조는 두 종류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의 창조이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는 영역의 창조다. 웨슬리는 물리적인 우주를 염두에 두는바, 그 크기와 거리 때문에 인간의 감각으로 우주 전체를 인식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 창조란 용여를 사용했다.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창조된 모든 존재가 물리적 몸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물론 여기서 웨슬리는 지성적인 영의 존재로서 창조자와 같은 인간을 섬기는 천사를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영들이고 우리와 같이 혈육을 지닌 물질적인....존재들이 아니다.

이해와 감성, 자유로 옷 입은 천사들의 창조는 다시 한번 창조자의 선함을 보여줄 뿐 아니라 웨슬리가 존재의 질서로 언급하듯이 창조에 일정한 질서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웨슬리는 가장 낮은 지점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이르기까지, 땅이나 물의 가장 체계화되지 않는 분자에서 대 천사장 미가엘에 이르기까지 존재의 질서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존재의 질서에는 창조자의 다양한 기획들이 가득 채워져 있다. 웨슬리는 창조자의 사역은 하나가 또 다른 하나를 낳을 뿐 아니라 덜 탁월했던 것으로부터 좀 더 탁월한 것으로 진보갔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느리지만 점차 복잡하고 탁월한 것으로 진보를 가져오는 발전적인 질서의 양식은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단서인바, 웨슬리의 창세기 주석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점진적이면서도 느린 창조의 발전은 엄격한 위계적 질서의 방식으로 이해되어선 안 된다. 특별히 이것이 동물의 영역에 해가 된다면 더더욱 그렇다. 웨슬리는 동물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으로 빚은 피조물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면에서 기본적인 평등성이 존재의 종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감히 하나님께서 동물과 하나님의 자녀를 동일하게 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동물과 인간을 동일하게 바라본다는 주장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표현이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적으로 거짓이다. 왜냐하면 진리와 끊없는 은총을 지닌 사랑으로 자신이 지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피조물 인간을 특별히 즐겨 축복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주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였듯이 거룩한 하나님은 만물을 보존한다. 웨슬리는 이렇게 주석한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자신의 능력의 말씀으로 곧 그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한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창조의 보전과 유지는 선과 지혜로 특징되는 자연의 지속적인 활동이 된다. 웨슬리는 이점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우리의 아버지우리의 보존자는...매일 매일 그가 준 생명을 유지한다. 우리는 지금 매순간 그분의 계속적인 사랑으로 생명과 숨과 만물을 받는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셔서 모든 피조물의 관계, 연결, 의존돌보신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들의 체계를 구성하며 전체 우주를 형성한다.

주권자

창조자이신 전능자 하나님은 주권자이며 자유로운 분이다. 통치자로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고발하는 정의나 신성한 정의없이 행동한다. 다시 말하자면, 창조자인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만물을 내었다. 이 상황에서 주권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 이해된다. 이제 창조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살펴보자. 웨슬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사유들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자유를 요약했다. 하나님은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시간에 창조를 시작했다. 우주의 기간을 결정했고, 광대한 공간에 우주의 자리를 지정했으며, 우주의 요소들뿐 아니라 별들의 수를 고정시켰고, 피조물들이 살 지구를 창조했으며, 이해와 자유와 뜻을 지닌 체화된 영으로서 인간을 만들었고, 모든 나라가 등장하는 때를 정했으며, 각양 새들이 살게 될 시간과 공간과 환경을 조성했고, 약하건 강하건 존재하는 각각의 존재에서 몸을 입혔으며, 마지막에는 인간에게 다양한 정도의 이해와 지식을 주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창조와 관련된 자유와 주권은 구원에 속한 것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좀 더 전문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자유와 능력과 하나님이 실제 창조한 인간에게 여지를 주는 어떤 의미에서 제약된 자유와 능력은 구분되어야 한다.

통치자

첫 번째 역할인 창조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만물을 창조할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을 강조한다. 그러나 두 번째 역할인 통치자의 역할은 자유와 주권이 아니라 정의와 사랑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자인 통치자로 활동할 때, 하나님은 자신의 유일한 뜻과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단순한 주권자로서 활동하지 않고, 변치 않는 정의에 따라 만물의 공정한 심판자로서 활동하며 다스린다. 통치자로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본성 자체인 거룩함에 따라 변치 않고 활동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거룩함 안에서 인간은 자유롭고 책임 있는 도덕적 존재로 창조되었다.

도덕법

웨슬리가 창조자와 통치자의 역할을 관계시켰던 한 가지 방법은 도덕법과 관련해서였다. 창조자 하나님은 물리적인 세계를 창조했고, 전능자 하나님은 인간 안에 하나님 본성 곧 영원한 정신의 투영도덕법에 따라 도덕적이고 영적인 질서를 부여했다. 그러므로 거룩하고 정의롭고 선하신 도덕법이 창조된 도덕적 영적 질서의 본성으로 자리하게 되었다.슬리의 설명을 들어보자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법은 창조된 만물 안에 영존한다.” 다시 말하자면, 옳고 그름의 변할 수 없는 규칙인 도덕법은 만물의 본성과 생존, 그리고 존재자들의 서로를 향한 본질적 관계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때문에 도덕법은 창조된 질서 안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존재들은 이 도덕적 영역이나 차원을 분별할 수 있다. 하나님은 도덕법의 원인일 뿐 아니라 도덕법은 하나님의 뜻의 적절한 표현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분리되지 않고 일치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의 표현이요 거룩한 사랑의 법인 도덕법은 흔들리지 않고 계속된다. 도덕법은 영원한 정신의 모상이고 피조물과 그 안에 있는 관계를 통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도덕에 대한 관상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으로 알려지고 조명된 요소들, 곧 정의와 자비를 생각하게 할뿐 아니라 인격적이며 본질적인 하나님의 본성의 항구성을 생각하게 한다. 이 입장에서 볼 때 웨슬리도덕법의 냉정함과 하나님의 본성의 불변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당시 여러 신학자들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섭리적 수여자

세계의 통치자인 주 하나님은 창조의 세계를 통치한다. (해나 달과 같은) 생명이 없는 존재들보다는 피조물들을 돌보는 것을 하나님의 통치로 생각하는 웨슬리는 그 의미를 완전하게 설명하기 위해 섭리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돌봄은 기독교인들의 소원이 아니라 성서의 엄연한 가르침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웨슬리와 신학적으로 생각이 달랐던 이들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창조에 관심을 가진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모든 것을 창조한 지고의 존재인 하나님께서 통치자로서 개인과 사회의 작고 사소하고 일상적인 문제까지 관심을 가진다는 특별 섭리 개념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신론적 고전을 읽었던 당시 사상가들은 하나님께서 기본적인 법칙과 원리를 따라 세상이 돌아가도록 창조했다는 입장을 내놓았고, 이 주장에 기초하여 하나님께서 삶의 세세한 차원에서 개체 존재들을 향해 섭리적인 돌봄과 관심으로 사랑한다는 특별 섭리의 개념을 거부했다.

웨슬리는 1786년 출판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On Divine Providence)라는 자신의 설교에서 첫 번째로, 특별한 섭리를 거절하는 것은 성서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작은 일조차도 위대한 창조자와 통치자의 사랑의 돌보심 아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번째로, 이러한 입장은 분명 하나님의 자유와 활동을 반박함으로써 일반적 자연법칙 외에 기적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법을 지연시키든가 아니면 능력 있는 천사를 동원하여 자신이 원하는 때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예외를 만들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세 번째로 특별섭리를 배제하는 일반 섭리의 개념은 혼용되고 궁극적으로는 모순된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특별섭리를 배제한 일반섭리가 있기는 한 것인가? 모든 일반 섭리는 당연히 여러 특별섭리들로 이루어진 것 아닌가?웨슬리는 특별섭리를 삼중적인 원으로 이해했다. 1.이방인세계 --->2.기독교인 ---> 3.참된 기독교인

00 불행이 있다할지라도 세계는 무질서와 돌발적인 일들이 혼란스럽게 일어나는 곳이 아니. 궁극적으로 축복이 되는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는 뜻은, 자신의 존재의 중심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이 좌절로 끝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자와 통치자의 돌봄 아래 있다면, 하늘이나 땅에 있는 어떤 것이 당신을 해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당신 편에 있다면 아무도 당신을 해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는 친절함이 방패로서 당신을 덮을 것인즉

속성들에 대한 요약

거룩함과 사랑의 상관관계의 상황에서 전능한 하나님을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으로 이해으로써 웨슬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존재를 긴장이나 접속으로 기술했다. 달리 말하면, 이것이 웨슬리가 견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성향이다. 실로 거룩한 사랑은 초월(분리)과 내재(연합)를 구분하여 웨슬리의 신성을 이해하게 된다. 이 긴장이 하나님/아버지의 역할을 (정의와 거룩한 도덕적 법에 따른)통치자(선과 지혜와 은총)에 의한 창조자로서 보게 한다. 이렇게 이해될 경우 웨슬리의 구원론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율법과 은총의 생생한 접속은 하나님의 존재와 목적을 드러내는 보다 큰 접속으로 인식되어야한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실천신학에서 주밀하게 전개된, 거룩한 사랑과 은총의 기본적인 신학적 성향에 주의를 기울인다 우리는 하나님의 미와 선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거룩함으로 창조된 모든 존재들의 경외와 가능성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는 웨슬리 신학을 불필요한 철학적 추상과 사색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한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은 지혜롭고 선하며 공의롭고 영원하며 편재하고 전지하며 전능한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오늘과 내일: 우주론의 최근 동향들

웨슬리는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탐구: 자연철학 개요](A Survey of the Wisdom of God in the Creation: Or a Compendium of Natural Philosophy)의 출판에서 보여 주듯이 물리과학 특히 전문학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웨슬리가 이 책을 출판한 전체적인 목적은 창조자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었다. 달리 말하면, 게으르고 황량한 호기심을 즐기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선이라는 보이지 않는 영역을 기술하기 위해서였다웨슬리는 [자연철학개요]에서 성서의 해석과 과학의 발견으로 나누어 진리를 표현하고자 했다. 성서는 철학이나 천문학의 가르침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철학이나 문자적인 표현을 성서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정리를 한 웨슬리는 당시 과학이 발견한 것들을 자유로이 사용하여 창조된 존재들의 경외와 영광을 성찰했다. 웨슬리는 [자연철학개요]에서 거룩한 하나님은 하나의 별에 붙어있는 조그만 행성에 지나지 않는, 작고 흩어져 나가는 우리의 거처 지구뿐 아니라전체 우주의 주님이라고 주장한다.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의 발견을 온전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혁명](On the Revolutions of the Heavenly Spheres)이란 책에서 지구가 태양이 태양계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fms 우주론에서의 두 혁명은 20세기나 되어 일어난다. 예를 들면, 1924년 변호사였다가 천문학자가 된 에드윈 허블(Edwin Hubble)은 은하수 너머 다른 은하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별견했다 허블은 우주가 고정되지 않고 실제로 확장하고 있다는, 더 놀라운 결론을 내놓았다 이는 은하수들이 관측지인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허블의 연구에 토대를 둔 천문학자들은 만일 우주가 시간을 두고 실제로 확장해간다고 했을 경우 시간을 뒤로 돌려 생각해볼 때, 이전의 우주는 크기가 훨씬 작았을 테고 밀도는 훨씬 강했을 것임을 알게 되었다 특이한 점으로부터 시작해 우주가 팽창한다는 것은 (시계를 뒤로 돌렸을 경우) 아한 작은 우주의 개념을 날려 버린다. 실로 우주는 정확한 시간을 갖고 있고 처음 1초안에 나누어진 여러 순간들은 그 결정적인 차이가 지속된다는 처음으로 우주의 확장의 원인을 파악하려는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 시공간은 왜 시작된 것인가? 과학자들은 시간의 최소 단위 이전, 예컨대, 십의 마이너스 43승 이전의 기간인 플랑크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전자기(몇몇 방사능의 형식 그리고 아원자적 분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구성하는)약력,(쿼크와 같은 소립자들을 묶는)강력, 중력 이렇게 중요한 네 가지 물리학적 힘 가운데 셋이 양자물리학 이론으로 설명이 되지만, 중력은 양자물리학으로 설명이 되지 않으며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겨져 있다. 호킹(Stephen Hawking)은 초기 우주의 요소 가운데 팽창률과 같이 여러 요소가 정확하게 배열되어서 맨 처음 우주가 등장하게 된 것 같다는 주장을 멈추지 않았다. 호킹의 설명을 들어보자. 만일 빅뱅 후 일초 동안의 우주의 팽창률이 1000억분의 1만큼 작았더라면 우주는 현재 크기에 다다르기 전에 붕괴되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만일 팽창 한순간 똑같은 정도로 컸더라면, 우주는 너무 커져서 지금쯤은 완전히 공이 되었을 것이다. 만일 우주가 팽창한다면 왜 시작이 있어야만 하는지 물리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빅뱅의 순간에 우주를 창조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1998년 몇몇 천물학자들이 초신성의 폭발을 연구하다가 실제로 우주의 폭발 속도가 증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는 거의 고정된 이론이 되어버린 허블 상수와 함께 우는 평평하며영원히 팽창해야 한다. 과학자들은 암흑에너지로 알려진 어떤 힘이 이 팽창속도를 가속화시키는 원인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므로 우주의 운명은(빅뱅의 반대가 되는)대 수축(a Big Crunch)이 아니며 불의 소멸도 아니다. 오히려 점점 팽창하고 있는 우주는 노쇠하게 되고 더욱 차가운 상태가 되어 결국은 죽게 될 것이다. 현대과학자들과 우주론자들은 기본적인 모델 둘을 제시하여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빅뱅 이론의 모델에서 출발하는 호킹의 모델인데, 특이점 곧 시공의 시작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우주의 시공의 차원은 유한하지만 경계가 없다. 마치 크기에서는 한계가 있지만 시작점이나 끝점이 없는 것과 같다. 호킹의 설명을 들어보자. 시공의 범위가 유한 할 수 있다. 그러나 경계나 가장자리를 구성했던 특이점이 없다. 시-공은 두 개 이상의 차원을 지닌 지구 표면과 같다. 지구 표면은 범위가 유한하지만 경계나 가장 자리를 가지지 않는다. 이 모델에 기초해 보면 창조의 순간도 없고 창조자가 창조할 순간도 없다. 왜냐하면 우주는 자기-포용적이기 때문이다. 빅뱅의 통찰에 의존하고 있는 둘째 모델은 우주가 양자의 파동이나 또 다른 우주로부터의 블랙홀에서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양자의 진동을 지배하고 있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적성 원리는 빈 공간이 양자의 규칙이 정한시간 한계 내에서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에너지 묶음들로 살아 있다고 가리킨다. 한 묶음의 에너지가 떨어져 나와 급속히 팽창했고 현재의 우주가 되었다.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 존 그리빈(John Gribbin)우주의 모든 블랙홀은 또 다른 우주로 이어지는 통로이며 우리의 우주는 다른 우주의 블랙홀이 붕괴되어 광대한 시공 안에 거품으로 이루어진 우주들이 무한의 대양을 만들어 내면서 형성되었을 수 있다. 프리드 애덤스(Fred Adams)와 다른 학자들은 호수의 거품들과 같이 여러 우주들이 존재하는 하나의 우가 아니라 다 우주를 주장한다. 애덤스의 설명을 들어보자 물리학 법칙들을 통해 우리 우주의 탄생을 설명할 수 있다면, 동일한 법칙들은 동일한 기제를 통해 전체적으로 수많은 우주의 탄생을 설명할 수 있다. 다 우주를 궁극적 기준으로 삼아 우주를 호수 안에 있는 하나의 거품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호수조차도 보다 큰 구조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것인가? 만일 오늘날 웨슬리가 살아있다면 우주론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최근의 모델들에 대해 무엇이라 대응했을까? 세계는 창조자의 말씀으로부터 존재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던, 영국의 사제 웨슬리는 유신론자로서 우주(시공)에 특이점의 여지가 없고, 때문에 시작도 없고, 창조자도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 호킹의 이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자연철학 개요]에 나타난 사상에 기초해 볼 때 웨슬리가 빅뱅이론을 포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양자 파동이나 블랙홀 같은 최근의 표현들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예컨대, 이러한 과학적 이론의 발전은 창조자가 모든 존재를 창조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이며 과정으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주가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고 경외로운 것이라면 그 우주를 창조한 분도 그렇게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고 경외로운 분이라는 것이 웨슬리의 생각이다.

그러나 자신의 전제와 가정에 기초할 때 웨슬리는 하나님의 실재를 고려하지 않는 자연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2장 거룩한 사랑으로 창조되었으나 본성상 타락한 인간

유장환교수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로우심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안에 나타났다. 웨슬리는 이 창조된 질서가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적 활동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지극히 높으신 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할 때, 영원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조성하기 전 어떤 사람으로부터 허락을 받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아주 기본적인 관계와 상호 책임이 타나나기 전에 주권적인 창조 활동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신학을 논할 때에 다른 곳에서도 논한 것처럼 값없이 넘치도록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인 하나님 홀로의 활동이 책임을 논하기에 앞서 먼저 요구되는 조건이다.

복잡한 존재로 창조된 인간

웨슬리가 어떤 의미에서 창조의 절정인 인간의 창조를 생각했을 때 염두에 둔 것은 인간 존재의 단순성이 아니고 복잡성이었다. 우선 남자와 여자는 우연적 존재로서 창조된 질서에 뿌리를 둔다. 몸을 가진 인간은 육체의 요소로 구성되며 형성된다. 웨슬리는 흙, 물, 공기, 네 요소로 구성된 이상한 복합물이라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인간 존재의 물리적 본성을 간과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리적 본성이 인간의 본질을 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웨슬리는 복합적인 피조물인 인간이 몸뿐 아니라 영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보았다. 인간은 흙으로 지은 지일 뿐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 영이라고 생각했다. 과 물질로 합성된... 인간은 영과 물질이 연합하는 동안 둘 중 하나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활동해야 한다는 원법에 의해 제정되었다.고 기록한다.

웨슬리는 철학적으로 말해서 독립적이고도 지속적인 영혼의 실재를 긍정함으로써 인간이 단순이 몸이라는 입장을 피했다. 몸을 입은 영으로서의 인간은 창조 질서에 뿌리를 두고 있고 시공의 제약을 받고 있다. 그러나 영이 하나님의 형상 곧 영광의 하나님의 타락할 수 없는 형상으로 창조된불멸의 영이기 때문에 영은 수많은 방식, 예컨대, 지성적 삶의 형식 요인에 참여함으로써, 도덕적 차원을 지각함으로써, 그리고 경배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물리적 몸의 존재가 갖는 제약들을 초월할 수 있다. 웨슬리는 인간의 영은 보이는 세계의 어떤 영역보다도 더 높은 질서에 속하며 탁월한 본성으로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해체나 부식하지 않고 지속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은 거룩한 사랑의 상징인 관계적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웨슬리 연구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랑이다. 따라서 창조할 때 인간은 사랑으로 가득했다. 사랑이 인간의 모든 성정과 사유, 말과 행동의 유일한 원리이다.” 라고 기록한다.

지극히 높으신 이와 고유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아담과 하와는 고요한 평화와 은총, 순수함의 열매를 바르게 향유했다. 또한 웨슬리는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라고 주장한다. 더구나 사랑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과 하나이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질적 형상, 정치적 형상, 도덕적 형상의 세 영역으로 나누어 좀 더 세밀하게 탐구했다.

먼저 본질적 형상은 자기-운동의 원리를 포함하며 영혼의 영적 본성과 불멸성으로 구성된다.하나님이 영이듯이 인간도 영이다.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하나의 영이다. 더 나아가 인간이ㅡ 삶을 특징짓는 비물질적 원리나 영적 본성에 이해, 의지, 자유가 부여된다.

자연적 형상의 첫 번째인 이해에 대해서 웨슬리는 절대적인 기준에서든 ... 다른 것과 비교를 통해서든 거짓과 진실을 분별하는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웨슬리는 인간의 이해가 하나님의 이해와 구분될 수는 있지만 본래 피조물은 피조물로서 완전하게 모든 사물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고 오류 없이 진리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의지에 대해서 웨슬리는 감성과 열정, 기질의 별자리를 염두에 둔다. 이들 모두는 창조 시에 지고로 선하신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다. 웨슬리는 아담의 의지는 어떤 잘못된 편견도 없었고 모든 열정과 정서가 오류가 없는 이해의 안내를 받아 오직 선한 것만을 포용하며 안정적이고도 일관되게 정상이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웨슬리는 정서(affections-감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발휘하는 의지)이라는 복수 형식을 사용하고 있지만 어떤 면에서 창조시 인간의 감성은 하나뿐이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이었다. 사랑이 인간 영혼의 모든 영역을 가득 채우고 어떤 경쟁도 없이 인간을 차지하였다.달리 말하면, 아담과 하와의 이해가 바로 진리를 향하듯이 의지 또한 고유하게 하나님의 사랑의 선함을 향한다.

만일 마지막 선물인 자유(Liberty)이해와 의지의 은사에 더해지지 않는다면, 이해와 의지는 쓸모없는 것이 될 것이다. 자유가 없는 아담은 흙 한줌이나 대리석 덩어리가 창조주를 예배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을 것이다.따라서 하나님의 자연적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할 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계약적 관계가 가능한 진정한 동역자를 원했을 뿐아니라 자유 안에서 일어나고 커 갈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속에서 자신의 완전함과 목적을 발견하게 될 존재를 원했다. 선과 목적한 바를 선택할 수 있는 도덕적이며 영적인 자유가 없었더라면, 아담과 하와는 목재처럼 덕이나 거룩함을 행할 수 없었을 것이.

또한 이처럼 자유가 사랑과 행복 속에서 생겼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진리와 선함에서 벗어나 오용될 수도 있다. 웨슬리는 인간이 냉담하게 처음 상태를 유지하거나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스스로 원하는 것을 했다. 인간은 선택의 순간에 만물 안에서 하나님을 선택해야만 했다.

아담의 의지는 어떤 잘못된 편견도 없었고, 모든 열정과 감성이 오류가 없는 이해의 안내를 받아 안정적이고도 일관되게 정상이었다. 본래적 선의 정도에 맞게 오직 선한 것 곧 온전히 선한 것만을 포용했다. 마찬가지로 아담의 자유는 그의 이해의 안내를 받아 온전하게 선택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두 번째는 정치적 형상이다. 정치적 형상은 인간이 서로가 또 하나님과 관계될 뿐 아니라 자연 자체에, 또한 다른 피조물과도 관계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웨슬리는 창제기에 나오는 언어를 사용하여 정치적 형상의 특성을 정의하고 설명하면서 인간에게 바다의 고기와 공기 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주목했다.

그러나 창조질서에서 인간의 지위는 지배와 권위 혹은 이로 인한 위계의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넘치는 은총의 중재라는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다. 성서의 말하는 지배는 일방적이거나 관심을 주지 않는 지배가 아니라 함께하는 지배이다. 낙원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인간을 통해 다른 피조물로 흘러갔고, 인간은 창조자와 전체 창조 세계를 소통하는 위대한 통였다.

마지막으로 도덕적 형상은 하나님이 형상 가운데 인간이 창조된 것은 일반 사랑뿐 아니라 거룩한 사랑이었다는 결정적 진리를 밝혀 준다. 에베소서 4장 24절과 골로새서 3장 10절사용하여 웨슬리는 인간의 창조된 상태와 진정한 경건의 본질이란 입장에서 도덕적 형상을 전개하고 있다. 원죄에 대한 논문에서 웨슬리는 이렇게 진술한다. 새사람 혹은 마음에 진정한 경건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도덕적 형상을 따라 창조했다. 도덕적 형상이란 인간이 처음 창조될 때 의와 진정한 거룩함으로 창조된 형상이다.

웨슬리는 자신의 정체적인 신학에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이 관계되어 있음을 알고는 다음 세 가지 이유 도덕적 형상을 주목했다. 첫째, 도덕적 형상은 인간과 다른 창조의 영역을 구분하게 한다. 둘째, 도덕적 형상이 중요한 것은 죄의 가능성을 위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도덕적 형상이 죄의 파괴적인 결과를 통해 곡해되고 왜곡될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이해될 때 도덕적 형상과 이에 수반되는 자유는 인간의 영화나 타락의 가능성을 예시한다. 셋째,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은 도덕법과 밀접하게 관계된다. 창조의 순간에 하나님의 은총과 도덕법이 명백하고도 풍요롭게 현존했다. 웨슬리의 설명을 들어보자. 자유와 지성을 가진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처음 난 자녀들에게 주었던 동일한 법을 주었습니다...진정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가락으로 이 법을 사람의 심령에 새겼습니다. 이법은 저 멀리 있거나 이해하기 어렵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법은 언제나 가까이 있어 하늘의 태양처럼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도덕법은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 곧 의와 거룩함에 달린 중요한 창문으로서 하나님의 본성과 본래 창조된 인간의 본성의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다.

웨슬리에게 도덕법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기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인간의 온전한 관계를 표현하는 표준이고 은총과 의(와 죄)의 존재 이유를 드러내는 표준이다.

또한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으로 인간이 창조된 것이 은총에 의한 것일 뿐 도덕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인식한다면, 이때 은총은 무정형이 되어 도덕법이 적절하게 표현하는 하나님의 생각을 담은 고유한 형식을 갖지 못하게 된다. 웨슬리는 구원론에서 은총은 언제나 범화된은총으로 평가 가능한 상황에서 생겨 꽃을 피우게 된다. 따라서 은총은 하나님의 도덕법으로 조명되며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인간을 초월하는 표준이다. 도덕법과 은총 중에도덕법이 없는 은총은 웨슬리가 그토록 분명하게 한탄했던, 추정과 자기-의지, 자기-기만과 반-율법주의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

최근 평가에서 웨슬리의 실천신학이 갖는 탁월성은 나누어진 것을 함께 묶어 낸다는 점이다. 실로 웨슬리는 도덕법이 올곧은 정직으로서의 거룩함의 특성을 표현할 뿐 아니라, 창조되었고 지금도 창조되고 있는 만물의 지속적인 생존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한편으로 도덕법은 기본적인 거룩함을 엮어낼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건강한 관계를 엮어 낸다.

인간의 타락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은혜로우시며 선하시다면, 또한 명시된 대로 인간은 어떠한 결여도 없이 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면, 어떻게 악이 세상에 들어왔는가?

웨슬리는 이 중요한 물음에 대해 이사야 14장 12절 이하에서 타락한 천사로 등장하는 루시퍼를 예를 들어 대답한다. 예를 들면 웨슬리는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이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악은 아침의 아들, 루시퍼로부터 왔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를 오용하여 악을 창조 세계에 들여온 처음 존재였습니다.이미 체계화된 교회 전통을 따라 웨슬리는 교만이란 이름으로 루시퍼의 죄의 본질을 인식한다. 제1 대천사장 루시퍼는 처음에 자기 스스로를 너무 높이 생각하려는 자기-유혹에 빠지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자연스럽게 유혹에 자기를 내주었다. 먼저는 교만에 내주고 다음으로는 자기-의지에 내주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몇 가지 중요한 입장에서 인간의 타락과 루시퍼의 타락을 구분했다. 예컨대 인간의 타락은 활동적이고 외향적인 악의 힘의 유혹에 넘어간 경우라면 루시퍼의 타락은 온전히 선한 창조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경우이다. 웨슬리는 악마는 스스로 유혹에 빠진 것이고 인간은 스스로 유혹에 빠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탄의 악

자기유혹 ---> 교만---> 자기 의지---> 악한 기질과 감성

인간의 악

외부의 유혹---> 불신앙---> 교만---> 자기 의지---> 악한 기질과 감성

사탄의 자기-유혹이 교만에서 일어난다면, 아담과 하와의 불신앙,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함, 깨어진 거룩한 사랑의 관계는 외부의 유혹에서 일어난다. 웨슬리는 불신앙을 악의 근본 요인으로 보고 이렇게 선언한다. 바로 여기서, 곧 불신앙에서 죄가 시작되었다. ‘여인이 속임을 당했고, 거짓을 믿고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악마의 말을 더 신뢰했다.웨슬리는 히브리서 3장 12절을 주석하며 이렇게 주장한다. 불신앙은 일만 악의 아버지다. 불신앙의 본질은 우리의 생명과 거룩함과 행복의 근원이 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다

웨슬리에게 인간의 죄의 본성 곧 환원할 수 없는 본질은, 종종 잘못 생각하는 것처럼,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왜곡된 불신앙이다. 그러므로 소외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부족이 교만과 자기-의지라는, 후행하는 악의 진정한 기반이다. 소외와 불신앙으로부터 교만과 자기-의지가 나오고, 소외와 불신앙으로부터 모든 악한 기질이 나타난다.

타락의 결과

지극히 높으신 이를 저항하고 죄로 타락함으로써 인간은 여러 해로운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몸과 영혼으로 구성된 복합적 존재인 아담과 하와는 육체적이며 영적인 죄의 결과를 경했다. 먼저 육체적인 죄에 대해 말한다면, “이전에는 고통과 죽음이 없었던 몸에 선과 악을 알게 된 후 죽음이 임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타락 이전에는 창조자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지금은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고 그 결과 몸은 썩고 죽게 되었다. 둘째, 영적인 타락의 결과 육체적인 타락의 결과보다 더 끔찍한 것으로 나타난다. 특별히 웨슬리는 아담이...자기와 후손에게 고통과 해산의 수고, 슬픔뿐 아니라 시간적이며 영적이고 영원한(하나님의 은총이 없이) 죽음을 가져왔다.고 주석한다. 다시 말하자면, 죄를 짓는 순간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인간의 본래적인 의와 하나님과의 연합을 잃게 되었기 때문에 아담은 영적으로 죄 안에서 죽게 되었다.이로써 그의 영혼은 하나님께 죽게 되었다.그러나 육체적이며 영적인 죽음이 죄의 열매라면 어떻게 앞서 말했던 웨슬리의 영혼 불멸의 개념을 이해해야 할까?

초기에 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설교에서 웨슬리는 대답을 제시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아담의 타락 때문에 육체가 죽게 되었고 영혼은 죽을 수 없는 것을 빼고는 그 힘을 발휘하는데, 변화를 경험하였다.달리 말하면, 웨슬리는 여기서 영혼이 죽게 되었을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웨슬리가 말하는 영혼의 죽음은 은유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예컨대 영혼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의미에서 죽은 것이다. 렇지만 영혼은 계속 존재한다. ===영혼의 근거인 하나님의 생명과 분리되고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를 깨트린 아담은 자연이 창조될 때 받은 하나님의 은총을 상실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인간을 용납하지 않았고, 인간은 더 이상 자유로운 모습으로 지극히 높으신 이의 풍요로운 축복을 향유하지 않았다. 은총의 상실과 더불어 하나님의 형상도 상실하게 되었고 인간은 진정으로 저주받은 상태에 남겨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아담과 관련한 웨슬리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요약 본질적, 정치적, 도덕적 형상이라는 세 차원에서 논의하는 것이 최상이다. 먼저, 처음 차원인 본질적 형상이 타락으로 크게 망가지기는 했지만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아담의 이해는 작용하기는 했지만 혼돈과 오류상태에 있었다. 예컨대, 거짓을 진리로 여겼고, 진리를 거짓으로 여겼다. 오류는 무지로 이어졌고 증폭시켰다.마찬가지로 아담의 의지는 슬픔, 분노, 미움, 두려움, 수치와 같은 악마의 격정에 사로잡혀 타락하게 된 결과 의지의 안내자인 이해가 맹목적이 되어 많은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와 마찬가지로 의지는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 의지는 곡해되고 품격이 떨어진 형식으로 남게 되었다. 예컨대, 의지는 더 이상 의지의 최고 목표요 목적이며 가장 고매한 목적이 되는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을 향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에 우상의 욕망과 감성의 홍수에 휩쓸려 계속해서 준-궁극적인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웨슬리가 이해의 타락과 의지의 타락의 관계를 분멸하였듯이 의지와 자유의 관계에서도 유사한 관계를 보았다.

이제 품격이 떨어진 의지의 타락으로 자유는 덕과 함께 사라졌다. 자유는 관대한 주인 대신 무자비한 폭군 아래 높였습니다. 덕의 주인이 악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정치적 형상도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크게 모호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인간이 창조자와 전체 짐승 세계 사이의 소통의 통로였지만 이러한 축복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당연히 창조자와 짐승 세계의 소통이 단절되었음을 주목한다. 분명코 인간이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의 중재자가 되는 대신 저주가 되었다.

웨슬리는 도덕적 형상이 지고의 존재의 의와 거룩함을 반영하는 하나님의 주요 형상이기 때문에, 관계에 있어서 가장 큰 분열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써 해결되어야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한편으로 웨슬리는 본질적이고 정치적인 형상이 부분적으로 오염되었거나 상실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 도덕적 형상은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은 도덕적인 형상인 의, 참된 거룩을 상실했다.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을 상실한 아담은 부분적으로는 교만, 악의, 다른 악한 성정이라는 악마의 형상에 빠졌고 또 부분적으로는 짐승의 형상에 빠져짐승의 격정과 타락의 욕망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갖게 된 하나님과의 왜곡된 관계는 거룩함과 사랑이 자리했던 그의 마음의 성정과 모든 사유와 활동을 향해 기본적인 성향과 기질을 함께 구성했던 성정에 영향을 미쳤다. 달리 말하면, 모든 삶과 거룩함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변화는 필연적으로 기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웨슬리는 타락한 이해와 의지의 노예가 된 결과 인간이 완전할 때 흘러 넘쳤던 행복이 뒤집어 지게 되었습니다.”라고 기술한다. 간단히 말해 아담과 하와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들이 거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의 마음은 비열함이 지배하게 되었고, 고통을 주는 감성으로 넘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순결함이 상실되었다.

원죄

교회 전통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들어온 육체적이며 영적인 유전으로 원죄교리받아들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원죄교리에 대한 종교 강령을 미국 감리교인들을 위해 편집하면서 마지막 구절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임하게 되었다는 마지막 구절을 생략하였다. 이처럼 편집상의 변화는 원죄교리에 대한 웨슬리의 강조가 죄책감이 아니라 어떻게 이해되든 타락한 본성이 후손에 전달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어떤 경우든 웨슬리에게 원죄교리는 매우 주요했고 1756년 큰 분량으로 원죄교리: 성서, 이성, 경험에 비추어라는 논문집내놓았다.

아우틀러에 따르면, 1750년대 말 웨슬리는 이미 전적 타락을 말하는 라틴 전통과 죄를 질병으로 보았던 동방정교회 입장의 종합을 추구하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웨슬리는 카르타고 공의회와 제2 오렌지 공의회의 전통을 따랐고, 원죄의 내용이 타락에 있지 않고 모방에 있다고 보았던 펠라기우스의 입장과 거리를 두었다.

여러모로 테일러와 당시 이신론자들과 스스로를 구분했던 웨슬리는 무슨 이유는 변명에서건 이렇게 중요한 원죄교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단자들일 뿐이라고 선언했다. 웨슬리는 신앙의 유비에 호소했고, 교회의 중요하고 근본적인 성서적 교리 세 가지는 죄,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 이에 따른 거룩함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신생의 기반은 인간의 본성의 전적인 타락이다.사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와 마음과 삶의 거룩함과 더불어 원죄의 교리는 웨슬리에게 너무도 결정적이어서 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원죄가 전해지는가?

웨슬리는 어떻게 원죄가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하여 온 인류에게 전해지는가에 대해 생각할 때는 철저하게 잘 정리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따랐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시편 51편 5절을 시편 기자에게만이 아니라 온 인류 전체에 적용한다. 이제 우리 모두는 악으로 형성되었고 우리의 어머니들이 우리를 죄 가운데서 잉태했습니다. 우리의 본성을 힘과 능력에 있어서 온전히 타락했습니다.다시 말한다면, 아담은 아담 스스로가 그런 것처럼 죄가 가득하여 불결하고 약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비천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아들을 출생하였다. 자신과 같이 몸과 영혼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뿐 아니라 죄책과 역겨움과 퇴보와 타락한 인간으로 출생하였다.

아담이 자신의 형상으로 아들을 낳았다는 우울하지만 중요한 진리는 강조해서 반복되는 다음 문구로 인해 독자에게 강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예컨대, 앞 구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형상과 반대되는 것으로 자신의 형상을 따라를 사용하고 있다. 이 표현은 분명 아담이 창조된 상태와 셋이 출생한 상태가 차이가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불신앙과 교만, 저항은 아담이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시킬 뿐 아니라,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고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아담의 타락한 형상을 드러내면서 후손에게 이어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웨슬리는 아담이 인간의 대표자로서 그가 한 일의 결과가 자신 안에서 그치지 않고 그가 대표하고 있는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로마서 5장 19절에서는 이렇게 주장한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여러 사람 곧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 이 구절은 아담의 죄의 유전으로부터 아무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예증하고 있다.

워드와 하이젠레이터는 웨슬리가 1762년 울너의 영혼의 참 기원을 읽은 후, 영혼 출생론의 입장을 갖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웨슬리는 “(아담의) 후손들의 몸뿐 아니라 영혼도 우리의 처음 아버지로부터 온 것으로 후손들에게 계속해서 이어졌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아담 안에서 아담과 더불어 타락했기 때문에 타락한 존재로서의 출산이 필연적으로 타락한 영혼을 전달해 준다.

그러나 웨슬리는 아우구스티누스와는 달리 출산의 과정 자체와 죄를 너무 밀접하게 연결시키려하지 않았다. 웨슬리는 우리는 죄로 오염된 본성을 자녀들에게 전달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죄를 범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원죄의 결과

웨슬리는 여러 저술에서 아담이 인간에게 유산으로 넘겨준 영적 유산을 탐구했다. 예를 들면, 웨슬리는 1759년에 쓴 원죄란 설교에서 자연적인 상태에 있는 인간, 곧 하나님의 은총의 도움을 받지 않은 상태의 인간을 언급한다. 그리고 이전에 다윗 왕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남자와 여자가 진리와 거룩함을 떠나갔기 때문에 의인은 없으며 한 사람도 없다.”주장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이 세상에 불신앙으로 특정되는 무신론자들로 태어났다. 우리는 본성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면식도 없습니다.달리 말하면, 은총에서 떠난 우리의 자연적인 이해는 하나님의 인식에 이르지 못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무신론과 우상숭배는 교만으로부터 일어난다. 인간은 스스로를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보다 더 높은 것으로 생각하거나 그들이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영광스런 무엇인가를 얻은 것처럼 생각한다.웨슬리의 자기-만곡으로서의 죄 개념은 루터의 스스로를 향해 뒤틀려진 자기 개념과 비슷하다.

아담이 물려준 유산 가운데 세 번째는 자기-의지이다. 사탄은 우리 마음에 자기-의지로 자신의 형상을 심어 놓았다.

여기까지 무신론, 교만, 자기 의지의 형식으로 나타난 원죄는 사탄의 악을 반영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다음 단계에서 우리는 아담이 죄의식조차 느끼지 않는 우상숭배에 빠진다. 예컨대, 세상의 사랑에 빠진다.고 말했다. 요한 1서 2장 16절을 주석하면서 육체의 정욕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세 요인으로 원죄의 네 번째 단면을 전개한다.

그러므로 불신앙(무신론), 교만, 자기-의지, 세상의 사랑은 모든 면에서 인간이 아담과 하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다. 다시 말하면, 웨슬리는 아담이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을 상실하게 되어 자연적 형상과 정치적 형상이 아주 희미하게 된 이후 이 유산은 그 후손에게 이어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하나님의 은총이 없다면 현재 인간의 영적 상태는 어둡고 황량하다고 기술하는 것이 적절하다. 웨슬리는 자신의 원죄교리에서 인간에게 던져진 도덕적이며 영적인 심연을 표현하기 위해 최상의 부정을 사용한다. 인간은 본성상 모든 악으로 가득한가? 인간의 영혼은 전적으로 타락했는가? ...이것을 인정하라 그리하면 여러분은 아직 기독교인이다. 그러나 이를 거부한다면 여러분은 한낱 이단에 불과하다

웨슬리는 다른 문헌에서도 전적 타락의 주제를 계속해서 다루면서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에서 여러분은 모든 능력, 영혼의 능력이 타락했고, 전적으로 타락하여 모든 기반이 정도에서 떠났다.”라고 논평했다. 인간의 마음의 기만이란 설교에서도 인간 마음의 사유의 모든 상상이 악하고 악할 뿐이며 계속해서 악하다.고 하였다. 또한 웨슬리는 원죄에 대한 논문에서 본래적 의로움의 결핍죄로의 본성적 성향이란 말로 인간 본성의 타락을 표현한다. 또다른 글들에서 웨슬리는 은총을 떠난 원죄의 깊이와 넓이를 기술하기 위해 (1)불법과 죄로 죽은”, (2)“불경건과 불의”, (3)“절망적으로 악”, (4)“지속되는 악”, (5)"전적 타락과 부패와 같은 문구들을 사용하고 있다. 셀은 웨슬 리가 사도바울,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칼빈이 걸어갔던 발자취를 따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서방 전통과는 달리 동방 교부들은 전적 타락이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동방교부들은 아담과 하와가 뒤따라오는 은총에 응답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예컨대, 동방 기독교 전통은 신-인 상호작용 안에 상호협력은 타락이후에도 남아 있다고 고백한다.

웨슬리와 동방신학자들의 신학은 인간이 은총을 받고 응답할 수 있도록 선물을 받았다.는 유사한 결론에 이르다. 그러나 이들의 유사한 구원론적 입장은 다른 시기와 다른 통로를 통해 이룩한 결론이다. 분명 웨슬리는 모든 은총에서 떠나 인간이 원죄로 인한 완전한 타락을 주장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먼저 주도권을 갖는 은총(선행은총에 대한 강조)으로 활동해야 했을 뿐 아니라, 어떤 책임이나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기 전 죄와 타락의 결과를 걷어 내기 위해 회복을 가져오는 은총의 주권적 원인으로 활동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간단히 말해서 많은 동방 신학자들에게 타락은 적절한 자리에서 응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 놓는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따랐던 웨슬리와 같은 이들은 하나님께서 먼저 주권적으로 선행 은총을 통해 이전에 향유했던 관계를 어느 정도 인간에게 회복시켜 주지 않는다면 타락한 결과가 너무 커서 구원의 길을 따라 응답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보았다.

선행은총 Prevenient Grace

웨슬리는 원죄에 대해 어떤 동방 교부들과는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던 반면, 은총에 대해서는 아우구스티누스와 16세기 종교개혁자들과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웨슬리가 전적 타락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 전혀 하나님의 은총이 없는 자연인을 의미하고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의 도움을 받지 않은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을 배운다.그러나 이러한 인간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웨슬리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이라는 설교에서 선행은총의 중심 본문이 되는 요한복음 1장 9절을 이용하여 이렇게 덧붙인다. 이렇게 악한 본성의 상태로 있는 인간은 없으며, 성령을 소멸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은총에서 완전히 떠난 인간은 없다. 살아 있는 인간 중에 저속하게 말해 자연적 양심이 전혀 없는 인간은 없다. 그러나 이것을 자연적인 것이라 하지 않고 좀 더 정확히 말해 선행 은총이라고 한다.”, 모든 사람은 조만간 혹은 약간은 세상에 난 모든 사람들을 비추는 어느 정도의 빛과 가냘픈 빛줄기를 갖고 있다.”(1;9) 엄프리 리는 웨슬리에게 자연인이란 실제 남자와 여자와는 상응하지 않는 논리적 추상이었다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그는 이 세계에서 인간은 자연인이면서 또한 하나님의 선행은총으로 존재한다.”고 기술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에 인간이 계속해서 의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원죄의 영향이 여전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전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성서와 전통에 호소함으로써 자신의 선행은총 교리를 지지했다. 예컨대 근거자료로서 요한복음(그 빛이 세상에 오셨으니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시다.(요1:9)영국 국교회 39개 종교강령을 사용했다. 선행은총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기초한 선행은총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이 약간은 인간의 부름 이전에 선행은총을 갖는다.”고 선언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행은총은 지리와 문화에 제약받지 않고 모든 인간에게 값없이 주어지며,인간의 능력과 공로에 기초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값없이 주시는 은총이다.선행은총은 배타적이 아니라 포용적이며,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값없이 주어진 은총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웨슬리는 처음 은총의 희미한 빛은 구원으로 안내하는 입구이다.

선행은총의 유익을 평가하지 전에 먼저 웨슬리의 글 속에서 선행은총의 이중적 사용을 찾아냈던 아우틀러의 분별을 살피는 편이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선행은총의 첫 번째 의미는 좁은 의미로 이해한 것인데, 칭의 은총과 성화 은총 이전의 모든 은총을 의미한다. 이 상황에서 선행이란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 죄인들을 책임적이게 하는 전체적인 죄인의 조명뿐 아니라 성령의 사역으로 일어난 죄에 대한 확신을 포함한다. 두 번째 의미는 광의의 의미에서 이해한 것인데 회개은총, 칭의 은총, 신생은총, 혹은 성화은총과 같이 모든 은총 안에서의 인간의 응답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행적 활동을 강조하는 모든 은총을 선행은총으로 본다.

모든 은총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우선성이라는 광의로 인식된 선행은총은 종교 강령10조가 선언하듯이 신-인 협력, 곧 진정으로 함께하는 활동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이란 설교에서 가장 잘 표현된 신-인 협력은 조심스럽게 이해어야 한다. 한 예로 만일 광의로 협력의 배경에서 선행은총이 모든 신-인 활동의 배타적인 패러다임이라면 웨슬리 신학은 신-인 협력의 개념을 넘어설 수 없는 것으로 잘못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본질상 하나님의 우선성 개념만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웨슬리의 이해를 다 담아낼 수 없다. 오히려 정확히 읽어보면 하나님의 활동과 인간의 활동을 포함하고 있는 신-인 협력적 패러다임은 인간의 공로 없이 하나님의 활동만을 강조하는 개신교(바울)의 입장이 동일하게 받아들여지는 좀 더 큰 접속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상호-협력적 은총뿐 아니라 상호 협력적 은총과 값없이 주시는 은총의 접속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결국 넓은 의미의 선행은총은 이 두 배경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값없이 주시는 은총 또한 하나님의 활동의 우선성을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웨슬리가 자신의 글에서 선행은총이란 용어를 사용할 경우 넓은 의미의 선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좁은 의미의 선행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선행은총은 앞서 오는 것으로 스스로를 넘어 구속적 은총을 지칭한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칭의 은총과 신생의 능력을 지시한다. 간단히 말하면 좁은 의미에서 선행은총은, 지극히 높으신 이로부터 오는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엄밀히 말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지 않는다.

선행은총의 혜택 (Prevenient Grace)

웨슬리는 자신의 글에서 타락의 끔직한 결과를 완화하는 선행의 은총으로 인간에게 가져다준 5가지 혜택(Charles Allen Rogers)에 대해 이야기한다.

먼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기본 지식> 로마서 1장 19절에 대한 주석에서 웨슬리는 하나님의 속성이란 형식으로 표현된 기본적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성령의 선행적 역사로 모든 인간에게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이 인식은 특별계시와 상관없는 보편계시이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이 인식이 자연신학의 기초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학자들은 자연신학이 나타나는 듯 보이지만 은총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서둘러 주장했다.

둘째, <도덕법에 대한 각인> 하나님의 은총이 없는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것이기 때문에 창조 시에 마음에 새겨져 하나님의 형상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는 타락 후에 하나님은 인간을 이처럼 완전히 절망스런 상태에 남겨두지 않고 하나님의 도덕법에 대한 인식을 인간을 마음에 새겨 주어서 길을 열어보였다.

셋째, <양심> 웨슬리는 양심의 궁극적 기원이 전능자 하나님이라고 밝힌다. 거부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 안에 인간의 격정과 행동을 인정하거나 정죄하는 내면의 심판자로서 양심을 주었다는 것이다.웨슬리는 양심이란 설교에서 양심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런 성품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선물 이라고 주장한다.

넷째, <은혜로이 회복된 자유의지의 측정> 웨슬리는 여러 면에서 개신교 종교개혁자들과 유사한 원죄교리를 가르쳤기 때문에 인간이 자연적 자유의지를 소유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부인했다. 달리 말하면, 은총이 없는 인간은 죄 덩어리일 뿐이다. 그러나 동방정교회와 마찬가지로 로마카톨릭은 자유의지가 타락으로 말미암아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멸되거나 상실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 그러나 웨슬리가 로마가톨릭의 전통을 따라고 또 다른 한편으로 비텐베르크와 제네바의 종교개혁 전통을 따름으로써 반-펠라기우스주의와 결정론로부터 자신의 신학을 구별하게 한 것은, 구원론적으로 말해 성령에 의한 회복이 없이는 자유롭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상당한 정도의 자유의지가 성령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회복된는 고백이었다. 1752년 예정론 성찰나는 자유의지를 인류의 현재 상태에서 이해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세상의 모든 인간을 깨우치는 초자연적 빛과 함께 모든 인간에게 초자연적으로 회복된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가 있음을 주장한다.” 웨슬리는 은총의 주권적인 원인성은 유지하되 하나님의 결정론은 피해 가는 제3의 대안을 추구했다. 이 외에도 아우틀러가 정확히 간파했듯이 선행은총의 현존으로서 은혜로이 회복된 자유의지에 대한 웨슬리의 탁월한 이해는 결정적으로 자신의 신학과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을 분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우틀러에 따르면 아르미니우스는 은총이 선행적으로 주어지기에 인간은 하나님께 돌아갈 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주장한 반면, 웨슬리는 성령의 선행적 활동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선한 것을 향해 움직여지고 영감을 얻게 된다.고 주장한다. ==>모든 선을 하나님의 은총에 돌리고 자연적 자유의지와 공로부인

다섯째, <악함의 제약> 하나님의 속성의 제한된 인식으로, 도덕법의 이해로, 양심의 능력으로, 그리고 초월적으로 회복된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로 표현된 선행은총은 인간의 악함을 제한하고 인간의 사악함을 제약하는, 선행하는 사례들과 구분될 수 있는 누적 효과를 갖는다. 선행은총에 대한 다섯 번째 개념은 여러 면에서 루터의 창조와 보존의 질서 개념과 유사하고 20세기 본회퍼의 위임개념과 유사하다. 달리 말하면 여기서 하나님의 은총은 적어도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교회를 개의치 않은 사람들의 세계에서조차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인간의 악을 제어한다.

웨슬리가 은총과 율법, 죄에 대한 교리들을 앞서 탐구했던 것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선행은총의 다섯 차원은 은혜로운 회복의 영을 통해 죄인들을 구원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선행적 활동과는 구분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새롭게 태어난 능력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새로워진 능력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다.

둘째, 웨슬리의 원죄교리는 전적 타락 개념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은총이 웨슬리의 구원의 순서의 어떤 지점에서 작용해야 한다. 선행은총이 은총으로 회복된 능력이란 점에서 저항할 수 없는 것임을 부인한다면 이는 곧 웨슬리가 전적 타락을 주장했음을 부인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배경에서 저항할 수 없음이란 저항될 수 있는 능력으로의 부름이나 서곡이 아니라, 책임적인 인격과 상호 책임의 능력을 회복는 것을 뜻한다.

서방(아르미안) 패러다임

타락-->원죄(전적 타락)--> 선행은총-->값없이 주시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회복된 주고 받을 수 있는 상호책임성과 자유--> 상호협력적 은총

동방 패러다임

타락-->원죄(전적 타락이 아님)--> 중단되지 않은 채로 여전히 남아있는 응답할 수 있는 상호책임성과 자유--> 상호협력적 은총 (오역124)

다시 말하자면, 선행은총의 저항할 수 없음은 인격이 지배를 당한다는 의미도 아니고, 상호책임적인 자아가 이미 존재하고 있어서 단순히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이 제공된다는 의미도 아니다. 오히려 선행은총은, 정확히 말해 역량을 회복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자아가 되도록, 필연적이며 선행이란 용어가 보여주듯이 앞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간단히 말해서 구원의 과정이 시작에는 협력은총이 아니라 하나님 홀로의 활동인 값없이 주시는 은총이 필요하다.

셋째, 더 나아가 어떤 의미에서 선행은총을 일종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으로 이해하는 것은, 칼빈과 마찬가지로 웨슬리도 사랑의 하나님의 순수한 은혜, 온전한 자비, 필연적 주도권을 강조했음을 예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와 웨슬리주의의 주요한 차이 중 하나는 구원의 순서 가운데 어느 시점에서 저항할 수 없는 은총이 일어나는가?하는 문제이다. 빈은 성화은총이 저항할 수 없는 은총이라고 본 반면 웨슬리는 선행은총이 인간의 요청을 기다리지 않는저항할 수 없는 은총이라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유럽의 종교개혁자들과 웨슬리 모두 전적 타락교리에 동의했지만, 이들의 기본적인 신학적 틀이 은총에 대한 서로 다른 개념으로 인해 구분된다. 웨슬리의 선행 은총론전적 타락, 은총에 의한 구원, 인간의 책임, 만인구원이란 네 주제를 어떤 모순도 없이 통합한다. // 그러나 칼빈과 루터의 신학은 단지 처음 두 주제만을 통합하고, 예정과 선택교리는 왜 모든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는가를 설명한다.

<참조> Don Thorsen <Calvin vs Wesley> 박도웅역 p. 259

Calvinism TULIP Wesleyanism ACURA

Total Depravity -------------- All are Sinfull

Unconditional Election -------------- Conditional Election

Limited Atonnement -------------- Unlimited Atonnement

Irresistible Grace -------------- Resistible Grace

Perserverance of the Saints -------------- Assurance of Salvation

오늘과 내일 : 자아에 대한 최근 논의들

비록 웨슬리가 자신의 인간학적 견해를 전개할 때 철학적 의미를 발전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웨슬리의 가르침 속에서 그 철학적 의미를 추론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선행은총으로 일어나게 되는 중요한 회복과 함께 웨슬리의 전적 타락 교리는, 초월적 자아가 존재하지만 초월적 자아가 은총으로 회복된 화려한 능력과 완전히 동일시되지 않고 구별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웨슬리의 입장에서 설명한다면, 자아는 타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심지어는 성령의 부르심을 통해서 양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자아의 이해는 통합되고 통일된 주체의 개념이 현실적인 현상의 반영이 아니라 계몽주의의 합리성과 중산층의 개인주의에 대한 담론의 산물로 비춰지는 포스트 모던의 배경에서 어려움을 맞고 있다. 사적으로 구성된 자아는 근본적으로 사회 안의 거미줄처럼 배열된 여러 담론에 자리하며 의존한다. 따라서 이들 담론과 사회적 실채가 없다면 분명한 정체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버시스 마틴은 나는 스스로를 계급, 성, 세대, 교회의 산물인 사회적 구성으로 경험한다.고 주장한다. 미셀 푸코는 인간이란 최근 자료가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예컨대 인간이란 바닷가의 모래 위에 그린 얼굴처럼 지워질 수 있는작품이다.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꼼꼼히 연구했던 로버트 웹스터는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에게서 발견된 하나님과 자아에 대한 허무주의적 해석을 열거했다. 그는 초기 급진적 경험론자들과 오늘날 포스트모던 해체주의자들의 공격으로 데카르트의 하나님이 해체됨으로써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존재가 기반을 잃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20세기 초 논리실증주의자들과 스키너와 같은 급진적 과학 경험론자들은 한편으로 환원주의를 견지하고, 다른 한편으론 인간이 단지 행동의 저장소이기 때문에 일반과학과 특히 환경과학으로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방법론적 주도권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실증주의든 해체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이든 각각의 경우 방법론적으로 간관한 것은, 자아가 참여하고 자아의 생명의 기원이 되는 초월의 실재이다. 이처럼 소통가능하고, 자유로우며, 상호 책임적인 초월적 차원은, 웨슬리의 자아 이해에 결정적인 것으로 나타나며, 자아에 대한 실증주의적 비판이 방법론적으로 아주 정확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포스트모던 이론들이 좀 더 광범위한 해체의 기획에 동참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사실 길은 그의 책 중재된 초월에서 전체적인 인간 경험을 이해할 때 필수적인 초월의 실재를 근대성과 다른 차원에서 주장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이 존재와 같이 인지를 갖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타자 지향을 사랑하는 초월적 자아는 실증주의나 해체적 포스트모더니즘이 방법론으로 증명되거나 증명될 수 있는 실재다. 그러므로 좀 더 광의의 인간학적 물음과 관련하여 말한다면, 초월적 자아가 더 이상 하나의 유용한 패러다임이나 선택이 아닌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포스트모던 허풍에 불과하다.

칸트의 통찰에서 볼 때 역사를 통해 나타난 다양한 인간 경험의 질서를 위해서라면 적어도 우리는 초월적 자아를 긍정할 수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초월적 자아를 위한 어떤 객관적 증명은 실제로 적합하지 않다. 또한 이 초월적 자아는 개인의 몸과 집단적인 사회적 배경이라는 구체적인 실체를 통해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초월적 자아는 이런 구체적인 실체의 설명으로 환원될 수 없다.

비록 웨슬리는 초월적 자아라를 구체적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선행은총으로 능력이 회복됨으로써 할 수 있고 책임질 수 있다는 가르침을 통해 그의 책 여러 곳에서 초월적 자아를 예시하고 있다. 그러나 웨슬리는 몇몇 포스트모던 주장과는 반대로 구원의 실체란 결코 순수하고 단순한 관계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상응에서 중요한 누구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신적인 본질인 하나님의 누구이 나닌 것처럼, 인간의 누구또한 비어있는 것이다. 바로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신적 누구에 대한 이해, 곧 그분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이해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이라는 구원의 시작을 특징짓는다.

제3장 예수 그리스도: 계시된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 유장환교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 기초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선행적 활동은 시간과 문화,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실재적인 의미에서 갈릴리 출신 유대인이었던 나사렛 예수는 구원 역사의 중심에 위치한다. 웨슬리의 거룩한 사랑의 신학은 성찰과 의도와 목회에서 그리스도가 중심임을 드러낸다. 웨슬리의 실천신학은 그리스도론(Christology)에 기초한다. 말하자면 창조 질서, 구원의 빛,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 이 모두는 그리스도의 은총과 탁월함을 나타내는 중요한 창이다.

I.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인격이란 용어는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작품에서 나타나듯이 초대교회의 성찰에서 비롯된다. 고대 신앙 공동체가 인격(위격, hypostasis)이란 용어로서 의도했던 바는 자율과 개인주의를 강조한 현대개념과는 구분된다. 고대신앙 공동체는 아리우스의 추론에 반대하여 그리스도(말씀 혹은 육을 입은 로고스)와 하나님(아버지)의 관계를 성서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분명히 하였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아버지와 아들, 출생한 자와 출생하지 않은 자의 관계를 주목했다. 관계로 이해된 인격은 분리되거나 자기-만족으로 완결된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과정 중에 있는 타자와의 관계를 표상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격을 바르게 설명하려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아버지)과 인간의 관계로 이해되어야 했다. 예컨대, 하나님의 아들인 로고스로서 그리스도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아버지로부터 출생한 독생자로서 존재를 갖는다. 인간의 아들 그리스도는 인간의 공동체에 구속적 표현으로 관계한다.

1) 하나님의 본성(신성)

초기 교회의 전통에 따랐던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한 인격이 하나님과 인간의 두 본성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노년에 쓴 <영적 예배>라는 설교에서 웨슬리는 영감을 받은 신약성서 저자들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모든 칭호와 속성, 특별히 영원성을 그리스도에게 부여했다고 지적한다. 웨슬리는 과거의 영원성과 미래의 영원성의 구분을 통해 아들의 영원성을 탐구했다. 웨슬리에 따르면 아들은 이토록 영원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진실로 온전하게 하나님이다.

또한 웨슬리는 예수그리스도의 권위는 모든 것의 창조자의 권위임을 말했다. 웨슬리는 감격하여 선포한다.하나님, 하나님의 권위이다. 그렇다. 존재들의 존재, 야훼, 자존자, 지고자, 모든 것을 넘어 존재하며 영원히 축복이신 하나님의 권위이다.”

더 나아가 웨슬리는 자신이 속한 영국 국교회의 가르침에 동의했다. 역사적인 국교회 39개 종교 강령 2항은 참되며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신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의 실체(이다)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한 실체임을 주장하는 모든 자료를 근거로 종속론에 대해서도 거부한다. 또한 1789년에 펴낸 설교 육체를 따라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는 아리우스주의, 저등 그리스도론들, 특별히 소키니우스주의를 반박한다.

웨슬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아버지의 동질적인 동등성을 주장하는 두 방식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하나님의 말씀이란 칭호를 통해서이다.

웨슬리는 신약성서 주석에서 누가복음 22:70을 주석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메시아를 뜻하는 칭호뿐 아닌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칭호라고 보았다. 하나님의 아들과 인간의 아들이라는 이 둘의 칭호는 메시아의 칭호였다. 하나님의 아들은 신성으로부터 취해졌으며 인간의 아들은 인성으로부터 취해졌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두 번째 칭호를 통해서 웨슬리는 하나님/아버지와 아들의 역동적인 관계를 분별했다. “하나님의 말씀하심은 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며 존재와 관계 둘 다를 지칭한다. 달리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말씀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 웨슬리에 따르면 지극히 높으신 이가 말씀하심으로서, 아버지와 더불어 존재하는 여기 선포된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이 본질에 있어 일치하듯이 영원한 성향을 갖는다.간단히 말해서,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존재를 가지지 않기 때문에 말씀은 하나님하고만 함께 하였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아들을 낳고 말씀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또한 세상의 창조에 밀접하게 관여했다. 아들은“‘참 하나님이고 모든 만물의 유일한 원인이며 창조자이자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움직임의주인’”이다.

아들은 세계와 많은 피조물을 창조하는 데에 밀접하게 참여했을 뿐 아니라 참 하나님으로써 만물의 지지자이기도 하다. 예컨대 아들은 그의 권능의 말씀으로 만물을 유지하며 일한 말씀으로 만물을 무로부터 창조했다.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은만물의 보존자이다. 우주에서 모든 움직임의 주인일 뿐 아니라,인간이 소유한 모든 생명의 샘이며...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생명이다.

창조자, 주인, 지지자, 보존자라는 네 역할은 세상이 존재하고 세워진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감독과 적극적인 돌봄을 강조한다. 아들은 전체 창조와 창조의 모든 부분의 주님이며 운행자이다. 웨슬리는 아들의 통치를 아주 중요하게 보았다. 아들은 창조된 만물의 통치자이며 아들의 통치는 아버지의 통치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향한섭리적 통를 포함한다.

또한 웨슬리는 자신의 신학적 의미와 방향이 담긴 신적 칭호를 아들에게 붙인다. 따라서 참 하나님으로서의 아들은사도신경에서 엄숙히 선언하듯이 만물의 목적이라고 주장한.“모든 만물이 그의 것이며 그를 통해서 존재하고 그에게 속한다.그의 것이란 말은 창조자를 뜻하고,그를 통해서란 말은 지탱자요 보존자임을 뜻하며,그에게라는 말은 모든 만물의 궁극적 목적이 됨을 뜻한다.단순히 말해서 창조의 기원에서부터 만물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이 지향하는 목적으로서 완전한 사랑과 존재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은 모든 인간의 구원자이다. 용서와 새로운 생명으로 신앙인들을 중재하는 구원자의 역할이 하나님 아들의 유일한 중심역할이라고 알려져 왔다. 실제로 최근의 몇몇 신학적 경향에 따르면 하나님의 세 위격은 아버지는 창조자, 아들은 구원자, 성령은 거룩하게하는 자로 구분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분명 웨슬리의 그리스도론(혹은 웨슬리의 신론과 성령론)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웨슬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구원자이면서 창조자요, 주인이며, 지탱자이자 보존자이고 통치자이며 궁극이라는 표현으로 적절하고도 정황하게 묘사된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면, 그 어떤 기능도 아버지에게만 혹은 아들이나 성령에게만 속하지는 않는다. 이 영역에 대해서 초기 교회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세 위격이 상호적으로 서로에게 침투하며 서로 관계한다는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혼돈 없이 순수하게 침투한 상태로 서로-안에 있는 존재를 상정할 때 위격들의 역할이 상호 침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웨슬리는 이러한 고대의 지혜를 소중한 것으로 이해했다.

인간의 본성(인성)

웨슬리는 하나님의 형체로부터 인간의 형체로 나아가는 아래로의 움직임(육을 입은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놀라운 방법으로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영광스런 형체를 비워 겸비한 순수 인간의 형체로 내려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과 인간을 잇는 말씀은, 웨슬리가 이해했듯이 기독교 신학에서 초월과 내재 사이의 기본적인 긴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이 은총의 움직임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온 이야기는 겸비한 모양으로 특별히 가난하고 겸비한 마리아가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를 감싸고 있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으로 임신했다고 가르쳤다. 동정녀 탄생 교리는 예수의 탄생에 하나님이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러 면에서 웨슬리는 마리아가 영원히 동정녀임을 주장함으로써 영국 국교회와 로마카톨릭 전통을 따랐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까지도 마리아가 순수하고 흠 없는 동정녀로 계속 남아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로 인해 웨슬리는 특히 마13장 55-56주석 어려움을 겪었는데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는 예수의 형제들이 아니라 이종사촌들이라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비록 그리스도께서 동정녀로부터 탄생되었다고 주장했지만, 마리아와 그녀의 실를 너무 밀접하게 동일화하는 것에 난색을 표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웨슬리는 분명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와 실체가 하나라는 것을 주장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 강령을 펴내면서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이 한 분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개의 온전하고 완전한 본성이 결코 나누어지지 않는 한 인격 안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서신들을 자신이 편집한 기독교 총서에 넣어 발행했을 때 또 다른 문제들이 나타나게 된다. 편집하는 과정에서 육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예수가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구절들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애칭을 피하려 하면서 같은 문제 발생했다.

흥미롭게도 웨슬리가 애칭사용을 거부한 합리적인 이유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칭은통치자 주님께 돌려져야 할 잔잔한 존경을 누그러뜨릴 뿐 아니라“‘감히 움직일 수도 없는 무언의 경외를 느끼지도 못하게 한다.

웨슬리의 저술에 그리스도의 인성을 경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료들이 있고, 때문에 단성론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웨슬리의 그리스도론은, 칼케돈 공의회가 정한 정통(한 인격 안에 두 본성을 공식화)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온전히 고백하는 데 주저했던 것은 사실이다. 데쉬너웨슬리가 기독교인의 삶과 예배를 위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할지라도 웨슬리의 그리스도론을 가현설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고 주장한다. 웨슬리는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존중하고 이름을 명예롭게 했지만 그에게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이었다.

II. 그리스도의 사역

어떻게 예수가 그리스도인가? 이 물음들에 대한 대답은 특별히 예언자, 제사장, 왕이라는 직무로 나사렛 예수의 사역을 논한 웨슬리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다.

1) 예언자

마태복음 1장 16절을 주석하면서 웨슬리는 교회가 예수의 삶과 목회의 빛에서 예수에게 붙여주었던 그리스어 그리스도와 히브리어 메시아라는 용어가 기름부음을 받은 칭호 곧 예언자, 제사장, 왕의 역할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았다.

웨슬리는 첫 번째 예언자의 역할에 대해서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깨우치고, 하나님의 전체 뜻드러내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 수육했다고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위대한 법의 수여자였으며 새로운 종교를 세상에 소개한 것이 아니고새벽별이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할 때 처음부터 존재했던 동일한 법을 세상에 소개한 것이다.이렇게 그리스도를 법의 수여자로 고백하는 것은 웨슬리 당시 놀라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몇몇 개신교인들이 율법과 복음의 변증에서 율법의 지지함과 규범적인 힘을 은총의 이름으로 폐기하고 복음을 자유로 여겼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이러한 신학적인 판단을 은총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을 간과한 것으로, 잘못된 가르침이며 오류라고 생각했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메시아인 그리스도는 계약과 계약 사이의 연속체이다. 특별히 구약의 도덕법과 신약의 도덕법 사이의 연속체이다. 다시금 웨슬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모세의 십계명의 수여자일뿐 아니라 법의 위대한 입안자라고 보았다. 사실 웨슬리는 도덕법과 그리스도를 아주 강하게 연결시킴으로써,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특징짓는 그리스도론적 술어들을 놀라울 정도로 도덕법과 관계시킨다. “율법의 기원, 본성, 속성, 그리고 사용이란 설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드러났다. 어떤 의미에서 사도신경이 아들에 대해 말한 것을 이 법에 적용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분출혹은 터져 나옴하나님의 인격이 드러난 형상이다.이와 같은 설교에서 웨슬리는 도덕법을 영원한 아버지의 가장 사랑스런 자녀, 가장 빛나는 아버지의 본질적인 지혜의 발산, 지극히 높으신 이의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으로 묘사한다.

웨슬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영원한 독생자인 그리스도의 존재와, 창조 질서에 기초하여 태초에 생겨난 도덕법의 형식 사이를 분명하게 구분했다. 다시 말하자면, 도덕법은 보이는 형식을 입은 하나님의 덕이요 지혜이다. 그래서 이러한 덕과 지혜가 영원부터 창조되지 않은 정신이었던 진리와 선의 원 개념들.임을 결단코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사와 인간 모두에게 납득할 만한 진리의 온전한 패러다임인 율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진리와 선이라는 영원한 요소들이 시간 안에 특별한 형식을 입고 나타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예언자 역할은 특히 관계의 적절함으로 도덕법을 창조자의 분명한 뜻으로뿐 아니라 여러 관계들 안에 믿는 자들이 영원히 선한 의지의 지고의 목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함에 이르도록, 만물에 질서를 준 통치자의 뜻을 표현으로 설명하는 것이. 다시 말하면, 예언자로서의 그리스도는 서방 개신교 신학의 접속적 표현인 율법과 복음, 웨슬리의 특성화된 접속적 표현인 거룩함과 사랑의 선생이다.

2) 제사장

웨슬리에 따르면 죄 때문에 생겨난 불신앙과 소외, 교만은 인간의 노력과 계획으로 극복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죄 된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문제이기 때문에 죄로 야기된 문제를 치유할 수 없었다. 왜곡시키고 속이며 깜짝 놀라게 하는 힘으로 죄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갖는 바른 관계는 중재자의 사역을 통해서만 다시 세워질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잇는 중재자의 사역이 너무도 중요하기에 웨슬리는중재자를 통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기에 인간과 하나님을 화해시키기 위해, 우리의 전체적인 구원의 사건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계신 중재자가 없다면 하나님이 계심을 향유할 수 없다.

하나님-인간을 중재하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역할은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는 독특한 인격과 본성에 대한 이해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독특하다. 영국 아르미니우스주의자였던 웨슬리는 그 인격이 참 하나님이면서 참 인간이 그리스도가 인간의 대표적인 둘째 아담으로서 모든 이의 중재자라고 보았다.

구속

죄에 대한 구속은 제사장인 중재자가 자신의 희생을 통해 이룬 일 가운데 일부이다. 웨슬리에 따르면 죄에 대한 구속의 사역은 이사야의 고난당하는 종의형상으로 나타나는 바, 골고다에서 완성되고 최고로 표현된다. 웨슬리가 활동했던 18세기의 상황에서 구속이나 십자가의 필요를 보지 못했다. 대신에 성서적인 도덕의 체계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원죄와 마찬가지로 구속이 이신론과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구분하는 접으로 보았다. “기독교 교리의 체계 안에서 구속의 교리보다 더 위대한 결과를 가진 것은 없다.

구속에 대한 수 많은 이론들이 교회 역사를 통해 표면에 떠올랐다. 이레니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같은 초대 교부들은 예시된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악마의 포로로부터 자유하게 하려고 보상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은유를 발전시켰다. 웨슬리의 경우 오리게네스처럼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보상했다고 분명하게 가르쳤다. 디모데전서 2:6을 주석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충분함을 논했던 부분에서 나타나듯이 보상의 보편성을 강조했다. “영혼이 있는 자마다 이러한 보상을 필요로 했다.1739년 펴낸 값없이 주시는 은총설교에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를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셨다.’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감당하였다.’”라고 웨슬리는 선언했다.

단순한 보상 이론을 넘어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웨슬리의 여러 성찰을 조명하는 구속 이론은 기본적인 만족 개념으로 귀속된다. 만족 개념은 보상 개념으로서, 특별히 보상을 하나님의 정의로 표현하는 개념으로 발전한 것이다.

중세 캔터배리 대주교 안셀름의 만족설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죄에 대하여 만족을 시켜야 하지만 그럴 수 없다.(의무, 그러나 그럴 수 없음)

하나님은 죄에 대해 만족을 시킬 수는 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그럴 수 있지만 의무는 없음)

오직 신/인만이 죄에 대해 만족을 시킬 수도 있고 만족을 시켜야 한다.(그럴 수 있고 의무가있음)

웨슬리는 자신의 글 속에서 첫 번째 전제를 상당히 자세하게 탐구하였다. 안젤무스와 비슷한 방식으로 웨슬리는 인간이 자신의 죄를 해결할 능력이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만족개념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대한 웨슬리의 이해와 통합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우리는 안셀무스의 만족설과 웨슬리의 만족설을 구분해야 웨슬리의 사려깊은 판단에 이를 수 있다. 예컨대 안셀무스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죄인에게 전가된 공로를 보장한다고 주장한 반면, 웨슬리는 주로 개신교 종교 개혁자들의 전통을 따라 만족이란 기껏해야 형벌대속(penal substitution)으로 여긴다고 주장했. 달리 말하면, 웨슬리는 그리스도께서 보상을 하고 죄된 인간의 자리에 서 있음으로써 인간의 한 사람으로 간주함으로써, 그래서 결국은 죄의 삯은 형벌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킨다고 주장하였다.원죄 교리논문에서 밝힌 웨슬리의 주장을 보자.그리스도께서 지신 모든 고난은 우리 죄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의 결과였다.그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를 자신에게 담당시켰다. 곧 우리의 죄로 인한 형벌을 그분이 담당하였다는 것이다.이 맥락에서 웨슬리에 대한 2차 문헌이 구속에 대한 웨슬리의 만족 이론을 형벌 대속으로 이해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데쉬너는 웨슬리의 구속에서 그리스도는 형벌 대속을 수행한 이라고 교회에서 가르쳤고, 윌리엄스도 웨슬리에게 형벌 대속설은 중심 가르침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우리는 구속을 형벌 대속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웨슬리의 선언이 그의 전체 신학에 적합할 뿐 아니라 실제로 지표가 됨을 알게 될 것이다. 예컨대, 웨슬리의 형벌 대속설은 정의와 자비, 사랑이라는 계속되는 주제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을 축하하는 접속 신학의 여러 주제들을 긴장이 있긴 하지만 하나로 묶어낸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객관적 요인(하나님을 향한 관계)과 주관적 요인(인간을 향한 관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웨슬리의 정교하고도 색조 있는 구속 개념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 나갈 것이다.

객관적 요인들(하나님을 행한 관계)

웨슬리의 형벌 대속설의 객관적인 면은 안셀무스와 웨슬리가 정확하게 인식했던 대로 인간이 스스로를 구속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한 사역과 관계된다. 말 그대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나타내는 바, 창조자와 통치자의 역할을 넘어 구원자로 인식하게 한다.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시원적인 은총과 사역은 본래 하나님과 인간이 맺었던 그 관계를 회복시키고, 또한 하나님의 입장에서 화해, 즉 하나 됨을 이루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관심을 가진다. 독특한 인격과 존재인 그리스도만이 신인 관계를 중재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그리스도 안에 신-인이 함께 참여한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바로 하나님의 진노가 인간을 죽음 아래로 떨어뜨린다.브루너는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본래 관계에서 떨어져 나와 위험과 재앙과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한편, 윌리엄스는 속죄의 객관적인 요인들을 하나님의 진노와 연결시키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웨슬리는 속죄에서 어떤 객관적인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만족시킨 것이 우리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고 주장했다.웨슬리는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제시하며, 골고다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와 화해를 얻었다.고 밝힌다. 원죄교리논문에서는그가 받은 고통은 우리 죄가 가져온 형벌이었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고자 받은 징벌이었다고 선언한다.

놀랍게도 진노의 두 번째 주제와 관련한 용어가 웨슬리 글에서 300번 이상 등장한다. 슬리는 실제로 하나님의 진노라는 용어로서, 메소디스트의 발흥과 정체성, 목적을 순서에 따라 열거했다.“내가 저들과 함께 기도하기를 열망했고 저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었던 래할 진노로부터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웨슬리는 진노를 인간의 의지로 지은 죄에 대한 합법적이며, 정의롭고, 거룩하며, 선한 하나님의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진노는 도덕법에서 표현되었듯이, 하나님의 생각을 온전히 고려한다는 점에서 합법적이며, 아주 작은 악까지도 묵인하지 않고 지속적이고도 단호하게 반대한다는 점에서 정의롭다. 린드스트룀이 주목한 것처럼,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자비와 관계하듯이 (하나님의)진노는 하나님의 정의와 관계한다.” 달리 말하면, 진노는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진노가 완고하게 지속되는 악의 힘에 대한 하나님의 응전을 뜻한다는 점에서 선한 것이다.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에 대한 생각이라는 글에서 웨슬리는 경고했다.법의 끔찍함을 증거하지 않고... 하늘로부터 계시된 하나님의 진노를 슬쩍 넘어가고,...약속을 남발하는 자들은 결코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이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진노를 바르게 이해하고 거룩한 사랑의 적합한 표현으로 보고자 할 때 만나게 되는 어려움은 분노의 문제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하나님의 분노와 인간의 진노를 혼동 하는 신인동형론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인간의 분노는 종종 거룩하지 않은 미움과 보복적인 격정에 빠진, 거칠고 생생한 복수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는 인간의 분노와 다르다. 결론적으로 말해 웨슬리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분노와 혼동하지 말아야 하며, 더욱 중요한 것은 여전히 부드럽고 감싸는하나님의 사랑을 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분노와 비교했을 때) 유비적인 의미로만인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진노와 관련한 두 번째 어려움원칙적으로 죄인을 희생으로 보는 심리요법적 구원의 모델과 관계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죄인을 결코 희생자가 아니라 범법자로 보았다.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 타고난 죄의 성향을 적극적으로 키워갈 뿐 아니라,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께 열정적으로 반대하고 저항하는 사람으로 보았다. 웨슬리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인정하는데 어려움이 없었고 악에 대해 확고하면서도 단호한 반대 입장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빛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이해했기 때문에, 자연스러우면서도 주저함이 없이 힐라스모스(요일2:2)를 보상보다는 속죄로 해석했다. 예컨대 웨슬리의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한다면,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는 속죄의 희생이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노와 우리 사이를 중재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가 된다.

그런데 웨슬리의 형벌 보상 입장은 그의 해석의 논리가 필연적으로 보편론을 요구하기 때문에 무조건적 선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또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신-인만이 죄를 구속할 수 있고 그리스도께서 전 세계의 죄를 위해 완전하고 온전하며 충분한 희생과 만을 드렸기 때문에 앞서 살폈듯이 보편성의 개념은 객관성을 고려한다면 고유한 웨슬리의 입장의 일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칭의의 형식적 원인(formal cause 과거 죄의 용서)이 아니라 공로적 원인(meritorious cause) 임을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구속은 모든 사람의 용서의 기반이 된다. 아우틀러는 형식적 원인을 예정과 불가항력적 은총에 상관된 입장으로, 공로적 원인을 선행은총, 자유의지, 보편적 구원을 허용하는 입장으로 기술했다. 달리말하자면,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모든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는 데에 보편적 기초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보편주의이다. 예컨[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은 이미 충분하게 죄의 용서를 받을 준비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편성은 웨슬리의 형벌 보상설의 입장을 보여준다.

중재의 구속적 사역을 통해 모든 인간의 필요가 충분히 준비되었다는 이 입장은, 광의로 이해된 선도은총 혹은 선행은총을 강조한다. 우리가 객관적 요소라 불렀던, 관계의 하나님 지향적인 측면에서 보면, 구속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도다.”(요19:30)라고 외쳤듯이 이미 완성된 것이다. 다시한번 영국 국교회의 종교 강령에 나오는 말을 사용한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은 원죄와 자범죄 모두에 대한, 곧 세계의 모든 죄에 대한 완전한 구속이며 속죄이고 만족이다.

주관적 요인들(인간을 향한 관계)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인 마음을 변화시키는 인간의 인간적 차원에서 볼 때,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인 속죄는 속죄의 은총을 받기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선도은총은 은총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져야 한다.(=선도은총은 수용은총에 의해서 동반되어야만 한다.) 예) 스팡겐베르크,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세상의 구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그분이 특별히 당신을 구원했음을 아는 것의 차이는,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는 선도은총과 수용은총의 차이를 보여준다. 다시 말하지만, 웨슬리의 구속론에서 객관적 요인으로부터 주관적 요인으로 옮겨 가게 될 때 비로소 죄인들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 죄인들은 죄인들 자신의 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거의 수동적인 태도로 있는 그대로 은혜를 선물로 받아들임으로써 의롭다함을 얻는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선물에 속하는 자유와 조건들 사이를 구분함으로써 선도은총과 수용은총,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 배후에 있는 개념들을 탐구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조항이나 조건 없이 그 은총을 값없이 주실 수 있는가?물론 하나님은 주실 수 있다. 누군가 당신에게 얼마만큼의 돈을 조건 없이 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손을 펴서 받아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우리가 은총으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하는 것과 어떤 조항이나 조건에 기초해서 은총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따라서 웨슬리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구원의 처음 움직임으로 선도은총수용은총이 그 특징이며, 그 후 감사와 감사의 기도로부터 응답은총이 나온다고 보았다. 그러나 수용은총을, 저항할 수 없이 회복된 선행은총의 능력처럼 군주적 방식으로 이해하건, 용서와 칭의의 선물을 받기 위해 최소한 손을 뻗는 인간의 활동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이해하건, 응답은총 이전에 수용은총이 있어야 한다.

앞서 설명했듯이, 비록 웨슬리가 그리스도의 구속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최고의 기쁨과 사랑과 감사를 준 것으로 비쳤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수용은총의 중요성을 효과적으로 조명하여, 말하자면 인간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역의 주관적 차원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웨슬리의 입장은 아벨라르의 도덕 감화설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아벨라르는 로마서 3장 19-26을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은 골고다와 상관없이 다른 방법들로도 나타날 수 있다고 덧붙여 설명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가장 낮고 깊은 곳, 가장 천한 곳에서 하나님의 겸비하고 희생이 넘치는 사랑이 빛을 발한다고 주장한다. 죄인의 자리로 오셔서 이들의 심판을 짊어지고 수치를 담당한 이 사랑은 도대체 어떤 사랑이란 말인가! 이렇게 이해하고 보면 사랑과 십자가는 우연히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관계된다. 사랑과 십자가 이 둘은 함께 하나님의 겸비하고 희생이 넘치는 거룩한 사랑을 반영한다.

3) 왕

멸시와 거부를 당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의 부활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계시된다.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는 통치를 위임받아 그리스도의 삼중직 가운데 마지막인 으로서 만국을 심판하고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웨슬리가 그리스도의 왕의 직임이 갖는 첫째 주요 역할, 곧 그가 피로 산 모든 사람들에게 법을 주시는 분으로탐구할 때, 그는 구원자인 그리스도께서 다스리고 영원한 권위를 가질 것임을 보여줄 뿐 아니라 율법을 갖고 일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예언자 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왕이시요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곧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로운 현존으로 변화를 받은 사람들에게 (말씀의 내용인) 율법을 준다.

믿는 자들에게 은총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왕의 직임의 두 번째 역할은, 먼저는 중생의 구원의 은총을 제시하고 그럼으로써 사법적인 주제인 용서와 참여적인 주제인 갱신을 연결한다. 독일 경건주의 전통을 대표하고 있던 조지아 주의 잘즈부르크 신도회와 영국의 모라비안 교도들로부터 죽음이 용서뿐 아니라 생명으로 인도하여 사법적인 주제인 용서와 참여적인 주제인 갱신 모두가 골고다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대한 주석에서는 믿는 자들을 죄의식과 그 능력으로부터 전적으로 구원받았다.고 주장했다.실로 죄의식에 대한 속죄가 없다면, 우리는 그 능력으로부터도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으며, 십자가 없이는 중생도 없고, 먼저 제사장의 직임이 없으면 왕의 직임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아니고서는 스스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들이 죄의 용서(칭의)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본래 거룩함도 없고 선도하는 성화은총없이는 거룩함을 가질 수 없는 죄인들은 중생과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은혜로운 영의 임재를 받아야만 한다. 갈2:20 웨슬리는 예리함을 가지고 칭의와 중생, 사법적 용서와 참여적 용서를 연결한다. 그러면 내적 성화는 언제 시작되는가?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순간이다. 이때에 모든 덕의 씨앗이 영혼에 심겨진다.

왕이신 그리스도의 세 번째 역할은, 모든 믿는 마음을 다스려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고,모든 죄를 몰아내며, 영원한 의를 불러오는 것이다.이제 우리가 수용은총에 속하는 거룩함의 사작과 수용은총과 응답은총에 속하는 계속적인 성화의 과정을 구분한다면, 데쉬너의 초기 주장이 정확하면서도 요점을 파악한 것이다. 예컨대, 웨슬리는 초기의 성화은총이 칭의와 용서와 더불어 값없이 주어진 것이지, 율법을 완성할 때 능동적인 그리스도의 순종이 믿는 자에게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데니쉬가 지적했듯이 그 완성은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 믿는 자 안에 역사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결국, 웨슬리는 승리의 동기가 그리스도의 제사장 사역, 곧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칭의)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왕의 사역, 곧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구원자와 거룩케 하는 자로서 하신 일(성화)과 관계된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감격하여 소리쳤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왕으로 오셔서 통치하며 만물을 그분에게 복종시키는 그리스도를 원하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왕의 역할에 대한 입장은, 믿는 자들의 삶이 바르도록 예방하며 또 그 바른 길을 비춰 주는 능력인 도덕법을 위해 중요하고도 지속적인 역할을 제공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오셔서 심판하며 거리낌 없이 통치하게 되듯이 십자가와 인간의 마음을 계속 변화시켜 가는 교회의 삶에서 볼수 있는 것처럼 죄와 죽음과 지옥과 사탄을 정복하는 승리의 주제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믿는 자의 마음에 역사하는 성화의 사역이 중요하다. 성화의 사역에서 은총이 강조되고 그리스도가 지배한다. 때문에 웨슬리는 은총과 그리스도가 없이는 종말론적 완성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보았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가 만물을 그 발아래 정복하고 완전히 죄를 몰아냄으로써 교회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하며 완전한 왕의 역할인 영원한 의가 다스리게 한다.

오늘과 내일 : 코란이 전하는 그리스도

오늘날 이슬람은 세계 주요 종교 가운데 하나로서 중동과 동남아시아에 걸쳐 십억 여명이나 그 추종자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기독교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신도 수를 갖고 있다. 코란의 내용인 무함마드가 받은 계시와 역사적인 인물 무함마드는 많은 사람에게 흡인력을 갖는 무슬림 신앙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이다. 무함마드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복음서에 대해 어떤 지식을 갖고 있었는지 평가하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9세기나 되어서야 복음서가 아랍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슬람 신앙에 따르면 예언자 무함마드의 종교는 구약과 신약에 담긴 유대교와 기독교 메시지를 수정하고 완성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언자가 실제 기독교를 접한 것은 단성론자들,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 멜카이 정교회원들과 만나거나 구전을 통해서였다. 어쨌든 무슬림 전통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610년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기 시작했다. 그 후 2년여의 잠적기를 거친 다음 예언자는 다시 한 번 조명을 받은 후 계속해서 쉬지 않고 632년에 죽기까지 계시를 받았다. 그 결과 22년에 걸쳐 114장 6천 절 이상으로 구성된 이슬람 책이 나타나게 되었다.

무슬림의 관점에서 보면 코란경은 신의 말씀이고 궁극적인 신의 계시이다. 기독교인의 수육(성육신) 이해와 비슷한 방식으로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신성시 하는 책을 하늘로부터 무함마드가 받아쓴 것으로, 위로부터 내려왔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코란경은 인간 역사에 신이 참여한 것이다. 예수와 비교해야 할 대상은 무함마드가 아니라 코란경이다.분명 이슬람/기독교 사상사를 보면 계시는 계시와 비교되어야 하는바, 무함마드가 아니라 코란경이 그리스도와 병행 구조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코란경과 무함마드의 관계는 예수와 기독교인의 관계이다.

그러나 최근 소수이긴 하지만 몇몇 학자들은 코란경과 그리스도의 병행은 두 가지 방법에서 어려움이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기독교인도 무슬림도 아닌 제3자 입장에서 보면, 독교의 성서는 신이 말씀한 것을 직접 구술했다고 보는 코란경의 당당한 주장과 비교해 미온적인 것처럼보인다. 둘째, 환원주의에 빠지는 어려움이다. 예컨대 그리스도와 코란경을 비교할 때 어쩔 수 없이 메시아는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 이렇게 되면 수육을 강조하게 되고 그 결과 속죄교리가 희석된다.

물론 우리의 현재 관심은 코란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평가하는 것이다. 코란이 말하는, 암묵적이며 명시적인 그리스도론을 평가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슬림들이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기는 코란경에 예수는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 수천 절에 이르는 코란경에 예수라는 고유 이름은 25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10여 곳에서 예수를 메시아 혹은 마리아의 아들이라 표기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코란경에서는 예수보다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 더 많이 언급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예수는 코란경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존경을 표하는 여러 칭호들이 예수를 증언하기 위해 사용된다.

코란경은 구원 역사의 흐름과 연속성에 주목하진 않았지만 예수를 예언자들의 대열에 넣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는 여러 예언자들 중 하나다. 분명 코란경은 예언자들 중 예수보다는 무함마드를 선호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노아와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무함마드로 이어지는종교를 세우기 위해 보냄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예수가 아니라 무함마드가 예언 운동의 절정이며, 코란경과 신약의 관계는 기독교인이 신약과 구약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비슷하게 된다. 말하자면, 코란경은 계시의 완성이고 완전이다. 곧 알라 외에 다른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예언자이다.

그러나 코란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 본 사람이라면 무슬림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예수가 어느 정도 특별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예수는 코란경에서 존경받는 예언자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예언자는 아니다. 좀 더 깊이 코란경에 나오는 예수에 대한 구절들을 탐구해 보면, 코란경에 나타난 그리스도론에 어려움이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이중 거리 두기 같은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코란경은 예수에게서 십자가를 제거하듯이예수에게서 신성을 제거한다.이 제거로 코란경은 아리우스와 다른 학자들이 했던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는 내용으로 채워진다.

게다가 코란경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십자가를 제거한다. 십자가 사건은 복음서가 증거하고 있고 타키투스 자료에도 언급되어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 어째서 많은 증거가 있는데도 예수를 십자가에서 제거하였는가? 무엇보다도 무슬림의 입장에서 보면, 참 예언자는 무함마드처럼 성공적인 사람이어야 한다. 적과 싸워 승리해야 하고 패배를 당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예언자들은 정복하는 전사들이거나 지도자들 이어야 한다. 따라서 알라는 참 예언자가 증오와 굴욕 가득한 죽음을 당하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동정과 사랑이 넘치는 알라는 자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더 많은 존귀와 좋은 대우를 베풀어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코란경은 기독교 신앙의 결정적인 영역인 십자가를 제거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의 기본적인 증언을 흔드는 이중 거리 두기상황에서,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이 중심 주제를 논의한다면 둘의 관계는 쉽지 않아 보인다. 기독교의 교회 일치를 향한 접근은 대화를 할 때 논쟁이 되지도 않고 본질적이지도 않은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서로 자극이 되지 않는 문제들만을 다루어 왔다.

웨슬리는 이슬람에 대해 대담하게 솔직하고도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슬림과 기독교인 대화라는 주제에 대해 웨슬리는 주로 무슬림의 행동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행위의 부적절함에 초점을 맞추었다. 실로 무슬림들이 복음을 바로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거대한 걸림돌은 다름 아닌 기독교인들의 삶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웨슬리는 이 점과 관련해 영국 국교회를 비판했다.

무엇보다도 웨슬리는 동방 교회의 성상 사용이 무슬림 공동체와 대화를 시도하기도 전에 대화를 망칠 수 있음을 명민하게 알고 있었다. 무슬림 공동체와는 달리 웨슬리는 모든 상을 반대하는 성상파괴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성상의 사용이 기독교인의 삶과 그 증언에 중대한 위험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성상과 이미지를 목회적인 생각을 갖고 제한하여 사용하라고 권장하는 웨슬리는, 어떤 것을 본떠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제2계명을 상기시키면서, 우리의 진정한 예배는 상상의 능력이 아니라 믿음의 능력으로 지배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진지한 대화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십자가와 관련해 어려운 난관에 부딪혀 있는 상황에서 부적절한 성상과 이미지를 계속 사용하여 문제를 더 복잡하게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성상과 이미지 사용을 오늘날 권장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애와 걸림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피 값으로 산(무슬림을 포함) 모든 사람들의 축복과 교화를 위해서 제거되어야 한다.

제4장 성령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의 현존

유장환교수

내가 떠나가면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참회하는 죄인의 마음에 좌정하사 영원히 사랑하는 거처로 삼으실 것이다. -John Lawson, The Wesley Hymns as a Guide to Scriptural Teaching ( 1987).

웨슬리는 창세기 1장 2절을 주석하면서 성령을 최초의 동자(the first mover)로 언급함으로써 조 안에 나타난 성령의 일반적인 역할을 분명하게 인정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주로 구속과 관련해 하나님의 성령의 활동을 탐구했다. 예를 들어, 윌리엄스(Colin Williams)는 성령의 사역 가운데 하나가 아들의 중재 없이 세계 내에서 역사하는 것이지만, 성령의 주된 사역은 믿는 자들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성령의 사역이 과거의 실재일 뿐 아니라 현재의 실재로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현존인 계시와 직접 관계한다고 보았다. 즉 성령은 타자 지향적이며, 역사적 그리스도를 증언함으로써, 은총과 은택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인격적 현존을 현실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현존인 성령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인간이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리를 깨닫게 한다.

구속의 통치자

리커구스 스타키(Lycurgus M. Starkey)가 지적하듯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완성하는 성령은 구속의 작인(agent)이거나 통치자(administrator)이다.성령은 지배하는 힘이 아주 크다. 웨슬리는 이성과 경건의 사람들에게 던지는 호소라는 논문에서 선한 생각, 말, 행위 등 전체 구원의 사역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완성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기 위해 성령을 받아야 한다.로버트 쿠쉬먼(Robert F. Cushman)성령의 구속 사역이 웨슬리의 실험 신학의 첫째 원리라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성령의 사역을 소개하면서 빛이란 언어를 사용한다.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이라는 진리를 밝히는 과정이다. 따라서 자기 중심적인 죄가 가져다준 어둠은 성령의 현존으로 말미암아 양심과 어느정도 회복된 도덕법과 같은 선행은총안에서 부서져 나간다. 성령은 우리의 이해의 눈을 열어 어둠으로부터 놀라운 빛으로 안내한다. 진리의 영인 성령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한다.

2. 회개은총

선행은총은 성령의 주권적이며 회복적인 사역을 통해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깨우고 불러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응답하게 하고 자유롭게 한다. 그러나 완고한 죄인은 선행은총의 시작이 되는 영역들, 특별히 양심을 거스를 수 있다. 성령은 죄 깨닫게 하고, 생각나게 하며, 가르치회개의 과정에서 주도적이고 감독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심지어 죄로 가득한 영혼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기까지 한다. 특히 영적인 차원에서 성령의 지혜로움과 인간의 어리석음을 대조시키면서, 인간의 어리석음은 성령으로 극복되어야 한다고 웨슬리는 주장한다. 노예의 영과 양자의 영”(The Spirit of Bondage and of Adoption)이란 설교에서 성령께서는 우리를 깨우시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며” “우리의 이해의 눈을 열어 주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필요한 모든 지식알려 준다고 선포한다. 달리 말하면, 깨우치는 것과 그리스도의 빛은 짝을 이루어 함께 간다.

3. 도덕법

웨슬리는 도덕법을 선행은총의 결과로 이해한다. 성령은 깨어난 양심 안에서 역사를 계속하게 하며,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을 향해 죄인들이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는 않는지 양심을 내적으로 살피게 한다. 그러므로 죄인들이 마음에 간직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식, 곧 하나님의 마음의 사본인 도덕법은 하나님의 의와 정의의 통로를 드러내기 위해서 양심에 빛을 비추는 말씀과 성령의 결합 안에서 사용된다. 전능자 하나님의 성령이 세상에서 아직도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자의 마음을 깨워 강퍅한 마음을 부수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신다.여기서 의의 태양이 나타나 그의 영혼을 비추며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여 주신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이 주로 들음에 의해서이지만 때때로 읽음에 의해서도 도래한다.고 주장한다. 성령은 복음의 약속일 뿐 아니라 도덕법인 말씀을 통해서 도래한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죄를 용서받을 때 신인 협력이 일어난다고 쉽게 생각하지만 웨슬리는 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편에서 회개와 믿음으로 인도하는 과정에서는 신인 협력적일 수 있지만 죄를 용서받는 일은 하나님 홀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실천신학에서 성령의 회개사역은 죄인을 회개하게 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진심으로 회개하여 의롭다 함을 얻게 하고, 자범죄 뿐 아니라 타고난 죄(inbred sin)를 회개케 한다. 성령은 모든 색욕과 욕망을 포함한 육체적 본성이 믿는 자의 삶 안에 있음을 고통스럽게 인식하도록 한다. 이와 같은 회개은총의 두 번째 사역을 웨슬리는 복음적 회개”(evangelical repentance)부른다. 복음적 회개에서 다시금 도덕법이 주도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복음적 회개는 육체적인 본성과 원죄를 완전히 회개한다는 점에서 법적 회개와 구분된다. 여기서 원죄가 지배하지는 않더라고 여전히 남아 있다.” 이때에 성령의 회개은총과 조명은총이 현존한다.

4. 거룩한 사랑인 성령의 현존

웨슬리는 고통을 수반하는 확신의 사역을 통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내적인 왕국을 준비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마음과 마음의 성정과 열망은 사랑으로 변화를 경험한다. 신생순간 본성이 변화하게 될 때, 성령이 새로운 방식으로 마음에 거하게 된다. 웨슬리는 이 변화의 현존을 롬5:5을 빌려 표현한다.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그분의 사랑을 부어 주었다.하나님은 자녀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만물을 새롭게 한다. 성령의 임재는 점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믿는 자들이 이전에는 결코 이루지 못했던 거룩함과 같은 변화된 본성을 가져온다.

웨슬리 신학에서 종교의 목적이나 목표는 사랑에 집중되고 있다. 웨슬리는 무한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성령이 ... 우리 안에 모든 거룩함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고백한다. 인간은 교육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노력했다고 거룩해질 수는 없다. 웨슬리가 말하는 구속적 사랑의 거룩함은 믿음을 통해 은총으로 받는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모든 인간적인 덕목과 구분된다.

모라비안과 할레의 독일 경겅건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웨슬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 마음의 깊이에 있다고 보고, 눅17:21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미래에서 찾지 마라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러분 가운데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고, 모든 믿는 자들의 마음에 현존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 왕국이며 내적 원리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온전한 삶의 변화뿐 아니라 마음의 변화가 필요하다.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우리 마음에 좌정하사 의와 평화와 기쁨을 채우시는성령의 거룩한 초기 현존으로 인해 우리 마음에 세워진다. 말하자면, 나님 나라는 믿는 자들 가운데 거하면서 기질적 변화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현존이다. 웨슬리는 하늘이 (개인의 신앙의 정도에 따라) 영혼 안에 열려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현존을 하늘 나라라고 보았다.이런 맥락에서 종교가 내적 원리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음이며, 의와 참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는 영혼의 갱신이라고 강조한다. 이 같은 역사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결코 우리 안에 일어날 수 없다.고 강조한다.

5. 성령의 은사와 열매

18세기의 웨슬리와 감리교인들은 성령의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특별 은사와 일반 은사를 구분한 웨슬리는 성 미카엘 교회 교구목사였던 다운즈(Downes)에게 보내는 편지에나는 모든 참된 기독교인들에게 공통으로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 외에 성령의 특별 은사성령의 다른 영향과 작용을 온전히 거부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반대자들과 상관없이 특별은사와 일반은사의 구분이 갖는 가치를 주장하면서 교회가 오늘날 열광주의라 부르는 광신을 부추기는 것을 멈추라고 하였다.

웨슬리는 성령의 특별 은사가 초대교회에 주어졌음을 인정한다. 구원의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흐른다는 가르침을 입증해야 했던 사도 시대의 상황이 기적의 은사를 요청했지만 이는 이내 사라지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목회의 지위를 강조하면서 상대적으로 은사를 간과했을 뿐 아니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상실된 당시 기독교인들의 세속성때문이었다.

또한 웨슬리는 성령의 특별은사와 관련해 호기심과 불필요한 의문을 피하고자 종종 논의의 초점을 성령의 일반적인 열매로 옮겨가곤 했다. 성령의 일반적인 열매에 대하여 웨슬리는 확신하는 바, 세대를 초월해 언제나 있어 왔고앞으로도 생명력이 있으며, 성서적인 기독교의 중요한 징표될 것이라고 말했다. 성령의 증거와 직접적인 결과는 성령의 열매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온유, 양선이다.” 이 요소들은 갈5:19-25에 나오는 육체의 열매들’, ‘성령의 열매들의 대비를 보여줄 뿐 아니라, 성령의 능력은 믿는 자들에게 믿음을 통해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모든 외적인 의를 완성할 수 있게 하며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걷게 한다.

웨슬리는 성령의 열매는 성령께서 실제로 사랑으로 역사는 것이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믿는 자들 안에 성정이라고 밝힌다. 성령의 열매가 모든 참된 기독교인의 분명한 특권이라고 상기시키면서 의와 사랑, 기쁨과 평화 같은 은총들이 기독교인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령의 열매란 성령을 따라 살게 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지 기분이나 감정이 아니다.

6. 성령의 확신

웨슬리는 성령의 열매, 거리낌 없는 양심, 하나님의 뜻의 표현인 도덕법을 지키는 것, 이 모두가 우리 자신의 영의 증거 혹은 간접적인 증거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나도 성령의 열매를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성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결론을 내린다.즉 (거리낌 없는 양심, 믿음, 소망, 사랑, 그리스도의 계명 지키기, 성령의 열매 등과 같은) 표증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내가 성령의 증거라고 말한 것은 영혼의 내적 각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순간적이고 직접적으로 나의 영에게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고, 나의 모든 죄가 사해져 하나님과 화해했다고 증언한다. 롬8장 16절의 진리를 반영하고 있는, 우리 영혼을 향한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녀야 하는 공통의 특권이다.

18세기 게몽주의 시대에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를 주장했던 웨슬리는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광신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가장 심한 비판은 엑세터 주교였던 레빙턴(Lavington)이 쓴 감리교인들과 교황주의자들의 광신주의 비교(Enthusiasm of Methodists and Papists Compared)라는 책에서 등장했다. 웨슬리는 광신주의의 본질”(The Nature of Enthusiasm) 이란 설교를 통해 곧 바로 응답했다. 여기서 그는 진정한 의미의 광신주의는 우리에게 부족한 은사와 은총을 갖고자 하는 열망이며 은총의 수단을 빌리지 않고 종교의 목적이나 목표를 얻고자 하는 열망이라고 주장했고 당시의 이름뿐인 기독교가 현실적인 광신주의라고 주장했다. 즉 순수하고 거룩한 종교, 진정한 의미의 광신주의 안에서 매일 매일 성장해 가기를 기대하라. 그러나 현실적인 광신주의, 곧 이름뿐인 기독교로부터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광신주의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능력이라고 기록한다.

또 다른 도전은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회가 성령의 직접적인 증언이 기독교의 신앙의 본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믿는 자들을 성만찬, 교회의 질서, 언제나 위로를 담을 수 있는 구속의 담지자인 거룩한 사회에 속해 있다는 식으로 안내했다. 이처럼 성령을 제도 속에 가두는 것을 우틀러는 성령의 길들이기라 표현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확신의 교리, 특히 직접적인 증언은 기독교 신앙에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감리교인들에게 이 성령의 증언을 모든 인류에게 전하도록 한 것이라고 여겼고 이 직접적인 증언이 바로 고유한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 증거를 부인하는 사람은 결국 믿음으로 인한 칭의를 부인하는 자이다.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18세기 감리회 운동의 교리적 강조점은 온전한 성화였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웨슬리가 이성의 시대에 온전한 성화 만큼이나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를 주목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는 성서적 기독교는 자기-준거적 이성(self-referential reason)의 한계를 넘어 믿음과 소망, 사랑이라는 신학적 덕목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인간의 심령에 현존함으로 거룩한 사랑의 인격적 연합을 이루게 한다.

7. 확신이 갖는 미묘한 차이

웨슬리의 확신의 교리는 다른 가르침보다 많은 수정을 거쳤다. 그러므로 그의 확신의 교리를 살피는 것은 웨슬리의 전체적인 역동적 실천신학을 살피는 중요한 창이다. 두 번째 문제는 웨슬리가 새롭게 제시한 구분에서 고유한 기독교 신앙(진정한 기독교)의 기준을 폄훼하거나 폐기했는지의 물음이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점에서 이전의 오류를 수정했기 때문이다. 첫째, 하이젠레이터에 따르면 영국의 모라비안들은 본질적으로 회심과 완전을 동일시하는새로운 구원관을 제시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죄의식과 능력, 존재의 이름으로 자유와 죄를 구분함으로써 모라비안들의 입장에 반대하였다. 구속이나 최초의 성화가 죄책(칭의), 죄의 능력(중생)으로부터는 자유롭지만, 그 존재(온전한 성화)로부터는 자유롭지 않다고 보았다. 즉 육체적 본성이나 타고난 죄(inbred sin)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여전히 남겨진다는 것이다.

둘째, 웨슬리는 완전한 확신과 칭의를 가져오는 믿음을 연관시켰던 초기 입장을 수정했다. 실로 야외설교를 시작한지 1년도 안되어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교리를 완전한 확신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확신으로 인식했다. 1755년 리처드 톰프슨(Richard Thompson)과 교환한 서신에서 웨슬리는 자신의 확신 교리를 두 가지 면에서 정리했다. 우선 악마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 사이에 중간 지대가 있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들도 믿음이 어느 정도는 있다. 때문에 주의 만찬에 참여하도록 허락할 수 있다. 반면에 기독교인의 믿음에서 확신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했다. 여전히 나는 마음을 정결케 하는 본래의 기독교 믿음은 이러한 확신을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1765년에 펴낸 성서적 구원의 길이란 요약 설교에서는 믿음과 확신을 유지하는 것을 연결시켰다. 분명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은 확신을 포함합니다 ... 그리스도는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두 이슈를 분석해 보면, 첫째, 노년의 웨슬리는 종의 믿음과 그 수용을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확신과 혼동했다. 왜냐하면 노예의 영아래 있는 존재, 곧 종은 의롭다 하는 신앙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를 믿어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사람이라고 정의했다.

둘째, 웨슬리는 예외적인 경우에 의롭다 함을 얻고 중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지나 몸의 무질서 때문에 자신의 죄가 용서 받았다는 확신이 부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말은 웨슬리가 두 가지 방식으로 종의 믿음을 정의했음을 의미한다. 먼저, 광의의 의미에서 종의 믿음은 종의 믿음에 상응하는 것으로 칭의와 중생, 확신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 다음 협의의 의미에서 종의 믿음은 칭의와 중생은 포함하지만 확신은 포함하지 않는 경우이다. 흥미로운 것은 두 번째 의미에서의 종의 믿음은 칭의와 중생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 기독교의 (구원하는) 믿음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여전히 이 믿음이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고유한 기독교 믿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웨슬리의 확신교리는 아래와 같이 세 단위로 나누어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 자녀의 믿음

(진정한 기독교)

종의 믿음

(광의의 의미)

종의 믿음

(협의의 의미)

양자의 영

노예의 영

노예의 영이 아님

증거가 있다(성령)

증거가 부족하다

증거가 부족한다

의롭다함을 얻었고

하나님께로 남

의롭다함을 얻지 못했고

하나님께로 나지 못함

의롭다함을 얻었고

하나님께로 남

성령의 증거가 있음

죄로 인하여 증거가 부족함

(많은 사람; 일반적임)

무지나 몸의 무질로서 인해

증거가 부족함

(소수의 삶; 예외적인 경우)

노후에 웨슬리는 확신과 본래의 (진정한) 기독교 믿음을 동일시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그의 설믿음에 대해서”(On Faith)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자녀의 믿음은 본래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확신입니다. 이 확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나는 나를 사랑했고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준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지금 누리는 생명을 산다.고 증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이 확신을 가진 자들은 누구든지 성령께서 그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는 바를 자신의 영으로 증거합니다.’”

8. 온전한 믿음의 확신

은혜 위에 은혜를 입은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웨슬리는 온전한 믿음의 확신이란 말을 사용하여 온전한 성화에 이르는 성령의 증거를 표현하고자 했다. 여기서 말하는 확신은 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마음이 사랑 안에서 완전해졌기 때문에, 모든 의심이나 두려움과 상관이 없는 확신이었다. 웨슬리는 요일4:18을 변용해 확신의 다른 차원들을 표현했다. 자연인은 두려움도 없고 사랑도 없습니다. 죄에 대한 자각을 한 사람은 사랑은 없고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사람은 사랑과 두려움이 공존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사람(아버지)은 두려움은 없고 사랑이 있습니다.” 절대적인 믿음의 확신이 의심과 두려움을 내어 쫓지만, 이 확신은 미래의 확신이 아니고 다만 현재의 확신입니다.예컨대 믿음의 확신은 미래의 가능성에 속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실재에 속한다.

9. 전문 용어에 대한 물음

그렇다면 웨슬리가 성령의 사역을 기술할 때 오순절의 용어를 사용했는가? 성령의 세례와 온전한 성화를 거의 동일시 했는가? 웨슬리는 믿는 자의 삶에서 역사한 성령의 사역을 기술할 때 성령을 받음성령이 충만함’,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이라는 세 가지 기본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1)먼저 성령을 받음이란 표현을 사용할 때 기독교인의 완전에만 한정시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의롭다함을 받을 때 모두가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충만함이라는 두 번째 구절은 교차 가능한 방식으로 사용했다. 어떤 때는 신생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했고, 또 어떤 때는 온전한 성화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공정함과 정확함을 가하기 위해 웨슬리는 성령 충이란 용어를 사랑으로 완전한 사람들과 연관시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1771년 벤슨 (Joseph Benson)에게 보낸 편지에서 웨슬리는 성령 충만이란 용어를 온전한 성화를 말하기 위해 사용했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성화만을 의미하기 위해 말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이란 표현을 온전한 성화와 밀접하게 관련시켰다고 예상해 볼수 있으나 여기서도 그 관계가 명증하지 않다. 너희는 ---성령 세례를 받을 것이라는 행1장5절에 대해 웨슬리는그러므로 모든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 끝까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주석했다. 후기 감리교에서는 성령의 세례와 기독교의 완전이 강력하게 연결되었지만 감리교의 아버지인 웨슬리 자신의 글에서는 이점이 분명하지 않았다.

우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웨슬리의 용어 사용에 대한 문자의 분석에 따르면, 웨슬리는 온전한 성화에서 성령의 역할을 기술하기 위해, 독특한 오순절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죄의 확신이든 씻김이든 아니면 확신이든, 일반적으로 중생과 온전한 성화라는 완전히 다른 사역을 설명할 때 동일한 용어를 사용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듯이,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그러므로 성령의 증거가 없이는 누구도 칭의와 온전한 성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자료를 본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해석학적 단서는 웨슬리 자신이 사용했던 용어나 성령의 역할과 관련하여 광범위한 유사성을 보여 주는 중생과 온전한 성화의 병행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 이 병행 구조에서만 웨슬리의 성령의 교리, 확신의 교리 혹은 이 교리들과 관련된 모든 교리가 본래적으로 이해될 것이다.

10. 온전한 소망의 확신

믿음의 온전한 확신이 최고의 확신이 아니다. 웨슬리는 온전한 소망의 확신을 제시한다. 믿음의 온전한 확신이 현재의 용서와 관계한다면 소망의 온전한 확신은 미래의 영광과 관계한다. 웨슬리는 소망의 확신을 성령의 은총과 은사로 독특하게 이해한다.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망의 온전한 확신을 주심으로’ ‘약속의 성령으로 우리를 인 치신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받는다는 확신이 의심의 가능성을 배격한다.’”

구원의 순서의 최고 단계에 이르면 웨슬리의 실천신학은 하나님의 은사가 선험적인 협력에 기반을 둔, 온전히 성화된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와 목적에 따라 주어지는 하나님의 완전한 자유를 강조한다. 따라서 그의 정교한 신학적 사유는 신-인 협력적 입장을 넘어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의 선성과 자유, 풍요로움을 강조한다.

확신

(중생)

믿음의 온전한 확신

(온전한 성화)

소망의 온전한 확신

(중생이나 온전한 성환)

어느 정도의 확신, 때때로

의심이나 두려움이 있음

지금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다는 분명한 확신.

모든 의심과 두려움이 없음

궁극적 구원으로 모든 의심과

두려움이 없음

히6:11을 주석하면서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소망의 온전한 확신은 ... 하나님의 인내의 은총과 영원한 영광과 같은 정도의 (성령의 직접적인 영감으로 영혼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증거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는 소망의 온전한 확신을 죄에 대한 보장이라고 왜곡시키려 했던 래의 견인이라는 가르침이 지닌 율법페기론적인 오류를 피해가고자 했다. 로(Hester Ann Roe)게 보낸 편지에서는 소망의 온전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의심과 의심에 대한 두려움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향유할 것이라는 가르침과 성인은 누구라도 은총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을 이라는 의견을 분명하게 구분했다. 달리 말하면, 죄의 권세나 지배에 굴복하게 되면 구름에 가려져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분리되기 때문에 온전한 소망의 확신이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소망의 온전한 확신이 미래 행동의 확신을 포함하지 않는다. 성서에서 나는 이를 증거하는 단어를 찾지 못했다.

11. 은총의 지각

웨슬리는 왜 직접적인 증거를 주장하였는가? 경험론에 기울어 있던 시대에서 웨슬리는 어떻게 성령의 역사가 인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보다 온건한 물음을 던졌다. 성령의 사역이 감각 느낌이나 감각 인지가 자연적인 오감을 통해 인지될 수 있다는 개념을 거부하고, 믿음의 능력을 통해 작용하는 영적 감각을 주장했다. 이 영적 감각을 통해 은총의 지고의 실재들이 인식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러한 관심은 성령의 직접적 증거의 요소들이 신비로 남아 있다 하더라도 어떤 면에서 믿는 자들이 성령을 인식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웨슬리는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를 가진 한 인격이 다른 인격에게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는지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성령의 증거를 가진 사람은 그 증거를 갖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의 증거는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웨슬리는 인간의 마음에 성령이 임재 한다는 것은 지속적인 영감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숨을 불어넣으시고, 또 역으로 우리 영혼은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숨으로 숨을 쉰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영혼에서 행하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활동이 인간 영혼을 깨워 하나님을 향해 반응하게 된다. 그러나 웨슬리는 먼저 은총을 받는 일이 없이는 응답할 수 없다고 보았다. 영혼은 수여자에게 대해서 은사에 대해서 유연하게 수용적이어야 한다.

12. 삼위일체

웨슬리는 믿는 자의 영혼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심는, 성령의 역동적인 역할을 말할 때 미국의 감리교 번안을 위해 참고한 영국 국교회 종교 강령의 성 삼위일체 신앙에 대하여를 자연스럽게 참했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며, 참되시고, 살아 계신 실재시며, 영원하시고, 몸도, 지체도, 감정도 없으시며, 무한한 능력과 지혜와 선을 가지시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창조자이시다. 그리고 신성의 통일성 속에는 세 가지 성품이 있는데, 본질과 능력, 영원성에 있어서 일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성삼위일체로 존재한다.

웨슬리는 이 원본을 편집 각색하면서 감정도 없으시며라는 구절을 빼버렸다. 본래적으로 거룩한 사랑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감정도 없으시며라는 구절을 생략함으로써 거룩한 사랑의 기질이나 열정을 가르치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는 것을 새롭게 함으로써 자신의 신학 안에 성령의 관대한 역할을 제시한다.

13. 필리오크베 문구

삼위일체의 역동적이며 관계적인 개념에 대한 관심은 서방의 필리오크베 문구를 웨슬리가 인정는 데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필리오크베 문구는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또한 아들로부터도 발현했다는 이중 발현의 의미를 담고 있다. 589년 제3차 톨레도 공의회에서, 그리고 또한 아들도라는 문구가 니케아 콘스탄티노를 신경의 아버지로부터 발현한 ... 성령이라는 문구로 뒤에 덧붙여지게 되었다. 때때로 필리오크베 문구는 아들과 성령의 연결을 축하하고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위격들의 신비한 사랑의 관계를 제시한다는 이유로 서방교회의 예배 때 노래로 불려졌다. 필리오크베 문구의 성서적 근거는 벧전1:11에서 성령에 대해 그리스도의 영이라 한 부분을 아버지로부터 그리스도에 의해 보내어진 영으로 주석함으로써 웨슬리는 필리오크베 문구 삽입을 지지했다. 진정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성령이 발현했음을 보지 못하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아들과 성령은 분리될 것이고, 서방 신학자들의 관심이었던 신성의 일치와 조화도 훼손될 것이다.

13. 웨슬리의 삼위일체 용어 사용

초기 교부들이 사용했던 삼위일체’(Trinity)삼위일체의’(triune) 라는 전통적 용어가 웨슬리의 글에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인의 완전이라는 설교에서 웨슬리는 하늘에는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라는, 셋이 새겨져 있는데 이 셋은 하나라고 주장한다. 1785년에 행한 새 창조(The New Creation)라는 설교에서는 종말이 되면 성령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과 지속적으로 연합하는 때가 도래할 것이며, 셋이면서 한 분이신 하나님과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지속적으로 향유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셋/ 하나 하나님이라는 성서적 용어를 사용할 때 웨슬리는 어떻게 이것이 그러할 수 있는가? 어떻게 실로 하나가 될 수 있는가?라는 사색적 물음을 하기 싫어했다. 웨슬리는 1771년 마치 양(Miss March)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답했다. 신비는 이들 셋이 하나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어떻게 하나인가를 설명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설명 방식에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그 사실 자체를 믿습니다.삼위일체라는 설교에서는 웨슬리는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은 셋이면서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방식과 방법을 나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그 방식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밝혔다.

또한 웨슬리는 삼위일체의 구분된 위격들에 대한 진리는 믿는 자들의 삶 속에 일어나는 활동적인 구원의 과정에서 인식된다고 주장한다. 1777년 친구 찰스 페로닛이 처음에는 중재자 예수에게로 인되되었고그후 아버지와 교제 했으며, 다음으로 성령과 교제한 후, 전체 삼위일체와 연합함보고는 삼위일체의 위격들과 인간으 영적 경험의 성숙의 상관관계를 주장했다. 그러나 1787년 맥스웰 양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것이 사랑안에 완전한 모든 사람들의 경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랑 안에 완전했던 몇몇 사람에게 적용되는 세/하나이신 하나님의 구분된 위격들의 경험적 증거와 신성의 위격들이 갖는 정상적인 활동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셋-하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참된 기독교 신앙과 모든 살아 있는 종교와 얽혀 있다.”주장한다. 누군가 기독교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안에 증거를 가질 때, 하나님의 성령이 그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할 때이다. 말하자면, 결국은 하나님 성령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공로를 통해 그를 받아들였음을 증거할 때이다. 이 증거를 가짐으로 그는 아버지를 존귀하게 하듯이 아들과 찬양을 받을실 성령을 존귀하게 한다.

14. 삼위일체와 거룩한 사랑의 용어

웨슬리는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에게 계시되었는가를 말하는 경세적 삼위일체에 초점을 두고 이 계시의 역동성을 탐구했다. 따라서 믿음을 가진 마음은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변화를 경험하고 거룩한 사랑의 흐름에 따라 응답한다. 이 경우 양자의 영은 믿는 자들이 아들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 받는자녀가 되게 하는 효자의 영이다. 이들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그로 인해 이들은 좀 더 깊이 하나님의 사랑의 삶에 참여하도록 초대 받는다. 이 사랑은 그 순결과 아름다움이 뛰어난 사랑이며 복음의 은총이 넘치는 자유 안에 곧 죄의식과 죄의 존재로부터의 궁극적인 자유 안에 나타나는 사랑이다.

웨슬리는 자신의 셋/하나 하나님의 교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사색적인 비실천적인 가르침이 아니고 본다. 오히려 성령은 말씀을 통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삶에 참여하도록 믿는 자들을 부른다. 예컨대, 거룩한 사랑의 삶으로 부른다. 따라서 하나님은 단순 명사가 아니라 역동적이며 인격적이고 참여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동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아버지는 구원을 계획하시고, 아들은 우리에게 오셔서 죽고 부활하시며, 성령은 타락한 인간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증언하고 심어준다. 아버지와 아들, 성령의 역할인(하나님 존재의 반영으로서) 하나님의 사역과 (점증하는 변화 안에서) 인간의 구원 과정 사이의 상관관계는 결국 구원받는 자들이 창조의 빛나는 거룩한 사랑을 반영하고 있고, 쓰여진 영광의 상징인 삼위일체의 표’(Transcripts of the Trinity)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

15. 오늘과 내일 : 오순절 종교의 등장

미 감리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파엠은 1894년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 하나님의 치유, 은총의 2차 사역으로서의 온전한 성화, 성령 세례의 3차 축복을 설교했다. 파햄의 학생이었던 아그네스 오즈면(Agnes Ozman)은 성령세례의 증거로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파햄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흑인 성결 설교자 윌리엄 시모어(William J. Seymour)는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거리 부흥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방언(glossolalia)으로 말했다.

오순절 운동의 발흥의 뿌리를 감리교 아버지 웨슬리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오순절 계열의 학자인 랜드(Steven Land)“18세기 웨슬리의 운동과 19세기 성결운동이 없었다면 20세기 오순절 운동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에 비춰보면 오순절주의의 줄기는 “19세기 성결 전통과 닿아 있고, 간접적으로 감리교의 주제와 연결되어 있으며 더 깊이는 경건주의와 청교도주의에 연결되어 있다.

오순절절 원초주의는 성령세례와 오순절적 주제들과 용어가 점차 웨슬리적 / 고등-삶 초교파적 조직망(Wesleyan/Higher-Life interdenominational network)과 얽히면서미국 부흥운동을 통해 나타났다. 또한 오순절적 상상과 성령세계를 강조했던 웨슬리의 친구 플레처의 글이 널리 확산되면서 우드(Laurence Wood)를 통해 더욱 강조되었다. 빈슨 사이넌(Vincent Synan)미국 오순절주의의 역사적이고 교리적인 뿌리는 웨슬리 전통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오순절주의는 역사기술(historiography)을 발전시켜 생명이 넘치는 성서적 기독교를 강조했다. 많은 예언자들은 대중적이고 세속적인 기독교에 도전했다. 루터(칭의), 웨슬리(성화), 오순절주의(성령충만)의 출현은 필연적이고도 피할 수 없는 개혁을 불러왔다.

오순절주의는 미국 종교세계에서 오순절주의가 갖는 경건주의의 성향 때문에 제3의 힘’(third force)으로 불렸다. 심지어는 개신교와 구분하기 위해 제4의 힘”(fourth force)이라고도 불렀다. 20세기 초의 오순절주의자들은 성서의 권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필연성, 회심의 필요, 복음화의 지상명령을 강조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대중”(proletarian masses of people)에 속해 있었다. 오늘날 오순절주의는 초기에 양분됐던 현상을 통합하여 세계에서 가장 사회적으로 활동적이며 성령이 충만한 기독교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웨슬리의 중생 교리와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 교리와 개인의 삶에 나타난 성령의 활동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오순절주의는, 이미 미래에 받을 능력을 믿는 자들이 미리 맛보았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능력을 주는 은총은 성령의 열매와 다양한 은사 속에서 나타날 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과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매력적인 승리가 선포되는 구원론적 낙관론을 갖게 한다. 즉 가난하고 억압을 받았던 자들이 압제들과 영적인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곧 인간 정신을 타락시키고 억압했던 죄의 세력과 지배로부터의 자유라는 소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역동성으로 오순절주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매료시켰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오늘날 전임으로 일하는 기독교 지도자의 1/4이 오순절주의의 / 은사주의자들에 속해 있으며 부라질에서는 매면 50만면 이상이 가톨릭교회를 떠나 복음주의적(오순절주의의) 교회로 유입되고 있다. 한마디로 라틴 아메리카는 17세기 중엽의 중앙 유럽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개신교화 되고 있다. 한 연구에 의하면 라틴 아메리카에서 복음주의자 5명 가운데 3명은 오순절주의자이다라고 보고 되고 있다.

최근 여론 조사들과 인구 통계원들의 연구에 따르면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삶에서 능력을 주는 성령의 활동에 우선권을 주는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신앙이 21세기에 나타나고 있다. 이 자료들을 탐구하다 보면 감리교회, 웨슬리교회, 성결교회, 오순절 교회들 사이에 중요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화를 보면 이들은 존 웨슬리의 유산으로부터 방향을 제시받을 뿐 아니라 영적 생명력을 공급받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력 넘치는 새로운 성령 운동이 된 18세기 감리회 운동과 현대 오순절주의는 기존 세력에 도전하며 토양을 갈아엎을 뿐 아니라 성령의 은총과 깊이 치유하고 만족을 주는 사랑 안에서 자유를 얻어 누리게 된 마음의 생명, 곧 새로운 생명과 진정한 해방을 열어 간다.

제5장: 칭의, 우리를 위한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

유장환 교수

나머지 모든 것을 포함하여 우리의 주된 교리는 세 가지이다

회개의 교리, 믿음의 교리, 성결(거룩)의 교리이다.

회개의 교리가 말하자면 종교의 현관에 해당한다면,

믿음의 교리는 종교의 에 해당하고,

성결의 교리는 종교 자체에 해당한다.

Rupert E. Davies, The Works of the John Wesley. The Methodist Societies: History, Nature, and Design( 1989), 9:227.

웨슬리의 구원의 순서는 구조나 전문성이 결핍된 것이 아니라 칭의와 온전한 성화라는 두 가지 중심 요점으로 정리된다. 칭의온전한 성화라는 두 초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법률적인 것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신 참여적인 것 사이의 차이를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으로부터 받은 유산과 광의의 카톨릭교회로부터 받은 유산에서 비롯된 다양한 은총이해를 보여준다.

협력은총(가톨릭)

웨슬리의 은총 이해 가운데 한 가지가 인간과 하나님의 협력이라는 구조이다. 이것이 반-펠라기우스에 가까운 신인 협력으로 해석되지 않게 하려면, 넓은 의미의 선행은총이 이 같은 신인협력을 품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즉 웨슬리는 구속에서 처음 주도권은 언제나 하나님의 몫이라고 본다.

회개

확신, 회개,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과 같은 칭의와 연관된 교리들을 생각할 때, 먼하나님의 선행적 활동에 기초한 신-인 협력의 은총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슬리에게 있어서 회개는 칭의의 결과가 아니라 선행적 은총으로부터 흘러나온 것다. 이것이 루터와 개혁교회의 구원의 순서로부터 구분되는 웨슬리 구원의 순서이다. (비교 루터/칼빈칭의의 믿음 안에 (1)회개와 (2)그리스도를 믿음이라는 두 운동이 있다.)

웨슬리는 회개를 주요교리들 가운데 하나로 보았다. 그러나 회개는 종교의 문도 아니고 종교 자체도 아니며, 단지 종교의 현관에 지나지 않는다. 1741년 옥스퍼드 안에 있는 위선이라는 설교에서 그는 칭의에 이르는 초기 법적인 회개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을 나열하고 있다. 그러나 5년 뒤에 쓰인감리교인의 원리들내용을 비교해 보면, 후에 쓴 글에서 그는 회개가 죄에 대한 단순한 확신을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첫째, 너희는 회개를 단순히 죄의 확신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회개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일 뿐이다. 요리문답을 배운 어린이라면 누구회개 안에 죄의 용서;....기회가 주어진다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순종하려는 진지한 열망과 목표...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을 포함하고 있다.웨슬리는 이전에 기술한 회개의 요소들을 반박하진 않았으나, 회개 혹은 자기-인식, 영의 갈급, 자기-의와 자기-정당화의 거부라는 회개의 3가지 면 강조점을 두려했다.

회개에 합당한 행위들

회개에 합당한 행동들이란 내적인 통회와 은총에 대한 외적인 표현들이다. 1745년에 출판한이성과 경건의 사람들에게 던지는 호소라는 논문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이란 형제를 용서하고, 악을 멈추며,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법령을 사용하며, 받은 은총의 정도에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 기록했다. 첫 번째 형제를 용서하고라는 내용은 우리가 완고하게 이웃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사랑의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용서를 기대한다면 합리적이지도 않고 자비롭지도 않다. 이어서 나오는 악을 멈추며,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법령을 사용하며라는 것은 웨슬리가 다른 곳에서도 반복하여 사용하는 삼중구조다. 특히 신도회의 주요규칙으로 이 3요소를 사용함으로서 신도회를 통해서 회개함으로써 죄인들이 도래할 진노로부터 피하게 함임을 알 수 있다. 이 삼중구조는 다음과 같은 조항들로 구성되어있다.

1. 악을 멈추라: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는 것, 안식일을 더럽히는 것, 술 취함, 싸움, 무자비하거나 무익한 대화, 부를 세상에 쌓아둠 등.

2. 선을 행함: 벗은 자를 입히고, 나그네를 환대하며, 병든 자와 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며, 성화의 은총을 기다리며, 사랑의 사역을 감당함.

3. 하나님의 법령을 사용함: 기도와 성서읽기, 주의 만찬을 받음과 같은 은총의 수단을 강조. 마지막으로 우리가 받은 은총의 정도에 따라하나님께 순종함개와 그에 합당한 열매가 하나님의 회개은총에 대한 진지한 응답인바, 인간의 공로 개념이 배제된 응답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신-인 협력에 나타난 두면을 주목하여 보면, 한편에서는 회개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듯이 강력한 인간의 활동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가 받은 은총의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회개 은총이 인간의 순종과 수고에 앞서 능력을 주어 순종하고 일하게 한다.

회개의 필요성과 회개에 합당한 행위들

웨슬리는 회심 초기 옥스퍼드대학내 성 마리아 칼리지에서 행한 첫 설교<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에서 칭의의 믿음 이전의 모든 행위들은 완전히 거룩하지 못하고 죄 된 것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저주에 속한 것이라고 설교하였다. 그러나 1744년에 있었던 1차 메소디스트 연회에서는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죄의 확신을 의미하며 회개에 합당한 행위란 할 수 있는 한 하나님께 순종하고 형제를 용서하고 받은 능력에 따라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법령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다음 해엔 이를 발전시켜서 이성과 경건한 사람들에게 던지는 호소라는 논문을 통해서 어떤 의미에서는 회개와 그에 합당한 열매가 칭의 이전에 필수적이긴 하지만 믿음과 같은 의미와 같은 정도로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먼저는 칭의 이전에 회개와 그 열매의 필수성을 설명할 수 있었고, 다음으로는 회개와 그 열매가 의롭하지 못한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이해했을 경우 칭의 이전의 회개와 열매를 강조한 것은 웨슬리가 넓은 의미에서 가톨릭의 협력적 은총 이해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에, 회개와 회개의 열매가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종교개혁적 은총이해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회개, 회개에 합당한 행위, 믿음에 따른 구분들.

같은 의미가 아니다

같은 정도가 아니다

회개는 원접적으로 필수적임

회개는 의롭게 하지 못함

그에 따른 열매는 더 원접적으로 필수적임

그에 따른 열매는 의롭게 못함

믿음은 직접적으로 필수적임

믿음만 의롭게 함

협력(책임)은총

값없이 주시는 은총

가톨릭 전통

개신교전통

값없이 주시는 은총(개신교)

웨슬리는 주권은총”(SOVEREIGN GRACE)이란 용어를 칼빈주의자들과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가 담고 있는 여러 기본적인 개념들을 포용했다. 예로 1739년 값없이 주시는 은총”(Free Grace)라는 설교에서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칼빈주의자들과 생각이 같았다. 즉 구원이 인간의 능력이나 공로에 의존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칭의은총은 은총의 수혜자의 어떠한 선행이나 의로움, 행위나 존재에 기초하지 않는다.”‘오직’(SOLA)이라는 용어가 여기서 주목되는데, 이는 인간의 무능력 가운데 일 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이 강조된다. <예정론 성찰>우리는 하나님만이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며, 영화롭게 한다고 인정한다. 칭의, 성화, 영화이 세 가지는 구원의 전체를 포함한다.웨슬리그가 쓴 여러 글에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행위와 주권적인 활동을 강조했다.하나님은 칭의와 성화에서 주권적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방식과 때에 활동하며 누구도 하나님을 향해서 당신이 무엇을 행하신 것입니까? 라고 반박할 수 없다. 말하자면, 시간표는 하나님의 손에 있지 우리의 손에 있지 않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는 사람들이 원하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 것이지 그들이 원하는 때에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 것이 아니다.“모든 사람이 원하는 때에 칭의나 성화에 이르도록 믿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과 반대됩니다. 모든 사람이 원한다면 믿을 수 있다고 한 것에 나는 진지하게 견지합니다. 그러나 원하는 때에 믿을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나는 전적으로 부인합니다.아래 도표는 하나님께서 칭의나 완전성화을 값없이 주시며, 인간의 공로나 신-인 협력적 패러다임이 제시하는 선험적인 협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값없이 주시는 은총

*인간의 공로를 배제함.

*구속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함. 구원의 순서 가운데 하나님 홀로의 활동 영역들과 상응함.

*웨슬리의 홀로오직이란 용어는 sola 용어 사용과 상응함.

*값없이 주시는 은총의 열매는 신-인 협력적 모델에서처럼 선험적 협력의 기초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자비하며 사랑 많은 하나님에 의해서 자유로이 값없이 주어진다.

*죄인들이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 혹은 기독교인들이 온전한 성화에 이르기 위해서 뭔가가 먼저 되어야 한다든지 혹은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순전한 은총의 선물을 강조한다.

*이 은총이 불가항력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칼빈주의의 이해와 다르다.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은 거부될 수 있다.

*값없이 주시는 은총은 웨슬리의 개신교의 은총이해를 보여준다.

값없이 주시는 은총의 개념은 웨슬리 실천신학의 중요한 창으로 인식되지 않은 이는 웨슬리 신학에서 나타나는 두 구분된 사역의 의미가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신인 협력 패러다임에 융합되고 포함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먼저 회개에 합당한 행위는 하나님이 먼저 주도권을 취하고 인간이 응답함으로써 은총 안에 더욱 자라게 하는 신-인 협력적 상황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두 번째 의미의 사역(칭의)은 신-인 협력적 사역의 일부가 아니고, 하나님 홀로의 사역을 강조한다. 예컨대, 응답하거나 협력하기에 앞서 먼저 수동적으로 충분히 받아야 한다. 칭의, 온전한 성화를 얻기 위해 손을 뻗는 행위는 행위가 아니고 고백이다. 이 고백이 인격의 온전함과 자유를 지켜주기에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결정론, 저항할 수 없는 구원의 은총 개념을 극복한다. 그러므로 두 번째 의미의 사역은 값없이 주시는 은총으로 가장 잘 이해되어 진다. 이때 값없이 주시는 은총은 사랑의 하나님의 선한 은사들을 받아들이고 이 은사들에 개방하도록 배려하는 은총이며, 따라서 이 하나님의 선물들은 거부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웨슬리는 아르미니우스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구속의 과정에 나타난 신인협력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둘 다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과 은총으로 회복된 인간의 자유에 대해 같은 의견을 갖고 있지만, 웨슬리는 교회의 역사를 알고 있던 터라 초대 교부들의 광범위한 전통을 참고했다. 또한 종종 아르미니우스와 다른 방식으로 단독적 패러다임과 협력적 패러다임의 가치를 평가했다. 믿음과 행위를 설명하면서 아르미니우스와 같은 의미로 구분했던 웨슬리는 단독적 사역으로 읽는 것이 어떤 의미에선 정확하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홀로 인간의 행위와 전혀 상관없이 전체행위를 하신다. 우리는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며 영화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홀로의 사역임을 인정한다. 달리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둘을 구분하여 단독적 패러다임과 협력적 패러다임을 동시에 인정하는 모순을 극복하려 하였다. 이것이 바로 제3의 길이라는 신학적 형태로 웨슬리가 주밀하게 생각해낸 신학방법이었다. 웨슬리는 이 방법을 통해 복음 선포의 의미를 바르게 전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웨슬리의 구원론을 철저히 협력적 구조로만 읽어간다면, 하나님을 실제 인간의 응답에만 응답하는 존재로 제약하게 된다. 그러나 웨슬리는 루터나 칼빈과 함께 하나님은 놀랍도록 은혜로우시며 인간의 무력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홀로 활동하신다고 이해했다. 그러므로 신-인 협력적 모델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역할을 소개하고는 있지만 웨슬리 신학의 접속적 유형이 충분하거나 적절히 표현되지는 않고 있다. 웨슬리의 자료를 좀더 정확하게 분석해 보면, 신-인 협력적 패러다임은 보다 큰 접속 안에 속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홀로의 활동을 강조하는 개신교의 강조는 협력은총 혹은 책임은총의 요인에 포함될 뿐 아니라 동시에 책임은총과 값없이 주시는 은총의 접속이면서 카톨릭과 개신교의 연합이다.

하나님의 행위

인간의 행위

하나님의 주도권

하나님 홀로의 사역

협력은총

그렇게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책임은총

값없이 주시는 은총

실재 의미에서 완전한 선물을 받음; 결코 행위가 아님

의롭다 칭하는 믿음

아우틀러는 1738년을 기적의 해라고 불렀다. 모라비안교도였던 뵐러는 자신의 철학에 잠자고 있던 웨슬리를 깨웠다. 그는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를 정확하게 지적했다. 두 열매는 용서받았다(칭의)감각에서 오는 평화와 중생을 가져오는 성령의 임재(중생)으로부터 오는 능력이다.(Cf.행복과 거룩)

웨슬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란 설교에서 믿음이 무엇인지 부각시키기 위해 먼저 무엇이 믿음이 아닌지를 묻고 있다.

첫 번째,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은 이방인의 믿음이 아니다. 의롭다 칭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존재하며,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소박한 믿음넘어선다. 또한 이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아는 것과 도덕적인 덕을 수행하는 것 이상이다. 더구나 이 믿음은 모든 선한 일에 감사를 드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조차 넘어선다. 이 모든 것들이 단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의 믿음불과하다.

두 번째,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은 악마의 믿음이 아니다. 웨슬리는 악마도 지혜롭고 능력이 많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후히 주시고 공의로 심판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한다. 악마의 믿음은 놀랍게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심지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악마의 믿음이 구원할 수 없는 이유는 냉철하고 사색적일 뿐 결코 존재의 깊이인 마음과 관계하지 않는다.

세 번째,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은 사도들의 믿음이 아니다. 웨슬리는 비록 사도들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며, 병든 자를 고치고, 악마를 내어 쫓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을 향해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꾸짖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기 전 사도들의 믿음과 경험 후의 사도들의 믿음은 차이가 있었다. 이후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필요성과 공로를 인정할 수 있었고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능력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의롭다 칭하는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아니며, 도덕적 덕행의 수행도 아니고(이방인의 믿음), 성서의 가르침에 대한 동의도 아니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심을 아는 것도 아니고(마귀의 믿음), 심지어는 예수가 이 땅에 있을 때 함께했던 사도들의 믿음도 아니라면, 도대체 이 믿음은 정확하게 무엇이란 말인가?

1)구원을 받는 믿음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이 믿음의 진정한 대상이다. 이 점이 이방인의 믿음과 구분된다.

2)의롭다 칭함을 주는 믿음은 사색적이고 합리적이며 냉철하고 생명이 없는 동의이머리로 하는 생각의 훈련이 아니고 마음의 기질이라는 점에서 악마의 믿음과는 다르다. (교재241수정)

3)의롭다 칭함을 주는 믿음은 사도들의 믿음을 넘어선다. 의롭다 칭함을 주는 믿음그리스도의 죽음의 필요성과 공로를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인정다. 그러므로 의롭다 칭함을 주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인류를 구속하는 충분한 수단으로 보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간에게 생명과 불멸을 회복시키는 구제책으로 본다.

그리스도의 전체 복음에 동의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에 온전히 의지하는 것,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공로를 믿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고 우리 안에 살아계신 우리의 속죄와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의존하십시오.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가지는 확실한 확신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인간의 죄가 용서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과 화해했다는 사실입니다.

웨슬리의 후기 글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특징은 믿음의 본성을 영적인 의미로 그려내고자 노력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들음, 맛봄이 자연감각이듯이 믿음도 하나의 감각인데 영적 감각이다. 1770년 메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웨슬리는 믿음을 주로적인 봄으로 정의한다.믿음은 어둠이 아니고 빛입니다.”<감리교인의 원리들>에서 믿음은 우리 몸의 감각에 의해서 보여지거나 발견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확신이다.”<성서적 구원의 길>에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켰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음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이고 확신이다.

요약하면, 의롭다 칭하는 믿음은 여러 중요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데, 개념적 차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과 화해한다는 성서에 계시된 진리에 동의한다. 인격적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마음으로 신뢰하는 것을 포함한다. 감각적 혹은 경험적 차원에서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다는 하나님의 증거와 확신 곧 초자연적 사역임을 신뢰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의롭다 칭하는 믿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목회의 구속적 성격을 떠나서는, 혹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믿는 자가 은총을 넘치도록 받는 경험적 신뢰와 확신을 떠나서는 온전히 인식할 수 없다. 1787년 래써에게 보낸 웨슬리의 편지에서 그는 기독교 믿음의 독특성에 대해서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믿는 것은 이방인의 믿음이고, 구약을 믿고 오신 분을 신뢰하는 것은 유대인의 믿음이며,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음을 믿는 것은 기독교인의 믿음이다.고 쓰고 있다.

칭의 자체: 구원의 순서에서 첫 번째 초점.

웨슬리에게 있어서 칭의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은, 1738년 이후이다. 그는 1765년 뉴턴에게 한 논평에서 칭의의 관한 한 자신은 칼빈과 머리카락 하나의 차이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738년 이전의 웨슬리는 종종 성화와 칭의를 종종 혼동했었. 이는 그가 속했던 영국 국교회의 이해 때문이다. 그러면 성화가 칭의를 앞설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가운데 하나는 죄인들은 칭의의 열매인 선한 행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엄격하게 말해 선한행위와 선하지 않은 행위의 구분은 이전과 이후의 차이를 강조함으로서 칭의의 결정적 본성을 강조하는 구원론적 지표인 것이다. 웨슬리는 1746년 출판한 설교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에서 무엇이 칭의가 아닌지를 제시하면서 칭의의 본성을 제시한다.

1. 칭의는 실제로 정의롭고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칭의가 아니고 성화.

2. 칭의는 율법이 제기한 고발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칭의 받은 자들이 받아야 할 벌을 그들에게 부과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3. 칭의는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속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하자면, 칭의는 하나님이 이들이 의롭지 못한데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순전한 칭의의 선물을 값없이 주시는 은총으로 보고,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들이 아니라 불경건한 사람을, 이미 거룩한 사람들이 아니라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을 의롭다고 한다.

죄책(죄의식)으로부터의 자유인 칭의: 복음이 주는 첫 번째 자유

웨슬리는 믿음을 통해 은총으로 주어지는 칭의는 죄인들의 용서, 이들의 모든 과거의 죄의 용서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칭의는 하나님 아버지의 행위이다. 아들의 피 값으로 주고 산 속죄를 위해, 아버지는 칭의로 말미암아 과거의 죄를 사면하여 아버지의 의로움(혹은 사랑)을 보여준다.”

이 정의의 세 가지 중요의미.

1. 칭의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 즉 아들의 핏 값으로 주고 산 속죄에 기초한다.

나는 칭의에서 세 가지 요소가 함께 어울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 가지 요소하나님 편에서의 자비와 은총이라는 요소, 그리스도 편에서 자신의 몸을 드리고 피를 흘림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키는 요소, ...우리 편에서 그리스도의 공로 안에서 참되도 살아 있는 믿음의 요소이다.

2. 칭의가 죄의 사면이나 용서를 수반하기에 복음의 처음 자유로서의 죄책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온다.

칭의는 죄인에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시킨다. 이 관계는 더 이상 소외와 과도한 두려움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관계이다.죄책으로부터 구원 받은 이들은 형벌과 하나님의 진노의 두려움으로부터 구원받았다.

3. 웨슬리는 죄의 용서를 과거에 지은 죄에 국한한다.

그는 칭의를 미래의 죄까지 용서하는 것으로 보는 자유방임적 해석을 두려워했다. 이유는 칭의가 죄책으로부터의 자유라기보다는 죄를 위한 보증이 되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가

웨슬리는 전가(imputation)의 교리를 언급하면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성인이 아니라 죄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자들이 믿을 때 전가되어, 믿는 순간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자들의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웨슬리는 전가의 교리를 분명하게 주장했지만 전가의 교리의 남용에 대해서 상당히 불쾌해했다.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라는 특정 문구를 가지고 논쟁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는 성서적이지 않으며 필연적이지도 않습니다.

웨슬리는 전가의 교리로 인한 율법폐기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때때로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자들에게 전가된다.는 선언 다음에 바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의를 전가한 모든 사람에게 의를 불어넣는다고 덧붙였다. 웨슬리는 전가된 의를 본래의 의로부터 조심스럽게 구분했습니다.그러면 여러분은 본래적인 의를 믿지 않습니까? 본시 본래적인 의는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열매로서 있습니다. 전가된 의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전가된 의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성찰해보면 본래적 의(성화)는 어떤 의미든 칭의의 근거일 수 없다. Cf. 전가된 의 ---- 이식된 의

오직 믿음으로만에 대한 물음

웨슬리는 칭의를 의인들이 아니라 죄인들의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로마카톨릭 지도자들, 영국 국교회 지도자들과 불편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로마카톨릭교회 지도자들이 칭의의 본성을 낯설어 하는 이유에 대한 웨슬리의 주장.

1. 저들은 칭의와 성화를 완전히 혼동했다.

2. 로마카톨릭은 칭의가 허구가 되지 않기위해서는 믿음만으로가 아니라 성화로 인식되는 자비 혹은 사랑이 영혼에 주입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3. 칭의는 협력은총으로 봐야하며 따라서 존재와 행위 둘 다 의롭다 함을 받기위해 절대적으로 요청된다고 주장했다.

1738년부터 죽을 때까지 웨슬리는 반복적으로 그의 글 속에서 믿는 자들은 율법의 행위나 공로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주장했다.

캐논 비판, 존 캅비판 믿음 +회개?

윌리엄 캐논 :물론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인간이 응답한다는 일반적인 개념은 웨슬리의 가르침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제대로 이해한다면, 인간이 주도권을 갖고 하나님이 응답한다는 개념 또한 웨슬리의 가르침을 기술하고 있으며 웨슬리의 신학에서 낯선 것이 아니. 그 이유는 단순하게 말해서 일반은총 혹은 선행은총이 주어질 때 하나님이 주도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존 캅 :웨슬리가 의롭다 칭하는 믿음은 회개 없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일 이러한 노력들이 필수적으로 선행한다면 믿음만으로라는 교리에 조건 하나가 포함되게 된다.

웨슬리:경건치 않는 자들을 의롭게 하는 것은 그분을 믿는 것 외에 아무것도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다.”“믿음은 칭의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맞다. 믿음만이 칭의의 유일한 필수적인 조건이다.<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

웨슬리의 접속적 신학

1) 개신교이해 --칭의는 하나님의 홀로의 사역이며 때문에 용서가 주어지는 것은 절대로 인간의 선험적인 행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도덕주의 극복

2) 카톨릭이해 —-시간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죄인들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비범한 사역을 위해 기다려야 하는 하나님이 제정한 방법이다. ===>정숙주의 극복

간단히 말해서 웨슬리는 접속적 신학의 균형을 통해 도덕주의와 믿음 지상주의, 행위의 의와 정숙주의를 극복했다.

웨슬리 구원의 순서

회개, 회개의 열매들 :협력은총이나 책임은총 /선행은총에 대한 응답 / 인간의 행

칭의 : 값없이 주시는 은총 /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받음 / 하나님 홀로의 행위

칭의와 신생은 연결되어있다.

웨슬리는 죄인의 칭의 개념이 자칫 무법을 암시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없게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비록 그도 논리적으로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만, 율법폐기론을 간과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구분된 두 선물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으며, 다른 것 없이 홀로 어느 하나를 말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과 평화하기까지는 어떤 거룩함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칭의가 성화를 대신한다고 생각하거나 말할 수 없으며, 또한 성화가 칭의를 대신한다고 생각하거나 말할 수 없다.”정확하게 말해서 칭의란 중생과 동시에 일어나며, 중생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칭의은총과 성화은총이 분리된다면, 우리는 중생이나 최초의 성화가 지속적으로 부재한 상황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될 경우 웨슬리가 맥스필드를 비판할 때 인식했던 동일한 문제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나는 당신이 의롭다 칭함을 얻으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것도 아니고, 새로운 피조물도 아니며...성령의 성정을 가진 것도 아니고, 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거나 은총으로 자라날 수도 없다고 말하면서 직간접으로 칭의를 경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델포트 편지)

받아들임과 칭의의 차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지 않으면서 의롭다 칭함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놓이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들은 받아들여진 사람들이다. 그렇다고해서 받아들여진 사람들이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은 아니다. Cf.종의 믿음 ---->아들의 믿음

열쇠가 되는 시간적 요소들

모든 은총의 수단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자비와 사랑의 행위를 하면서 신-인 협력의 형식을 띠는 과정이 웨슬리의 구속에 대한 이해의 단면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웨슬리의 구원의 순서의 전부라고 결론짓는다면 실수이다. 웨슬리는 구원을 과정로 볼 뿐만 아니라 그의 생애를 통해 반복적으로 구속의 순간적 요인들을 강조다.나는 칭의 은총이 일반적으로 순간에 주어진다고 믿는다말하자면, 칭의 은총이 시공간이란 삶에서 구현되어 현관을 지나 문지방을 넘어선 것이라면, 그것은 극적이든 아니든 혹은 심지어 기억되든 기억되지 않든한순간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노년의 웨슬리는 구원의 순서에서 과정과 순간의 사이에서 섬세한 균형을 이루면서도 동시에 순간을 강조했다.하나님의 행위가 칭의 뿐만 아니라 성화와 관련해서도 순간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행위가 또한 점진적이란 주장에 대해서도 전혀 반대하지 않습니다.

영국 국교회 성직자들의 반대 입장에도 불구하고 웨슬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칭의의 순간적인 변화를 강조했다.

1. 죄인의 편에서 볼 때, 지금 이 순간 구원의 타당성에 주목하는 것이 구원의 은총을 수용하는 길을 열어준다.

2. 시간적 순간의 요인은 칭의 앞선 신-인 협력이 적어도 지금 끝이 났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웨슬리가 칭의 이전과 이후의 과정과 차별하여 순간에 집착할 때는 심지어 불가항력적 은총의 개념까지 마음에 품고 있었다. 나는 불가항령적 은총과 ...관련해서 믿음을 가져오는 은총은 그 순간에 불가항력적이라고 생각해한다. 대부분의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불가항력적으로 이들의 죄를 확신시켜 준 어떤 순간을 기억할 수 있다....그러나 이 순간 이전과 이후 하나님의 은총이 저항을 받을 수 있고, 저항을 받았을 수도 있다.

웨슬리는 구원의 교리의 과정과 순간, 신인 협력과 하나님 홀로의 사역 중 어느 한 면만을 주장하지 않고 양면을 긴장 가운데 주장했다. 전자는 웨슬리의 가톨릭적 성향을 보여주는 반면, 후자는 웨슬리의 개신교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면에서 웨슬리의 구원론적 긴장(과정)의 첫 번째 면에만 집중하고, 두 번째 면(순간)을 실제로 간과한다면 나머지 인간의 노력이 하나님의 은총의 광채를 소멸시킬 것이다. 반면 두 번째 측면(순간)을 너무 주목하게 되면 이 또한 오류에 빠지게 되는데, 이는 어떤 점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거나 받지 못할 때에는(과정, 협력, 은총의 수단을 사용함) 인간의 책임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1738년 이후 칭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믿음에 의한 칭가르침 ===>행위, 도덕법 순종, 신실성, 은총의 수단, 심지어는 선한 의도가 아니라 믿음만이 의롭게한다.

<<누구든지 원하면 구원받는다./그러나 누구든지 원할 때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원한다 회개, 회개의 열매, 은혜의 수단 인간의 활동

오늘과 내일: 용서의 실재들

웨슬리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용서받기 위해서 어떤 존재가 되거나 뭔가를 해야 한다는, 은총과 상관없는 생각으로 갈등한다. 이 생각은 실재로는 자신의 삶의 세세한 것까지 관리하고자 하는 죄 많은 자아의 마지막 열망이며, 구속을 야기하고자 하는 헛된 시도이다. 정당화 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버리고 빈손과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온다면, 선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광대하신 자비와 풍요로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6장 신생 : 우리 안에 계신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 유장환교수

당신은 경건(religion)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의 영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형성된 그리스도’, ‘그대 안에 있는 영광의 희망 그리스도’,

행복과 거룩함, 땅 위에 시작된 하늘나라,

그대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의 영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웨슬리 설교전집 3번 잠자는 자여 깨어라)

웨슬리 신학은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의 경우처럼 칭의와 용서의 문제뿐 아니라 신생과 거룩함 같은 문제들에 주목한다.

하나님의 선물인 중생은총

신생과 관련해서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획일적인 의미가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사랑(favor)능력(power) 혹은 능력을 주는 현존(enabling presence)이란 두 중요 방식으로 이해했다.

웨슬리는 이전에는 거룩함이 행위와 결단, 인간의 의지와 노력, 좋은 동기나 신실함에 중점을 두고 있었으나, 모라비안 교도들, 아 켐피스, 테일러, 로 의 영향을 통해서, 단순하고 경이롭게도 하나님의 은총의 충만함과 사랑의 결과에 의해서 자신의 삶이 실현된다는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다. 칭의와 중생이란 두 구분된 은총을 하나님 사랑의 은혜(favor)와 풍요로움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했다.

웨슬리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처럼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다. 믿음이 칭의의 조건인 것과 똑같이 성화의 조건이며 유일한 조건이다고 말했다. 여기서 거룩하게 된다는 용어에 웨슬리는 그 시작부터 중생을 포함하고 완전에 있어서 온전한 성화를 포함하고 있다. 즉, 죄인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은총으로 다시 태어날 뿐 아니라 의롭다 칭함을 얻는다.

웨슬리가 말하는 은총은 칭의와 중생 둘 다와 관계한다. 예컨대, 값없이 주시는 은총은 모든 인간의 공로를 배제하며, 중생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고(오직 하나님만이 영혼을 다시 나게 할 수 있다), 값없이 주시는 은총의 열매는 (신-인 협력적 모델에서처럼)선행적인 인간의 협력에 기초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절대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먼저 뭔가가 되어야 한다든지 뭔가를 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칼빈주의의 입장과 차이가 있다).

즉, 칭의은총과 중생은총은 둘 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유와 은총이 넘침을 보여준다. 칭의와 마찬가지로 중생도 완전한 선물이다.

하나님의 능력인 중생은총

웨슬리는 칭의와 중생의 교리 모두를 하나님의 자비를 강조하는 사랑(favor)으로서의 은총 개념과 관계시킨다. 그러나 칭의은총과 중생은총을 구분함으로써 사랑으로서의 은총개념에서 생겨날 수 있는 율법폐기론적 향방을 피해갔다. 한편으로 웨슬리의 칭의 은총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의롭다 칭하기 때문에 전가되고 전가되어야 한다. 죄인들은 그들의 속죄 행위가 없다면 칭의의 참 의미인 죄를 용서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론, 웨슬리의 중생은총과 그 결과는 공로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순수한 선물을 표상하지만 전가된 것이 아니라 여된(imparted)이다. 예컨대,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의 현존의 결과로 실제로 거룩하게 된다. 웨슬리는 개신교 전통과 가톨릭 전통을 포함시켜 전가(imputation)와 분여(impartation)를 융합한 제3의 대안을 제시했다. 이를 통해 다시금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의롭다 칭함을 받을 뿐 아니라 본래적으로 말해 중생의 다른 사역, 곧 이전에 결코 이뤄본 일이 없는 거룩함으로 변화된다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자신의 저술 여러 곳에서 중생은총을 하나님의 능력과 능력의 현존으로 표현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을 때 이 말은 때로 값없이 주시는 사랑, 공로에 의지하지 않은 자비로 말미암아, 죄인인 내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지금 하나님과 화해되었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능력인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자신의 선한 행복을 주시기로 작정하고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전자의 의미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인)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영혼에 나타나자마자, (후자의 의미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인)하나님의 은총이 그 안에 일어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서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웨슬리는 선한 청지기설교에서 깊고 중요한 변화를 일으키는 비범한 은총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요 행위여야 한다고 말했다.

즉, 중생의 상황에서 은총이란 믿는 모든 이들에게 합당한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며, 그리스도께 복종할 수 있도록 하는 성령의 능력이다. 이는 인간의 무능력에 초점을 맞추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은총을 받는 인간적 요소를 강조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한다.

피터 뵐러의 공헌

영국국교회의 영향가운데 살았던 웨슬리는, 거룩한 삶(Holy Living)을 추구했으나, 1736-1738년 모라비안교도들과 경건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이후 피터 뵐러와의 만남을 통해서 높은 기독교 윤리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 오류임을 알게되었다. 웨슬리도 은총의 수단을 포함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그 색조와 강조가 주로 도덕주의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뵐러는 웨슬리에게 오직 믿음으로만의 교리를 개인적인 결단으로 받아들이도록도전다. 이 도전은 (칭의와 중생 둘 다를 포함하는)구원을 가져다 주는 믿음은 이에 합당한 두 열매, 곧 행복과 거룩함, 다시말하면 용서함으로부터 오는 평화와 기운이 넘치게 하는 성령의 현존을 통해 나타나는 능력이라는 특별한 가르침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웨슬리는 중생의 믿음을 믿는자들에게 주신 선물로, 곧 하나님의 사랑으로 봤을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임한 능력의 현존,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게 되었다.

행복(평화)과 거룩함(능력)을 포함하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믿음의 경험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 경험

나는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 곧 그리스도만을 신뢰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분이 내 죄를 제거했고 죄와 죽음의 법으로부터 나를 구원했다는 확신이 주어졌다

중생에 대한 정의

웨슬리는 칭의가 하나님과의 달라진 관계를 수반하는 상대적인(관계적인) 변화였다면, 중생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행함으로 다시 우리를 탄생시킨 실제적인 변화였다고 주장했다.

칭의 : 관계적인 변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심, 외적관계의 변화, 사랑회복, 죄책없앰

중생 : 실제적인 변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심. 영혼의 변화, 하나님 형상회복, 죄의 세력 없앰

중생 : 하나님의 홀로의 사역---성령의 임재--- 하나님-인간의 협력참여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믿는 자의 반응 예) 달란트의 비유

예) 우리없이 우리를 만드신 분께서 우리없이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을 것이다.(어거스틴)

1) 필수적(necessary) 변화인 신생

원죄중생성화 반드시 거듭나야만 한다. 거룩과 행복을 위한 필수적인 변화

요3장3절 :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하지만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2) 거대한(vast) 변화인 신생

전체영혼의 변화, 거대한 내적인 변화

중생한다는 것은 또한 태어나거나 출생한다는 것이다. 그로 온전한 인간은 중생한다. 그러므로 온전한 인간은 태어난다.

고후5장 17절 :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존재입니다.

3) 결정적인(crucial) 변화인 신생

초자연적인 변화, 영적 탄생

===X 바른 의견(행위), 도덕성(의지), 은총의 수단사용(기획)

기적적이지 않은 회심이 어디 있는가? 회심이 자연적인 행위인가? 초자연적인 행위인가? 내 생각에는 이 기적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회심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믿는다.

열쇠가 되는 시간적 요소들

웨슬리는 성화의 보다 큰 과정으로부터 성화를 구분해 낸 다음 신생의 시간적 요인들이 갖는 의미를 설명함으로써 신생의 결정적인 특성을 강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웨슬리가 신생을 성화의 과정과 구분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면, 그 결과 신생 자체는 결정적이고 순간적인 사건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우리가 중생과 더불어 시작하는 영적인 삶은 사건의 본성상 자연적 탄생과 마찬가지로 처음 순간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웨슬리는 신생이라는 설교에서는 성화의 과정을 배경으로 하는 것과 대비해서 중생의 순간을 기술했다. 중생은 성화의 순간적인 측면이다.

이렇게 주장했던 웨슬리는 마치 양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밀한 접속적 긴장 안에 순간과 과정을 함께 주장했다. 순간 하나님께로 태어나고 또 순간 거룩하게 되지만,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고 거룩하게 된 이후 느리게 성장해간다.

그러므로 자연적 탄생과 성숙의 관계는 신생과 성화의 관계와 유사하다. 예컨대, 웨슬리는 순간적이고 기적적인 요소인 신생의 위기에 주목한 다음(and) 점진적 요소인 성화의 과정주목했다. 신생과 성화는 둘 다 인정되어야지 어느 하나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중년의 웨슬리뿐만 아니라 노년의 웨슬리도 여전히 순간에 대해 관심했다. 예를 들면 성서적 구원의 길이라는 설교에서 결코 신생의 순간과 불연속성을 반박하지 않았다.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는 동시에, 바로 그 찰나성화가 시작된다. 그 순간에 우리는 다시 태어나고’ ‘위로부터 태어난 것이며, 성령으로 태어난 것이다. 여기서 웨슬리 사유의 큰 밑그림은 웨슬리가 순간적 요소와 내적 종교, 곧 은총의 순간과 하나님의 활동을 동일시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웨슬리는 내면의 거룩함은 대체로 순간적인데 반해 ...외면의 거룩함은 대체로 점진적이다.라고 주장했다. 내면의 거룩함은 은총과 거룩함이라는 하나님의 활동을 의미하고, 외면의 거룩함이란 시간과 기회가 있다면 이들 은총의 선물을 수용하여 생겨나는 인간의 협력적 활동, 경건과 자비와 같은 행위들을 지칭한다.

예컨대, 웨슬리는 구원의 순서에서 순간적인 요소들은 죄를 용서하고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결정적 진리를 강조하기 위한 그의 중심 틀이다. 달리 말하면, 시간적 요소들은 구원론적 역할을 지칭한다.

해방을 가져오는 변화인 신생: 복음이 주는 두 번째 자유

웨슬리는 믿음은 하나님 진리에 대한 동의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를 확신하는 것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그러나 자신의 논평 속에서 믿음을 통해 우리가 다시 태어나며, 그 믿음과 분리될 수 없는 믿음의 열매가 바로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라는 내용을 새롭게 강조했다. 곧 믿음의 열매로서 자유는 모든 종류의 외적 죄를 뛰어넘는 권세이며; 모든 악한 말과 행위를 뛰어넘는 권세이고 내적 죄를 넘어서는 권세이다.이것이 바로 복음의 두 번째 위대한 자유이며 웨슬리가 자신의 생애를 통해 자주 가르치고 설교했던 내용이다.

결정적인 웨슬리의 죄와 은총 교리를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좀 더 정확하고도 자세하게 죄가 무엇인지 본래 어떻게 정의되는지를 기술해야 한다. 엄격하게 말죄란 인식된 하나님의 법을 의지적으로 범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본래적으로 말한다면 사랑의 법을 의지적으로 범하는 것이 죄이며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을 범하지 않으면서도 만 가지 방황하는 사유와 불복종에 대한 망각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담의 법을 범하여 이런 일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 정의에서 특별히 두 가지 요소에 관심이 간다. 첫째, 웨슬리는 죄를 의지적으로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두 번째로, 웨슬리는 죄를 계시되고 쓰여진 하나님의 법의 견지에서 정의하고 있다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웨슬리의 몇몇 동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갖는 위대한 자유에 대해 웨슬리가 설교하는 것을 들었을 때, 특별히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해지는 것에 대해 들었을 때, 이들은 그 가르침에 대해 난색을 보이면서 여러 조항을 제시했다. 그 중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 곧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를 범치 않는 자가 아니라 죄를 습관적으로 범치 않는 자라는 조항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습관적으로라는 용어를 덧붙이는 것은 하나의 도피라 판단하여 이에 대해 강한 의의를 제기했다. 웨슬리는 지속적으로 술을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좋다고 주장했던 어떤 술주정뱅이 예를 들어가며 자신의 비평가들에게 대답했다. 이 상황에서 습관적으로혹은 지속적으로라는 용어를 삭제함으로써, 웨슬리는 복음의 소중한 전제들 중 하나와 그 2차적인 위대한 자유를 지켜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존 캅의 주장>

웨슬리는 죄가 우리의 말과 행동에 붙어있다고 주장했기에 중생한 자들은 죄의 권세나 지배아래 놓여 있게 된다.

<반론>

첫째, 웨슬리는 믿는 자들 안에 있는 죄들에서 죄책과 죄의 권세와 죄의 존재를 구분다. 우리는 믿는 자들의 죄책과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들이 죄의 존재로부터 구원받은 것은 부인합니다.

둘째, 웨슬리는 신생의 표징을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라고 수없이 언급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죄로부터 구원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 구원자가 아닙니다.

셋째, 캅은 하나님의 자녀는 내적인 죄가 아니라 외적인 죄로부터만 구원받았다고 주장하지 웨슬리는 신생의 표징들에서 중생을 가져오는 믿음의 순간적이고 항구적인 열매는 든 종류의 외적인 죄와 내적인 죄를 지배하는 권세라고 설파했다. 거듭 요점을 말한다면, 내적인 죄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에 남아 있지만 지배하지는 않는다.

죄와 은총에 대한 웨슬리의 입장은 순간순간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 의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은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유로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믿음의 상실을 통해 다른 사람처럼 죄에 빠질 수 있다. 웨슬리는 이 둘을 함께 견지하고 있다.

웨슬리는 신생의 기준을 지켰는가?

1750년대

내가 네게 쉼을 주리라. 나 홀로 칭의로써 너희게게 값없이 죄책으로부터, 성화로써 죄의 권세로부터 쉼을 너희에게 주리라.

1760년대

그러나 믿는 자들은 성령을 따라 걷고 하나님의 영은 그들 안에 거합니다. 그 결과 이들은 죄책과 죄의 세력으로부터 혹은 한마디로 죄의 존재로부터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이 셋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죄책이 하나이며, 죄의 세력은 다른 것이며, 죄의 존재는 또 다른 입니다. 우리는 믿는 자들이 죄책과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죄의 존재로부터 구원받은 것은 부인합니다.” “죄의 존재로부터의 구원은 온전한 성화의 행위를 기다립니다.<믿는자들 안에 있는 회개>

1780년대

먼저는 죄책으로부터(칭의) 그의 피를 통해 구속을 받고, 다음은 죄의 권세로부터(중생) 구원을 받으십시오. 죄의 권세가 더이상 여러분을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죄의 뿌리로부터(성화)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으로 구원을 받으십시오.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유로서의 신생

신생의 첫 번째 표현은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신생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두 번째 표현은,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유를 수반한다. 웨슬리에게는 죄로부터의 자유와 거룩한 사랑이란 주제로 변용되어 나타나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유가 강하게 연결되어 존재한다. 실제로 두 자유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주조된 동전의 양면을 보여준다.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은 그 자체를 넘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리킨다. 곧 믿음은 사랑의 도구가 되면서 언제나 사랑안에서 활동한다. 믿음은 사랑의 도구이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열정에 관하여1781> :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사랑은 내면의 영혼 안에 서 있는 보좌에 자리합니다.

교회

경건의 삶

자비의 삶

거룩한 기질

하나님과 이웃사랑

신생의 가장 큰 표징 : 사랑

믿음과 사랑의 관계는 도구적이다. 믿음은 언제나 사랑을 가리키고, 사랑은 언제나 믿음을 가리킨다. 예컨대, 믿음은 사랑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 풍성하게 나타난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은 진정한 경건의 요점이자 본성이며 기독교 믿음의 진정한 내용이다.

오늘과 내일 : 다시 찾아온 회심

제7장 교회와 은총의 수단

거룩한 사랑의 공동체 유장환 교수

죄밖에는 두려울 것이 없고

하나님 밖에는 바랄 것이 없는

백 명의 설교자를 내게 주십시오.

이들이 성직자이든 평신도이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 지옥의 문들이 흔들릴 것이고

이 땅에 하늘나라가 세워질 것입니다. [존 웨슬리]

John Telford, cd, The Letters of John Wesley(Londo:Epworth Press, 1931), 6:272

웨슬리의 사상에서 기독교인 삶을 특징짓는 칭의와 신생은, 관계와 존재를 통한 거룩한 사랑의 자유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일어난다. 따라서 관계와 존재 속에서 일어나는 이 변화는 신앙공동체의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이 변화가 충분히 인식되든 그렇지않든 모든 기독교인은 교회와 관계되어야 한다. 따라서 웨슬리에게 교회란 구원의 방주로서 공동체가 낙원에 안전하게 이르도록 삶의 풍랑과 시련을 넘어 나아갈 수 있도록 택함 받은 그릇이다.

교회

메소디스트의 아버지인 웨슬리는 온 땅에 성서적 거룩함을 전하기 위해 교회의 본성과 그 본래의 지표를 성찰하던 중 영어 표현 가운데 교회보다 더 모호한 용어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교회론에 집중했다. 따러서 상황에 따라 교회는 건물이나 회중을 뜻하고 혹은 하나님의 현존 안에 함께 연합한 백성들의 몸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몸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작은 몸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 보편적 개념의 몸을 의미한다. 따라서 보편적 교회“‘한 영으로 연합된 한 몸이어야 하고, 한 믿음과 소망과 세례를 갖고, 한 분 하나님과 아버지’”를 모셔야 한다. 교회는 모든 지엽적인 영역을 넘어 보편성을 견지하고 당파적이고 분파적인 영역을 넘어선 본질상 구원받은 공동체이다. 그 핵심은 바울이나 아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다.

웨슬리는 영국 종교개혁의 유산인 교회의 보편성과 39개 종교 강령 19번째 나타나는 종교개혁의 입장을 따랐다.그리스도의 보이는 교회는 마땅히 요구되는 모든 상황에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대로 성만찬을 적절하게 수행하는 신앙인들의 회합이다.이 같은 종교개혁의 교회 정의는 국가교회, 특히 영국교회의 탄생을 가능케 했으며, 수행이나 가르침이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표준이 되었다.

웨슬리의 보편적인 정신은 그가 내세운 종교의 목적이나 목표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사람들 가운데 혼돈이나 교리적인 오류에 빠진 사람에게조차 거룩한 사랑을 가르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거룩한 보편적 교회의 실상을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강조했다.

교회가 거룩하다고 불리는 것은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거룩함혹은 성화라는 용어로 정의했듯이, 믿는 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아 에클레시아의 일원이 된 사람들, 혹은 처음부터 그렇게 거룩하게 된 사람들을 성도라 불렀다. 웨슬리의 또 다른 이해는 행5:10에서이다.이것이 신약성서 교회의 표본입니다. 교회는 복음으로 부름을 받아, 세례에 의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고, 사랑으로 생명이 넘쳐나며, 모든 교제로 연합한 가운데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으로 훈련된 공동체입니다.

교회에 대한 웨슬리의 다양한 정의는 보다 큰 긴장이나 접속의 구조에서 표현된다. 웨슬리는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만찬이 바르게 집행되는 제도로 생각한다. 다른 한편으론, 교회를 제도적이고 객관적인 각도에서 정의할 뿐 아니라 혈육을 가진 사람들, 특히 구주가 거룩하기에 그 백성들도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들로 정의했다. 이처럼 정의했을 경우, 교회는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령으로 살아난 성도의 거룩함으로, 부름 받은 살아 있는 하나의 유기체가 된다. 아우틀러는 이러한 변증법적인 긴장이 웨슬리의 전체적인 입장에 채색되어 나타나는데, 영국 국교회의 교회론과 재세례파의 교회론이 종합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 접속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은 제도적이며 기능적인 면을 강조하는 가운데 나타난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거룩한 백성들이 살아나도록 부름 받는 교회가 구성원들의 삶 속에 거룩한 사랑을 훈련하지 못한다면, 지역적인 관심에 몰입한 나머지 거룩한 사랑의 보편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제도적이거나 객관적인 요인과는 상관없이 교회가 그 정도를 상실한 것으로 보았다. 이 경우 개혁이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웨슬리는 메소디스트 운동의 시작을 정당화하기 위해 개혁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2. 쇠퇴하는 교회

웨슬리의 교회론은 그의 교회 역사기술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의 개신교적 해석에 따르면 종교개혁기의 제도적 교회는 쇠퇴기를 맞고 있었다. 웨슬리는 교회가 쇠퇴하는 데에는 세 가지 주요 요들이 있다고 보았다. 첫째는, 거룩한 사랑 안에 타자를 이웃으로 품는 복음의 보편성이 편파성(partiality)과 초기의 부족주의로 인해 크게 상처를 입었고, 그로 말미암아 특정 집단들이 자기들에게 속한 이들만을 챙기고 다른 집단의 사람들을 경홀이 여기며 전체 공동체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이러한 편파성은 언제나 교묘한 우상숭배를 수반한다고 보았다. 교묘한 우상숭배는 (계급, 인종, 경제적 상태, 문화, 언어, 혹은 교파와 같은) 준 궁극적인 가치를 궁극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분파성은 복음의 심장을 강타하고 하나님과 이웃의 보편적 사랑 안에 나타난 보편성의 근본 내용을 강타했다.

둘째, 웨슬리의 역사 기술은 재세례파와 자유교회의 모델과 비슷하다. 웨슬리는 4세기부터 로마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를 비중 있게 분석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부르고 기독교 교회와 성직자의 세계에 부와 권력이 흘러넘치게 함으로써, 이전에 있었던 수십 번의 박해가 가져온 것보다도 더 악한 일들을 교회에 불러들였다.라고 기술했다. 이뿐 아니라 4세기 교회와 국가는 너무 이상하고도 부자연스런 모습으로 융합되어 기독교와 이교도가 서로 철저하게 통합되었다.

셋째, 국가교회가 되어 교회가 부유하게 되고, 그리스도와 문화, 거룩한 삶과 세속적 삶이 융합된 것이 교회의 증언을 붕괴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국가가 부여한 명예와 권력이라는 외부 요인뿐만 아니라 훈련과 은총이 없는 신앙의 내면적 요인도 교회를 쇠퇴시킨 요인으로 보아야 한다.

부의 위험성 경고 : 부가 가진 위험은 무엇보다도 참되고 살아있는 종교의 내용을 구성하는 거룩한 성정의 타락이다. 부가 교회자체를 타락하게 하는 이유는 먼저, 신앙의 처음 열매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부가 하나님이 우주 안에 계시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을 완전히 잊게 하는 ...무신론의 유혹을 주기 때문이다.

3. 교회 개혁으로서의 메소디스트

메소디스트는 1729년 옥스퍼드에서 거룩함이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깨달았던 두 젊은이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이때 이들이 가졌던 생각은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교회를 개혁하려는 것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길로 인도하여 거룩한 백성을 일으켰다.웨슬리의 사역과 선교는 큰 교회 안에서 일어난 개혁 운동이었다.

젊은 웨슬리영국 국교회와 같은 거대한 국가교회들이 탁월한 신앙고백을 지켜냈지만 게으름에 빠져 이름뿐인 기독교로 전락했다고 보았다. 실로 18세기 영국의 많은 사람들은 영국인이 되는 것이 곧 기독교인이 된다고 생각하여 국가와 신앙의 차원을 혼합했다. 그러나 경건의 목적과 이유가 거룩함임을 분명하게 보았던 웨슬리는 1725년 존 그리스피스(John Griffiths)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미지근한 기독교인이 되어 경건에 관심은 있으나 경건의 감각은 죽어 버렸다.고 평했다.

대륙의 경건주의에 영향을 받았던 중년 웨슬리는 진정한 기독교의 동기가 내적 경건과 개혁, 곧 중생한 신앙인의 표징과 본래의 기독교 신앙의 내용인 마음의 기질과 성정에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면 산상수훈 강론6에서 웨슬리는 그리스도가 진정한 기독교를 구성하는 영혼의 기질, 곧 기질이 없다면 누구도 주님을 볼 수 없는거룩함 안에 담겨진 내적 성정을 우리 앞에 보여 주었다.고 강조한다.

노년의 웨슬리는 여전히 이름뿐인 기독교인(nominal Christan)과 진정한 기독교인(real Christan)을 구분했다. 그의 설교 지나간 시간들”(Of Former Times)에서 신성클럽의 목적이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도록 서로를 돕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즉 메소디스트의 목적은 새로운 소 종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었고, 성서적 거룩함을 나라 전체에 퍼뜨리는 것었다.

18세기 메소디스트들은 여러 세기 동안 타락할 때로 타락해 온 교회의 보편적형식에 도전하였다. 1750년 예언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미혹”(The General Delusion of Christians with regard to Prophecy)을 읽었던 웨슬리는 고대의 가톨릭교회가 몬타누스주의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했지만 실상은 그들은 진정한 성서적 기독교인들이었다.”고 확신했다.

도나투스 논쟁은 형식주의와 성례의 사효적 입장(an ex opere operato view)을 공고히 하는 이름뿐인 기독교를 낳는 요인이 되었다. 이처럼 교회가 타락과 남용으로 분명하게 잘못되었을 때에 개혁을 필요로 하지만, 교회가 제 길을 가고 있을 때라도 적절하고도 필연적인 판단을 떠나 의도되지 않는 결과로 나아가게 된다면 개혁이 요청된다. Cf. 사효적 입장(어거스틴) <--->인효적 입장(도나투스)

4. 독일 경건주의와 모라비안주의의 중요성

교회의 개혁을 위해 노력했던 웨슬리와 감리교인들은 경건주의와 모라비안들로부터 개혁의 통찰얻었다. 이들은 생각과 수행에 있어서 어떻게 뜻을 갖고 헌신한 기독교집단이 교회 안에서 분열을 일으키지 않는 채 은혜와 거룩한 목적을 갖고 존재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독일 개혁파 경건주의자 안토니 호르넥(Anthony Homeck, 1641-1697)은 사보이(Savoy)의 목사로서 행복한 금욕적 수행자」 (The Happy Ascetik), 「시레네스」 (The Sirenes), 「환희와 심판(Delight and Judgement)이라는 책에서, 초대 교회를 현대 교회가 따라야 할 모델로 제시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호르넥의 호소는 영국교회의 여러 곳으로부터, 특별히 초대교회 교부들의 자료를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그 결과 경건한 신도회 운동이 탄생되었다. 이 운동으로부터 “’행동개혁 신도회’(Society for the Refomation of Manners, 1691), 기독교 지식 증진 신도회’ (the Society for Prompting Christian Knowledge, SPCK, 1698) 복음전파 신도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Foreign Part, SPG, 1701)가 나오게 되었다. (아버지웨슬리--->아들 웨슬리 영향)

스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전체 교회의 건강을 위해 공동체의 친밀감과 훈을 목적으로 마인의 프랑크푸르트에서 경건회(collegia pietatis)를 조직했다.스페너가 경건회를 만든 것은 모든 믿는 자들이 제사장이라고 주장했던 루터의 사상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콜리기아의 평신도 역할 증대와 힘과 특권, 관리 능력을 가진 평신도의 독립이 제도교회에 위협으로 비쳐지면서 프랑크푸르트 경건회에 반대 운동이 나타났다. 스페너는 끝까지 자기 입장을 견지하면서 분열이나 분리를 원하지 않았다.

메소디스트의 공동체 생활에 끼친 모라비안 운동의 영향은 반회(band)의 구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반회는 메소디스트의 속회보다 더 작은 수로 구성되었을 뿐 아니라 제자도에 있어서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반회의 목적은 회원들이 가장 깊은 차원에서 마음의 성정이 변화되는 것이었다. 경건주의와 교회 안의 교회와, 모라비안 운동의 작고 훈련된 모임이 성공하자 감명을 받은 웨슬리는 속회, 반회, 선발 신도회(select society)등과 같은 메소디스트의 내적 구조를 발전시켰다. 이들 셀 모임들은 속회 인도자들 뿐 아니라 모든 회원이 서로 영적 건강을 위해 견지해 주는, 믿는 자들의 만인 제사장에 대한 실천적 표현이 되었다. 애찬식에 참여하기 위해선 언제나 표를 발급하여 제한된 허용을 했으며, 감독함으로써 훈련이 이루어졌다. 웨슬리는 영혼과 몸이 한 사람을 만든다면, 영과 훈련이 기독교인들 만든다.”고 했다. 깨어 하나님의 방법으로 훈련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고 사도와 같이 설교하는 것은 살인자를 위한 자녀를 낳는 것과 같다.

5. 메소디스트의 내적 구조

1739년 말, 자신들의 죄에 대해 깊이 확신했던 10명의 사람들이 웨슬리에게 와서, 기도해 줄 것과 어떻게 해야 다가올 진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안내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이 바로 런던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연합신도회’(the United Society)의 시작이었다. 그 후 연합신도회는 여러 지역으로 번져나갔다. 웨슬리는 이 신도회는 형식을 갖춘 공동체였고 경건의 능력을 추구하는 공동체였다고 술회했다.

연합신도회는 작은 수의 모임으로 나뉘어져 속회(class)를 이루었다. 속회는 12명 정도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을 지도자로 세웠다. 속회에 가입하는 조건은 연합신도회의 일반 규칙을 지키는 것이다. 연합신도회의 일반 규칙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고, 은총의 수단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속회 모임의 가장 큰 목적은 죄를 용서받고 거룩한 사랑의 은혜로운 성정이 공동체와 그 회원들의 심령에 일어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나아가도록 회개를 독력하기 위해서였다.

메소디스트 제도의 탁월함은 영국 국교회 사람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향해 개방적이었다. 일단 입단한 사람들에게는 진정하고도 참되며 본래적인 성서적 기독교를 훈련시켰다. 이처럼 전체 공동체가 타락하지 않도록 메소디스트 속회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뜻에 따라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경건치 못한 삶을 버리려 하지 않은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회원을 배제시키는 방법은 자기-의의 방식으로 행하지 않고 보다 큰 신도회의 유익을 위해 행해졌다. 남은 자들은 떠난 사람들을 위해 울며 기도했다. 그러면서도 기뻐했다. 그 이유는 문제의 갈등이 신도회에서 사라졌기 때문이.”

메소디스트 속회 제도는 계급과 경제 지위, 혹은 교육이 속회에서 고려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 뿌리에서부터 계층에 대한 편견을 제거했다. 대신 메소디스트 속회에서 지도력과 더 책임 있는 지위가 부여되는 것은 계층과 상관없이 신앙과 영적 성장이 기준이었다.

반회(Band)는 특정 지도자가 세워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메소디스트 속회와 구별되었다. 반회에 속한 회원들은 적어도 어느 정도의 죄의 용서, 상호 책임과 돌봄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1744년 반회신도회 지침”(Directions given to the Band Societies)을 만들어 방향을 제해줬다. 이 지침은 연합신도회의 세 가지 일반 규칙을 포함했으나 그 내용은 은총에 있어서 괄목할마한 성장을 기대한다는 점에서 싸움, 술취함, 하나님이름 헛되이 하기, 등 일반규칙항을 삭제했다. 속회와 반회는 각기 다른 시간대에 모임을 가졌지만, 일 년에 네 차례는 애찬식의 이름으로 연합모임을 가졌다. 애찬식은 모라비안이 웨슬리의 메소디스트 운동에 기여한 또 다른 영역이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빛 안으로 계속해서 걸으며 형제단에 앞서 나가고 있는탁월한 회원들을 위한 선발신도회(select society)를 조직했다. 선발신도회 회원들은 속회와 반회에 모범이 되었기 때문에 특정 지도자가 필요하지도 않다. 대신 몇 가지 지침을 마련했다. 첫째, 비밀준수 둘째, 순종 셋째, 기여, 그러므로 메소디스트의 내적 구조가 갖는 최고의 차원은 은총이 자라면서 책임지는 자유자란다는 것을 보여준다.

1744년 웨슬리는 설교자들을 모아 연회(Conference)를 조직했다. 그러다가 이후에는 메소디스트 강단에서 설교한 것과 감리회 조직 독립선언’(Deed of Declaration)했는데 설교자는 웨슬리의 신약성서 주석과 네권으로 된 설교들에 담긴 교리를 설교해야 했다.

경건주의와 모라비안 모델로부터 배운 메소디스트는 영국 국교회 안의 복음적 집단을 이루고었다. 달리 말하면 종(bell)과 책과 촛불로 완전히 무장한메소디스트는 결코 교회가 이나라 보다 큰 신앙의 연합 안에 개혁을 가져오는 신도회가 되고자 했다. 메소디스트는 그 정체성으로 보편성을 필요로 하였고 교회의 선교와 기능적 이해가 없이는 메소디스트는 그 방향과 정체성과 목표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로부터의 분리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웨슬리는 분리의 문제와 관련해 신앙을 다음 세대로 이어 주는 데 필요한 경건의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그 안에 복음적인 모임이 필요하다고 보고 예언자적 모임을 결성했다. 이는 교회는 역동적이며 영적이어야 하고, 지속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이해를 담고 있다. 메소디스트가 그 배경에 영국 국교회를 필요로 하듯이 영국 국교회는 교회의 증언자로 메소디스트 신도회를 필요로 했다. (Cf. 전통적인 제도적인 교회---개혁적인 예언자적인 교회)

6. 실천적 기독교인의 삶

웨슬리 당시 개신교 몇몇 흐름은 오직 은총으로만’(sola gratia)이란 가르침으로부터 잘못된 결론을 끌어내어 행함을 거부하는 피동성 정숙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행함이 없는 신앙은 기독교의 거대한 역병이라고 주장했다. (피터레인 신도회---> 파운데리 신도회) 웨슬리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총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했으며 이 은총을 순전한 선물로 받아들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충분성이란 일단 은총을 받게 되면 하나님과 협력하고 하나님께 응답하게 되는 것으로 보았다. 값없이 주시는 은총과 협력 은총의 균형은 개신교 요소와 카톨릭 요소의 종합으로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대해서라는 그의 설교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배경이다.

웨슬리는 초기 교부들과 개혁파 경건주의로부터 기독교인의 삶 속에 믿음과 행위의 진정한 균형있어야 함을 배웠고, 성서를 존중하고, 원시 교부들의 가치를 존중하도록 훈련받았다. 웨슬리는 처한 상황에서 실천적 기독교 신앙의 참된 모델을 그리스와 라틴 교부들의 세계에서 찾았다. 웨슬리는 본래의 기독교 신앙의 표준, 특히 신생의 표징을 현실적으로 주장하기 위해 기독교총서사용했다. 이런 맥락에서 캠벨(Campbell)은 교부들에 대한 보수적인 사용실용적인 사용구분하였지만, 웨슬리는 믿음과 행위, 칭의와 성화, 과정과 실현의 진정한 균형을 새롭게 하고 강화시키는 진정한 기독교로 영국 교회를 개혁하고자 실용적인 사용을 채택했다.

초기 교부들을 넘어 웨슬리는 독일 경건주의자 테르스테겐(Gerhard Tersteegen)에게서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신학을 만났다. 테르스테겐은 칭의와 성화를 융합시키지 않고 기독교인 삶이란 구원을 주는 은총의 실천 속에서 일관되게 매일 성장을 가져온다고 보았다. 친첸도르프와 달리 테르스테겐은 칭의와 성화를 융합시키지 않고 기독교인 삶이란 구원을 주는 은총의 실천 속에서 일관되게 매일 성장을 가져온다고 보았다. 따라서 의란 내주하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점차 자라 간다.

7. 은총의 수단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은총은 종종 다양한 수단을 통해 영혼에게 전달된다. 웨슬리에 따르면, 은총의 수단은 선행은총, 칭의 은총, 혹은 성화은총을 사람들에게 베풀기 위해 일반적인 통로로 하나님이 제정한 외적인 표징, 말씀 혹은 행동이다.여기서 나이트(Henry Knight)가 제시한 패러다임을 통해 일반적 은총의 수단(general means of grace)과 특별한 은총의 수단(particular means of grace)을 구분했다. 특별한 은총의 수단은 상황적 은총의 수단(prudential means of grace)을 포함한다. 웨슬리가 생각한 일반적 은총의 수단은 모든 계명을 지키고, 자신을 매 순간 돌아보아 부정하며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점차 하나님의 현존을 알아가는 보편적 순종이었다. 따라서 웨슬리가 말한 바 신실함을 뜻하는 것으로, 믿는 자들이 정직하고 겸손한 방법으로 은총 안에서 더욱 자라 가게 하는 다양한 방식을 의미한다.

(특별은총== 제도적 은총의 수단, 상황적 은총의 수단)

8. 제도적 은총의 수단 (경건의 사역)

특별한 은총의 수단 중 첫 번째인 제도적 은총은 대부분의 사람들인 은총의 수단이라 했을 때 생각할 수 있는 은총이다. 예컨대, 애원(deprecation), 탄원(petiton), 중재(intercession), 감사(thanksgiving)로 구성된 개인기도, 가족기도, 공중기도와 같이 기도하는 일,” “성서를 탐구하는 일,주의 만찬을 받는 일, 금식하는 일, 고대교회가 지켰던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하는 일, 기독교인 집회에 참석하는 일을 특별 수단으로 여겨 반드시 해야 했다. 또한 여기에 제시된 제도적 은총의 수단의 목록은 은총의 수단이 성례전을 언급하는 것을 넘어 중요한 방식으로 말씀(기도, 성서탐구, 기독교인 집회 참석)을 포함하는 데까지 나아감을 보여준다.

제도적 은총의 수단의 목록을 일일이 열거한 웨슬리는 은총의 수단이 갖는 가치는 경건의 목적에 기초하고 있으며, 목적과 결별될 때는 공허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웨슬리는 실제로 은총의 수단들사랑의 여러 수단에 지나지 않거나 사랑의 진정한 열매인 특별한 덕목의 수행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은총의 수단이 종교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임을 강조하는 것이 웨슬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과제이기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부족한 것과 진정한 기독교의 참된 동기의 긴장을 통해 이를 전개했다.

웨슬리는 이러한 자신의 생각이 사효적(ex opere operato) 방향으로 흘러가는 주장을 반박했다. 실제로 무슨 큰 실수를 하였건 은총의 모든 수단 안에 본질적인 힘이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자들이 있다.웨슬리는 수단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는 것은 위험하며, 생명력 있는 종교를 대신해 수단의 가치를 지나치게 중히 여기는 것도 똑같이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여러 긴장과 주제를 다루면서 웨슬리가 보였던 균형적 입장은 한편으로는 열광주의의 함정을 피해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형식주의의 함정을 피해 갔다.

9. 성만찬 성례전

영국 국교회의 요리문답으로부터 빌려 온 웨슬리의 성례전에 대한 기본 정의는 외적인 표징과 내적인 효력(signum and res)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구분을 따랐다. 1784년에 출판된 메소디스트 강령」(Methodist Articles)에서 웨슬리는 그리스도가 제정한 성례전은 기독교인의 고백의 표지나 표일 뿐 아니라 은총의 분명한 징표이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의지이며...더 나아가 그분 안에서 우리 믿음을 강화시키고 분명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주의 만찬에 대한 설명을 대니얼 브레빈트(Daniel Brevint)가 쓴 기독교 성례전과 희」(On the Christian Sacrament and Sacrifice)이란 책을 참조했다. 웨슬리는 성례전과 관련된 고전11:20을 주석하면서 주의 만찬을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엄숙한 기념이라고 불렀다. 한 마디로 말해 기억이 현존을 수반하며, 롭 스테이플스(Rob L, Staples)의 말대로 몸의 현존실재적인 현존은 이 아니라 영적 현존이다.

따라서 메소디스트 종교 강령은 주의 만찬은 기독교인들 서로가 스스로 안에 지녀야할 사랑의 징표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에 따른 우리의 구원의 성례전이라고 진술한다. 그러므로 복음의 표상인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가 선행은총뿐 아니라 칭의 은총이나 성화은총도 수여하는 수단으로 제정한 셈이다.

웨슬리는 성례전에 담겨 있는 중세적인 제사장 개념, 즉. 제사장이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라는 생각뿐 아니라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로마가톨릭의 화체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문제와 관련된 요한복음 6장을 주석하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와 연결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당하신 수난과 연결했다. 달리 말해 준 궁극적인 것이 궁극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상징은 그 상징이 지칭하는 실재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빈과 마찬가지로 웨슬리에게도 성만찬의 능력과 힘, 효능은 성령을 통해 중재된다. 그러나 칼빈과 달리 성령께서 믿는 자들을 높여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낸다고 주장했다. 즉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를 받는다는 신수주의 입장을 견지했다.

주의 만찬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현존을 전하는 은총의 수단이며 위로이기 때문에 속되는 성만찬의 의무라는 설교에서 두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그리스도의 명령과 관계되고 , 주의 만찬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푼 자비와 관계된다. 웨슬리는 매 주일 한 번은 성만찬에 참여했고 5일에 한 번 꼴로 성만찬에 참여했다.

10. 세례 성례전

슬리는 세례를 계속되는 은총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세례는 한번 행해지는 성례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례는 그리스도가 제정한 두 성례전 중 하나로서 실천적인 기독교인의 삶의 본성을 보여 주는 중요한 창으로 보았다. 첫째, 웨슬리는 세례와 신생을 서로 완전하게 다른 것으로 생각했다. 즉 세례가 외적 사역의 징표인 반면 신생은 내적인 사역의 기의(記意 the thing signified)이다. 그러므로 세례를 내적인 사역으로 보지 않았고 신생을 외적인 사역으로 보지 않았다.

둘째, 웨슬리는 분명하게 세례와 중생을 구별하면서도 이 둘을 밀접하게 연관시켰기 때문에 신생은 성인세례와 관련되고, 유아세례는 더 강하게 관련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교회는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은 세례와 더불어 중생이 되었다고 믿는다.바로 여기가 중생에 대한 웨슬리의 성례전입장이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는 영역이다.

유아세례에 대한 웨슬리의 평가는 성만찬적 입장과 다른 구원론적 주제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776년 존 메이슨(John Mason)에게 보낸 편지에서 웨슬리는 그러므로 어린아이는 누구든 아담의 죄로 인해 지옥에 떨어졌거나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담의 죄는 어린아이들이 세상에 보내지는 순간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취소되었다.그러나 유아세례 안에 회개와 믿음이 부족하다는 결정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성인세례는 어떠한가? 신생의 기의는 모든 경우에서 언제나 세례의 증표를 수반하는가? 신생설교 사람이 물로 탄생했다고 해도 영으로 탄생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때로 내적인 은총은 없고 외적인 증표만 있는 경우가 있다.”

신생과 유아세례를 연관시킴으로써 중생에 대한 웨슬리의 성만찬적입장이 나타나게 된다. 입장은 로마가톨릭의 전통이 영국 국교회를 통해 웨슬리에게 이어진 유산이었다. 여러 면에서 교개혁 전통의 웨슬리의 복음적입장신생과 세례를 구분하는 가운데 나타나게 되었다. 웨슬리는 성인세례를 말할 때 신생과 세례를 연관시키지 않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은 신생의 표, 예컨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웨슬리에게는 세례 안에 나타난 기의(記意)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새롭게 사는 것이었다.

11. 상황적 은총의 수단

제도적 은총의 수단을 넘어 웨슬리는 상황적 은총의 가치, 곧 성령의 인도로 은총 안에 자라가도록 이성과 경험에 기초한 특별한 규칙의 가치를 강조했다. 또한 구속의 보편적 은총인 선행은총을 통해 생겨난 도덕법을 마음에 새기는 것은, 성서와 이성, 경험에 기초한 상황적 규범을 만들어내는 것과는 다른 과정이다. 상황적 규범에 대해 웨슬리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상황적 규범이란 하나님이 제정한 것이 아니며 상황적인 것으로 본질적이 아니다.

12. 사랑의 사역

웨슬리는 사랑의 사역의 가치를 순수한 은총의 수단으로 강조했다. 따라서 궁핍한 사람들의 몸을 위한 사랑의 사역을 위해 배고픈 자를 먹이고, 벗은 자를 입히며, 나그네를 영접하고, 갇힌 자, 병든 자, 여러 모양으로 고통당하는 자를 방문하며,영혼을 위한 사랑의 사역을 위해서는 무지한 자들을 교훈하는 데 힘쓰고, 어리석은 죄인들을 깨우치는 데 힘써야 한다.

웨슬리는 경건의 사역의 가치보다 사랑의 사역을 선호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경건의 사역보다 사랑의 사역을 더욱 열망해야 합니다.이러한 비교를 넘어 웨슬리는 기독교의 제자도의 항구적인 목를 드러낸다. 여러분은 겸비, 온유, 포기와 같은 거룩한 기질을 더욱 열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완전하고 온전한 경건인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 사랑을 가장 열망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사랑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은 모든 거룩한 기질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실재적인 은총의 수단이 되게 할 뿐만 아니라하나님과 이웃의 사랑 안에서 자라 가야 한다. 그러므로 경건의 사역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사역은 섬김을 받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섬기는 사람들에게도 순수한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이다. 따라서 거룩한 사랑을 새기고 자라게 하는 마음의 기질의 변화는 일상적인 활동의 결과일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종종 일상의 삶에서 가장 낮은 자들 가운데 임한다.

웨슬리는 영역별로 구성된 속회 조직을 사용하여 궁핍한 메소디스트 회원들에게 음식과, 옷, 연료 등을 공급해 주었다. 특히 당시에 영국제도(British Isles)에서 의료 혜택이 모자랐던 터라 스스로 의학강의를 듣고 약사와 의사의 충고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술을 베풀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런던에 무료의료 시술소를 열었고 원시의학」 (Primitive Physic)이란 책에 응급 치료법들을 소개했다. 웨슬리의 사랑의 사역과 목회는 상호책임의 특성을 갖고 있었다.

웨슬리의 사랑의 사역은 정치 영역에까지 확장되었다. 설교자들에게는 왕의 악한 욕망을 지적한 것 외에는 강단에서 정치를 설교하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설교자의 지속적이고도 주된 과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일이라고 했다.

웨슬리는 영국 제도와 미국 정부를 상대로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피력한 여러 편의 글을 남겼다. 오렌지 공 윌리엄(William of Orange)과 그의 부인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가 1688년 즉위하면서 세워진 헌법적 군주제를 지지했고, 존 로크(John Locke)와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정치사상에 비판적이었다. 특히 권력이 백성들로부터 나온다는 이들의 생각을 반박하며 하나님이 권력의 기원으로 보았다. 그래서 자연법에 호소하며 아러한 정치적 사유에 대해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 웨슬리가 생각한 자연법은 창조와 더불어 건강한 관계로서의 도덕법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의 반영이었다.

웨슬리는 노예제도의 악법에 반대하여 자기의 주장을 발전시켰고, 1774년에 노예제도에 대한 생각」(Thoughts Upon Slavey)에서는 그러면 인간의 법이 사물의 본성을 바꿀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만 개의 법이 있다 할지라도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잘못된 것은 여전히 잘못된 것이다.고 주장했다.

웨슬리에게 시민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의 근간을 이루는 자연법은 모든 인간이 인간되게 하는 법이었다. 그러므로 자연법은 창조 시에 세워진 존재자들의 본성과 건강함을 표현하는 도덕법의 반이다. 따라서 노예제도는 인간의 존엄성뿐 아니라 창조자 하나님에게 반하는 죄이다.

웨슬리는 죽기 전, 영국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lberforce)에게 그의 개혁과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노력을 계속해 달라고 당부했다.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능력으로 미국의 노예들이 이 땅에서 사라질 때까지 싸움을 계속하십시오.” 웨슬리의 눈에 비친 노예제도의 실상은 기독교뿐 아니라 인류에게 걸림돌이었다.웨슬리는 이러한 악행에 반대하여 글을 쓰고 강연을 함으로써 또한 박해 받고 목소리가 없는 사람들을 대신해 의미 있는 사랑의 사역을 함으로써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

13. 오늘과 내일 :자연법과 정치학을 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클래런스 토마스(Clarence Thomas)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을 때, 상원의원인 비든(Joseph Biden)의 질문은 자연법에 대한 이해가 다양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독일 학자 볼프(Frik Wolf)90개 이상 되는 자연법 정의를 크게 셋으로 정리했다. 첫째, 자연법은 일반적 도덕원리들이다. , 자연법은 기독교 신학에서 창조되었으며 외적인 질서로부터 파생된 원리들이다. 셋째, 자연법은 하나님께서 수여한 결과다.

마틴 루터 킹 2세(Martin Luther King Jr)는 남부의 여러 주 정부 법들이 모든 인간에게 고유하게 주어진 권한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는 허락하지 않자 이 법이 지닌 도덕성에 도전하여 여러 남부의 주 정부 법들을 폐지시키는 데 성공했다. 킹이 이처럼 사태를 바꿔 놓은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법 논쟁이 지닌 타당성 때문이 아니고 당시 킹이 가지고 있었던 도덕적 힘 때문었다.

자연법에 대한 거부는 보수주의 진영뿐 아니라 자유주의 진영에서도 발견되며, 합법적인 선언 뿐 아니라 비합법적인 선언에서도 발견된다. 더 나아가 이 거부가 감리교 신학자들과 윤리학자들에게 주는 문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웨슬리의 윤리적 사유의 상당 부분이 자연법의 표현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웨슬리는 그 목표나 목적에 있어서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결된 일종의 도덕법으로 자연법을 이해하고 있었다.

감리교 신학자 스티븐 롱(Stephen Long)에 따르면 웨슬리는 루소와 흄, 볼테르의 근대 윤리를 반박했는데, 이는 철학자들이 인간성’ ‘덕성’ ‘도덕성혹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에 윤리적 근거를 두었기 때문이었다. 웨슬리는 이러한 철학자들의 움직임은 윤리와 자연법의 개념들이 선을 알게 하고 지고의 선으로 표상되는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도 작용하기 때문에 일종의 무신론을 가져온다고 보았다.

예수회 사제요 의회 의원인 드리난(Robert Drinan)은 오늘날 많은 국제법 전문가들이 인권의 신장은 종교의 영향이나 목소리가 없을 때 더 개선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데 주목했다. 이것이 어째서 그럴까? 그 이유는 단순했다. 국제법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논증할 충분한 자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공공윤리가 부재한 상황에서 가톨릭 윤리학자인 드리난 국제인권 학술 단체와 운동가들의 단체에 참여하여 정치적 차원에서 도덕적 판단을 시도했다. 그리고 가톨릭교도들이 이러한 접근이 가톨릭의 입장임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교황 요한 23세가 된 안젤로 론칼리(Monsignor Angelo Roncalli)는 1948년에 발의된 보편적 인권선언에 협력했기 때문이다.

한스 큉(Hans kϋng)은 교회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에 관여하게 될 때 자유롭지 않다고 주한다. 큉은 신학자들과 윤리학자들이 개인과 자기 종족의 관심을 하나님 나라의 실재와 종종 혼동시키는 오류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교회건 회당이건 모스크인건 공공사회에서 종교가 주도권을 갖고자 할 경우 세 가지 기본적인 표준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긍정적 표준은 종교가 인간의 선과 복리를 위해 일해야 함을 강조한다. 둘째, 부정적 표준은 종교적인 도덕과 예식, 제도가 인간의 자기 정체성과 의미, 가치를 찾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됨을 강조한다. 마지막으, 특정 종교는 그 자신의 규범적 교리나 수행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산상수훈과 십계명도 포함된다.

이처럼 여러 접근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난제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교회는 당대의 중심 문제에 대해 최상의 도덕적이며 영적인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인간의 반영을 말하는 유신론적인 자연법사유는 가난한 사람들과 소수자들, 작은 자들을 보호해야 한다.

둘째, 교회의 사유화와 행위는 자기 이익과 지역이기주의에 빠져 많은 적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교회가 바른 신앙의 고백을 통해 공공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활동하고 동시에 포스트모던 사회의 다양성과 다원성을 인식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박해를 받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소중하게 받아들여지고 사랑을 받게 할 수 있을까? 이 물음은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지속적인 도전이다.

제7장 교회와 은총의 수단 : 거룩한 사랑의 공동체 유장환교수

교회 :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연합한 백성들의 몸

전체 믿는자들의 몸===>거룩한 보편적 교회(그리스도 거룩하기에 교회 거룩함)

거룩한 사랑 훈련 (X) , 거룩한 사랑 보편성 (X)

===>교회 쇠퇴 (1)편파성 (2)국가권력, 부 (3) 훈련과 은총 부재

감리교 운동 == 교회개혁운동

진정한 기독교인” <--- 경건주의 영향(호르넥, 스페너), 모라비안 운동(반회)

연합신도회 속회 ---> 반회 ---> 선발신도회

the united society ---악 피하고 선 행하고 은혜의 수단 사용

clsss ---회개, 제명, 칭의

band ---상호돌봄, 성화

select socity ---모범, 완전

연합신도회 속회 ---> 반회 ---> 선발신도회 모든 회원의 영적 건강 (감독/훈련)

은총 증가 --------------> 책임 증가

실천적인 그리스도인의 삶 믿음과 행함의 균형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 은총의 수단 (no merit, no power)

제도적 은총의 수단 = 경건의 사역(기도, 성서, 성만찬, 금식 집회 참석)

상황적 은총의 수단 = 사랑의 사역(가난한 자, 병든자, 갇힌다 구제, 노예제도폐지)

은혜안에서의 성장”(테르스테겐)

은총의 수단의 목적===> 거룩한 기질 열망,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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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윤리 : 도덕법 인간이 본성에 뿌리 둠===>무신론

W(스티븐 롱) : 선 ---하나님 연결 ===> 도덕 신학 주장

*** 메소디즘에 관한 생각 (존 웨슬리 논문집1) 396

속회(회개, 칭의, 중생) ---> 반회(성화) ---> 선발신도회(완전)

제8장: 온전한 성화: 순전하고 완전한 거룩한 사랑 유장환교수

걱정 근심 많은 내 심령에 성령 감화하시어

주님 안에 거함으로 쉼을 얻게 하소서

처음과 나중 되신 주여

죄와 상관없게 하시고

믿음의 처음처럼 믿음의 끝도

우리 마음에 자유를 허락하소서.

Charles Wesley, Love Divine, All Loves Excelling,The United Methodist Hymnal (Nashville: The United Methodist Publishing House, 1989), Hymn #384.

웨슬리는 높은 기준과 성서적 기독교를 지향했다. 그는 회개가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미 중생한 자들에게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온전한 성화를 추구하는 자들은 현실적인 죄(=자범죄) 뿐만 아니라 타고난 죄(원죄: original sin)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칭의 중생한 자는 내적, 외적 죄를 이길 힘을 가진다고 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넘어지고 자범죄를 회개하며 은혜 속에서 회복하는 일을 반복하는 자는 두 번째 복음적 회심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결정적인 은총의 사역은 첫 번째 회심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복음적 회심

칭의 중생한 자들에게는 두 번째 회개인 복음적 회개가 요구된다. 이것은 믿는 자들이 아직 온전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자신을 지킬 수 없음을 드러내 준다. 즉 믿는 자들은 말씀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거룩하지 못한 성정과 마음을 어지럽히는 애욕, 곧 육체의 본성이 남아있다. 비록 죄가 통치하진 않더라도 남아있다.(It remains, though it does not reign.) 그러므로 구속은 단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두 번째 구분된 은총사역이 요청되어 진다.

<웨슬리 두 번째 사역 주장>

나는 지난 5주 동안 한 속회에서 여섯 명이 죄 사함을 얻었고, 한 반회에서 다섯 명이 두 번째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1761년 크로스비 여사에게 보낸 편지)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당신에게 두 번째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범죄와 태어날 때부터 가진 죄의 쓴 뿌리로부터 당신을 구원해주셨습니다.”(1774년 바튼여사에게 보낸 편지)

두 번째라는 용어는 분명히 웨슬리 자신의 용어였다. 웨슬리는주님이 우리의 심령에 다시 말씀하시면서 두 번째로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실 때 영혼의 문등병이 깨끗함을 얻는다보았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

1766년 출판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평이한 해설이란 책에서 웨슬리는 어떻게 온전한 성화를 이룰 수 있을 지에 대해서 부주의한 무관심이나 게으름으론 불가능하며, 열심을 내어 온전히 순종할 것과 모든 계명을 지킬 것, 깨어 아픔을 지닌 채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매일 지게 될 때, 온전한 성화를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웨슬리는 완전을 향하고 있는, 믿는 자들에게 사랑과 경건의 사역을 함께 추구하도록 촉구했다.

먼저 사랑의 사역은, 믿는 자들이 열심과 희생으로 가난한 자들의 영과 육체에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두 가지 분명한 것은, 첫째, 온전한 이웃사랑은 물질적인 영역과 영적인 영역 모두를 포함한다는 점이다. 둘째, 비록 이웃의 육적인 필요가 당장 필요한 것이긴 하나 영적인 영역이 더 가치가 있음을 강조한다.

두 번째로, 경건의 사역 또한 중요시하였는데, 이는 은총의 수단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공중기도, 가족기도, 골방기도,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 성서를 읽고 묵상하기, 몸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 금식이나 절제하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사역은 온전한 성화를 위해서 어떤 의미에선 필수적인 이다. 앞서 칭의를 다룰 때 구분했던 구도가 성화를 다룰 때도 다음과 같이 같은 구도로 그려질 수 있다.

회개, 사역, 믿음에 따른 구분들

같은 의미가 아니다

같은 정도가 아니다

회개는 필수적인 것이 아님

회개는 완전히 거룩하게 하지 못함

회개의 열매는 더욱 필수적인 것이 아님

회개의 열매는 완전히 거룩하게 하지 않음

믿음은 직접(가장 근사치로) 필수적

믿음만 완전히 거룩하게 함

협력(책임)은총

값없이 주시는 은총

가톨릭 주장

개신교 주장

웨슬리는 성서적 구원의 길에서 회개와 믿음이 동일한 의미, 동일한 정도에서 같을 수 없다주장한다. 즉 온전한 성화를 위해서 한편에서는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필요함을 말하고 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복음적 회개와 회개에 필요한 열매가 완전히 거룩하게 하지 못한다고 한다.

동일한 의미에서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과 관련해서 웨슬리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죽음 직전까지 온전히 성화될 수 없기에 믿는 자들은 회개하고 도덕법 안에 명시된 대로 경건과 사랑의 사역을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는 믿는 자들이 은총을 가장 풍성하게 받아들이게 하며, 성령의 정화능력(=성결의 능력)을 가장 잘 받아들이게 한다. 뿐만 아니라, 웨슬리의 구원의 순서의 점진성은 이 필수성을 더욱 강화한다.

동일한 정도로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구분을 통해서 웨슬리는 칭의와 같이 믿는 자들이 복음적 회개의 열매 없이도 온전히 성화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복음적 회개의 열매를 맺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회개는 거룩하게 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은 믿을 때 비로소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거룩하게 하는 것은 믿음을 통해 얻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이다.

믿음

웨슬리는 피터 뵐러의 영향으로 칭의와 중생이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1741년에는 뵐러를 뛰어넘어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온전한 성화 또한 온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며, 칭의와 마찬가지로 믿음을 통해서만 받게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값없이 주시는 은종의 선물임을 주장했던 종교개혁 전통을 연결했다. 그는 온전한 성화가 실현되는 방법으로 순한 믿음’(simple faith)순전한 믿음’(naked faith)을 주장하였다. 웨슬리는 이로써 온전한 성화가 어떻게 값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지를 강조했다. 오직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을 향해 계속 나아가도록 권면하십시오. 그리고 어디서든 지금 단순한 믿음으로 칭의와 완전한 성화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십시오.

균형 잡힌 웨슬리의 은총개념

웨슬리가 사용했던 용어를 살펴보면, 웨슬리의 은총에 관해서 하나가 아닌 두 개의 구분된 이해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비평가들에게서는 웨슬리가 지기 모순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받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웨슬리는 다른 두 개의 신학 전통이 말하는 구별된 패러다임을 하며 본래적인 기독교인의 믿음과 본래적으로 이해된 보편성에 대한 물음 안에서 이 두 은총 개념을 자신의 실천신학 안에 궁극적으로 화해시키고 있다.

즉, 웨슬리는 가톨릭적 은총개신교적 은총을 모두 가지고 있다. 웨슬리의 균형있는 은총이해색깔도 없는 반 펠라기우스적 해설로 끝나거나 복음적 회개의 합당한 수단을 간과함으로써 열광주의나 정숙주의로 흘러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개신교 전통과 가톨릭 전통을 종합하는 웨슬리의 균형 있는 은총 이해의 두 가지 초점은 개신교나 가톨릭 전통에서만 해석되어서는 안 되고 적절한 긴장 가운데 이 둘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 해석해야 한다.

온전한 성화은총에 대한 웨슬리의 이해

하나님 홀로의 사역

온전한 성화에 앞선 신-인 협력

하나님에 의한 주도권 (넓은 의미의 선행 은총)

순간을 강조,

믿음으로만 받음

하나님과 인간의 사역과정

개신교의 강조점

(독일 경건주의자들)

가톨릭의 강조점

웨슬리는 신-인 협력 그 자체가 보다 크고 관대한 접속의 반을 구성한다고 주장했다. 은총이란 협력은총일 뿐 아니라 협력은총과 값없이 주시는 은총의 접속이다.

온전한 성화의 시간적 차원들

은총에 대한 이중적 이해는 온전한 성화의 시간적 이해를 분명히 한다. 그래서 웨슬리는 기독교인의 완전에 관련한 시간의 주제는 연대기적 방식이 아니라 구속론적 방식으로 인식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그 정도가 점점 커지면서 점점 거룩하게 되는 성화의 과정과, 순간 마음으로 순수해지고 질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온전한 성화를 구분할 수 없거나, 단순히 가톨릭의 신인협력적으로만 보게 된다면, 온전한 성화 자체가 하나의 과정이라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웨슬리는 과정과 실현, 점진적인 요소와 순간적인 요소, 이 둘을 미묘하고도 잘 구성된 긴장 속에 담아낸다. 또한 기독교인의 완전이 실현된 후에도 은총 안에서 계속 성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칭의와 기독교인의 완전이 점진적인 사역에 선행하는 순간적인 사건이라고 분명히 주장했다. 은총의 점진적인 사역은 계속해서 칭의와 성화의 순간적인 사역에 앞섭니다. 그러나 (칭의 뿐만 아니라 성화도) 사역 그 자체는 순간적입니다. 죄책감과 죄의 권세를 점진적으로 확신한 후 어느 한순간에 이르러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듯이, 타고난 죄를 점차적으로 인식한 후 우리는 한순에 이르러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오류>

1. 아우틀러 오해적 표현 완전=과정역동적 과정으로서의 완전

웨슬리 완전한 성화를 말할 때 탄생이 아니라 죽음의 예화 사용

죽기 전에 죄를 멈춘다면 사물의 본성상 순간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고, 죄가 그 안에 존재하는 마지막 순간과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받는 처음 순간이 존재해야 한다.

2. 완전한 성화= 장년 기독교인 상태

어른보다는 어린아이에게서도 완전한 성화볼 수 있다. “나는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믿음의 확신을 갖고서 인생을 완성한 네 살도 안된 어린아이를 인근 무덤에 묻었다.

온전한 성화의 본질 : 구원의 순서의 두 번째 초점

웨슬리는 젊은 시절 거룩함이 종교의 목적이라고 보았다. 1725년 테일러거룩한 삶의 규칙과 수행을 통해서 의도의 순수함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1726년 토마스 아 캠피스그리스도를 본받아를 통해서 마음의 종교, 즉 내적 종교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1728년 혹은 1729년윌리엄 로의기독교인의 완전을 통해서 더욱 확신 있게 반쪽 기독교인은 절대 불가능함을 스스로 다지게 되었다. 이것을 통해 웨슬리의 기독교인의 완전에 관한 이해가 방전통에 속한 자료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동방(가톨릭)교부들은 웨슬리에게 주로 기독교인의 완전에 이르는 성화의 과정에 대한 관점을 갖도록 영향을 주었다.

마음의 할례는 온전한 성화에 대한 웨슬리의 이해를 예증해 준다. 할례란 영혼의 습관적 기질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덕목들로 덧입게 된다”. 달리 말하면 온전한 성화나 기독교의 완전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거룩한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뿐 아니라 모든 죄를 배제하는 사랑의 특징을 갖고 있다.

온전한 성화가 아닌 것

웨슬리는 1766년에 출판한 기독교인의 완전에 대한 평이한 해설과 1741년에 쓴 기독교인의 완전이란 설교에서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인들이 완전하지 않은지, 또 완전할 수 없는지 세심하게 기록하였다.

첫째, 믿는 자들은 지식이 완전하지 않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하게 받고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지 않은 사람도 무지로부터의 자유 약속받지 않았다. 마음이 정결한 사람들도 계속 공부하고 학습해야하며 생각을 갈고 닦아 열광주의나 광신주의를 피해야만 한다.

둘째, 우리가 죄에 빠질 수 없도록 하는 그렇게 고매한 은총의 상태란 없다. 성서 어디에서도 인간이 죄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기록한 일반적인 선언을 찾을 수 없다. 1766년 웨슬리는 이전에 기독교인의 완전을 경험했던 50명의 고백자들을 조사한 결과 이들 중 2/3 가량이 기독교인의 완전에서 떠났다는 것을 발견했다. 결국, 웨슬리는 죄 없는 완전이란 문구를 사용하지 않았다. 사랑으로 완전한 사람들은 여전히 인간의 유한성과 관계된 무지와 실수에 빠지기 쉽다.절대적인 완전은 인간이나 천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다.

셋째, 기독교인들은 연약함으로부터 자유로울 만큼 완전하지 않다. 예컨대 이해력이 모자라거나 더디 이해하는 것, 어리석음, 혼돈, 일관성 없는 사유, 성격이 급하거나 지나치게 진지하게 생각함으로부터 자유하지 않다.

넷째, 완전한 사랑은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성서 어디에도 믿는 사람들에게 유혹을 없애겠다고 한 약속이 없다. 대신 성서는 웨슬리가 정확학게 보았듯이,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과 딸들에게 많은 유혹에 직면하여 견고히 서라고 지속적으로 권면한다. 웨슬리는 1760년 다양한 유혹이 가져다 준 무거운 짐설교에서 시험으로부터의 자유는 이생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다섯째, 하나님의 풍요로운 은총이 자라가기 때문에 지속적인 증가나 진보를 허용하지 않는 정적인 완전개념을 거부했다. 그러므로 웨슬리 신학에서는 영적으로 우리가 이미 도달했다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피로 마음이 정결해진 사람들은 지식과 은총과 은사에서 지속적으로 자라나야 한다. 기독교인의 완전은 정적인 완전이 아니라 동적인 완전이며 가장 풍요로운 거룩한 사랑을 말한다.

온전한 성화: 복음이 주는 세 번째 자유

웨슬리는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인들이 완전한가?라는 주제의 글을 쓰면서, 그는 자기가 말하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른 기독교인이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부연 설명하기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완전하다라고 했다. 요점을 말한다면 기독교인의 완전은 주로 죄의 권세가 아니라 죄의 존재를 다룬다. 웨슬리는 당시 영국사회의 많은 독자들이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와 온전히 성화된 사람들의 자유를 동일시하여 중생과 온전한 성화의 의미를 과소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웨슬리는 죄의 여러 효능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과 관련해 복음의 자유를 설명한다.

죄책이 하나이며, 죄의 권세가 또 다른 하나이고, 죄의 존재는 또 다른 하나입니다. 믿는 자들이 죄책과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인정하지만, 이들이 죄의 존재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거부합니다.예컨대, 복음이 주는 세 번째 자유는, 곧 죄의 존재와 육적인 본성과 원죄로부터의 자유는 두 번째 복음적 회개의 관심이 될 뿐만 아니라 아래의 도표가 보여주는 것처럼 온전한 성화에서 중요한 일부를 구성한다.

세 자유 안에 나타나는 이중적 회개

구원하는 실재

칭의

중생

온전한 성화

~로부터의 자유

죄책감(guilt)

죄의 세력, 지배(power)

죄의 존재(being)

에 대한 자각

자범죄

자범죄

타고난 죄

회개의 유형

율법적

율법적

복음적

그러면 온전한 성화는 무엇인가? 웨슬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은총은 두 가지 점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들의 은총을 능가한다고 말한다.

첫째, 성숙한 기독교인들은 악한 생각으로부터 자유롭다. 즉 악한 의지와 색욕, 시기 등으로부터 자유롭다. 마음이 악하지 않으니 악한 의지와 색욕, 시기 등을 품은 생각은 더 이상 마음에 자리하지 않을 것이다. 1766년 웨슬리는 악한 생각으로부터 자유하고 완전하려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악한 생각과 방황하는 생각은 구별되어야한다. 방황하는 생”(Wandering Thoughts)설교에서 방황하는 생각을 둘로 나누어 즉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방황하는 생각과 우리가 서 있는 입각점으로부터 방황하는 생각으로 설명했는데, 전자는악한 것이고 후자는 악한 것이 아니다.

둘째, 그리스도 안에 마음을 두고 사랑안에서 완전한 사람들은 악한 기질로부터 자유롭다. 악한 기질로부터의 구원은 부정적인 차원과 긍정적인 두 차원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부정적으로 말한다면, 악한 기질로부터의 자유는 교만과 자기의지, 세상 사랑과 같은 불경건한 기질, 타락한 마음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한다. 믿는자는 이제 거룩케하는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마음으로부터 타고난 죄가 깨끗하게 되어 마음에 갈등을 느끼지 않는다. 1766년 웨슬리의 표현을 따르면 믿는자는 죄의 완전한 죽음을 경험한다.

긍정적으로 말한다면, 온전한 성화는 하나님의 전능한 은총을 통해 실제적인 갱신, 변화, 정결뿐만아니라 온전한 영혼의 치유(therapeia psuches)를 가져온다. 웨슬리는 자신이 말한 완전의미는 모든 기질과 말, 행동과 온전한 마음, 삶을 지배하는 겸손과 온유, 인내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말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사랑은 죄를 몰아내며, 마음을 채우고 영혼의 능력을 회복하는 사랑이다.기독자의 완전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두 명ㄹ영에 순종할 수 있도록 은혜 가운데 회복된 자유를 수반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22:37-39) 이어서 웨슬리 (완전한 성화에는) 사랑에 반하는 어떤 잘못된 기질도 영혼에 남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순수한 사랑의 지배를 받는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온전한 성화는 죄를 대신한 사랑이고 모든 악한 정욕과 기질을 정복한 거룩한 사랑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완전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거룩한 사랑이 된다. 거룩함으로 은총 안에 새롭게 된 믿는 자들이 죄의 불순함과 함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사랑함으로 존재의 목적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 죄의 존재로부터의 자유 = 거룩한 사랑의 존재

온전한 영혼의 치유 = 영혼의 위대한 자유(저널)

온전한 믿음의 확신

과연 믿는 자들이 성화되었음을 그들 자신이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이 질문에 대해서 웨슬리는 성령의 증거와 열매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성화되었고 구원받았음을 알게 된다고 했다. 즉 확신의 시작인 직접적인 증언과 뒤따르는 확신인 간접적인 증언이 그것이다.

첫째, 직접적인 증언, 칭의와 마찬가지로 온전한 성화는 성령의 직접적인 증언을 수반한다.의 받았을 때 성령이 우리 자신의 영과 더불어 우리 죄가 용서받았음을 친히 증거 하듯이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을 때, 성령은 우리 죄가 사라졌음을 증거한다.”

둘째, 간접적인 증언, 웨슬리는 온전한 성화를 가져오는 성령의 열매는 변하지 않는 오래 참음과 인내와 기다림, 모든 화를 이기는 온유함--- 항상 존재하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이다. 웨슬리는 사역의 완전함과 철저함뿐 아니라 그 항구적인 열매에 호소하면서 하나님께서 온전히 거룩하게 하는, 은총의 능력을 증거하고 있다. 웨슬리의 경고를 들어보자. 만일 선발 신도회 내에서 누군가가 성화의 증거를 부정하고 반박하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선발 신도회 안에 두지 말 것이다.

영원에 이르는 길에 대한 목회적 성찰들

웨슬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단순한 믿음으로 온전한 성화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성화 은총은 대체로 죽음에 이르러서야 받게 된다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찰스에게 온전한 성화의 시간은 일반적으로 죽음의 순간 곧 영혼이 몸을 떠나기 직전의 순간이라고 생각된다고 전했다.

웨슬리는 로마가톨릭의 연옥, 곧 죽은 다음에 정결하게 될 가능성을 거부했다. 그런가 하면 루터주의자들이 가르치는 것과 같은 죽음 자체가 정화시키는 통로라는 주장도 반박했다. 그는 온전한 성화가 영원의 이편, 곧 살아있는 동안에 일어나야 한다고 보았다.

완전하지 못한체 죽는다면?

1)부정적인 대답 1758년 포터 우리가 죽기 전에 마음을 정하게 하지 않는다면, 태어나지 않는 것이 차라리 좋았을 것입니다.”

2)긍정적인 대답 하디양 내말은 온전한 성화에 이르지 않고 죽으면 멸망하게 될 것이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이 거룩하지 않은 기질로부터 구원을 받기까지는 영광에 이를 만큼 성숙하지 않았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온전한 성화는 죽음 직전에나 일어날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은총의 최고 단계에 있는 온전한 성화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바로 온전한 성화를 은총의 최고의 단계로 이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중생한 영혼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육체적 본성에 대해, 완전한 사랑은 소멸과 무로 비쳐질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완전한 사랑은 소멸이며 무이다. 왜냐하며 하나님은 경쟁도 없이 마음을 다스리는 모든 것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머튼(Thomas Merton)의 말대로 표현한다면, 거짓 자아를 버리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완전한 영광을 돌릴 때에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빚이 빛나게 될 것이다.

오늘과 내일: 웨슬리의 구원의 순서 다시 생각하기

구원의 순서에 대한 논의들

몇몇 학자들은 구원의 순서라는 말보다는 단순히 구원의 길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랜디 매덕스웨슬리가 사용한 용어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구원이 기본적으로 점진적인 과정이라고 주장하지만, 첫째 매덕스의 점진적인 과정으로서의 인간의 구원은 모든 것을 점진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으로서 웨슬리 신학을 가톨릭적으로 읽어가는 것이다. 웨슬리는 은총의 첫 번째 사역을 탄생에 비유했고, 두 번째 사역을 죽음에 비유했다. 이를 통해 볼 때 과정과 순간성 모두를 인정하고 있으며, 이 둘의 균형을 지닌 심상을 제시하고 있다.

둘째, 매덕스에 따르면 웨슬리의 구원의 순서는 목회적인 구분이었는데 학문적 구분으로 이해하는 것은 웨슬리 신학을 스콜라주의적 입장으로 회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1)웨슬리 구원론은 스콜라주의에서 온 것이 아니라 목회적 상황에 규범적인 신학적 요인들(성서, 도덕법, 이성, 전통)을 적용한 결과이다. 2)더욱이 구원의 순서를 배제하면 다양한 영적 상태의 질적 구분 최소화된다. 말하자면 구원의 순서는 은총이 실현되어 따라오는 존재의 변화의 특별한 형식을 보여준다. : 회개칭의중생성화완전 믿는 자들은 영적 여정에서 자신들이 도달한 영적 상태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된다. 사실 웨슬리는 존재의 양태를 자연의 상태, 율법의 상태, 복음의 상태로 구분하여 동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

### 존재의 양태의 구분 : 자연의 상태율법의 상태복음의 상태

구원의 순서가 구조 한 가운데서 다양한 은총의 실현을 인식하며 과정을 강조하게 할 수 있듯이, 구원의 길이란 용어는 계속되는 과정 한 가운데서 구조를 강조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구원의 순서와 마찬가지로 구원의 길이라는 용어는 성서적 구원의 길이란 설교에 나타나듯이 실제로 어떤 질서, 곧 어떤 분명한 구조를 내포하고 있다. 사실 누구나 이 설교를 통해 구원에는 질서와 구조가 있음을 읽어 낼 수 있다. 해석자의 선호에 따라 택하게 되는 각각의 용어를 통해서, 우리는

과정과 순간, 그리고 카톨릭 요소와 개신교 요소 둘 다 작용하는 웨슬리의 구원 여정의 접속적 성격을 인식하게 된다.

웨슬리 구원론에 나타난 질서

웨슬리의 구원의 순서는 구분할 수 없는 은총의 무정형적 과정으로 특징되기보다는, 은총이 실현되는 과정마다 독특한 위치를 갖는 순간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러므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죄인들이 은총에 힘입어 발전해 가는 여정을 살펴보게 된다. 또한 이 여정은 칭의 요소들과 성화 요소들로 이루어진 두 구분된 초점을 갖는다. 그러므로 율법적 회개의 회개은총, 중생, 최초의 확신은 칭의와 밀접하게 관계하며, 복음적 회개의 회개은총과 완전한 확신은 온전한 성화와 관계한다.

칭 의

온전한 성화

율법

율법

유사점고발

고발

차이점자범죄(actual sin)

타고난 죄(inbred sin)

회개

회개

유사점자기인식

자기인식

차이점율법적 회개

복음적 회개

회개에 합당한 사역(은총의 수단)

회개에 합당한 사역(은총의 수단)

유사점조건적으로 필수적임

조건적으로 필수적임

차이점→(엄격히 말해) 선한 것이 아님

(최초 성화 은총) 선한 것임

믿음

믿음

유사점무조건적으로 필수적임

무조건적으로 필수적임

차이점→“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확실한 신뢰

그리스도가 남아있는 죄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는 확실한 신뢰

시간적 차원들

시간적 차원들

유사점점진적/순간적

점진적/순간적

차이점탄생의 이미지

죽음의 이미지

성령의 증거

성령의 증거

유사점직접증거

직접증거

차이점용서받은 죄들(sins forgiven)

없어진(치워진) 죄들(taken away)

웨슬리의 구원의 순서는 여러 설교뿐 아니라 편지나 신학적 논문과 일지에 나타난다. 여러 해를 두고 작성되고 수정된 기본 구조는 웨슬리와 메소디스트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자기성찰로 인도한다. 또한 이 기본 구조는 저들이 공동체 안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로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며 자라 왔듯이 앞으로 도래할 놀랍고도 초자연적인 은총을 제시한다.

###<완전한 사랑안에서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날마다 은혜 안에서 성장!>>

제9장 종말과 영화 : 거룩한 사랑의 승리 유장환교수

우리로 순결하고 흠이 없게 하사

주님의 새 창조를 완성하게 하소서.

주님 안에 완전히 회복함으로

주님의 위대한 구원을 보게 하소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를 받아

하늘나라에 이르게 하시고

주님 앞에 면류관 내려놓고

경외와 사랑과 찬양을 드리게 하소서.

Franz Hildebrandt and Oliver A. Beckerlegge, The Works of John Wesley.

A Collection of Hymns for Use of the People Called Methodists(Nashville: Abingdon Press, 1983), Hymn #374, 7:547.

###<보편적인 구원> 통전적 구원// <지옥에 관하여>, <대심판>

시145:9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면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웨슬리는 인간의 유일한 목적은 유동적인 시간에 관심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을 준비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것은 거룩한 사랑의 가르침과 기독교인 완전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순결함과 존재의 변화, 하나님의 형상의 빛나는 완전한 회복과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는 완전한 사랑, 이 모든 것은 혈육으로는 불가능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는 준비다.

그러나 이생과 내세는 연속성이 있다. 따라서 웨슬리는 영원한 세계가 죽음으로 시작할 뿐 아니라 신생에서 우리 심령에 자신의 아들을 계시하는 아버지를 기쁘게 할 때 시작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두 초점을 지닌 전체 웨슬리의 구원의 순서는 얼굴과 얼굴로 하나님을 볼수 있도록 하는 성령의 충만하고 구별된 준비의 여정이다. 지고의 영광이 빛나는 가운데 그렇게 준비된 믿는 자들은 완전한 구원을 얻어 누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아우틀러는 웨슬리 사상에서 구원론과 종말론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푼 은총의 신비의 양면과 같다고 해석했다. 구원의 순서는 온전한 성화에서 혹은 죄인들의 때가 찾을 때 갑자기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 받은 이들을 영원으로 안내하는 다리요 길이다.

부흥운동과 천년왕국설

웨슬리는 18세기 대각성 복음주의 부흥운동과 도래하는 천년왕국 통치의 관계를 통해 구원론과 종말론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복음주의 부흥이란 더 큰 역사의 시작이고 종말의 영광의 여명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웨슬리는 이름뿐인 기독교인들의 삶이 성서적 기독교가 확산되지 못하게 하는 거대한 걸림돌이라 보고, 생동감 있는 기독교의 전파가 성령의 능력으로 온 땅의 모든 백성들에게 미치게 될 것이라 보았으며, 전 천년 동안 교회가 번창하리라는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고, 후 천년 동안 하늘에서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통치를 하고 땅에서는 인간들이 근심도 없는 태평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것이라 보았다.(후천년설)

웨슬리는 대각성 복음주의 부흥운동과 전 천년의 통치를 연결시킴으로써, 전 천년의 통치는 재림 전에 일어날 것이라 주장했다. 천년왕국의 통치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도시에서 도시로, 국가에서 국가로 증가해 가면서 신인 협력은총을 보여주면서도 //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의 도래는 성도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 나타난다고 말함으로써 웨슬리의 종말론조차도 접속적 은총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종말과 하나님의 통치

지금까지 살았던 몇몇 선발된 성도만이 이 땅에서 천년왕국 통치에 참여할 것이지만, 성도와 죄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죽음과 관련한 종말론적 사건들, 중간 상태와 도래하는 심판, 새 창조와 거룩한 사랑의 최후 승리 이전에 일어나게 될 사건들을 경험한 것이다.

죽음

웨슬리는 죽음을 우리의 시간적 현존을 사라지게 할 뿐 아니라 그 존재 방식에 심각한 도전을 주는 실제적인 끝, 유한한 한계로 이해했다. 죽음은 문자 그대로 시간을 다 써버린 것으로, 정결을 향한 변화의 과정이 이제 끝났음을 의미한다. 웨슬리는 본래 죽음이란 영혼과 몸의 분리를 수반하며 죽음을 통해 영혼은 죽지 않으며 죽을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의 몸은 죽음과 더불어 좀이 먹어 무너져 내린다. 그러나 영혼은 결코 죽지 않는다,” 1788년 출판된 설교 인간이란 무엇인가? 에서는 이렇게 주장한다.

나? 그래 나는 무엇입니까? 의심할 바 없이 나는 내 몸과는 구별된 무엇입니다. 내 몸은 필수적으로 내 안에 포함될 필요는 없다고 보입니다. 왜냐하면 내 몸이 죽을 때에도 나는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실제로 존재할 것입니다. 나는 모든 열정과 사랑을 가지고 스스로 움직이며 생각하는 원리가 몸이 재로 변한다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웨슬리는 보고 걷는 것과 믿음으로 걷는 것설교에서도 실로 몸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고상한 본성의 존재인 영혼은 죽음으로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중간상태

죽음과 함께 불멸의 영혼은 황천(Hades)(낙원)에 들어간다. 황천은 분리된 영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지옥과는 구분되는 존재의 자리 혹은 존재의 상태이다. 황천이 지옥과 구분되어야 하는 이유는 의로운 자들과 불의한 자들 모두가 개체 영들로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황천은 일반적인 용어로 단순히 개체 영들의 거처를 뜻한다. 반면 지옥은 저주받은 이들만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은 지옥과 하늘나라에 이르는 대기실이다. 지옥과 관련해서 웨슬리는 악한 인간의 영들을 위해 가능한 역할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믿음에서 떠난 자들이 죽게 되면 곧 악마와 악귀에 의해 고통의 장소로 안내된다고 주장한다. 지옥의 대기실에서 고문을 받은 이들은 그 고문으로 정결하게 될 수 없고 오히려 교만과 탐심, 색욕과 미움, 신성 모독이라는 지옥의 개들로 오염이 된다. 그러므로 연옥의 개념은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탁월함과 충분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잘못된 가르침이다.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통 외에 어떤 고통도 죄를 근절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불 외에 다른 불은 이생과 내세에 영혼을 정결하게 할 수 없다.

믿음에서 떠난 자들의 영혼이 바로 지옥 밑바닥으로 떨어지지 않듯이, 의로운 자들의 영혼도 바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들도 역시 죽은 자들이 거하는 황천에 들어가는데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첫째, 이들은 악한 자들과 분리되어 있어서 더 이상 악한 자들이 의로운 영혼을 해롭게 할 수 없다. 둘째, 이들에게는 아픔과 고통이 없다. 웨슬리는 하늘나라의 대기실인 황천을 낙원이라 불렀다. 바로 예수의 십자가 오른쪽에 달렸던 회개한 강도가 이르렀던 곳이다. 비록 웨슬리는 지옥의 대기실에 해당하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타르투르스”(Tarturus)라는 전통적인 용어를 사용했다.(매덕스)

<중간상태 구분>

구원받은 자들----->Hades(황천)---하늘나라의 대기실 ==>하늘나라 (영광 가운데 있는 성도들)

믿음에서 떠난 자들--->Hades(타르투르스)--지옥의 대기실==>지옥(고통 가운데 저주 받은 자들)

온전히 거룩하게 된 자들은 낙원에 있는 동안 은총과 지식이 날로 자랄 것이다. 웨슬리는 아주 목가적인 그림을 상상한다. 그 때에 성도들은 세상이 시작되던 때부터 모든 세대와 열방에 살았던 지혜롭고 거룩한 모든 영혼들과 대화할 것이며, 아름답게 빛나는 천사들과 대화할 것이고, 심지어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대화할 것이다. 이처럼 지식과 지혜가 자라가면서 행복과 거룩함이 자라나고 성도들은 하늘나라를 향해 지속적으로 성숙해 갈 것이다.

부활과 심판

웨슬리는 카톡릭의 두심판교리가 성서에 충분히 나와 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웨슬리는 영혼이 몸을 떠나 하나님 앞에 발가벗겨진 채 서는 순간 그 상태로 영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황천으로 빠져나온 순간 영원으로 이어지지만 그 자체가 아직 심판은 아니며, 도래하게 될 놀랍고도 불변하는 심판(주님의 날”)이 있음을 암시한다. 인간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기 전 이 땅에서 미리 그 징조가 나타난다. 그 때가 되면 천사장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고 이 때가 바로 부활의 시간으로 죽은 자들이 일어설 것이다. 웨슬리는 이 땅에서 완성했건 미완성했자신들이 행한 일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다.고 말하였다. 또한 인간의 영혼에 담겨 둔 모든 내면의 활동, 즉 모든 식욕과 정욕, 의도와 감성이 공개되어 누가 의로운 사람이며 누가 불의한 사람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하였다. 웨슬리는 도덕법과 예수 그리스도를 특징짓는 여러 속성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도래하는 심판에서 도덕법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최종적 칭의

이제 웨슬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의 개념과 행위에 따른 심판의 개념을 화해시켰는지 살펴보자. 웨슬리는 1790년에 출판된 결혼예복에 대하여라는 설교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가 처음 칭의이고 행위에 따른 심판이 최종적 칭의를 뜻한다면, 이 두 개념이 모순될 필요가 없다고 설명한다. 전자는 믿음이 신생에 들어가기 위해 절대적으로 유일한 조건인 현재적 구원을 의미하고, 후자는 어떤 의미에서 행위의 기회가 충분하기 때문에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을 보여 주어야하는 행위가 요청되는 최종적 구원을 의미한다. 웨슬리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를 하늘나라 시민이라 부르는 데 필요하지만, 개인의 거룩함은 하늘나라 시민이 되는 자격 요건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없다면 우리는 영광에 이르렀다고 할 수 없을 것이고, 거룩함이 없다면 영광에 적합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예복에 대하여>

웨슬리는 1745년 처치에게 편지를 보내 2차 칭의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내적이고 외적인 거룩함 모두가 최종 칭의의 공인된 조건임을 주장했다. 또한 1770년 들어서도 2차 칭의에 대한 강도를 높였는데 아마도 2차 칭의가 그가 좋아했던 거룩함의 주제와 연결됐기 때문이다.

공로에 대한 물음

웨슬리는 공로라는 용어를 로마가톨릭과는 다른 차원으로 사용했다. 그는 엄격한’(본질적인)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고 느슨한의미로 사용하기도 했다. 엄격한 의미로는 1771년 동생 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다. 나는 의롭다 함을 받기 까지 아무도 선함이 없다고 선언했다. 의롭다 함을 받기 전이나 후에나 인간에게는 아무런 공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1773년 웨슬리가 쓴 글에서 엄격하게 말해서 그리스도의 보혈 밖에는 다른 곳에서 공로를 찾을 수 없다. 구원은 행위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생 찰스에게 보내는 다른 편지에서는 공로는 표현을 느슨한 의미 사용하는데, 이 경우에 우리의 행위란 보상을 받을 만한보다는 좀 더 깊은 의미다. 보상을 받을 만하다는 말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이미 역사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순전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행위가 열매를 맺게 되고 그 열매로 사랑과 보상을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느슨한 의미에서 보더라도 웨슬리의 공로 사상은 결코 인간의 자율적인 성취를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의 이중적 활동을 강조한다. 첫째는 은총을 주심고, 둘째는 은총의 열매에 대해 상을 주심이다. 그러므로 성화가 (처음) 칭의의 기초는 아니라고 해도 최종적 칭의 기초가 된다. 그 이유는 행위가 하나님의 선함을 주장하는 독립적인 기초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행위가 살아 있고 은총이 넘치는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우리 교회가 믿음으로만 칭의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개신교 강조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 칭의에 앞서 보편적 거룩함을 가르친다.”(가톨릭 강조점) 결국 웨슬리에게 처음 칭의와 최종적 칭의의 공로의 근거는 그 행위가 아무리 고상하고 다양하다 할지라도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구속이다.

새 창조(New Creation)

새로운 창조에 대한 웨슬리의 글은 상당 부분 하나님께서 이 땅을 심판한 직후 나타나게 될 승리의 교회에 관심을 가진다. 심판이 있은 다음 하늘이 지나갈 것이고 땅과 땅에서 지은 모든 죄 된 행위는 계시록에 약속한 대로 새 창조를 준비하기 위해 태워질 것이다. 새 창조와 관련해서 웨슬리는 옛 세계의 파괴보다는 새 세계의 창조에 더 많이 관심한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새 창조란 설교에서 어떻게 별이 빛나는 하늘과 보다 낮은 층의 하늘이 새롭게 창조될 것인지 보여준다. 더구나 자연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모두가 좋은 모양으로 변화될 것이다. 예컨대, 생명을 불어 넣는 힘은 남겨둔 채 파괴하는 힘이 상실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변화는 무생물과 관계된 내용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들과 관계된 내용이다. 하나님은 저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줄 거입니다. 죽음이나 슬픔이나 애곡이 없을 것이며 어떤 아픔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전 것이 지나 갔기 때문입니다...오히려 이 모든 것보다 뛰어난 구원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죄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특별한 시간에 온유한 사람들은 이 땅의 기초를 놓기 전 이들을 위해 예비 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이들은 최고로 투명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맞게 살아가며 두루두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새 창조의 교리는 의로운 사람들이 거하게 될 새롭게 구성된 물리적 세계로서 신정론의 문제를 대처한다. 말하자면 자연 악은 궁극적으로 슬픔과 아픔과 죽음이 그렇듯이 과거 일이 될 것이다. 새 창조에서는 아담과 낙원에서 즐겼던 거룩함과 행복보다 훨씬 더 순수한 상태가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축복과 영광의 상태는 여러 차원에서 현저한데,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사랑에 기초한다. 무엇보다도 그날에는 깊고 친밀하며 거리낌이 없는 하나님과의 연합이 있을 것이고, 성령을 통한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항구적인 연합이 있을 것이며, 삼위가 하나이신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향유를 누리며 하나님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향유를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새 창조는 전체 창조된 질서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인간과 동물계 안에 선과 보상을 준다. 동물들도 타락의 멍에로부터, 불규칙한 식탐과 열망으로분터 영화로운 자유로 구원을 받을 이다. 보편적인 구원 설교에서 하나님께서 인간가 짐승을 동일하게 관심한다는 것을 부인했지만일 짐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들의 존재의 주인을 인식하고 사랑하고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라면서 둘 사이를 관계시키고 있다. 예컨대, 웨슬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를 거부하는 악한 사람들은 동물보다도 못한 단계로 가라앉게 될 것을 주장다. 왜냐하면 동물의 세계는 그 자체가 그렇게 낮은 단계가 아니며 오히려 죄 된 인간이 거부해온 것을 향유하도록 초대될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동물의 세계도 영원히 하나님을 인식하고 사랑하며 향유하도록 초대될 것이기 때문이다. (Cf. 자녀들의 교육 설교-동물을 존중하고 친절하게 대하라) 해가 되지 않는 뱀이나 지렁이나 두꺼비를 해쳐서는 안됩니다. 어떤 동물이든지 그들이 향유할 수 있는 삶을 연장해서 살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동물권과 인간권의 변화뿐만 아니라 새롭게 구성된 창조질서를 지배하는 새 창조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 지고로 넘쳐난다. 하나님의 지식과 완전히 거룩한 사랑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새 예루살렘을 감싸며 우리는 신부로 받아들여진다. 웨슬리는 이렇게 주석한다. 이 도시는 이 세상이나 천년왕국이 아니라 영원에 속한, 전혀 새로운 도시이다.이 도시는 새 땅이 생기기 전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통치를 통해 이전 인간의 죄가 가져온 분열을 넘어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오늘과 내일 : 제자도와 섬김의 자료가 되는 존 웨슬리의 실천신학

웨슬리는 자신의 생애뿐 아니라 그가 섬겼던 신앙 공동체 안에서 거룩한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실현코자 했다. 구원이라는 좋은 소식을 나누는, 이 거대한 목적을 가진 웨슬리는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학에 대한 추상적이며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설명을 피하고 대신 실천신학에 주목했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신학적 관심은 종교의 형식을 피하고 그 능력을 맛보고자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을 세우는 일을 희망했고 그 일에 몰두했다. 당시를 풍미했던 민속신앙에 만족하지 않았던 웨슬리는 내가 어떻게 기독교이 되는가?라는 무름과, 아르미니우주의자로서 또한 내가 어떻게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는가?라는 종교개혁 전통의 물음을 던졌다. 이물음들은 은총과 거룩한 사랑을 배경으로 그의 전체적인 신학이 진지하기 하지만 아주 실천적인 맛을 갖게 했다. 단순히 말해, 웨슬리의 실천신학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을 받고 성령으로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간직하도록 하는 거룩한 사랑의 역사임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그의 실천신학과 구체적으로는 그의 구원의 순서에 반영된 웨슬리의 구원론적 의도는, 거룩한 사랑의 은총이 모든 사람들에게, 특별히 가난하고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감리회의 생명의 목회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이 더 이상 소외되지 않고 받아들여지며, 강탈당하지 않고 능력을 덧입고 잊히지 않고 소중하게 여겨졌다.

웨슬리의 실천신학은 어느 특정 신학 전통에 대해 올곧은 성찰이라기보다는 성서라는 규범적 가치와 다양한 전통의 참여적 상황에 기초하여 여러 목회적 과제와 씨름하면서 교회일치적 방향을 갖고 잘 구성된 적절한 종합(synthesis)의 신학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웨슬리의 실천신학은 개인적이건 사회적이건 구원 중심의 신학을 펼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이웃의 사랑이 주는 자유를 추구하지만 개인 차원에서는 자기-의지의 노예가 되고, 공동체 차원에서는 무자비한 종족주의의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 죄의 침울한 지배에 사람을 던져 버리는 허울 좋은 세상의 자유가 아니라 은총이 넘치는 진정한 자유를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이처럼 상처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 복음의 신학이었다. 주님의 은혜의 해의 선표였고, 포로 된 자들에게는 자유의 선포였다. 목회적으로 복음의 부름에 민감했던 웨슬리는 역사적인 감리회의 상징인 영속하는 거룩한 사랑을 증거하는 지혜로운 균형의 목회를 발전시켰다.

값없이 주시는 은총 ------ 신-인 협력적인 은총

순간(개신교전통) 과정(가톡릭 전통)

접속의 신학

balance의 신학

믿음 사랑

정숙주의 <------------> 공로주의

열광주의 형식주의

무율법주의 율법주의

존 웨슬리 :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걸어가는 것

(내적 성령의 증거) + (외적 성령의 열매)

마음의 성화 + 삶의 성화 = 존재의 성화

내적 외적 죄로부터의 해방 = 하나님사랑, 이웃사랑 =거룩한 사랑의 존재

균형의 신학자 : 회개하고 믿고 사랑하자

(롬12:2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를 하늘나라 시민이라 부르는 데 필요하지만, 개인의 거룩함은 하늘나라 시민이 되는 자격 요건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없다면 우리는 영광의 니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고, 거룩함이 없다면 우리는 영광의 나라에 적합하지 않있을 것이다.” <결혼예복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