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 문헌 연구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문화의 종교적
4152067 정수용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란 뜻은 종교의 이름으로
문화를 가볍게 취급하는 사람을 말한다
.
지혜문학에 관한 새로운 관심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 왜냐하면 우리는 지혜문학을 통해 이제껏
등한히 했고 또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이스라엘의 신앙과 사상과 생활 양태를 새롭게
이해하도록 새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최근까지 성서학자들이 지혜문학에 별로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
많은 학자들은 지혜문학이 원래 구약성서 경전에
속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었다
.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연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
실은 이 같은 생각이 일반적인 기독교 집단 특히
개신교의 전통을 잘 반영시키는 것이었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지혜신학의 중심사상은 교회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와
정면으로 대결되는 것들이다
.
이스라엘의 지혜로운 자는 대표적으로 삶의 긍지를 갖고
,
인생을 즐기며
, 사랑하고, 거기에 높은 가치를 두는
것이다
. 지혜로운 자는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며, 학문의
질에 근면하며
, 문화적인 업적에 자부심을 갖는 자이다.
그러나 그 반면에 개신교는 일반적으로 문화를
두려워하고 기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우리시대의 대표적 개신교의 전통과 우리가 새로 발견한
이스라엘 신앙의 국면 사이에서 여러 가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
첫째로
, 지혜문학은 인간 존재의 목적과 의미가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다
.
잠언서의 문장과 교훈은 어떻게 하면 생을 최대한 향유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한 안내 역할을 해 준다
.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
짧아지느니라”(
잠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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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이외의 고대자료인 이집트의 “아멘 엠 오펫의
가르침”속에서도 우리는 잠언서 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똑같은 생에 대한 동경과 생이 주는 만족에
대한 사상을 찾아볼 수 있다
.
“귀를 기울여 들어보라. 마음을 기울여 이해해 보라.
시간을 들여 찾으면 성공을 발견 할 것이다
. 내 말은
생의 보화가 될 것이며
, 네 몸은 땅 위에서
형통하리라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지혜문학에서 말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우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인 것이다
. 그것은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장수나 또는 목숨의 연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오히려 생의 모든 면
, 즉 감정적인 면, 신체적,
정신적
, 사회적인 모든 면을 말하며 생의 기쁨과 안전과
전체성을 부여함을 말한다
.
그리고 이스라엘과 고대 세계에서는 생에 대한 희망이
언제나 이웃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
, 결국 한 인간은 그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생이 주는 만족을 최대한도로
향유하도록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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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이 자신의 무죄를 변호하는 주장(
욥31:1-34)도 모두
그가 공동체의 안전과 평강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 그러므로 지혜문학이 인간존재의
목적과 의미라고 보는 “삶”은 곧 공동체와 그 구성원의 평강
즉 "샬롬”
(shalom)을 말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온 공동체의 “평화”라는 것도 바로 지금 이
자리에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다
. 하늘 나라에 가서 받을
보상이라는 것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 삶이라는 것은
현명한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현명한 행동의 결과일
뿐이다
.
“ 의인은 포식하여도 악인의 배는 주리느니라(
잠13:25)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그러므로 지혜문학이 강조하는 점은 책임 있는
생동감이며
, 이것은 한 인간이나 한 공동체가 “풍성
함”(
요10:10)을 얻을 수 있는 체험인 것이다.
이 같은 견해는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들 에게는 잘
용납이 되지 않고 있다
.
그들은 인간 존재의 목적과 의미가 역사적인
과정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 생의 종국에
가서야 무엇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
지혜문학은 생의 가치를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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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로
, 지혜문학은 생의 권위를 우리의 일상생활 체험
속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
잠11:25)
“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
”(
잠11:16)
->지혜는 어떤 것들이 삶을 창조하며 어떤 것들이 삶을
부정하는 가를 차근차근히 분별하는 것이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이 같은 견해가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들 에게는
일반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경향이 있다
-> 따라서 그들은 분별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에 인간의 관찰력 대신에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신다는 “ 신의 주권” 을 더
강조하게 된 것이다
.
그리고 미덕도 어떤 권위에 관련되었을 때에만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사람들이 그것들을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것을 미덕이라고 선언하여 몇몇 권위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였다고 믿는 것이다
.
계시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규칙이 필요한데 그 같은
규칙이나 어떤 권위에 호소를 해야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다면
, 그것은 어떤 인물이나 직책 또는 기관이 어떤
것이 옳고 그른가를 올바로 이해하는 독점권을 갖게 되고
,
나머지 사람들은 지시해 주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
이 같은 도덕적인 독점은 기존 권위 체제에 지도를
받아야 하는 교회의 모든 부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그와는 반대로 지혜전승의 스승들은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아무도 지혜를 독점하도록 하지 않는다
(욥 의 항의를 참고하라
)
하나님의 뜻이 결국 신비적인 것은 아니고 자신의
뜻을 특별한 경우에 특정 인물에게만 계시하는
것은 아니다
. (
신30:11-14)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지혜는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인간의 책임을
회피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 그렇다고 어떤 특정
인물이 권위가 있다고 해서 그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것도
아니다
.
그런데 교회에서는 지나치게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 그리고 맹목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시해
주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경건인 양 가르쳐 왔다
.
때로는 이 같은 방법이 우리의 결단과 책임감을 피하는
묘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지기도 하였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세 번째로 지혜문학은
,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최종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
“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잠24:16)
지혜문학이 가르치는 분명한 교훈은 인간의 선택이 결국은
그의 운명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
이 같은 교훈이 때로는 욥기에서처럼 냉혹하고도 비인간적인
인과보응 사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지혜문학은 인간이 현명한 선택을 하고
, 또 책임 있는 결단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지혜는 인간이 자기 능력을 살려 책임감 있게 행동하도록
한다
.
지혜는 또 인간이 모든 경우에 선택을 내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
그가 인간이라는 것은 모든 경우에 그가 처하는 상태에서
인간답게 책임성 있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
결코 책임회피란 있을 수 없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이 같은 견해 역시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에게는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이다
.
우리의 신학은 바울-어거스틴-루터 계열에서
우러나온 신학은 근본적으로 타락한 인간 즉 그의
모든 능력과 역량이 쇠퇴되어 인간다운 행동을 취할
수 없는 상태를 강조해 왔던 것이다
.
이 같은 신학은 인간이 선택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지혜문학이 전통적 신학에 도전하는 문제는 인간이
자기 공동체의 운명을 결단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
재래의 전통적 신학에서는
, 그리고 특히 여러 가지
기도문에 잘 나타나 있는 대로 우리는 이 같은 결단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어 왔던 것이다
.
이스라엘의 지혜 전승의 스승들이 기도의 힘을 믿은
것은 사실이지만
, 그들은 결코 기도라는 명목으로
인간의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리지는 않았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평화
, 사회정의, 복지-이 모든 과업은 다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다
. 우리가 수행해야 할 과업을
하나님에게 넘김으로써 우리의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
. 이 같은 문제의 해결은 용기와 통찰력을
요구하는 인간의 선택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을 대신 해 주시지는 않는다
.
인간의 미래는 인간의 책임성을 다 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폰 라트와 침멀리
(zimmerli)가 제시한 바와 같이 지혜
문학은 인간의 통찰력과 인간의 능력에 제한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한다
.
지혜문학이 보여주는 인간성은 큰 일을 성취해 내기를
기대하는 위대한 존재이다
.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교회의 생각으로는 인간성이란 일 할
수 있는 기회 대신에 하나의 핑계로 사용되는 것이다
.
즉, “나는 보 잘 것 없는 인간이니까” 라는 핑계를 대는
것이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이 같은 태도는 지혜문학에서는 죽음의 길로
이끄는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
그것은 결국 책임을 회피하며 다른 이(아마도
하나님
) 가 우리 대신 우리의 삶을 살아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교회가 설교와 교육 그리고 개인 접촉을 통해 신도들을
어떻게 가르쳐 왔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
, 문제는
심각하다
.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람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해 왔다
.
인간은 스스로 결단을 내리기를 원치도 않으며 또 그럴
능력도 없기 때문에 그를 위해 대신 결단을 내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
지혜문학의 가르침은 우리가 인간의 신비와 영화를
파괴시키는 것에 대해 항의하도록 가르친다
.
인간은 하나님의 신뢰를 받은 존재인 만큼 우리의 인간관
역시 그 같은 신뢰를 반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네번째로 지혜문학은 인간의 역할이 질서 있는
우주 세계 속에서 질서 있는 역할을 맡은 것이라고
본다
.
삶이라는 것은 원래 안정되고 질서 있도록
하나님이 주선했다는 것이다
.
신이 주선한 질서를 유지한다는 것은 우리가
택하는 선택의 질에 달려 있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이 같은 견해 역시 교회의 중심적 견해를 구성하는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에게는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이다
.
“ 하나님의 엄청난 활동” 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엮어진 신학은 성서를 하나님이 결정적으로 역사적
과정 속에 “침입”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
그러기에 이들에게는 출애굽 사건이라는 것이
애굽의 생활형태에 변혁을 가져온 것이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신학적으로 우리는 역사적 “단절”을 높이 평가하고
,
문화 속에서의 지속성에 대해서는 외면해 왔던
것이다
.
따라서 신의 침입과 역사적인 단절만으로는 우리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질서와
공동체를 구성해 왔던 것이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우리가 높이 평가하고
, 또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질서와 안전은 그것이
경제적이거나 사회적
, 민족적 또는 정치적인
성격을 띤 것이라도 어디까지나 “ 게토
들”(ghettos)이라고 부리기에 적합한 ‘ 부분적인
공동체’ 에 불과한 것이다
.
겉으로는 질서가 있는 것 같고 안전한 것같이
보이지만
, 성격상 부분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안전하고 무질서한 것이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지혜문학은 인간의 삶이 단순한 단절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 정당한 질서 속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또 부분적인 공동체라는 것이 생명의
추구를 위해서는 건전한 공동체가 되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다섯째로 지혜문학은 인간이 피조물의 왕임을 경축하는
것이다
.
지혜문학은 인간이 우주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고 믿는다
. 이 세상은 살기 좋은 곳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건전한 환경이라고 보는 것이다
.
지혜문학은 따라서 인간이 그의 사회적 및 자연적인
환경에 대해 책임을 지고 또 그것이 주는 기회를 포착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이 같은 견해 역시 교회의 중심적 견해를 구성하는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에게는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다
.
기독교 신앙의 가장 대표적인 표명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 때문에 사망하셨다”라는 것이다
.
예수그리스도는 올무에 걸린 인간을 구원해 줌으로써
인간의 가장 필요한 요구를 충족시켜 주게 되는
것이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이 같은 단순한 강조점이 결국은 성서를 구원사적인
입장에서 보게 되어 인간이 얽매인 올무 와 또 하나님이
그를 풀어주는 강력한 행동에 강조점을 두게 되었던
것이다
.
따라서 성서는 구원이라는 주제 하에서 해석하게
되었고
,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 그리고 거기에 상반되는
인간의 절망과 무능력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
-> 그 결과는 인간의 능력과 지식으로 결단을
내리기에는 너무나 부적당한 열등한 인간상을 갖게 된
것이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그러므로 창조라는 주제 역시 자연히 등한시하게
되었는데
, 그 이유는 그 주제가 재래적으로 해석된
예수의 중심성과 그의 결정적인 역할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
지혜문학은 복음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 예수 그리스도가 죄에서 인간을 구원해
주는 구세주일 뿐 아니라 그는 창세기에 나타난 대로
아담의 부르심을 완성시킨 이로 볼 수 있다
.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가
우리의 섬기는 참 하나님일 뿐 아니라 그의 인간성을
우리와 함께 나눌 수 있는 참 인간인 것이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그의 참 인간성이란 우리의 것과 마찬가지로 건전한
인간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그의 사회적 및 자연적인
환경을 잘 배열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를 이같이 이해하는 것은 지혜전승의 창조
신앙과도 일치하는 것이며
, 결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그의 결정적인 역할을 감소시키는 것도 아니다
.
오히려 그 같은 해석은 인간 공동체의 문화적인 업적을
치하하며 보충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이제 결론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의 지혜문학의
가르침을 정리해 보면
, 몇 가지 새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1)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신뢰를 얻고 가치가 있는
피조물인 만큼 우리 역시 인간을 그렇게 보아야 할 것이다
.
(2)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 내에서의 지배적인 견해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
->브루지만은 단지 이 같은 통속적인 견해가 인간
공동체보다는 신앙 공동체에 특별한 부담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한 것 뿐이다. 즉 그 결과는 전체주의와도 같은
것이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가 갖는 문제는 우리가 그 동안
종교의 명목으로 문화를 경멸하는 일에만 전념했다는
것이다
.
우리는 심리적
, 문화적, 정치적 그리고 신학적인 이유에서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고 인간을 존중하지 못했던 것이다
.
-> 그 결과로 우리는 결국 신뢰할 수 없는 인간성을 창조해
내게 된 것이다
. 그리고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권위
의식에서 필요로 하는 성숙하지 못한 공동체를 창조해 낸
것이다
.
문화의 종교적 경시자
But 지혜전승의 스승에게서 찾아볼 수 있고 또
나사렛 예수에게서 구체화된 복음은 인간이
신뢰받고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인간을 신뢰한다는 것은 매우 모험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도 그러한
모험이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