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P문서치유.hwp

닫기

5 치유에 관하여

4102001

곽종선 1/4

최근에 나는 독일에서 본것은 민족 전체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 병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정신을 어지럽히는 혼돈과 자기모순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외적으로 그 나라는 온 인류를 정치적으로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갈라놓은 동과 서의 구분에 의해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 나라는 내적으로도 분열되어 오래된 적대감이 계속 자라나고 있으며, 아무런 평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병든 나라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나라 안에서 건강한 사람들도 발견했습니다. 그들이 건강한 것은 그들의 얼굴에 질병이 나타나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 안에 다른 그 무엇, 즉 혼란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온전하게 만들고, 슬픔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평온하게 만들고 그들이 우리 모두를 위한 모범이 되도록 만들어 주는 건강한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국의 군대에서 거부된 청년들 중 40퍼센트에 이르는 이들이 정신적 문제와 부적응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보도를 읽습니다. 또 우리는 이 나라에는 모든 질병들 중에서도 정신병이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보도를 접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우리의 건강의 심각한 위험을 보여주는 징조입니다. 예컨대, 그것은 이 건강한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제한적이고 가차없는 경쟁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형태의 육체적 질병과 맞서 싸워 이겼으나 이 나라의 많은 이들은 그런 건강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들은 고되고 불안한 삶으로부터 도피하여 정신적 질병을 택합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병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대개 무의식적으로 그러나 때로는 의식하면서까지 병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 시대에서처럼 예수님의 시대에도 질병과 치유에 대한 많은 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들을 미친사람혹은 귀신들린자라고 불렀고 그런 악한 영들을 추방하려고 했습니다. 병든시대에 대한 이런 인식으로부터 새 시대, 즉 건강하고 온전한 현실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구원과 구주를 기대했습니다.

구원은 치유입니다. 그리고 구주는 치유자입니다. 만약 내가 귀머거리와 맹인을 치유할수 있다면, 만약 내가 정신적으로 병든자를 해방시킬수 있다면 그때는 새로운 현실이 너희에게 임한것이다”(마 11:5, 눅7:22) 복음서에는 여러 가지 치유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그것들은 학자와 설교자와 교사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재의 치유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의 기적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현재의 치유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 이야기들은 현재의 치유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 이야기들은 인간의 상황, 즉 육체적 질방과 정신적 질병, 질병과 죄책, 그리고 치유를 얻고자 하는 바람과 치유를 얻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사이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또한 치유를 가능하게 만드는 태도에 대해 묘사합니다. 그것을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신앙은 우리가 자기보다 큰 힘, 즉 우리를 흔들고 전복시키고 변화시키고 치유하는 힘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힘에 순복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치유하실수 있었고 치유 하실수 있는 이들은 그 분안에 있는 치유하는 힘에 순복했던 그리고 순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를 포기합니다. 자신을 미워하고, 그로 인해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해 적대적이고, 삶을 두려워하고 죄책감에 짓눌리고 자기를 비난하며 변명하고, 다른 사람들을 피해 외로움 속으로 도망치고, 자신을 피해 다른 이들에게로 도망치고, 최종적으로 실존의 위협으로부터 정신적, 육체적 질병이라는 고통스럽고 기만적인 안전함 속으로 도피하는 자기를 말입니다. 예수님께 치유를 얻는 이들은 그렇게 예수님께 순복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순복을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을 자신에게 붙들어 두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그들 자신에게 돌려보내십니다. 치유되고 온전해진 새로운 피조물로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죽으셨을때 온세상의 개인들과 나라들을 정복하기에 충분할 만큼 크다고 확신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 세상에 남겨 두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분안에서 나타났던 새로운 현실에 사로잡힌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속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치유 능력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의사는 신체의 한 부분을 쉽사리 잘라버리거나 다른 기능을 위해 한 기능을 쉽게 억제하는 사람이 아니라, 육체의 통일성 안에서 서로 상충하는 요소들이 화해할 수 있도록 전체를 강화하는 사람입니다.

의사는 우리를 도울 수 있고, 우리를 살아 있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온전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가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 있을까요? 확실히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인들, 현명한 행정가들, 지식인들, 선한 사람들, 그리고 혁명적인 대중들 모두에게는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역사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그들은 그렇게 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온전함이 필요하고 구원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낡은 현실 속에는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리고 모든 제도가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새로운 현실만이 낡은 현실속으로 뚫고 들어가 그것을 자신과 화해시키면서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역사속에서 늘 활동하고 있던 이 새로운 현실이 치유자이자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온전함과 능력안에서 나타났다는것 바로 그것이 결코 정복되지 않는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분만이 우리에게 사유와 행동을 위한 또 다른 율법을 제공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삶에 속한 그 어떤 것도 잘라버리거나 억압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화해의 현실이십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우리와 우리의 실존 전체가 용납되고 재결합되는 새로운 현실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새로운 현실은 그분의 사역이 온전하게 하는 것이고 그분의 이름이 사랑이신 분이 갖고 계신 화해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